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V INDEPENDENCE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4장 (연결점으로서의)독립(된 경계면)

जन्मौषधि-मन्त्र-तपः-समाधिजाः सिद्धयः ॥१॥
janmauṣadhimantratapaḥsamādhijāḥ siddhayaḥ
1. The Siddhis (powers) are attained by birth, chemical means, power of words, mortification, or concentration.
[4.1] 싯디(힘)는 탄생, (생)화학적 수단[2], 말(소리)의 힘, 고행 또는 집중을 통해 획득됩니다.

Sometimes a man is born with the Siddhis, powers, of course, those he had earned in his previous incarnation. This time he is born, as it were, to enjoy the fruits of them. It is said of Kapila, the great father of the Sankhya philosophy, that he was a born Siddha, which means literally a man who has attained to success.
때때로 사람은 싯디(siddhi)[3]의 힘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물론 그가 이전 화신(생애)에서 얻은 힘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그는 말하자면 그 열매를 즐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상키아 철학의 위대한 아버지인 카필라(Kapila)는 타고난 싯다(Siddha)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성공에 도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The Yogis claim that these powers can be gained by chemical means. All of you know that chemistry originally began as alchemy; men went in search of the philosopher's stone and elixirs of life, and so forth. In India there was a sect called the Rāsāyanas. Their idea was that ideality, knowledge, spirituality, and religion were all very right, but that the body was the only instrument by which to attain to all these. If the body came to an end every now and again, it would take so much more time to attain to the goal. For instance, a man wants to practise Yoga, or wants to become spiritual. Before he has advanced very far he dies. Then he takes another body and begins again, then dies, and so on. In this way much time will be lost in dying and being born again. If the body could be made strong and perfect, so that it would get rid of birth and death, we should have so much more time to become spiritual. So these Rasayanas say, first make the body very strong. They claim that this body can be made immortal. Their idea is that if the mind manufactures the body, and if it be true that each mind is only one outlet to the infinite energy, there should be no limit to each outlet getting any amount of power from outside. Why is it impossible to keep our bodies all the time? We have to manufacture all the bodies that we ever have. As soon as this body dies, we shall have to manufacture another. If we can do that, why cannot we do it just here and now, without getting out of the present body? The theory is perfectly correct. If it is possible that we live after death, and make other bodies, why is it impossible that we should have the power of making bodies here, without entirely dissolving this body, simply changing it continually? They also thought that in mercury and in sulphur was hidden the most wonderful power, and that by certain preparations of these a man could keep the body as long as he liked. Others believed that certain drugs could bring powers, such as flying through the air. Many of the most wonderful medicines of the present day we owe to the Rasayanas, notably the use of metals in medicine. Certain sects of Yogis claim that many of their principal teachers are still living in their old bodies. Patanjali, the great authority on Yoga, does not deny this.
요기들은 이러한 힘이 화학적 수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화학이 원래 연금술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의 돌과 생명의 비약 등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도에는 라사야나(Rāsāyanas)라는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상, 지식, 영성, 종교가 모두 매우 옳지만 몸은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가끔씩 끝이 난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요가를 수련하고 싶거나 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가 아주 멀리 발전하기 전에 (시간이 다되면)그는 죽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몸을 취하고 다시 시작하고 죽는 식으로 계속됩니다. 이런 식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낭비(소요)될 것입니다. 몸이 강해지고 완전해져서 탄생과 죽음이 제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라사야나들은 먼저 몸을 매우 강하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몸이 불멸의 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마음이 몸을 만든다면, 그리고 각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의 출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각 출구가 외부로부터 어떤 양의 힘이라도 얻는 데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몸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체를 제조해야 합니다. 이 몸이 죽자마자 우리는 다른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왜 지금 여기서, 이 몸을 벗어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까? 이론은 완벽하게 정확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며 다른 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몸을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꾸는 것 없이 여기서 몸을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그들은 또한 수은과 유황에 가장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으며, 이들의 특정한 준비를 통해 사람이 원하는 만큼 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중) 또다른 사람들은 특정 약물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의약품 중 상당수는 라사야나(Rasayanas)의 덕분입니다. 특히 의약품에 금속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기의 일부 종파에서는 많은 주요 스승(guru)들이 여전히 오래된 몸으로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가의 위대한 권위자인 파탄잘리는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The power of words. There are certain sacred words called Mantras, which have power, when repeated under proper conditions, to produce these extraordinary powers. We are living in the midst of such a mass of miracles, day and night, that we do not think anything of them. There is no limit to man's power, the power of words and the power of mind.
'말의 힘'. 만트라(Mantras)라는 특정 신성한 단어가 있는데, 적절한 조건에서 반복하면 이러한 놀라운 힘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기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 말의 힘, 정신의 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Mortification. You find that in every religion mortifications and asceticisms have been practised. In these religious conceptions the Hindus always go to the extremes. You will find men with their hands up all their lives, until their hands wither and die. Men keep standing, day and night, until their feet swell, and if they live, the legs become so stiff in this position that they can no more bend them, but have to stand all their lives. I once saw a man who had kept his hands raised in this way, and I asked him how it felt when he did it first. He said it was awful torture. It was such torture that he had to go to a river and put himself in water, and that allayed the pain for a little while. After a month he did not suffer much. Through such practices powers (Siddhis) can be attained.
고행. 당신은 모든 종교에서 고행과 금욕주의가 실천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개념에서 힌두교인들은 항상 극단적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손이 시들고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남자들은 발이 부을 때까지 밤낮으로 계속 서 있고, 살면서 이 자세로 다리가 너무 굳어 더 이상 구부릴 수 없고 평생 서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 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끔찍한 고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에 가서 물에 몸을 담가야 할 정도의 고문이었고, 그 고통은 잠시 가라앉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그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 힘(시디)을 얻을 수 있습니다.

