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 요가/제3장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II POWERS
파탄자리의 요가 수트라 제3장 능력의 시작점
देशबन्धश्चित्तस्य धारणा ॥१॥
deśabandhaś cittasya dhāraṇā
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dharanā)[2]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Dharana (concentration) is when the mind holds on to some object, either in the body, or outside the body, and keeps itself in that state.
다라나(집중)는 마음이 몸 안이나 몸 밖에 어떤 대상을 붙잡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तत्र प्रत्ययैकतानता ध्यानम् ॥२॥
tatra pratyayaikatānatā dhyānam
2. An unbroken flow of knowledge in that object is Dhyāna.
[3.2] 그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의식)의 흐름이 드야나(명상)[3][4][5][6]입니다.
The mind tries to think of one object, to hold itself to one particular spot, as the top of the head, the heart, etc., and if the mind succeeds in receiving the sensations only through that part of the body, and through no other part, that would be Dharana, and when the mind succeeds in keeping itself in that state for some time, it is called Dhyana (meditation).
마음은 머리 꼭대기, 심장 등과 같은 하나의 특정 지점에 자신을 고정하기 위해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려고 시도하며, 마음이 신체의 해당 부분을 통해서만 감각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면 다른 부분은 다라나(Dharana)이며, 마음이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드야나(명상)라고 합니다.
तदे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स्वरूपशून्यमिव समाधिः ॥३॥
tad evārthamātranirbhāsaṃ svarūpaśūnyam iva samādhiḥ
3. When that, giving up all forms, reflects only the meaning, it is Samādhi.
[3.3] 그것이 모든 형태를 버리고 의미만을 반영할 때, 그것이 사마띠(삼다)[7][8]입니다.
That comes when in meditation the form or the external part is given up. Suppose I were meditating on a book, and that I have gradually succeeded in concentrating the mind on it, and perceiving only the internal sensations, the meaning, unexpressed in any form — that state of Dhyana is called Samadhi.
그것은 명상 중에 형태나 외적인 부분을 포기할 때 발생합니다. 내가 책에 대해 명상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어떤 형태로도 표현되지 않은 내적 감각과 의미만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한 드야나(명상)의 상태를 삼매(사마띠samadhi)라고 합니다.
त्रयमेकत्र संयमः ॥४॥
trayam ekatra saṃyamaḥ
4. (These) three (when practised) in regard to one object is Samyama.
[3.4] (이들) 세 가지(를 수행[9]할 때) (또다른)하나의 대상이 삼야마[10][11]입니다.
When a man can direct his mind to any particular object and fix it there, and then keep it there for a long time, separating the object from the internal part, this is Samyama; or Dharana, Dhyana, and Samadhi, one following the other, and making one. The form of the thing has vanished, and only its meaning remains in the mind.
사람이 어떤 특정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거기에 고정시킨 다음 대상과 내부 부분을 분리하여 오랫동안 거기에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삼야마입니다. 또는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가 차례로 이어져 하나를 만듭니다. 사물의 형태는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의미(뜻)[12]만 남습니다.
तज्जयात् प्रज्ञाऽऽलोकः ॥५॥
tajjayāt prajñālokaḥ
5. By the conquest of that comes light of knowledge.
[3.5] 그것을 극복(정복)함으로써 지식(의지)의 빛이 나옵니다.
When one has succeeded in making this Samyama, all powers come under his control. This is the great instrument of the Yogi. The objects of knowledge are infinite, and they are divided into the gross, grosser, grossest and the fine, finer, finest and so on. This Samyama should be first applied to gross things, and when you begin to get knowledge of this gross, slowly, by stages, it should be brought to finer things.
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권력이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요기의 위대한 도구입니다. 지식의 대상은 무한하며, 그것들은 (부분의 합이자 그이상의 것)전체적인 것(gross)[13], 더 전체적인것, 가장 전체적인것과 미세한것(fine), 더 미세한것, 아주 가장 미세한것 등으로 나뉩니다. 이 삼야마는 총체적인 것들에 먼저 적용되어야 하며, 이 총체적인 것들에 대해 서서히, 단계적으로 지식을 얻기 시작하면 (점점)더 미세한 것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तस्य भूमिषु विनियोगः ॥६॥
tasya bhūmiṣu viniyogaḥ
6. That should be employed in stages.
[3.6] 단계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This is a note of warning not to attempt to go too fast.
너무 빨리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त्रयमन्तरङ्गं पूर्वेभ्यः ॥७॥
trayam antaraṅgaṃ pūrvebhyaḥ
7. These three are more internal than those that precede.
[3.7] (여덟가지중)[14]이 세 가지는 앞의 것(5개)보다 내부적인 것입니다.
Before these we had the Pratyāhāra, the Prānāyāma, the Āsana, the Yama and Niyama; they are external parts of the three — Dharana, Dhyana and Samadhi.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em, he may attain to omniscience and omnipotence, but that would not be salvation. These three would not make the mind Nirvikalpa, changeless, but would leave the seeds for getting bodies again. Only when the seeds are, as the Yogi says, "fried," do they lose the possibility of producing further plants. These powers cannot fry the seed.
이들 이전에는 프라티야하라Pratyāhāra, 프라나야마Prānāyāma, 아사나Āsana, 야마Yama 및 니야마Niyama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라나(Dharana), 드야나(Dhyana), 사마띠(Samadhi)의 외부 부분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에 도달하면 전지와 전능함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마음을 불변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유'(니르비칼파Nirvikalpa)[15]로 만들지 않고 다시 몸을 얻기 위한 씨앗을 남길 것입니다. 요기가 말했듯이 씨앗이 '소멸한'[16] 경우에만 더 많은 식물을 생산할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힘으로는 씨(앗)를 태울(말릴)수 없습니다.[17]
तदपि बहिरङ्गं निर्बीजस्य ॥८॥
tad api bahiraṅgaṃ nirbījasya
8. But even they are external to the seedless (Samadhi).
[3.8] 그러나 그들조차도 씨앗 없는 것(사마띠)의 외부에 있습니다.
Compared with that seedless Samadhi, therefore, even these are external. We have not yet reached the real Samadhi, the highest, but a lower stage, in which this universe still exists as we see it, and in which are all these powers.
그러므로 이들조차도 저 씨(앗)없는 사마띠에 비하면 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우주가 우리가 보는 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그리고 이 모든 힘들이 존재하는 (가장높은단계)보다는 더 낮은 단계이며 그리고(아직) 가장 높은 단계인 실제 사마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व्युत्थान-निरोधसंस्कारयोरभिभव-प्रादुर्भावौ निरोधक्षणचित्तान्वयो निरोध-परिणामः ॥९॥
vyutthānanirodhasaṃskārayor abhibhavaprādurbhāvau nirodhakṣaṇacittānvayo nirodhapariṇāmaḥ
9. By the suppression of the disturbed impressions of the mind, and by the rise of impressions of control, the mind, which persists in that moment of control, is said to attain the controlling modifications.
[3.9] 마음의 흐트러진 인상(반영)[18]을 억제하고, 통제의 인상을 상승(돌출)시킴으로써, 그 통제의 순간에 지속되는 마음은 통제의 변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That is to say, in this first state of Samadhi the modifications of the mind have been controlled, but not perfectly, because if they were, there would be no modifications. If there is a modification which impels the mind to rush out through the senses, and the Yogi tries to control it, that very control itself will be a modification. One wave will be checked by another wave, so it will not be real Samadhi in which all the waves subside, as control itself will be a wave. Yet this lower Samadhi is very much nearer to the higher Samadhi than when the mind comes bubbling out.
