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5/양주의 어옹

덜걱덜걱!

『?─』

문이 잠겼다.

웬일이냐. 문이 잠길 까닭이 없다. 설혹 문을 잠갔다 할지라도 자기가 온 것이 멀리서 보이기만 하면 황황히 열어놓을 문이 그냥 잠겨있다.

견여(肩與)에서 내린 대원군, 눈살을 찌푸리고 하인의 부액을 받고 참을성 좋게 기다고 있었다.

덜걱덜걱. 구종(驅從)은 문을 조심성 있게 흔들었다. 그러나 문을 열러 오는 사람의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경복궁 새 대궐 대원군 전용의 문─ 다른 사람은 출입할 권한이 없는 문이니만치 또한 대원군 행차의 그림자가 건춘문(建春門) 안에 나타나기만 하면 황황히 정감이 달려와서 문을 열고 별감, 궁액들이 문안에 등대하여 국태공 대원군을 맞아들이는 것이 상례였다.

오늘은 지금 영조(營造) 중인 종묘의 공사를 좀 보고 오노라고 약간 늦기는 늦었지만 좀 늦었기로서니 이 문을 이렇듯 잠가버리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묵묵히 서서 참을성 좋게 좀 기다렸지만 드디어 역정이 났다.

『좀 더 요란하게 두드려라!』

조심스러히 문을 두드리는 구종에게 태공은 명하였다.

왈칵! 왈칵! 문은 요란히 흔들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역시 쥐죽은 듯이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함쳐 봐라!』

둘째 명령.

동시에 구종 셋이 달려들어서 문을 부서질듯이 흔들었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누구 없느냐? 문 열어라.』

하인들의 호령은 연하여 났다.

그러나 안에서는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마침내 태공의 노염은 폭발하였다.

『문을 부셔라.』

불쾌, 격노, 이러한 가운데서 하인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 명령과 함께 한인들의 억센 발길이 문을 부서저라 하고 차기 시작하였다. 지끈지끈 문은 부서질듯이 흔들렸다. 그러나 국탕을 다하여 견고히 지은 경복궁의 이 문은 좀체 부서지지 않았다.

이러한 소란한 가운데 드디어 사람의 그림자가 저편에 나타났다.

문안까지 달려온 그 사람─ 문틈으로 보니 이 문을 관할하는 수문장이었다─

『문 열어라!』

『네……』

그러나 꿈질거리는 모양.

태공은 문으로 가까이 갔다. 문을 흔들던 하인들이 비겨서는 틈으로 태공은 안을 향하여 호령하였다─

『문 열어라.』

덜걱덜걱, 빗장이 빠지고 겨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문장이 그 안에 읍하고 섰다. 태공은 거기 버티고 섰다. 들어가지 않았다. 노여움 때문에 그의 뺨의 근육이 히물 허물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

수문장은 머리를 숙이고 읍한 채 대답이 없었다.

『무슨 짓이냐, 문은 왜 잠갔느냐?』

『네……. 어명으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얼? 어명? 왕이 이 문을 잠그라 하였다? 이 국태공, 왕의 아버지 자기가 출입하는 문을 왕이 잠그라 하였다? 섭정 전용의 문이며 이 문을 잠그는 것은 자기의 길을 막는 일이다. 왕이 자기를 막아?

─이 알 수 없는 일의 앞에 태공은 자기의 노염을 어디로 부어야 할지 분간치 못했다. 불쾌한 눈으로 잠시 더 수문장을 힐책하는 듯이 들여다 보다가,

『이 뒤에 다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용서치 못한다.』

한마디 하고 말을 문안으로 옮겼다.

× ×

기괴한 일이었다.

빈청에서 민승호를 보았는데 민승호는 태공을 보고 황황히 몸을 숨겼다. 뿐만 아니었다. 모두들 태공 자기를 보고 낭패하여 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사정전(思政殿)에 계신 아드님 국왕께 들어가 절하매 아드님도 분명히 낭패해 하시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태공 자기를 보고 낭패해 하는 모양이 분명하였다.

첫째로 태공 자기 전용의 문을 잠근 것, 둘째로 자기를 보고 모두 낭패해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원에서는 태공에게 알지 못하게 무슨 일을 진행시키는 모양으로 무엇을 수근거리는 듯하였다.

