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업을 이으려
그것은 내가 ○○사(社)에서 일을 볼 때의 일이니까, 벌써 반 10년이 지난 옛날 일이외다.
그때 ○○사에 탐방 기자로 있던 나는, 봄도 다 가고 여름이라 하여도 좋을 어떤 더운 날 사의 임무를 띠고 어떤 여자를 한 사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로 동북쪽으로 서너 정거장 더 가서 내려서도 한 30리나 걸어가야 할 이름도 없는 땅으로서 본래는 사에서도 그런 곳은 가볼 필요도 없다고 거절한 것이지만, 그 전달에 내가 어떤 귀족 집안의 분규를(아직 신문사에서도 모르는 것을) 얻어내어 잡지에 게재하여 그 때문에 잡지의 흥정이 괜찮았으므로 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하였습니다.
사건은 그때 신문에도 다치키리로 한 비극으로 몇 회를 연하여 발표된 주지의 사실인지라, 특별히 방문까지 안 하더라도 넉넉한 일이지만 그때는 마침 다만 하루라도 교외의 시원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던 때에 겸하여 함흥까지 가는 친구를 전송도 할 겸 거기까지 가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사실을 자백하자면 신문을 참조해가면서 벌써 방문도 하기 전에 기사까지 모두 써 두었던 것으로서 말하자면 이 ‘방문’이란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함흥 가는 벗을 기차에서 작별하고 고요한 촌길에 나선 때는 아직 아침 서늘한 바람이 오전 10시쯤이었습니다.
30리라는 길이 이렇게도 먼지, 사실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킨 전차망 가운데 서 길러난‘도회 사람’이란 것은 길 걷는 데 나서면 무능자였습니다. 발이 아프고 다리가 저리고 눈이 저절로 감기고……. 극단으로 말하자면, 나는 구두를 발명한 사람을 몇 백 번 저주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오후 2시쯤에야 겨우 그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이라 하는 것은 〉모양으로 산이 둘러막힌 구석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앞에는 밤나무와 수양버들과 샘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산을 끼고 역시 밤나무와 포도넝쿨이 무성히 얽혀 있는 외딴 조그마한 기와집이었습니다. 초라하나마 대문도 달리고 흙담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썩어지고 무너져가는 일견 빈집같이 보이는 쓸쓸한 집이었습니다.
쓸쓸히 닫겨 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매, 이 집에 조화되지 않는 화려한 화단이 뜰을 장식하였고 그 화단에서 꽃을 가꾸고 있던 허연 노인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이 댁이 최봉선 씨 댁이오니까?”
이렇게 묻는 나의 쾌활한 소리에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그냥 보고만 있 다가,
“어디서 오셨소?”
하고 묻습니다. 나는 얼결에 서울서 왔노랄까, 잡지사에서 왔노랄까, 주저 하고 있을 때에 어두컴컴한 건넌방에 드리운 발이 걷어지며 젊은 여인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를 찾으세요?”
“최봉선 씨네 댁이 여긴가요?”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
으로 끝을 낼까 어떤 잡지사라고까지 할까 하는 동안에 방 안에 있던 여인 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경애 씨 아니세요?”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나설 줄은 뜻도 안 하였습니다. 그래서 놀란 마음과 놀란 눈을 그리로 향할 때에, 나는 거기서 나의 소학과 중학의 동창생이었고, 같은 해에 ○○여중학교를 졸업한 최화순을 발견하였습니다. 졸업생들의 자축회를 끝낸 뒤에,
“또 보자.”
의 한마디를 최후로 그 이래 7년을 만나지 못하였던 화순을 보았습니다.
조선 명문의 출생인 그는 그 뒤에 역시 어떤 명문에 시집을 갔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밥벌이에 분주한 나는 그 뒤의 그의 거처를 알아보려고도 안 하였습니다. 이래 7년, 서로 종적을 모르던 두 사람이 뜻밖에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 화순, 웬일이에요?”
“들어와요. 어떻게 예까지 찾아왔세요?”
순간에 나는 모든 일을 다 알아챘습니다.