즉, 사마띠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통제되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변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감각을 통해 빠져나오도록 강요하는 변형이 있고, 요기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 통제 자체가 변형이 될 것입니다. 하나의 파동은 다른 파동에 의해 저지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파동이 가라앉는 진정한 사마띠는 아닐 것입니다. 통제 자체가 파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낮은 삼매는 마음이 솟아날 때보다(는) 더 높은 사마띠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तस्य प्रशान्तवाहिता संस्कारात् ॥१०॥
tasya praśāntavāhitā saṃskārāt
10. Its flow becomes steady by habit.
[3.10] 습관에 의해 흐름이 꾸준해집니다.
The flow of this continuous control of the mind becomes steady when practised day after day, and the mind obtains the faculty of constant concentration.
마음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는 흐름은 날마다 수행할 때 안정되고 마음은 지속적인 집중 능력을 얻습니다.
सर्वार्थतैकाग्रतयोः क्षयोदयौ चित्तस्य समाधि-परिणामः ॥११॥
sarvārthataikāgratayoḥ kṣayodayau cittasya samādhipariṇāmaḥ
11. Taking in all sorts of objects, and concentrating upon one object, these two powers being destroyed and manifested respectively, the Chitta gets the modification called Samadhi.
[3.11] 모든 종류의 대상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이 두 가지 힘이 각각 파괴되고 (새로이)발현되면 치타는 (또다른)사마띠(Samadhi)라는 변형을 얻습니다.
The mind takes up various objects, runs into all sorts of things. That is the lower state. There is a higher state of the mind, when it takes up one object and excludes all others, of which Samadhi is the result.
마음은 다양한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종류의 것들에 부딪칩니다. 즉 낮은 상태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취하고 다른 모든 대상을 배제하는 마음의 더 높은 상태가 있으며, 그 결과가 사마띠입니다.
शान्तोदितौ तुल्यप्रत्ययौ चित्तस्यैकाग्रता-परिणामः ॥१२॥
tataḥ punaḥ śāntoditau tulyapratyayau cittasyaikāgratāpariṇāmaḥ
12. The one-pointedness of the Chitta is when the impression that is past and that which is present are similar.
[3.12] 치타의 일점성(一點性)[19][20]은 과거의 인상과 현재의 인상이 유사할 때입니다.
How are we to know that the mind has become concentrated? Because the idea of time will vanish. The more time passes unnoticed the more concentrated we are. In common life we see that when we are interested in a book we do not note the time at all; and when we leave the book, we are often surprised to find how many hours have passed. All time will have the tendency to come and stand in the one present. So the definition is given: When the past and present come and stand in one, the mind is said to be concentrated.[21]
마음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간에 대한 생각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집중하고있게 된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책에 관심을 가질 때 시간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떠날 때,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종종 놀라게 됩니다. 모든 시간은 하나의 현재에 왔다가 멈추어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주어졌습니다. 과거(그리고 미래)가 현재로 와서 하나로 뭉칠 때 마음이 집중된다고 합니다.[22]
एतेन भूतेन्द्रियेषु धर्मलक्षणावस्थापरिणामा व्याख्याताः ॥१३॥
etena bhūtendriyeṣu dharmalakṣaṇāvasthāpariṇāmā vyākhyātāḥ
13. By this is explained the threefold transformation of form, time and state, in fine or gross matter and in the organs.
[3.13] 이것은 미세하거나 총체적인 물질과 기관에서 형태, 시간, (공간적으로)상태[23]의 삼중(三重) 변형을 설명합니다.[24]
By the threefold changes in the mind-stuff as to form, time and state are explained the corresponding changes in gross and subtle matter and in the organs. Suppose there is a lump of gold. It is transformed into a bracelet and again into an earring. These are changes as to form. The same phenomena looked at from the standpoint of time give us change as to time. Again, the bracelet or the earring may be bright or dull, thick or thin, and so on. This is change as to state. Now referring to the aphorisms 9, 11 and 12, the mind-stuff is changing into Vrittis — this is change as to form. That it passes through past, present and future moments of time is change as to time. That the impressions vary as to intensity within one particular period, say, present, is change as to state. The concentrations taught in the preceding aphorisms were to give the Yogi a voluntary control over the transformations of his mind-stuff, which alone will enable him to make the Samyama named in III.4.
형태, 시간, 상태(공간)에 관한 마음의 삼중 변화는 총체적이거나 미묘한 물질과 기관의 상응하는 변화를 설명합니다. 금 덩어리가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팔찌로, 다시 귀걸이로 변형됩니다. 이는 형태에 따른 변화입니다. 동일한 현상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에 따른 변화도 나타납니다. 역시 팔찌나 귀걸이는 밝을 수도 있고 칙칙할 수도 있고, 두껍거나 얇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상태에 대한 변경입니다. 이제 구절(verse) 9, 11, 12를 언급하면 마음의 재료가 브리티스(Vrittis)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태의 변화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간을 통과한다는 것은 시간의 변화입니다. 특정 기간, 즉 현재 내에서 강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상태에 대한 변화입니다. 앞의 구절(verse)에서 가르친 집중은 요기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3.4]에 명명된 삼야마(Samyama)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शान्तोदिताव्यपदेश्यधर्मानुपातो धर्मी ॥१४॥
śāntoditāvyapadeśyadharmānupātī dharmī
14. That which is acted upon by transformation, either past, present, or yet to be manifested is the qualified.
[3.14] 과거, 현재 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변화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자격이 있는 것'(자격있음)입니다.
That is to say, the qualified is the substance which is being acted upon by time and by the Samskāras, and getting changed and being manifested always.
즉, '자격있음'은 시간과 삼스카라에 의해 항상 작용하여 변화하는 구현된 실체입니다.
क्रमान्यत्वं परिणामान्यत्वे हेतुः ॥१५॥
kramānyatvaṃ pariṇāmānyatve hetuḥ
15. The succession of changes is the cause of manifold evolution.
[3.15] 변화의 연속은 다양체 진화의 원인입니다.
परिणामत्रयसंयमादतीतानागतज्ञानम् ॥१६॥
pariṇāmatrayasaṃyamād atītānāgatajñānam
16. By making Samyama on the three sorts of change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and future.
[3.16]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
We must not lose sight of the first definition of Samyama. When the mind has attained to that state when it identifies itself with the internal impression of the object, leaving the external, and when, by long practice, that is retained by the mind and the mind can get into that state in a moment, that is Samyama. If a man in that state wants to know the past and future, he has to make a Samyama on the changes in the Samskaras (III.13). Some are working now at present, some have worked out, and some are waiting to work. So by making a Samyama on these he knows the past and future.
우리는 삼야마에 대한 첫 번째 정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대상의 내적 인상과 동일시되어 외적인 것을 떠나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리고 마음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오랜 연습에 의해 그 상태에 (순차적으로)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삼야마입니다.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 과거와 미래를 알고 싶다면, 삼까라스(삼카라스samskaras)의 변화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야 합니다(참고[3.13]). 어떤 사람은 현재 일(연습)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운동(연습)을 했고, 어떤 사람은 일(연습)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에 대해 삼야마를 만들어서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शब्दार्थप्रत्ययानामितरेतराध्यासात्सङ्करस्तत्प्रविभागसंयमात् सर्वभूतरुतज्ञानम् ॥१७॥
śabdārthapratyayānām itaretarādhyāsāt saṃkaras tatpravibhāgasaṃyamāt sarvabhūtarutajñānam
17. By making Samyama on word, meaning and knowledge, which are ordinarily confused, comes the knowledge of all animal sounds.