Concentration. Concentration is Samādhi, and that is Yoga proper; that is the principal theme of this science, and it is the highest means. The preceding ones are only secondary, and we cannot attain to the highest through them. Samadhi is the means through which we can gain anything and everything, mental, moral, or spiritual.
집중. 집중은 사마띠(Samādhi)(의 또다른 말)이며, 그것이 바로 요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과학의 주요 주제이며 최고의 수단입니다. 앞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는 가장 높은 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마띠는 (사마띠만이) 우리가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


जात्यन्तरपरिणामः प्रकृत्यापूरात् ॥२॥
jātyantarapariṇāmaḥ prakṛtyāpūrāt
2. The change into another species is by the filling in of nature.
[4.2] 다른 종류(species)로의 변화는 자연의 충만에 의한 것입니다.

Patanjali has advanced the proposition that these powers come by birth, sometimes by chemical means, or through mortification. He also admits that this body can be kept for any length of time. Now he goes on to state what is the cause of the change of the body into another species. He says this is done by the filling in of nature, which he explains in the next aphorism.
파탄잘리는 이러한 힘이 탄생, 때로는 화학적 수단 또는 고행을 통해 온다는 제안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이 몸이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그는 신체가 다른 종(species)으로 변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계속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이 자연을 채우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그는 다음 구절(verse)([4.3]이후)에서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निमित्तमप्रयोजकं प्रकृतीनां वरणभेदस्तु ततः क्षेत्रिकवत् ॥३॥
nimittam aprayojakaṃ prakṛtīnāṃ varaṇabhedas tu tataḥ kṣetrikavat
3. Good and bad deeds are not the direct causes in the transformations of nature, but they act as breakers of obstacles to the evolutions of nature: as a farmer breaks the obstacles to the course of water, which then runs down by its own nature.
[4.3] 선행과 악행은 자연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자연의 진화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농부가 물의 흐름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고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The water for irrigation of fields is already in the canal, only shut in by gates. The farmer opens these gates, and the water flows in by itself, by the law of gravitation. So all progress and power are already in every man; perfection is man's nature, only it is barred in and prevented from taking its proper course. If anyone can take the bar off, in rushes nature. Then the man attains the powers which are his already. Those we call wicked become saints, as soon as the bar is broken and nature rushes in. It is nature that is driving us towards perfection, and eventually she will bring everyone there. All these practices and struggles to become religious are only negative work, to take off the bars, and open the doors to that perfection which is our birthright, our nature.
들판의 관개용 물은 이미 운하에 있고, 문으로만 막혀 있습니다. 농부는 이 문을 열고, 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와 능력은 이미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완벽함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단지 그것이 방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방해될 뿐입니다. 누구든지 (울타리 빗장)막대를 떼어낼 수 있다면, 자연 속에서 달려가세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악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장벽이 무너지고 자연이 돌진하자마자 성인이 됩니다. 우리를 완벽함으로 이끄는 것은 자연이며, 결국 그녀는 모든 사람을 완벽함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종교적이 되기 위한 이러한 모든 실천과 투쟁은 빗장을 풀고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자 본성인 완벽함에 이르는 문을 여는 부정적인 일일 뿐입니다.

Today the evolution theory of the ancient Yogis will be better understood in the light of modern research. And yet the theory of the Yogis is a better explanation. The two causes of evolution advanced by the moderns, viz. sexual selection and survival of the fittest, are inadequate. Suppose human knowledge to have advanced so much as to eliminate competition, both from the function of acquiring physical sustenance and of acquiring a mate. Then, according to the moderns, human progress will stop and the race will die. The result of this theory is to furnish every oppressor with an argument to calm the qualms of conscience. Men are not lacking, who, posing as philosophers, want to kill out all wicked and incompetent persons (they are, of course, the only judges of competency) and thus preserve the human race! But the great ancient evolutionist, Patanjali, declares that the true secret of evolution is the manifestation of the perfection which is already in every being; that this perfection has been barred and the infinite tide behind is struggling to express itself. These struggles and competitions are but the results of our ignorance, because we do not know the proper way to unlock the gate and let the water in. This infinite tide behind must express itself; it is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오늘날 고대 요기들의 진화론은 현대 연구에 비추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기(Yogi)의 이론이 더 나은 설명입니다. 현대인들이 발전시킨 진화의 두 가지 원인, 즉. 성적 선택과 적자 생존은 (인간에 이르러서는 점점더)부적절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육체적 생계를 유지하는 기능과 배우자를 얻는 기능 모두에서 경쟁을 제거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현대인에 따르면 인간의 진보는 멈추고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론의 결과는 모든 억압자에게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기 위한 논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로 가장하여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물론 그들은 유일한 능력의 재판관입니다) 인류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위대한 진화론자인 파탄잘리는 진화의 진정한 비밀은 모든 존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벽함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완벽함은 금지되었고 뒤에 있는 무한한 조류(tide)는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과 경쟁은 우리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을 열고 물을 들여오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이 무한한 조수(tide)는 스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발현의 원인입니다.

Competitions for life or sex-gratification are only momentary, unnecessary, extraneous effects, caused by ignorance. Even when all competition has ceased, this perfect nature behind will make us go forward until everyone has become perfect. Therefore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competition is necessary to progress. In the animal the man was suppressed, but as soon as the door was opened, out rushed man. So in man there is the potential god, kept in by the locks and bars of ignorance. When knowledge breaks these bars, the god becomes manifest.
삶이나 성적 만족을 위한 경쟁은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불필요하며 외부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모든 경쟁이 끝나더라도 뒤에 있는 완벽한 본성은 모두가 완벽해질 때까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전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물 안에서는 인간이 제압당했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인간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는 무지의 자물쇠와 빗장으로 갇혀 있는 잠재적인 신이 있습니다. 지식이 이러한 기준을 깨면 신이 나타나게 됩니다.