자기는 이 나라 국왕의 사친(私親)일 뿐더러 그 위에 이 나라의 정치를 (국왕을 대신하여) 보는 섭정 자기 몰래 무슨 일이 계획되고 진행될 까닭이 없다. 그런데 오늘의 공기는 분명히 수상하였다.

문이 잠겨있기 때문에 생긴 노염이 아직 꺼지지도 않은 위에, 또한 이런 수상한 공기를 본 태공은 속으로 치받쳐 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품고 어전을 물러 나와서 빈청으로 나왔다.

정원에서 도승지가 바치는 한 장의 상소문, 태공은 불쾌한 가운데서 그 상소문을 받아서 읽어 보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문이었다.

× ×

엎드려 생각컨대 신이 장헌(掌憲)의 명을 받은지 이미 월여, 과하신 은혜는 몸둘 곳을 아지 못하나이다. 예로부터 국가에 대직(臺職)을 두옵는 것은 임금은 백성의 위에 계셔서 만기(萬機)를 총찰하시매 아무리 밝으실지라도 다 살피시기 힘들므로, 대간(臺諫)으로서 이목(耳目)을 삼는 것이옵니다. 여기서 대신(臺臣)은 법을 잡고 임금을 보좌해서 임금으로 덕업에 흠없고 정교에 실이 없도록 하는 것이옵니다. 이러한 귀한 자리에 신과 같은 어리석은 물건은 감당하기 매우 힘드옵니다.

그러나 몸이 이미 이 직에 있는 이상은 어찌 책임이야 저버릴 수 있사오리까? 여기 잠월함을 돌보지 않고 전하를 위하여 말씀 올리옵니다.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를 엎드려 비나이다.

그 일에 가로되 경복궁 토목의 업을 멈출 것이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 등극 이래 다른 일은 밀고 궁궐 영조를 가장 급히 하여 사 년 동안에 궐이 거의 낙성되어 가옵니다. 신 생각컨대 임금의 급무는 덕에 있고 흥작(興作)에 있지 않은 줄 아옵니다. 그런고로 오막살이가 요(堯)를 크게 한 소이며 궁실을 알게 하고 음식을 박하게 하여 민사에 근로한 것이 우(禹)를 번창케 한 소이옵니다. 경궁요대와 아 방장성(瓊宮瑤臺, 阿房長城)은 걸주 진황의 망한 원인이옵니다.

한당(漢唐) 이래 대개 나라를 보전한 임금은 모두 역사를 하지 않고 민심을 기른 것이요, 나라를 잃은 임금은 토목을 성히 하여 민력을 갖게 한 자이옵니다. (略)

엎드려 비오며 성명으로서 깊이 신의 상소를 생각하시고, 공사 아직 시작지 않은 자는 그만두시어서 백성의 노력을 쉬게 하시면 이런 다행한 일이 없겠사옵니다. 신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지극하와 죽음으로써 이 말씀을 올리나이다.』

경복궁 역사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지금 학정을 중지할 것과 당백전을 걷을 것과 문세(門稅)를 금할 것 등등을 격론한 것이었다.

태공은 다 읽었다. 읽은 뒤에 둘러 보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빈청, 모두 침을 삼키며 눈을 내려뜨고 태공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없었다.

잠시 노염에 불붙는 눈으로 둘러보다가 태공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 이 최생(최익현)은?』

『네…….』

『금부에 내렸나?』

『…….』

『어쨌어!』

마침내 큰소리가 났다. 그 큰소리에야 할 일 없이 대답이 나왔다─.

『특지로서 최생을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을 제수하왔습니다.』

『무얼?』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나, 섭정이 있는 이 상에는 아무리 국왕이라도 섭정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따라 잠긴 문.

국왕 이하 정부에서 모두 낭패해하던 그 모양.

자기를 제껴놓고 비밀리에 무슨 책동이 있은 것이 분명하였다.

『고약한.』

드디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태공─ 상소문을 극처 쥐고 아드님께 그 곡절을 알아보러 사정전으로 다시 들어갔다.