17. 평소에 혼동되었던 말과 의미 그리고 지식을 삼야마로 만듦게 됨으로써 모든 동물의 소리에 대한 앎이 형성(체득)됩니다.
The word represents the external cause, the meaning represents the internal vibration that travels to the brain through the channels of the Indriyas, conveying the external impression to the mind, and knowledge represents the reaction of the mind, with which comes perception. These three, confused, make our sense-objects. Suppose I hear a word;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next the internal sensation carried to the mind by the organ of hearing, then the mind reacts, and I know the word. The word I know is a mixture of the three — vibration, sensation, and reaction. Ordinarily these three are inseparable; but by practice the Yogi can separate them. When a man has attained to this, if he makes a Samyama on any sound, he understands the meaning which that sound was intended to express, whether it was made by man or by any other animal.
그 말(음성적 울림 또는 진동)은 (소리라는)외적인 원인을 나타내고, 그 의미는 인드리야스의 통로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내적인 진동을 나타내며, 외적인 인상을 마음에 전달하고, 지식은 지각에 이르는 마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혼란스러운 이 세 가지는 우리의 감각 대상을 만듭니다. 내가 어떤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봅니다. 먼저 외적인 진동이 있고, 다음은 청각 기관에 의해 마음으로 전달되는 내적인 감각이 있고, 그 다음은 마음이 반응하고, 나는 그 말을 압니다. 내가 아는 그 말은 진동, 감각, 그리고 반응의 세 가지가 혼합된 것입니다. 보통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없지만, 연습에 의해 요기들은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에 도달했을 때, 어떤 소리에 대해 삼야마를 지으면, 그 소리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든 다른 동물에 의해 만들어졌든,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를 이해합니다.
संस्कारसाक्षात्करणात् पूर्वजातिज्ञानम् ॥१८॥
saṃskārasākṣātkaraṇāt pūrvajātijñānam
18. By perceiving the impressions, (comes) the knowledge of past life.
[3.18] 인상을 지각함으로써 과거(삶)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Each experience that we have, comes in the form of a wave in the Chitta, and this subsides and becomes finer and finer, but is never lost. It remains there in minute form, and if we can bring this wave up again, it becomes memory. So, if the Yogi can make a Samyama on these past impressions in the mind, he will begin to remember all his past lives.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경험은 치타에서 파동의 형태로 오고, 이것은 가라앉고 점점 미세해지지만 결코 잃지 않습니다. 미세한 형태로 거기에 남아 있고, 이 파동을 다시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요기들이 이러한 과거의 인상에 대해 마음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생을 기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प्रत्ययस्य परचित्तज्ञानम् ॥१९॥
pratyayasya paracittajñānam
19. By making Samyama on the signs in another's body, knowledge of his mind comes.
[3.19] 남의 몸에 있는 신호(싸인)를 삼야마로 만듦으로써 그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Each man has particular signs on his body, which differentiate him from others; when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ese signs he knows the nature of the mind of that person.
사람마다 몸에 특별한 표시(신호)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됩니다. 요기가 이 표시(신호)에 삼야마를 만들 때 그 사람의 마음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न च तत् सालम्बनं तस्याविषयीभूतत्वात् ॥२०॥
na ca tat sālambanaṃ tasyāviṣayībhūtatvāt
20. But not its contents, that not being the object of the Samyama.
[3.20] 그러나 (우선)그 내용(을 바로 아는것)은 아닙니다. 삼야마의 대상은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이해하는것이지) 그 내용 자체는 아니라는것입니다.[25]
He would not know the contents of the mind by making a Samyama on the body. There would be required a twofold Samyama, first on the signs in the body, and then on the mind itself. The Yogi would then know everything that is in that mind.
그는 몸에 삼야마를 만들어서 마음의 내용을 알(려고하)지 않습니다. 먼저 몸의 징표(신호)에, 그리고(나서) 마음 자체에 (서로 연관된)이중(二重)의 삼야마가 (비로서)요구됩니다. 그러면 요기들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कायरूपसंयमात्तद्ग्राह्यशक्ति-स्तम्भे चक्षुःप्रकाशासंप्रयोगेऽन्तर्धानम् ॥२१॥
kāyarūpasaṃyamāt tadgrāhyaśaktistambhe cakṣuḥprakāśāsaṃprayoge 'ntardhānam
21. By making Samyama on the form of the body, the perceptibility of the form being obstructed and the power of manifestation in the eye being separated, the Yogi's body becomes unseen.
[3.21] 몸의 형태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태를 가로막는 지각력과 눈에 나타나는 발현력이 분리됨으로써 요기의 몸은 보이지 않(사라지)게 됩니다.(또는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 그 형태를 통해서 그 기능을 바라볼수있게됩니다.)[26][27]
A Yogi standing in the midst of this room can apparently vanish. He does not really vanish, but he will not be seen by anyone. The form and the body are, as it were, separated. You must remember that this can only be done when the Yogi has attained to that power of concentration when form and the thing formed have been separated. Then he makes a Samyama on that, and the power to perceive forms is obstructed, because the power of perceiving forms comes from the junction of form and the thing formed.
이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요기는 분명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삼야마는 이처럼)누구도 (자신과 다른이들도)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형식과 몸은, 그대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것은 형식과 형성된 것이 분리되었을 때, 요기가 그러한 집중력에 도달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형식과 형성된 것의 접합점에서 나오기 때문에, 형식을 지각하는 힘은 방해를 받습니다.
एतेन शब्दाद्यन्तर्धानमुक्तम् ॥२२॥ ※이절은 몇몇 요가수트라 판본에서는 없는 또는 보이지않는(사라진) 절로 언급됩니다. |
सोपक्रमं निरुपक्रमं च कर्म तत्संयमादपरान्तज्ञानमरिष्टेभ्यो वा ॥२३॥
sopakramaṃ nirupakramaṃ ca karma tatsaṃyamād aparāntajñānam ariṣṭebhyo vā
23. Karma is of two kinds — soon to be fructified and late to be fructified. By making Samyama on these, or by the signs called Arishta, portents, the Yogis know the exact time of separation from their bodies.
[3.23] 카르마[31]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곧 결실을 맺게 되는 것과 늦게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삼야마Samyama를 만들거나 아리쉬타arishta[32]라는 신호를 표시함으로써 요기들은 자신의 몸(행동)에서 분리(파생)되는 정확한 시간(확률적 있을수있는 여러 변수들)을 알(예측할) 수 있습니다.
When a Yogi makes a Samyama on his own Karma, upon those impressions in his mind which are now working, and those which are just waiting to work, he knows exactly by those that are waiting when his body will fall. He knows when he will die, at what hour, even at what minute. The Hindus think very much of that knowledge or consciousness of the nearness of death, because it is taught in the Gita that the thoughts at the moment of departure are great powers in determining the next life.
