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그는 동해의 정기를 혼자만 타고난 듯이도 맑은 여인(麗人)이었다. 시절의 탓도 있었을까.

북방의 이른봄은 애잔하고 엷은 감촉을 준다. 그런 배경 속에 떠오르는 그도 역시 애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심홍의 저고리와 검은 치마의 조화가 할미꽃의 그윽한 색조와도 같았다 그 빛깔을 받아 얼굴도 불그레한 반영을 띠었다. 그 모든 것이 독특한 아름다운 인상을 주었다. 눈망울의 초점이 명확은 하나 망연하다. 개물(個物)을 보는 눈이 아니오, 꿈을 보는 눈이다.

그의 미는 맺힌 점의 미가 아니오, 흩어진 구름의 미다.

이지미(理知美)라는 것이 있다면 그의 그런 것은 낭만미라고나 할까.

중세기의 재현. 사실 그는 드물게 보는─몇 세기를 넘어서 볼 수 있는 희귀한 여인이었다. 중세기의 왕비인 대신에 현세기의 여인은 여교원이었다. 근심 없는 여교원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니 여인의 무비의 홍안은 근심의 빛이었다. 가슴속에 병마가 근실거리는 것이다. 가엾은 일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인에게도 속사(俗事)가 많은 듯하다. 장성한 애제(愛弟)를 데리고 학교에 입학시키러 왔다가 미치지 못하는 재주로 낙망의 결과를 가지고 돌아갔다. 홍안이 더욱 근심에 흐렸을 것이 가엾다. 여인의 속루(俗累)만은 여의(如意)의 해결을 줌이 인류의 공덕일 것 같다. 그의 불여의를 마음 아프게 여겼다─

이야기 값에는 안 가나 이것은 구화(構話)가 아니고 실화이다. 실화란 항용 이야기 값에 못 가는 법이다. 그러나 여인의 구화를 애써 꾸미느니보다는 차라리 그와의 현실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으면 오죽 다행하랴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그는 반생 동안 기억 속에 적힌 중의 최상급의 여인이었다. 외람한 생각은 나의 죄가 아니다.

그의 성을 모름이 도리어 다행이다. ‘권(權)’이니 ‘피(皮)’니를 들었을 때의 환멸을 생각함으로이다. 이름을 모름이 차라리 행복스럽다.

‘복금(福今)’ 이나 ‘봉이(鳳伊)’ 니를 들었을 때의 비애를 즐기지 않음으로이다.

현실의 거리가 먼 그는 그러는 동안 일종 꿈속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꿈속에서 이모저모 빚는 마음─역시 소설을 만들려는 마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듯싶다. 결국 여인은 소설의 대상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슬퍼야 될 것 같다. 애잔한 홍안이 그것을 암시한다. 둘째로 여교원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웬일인지 세상에 여교원같이 소설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산문적 존재는 없다. (소설 자체는 산문이나 그것을 벗는 정신은 시인 것이다.) 셋째로 데설데설 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인의 웃음은 향기와도 같이 미묘한 것이어서 벌리는 입의 각도가 조금 빗나가도 시심을 상하는 까닭이다. 넷째로 노래를 잊고 침묵해야 할 것이다. 서투른 노래란 마음의 은근성을 도리어 천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돌같이 침묵할 때 마음의 심연은 더욱더욱 심화되는 법이다. 다섯째로……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자라는 동안에 마음의 여인은 자꾸만 이상화하여 가는 것 같다. 인물의 성격이 유형화만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굳이 불행한 일은 아니다. 결국 여인의 운명은 비(臂)하면 ‘마그리트’ 의 경우와도 흡사했으면 한다. 거기에 홍안의 여인의 완전한 표현이 있을 성싶다. 굳이 비운과 박명을 원함은 작가의 불행한 악마적 근성이라고도 할까.

잃어진 여주인공이 아니오, 얻어진 여주인공이며 소설되다만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되려는 이야기이다. 하기는 지금에 있어서는 결국 잃어진 여주인공이고 소설이 되다만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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