× ×

사정전으로 들어가매 아드님은 사정전에 계시지 않고 교태전(交泰殿)에 듭셨다 한다.

『전하께 흥선대원군이 상계할 말씀이 있다고 여쭈어라.』

승전빗에게 이렇게 말하여 왕의 출어를 재촉하였다.

물론 왕이 출어하실 줄 믿었다. 사사로 보더라도 아버님이거니와 공으로 보아서 섭정 태공이, 국사에 관해서 상계할 일이 있다는데 출어하시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태공은 거기서 불쾌한 마음을 품은 채로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들어간 승전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나온 승전빗의 얼굴에 역시 낭패한 빛이 있었다.

『?』

『상감께서는 좀 미령합시다고─』

태공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왕이 태공 자기를 피하시는 것이 분명하였다.

자기 전용의 문을 잠근 것─ 기괴한 일이었다. 최익현의 상소 따위─ 또, 비록 그 상소를 가납하여 (섭정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익현을 돈녕부 도정을 시켰다기로서니 자기를 이렇듯 피하기까지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태공은 어떻게 해서든 그 내막을 들춰내 보려 하였다.

『음 그러냐? 그래도 긴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출어합셔야겠다고, 그렇지 못하겠거든 흥선이 잠간 들어라도 가야겠다고, 다시 들어가 보아라.』

다시 내시를 들여보냈다.

안에서는 왕이 왕비와 의논이라도 하시는 모양으로, 승전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교태전에서 잠간 보시겠다는 허락이 났다.

태공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그냥 극처 쥔 채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 ×

그러나 교태전에서 태공은 왕께 뵙지 못하였다.

연극이 분명하였다.

왕은 자리에 누우시고 궁녀들이 삥 둘러있으며, 발 안에는 왕비가 왕을 대신하여 태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발을 통하여서나마 왕비의 눈에 나타난 기괴한 표정. 태공은 불쾌한 눈치로 잠시 엎드려서 보다가

『전하께서 미령합시다니 후일 다시 상계하겠습니다.』

하고는 도로 나오고 말았다.

무슨 음모가 진행되는 것이 분명하였다. 정부에서 재상들의 낭패해 하는 꼴은 둘째 두고라도 왕이 자기를 피하는 것이며, 내시며 궁녀들까지라도 어릿거리는 꼴을 보아서 정녕코 무슨 일이 진행된다.

더구나 일개 최익현 따위가 나는 새라도 떨굴만한 태공을 대항하여 이런 상소문을 올린 것도 기괴하거니와 그 상소문이 섭정인 자기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왕께까지 간 것은 더욱 기괴하며, 비록 그런 소문이 들어왔을지라도 이런 외람된 행동을 한 최생을 벌하지 않고 도리어 가납하고, 가납함에 있어서도 섭정에게 자문치도 않고─

뿐만 아니라 이런 밀의(密議)를 하기 위해서 섭정 전용의 문까지 잠가버리고, 의논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문을 열어 자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여 놓고 거기 대하여 자세한 연유를 알아보려고 왕께 배 알하려 하매 왕은 어느덧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가 버리시고 내전까지 들어가 뵈오려 하매 병을 핑계 삼으시어 왕비가 대신 나오고.

그 위에 그때 왕비의 눈에 보이던 기괴한 표정─.

정녕코 무슨 책동이 있으며 그 책동의 근원은 왕비인 것도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태공은 정부로 나왔으나 마음이 불쾌하여 이렇다 저렇다 간섭하기가 싫었다. 뿐더러 왕비의 오라비 되는 민승호가 유난히도 싱글생글 웃으면 피하는 듯 아첨하는 듯 기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더욱 불쾌하였다.

좀 정부에서 어름거리다가 태공은 종묘의 역사를 또 좀 보아야겠다는 핑계로 대궐에서 나왔다. 그러나 종묘에는 들르지 않고 운현궁으로 돌아와 버렸다.

× ×

그 사건의 이면에는 물론 왕비가 있었다.

왕비 민씨.

놀라운 야심과 놀라운 기지(機智)는 능히 六척의 남자라도 깔아볼 만한 여걸.