요기가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삼야마를 만들 때, 마음 속에 지금 작용하고 있는 인상과 단지 작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에 대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질(분리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인상을 통해 정확히 압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몇 시에, 심지어 몇 분에 죽을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힌두교인들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지식이나 의식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출발 순간의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기타[33]에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मैत्र्यादिषु बलानि ॥२४॥
maitryādiṣu balāni
24. By making Samyama on friendship, mercy, etc. (I.33), the Yogi excels in the respective qualities.
[3.24] 의리(우정), 연민(자비) 등을 삼야마(Samyama)로 삼음으로써(참고[1.33] ) 요기는 각각의 자질에서 탁월합니다.
बलेषु हस्तिबलादीनि ॥२५॥
baleṣu hastibalādīni
25. By making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others, their respective strength comes to the Yogi.
[3.25] 코끼리와 다른것들의 힘을 동일시(그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함으로써 요기는 코끼리(나 다른것)의 힘을 기대할수있습니다.
When a Yogi has attained to this Samyama and wants strength, he makes a Samyama on the strength of the elephant and gets it. Infinite energy is at the disposal of everyone if he only knows how to get it. The Yogi has discovered the science of getting it.
요기는 이 삼야마에 도달하여 힘을 얻고자 할 때 코끼리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어 얻습니다. 무한한 에너지는 얻을 줄만 알면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기는 얻는 과학을 발견했습니다.
प्रवृत्त्यालोकन्यासात् सूक्ष्म-व्यवहित-विप्रकृष्टज्ञानम् ॥२६॥
pravṛttyālokanyāsāt sūkṣmavyavahitaviprakṛṣṭajñānam
26. By making Samyama on the Effulgent Light (I.36), comes the knowledge of the fine, the obstructed, and the remote.
[3.26] 삼야마를 힘찬 빛(참고[1.36] ) 위에 만들어 줌으로써 미세한 것, 방해받고 있는 것, 멀리 떨어져있는 것에 대한(것이라도 그것에대한) 지식이 드러납니다.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at Effulgent Light in the heart, he sees things which are very remote, things, for instance, that are happening in a distant place, and which are obstructed by mountain barriers, and also things which are very fine.
요기가 마음속의 그 힘찬 빛에 삼야마를 만들 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 그리고 산의 장벽에 의해 막혀 있는 것들(넘어에 있는), 그리고 아주 (눈에 보이지않는)미세한 것들을 봅니다.
भुवनज्ञानं सूर्ये संयमात् ॥२७॥
bhuvanajñānaṃ sūrye saṃyamāt
27. By making Samyama on the sun, (comes) the knowledge of the world.
[3.27] 삼야마를 태양 위에 세움으로써 세상의 지식이 됩니다.
चन्द्रे ताराव्यूहज्ञानम् ॥२८॥
candre tārāvyūhajñānam
28. On the moon, (comes) the knowledge of the cluster of stars.
[3.28] 달에서는 별들의 성단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
ध्रुवे तद्गतिज्ञानम् ॥२९॥
dhruve tadgatijñānam
29. On the pole-star, (comes) the knowledge of the motions of the stars.
[3.29] (북)극성에서는 별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이 나옵니다.
नाभिचक्रे कायव्यूहज्ञानम् ॥३०॥
nābhicakre kāyavyūhajñānam
30. On the navel circle, (comes) the knowledge of the constitution of the body.
[3.30] 배꼽 원에서는 몸의 체질에 대한 지식이 들어옵니다.
कण्ठकूपे क्षुत्पिपासानिवृत्तिः ॥३१॥
kaṇṭhakūpe kṣutpipāsānivṛttiḥ
31. On the hollow of the throat, (comes) cessation of hunger.
[3.31] 목구멍에서, 배고픔의 정지(가 옵니다).
When a man is very hungry, if he can make Samyama on the hollow of the throat, hunger ceases.
사람이 몹시 배고플 때, 목구멍에 삼야마를 만들 수 있다면 배고픔은 그치게 됩니다.
कूर्मनाड्यां स्थैर्यम् ॥३२॥
kūrmanāḍyāṃ sthairyam
32. On the nerve called Kurma, (comes) fixity of the body.
[3.32] 쿠르마[34]라고 불리는 신경(nerve)에, 몸의 고정성.
When he is practising, the body is not disturbed.
수련할 때 몸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मूर्धज्योतिषि सिद्धदर्शनम् ॥३३॥
mūrdhajyotiṣi siddhadarśanam
33. On the light emanating from the top of the head, sight of the Siddhas.
[3.33] 머리 꼭대기[35]에서 나오는 빛에 싯다스가 보입니다.
The Siddhas are beings who are a little above ghosts. When the Yogi concentrates his mind on the top of his head, he will see these Siddhas. The word Siddha does not refer to those men who have become free — a sense in which it is often used.
싯다(들)Siddha(s)는 유령보다 약간 높은 존재입니다. 요기가 머리 꼭대기에 마음을 집중할 때, 그는 이 싯다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싯다(Siddha)라는 단어는 자유로워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प्रातिभाद्वा सर्वम् ॥३४॥
prātibhād vā sarvam
34. Or by the power of Prātibha, all knowledge.
[3.34] 또는 프라티바prātibha의 힘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All these can come without any Samyama to the man who has the power of Pratibha (spontaneous enlightenment from purity). When a man has risen to a high state of Pratibha, he has that great light. All things are apparent to him. Everything comes to him naturally without making Samyama.
이 모든 것은 프라티바(순수로부터의 자발적인 깨달음)[36][37]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삼야마samyama 없이도 올 수 있습니다. 사람이 프라티바(pratibha)라는 높은 경지에 올랐을 때 그 사람은 그 큰 빛을 갖게 됩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백합니다. 삼야마를 만들지 않고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옵니다.
ह्रदये चित्त-संवित् ॥३५॥
hṛdaye cittasaṃvit
35. In the heart, knowledge of minds.
[3.35] 심장(가슴)에는 마음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38][39]
सत्त्वपुरुषयोरत्यन्तासंकीर्णयोः प्रत्ययाविशेषाद् भोगः परार्थत्वात् स्वार्थसंयमात् पुरुषज्ञानम् ॥३६॥
sattvapuruṣayor atyantāsaṃkīrṇayoḥ pratyayāviśeṣo bhogaḥ parārthāt svārthasaṃyamāt puruṣajñānam
36. Enjoyment comes from the non-discrimination of the soul and Sattva which are totally different because the latter's actions are for another. Samyama on the self-centred one gives knowledge of the Purusha.
[3.36] 즐거움은 영혼과 사트바(sattva)[40]의 행위가 서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별(차등)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삼야마는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합니다.
All action of Sattva, a modification of Prakriti characterised by light and happiness, is for the soul. When Sattva is free from egoism and illuminated with the pure intelligence of Purusha, it is called the self-centred one, because in that state it becomes independent of all relations.
빛과 행복을 특징으로 하는 프라크리티prakriti의 변형인 사트바sattva의 모든 행동은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사트바가 이기심에서 벗어나 푸루샤의 순수한 지성으로 조명될 때, 사트바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라고 불립니다.
ततः प्रातिभश्रावणवेदनादर्शास्वादवार्ता जायन्ते ॥३७॥
tataḥ prātibhaśrāvaṇavedanādarśāsvādavārtā jāyante
37. From that arises the knowledge belonging to Pratibha and (supernatural) hearing, touching, seeing, tasting and smelling.