निर्माणचित्तान्यस्मितामात्रात् ॥४॥
nirmāṇacittāny asmitāmātrāt
4. From egoism alone proceed the created minds.
[4.4] (인위적인)창조된 마음은 (그 시작점은)이기심(또는 자아)에서만 나옵니다.

The theory of Karma is that we suffer for our good or bad deeds, and the whole scope of philosophy is to reach the glory of man. All the scriptures sing the glory of man, of the soul, and then, in the same breath, they preach Karma. A good deed brings such a result, and a bad deed such another, but if the soul can be acted upon by a good or a bad deed, the soul amounts to nothing. Bad deeds put a bar to the manifestation of the nature of the Purusha; good deeds take the obstacles off, and the glory of the Purusha becomes manifest. The Purusha itself is never changed. Whatever you do never destroys your own glory, your own nature, because the soul cannot be acted upon by anything, only a veil is spread before it, hiding its perfection.
카르마 이론은 우리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며, 철학의 전체 범위는 인간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인간과 영혼의 영광을 노래하고 동시에 카르마를 설교합니다. 선한 행위는 (그에 맞는)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행위는 (또한)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쁜 행위는 푸루샤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장애가 됩니다. 선행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푸루샤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푸루샤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 자신의 영광과 본성을 결코 파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없고, 영혼 앞에는 베일이 펼쳐져 있어 그 완벽함을 숨길 뿐입니다.

With a view to exhausting their Karma quickly, Yogis create Kāya-vyuha, or groups of bodies, in which to work it out. For all these bodies they create minds from egoism. These are called "created minds", in contradistinction to their original minds.
카르마를 빨리 소진시키기 위해 요기들은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한 신체 그룹인 카야뷰하(Kāya-vyuha)를 만듭니다. 이 모든 신체에 대해 그들은 이기심에서 마음을 창조합니다. 이것을 원래의 마음과 달리 '창조된 마음'이라고 합니다.


प्रवृत्तिभेदे प्रयोजकं चित्तमेकमनेकेषाम् ॥५॥
pravṛttibhede prayojakaṃ cittam ekam anekeṣām
5. Though the activities of the different created minds are various, the one original mind is the controller of them all.
[4.5] (인위적으로)창조된 여러 마음의 활동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본심이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

These different minds, which act in these different bodies are called made-minds, and the bodies, made-bodies; that is, manufactured bodies and minds. Matter and mind are like two inexhaustible storehouses. When you become a Yogi, you learn the secret of their control. It was yours all the time, but you had forgotten it. When you become a Yogi, you recollect it. Then you can do anything with it, manipulate it in every way you like. The material out of which a manufactured mind is created is the very same material which is used for the macrocosm. It is not that mind is one thing and matter another, they are different aspects of the same thing. Asmitā, egoism, is the material, the fine state of existence out of which these made-minds and made-bodies of the Yogi are manufactured. Therefore, when the Yogi has found the secret of these energies of nature, he can manufacture any number of bodies or minds out of the substance known as egoism.
이렇게 서로 다른 신체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서로 다른 마음을 만든 마음이라고 하고, 몸을 만든 몸이라고 합니다. 즉, 만들어진 육체와 정신입니다. 물질과 마음은 두 개의 무한한 창고와 같습니다. 당신이 요기가 되면 그들의 통제의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항상 당신의 것이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요기가 되면 그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가공된 마음이 창조되는 물질은 대우주에 사용되는 물질과 바로 동일합니다. 마음은 하나이고 물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기심인 아스미타(asmitā)는 요기의 만들어진 마음과 만들어진 몸이 만들어지는 물질, 존재의 훌륭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요기가 이러한 자연 에너지의 비밀을 발견하면 이기주의라는 물질로 수많은 몸이나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तत्र ध्यानजमनाशयम् ॥६॥
tatra dhyānajam anāśayam
6. Among the various Chittas, that which is attained by Samadhi is desireless.
[4.6] 다양한 치타(Chitta) 중에서 사마띠(samadhi,-삼다)에 의해 달성된 것은 욕망이 없습니다.

Among all the various minds that we see in various men, only that mind which has attained to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is the highest. A man who has attained certain powers through medicines, or through words, or through mortifications, still has desires, but that man who has attained to Samadhi through concentration is alone free from all desires.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마음 중에서 오직 사마띠, 즉 완전한 집중에 도달한 마음만이 가장 높습니다. 약이나 말, 고행을 통해 어떤 힘을 얻은 사람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지만 집중을 통해 사마띠에 도달한 사람은 홀로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습니다.


कर्माशुक्लाकृष्णं योगिनस्त्रिविधमितरेषाम् ॥७॥
karmāśuklākṛṣṇaṃ yoginas trividham itareṣām
7. Works are neither black nor white for the Yogis; for others they are threefold — black, white, and mixed.
[4.7] 요기들에게는 일[4]이 흑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검은색, 흰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When the Yogi has attained perfection, his actions, and the Karma produced by those actions, do not bind him, because he did not desire them. He just works on; he works to do good, and he does good, but does not care for the result, and it will not come to him. But, for ordinary men, who have not attained to the highest state, works are of three kinds, black (evil actions), white (good actions), and mixed.
요기가 완전함과 그의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 인해 생긴 카르마를 얻었을 때 그를 묶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일하고 선을 행하지만 결과를 염려하지 않으며 결과가 그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행위는 흑색(악행), 백색(선행), 혼합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ततस्तद्विपाकानुगुणानामेवाभिव्यक्तिर्वासनानाम् ॥८॥
tatas tadvipākānuguṇānām evābhivyaktir vāsanānām
8. From these threefold works are manifested in each state only those desires (which are) fitting to that state alone. (The others are held in abeyance for the time being.)
[4.8] 이 세 가지 행위 중에서 각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만 적합한 욕망만이 나타납니다. (나머지는 당분간(잠정적으로) 보류됩니다.)