내가 잡지사의 일로 찾아보려던 최봉선이는, 즉 나의 동창생이고 나의 친구인 최화순 그 사람이었습니다.‘봉선’은 ‘화순’의 아명이었고 민적의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의의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이 방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신문에 발표된 사실을 읽고도 아직 ‘봉선’을 ‘화순’으로는 뜻도 안 하였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여중학교의 졸업생, 최 판서의 딸 미인 이만큼이나 , , 신문지가 가르쳐주었는데도 봉선이를 즉 화순 인 줄 몰랐던 것은 오히려 웬일이었을까. 더구나 그의 아명이 봉선인 줄까지 알던 내가…….
아니 거기 대하여서도 상당히 변명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신문 지상에 발표된 사실은 너무도 엄청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잘 아는 최화순이와 신문 지상에 나타난 최봉선이의 사이에는 너무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친구 화순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 신문에 발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오래간만이구려.”
“몇 해 만이오?”
“7년? 8년?”
“아마, 그렇겐 넉넉히 될걸.”
이러한 인사가 서로 사귀어진 뒤에는 우리사이에는 지나간 옛날의 학생 시대의 추억담이 꽃피었습니다. 꿈과 같고 꿀과 같은 지나간 해의 이야기에…….
그러나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 범위에서는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마친 뒤로부터 오늘까지의 생활에 대하여서는, 그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나도 또한 물어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시겠지요.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무엇이외 까. 봉선이를 만나서 그의 이즈음의 생활이며, 또는 세상을 한동안 떠들게 한 그의 시집살이의 말로며를 물어보아가지고 그것을 잡지에 게재하려던 것 이 나의 목적이 아닙니까. 멀리 발이 부르트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봉선이 의 이즈음의 살림을 들으려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내가 왜 그에게 이즈음 의 살림을 물어보려도 안 합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차마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봉선’이가 ‘화순’ 이와 동일인아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신문 지상에 게재된 그의 소위 사실이라는 것이 모두 엉뚱한 오해인 줄을 알았습니다.
거기서 무슨 커다란 착오가 있는 것을 짐작하였습니다. 적어도 무슨 무서운 트릭이 있는 것을 짐작하였습니다.
간통? 화순이와 같이 이지에 밝은 여인이 과연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겠 습니까? 정열적인 사람이면 모르겠거니와, 이지의 덩어리와 같은 하순에게는 절대로 그런 행동은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더구나 추상같은 엄한 규율 아래서 길러나고 추상같은 엄한 집안에 시집간 그로서, 그런 행동을 하였다고는 화순을 아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외다.
신문 기사에 의하건대, 그는 그런 누명을 쓰고 시집을 쫓겨올 때에도 한마디의 변명도 안 하였다 합니다. 찾아간 신문기자들은 다만 쓸쓸한 웃음을 볼 뿐 한마디의 이야기도 못 들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 사회의 오해는 이 ‘무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침묵’도 그의 성격에서 자아낸 것으로서, 인종이라 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덕이라는 가정교육 아래서 길러난 그인지라 온갖 트릭을 무서운 참을성으로 참아왔을 것이외다. 모든 것은 내가 불초인 까닭이다, 이러한 문제가 일어난 것도 내가 불초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종적 태도로써 그는 아직껏 참아왔을 것이외다. 그의 초췌한 얼굴은 그가 얼마나 분하고 억울한 것을 참아왔는지를 증명합니다. 온갖 사정을 서로 통할 만한 벗에게도 불평의 한마디를 사뢰지 않는 그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지와 온순으로 아름답게 조화된 그의 얼굴은 몇 해 동안의 인종적 생활에 무섭게도 야위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이즈음의 그의 생활 혹은 당한 일을 물으면 무얼 합니까.
그는 다만 쓸쓸한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 삼을 뿐이겠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내가 못난 까닭이지.”
하고는 한숨을 내쉴 따름이겠습니다.
“화순, 지난 일은 다 꿈 같지?”
한 토막의 추억담이 끝이 난 뒤에 나는 이렇게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참, 꿈이야.”
“다시 한번 그런 때를 만나보고 싶지 않아?”
“글쎄…… 왜 그런지 외려 난 하루바삐 늙어 죽고 싶어.”