[3.37] 여기에서 프라티바(pratibha)[41]에 속하는 지식과 (인위적인) 듣고, 만지고, 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지식이 나옵니다.
ते समाधावुपसर्गा व्युत्थाने सिद्धयः ॥३८॥
te samādhāv upasargā vyutthāne siddhayaḥ
38. These are obstacles to Samadhi; but they are powers in the worldly state.
[3.38] 이것들은 사마띠(sammadhi)에 장애가 됩니다.[42] 그러나 그들은 세상 국가에서는 권력입니다.
To the Yogi knowledge of the enjoyments of the world comes by the junction of the Purusha and the mind. If he wants to make Samyama on the knowledge that they are two different things, nature and soul, he gets knowledge of the Purusha. From that arises discrimination. When he has got that discrimination, he gets the Pratibha, the light of supreme genius. These powers, however, are obstructions to the attainment of the highest goal, the knowledge of the pure Self, and freedom. These are, as it were, to be met in the way; and if the Yogi rejects them, he attains the highest. If he is tempted to acquire these, his further progress is barred.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요기의 지식은 푸루샤와 마음의 접점을 통해 옵니다. 자연과 영혼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삼야마를 만들고 싶다면 푸루샤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차별이 발생합니다. 그가 그 차별을 갖게 되면, 그는 최고의 천재의 빛인 프라티바(Pratibha)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가장 높은 목표, 순수한 자아에 대한 지식 및 자유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도중에(과도기적으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요기가 그것들을 거부하면 그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합니다. 만약 그가 이것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의 더 이상의 발전은 방해받을 것입니다.
बन्धकारणशैथिल्यात् प्रचारसंवेदनाच्च चित्तस्य परशरीरावेशः ॥३९॥
bandhakāraṇaśaithilyāt pracārasaṃvedanāc ca cittasya paraśarīrāveśaḥ
39. When the cause of bondage of the Chitta has become loosened, the Yogi, by his knowledge of its channels of activity (the nerves), enters another's body.
[3.39] 치타의 속박의 원인이 풀리면 요기는 활동 경로(신경)에 대한 지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몸을 들어갑니다(다룰수있습니다)[43]
(※ 이후부터 보다 초인적인 표현으로 기술되는 구절들의 맥락(context)은 개개의 생명체가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적(개인적)으로 존중되어야한다는 생명존중의 기준을 넘어서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염두하십시오.)
The Yogi can enter a dead body and make it get up and move, even while he himself is working in another body. Or he can enter a living body and hold that man's mind and organs in check, and for the time being act through the body of that man. That is done by the Yogi coming to this discrimination of Purusha and nature. If he wants to enter another's body, he makes a Samyama on that body and enters it, because, not only is his soul omnipresent, but his mind also, as the Yogi teaches. It is one bit of the universal mind. Now, however, it can only work through the nerve currents in this body, but when the Yogi has loosened himself from these nerve currents, he can work through other things.
요기는 자신이 다른 몸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죽은 몸에 들어가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살아있는 몸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정신과 기관을 통제하고 한동안 그 사람의 몸을 통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푸루샤와 자연을 차별하는 요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 몸에 삼야마(Samyama)를 하고 그 몸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기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은 편재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신체의 신경 전류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지만 요기가 이러한 신경 전류에서 벗어나면 다른 작업을 통해 작동할 수 있습니다.
उदानजयाज्जलपङ्ककण्टकादिष्वसङ्ग उत्क्रान्तिश्च ॥४०॥
udānajayāj jalapaṅkakaṇṭakādiṣv asaṅga utkrāntiś ca
40. By conquering the current called Udāna the Yogi does not sink in water or in swamps, he can walk on thorns etc., and can die at will.
[3.40] 웃다나(Udāna)라는 흐름을 정복함으로써 요기는 물이나 늪에 빠지지 않고 가시나무 위를 걸을 수 있으며 마음대로 죽음에 도달할(가사상태일) 수 있습니다.
Udana is the name of the nerve current that governs the lungs and all the upper parts of the body, and when he is master of it, he becomes light in weight. He does not sink in water; he can walk on thorns and sword blades, and stand in fire, and can depart this life whenever he likes.
우다나(웃다나)는 폐와 몸의 모든 윗부분을 관장하는 신경류의 이름으로, 그것을 익히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는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가시와 칼날 위를 걸을 수도 있고, 불 속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원할 때마다 이생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समानजयात् प्रज्वलनम् ॥४१॥
samānajayāj jvalanam
41. By the conquest of the current Samāna he is surrounded by a blaze of light.
[3.41] 현재의 사마나(samāna)[44]를 정복함으로써 그는 빛의 불꽃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Whenever he likes, light flashes from his body.
그가 원할 때마다 그의 몸에서 빛이 번쩍입니다.
श्रोत्रा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द्दिव्यं श्रोत्रम् ॥४२॥
śrotr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d divyaṃ śrotram
42.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ear and the Akasha comes divine hearing.
[3.42] 귀와 아카샤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신성한 청각이 나옵니다.
There is the Akasha, the ether, and the instrument, the ear. By making Samyama on them the Yogi gets supernormal hearing; he hears everything. Anything spoken or sounded miles away he can hear.
에테르인 아카샤와 도구인 귀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삼야마(Samyama)를 함으로써 요기는 초인적인 청력을 얻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듣습니다.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모든 말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कायाकाशयोः सम्बन्धसंयमाल्लघुतूलसमापत्तेश्चाकाशगमनम् ॥४३॥
kāyākāśayoḥ saṃbandhasaṃyamāl laghutūlasamāpatteś cākāśagamanam
43. By making Samyama on the relation between the Akasha and the body and becoming light as cotton-wool etc., through meditation on them, the Yogi goes through the skies.
[3.43] 아카샤와 몸의 관계에 대해 삼야마를 하고, 명상을 통해 솜처럼 가벼워짐으로써 요기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This Akasha is the material of this body; it is only Akasha in a certain form that has become the body. If the Yogi makes a Samyama on this Akasha material of his body, it acquires the lightness of Akasha, and he can go anywhere through the air. So in the other case also.
이 아카샤는 이 몸의 재료입니다. 몸이 된 것은 특정한 형태의 아카샤일뿐입니다. 요기가 몸의 이 아카샤 물질에 삼야마(Samyama)를 하면 아카샤의 가벼움을 얻게 되고 공기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बहिरकल्पिता वृत्तिर्महाविदेहा ततः प्रकाशावरणक्षयः ॥४४॥
bahir akalpitā vṛttir mahāvidehā tataḥ prakāśāvaraṇakṣayaḥ
44. By making Samyama on the "real modifications" of the mind, outside of the body, called great disembodiedness, comes disappearance of the covering to light.
[3.44] 몸 밖에서 마음의 '실질적인 변형'을 삼야마로 얻음으로써, 큰 탈육신이라 불리며 덮개가 빛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The mind in its foolishness thinks that it is working in this body. Why should I be bound by one system of nerves, and put the Ego only in one body, if the mind is omnipresent? There is no reason why I should. The Yogi wants to feel the Ego wherever he likes. The mental waves which arise in the absence of egoism in the body are called "real modifications" or "great disembodiedness". When he has succeeded in making Samyama on these modifications, all covering to light goes away, and all darkness and ignorance vanish. Everything appears to him to be full of knowledge.