Suppose I have made the three kinds of Karma, good, bad, and mixed, and suppose I die and become a god in heaven. The desires in a god body are not the same as the desires in a human body; the god body neither eats nor drinks. What becomes of my past unworked Karmas which produce as their effect the desire to eat and drink? Where would these Karmas go when I become a god? The answer is that desires can only manifest themselves in proper environments. Only those desires will come out for which the environment is fitted; the rest will remain stored up. In this life we have many godly desires, many human desires, many animal desires. If I take a god body, only the good desires will come up, because for them the environments are suitable. And if I take an animal body, only the animal desires will come up, and the good desires will wait. What does this show? That by means of environment we can check these desires. Only that Karma which is suited to and fitted for the environments will come out. This shows that the power of environment is the great check to control even Karma itself.
내가 세 가지 카르마(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 혼합 카르마)를 만들고 죽어서 천국의 신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신의 몸에 있는 욕망은 인간 몸에 있는 욕망과 같지 않습니다. 신의 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가정합니다). 먹고 마시고 싶은 욕망을 결과로 낳는 과거의 일하지 않은 카르마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신이 되면 이 카르마들은 어디로 갈 것입ᄂᆝ까? 대답은 욕망이 적절한 환경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맞는 욕망만이 나올 것입니다. 나머지는 저장된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생에서 우리는 많은 경건한 욕망, 많은 인간적 욕망, 많은 동물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신체를 취하면 좋은 욕망만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몸을 취하면 동물적인 욕망만 올라오고, 좋은 욕망만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환경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욕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경에 적합하고 적당한 카르마만이 나올 것입니다. 이는 환경의 힘이 카르마 자체를 제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जाति-देश-काल-व्यवहितानामप्यानन्तर्यं स्मृतिसंस्कारयोरेकरूपत्वात् ॥९॥
jātideśakālavyavahitānām apy ānantaryaṃ smṛtisaṃskārayor ekarūpatvāt
9. There is consecutiveness in desires, even though separated by species, space, and time, there being identification of memory and impressions.
[4.9] 욕망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비록 종류(species)[5][6][7], 공간, 시간으로 구분되어도 기억과 인상의 동일성이 있습니다.

Experiences becoming fine become impressions; impressions revivified become memory. The word memory here includes unconscious co-ordination of past experiences, reduced to impressions, with present conscious action. In each body, the group of impressions acquired in a similar body only becomes the cause of action in that body. The experiences of a dissimilar body are held in abeyance. Each body acts as if it were a descendant of a series of bodies of that species only; thus, consecutiveness of desires is not to be broken.
괜찮은 경험은 인상이 됩니다. 되살아난 인상은 추억이 됩니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단어는 인상으로 축소된 과거 경험과 현재의 의식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각 신체에서는 유사한 신체에서 획득한 인상들의 집합이 그 신체에서 작용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신체의 경험은 보류됩니다. 각 신체는 마치 해당 종(species)의 일련의 신체의 후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따라서 욕망의 연속성은 깨지지 않습니다.

तासामनादित्वं चाशिषो नित्यत्वात् ॥१०॥
tāsām anāditvaṃ cāśiṣo nityatvāt
10. Thirst for happiness being eternal, desires are without beginning.
[4.10] 행복에 대한 갈증은 영원하고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따라서 끝도 없습니다)

All experience is preceded by desire for happiness. There was no beginning of experience, as each fresh experience is built upon the tendency generated by past experience; therefore desire is without beginning.
모든 경험에는 행복에 대한 열망이 선행됩니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은 과거 경험에 의해 생성된 경향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경험의 시작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시작이 없습니다.


हेतुफलाश्रयालम्बनैः संगृहीतत्वादेषामभावे तदभावः ॥११॥
hetuphalāśrayālambanaiḥ saṃgṛhītatvād eṣām abhāve tadabhāvaḥ
11. Being held together by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in the absence of these is its absence.
[4.11] 원인, 결과, 지탱 및 대상에 의해 결합되며, 이것이 없으면 부재(존재하지않음)입니다.

Desires are held together by cause and effect;[8] if a desire has been raised, it does not die without producing its effect. Then, again, the mind-stuff is the great storehouse, the support of all past desires reduced to Samskāra form; until they have worked themselves out, they will not die. Moreover, so long as the senses receive the external objects, fresh desires will arise. If it be possible to get rid of the cause, effect, support, and objects of desire, then alone it will vanish.
욕망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합됩니다.[9] 욕망이 고조되면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의 재료는 거대한 창고이며, 삼스카라(Samskāra) 형태로 축소된 모든 과거의 욕망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일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감각이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는 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욕망의 원인과 결과, 지탱과 대상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혼자서도 사라질 것입니다.


अतीतानागतं स्वरूपतोऽस्त्यध्वभेदाद्धर्माणाम् ॥१२॥
atītānāgataṃ svarūpato 'sty adhvabhedād dharmāṇām
12. The past and future exist in their own nature, qualities having different ways.
[4.12]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 존재하며, 특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The idea is that existence never comes out of non-existence. The past and future, though not existing in a manifested form, yet exist in a fine form.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비록 현현(顯現)된 형태는 아니지만 미세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ते व्यक्त-सूक्ष्मा गुणात्मानः ॥१३॥
te vyaktasūkṣmā guṇātmānaḥ
13. They are manifested or fine, being of the nature of the Gunas.
[4.13] (구나는)구나들(gunas)의 특성상 뚜렷하거나 미세(미미)[10]합니다.