아무리 놀라운 기략을 마음에 배포하고 있다 할지나, 지금의 형세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신의 시아버님인 태공 흥선대원군이 나라 일을 죄다 맡아서 행하여, 비록 국왕일지라도 실권은 하나도 없는 지금의 형편이었다.

야심이 만만한 왕비는 단지 왕비라는 사사로운 영화만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가진 놀라운 기략을 펴서, 이 삼천리 국토를 주무르지 않으면 속이 편치 못하였다. 그러자면 당연히 태공 흥선대원군의 세력을 꺾어야 할 것이다.

본시 섭정이라 하는 것은 국왕이 어리어서 정사를 못 볼 동안 국왕을 대신해서 국정을 듣는 것. 지금 국왕이 이미 장성하신 이때까지 그냥 섭정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는 것은 대원군의 실수다.

왕은 또한 당신의 아버님이니 감히 물리치지 못하고 계시다.

정부에서는 대원군의 세가 너무도 크니까 감히 소리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비의 입장으로 보자면, 대원군의 섭정이란, 귀찮은 것이었다. 큰일에서 작은 일까지 국정을 죄 태공 혼자서 독재를 하기 때문에, 왕비 당신의 사사 친척 하나를 귀한 자리에 올릴 수도 없다.

이러한 일들로 불평을 품고 태공의 권세를 꺾기 위하여, 왕비 당신의 오라비 민승호를 어떤 날 몰래 대내로 불러들여서 밀의를 한 바가 있었다.

왕비의 밀계를 받고 나온 민승호는 역시 태공에게 불만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차라 즉시로 장령 최익현을 몰래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장령 최익현은 또한 문신으로서 태공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것이었다. 태공이 이 나라 대대로 내려온 당쟁의 폐해를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당쟁의 근원 되는 서원(書院)들을 모두 철폐하였기 때문에, 문신인 최익현은 그로서 태공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던 터이었다.

이리하여 민승호의 충동도 있는 기회에 최익현은 왕께 상소문을 올려서 국태공의 비정을 극론하였다.

왕비는 민승호를 시켜서 일변 밖으로는 이런 일을 진행시키는 한편으로는, 왕을 찔러서 이번 계획이 꼭 성공되도록 용의주도한 계책을 꾸몄다.

왕은 처음은 물론 주저하셨다. 당신의 아버님께 거역하는 것이 싫었을 뿐 아니라, 대원군의 세력에 대항하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왕비는 왕께 조르고 탄원하고 강박하고 하여 드디어 왕을 승복시켰다.

최익현의 상소문이 들어온 것은 저녁 때 태공이 퇴궐한 뒤였었다. 이 시각쯤 들어오도록 미리 계획한 것이었다.

이튿날 일찍이 왕은 사정전에 출어하셨다. 정전에 출어하시려면 그만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시간이 걸리므로 사전에 출어토록, 그리고 그동안에 일이 진행되도록─ 왕비의 계책이었다.

일변 어명을 받은 승지 하나는 운현궁으로 달려가서 태공에게, 영조 중인 종묘 건축이 얼마만치나 되었는지 보라는 왕명을 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대궐 안의 섭정 대원군 전용의 문을 안으로 잠가버렸다. 갑자기 들어오지 못하도록─ 태공이 문밖에 이르면 자연히 안에서도 알고, 그 문을 열 동안에는 안에서도 끝낼 수가 있게 되도록─ 문을 잠가버렸다. 그런 뒤에 어전회의가 열렸다.

× ×

이 문제가 조의에 오를 때에 조신(朝臣)들은 깜짝 놀랐다.

민승호, 민겸호, 등등 미니 왕비의 내의를 받고 일을 책동한 사람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영문 모르고 모였던 다른 조신들은 깜짝 놀랐다.

『대원군이 아직 입내하지 않았사오매 대원군 입내를 기다려서 의론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옵니다.』

이것이 김병국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 의견에 대하여 민승호가 즉시 반대하였다.