그는 한숨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왜? 하고 물으려고 하던 나는 입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나가면 저절로 그의 이즈음의 생활에까지 말이 미치겠습니다. 그로서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없겠지만 나도 또한 그 이야기가 듣기가 싫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돌아가도록 절대로 이 문제는 다치지 않으려 작정하였습니다.
저녁때 행랑 사람이며 심부름하는 사람이 없는 그는, 손수 저녁을 지으러 부엌에 나갔습니다. 그 기회를 타서 나는 그의 사건이 발표된 신문들을 백 에서 꺼내가지고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하여 내려다보이는 초라한 뜰에 바가지며 쌀을 들고 들락날락 하는 그를 간간 바라보면서 신문을 폈습니다.
‘귀족가 내의 추문.’ ‘미인의 말로.’ ‘세 겹 대문 안의 비밀.’ 이러한 엉뚱한 제목 아래 그의 사건은 소설화하여 다치키리로 세회를 연하 여 게재되었습니다.
그 기사에 의지하면…….
봉선이는 재산과 명예를 겸비한 최 판서의 외딸로서 일찍이 어머니는 여의 었으나 자부(慈父)의 사랑 아래 길러난 어여쁜 처녀였다. 그러나 온갖 영화는 한때의 꿈이라, 그 집의 가산도 아버지가 어떤 광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때부터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여중학교를 졸업한 열여덟 살 적에는 재산보다는 오히려 빚이 많아지게까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가 스무 살 나는 해에 그는 그의 아버지가 판서 시대에 같이 판서로 있던 M가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들에서 자유로이 놀던 아름다운 새 한 마리는 세 겹 대문 안에 깊이 감추어진 ‘조롱 속의 새’가 되었다.
1년은 무사히 지났다. 2년도 무사히 지났다. 3년, 4년까지도 무사히 지났다. 그러나 한때 들의 넓음과 자유로움을 맛본‘새’는 조롱 속에서 끝끝내 참을 수가 없었다. 조롱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할망정, 적어도 조롱 속에 서라도 어떤 위안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M가의 호협한 기풍을 타고난 그 이 남편의 밤낮 요릿집과 기생집에만 묻혀 있고 집안에는 돌아오지를 않으매, 한참 젊은 나이의 봉선은 어떻게든 자기의 위안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몸은 세 겹 대문 안에 갇혀서 자유로이 나다닐 길이 없으니 그는 자기의 위안을 어떤 곳에서 찾을꼬.
금년 정월 초승께다. 달도 없는 침침한 깊은 밤, 혼자 있어야 할 며느리 (봉선)의 방에서 뛰쳐나온 한 괴한이 있었다.
명예와 가문을 존중히 여기는 집안인지라, 이때의 일은 그다지 문제가 커지지 않고 스러지고 말았다. M판서의 사랑채까지도 이 소문은 안 나오고 말았다.
또 석 달은 지났다.
봉선의 남편 되는 사람은 어떤 혼이 들었던지 만 3년 만에 봉선의 방에 들어왔다. 밤은 깊어 고요한 삼경에 그는 문득 윗목의 인기척에 펄떡 깼다.
“거 누구냐?”
한마디뿐, 윗목의 괴한은 문을 박차고 달아났다.
문제는 이에 다시 커졌다. 잠시 꺼지려던 불은 다시 일어섰다.
분규에 분규. 한 달 동안을 위아래 어지럽게 지낸 M집안은 5월 초승께야 겨우 문제가 낙착되었다. 그리고 결과로서는 봉선은 자기 본가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최 판서는 온갖 제 재산을 채권자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군 ○○산 아래 있는 산장으로 홀로 가서 늙은 몸을 외롭게 지내는 때였다. 봉선의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봉선은 그리로 갔다.
머리를 수그리고 외로이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아름다운 새 한 마리. 역시 머리를 수그리고 이를 맞아들인 늙은 명문, 이 두 배우의 장래의 연출하려는 비극은 어떠할까. 우리는 괄목하고 그를 기다리자.
신문 기사 특유의 과장적 동정의 태도로 신문 지상에 나타난 그의 사건은 대략 이러하였습니다.