The Gunas are the three substances, Sattva, Rajas, and Tamas, whose gross state is the sensible universe. Past and future arise from the different modes of manifestation of these Gunas.
구나스Gunas는 사트바Sattva(물질), 라자스Rajas(빛) 및 타마스Tamas(어둠)의 세 가지 재질이며, 그 전체 상태는 감각적 우주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이러한 구나스Gunas의 다양한 발현 방식에서 발생합니다.


परिणामैकत्वाद्वस्तुतत्त्वम् ॥१४॥
pariṇāmaikatvād vastutattvam
14. The unity in things is from the unity in changes.
[4.14] 사물의 통일성(연관성)은 변화의 통일성(관련성)에서 나옵니다.[11]

Though there are three substances, their changes being co-ordinated, all objects have their unity.
세 가지 물질이 있고 그 변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모든 사물은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वस्तुसाम्ये चित्तभेदात्तयोर्विभक्तः पन्थाः ॥१५॥
vastusāmye cittabhedāt tayor vibhaktaḥ panthāḥ
15. Since perception and desire vary with regard to the same object, mind and object are of different nature.
[4.15]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지각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대상은 성질이 다릅니다.

That is, there is an objective world independent of our minds. This is a refutation of Buddhistic Idealism. Since different people look at the same thing differently, it cannot be a mere imagination of any particular individual.[12]
즉, 우리 마음과 독립된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적 이상주의에 대한 반박일수있습니다. 같은 것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 때문에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단순한 상상일 수는 없습니다.[13]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१६॥
na caikacittatantraṃ vastu tadapramāṇakaṃ tadā kiṃ syāt
16.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
[4.16] 대상은 한 마음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존재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 몇몇 판본에는 이구절이 추가되어있습니다.

तदुपरागापेक्षित्वाच्चित्तस्य वस्तु ज्ञाताज्ञातम् ॥१६॥
taduparāgāpekṣitvāc cittasya vastu jñātājñātam
16. Things are known or unknown to the mind, being dependent on the colouring which they give to the mind.
[4.16] 사물은 마음에 부여되는 색상에 따라 마음에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습니다.


सदा ज्ञाताश्चित्तवृत्तयस्तत्प्रभोः पुरुषस्यापरिणामित्वात् ॥१७॥
sadā jñātāś cittavṛttayas tatprabhoḥ puruṣasyāpariṇāmitvāt
17. The states of the mind are always known, because the lord of the mind, the Purusha, is unchangeable.
[4.17] 마음의 주인인 푸루샤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는 항상 알려져 있습니다.

The whole gist of this theory is that the universe is both mental and material. Both of these are in a continuous state of flux. What is this book? It is a combination of molecules in constant change. One lot is going out, and another coming in; it is a whirlpool, but what makes the unity? What makes it the same book? The changes are rhythmical; in harmonious order they are sending impressions to my mind, and these pieced together make a continuous picture, although the parts are continuously changing. Mind itself is continuously changing. The mind and body are like two layers in the same substance, moving at different rates of speed. Relatively, one being slower and the other quicker, we can distinguish between the two motions. For instance, a train is in motion, and a carriage is moving alongside it. It is possible to find the motion of both these to a certain extent. But still something else is necessary. Motion can only be perceived when there is something else which is not moving. But when two or three things are relatively moving, we first perceive the motion of the faster one, and then that of the slower ones. How is the mind to perceive? It is also in a flux. Therefore another thing is necessary which moves more slowly, then you must get to something in which the motion is still slower, and so on, and you will find no end. Therefore logic compels you to stop somewhere. You must complete the series by knowing something which never changes. Behind this never-ending chain of motion is the Purusha, the changeless, the colourless, the pure. All these impressions are merely reflected upon it, as a magic lantern throws images upon a screen, without in any way tarnishing it.
이 이론의 전체적인 요점은 우주가 정신적이고 물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지속적인 유동 상태에 있습니다. 이 책은 무엇입니까?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자들의 조합입니다. 한 무더기가 나가고 다른 무더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나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책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화는 리드미컬(주기적인 또는 율동의)합니다. 조화로운 순서로 그것들은 내 마음에 인상을 주고 있으며, 부분들이 계속해서 변하더라도 이것들이 함께 뭉쳐서 연속적인 그림을 이룹니다. 마음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동일한 물질의 두 층과 같아서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는 느리고 다른 하나는 더 빠르므로 두 동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차가 움직이고 있고 마차가 그 옆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는 다른 것이 있을 때만 감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세 가지 사물이 상대적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먼저 더 빠른 것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 다음에는 느린 것의 움직임을 인지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인식합니까? 그것은 또한 유동적입니다. 그러므로 더 느리게 움직이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고, 그런 다음 동작이 여전히 더 느린 것에 도달해야 하며, 계속해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는 당신이 어딘가에서 멈추도록 강요합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시리즈(연속성)를 완성해야 합니다. 이 끝없는 운동 사슬 뒤에는 불변, 무색, 순수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상은 마술 랜턴이 어떤 방식으로든 화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화면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처럼 화면에 반영될 뿐입니다.


न तत् स्वाभासं दृश्यत्वात् ॥१८॥
na tat svābhāsaṃ dṛśyatvāt
18. The mind is not self-luminous, being an object.
[4.18] 마음은 객체로서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Tremendous power is manifested everywhere in nature, but it is not self-luminous, not essentially intelligent. The Purusha alone is self-luminous, and gives its light to everything. It is the power of the Purusha that is percolating through all matter and force.
엄청난 힘은 자연의 모든 곳에서 발현되지만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도 않고 본질적으로 이해력을 바랄수있지 않습니다. 푸루샤만이 스스로 빛을 내며 모든 것에 빛을 줍니다. 모든 물질과 힘에 스며드는 푸루샤의 힘입니다.