『전하의 직재─ 대원군이 입내하였으면어니와 입내치 않은 이상에는 전하께 직재를 구하여도 좋을 줄 아옵니다.』

어전에서 의논이 백출하였다. 이 내막을 미리 모르는 조신들의 의견은 대개가, 최생의 상소문은 물리치고 최생을 찬(竄)하자는 편이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의 옳고 그름은 둘째 두고, 이런 상소문을 그냥 불문에 붙이면 이 뒤에도 뒤따라 이런 일이 생기겠으며, 이런 일이 연하여 생기는 것은 정치를 갈피 못 차리게 하는 것이며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매 엄히 경계해서 뒤의 분규를 미리 방지하여야 한다─ 이것이 조신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미리부터 왕비의 내명을 받은 무리들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이 사건이 어떻게 귀결될지 알고 있으므로 속으로 웃으면서 반대하였다.

─즉 이런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최생의 죄는 엄벌하는 것이 당연은 하나, 그의 말이 고례에 의지한 바이며 애국지심에서 나온 바이라 지금 최생 하나를 엄벌하면 백만 유생들이 봉기할 터이니 그의 죄를 용서하고 그 적정을 청납하셔야 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두 가지의 다툼이 어전에서 계속되는 동안, 왕은 잠자코 듣고만 계셨다. 왕도 이미 왕비와 의논한 바가 계시니 당신의 하실 결재는 마음에 미리 작정되신 셈이었다. 단지 조신들의 논쟁의 귀결이 어찌 되나, 정관하고 계실 뿐이었다.

사정전 안에서는 한창 (귀결될 바가 미리부터 작정되어 있는) 논쟁을 하는 동안에 종묘 영조를 돌본 태공의 행차는 경복궁에 도착한 것이었다.

태공이 문을 열라고 호령할 동안 사정전에서는 최익현 처분 문제에 관한 왕의 결재가 내렸다.

─최모의 소문(疏文)은 고례에 빙거한 바 있다. 애군의 적성이 보이니 가납한다.

그리고 최모를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한다.

이리하여 지급히 정부에서는 최익현에게 직첩이 내리고, 한편으로는 수문장이 비로소 잠겼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들어온 태공.

아버님을 맞으시는 왕.

거북하시고 미안하시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안 보실 수가 없어서 보시고는 즉시 내전으로 듭시고 말았다.

태공이 내전에 아드님께 뵈려 할 때에 왕은 너무도 거북하셔서, 어찌하실 줄을 모르시었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왕비가 또 새 지혜를 내어서 왕을 누우시게 하고 당신이 태공을 맞은 것이었다.

태공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만 하면 거기 대하여 할 대답을 미리 다 준비하고 기다렸었는데 태공이 잠자코 돌아가기 때문에 왕비는 내심 불만하였다.

─이리하여 왕비와 태공과의 권리 쟁탈전은 차차 노골화하였다.

× ×

태공의 세력을 꺾어버리고 스스로 이 나라의 권세를 잡으려는 왕비의 책동은 날로 더하여 갔다.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등등 민씨 일족을 수족으로 삼아서 비밀리에 차차 그 세력을 쌓아갔다.

태공은 나라 정사에 바빠서 이 비밀 책동을 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왕비 일파의 책동은 차차 커져서 꽤 큰 힘을 지어놓고 일변으로 태공의 결점을 들추어 가지고 떨구어 버릴 날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 ×

어떤 날 민승호의 그림자가 밤중까지 대내에서 어른거리다가 밤이 깊어서야 나갔다. 그 이튿날 입궐하였던 태공은 내전의 급소로 내전으로 달려 들어갔다.

?─

들어오던 태공은 발이 땅에 붙은 듯이 뜰 아래 딱 섰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교태전 온돌 툇마루에 선혜당상 조성하(宣惠堂上 趙成夏)가 엎드려 있었다. 조성하는 조대비의 조카지만 아무리 궁실의 외척이라 할지라도 내전까지 들어온 것도 기괴하거니와 툇마루에 엎드린 조성하는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다.

동온돌 안을 넘겨 보니 동온돌에는 왕과 왕비가 계셨다. 그런데 왕의 용안도 종잇장같이 창백해지고, 그 곁에 쪼그리고 앉은 왕비는 왕께 무엇을 강제하는 모양이었다. 대청에 읍하고 서 있는 궁녀들도 모두 한결같이 와들와들 떨고 있다. 발도 안 쳤다.