저녁때부터 흐려오던 일기는 밤에는 보슬비를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외로운 산촌의 빗소리를 들으면서 봉선이와 나란히 하여 자리에 들어간 나는 곤함에 못 이겨서 어느덧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깊이 잠들지 못하였던 새벽 2시쯤 하여 문득 깨었습니다. 깨면서 나는 보슬보슬 내리 붓는 빗소리에 섞여서 나는 젊은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펄떡 정신을 차리며 화순의 자리를 만져보니 거기는 빈 자리뿐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발을 들고 내다보매 화순이는 토방에 놓인 쌀자루에 기대어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외딴 산촌의 빗소리에 섞여서 간간 그의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적적히 들립니다.
나는 발소리 안 나게 나가서 그의 뒤로 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는 한순간 펄떡 놀랐지만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그러나 격렬히 떨리는 그의 어깨는 그가 얼마나 힘 있게 울음을 참고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화순, 들어가요.”
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억제도 할 수 없는지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자, 화순 들어가요.”
“경애, 먼저 들어가요. 인제 들어갈게…….”
“그러지 말구 자, 들어가요.”
나는 그를 옆에 끼다시피 하여 들어왔습니다.
화순 나도 신문에서 “, 보고 다짐작했어. 얼마나 분했겠소? 그러나 잘 참았어. 용하도록 참았어.”
이전 학교 시대에 200여 명 생도가 교장에게 꾸지람을 듣고 울 때에 혼자서 눈이 말둥말 둥 교장을 흘려보고 있던 그였습니다.
“제삼자인 내가 보아도 분한 것을 잘 참았어. 그래도 그때 왜 변명을 안 했소?”
“변명? 그런 일을 꾸며낸 사람에게 변명을 하면 무얼 합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여하튼 대체 그때 일이 어떻게 되었소? 나도 신문에서만 보고 그렇진 않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한번 자세히 화순의 입으로 이야기해주어요. 나는 지금 어떤 잡지사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문제를 일으켜서 그런 고약한 사람…….”
“그만두어요. 세상이 다 잊으려 할 때 다시 그런 일을 떠들쳐 내면 무얼 합니까. 한 달만 지나면 세상이 다 잊어버릴 일을…….”
“그래도 분하지 않아요?”
잠깐 그치려던 그의 울음은 다시 폭발되었습니다.
“자, 그러지 말고 그 이야길 한번 자세히 해봐요.”
잠깐 침묵이 계속되었습니다.
“아직 아버님께두 말씀 안 드렸지만 죽기 전에 언제든 할 말을…… 자, 경애, 들어봐요.”
그의 남편 P생(生), 화순과의 결혼이 재혼이었습니다. 전 마누라를 무식하다는 핑계로 쫓아버리고 그 뒤에 얻은 화순인지라, 처음에는 의가 썩 좋았습니다. 신문지가 몇 번을 연거푸 부른 ‘세 겹 대문’안에도 향기가 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방탕함을 타고난 P는 한 1년 뒤에는 마침내 방탕한 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탕에 재미를 본 P는 방탕을 시작한 지 반 년쯤 뒤에는 안방에는 얼씬을 안 하게까지 심하게 되었습니다. 잠깐 안사랑에서 점심을 먹고는 다시 뛰쳐나가서는 이튿날에야 또 들어와서 점심을 먹고…… 이리하여 화순과는 대면 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순은 아무 말도 안 하였습니다.
“그 지아비에게 거역하지 마라.”
이러한 말을 몇 천 번이나 아버지에게 들은 그는 절대로 침묵하였습니다.
“이것도 역시 처도(妻道)겠지…… 이렇게 마음먹고 억지로 화평한 낯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 그의 시어머니가 그를 불러가지고 아들의 방탕을 좀 말리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 말을 듣고 그날 밤 그는 밤새도록 생각하였습니다.