어리석은 마음은 자신이 이 몸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편재한다면 왜 내가 하나의 신경 체계에 묶여 있고 자아를 하나의 몸에만 두어야 합니까?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 어디에서나 자아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신체에 이기심이 없을 때 발생하는 정신적 파동을 "진정한 변형" 또는 "큰 탈육체화"라고 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정을 통해 삼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모든 빛을 덮는 것이 사라지고 모든 어둠과 무지가 사라집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स्थूल-स्वरूप-सूक्ष्मा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भूतजयः ॥४५॥
sthūlasvarūpasūkṣm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bhūtajayaḥ
45. By making Samyama on the gross and fine forms of the elements, their essential traits,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mastery of the elements.
[3.45] 요소의 (커다란)총체적이거나 (아주)미세한 형태, 요소의 본질적인 속성(property), 요소 안에 있는 구나스(gunas)[45]들의 내재 및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삼야마를 만들면 요소의 숙달이 이루어집니다.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 elements, first on the gross, and then on the finer states. This Samyama is taken up more by a sect of the Buddhists. They take a lump of clay and make Samyama on that, and gradually they begin to see the fine materials of which it is composed, and when they have known all the fine materials in it, they get power over that element. So with all the elements. The Yogi can conquer them all.
요기들은 처음에는 총체적인 상태에서, 다음에는 미세한 상태에서 삼야마를 만듭니다. 이 삼야마는 (종교적으로는)불교 종파가 더 많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점토 덩어리를 가지고 그 위에 삼야마를 만들고, 점차 그 구성의 미세한 물질을 보기 시작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미세한 물질을 알게 되면 그 원소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모든 원소를 가지고 요기들은 그들을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
ततोऽणिमादिप्रादुर्भावः कायसम्पत्तद्धर्मानभिघातश्च ॥४६॥
tato 'ṇimādiprādurbhāvaḥ kāyasaṃpat taddharmānabhighātaś ca
46. From that comes minuteness and the rest of the powers, "glorification of the body," and indestructibleness of the bodily qualities.
[3.46] 그것으로부터 미세함과 나머지 힘들 '몸의 영광' 그리고 신체의 자질들에 대한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나옵니다.
This means that the Yogi has attained the eight powers. He can make himself as minute as a particle, or as huge as a mountain, as heavy as the earth, or as light as the air; he can reach anything he likes, he can rule everything he wants, he can conquer everything he wants, and so on. A lion will sit at his feet like a lamb, and all his desires will be fulfilled at will.
이것은 요기가 팔력(八力)[46]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을 입자처럼 미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산처럼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땅처럼 무겁게 만들 수도 있고, 공기처럼 가볍게 만들 수도 있고,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스릴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정복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양처럼 그의 발 앞에 앉아 있을 것이고, 그의 모든 욕망은 마음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रूप-लावण्य-बल-वज्रसंहननत्वानि कायसम्पत् ॥४७॥
rūpalāvaṇyabalavajrasaṃhananatvāni kāyasaṃpat
47. The "glorification of the body" is beauty, complexion, strength, adamantine hardness.
[3.47] '몸의 영광'은 아름다움, 혈색, 힘, 아다만틴(철석같은) 경도[47][48]입니다.
The body becomes indestructible. Nothing can injure it. Nothing can destroy it until the Yogi wishes. "Breaking the rod of time he lives in this universe with his body." In the Vedas it is written that for that man there is no more disease, death or pain.
육체는 파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요기가 바라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시간의 막대를 그의 몸으로 부수어라." 베다(Veda)에는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질병도, 죽음도, 고통도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
ग्रहण-स्वरूपास्मितान्वयार्थवत्त्वसंयमादिन्द्रियजयः ॥४८॥
grahaṇasvarūpāsmitānvayārthavattvasaṃyamād indriyajayaḥ
48. By making Samyama on the objectivity and power of illumination of the organs, on egoism, the inherence of the Gunas in them and on their contributing to the experience of the soul, comes the conquest of the organs.
[3.48] (신체)기관들을 조명하는 객관성과 힘, 자기절제의, 그 안에 있는 구나들(guṇas)의 독립성, 영혼의 경험에 기여하는 그들의 힘으로 삼야마를 만들면서 기관들의 정복이 옵니다.
In the perception of external objects the organs leave their place in the mind and go towards the object; this is followed by knowledge. Egoism also is present in the act. When the Yogi makes Samyama on these and the other two by gradation, he conquers the organs. Take up anything that you see or feel, a book for instance; first concentrate the mind on it, then on the knowledge that is in the form of a book, and then on the Ego that sees the book, and so on. By that practice all the organs will be conquered.
외부 대상을 지각할 때 기관은 마음 속의 자리를 떠나 대상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이 따릅니다. 행위에는 (자기절제가 필요한)이기주의도 존재합니다. 요기가 이들과 다른 두 가지에 단계적으로 삼야마를 만들 때, 그는 기관을 정복합니다. 예를 들어 책과 같이 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가져오십시오. 먼저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는 책 형태의 지식에, 그 다음에는 책을 보는 자아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장기들(organs)이 정복될 것입니다.
ततो मनोजवित्वं विकरणभावः प्रधानजयश्च ॥४९॥
tato manojavitvaṃ vikaraṇabhāvaḥ pradhānajayaś ca
49. From that comes to the body the power of rapid movement like the mind, power of the organs independently of the body, and conquest of nature.
[3.49] 거기서부터 마음처럼 빠른 움직임의 힘, 몸과 독립된 기관의 힘, 자연을 정복하는 힘이 몸으로 나옵니다.
Just as by the conquest of the elements comes glorified body, so from the conquest of the organs will come the above-mentioned powers.
요소를 정복하면 영광스러운 몸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관을 정복하면 위에서 언급한 능력이 나올 것입니다.
सत्त्वपुरुषान्यताख्यातिमात्रस्य सर्वभावाधिष्ठातृत्वं सर्वज्ञातृत्वञ्च ॥५०॥
sattvapuruṣānyatākhyātimātrasya sarvabhāvādhiṣṭhātṛtvaṃ sarvajñātṛtvaṃ ca
50. By making Samyama on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
[3.50]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의 차별을 삼야마(Samyama)로 만듦으로써 전능함과 전지함이 나옵니다.
When nature has been conquered,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Purusha and nature realised — that the Purusha is indestructible, pure and perfect — then come omnipotence and omniscience.
자연이 정복되고 푸루샤와 자연의 차이, 즉 푸루샤는 불멸이고 순수하며 완벽하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전능함과 전지함이 찾아옵니다.
तद्वैराग्यादपि दोषबीजक्षये कैवल्यम् ॥५१॥
tadvairāgyād api doṣabījakṣaye kaivalyam
51. By giving up even these powers comes the destruction of the very seed of evil, which leads to Kaivalya.
[3.51] 이러한 힘조차 포기함으로써 카이발랴(kaivalya)로 이어지는 악의 씨앗 자체가 파괴됩니다.
He attains aloneness, independence, and becomes free. When one gives up even the ideas of omnipotence and omniscience, there comes entire rejection of enjoyment, of the temptations from celestial beings. When the Yogi has seen all these wonderful powers, and rejected them, he reaches the goal. What are all these powers? Simply manifestations. They are no better than dreams. Even omnipotence is a dream. It depends on the mind. So long as there is a mind it can be understood, but the goal is beyond even the mind.