이 범상치 못한 광경에 태공은 허망지망 전에 올라갔다. 궁녀들이 비켜서는 틈으로 태공은 엎드리며 눈을 치뜨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발이 있었다. 약사발이었다. 사발도 세 개나─.

『자. 상감 잡수세요. 대감도 자시오. 나도 먹겠소.』

눈에 충혈이 되어 악을 쓰는 왕비.

『비전 마마. 무슨 일이온지─』

태공은 거기 엎드려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비가 힐끗 태공을 보았다.

『대감께도 죄가 있습니다. 얘 누구 사발 하나만 더 가져오너라.』

왕비는 태공을 보고 궁녀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궁녀들은 움찍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

『무슨 일이온지?』

『무슨 일? 그래 대감. 상감께서도 약사발을 받으셔야겠고 저 밖에 있는 선혜당상도 받어야겠고 나도 받어야겠는데 대감만 피하시겠단 말씀이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글쎄, 무슨 일이온지 받을 만한 일이 있으면 흥선은 피하지 않소이다.』

『받을 만한 일이란 웬 말씀이오니까? 그래 조종께 낯을 들지 못할 죄를 짓고 모르신단 말이 웬 말씀이오?』

『자 상감 듭세요. 상감부터 듭세야 다른 사람이 들 것이 아니오니까?』

왕도 몸을 떨으시면서 어쩔 줄을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이 범상치 못한 경우에, 태공은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더 나갔다.

『비전 마마, 사발은 받소리다만 사유부터 알고 받읍시다.』

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태공을 흘겼다.

『사유? 대감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봅시오. 효종대왕 어대부터 저축해 오시던 호조금(戶曹金)을 없이 한 게 조종께 죄 되지 않는단 말씀이오니까? 국가 유사시에 쓰러진 선왕의 높으신 뜻을 저버리고 허튼 데 쓴 죄를 어떻게 사죄하시렵니까? 팔기는 대감이 팔았어도 책임은 상감께 있는 것, 더구나 상감으로 말씀하자면 다른 갈래에서 양(養)으로 들어 오신 분─ 양으로 들어오셔서 선왕의 높으신 뜻을 저버리시고 이런 일을 하셨으니 종묘에 뵈올 낯이 어디 있습니까?』

태공은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 ×

병자년 호란 뒤 그때 왕자이시던 효종 대왕이 볼모로 청국에 잡혀가서 몇 해 계시다가 돌아와 등극을 하셨는데 효종은 그 호란 때에 겪으신 고생과 그곳에 볼모로 계실 동안에 받으신 수모 등이 골수에 사모치어, 언제 한번 청국을 정벌하실 웅지(雄志)를 품으시게 되었다. 그래서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 국탕이 고갈되고 민재가 결핍함에도 불구하시고 국방의 충실을 도모하셨다.

이리하여 청국을 정벌할 때 쓰려는 군용금을 잔뜩 황금으로 가려 두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종은 그 웅지를 실행치 못하시고 승하하셨다.

그 이래 그때의 황금은 그냥 호조에서 보관하는 채 수백 년을 내려왔다. 국가에 대사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쓰기로 하고서……

이 황금 창고는 세 개의 열쇠로야 여나니, 그 세 개의 열쇠를 한 개는 왕이 맡으시고 한 개는 호조 판서가 맡고 한 개는 선혜당상이 맡는 것이다.

이래 수백 년간을 묵어오던 황금,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각색 시설을 새롭게 하며 더욱이 국탕을 기울여서 경복궁을 조영함에 돈이 부족하였다.

이전부터 나라가 제법 나라 같았으면 그만 돈이야 국고에도 있었을 터이지만, 나라가 나라가 아니라 한 개 당파싸움에 매두몰신한 자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던 때의 곧 뒤라, 그렇지 않아도 재정이 부족한데 이런 큰 역사를 하자니 물론 돈이 부족하였다.

역사는 해야겠고─

돈은 없고─

이 양난의 입장에서 태공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선혜당상 호조판서 조성하와 의논하고 호조에 보관하는 그 금을 꺼내어 경복궁 영조의 비용의 一부분으로 쓴 것이었다.

물론 비밀히 하였다.