एकसमये चोभयानवधारणम् ॥१९॥
ekasamaye cobhayānavadhāraṇam
19. From its being unable to cognise both at the same time.
[4.19]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14]

If the mind were self-luminous it would be able to cognise itself and its objects at the same time, which it cannot. When it cognises the object, it cannot reflect on itself. Therefore the Purusha is self-luminous, and the mind is not.
마음이 스스로 빛난다면 그 자체와 그 대상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면 그 자체를 성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푸루샤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चित्तान्तरदृश्ये बुद्धिबुद्धेरतिप्रसङ्गः स्मृतिसङ्करश्च ॥२०॥
cittāntaradṛśye buddhibuddher atiprasaṅgaḥ smṛtisaṃkaraśca
20. Another cognising mind being assumed, there will be no end to such assumptions, and confusion of memory will be the result.
[4.20] 또 다른 인식 정신을 가정하면 그러한 가정은 끝이 없을 것이며 기억의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

Let us suppose there is another mind which cognises the ordinary mind, then there will have to be still another to cognise the former, and so there will be no end to it. It will result in confusion of memory, there will be no storehouse of memory.
평범한 마음을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전자를 인식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기억의 창고도 (끝이)없을 것입니다.


चितेरप्रतिसंक्रमायास्तदाकारापत्तौ स्वबुद्धि-संवेदनम् ॥२१॥
citer apratisaṃkramāyās tadākārāpattau svabuddhisaṃvedanam
21. The essence of knowledge (the Purusha) being unchangeable, when the mind takes its form, it becomes conscious.
[4.21] 지식(푸루샤)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마음이 형태를 취하면 의식(변별력)이 생깁니다.[15]

Patanjali says this to make it more clear that knowledge is not a quality of the Purusha. When the mind comes near the Purusha it is reflected, as it were, upon the mind, and the mind, for the time being, becomes knowing and seems as if it were itself the Purusha.
파탄잘리Patanjali는 지식이 푸루샤의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푸루샤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에 반영되며, 마음은 한동안 알게 되고 마치 그 자체가 푸루샤인 것처럼 보입니다.


द्रष्टृदृश्योपरक्तं चित्तं सर्वार्थम् ॥२२॥
draṣṭṛdṛśyoparaktaṃ cittaṃ sarvārtham
22. Coloured by the seer and the seen the mind is able to understand everything.
[4.22] 보는자(것)(seer)와 보여진 것(seen)에 의해 색칠된 마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On one side of the mind the external world, the seen, is being reflected, and on the other, the seer is being reflected. Thus comes the power of all knowledge to the mind.
마음의 한쪽에는 외부 세계, 즉 보이는 것이 반영되고, 다른 한쪽에는 보는 사람이 반영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의 힘이 마음에 옵니다.

तदसंख्येयवासनाभिश्चित्रमपि परार्थं संहत्यकारित्वात् ॥२३॥
tad asaṃkhyeyavāsanābhiś citram api parārthaṃ saṃhatyakāritvāt
23. The mind, though variegated by innumerable desires, acts for another (the Purusha), because it acts in combination.
[4.23] 마음은 무수한 욕망으로 다양하지만 다른것(푸루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결합하여 행동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The mind is a compound of various things and therefore it cannot work for itself. Everything that is a combination in this world has some object for that combination, some third thing for which this combination is going on. So this combination of the mind is for the Purusha.
마음은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이므로 스스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결합인 모든 것에는 그 결합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고, 이 결합이 진행되는 세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의 조합은 푸루샤를 위한 것입니다.


विशेषदर्शिन आत्मभाव-भावनाविनिवृत्तिः ॥२४॥
viśeṣadarśina ātmabhāvabhāvanānivṛttiḥ
24. For the discriminating, the perception of the mind as Atman ceases.
[4.24] 분별을 위해 아트만(atman)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인식이 중단됩니다.

Through discrimination the Yogi knows that the Purusha is not mind.
차별을 통해 요기는 푸루샤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तदा विवेकनिम्नं कैवल्यप्राग्भावं चित्तम् ॥२५॥
tadā vivekanimnaṃ kaivalyaprāgbhāraṃ cittam
25. Then, bent on discriminating, the mind attains the previous state of Kaivalya (isolation).[16]
[4.25] 그런 다음 분별에 전념하면 마음은 이전 상태인 카이발야Kaivalya(독립)에 도달합니다.[17]

Thus the practice of Yoga leads to discriminating power, to clearness of vision. The veil drops from the eyes, and we see things as they are. We find that nature is a compound, and is showing the panorama for the Purusha, who is the witness; that nature is not the Lord, that all the combinations of nature are simply for the sake of showing these phenomena to the Purusha, the enthroned king within. When discrimination comes by long practice, fear ceases, and the mind attains isolation.
따라서 요가 수련은 분별력, 시야의 명료함으로 이어집니다. 눈에서 베일이 벗겨지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이 복합적이며, 증인인 푸루샤에게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자연은 주된 것이 아니며, 자연의 모든 조합은 단순히 내면에 즉위한 왕인 푸루샤에게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랜 연습으로 차별이 생기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은 독립됩니다.


तच्छिद्रेषु प्रत्ययान्तराणि संस्कारेभ्यः ॥२६॥
tacchidreṣu pratyayāntarāṇi saṃskārebhyaḥ
26. The thoughts that arise as obstructions to that are from impressions.
[4.26] 그것을 방해하는 생각은 인상에서 비롯됩니다.