그는 고독과 독립을 얻고 자유로워집니다. 전능함과 전지함에 대한 관념조차 포기할 때, 즐거움과 천상의 존재로부터 오는 유혹을 완전히 거부하게 됩니다. 요기가 이 모든 놀라운 힘을 보고 거부하면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 힘은 다 무엇입니까? 단순히 표현(에 지나지않는것)입니다. 그것은 꿈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전능함도 꿈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한 이해할 수 있지만 목표는 마음조차 초월합니다.
स्थान्युपनिमन्त्रणे सङ्गस्मयाकरणं पुनरनिष्टप्रसङ्गात् ॥५२॥
sthānyupanimantraṇe saṅgasmayākaraṇaṃ punar aniṣṭaprasaṅgāt
52. The Yogi should not feel allured or flattered by the overtures of celestial beings for fear of evil again.
[3.52] 수행자는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천상의 존재들의 제안에 유혹을 받거나 우쭐해져서는 안 됩니다.
There are other dangers too; gods and other beings come to tempt the Yogi. They do not want anyone to be perfectly free. They are jealous, just as we are, and worse than us sometimes. They are very much afraid of losing their places. Those Yogis who do not reach perfection die and become gods; leaving the direct road they go into one of the side streets, and get these powers. Then, again, they have to be born. But he who is strong enough to withstand these temptations and go straight to the goal, becomes free.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신들과 다른 존재들이 요기를 유혹하러 옵니다. 그들은 누구도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질투심이 많고 때로는 우리보다 더 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봐 매우 두려워합니다.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요기들은 죽어 신이 됩니다. 직선 도로를 벗어나면 옆길 중 하나로 들어가 이러한 권한을 얻습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목표를 향해 직진할 만큼 강한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
क्षण-तत्क्रमयोः संयमाद्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३॥
kṣaṇatatkramayoḥ saṃyamād vivekajaṃ jñānam
53. By making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its precession and succession comes discrimination.
[3.53] 삼야마를 시간의 입자와 세차 그리고 연속으로 만들면 차별(변별력)이 생깁니다.
How are we to avoid all these things, these Devas, and heavens, and powers? By discrimination, by knowing good from evil. Therefore a Samyama is given by which the power of discrimination can be strengthened. This is by making a Samyama on a particle of time, and the time preceding and following it.
우리는 이 모든 것, 이 천신들과 하늘들과 권세들을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분별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함으로써. 그러므로 차별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삼야마(Samyama)가 주어집니다. 이는 시간의 입자와 그 전후의 시간에 따라 삼야마를 만드는 것입니다.
जाति-लक्षण-देशैरन्यताऽनवच्छेदात्तुल्ययोस्ततः प्रतिपत्तिः ॥५४॥
jātilakṣaṇadeśair anyatānavacchedāt tulyayos tataḥ pratipattiḥ
54. Those things which cannot be differentiated by species, sign, and place, even they will be discriminated by the above Samyama.
[3.54] 종(species), 기호, 장소로 구별할 수 없는 것들도 위의 삼야마에 의해 구별될 것입니다.
The misery that we suffer comes from ignorance, from non-discrimination between the real and the unreal. We all take the bad for the good, the dream for the reality. Soul is the only reality, and we have forgotten it. Body is an unreal dream, and we think we are all bodies. This non-discrimination is the cause of misery. It is caused by ignorance. When discrimination comes, it brings strength, and then alone can we avoid all these various ideas of body, heavens, and gods. This ignorance arises through differentiating by species, sign, and place. For instance, take a cow. The cow is differentiated from the dog by species. Even with the cows alone how do we make the distinction between one cow and another? By signs. If two objects are exactly similar, they can be distinguished if they are in different places. When objects are so mixed up that even these differentiae will not help us, the power of discrimination acquired by the above-mentioned practice will give us the ability to distinguish them. The highest philosophy of the Yogi is based upon this fact, that the Purusha is pure and perfect, and is the only "simple" that exists in this universe. The body and mind are compounds, and yet we are ever identifying ourselves with them. This is the great mistake that the distinction has been lost. When this power of discrimination has been attained, man sees that everything in this world, mental and physical, is a compound, and, as such, cannot be the Purusha.
우리가 겪는 불행은 무지, 즉 현실과 비현실을 차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꿈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영혼은 유일한 현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몸은 비현실적인 꿈이고, 우리는 우리 모두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별 중지가 불행의 원인입니다. 무지로 인해 발생합니다. 차별이 오면 힘이 생기고, 그때만이 우리만이 몸, 하늘, 신에 대한 이 모든 다양한 관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종(species), 기호, 장소를 구별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소를 생각해 보세요. 소는 종(species)에 따라 개와 구별됩니다. 소들만 있어도 한 소와 다른 소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표시(sign기호)로(가능합니다). 두 물체가 완전히 유사할 경우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 너무 뒤섞여 있어 이러한 구별조차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위에서 언급한 실천을 통해 얻은 식별의 힘은 우리에게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입니다. 요기의 가장 높은 철학은 푸루샤가 순수하고 완벽하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단순'(simple)이라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몸과 마음은 복합물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별성을 상실한 큰 실수입니다. 이러한 차별의 힘이 달성되면 인간은 이 세상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것이 복합물이므로 푸루샤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तारकं सर्वविषयं सर्वथाविषयमक्रमञ्चेति विवेकजं ज्ञानम् ॥५५॥
tārakaṃ sarvaviṣayaṃ sarvathāviṣayam akramaṃ ceti vivekajaṃ jñānam
55. The saving knowledge is that knowledge of discrimination which simultaneously covers all objects, in all their variations.
[3.55] 구원의 지식은 모든 대상과 모든 변형을 동시에 포괄하는 변별[49]에 대한 지식입니다.
Saving, because the knowledge takes the Yogi across the ocean of birth and death. The whole of Prakriti in all its states, subtle and gross, is within the grasp of this knowledge. There is no succession in perception by this knowledge; it takes in all things simultaneously, at a glance.
구원은 지식이 요기를 탄생과 죽음의 바다 건너편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미묘하고 총체적인 모든 상태의 프라크리티 전체가 이 지식의 이해 범위 내에 있습니다. 이 지식에 의한 지각에는 연속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한 눈에 파악합니다.
सत्त्वपुरुषयोः शुद्धिसाम्ये कैवल्यमिति ॥५६॥
sattvapuruṣayoḥ śuddhisāmye kaivalyam iti
56. By the similarity of purity between the Sattva and the Purusha comes Kaivalya.
[3.56] 사트바(Sattva)와 푸루샤(Purusha) 사이의 순수성의 유사성에 의해 카이발야(Kaivalya)가 옵니다.
When the soul realises that it depends on nothing in the universe, from gods to the lowest atom, that is called Kaivalya (isolation) and perfection. It is attained when this mixture of purity and impurity called Sattva (intellect) has been made as pure as the Purusha itself; then the Sattva reflects only the unqualified essence of purity, which is the Purusha.
영혼이 신에서 가장 낮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카이발야Kaivalya(고립) 및 (동시에 원자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서로 연결되있다는 그 반대편의 지식도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것. 이것을)완전이라고 합니다. 사트바(지성,이성)라고 불리는 순수함과 불순함의 혼합물이 푸루샤 자체만큼 순수해졌을 때 달성됩니다. 그러면 사트바는 순수함의 무조건적인 본질, 즉 푸루샤만을 반영합니다.