경복궁 조영도 국가의 중대사는 중대사지만 선왕의 뜻은 더 큰데 있었더니만치, 그 금을 경복궁 조영에 썼다면 여론이 귀찮을 것 같아서 비밀히 하여 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 어떻게 새어났는지 왕비에게 알리어져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 ×

태공은 한참을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곤전 마마, 그것은 흥선이 조판서와 의논해서 한 일이니, 흥선과 조판서는 책임질지언정 전하와 곤전마마는 왜 책임이 있소리까.』

『대감. 상감은 대감의 아드님이 아니시오니까? 아버님이 죄를 지셨으면 아드님인들 면하리까? 아드님으로 앉으셔서 아버님께 약사발을 들여야 할 테니까 이 불효의 죄로 상감도 변할 수 없을 줄 압니다. 또 나는 여필종부라는 옛날 성현의 말씀이 있으니 나 또 어찌 면하리까.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여기 네 사람만 약을 받으면 일이 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비는 왕께로 향하였다─

『상감, 임금은 아무런 일에도 신자의 표본이 되셔야 합니다. 먼저 사발을 들읍시오.』

이 강박─

왕은 용안이 창백하셔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계시다.

『자. 왜 못듭세요. 어서 듭시오.』

왕의 약간 떨리는 손이 약사발 앞으로 차차 가까와 갔다.

태공은 더 볼 수가 없었다.

인젠 규법을 무시할 수밖에는 없었다. 태공은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왕이 잡으시려던 약사발을 뺏어 들었다.

『전하! 전하께 무슨 책임이 있소리까? 모든 책임은 흥선에게 있는 것! 흥선과 조판서가 약을 먹으면 그뿐이올시다. 또 곤전마마도─』

태공은 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부군께 독을 권하신 죄는 면치 못하리다. 여기 있는 약사발 세 개, 하나는 곤전 마마, 하나는 흥선, 하나는 조판서─ 셋이서 하나씩 듭 시다. 자 곤전도 듭시오.』

본시 성량(聲量)이 큰 데다가 흥분되어서 고함 지르는 흥선의 소리는 전각을 더릉더릉 울리었다.

『자 곤전도 듭시오.』

이 역전(逆轉)하는 형세에 비의 입술은 새파 랗게 되었다.

『상감은─』

『국왕의 불찰은 재상이 대신 지는 것─ 이번 일은 전하의 불관한 일이지만 설사 전하께 책임이 계시다 해도 섭정이 대신 질 테니, 곤전이나 어서 사발을 듭시오.』

태공은 툇마루의 조성하에게로도 사발 하나를 밀었다.

『대감도 들게.』

처참한 공기.

어떻게 귀결이 될지 밖에 국궁하고 서있는 궁녀들도 몸만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자 어서 듭시오.』

이때였다.

조대비가 들어섰다.

궁인이 괴변을 알렸는지 혹은 태공의 우렁찬 소리가 대비전까지 들렸는지, 대비가 여관의 부액으로서 황황히 달려왔다.

대비 임어에 왕 이하로 왕비 태공 조성하 등이 일어나 절할 때에, 대비는 내려가서 자리를 잡았다.

『무슨 소란이오?』

거기 대하여 태공은 사건의 대략을 대비께 아뢰었다.

대비는 다 듣고 한참을 생각하였다. 딱한 모양이었다. 만약 책임 문제를 일으켰다가는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조성하는 면치 못할 것이니 사랑하는 조카의 문제도 딱하였다.

한참 뒤에 대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듣고 보니 상감도 책임을 면치 못하겠고 중전도 또한 면치 못하겠고 원합(院閤)이나 조성하는 무론 면치 못하겠소. 그렇지만 임금을 벌한다는 법이 고금에 없으니 상감께는 아무 말씀도 못할 것이고, 중전은 상감의 배우니 또한 불문할 것이고, 대원군은 왕친이니 인자로서 생친을 벌하지 못할 것이고─ 성하 너하고 나하고 죽자, 너는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고, 나는 너 같은 것을 조카로 두었으니 죽어 싸다. 야 누구 약사발을 가져오너라.』

일이 딱하게 되었다. 이 궁실의 어른 대비가 약을 받겠노라는 것이다. 기가 승승하여 태공에게 약을 권하던 왕비도 아무말도 못하였다. 왕비에게 약을 권하던 태공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잠시는 죽은 듯이 모두 가만 있었다.