All the various ideas that arise, making us believe that we require something external to make us happy, are obstructions to that perfection. The Purusha is happiness and blessedness by its own nature. But that knowledge is covered over by past impressions. These impressions have to work themselves out.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외부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다양한 아이디어는 모두 그러한 완벽함을 방해합니다. 푸루샤는 그 자체로 행복과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과거의 인상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러한 노출은 스스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हानमेषां क्लेशवदुक्तम् ॥२७॥
hānam eṣāṃ kleśavad uktam
27. Their destruction is in the same manner as of ignorance, egoism, etc., as said before (II.10).
[4.27] 그들의 멸망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무지, (벗어나야할)이기주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참고[2.10]).

प्रसंख्यानेऽप्यकुसीदस्य सर्वथा विवेकख्यातेर्धर्ममेघः समाधिः ॥२८॥
prasaṃkhyāne 'py akusīdasya sarvathā vivekakhyāter dharmameghaḥ samādhiḥ
28. Even when arriving at the right discriminating knowledge of the essences, he who gives up the fruits, unto him comes, as the result of perfect discrimination, the Samadhi called the cloud of virtue.
[4.28] 본질에 대한 올바른 식별 지식에 도달할 때에도 열매(fruits)를 버리는 사람은 완전한 식별의 결과로 그에게 (돌아)옵니다. 이를 사마띠는 덕(德)의 구름이라고 불렀습니다.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is discrimination, all the powers mentioned in the last chapter come to him, but the true Yogi rejects them all. Unto him comes a peculiar knowledge, a particular light, called the Dharma-megha, the cloud of virtue. All the great prophets of the world whom history has recorded had this. They had found the whole foundation of knowledge within themselves. Truth to them had become real. Peace and calmness, and perfect purity became their own nature, after they had given up the vanities of powers.
요기가 이 분별력에 도달하면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모든 힘이 그에게 오지만, 진정한 요기는 그 모든 힘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덕의 구름인 다르마메가(Dharma-megha)라고 불리는 특별한 지식, 특별한 빛이 옵니다. 역사에 기록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기초 전체를 자기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힘의 허영을 포기한 후에는 평화와 평온, 완전한 순결이 그들 자신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ततः क्लेशकर्मनिवृत्तिः ॥२९॥
tataḥ kleśakarmanivṛttiḥ
29. From that comes cessation of pain and works.
[4.29] 거기서 괴로움과 일이 그쳐집니다.

When that cloud of virtue has come, then no more is there fear of falling, nothing can drag the Yogi down. No more will there be evils for him. No more pains.
그 미덕의 구름이 오면 더 이상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그 무엇도 요기를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악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은 없습니다.[18]

तदा सर्वावरणमलापेतस्य ज्ञानस्याऽनन्त्याज्ज्ञेयमल्पम् ॥३०॥
tadā sarvāvaraṇamalāpetasya jñānasyānantyāj jñeyam alpam
30. The knowledge, bereft of covering and impurities,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
[4.30] 지식은 가려짐과 불순물이 없어지고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집니다.

Knowledge itself is there; its covering is gone. One of the Buddhistic scriptures defines what is meant by the Buddha (which is the name of a state) as infinite knowledge, infinite as the sky. Jesus attained to that and became the Christ. All of you will attain to that state. Knowledge becoming infinite, the knowable becomes small. The whole universe, with all its objects of knowledge, becomes as nothing before the Purusha. The ordinary man thinks himself very small, because to him the knowable seems to be infinite.
지식 자체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덮개가 사라졌습니다. 불교 경전 중 하나는 부처님(의 나라)이 의미하는 바를 무한한 지식, 하늘처럼 무한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것(그 나라)을 얻으시고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당신(들) 모두는 그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지식은 무한해지며, 알 수 있는 것은 작아질것입다. 모든 지식의 대상을 포함한 온 우주는 푸루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됩니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매우 작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알 수 있는 것은 무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ततः कृतार्थानां परिणामक्रमसमाप्तिर्गुणानाम् ॥३१॥
tataḥ kṛtārthānāṃ pariṇāmakramasamāptir guṇānām
31. Then are finished the successive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they having attained the end.
[4.31] 그런 다음 특성의 연속적인 변형이 완료되어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Then all these various transformations of the qualities, which change from species to species, cease for ever.
그러면 종(species)에서 종(species)으로 변하는 이러한 다양한 특성의 변형이 모두 영원히 중단됩니다.


क्षणप्रतियोगी परिणामापरान्तनिर्ग्राह्यः क्रमः ॥३२॥
kṣaṇapratiyogī pariṇāmāparāntanirgrāhyaḥ kramaḥ
32.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and which are perceived at the other end (at the end of a series) are succession.
[4.32]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고 다른 쪽 끝(연속의 끝)에서 지각(이해)되는 변화는 연속입니다.