‘시기는 여인 최대의 죄악이라.’ 이러한 교훈을 아버지에게 받은 그로서는 남편의 방탕을 책할 용기가 없었 습니다. 그러나, ‘시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마라.’ 한 아버지의 교훈도 또한 잊지 않은 바였습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생각한 결과 자기는‘시기 많은 여편네’로 보일지라도 시어머니의 말을 복종하 여 남편을 책하는 것이 M가의 며느리로서의(집안을 생각하고 시어머니의 명령에 복종하는) 가장 적당한 일이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으므로 만날 기회도 없는 P를 어떻게 만나 서 권고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힐끗 본 P는 그 달음으로 나가서 열흘 동안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집안 차인이며 남복여비(男僕女婢)가 모두 나서서 그를 어떤 기생집 아랫 목에서 찾아온 때는, 그는 갑자기 화순이와의 이혼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핑계는 시기 많은 여편네는 가풍에 맞지 않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화순이는 시아버지에게 불려서 한 시간 이상을 시기라 하는 데 대한 강설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결코 시기로써 그런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 의 명령으로 그랬노라고 대답을 하고는 싶었으나 이러한 일로 조금이라도 집안에 분규가 일어나면 그 책임자는 자기인지라, 그는 다만 이후에는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고 사과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난 뒤부터 시어머니의 눈이 괴상히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어머니도 차차 며느리를 적시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 믿고 온 남편과 집안 안의 모든 일을 다스릴 시어머니에게 밉게 보인 그는 그래도 모든 일을 모른 체하고 온순과 인종을 푯대 삼고 나아갔습니다. 그저 참자. 이것이 처도이고 부도(婦道)이고 동시에 여도(女道)겠지. 이러한 신념으로 그는 모든 일을 참았습니다. 트집 잡힐 일만 없으면 그뿐이 아니냐, 이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웃는 낯으로 지내왔습니다.
이리하여 2년이라는 날짜가 지났습니다.
어떤 추운 겨울날, 삼월이라는 종과 둘이서 자고 있던 그는 문득 인기척에 펄떡 깼습니다.
“누구야.”
이 한마디에 어떤 괴한이 윗목 문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는 곧 삼월을 깨 워가지고 나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을 터인데 그날 저녁에 삼월이가 들어와서 하는 말에 의지하건대, 어젯밤의 일이 벌써 뭇 종년놈들에게 소문이 퍼졌으며 그 말의 근원은 노마님인 듯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순은 모든 일을 다 직각하였습니다.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화순에게서 트집을 찾아내지 못한 시어머니(혹은 남편)는 화순에게 누명을 씌워서 그것을 트집삼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괴한의 뛰쳐나가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지라 이 문제는 이삼일 뒤에는 삭아지고 말았습니다.
또 석 달은 지났습니다.
아직껏 4년 동안을 얼씬도 안 하던 그의 남편이 4년 만에 그의 방에 들어 왔습니다.
그날 밤 이상한 흥분으로 깊이 잠이 못 들던 그는 또 윗목의 사람기에 놀라 깼습니다.
윗목에는 확실히 어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잠 깨기를 재촉하는 듯이 헛기침을 컥컥 뱉었습니다.
화순은 몸을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무서운 트릭이었습니다. 먼젓번에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 실패에 돌아간 그들의 계획은 다시 중인 입회하에서 실행된 셈이었습니다.
남편은 곤한 잠에서 깨는 듯이 눈을 떴습니다.
그 뒤의 일은 간단하외다. 어지러운 문제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는 더러운 이름 아래 본가로 쫓겨가고…….
그 이튿날.
“간간 편지해요.”
하는 말과 적적한 웃음으로 화순의 전송을 받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얼마 동안 사의 일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느라고 화순의 일을 생각할 틈이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반년이 지난 뒤에 뜻밖에 화순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사에는 이삼 일 여행을 간다고 전화를 한 뒤에 기차로써 화순의 집에 달려갔습니다.
조선 가장 명문의 전형인 허연 수염과 싯누런 살빛과 곧은 콧날을 가진 화순의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정신없이 뜰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곁에까지 간 때에야 처음으로 머리를 들었습니다.
“선생이 박경애씨요?”
그는 느릿느릿한 말소리로 묻습니다.
“네.”
“늦었소. 오늘 아침 장례를 지냈소.”
“한데, 웬일이에요? 참!”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안방에 들어가서 무슨 편지를 하나 내어다 내게 줍니다. 그것은 나에게의 화순의 편지였습니다.
“그저께 밤이오. 나도 늙은 몸이라 잠이 늦은데, 이즈음 맨날 잠을 못 들어서 애들 쓰던 그 애네 방에서 그날 밤은 기침 소리 한마디 없지 않겠소?