- ↑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1]
- ↑ 마음 집중 또는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 ध्यान dhyāna meditation명상(묵상contemplation, thought생각(의식,의지), reflection 반영(반사상)
- ↑ 과학적 사고(원리)
- ↑ 참고[3.13] 삼야마(संयम saṃyama) = 변수(variable變數)
- ↑ 명상(meditation)영적 목적을 위해 또는 이완 방법으로 침묵 속에서 또는 소리(청각)의 도움을 받아 깊이 생각하거나 일정 시간 동안 마음을 집중하는 것. 묵상(contemplation) 무언가에 몰입해(생각에잠겨)서 이를 바라보(듣)는 행위.
-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 -삼다(국어사전)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어 자기와 관계있는 것으로 만들다. -삼다 [동사]( ~을 ~으로)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거나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가정하다.
- ↑ 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아 사마띠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무언가로 삼지 않음으로서 삼는 이것도 (씨없는)사마띠입니다. 그리고 사마띠의 삼(는)다는 행위조차도 푸루샤(purusha)앞에서는(때가 되면) 한줌의 먼지같은 한점이 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라집니다.그러나 그때가 될때까지는 질량덩어리로 잉태된 고귀한 의무를 다합니다.
- ↑ 수련 또는 실천
- ↑ [3.13]참고
- ↑ 변수(variable變數) 또는 가능성(possibility)
- ↑ 뜻은 말의 단어가 표상되는 그 (일대일대응되는)대상이며 뇌신경의 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단어)로 발음되기전의 상태입니다.
- ↑ gross 전체(합),총체
- ↑ [참고] 팔지체 아쉬탕가 [2.29]
- ↑ निर्विकल्प nirvikalpa
- ↑ 태워진(fry) 불에 볶다. 기름에 튀기다. 여기서는 (씨를)말리다 , (정당하게)흡수되(소멸한)로 이해할수있다.
- ↑ 참고 [1.17]
- ↑ 반사상 reflection
- ↑ 초점을 맞추는 성질(또는 초점이 맞추어지는 성질) , 참고 [1.2]
- ↑ 심리학적인 또는 원근법의 소실점(또는 수평선)
- ↑ The distinction among the three kinds of concentration mentioned in aphorisms 9, 11 and 12 is as follows: In the first, the disturbed impressions are merely held back, but not altogether obliterated by the impressions of control which just come in; in the second, the former are completely suppressed by the latter which stand in bold relief; while in the third, which is the highest, there is no question of suppressing, but only similar impressions succeed each other in a stream. —Ed.
- ↑ 구절 9, 11, 12에 언급된 세 가지 종류의 집중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방해받은 인상은 단지 (하나로)억제될 뿐이며 지금 들어온 통제의 인상에 의해 완전히 제거된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어 대담한 안도감(압도감)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가장 높은 세 번째에서는 억제할 여지가 없으며 유사한 인상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에드.
- ↑ 공간속에서의 상황,상태
- ↑ 현대요가는 이것을 과학적방법론의 절차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 이해해볼수있습니다.
- ↑ 치타는 다양한 브리티스를 만들수있지만 그것(치타)을 삼야마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지금 이것은 그것(치타가 삼야마를 (합리적으로)담을수있도록 수련하는것)을 가리킵니다.
- ↑ 조각가는 거대한 자연의 돌덩이 앞에서 생각만으로 조각상 작업을 시작하고 진행할수있습니다.
- ↑ 이미 가득차 그릇은 더이상 어떤것도 담을수없게 됩니다. 절반이 채워진 그릇은 나머지 절반에서 자유롭습니다. 담겨진것이 모두 사라진 빈공간의 그릇은 모든것이 가능합니다.
- ↑ saṃyam संयम् to hold together(함께 붙잡다),guide(안내하다),(네트워크를)to present with(제시하다)
- ↑ 소리는 청각을 통해 뇌에 정보를 만들어 놓습니다. 소리,청각,(언어)정보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역시)삼중의 삼야마의 대상입니다. 삼야마는 모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사라지게합니다)
- ↑ 참고[3.17]
- ↑ कर्म karma(n)कर्मन् 특별한 임무,제사의례절차, 행위에서의 작업(과정)의 결과(consequence)
- ↑ ariṣṭa(अरिष्ट)proof against injury or damage(손상이나 부상에대한 증거), secure(안전), safe(안심) 여기서는 sukha(सुख)의 뜻 safe(안심,안전,편안함)
- ↑ 바가바드 기타 (भगवद्गीता)Bhagavad Gītā
- ↑ kūrma कूर्म 거북이 또는 (물 위를 헤엄치는 거북이로 간주되는)지구(의 별칭) 여기서는 특히 생물체로서 거북이(의 느린 동작)
- ↑ 앞이마(미간사이) 또는 머리 후광
- ↑ 프라티바(또는 쁘라띠바 pratibha प्रतिभ wise(현명한), intelligent(지적인)
- ↑ 좋아하는 또는 염감받는 또는 선천적으로(타고난) 또는 기타 이와같이 쉽게 접근하는 것들
- ↑ 브리티스(vrittis)는 치타(chitta)를 낳고 치타는 삼야마(samyama)를 낳고 삼야마는 푸루샤(purusha)를 보여줍니다.
- ↑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것 사랑하는이가 사랑하는이에 연민을 토해내는것 이러한 맥락(context)의 궁극의 존재가 푸루샤(purusha)입니다. 과연 푸루샤(purusha)가 대자연의 흐름을 벗어난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위해 죽는다는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밝히)비추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진리와 푸루샤(purusha)가 관련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푸루샤(purusha)일리가 없습니다. 죽음어야만 다시 사는 희생과 연민만이 완전한 동물(animal)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신(god)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모호한 모두 다 시간이 흐를수록 망가져가는 인간을 비로서 인간답게 하는 것 그것만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빛나는 가냘픈 한줄기 실날같은 빛 바로 푸루샤(purusha)의 존재 이유여야합니다.
- ↑ सत्त्व being, existence, entity, reality (ईश्वर-स्°, ‘the existence of a Supreme Being’) 궁극적인 존재, 존재를 존재케하는 존재(있다는것을 있게하는 그 어떤 있는것)
- ↑ प्रातिभ intuitive, divinatory 직관, 예측
- ↑ 인지기능(삼야마)과 정서(사마띠=삼다)는서로 다르지만 서로 연합해서 하나입니다.
- ↑ 하나를 알면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것을 이해할수있습니다. 하나가 그 시작입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 ↑ समान being (present)존재 = सत् sat
- ↑ guṇa गुण 줄(thread 또는 string) 여기서는 기능(method 또는 function)
- ↑ 여덟가지(팔지체 또는 아쉬탕가) 수행의 결과
- ↑ (중력이 한곳으로 모이면) 몸이 단단해 집니다. [2.46]참고
- ↑ [참고]vajra वज्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the hard or mighty one) 또는 천둥(thunderbolt)
- ↑ 변별(=구별=차별=차이)은 일대일대응을 사용할때만이 대상(정보)에 접근해 갈수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것과 또다른 그 어떤것의 반대편에 있는것으로서 A=B(A는B이다) 이거나 또는 A ≠ C(A는C가 아니다)라는 사실로부터 삼단논법으로 확인할수있는 확장된 정보(따라서 A≠C이므로 B는C가 아니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