Patanjali here defines the word succession, the changes that exist in relation to moments. While I think, many moments pass, and with each moment there is a change of idea, but I only perceive these changes at the end of a series. This is called succession, but for the mind that has realised omnipresence there is no succession. Everything has become present for it; to it the present alone exists, the past and future are lost. Time stands controlled, all knowledge is there in one second. Everything is known like a flash.
파탄잘리Patanjali는 여기에서 연속이라는 단어, 즉 순간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변화를 정의합니다. 생각하는 동안 많은 순간이 지나가고 매 순간 생각의 변화가 있지만 나는 이러한 변화를 시리즈가 끝날 때만 인식합니다. 이것을 계승이라고 부르지만 편재성을 깨달은 마음에게는 계승이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현재만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는 상실됩니다. 시간은 통제되며 모든 지식은 1초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플래시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पुरुषार्थशून्यानां गुणानां प्रतिप्रसवः कैवल्यं स्वरूपप्रतिष्ठा वा चितिशक्तेरिति ॥३३॥
puruṣārthaśūnyānāṃ guṇānāṃ pratiprasavaḥ kaivalyaṃ svarūpapratiṣṭhā vā citiśaktir iti
33. The resolution in the inverse order of the qualities, bereft of any motive of action for the Purusha, is Kaivalya, or it is the establishment of the power of knowledge in its own nature.
[4.33] 푸루샤에 대한 행동 동기를 상실한 채 자질의 역순으로 해결되는 것은 카이발야Kaivalya 또는 그 자체의 성격으로 지식의 힘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Nature's task is done, this unselfish task which our sweet nurse, nature, had imposed upon herself. She gently took the self-forgetting soul by the hand, as it were, and showed him all the experiences in the universe, all manifestations, bringing him higher and higher through various bodies, till his lost glory came back, and he remembered his own nature. Then the kind mother went back the same way she came, for others who also have lost their way in the trackless desert of life. And thus is she working, without beginning and without end. And thus through pleasure and pain, through good and evil, the infinite river of souls is flowing into the ocean of perfection, of self-realisation.
자연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유모인 자연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 비이기적인 임무입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자기를 망각하는 영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경험과 모든 현현(顯現)을 보여 주었고, 그의 잃어버린 영광이 돌아올 때까지 그를 다양한 몸을 통해 점점 더 높이 올려주었습니다. 자연(이자), 그리고 친절한 어머니는 길도 없는 삶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작도 끝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과 고통, 선과 악을 통해 영혼의 무한한 강이 완전함과 자아 실현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Glory unto those who have realised their own nature. May their blessing be on us all!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자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1]
  2. 먹이사슬과 생태계라는 단지 생명체들이 벗어날수없는 생명의 굴레만으로도 생화학적인 에너지의 끝없는 순환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커다란 딜레마 중 주요한 하나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생태계조차 원자들로 이루어지는 물질세계의 질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 또한 단지 존재하는것으로부터 영적으로 겸손하고 겸허하게 합니다.
  3. सिद्धि siddhi 성취,능력,성공
  4. 수행,수련,실천
  5. 종류(철학,논리학) - 종차(種差)는 같은 유(류)개념에 속한 어떤 종개념과 또다른 종개념을 서로 구별할수있는 요소라고 정의해본다면 이를테면 동물에 속하는 사람과 새를 비교할 때 날개가 있고 없는 차이를 종차의 예로 들수있다. 이 때 종류를 이해해볼수있다.
  6. [2.13]The root being there, the fruition comes (in the form of)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뿌리가 거기에 있고 그 열매는 종(種)과 생명과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형태)으로 옵니다.[2.13]참고
  7. 치타(chitta)가 브리티스(vrittis)를 멈출때 푸루샤(purusha)가 아트만(atman)을 브라흐마(brahma)에게 안내합니다. 이제 카르마(karma)는 더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몸이 자신을 받아들이면 영혼이 드러납니다. 그 영혼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도됩니다.)
  8. The causes are the "pain-bearing obstructions" (II.3) and actions (IV.7), and the effects are "species, life, and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II.13). —Ed.
  9. 원인은 "고통을 수반하는 장애물"([2.3])과 행위([4.7])이며, 결과는 "종(species), 생명, 쾌락과 고통의 경험"이다. ([2.13]). —Ed.
  10. 미미할수있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보입니다.
  11. The Silent Spring(침묵의 봄)레이첼 루이즈 카슨(Rachel Louise Carson)1962년 (쳅터4. Surface Waters and Underground Seas) Here again we are reminded that in nature nothing exists alone. To understand more clearly how the pollution of our world is happening, we must now look at another of the earth's basic resources, the soil.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 세계의 오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더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이제 지구의 또 다른 기본 자원인 토양을 살펴봐야 합니다.)
  12. There is an additional aphorism here in some editions:
    न चैकचित्ततन्त्रं वस्तु तदप्रमाणकं तदा किं स्यात् ॥
    "The object cannot be said to be dependent on a single mind. There being no proof of its existence, it would then become nonexistent."
    If the perception of an object were the only criterion of its existence, then when the mind is absorbed in anything or is in Samadhi, it would not be perceived by anybody and might as well be said to be non-existent. This is an undesirable conclusion. —Ed.
  13.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그 존재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마음이 어떤 것에 몰입하거나 사마띠에 (들어)있을 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론입니다. —에드.
  14. 한 물질이 동시에 두 공간에서 존재할수없고 그리고 두 물질은 서로 한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할수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한 개의 독립된 물질로 가정할수있게 됩니다.
  15. 여기 어떤 모든것의 첫번째 질서(1st order)가 있다고 가정해봄니다. 그것은 모든것의 시작이며 모든것의 끝입니다. 치타와 브리티스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러한 첫번째 질서에 접근했다고 가정해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푸루샤조차도 그것앞에서는 한낱 아주 미세한 입자(먼지) 같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라고 가정해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첫번째 질서앞에서는 먼지도 푸루샤도 치타도 브리티들도 모두 중요하고 동시에 동등할것입니다.
  16. There is another reading — कैवल्यप्राग्भारं। The meaning then would be: "Then the mind becomes deep in discrimination and gravitates towards Kaivalya." —Ed.
  17. 또 다른 해석(또는 주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차별에 깊이 빠지고 카이발야Kaivalya 쪽으로 끌립니다." —Ed.(번역가 또는 편집자)
  18. 또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이세상은 가뭄과 단비가 주기(週期)를 돌며 찬공기와 더운공기가 자연을 조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선과 악은 여기에 비교될수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슬픈일로 여겨질수있으며 고통으로 여겨질수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두려움이 두려움이 아니며 더이상 악이 악이 아닙니다.'라는 생각의 또다른 영토에 접근해보고 이를 조사(investigation)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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