하 이상해서 건너가보았구려. 그 방엔 아무도 없어. 그래서 성냥을 켜가지고 보니깐 편지 두 장이 있습니다. 한 장은 내게 한 게고 한 장은 선생께, 그……. 편지를 보니깐 중이 되려 떠나노라고 그랬겠지요. 나도 늙은 몸이 외롭긴 외롭소. 그러나 젊은 청춘에 맨날 잠도 못 자고 밤중에 간간 소리를 내어서까지 울던 그 애 처지를 생각하면, 이제 몇 해를 더 못 살 나는 외롭 든 어떻든 중이라도 되어서 자기 마음이라도 편안해지면 오죽 다행이 아니 오? 그래서 내버려두었구려. 그랬더니 이튿날 아침, 촌사람들이 그 애 시체를 앞 개울에서 건져 왔소.”
이것이 외로운 노인의 한숨과 같이 하소연한 화순의 최후였습니다.
“선생, 선생은 부모가 다 생존해 계시우?”
“불행히 일찍 여의었습니다.”
“불행히?”
그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지었습니다.
“선생께는 불행일지 모르나 다 늙은 뒤에 자식을 잃는다는 것도…….”
그날 밤 나는 화순의 이전 거처하던 건넌방에서 묵었습니다.
밤이 깊어서 잠깐 깨어 뜰에 사람의 걷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달빛이 밝에 비추는 가운데 서리 맞아서 시들어진 화단을 두고 노인은 뒷짐을 지고 거닐고 있었습니다. 달빛 때문에 은빛으로 빛나는 수염을 가을바람에 휘날리면서…….
새벽에 다시 깨어보니 그는 그냥 거기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기침 소리가 간간 들립니다.
이튿날 저녁 서울로 돌아올 때에 그는 전송으로 10리나 따라 나왔습니다.
“들어가세요.”
하면, 그는,
“무얼, 집에 돌아가야 일도 없는 사람이오.”
하면서 그냥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반면에 ‘집에 돌아가야 기다릴 봉선이도 인젠 없소’라는 것같이 들려서 처량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긴 언덕 하나를 올라와서 그 마루에서야 그는 떨어졌습니다.
“안녕히 가시오.”
“그럼, 인젠 돌아가십시오.”
이러한 인사로 작별하고 나는 그 긴 언덕을 다 내려와서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는 그냥 그 언덕마루에 서서 이마에 손을 대고 한없이 서편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더 오다 돌아보매 그냥 붉어가는 서편 하늘에 그의 그림자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그가 이마에 손을 대고 돌아보는 쪽에는 그의 가장 사랑하던 딸이 묻혀 있는 묘지가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 여전히 잡지사의 일을 보던 나는 그해도 다 가고 새해가 된 정월 그믐께 뜻밖의 사람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화순의 아버지 최 판서였습니다.
그는 들어와 앉아서도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이리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도 없이 앉았던 그는 머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떠나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다만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떠나오.”
“어디로 말씀이외까?”
“봉선이가 되려다 못 된 중을 내가 되려구 떠나오.”
그 뒤에는 또 침묵.
전등이 켜졌습니다. 동시에 그는 얼른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었습니다.
“참, 늙으면 할 수가 없어. 조금만 추워도 눈물이 나구. 허허허허.”
그는 적적히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몹시 추위를 타는 나는 방을 여간 덥게 안 하매 추워서 눈물이 난다는 것은 거짓 말로서 그의 눈물은 딴 의미의 눈물일 것이었습니다.
좀 있다가 그는 일어서며,
“인연 있으면 다시 만납시다.”
하고는 초연히 가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반 10년, 그의 소식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뒤에서 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는 혁명당의 괴수가 되어 있단 말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떠드는 ○○단의 수령이 그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구월산에서 최판서와 흡사한 중을 보았다 합니다. 그러나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외다.
나는 이러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늙으면 할 수가 없어. 허허허허.’ 하면서 눈물을 씻던 그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눈에서도 또 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과연 살아 있나. 살아 있어서 어떤 사람의 말과 같이 중이 되었나.
혹은 만주의 넓은 혁명당의 수령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나.
‘인연 있으면 다시 만납니사.’ 하던 그의 마지막 말은 쟁쟁히 내 귀에 남아서 떠나지를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