『누구 약사발 안 가져 오느냐.』

대비가 다시 채근할 때에 태공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비전 마마야 무슨 까닭으로 약을 받으시겠습니까. 성하도 또한 죽어 마땅한 죄나 대비전 마마의 친질(親姪)이오매 관대히 보고 신 혼자서 책임지오리다.』

이리하여 몇 마디 말이 왔다 갔다 하는 중에 약사발 문제는 유야무야 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호조의 금 문제를 들어 흥선대원군에게 책임을 입히자던 그 고육책은 이렇듯 대비의 권병의 덕으로 소득 없이 작아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기회로 왕비는 인제부터는 정면으로 국태공 흥선대원군에게 대항하러 일어섰다. 아직껏의 이 면의 책동을 버리고 나타나게 맞서려는 것이었다.

× ×

꾀 많고 지혜 많은 왕비.

그 위에 그의 수족으로 이면에서 활동하는 (왕비의 오라비) 민승호는 송곳과 같이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민태호 민겸호 그 어느 사람을 무론하고, 왕비의 막하 인물들은 모두 다 날카로운 사람들이었다. 그 위에 그들은 태공에게는 다 불평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태공 본시 나라의 권세를 잡으매 이전 대대의 외척 세도를 꺼리어서 외척은 모두 멀리하였다. 민승호로 말하자면 부 대부인(태공의 부인)의 친오라비로서, 태공에게도 처남이 되는 사람이었다. 민치록(閔致祿)의 집에 양으로 가서 지금 왕비와 남매간이 되었으나, 혈통으로 보자면 태공의 직처남이었다. 그런 민승호조차 중용하지 않었으니까 다른 민씨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민씨를 중용하여서 외척들의 손에 세력이 들어갔다가는, 장래 큰 화근을 남길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모든 민씨를 멀리하였다.

이 때문에 민족은 내심 태공을 원망하던 터에, 왕비가 지금 태공과 대항하려는 눈치를 보고 모두 그 산하로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왕비의 산하에는 민족으로 커다란 그룹이 형성되었다.

꾀 많은 왕비는 인심 수습하는 비결을 아는 사람이었다. 왕비는 무엇보다도 불평객들을 매수하였다.

이전 명문이면서도 태공의 정부에 중용되지 못한 불평객들도 끌어넣었다.

그리고 조선 八도에 뻗어 있는 유림(儒林)의 세력이 깔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 왕비는 그 세력도 끌어넣으려 하였다.

태공이 국정을 잡은 이래로 서원들을 모두 철폐하여, 유림의 반감을 산 것을 아는 왕비는 이 유림을 회유하기 위해서 과거법을 부활시켰다.

본시부터 관리 등용 방법으로는 과거를 보는 법이었지만 태공은 이것을 악법이라 하여 철폐하였다. 인재는 과거로 알 배가 아니다. 과거는 대개 공평하게 되지 않고, 이면으로 운동을 하여야 등용되므로, 그 실력을 알 수가 없는 것이라, 이것을 철폐하고 八도에서 문벌을 무론하고 제 재간 하나를 가진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물론 유림들에게 반감을 산 것이다. 비는 이 반감을 이용하였다. 즉 왕세자 탄생일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과거를 보아서 태공이 철폐하였던 제도를 부활시켰다.

태공은 이것을 불쾌하게 보았다. 그러나 왕세자 탄생일이라는 이유가 붙었으매 표면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들로서 유림이며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들에서는, 왕비를 칭송하는 소리가 차차 높아 갔다. 이러는 동안에 차차 기회가 익어서 왕비는 태공의 면전에 또 한 개 거탄을 던진 것이다.

× ×

어떤 날 최익현의 또 한 장의 상소문이 들어왔다.

거기는, 대원군은 전하께 환정(還政)을 하고 은퇴할 것이며 대원군은 국왕의 사친으로서 우우(優愚)할 것이라는 뜻이 적히어 있었다. 태공은 이 상소를 보고 격노하였다. 곧 붓을 들고 커다랗게,

『참(斬)』

이라 썼다. 최익현을 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께서 그 종이를 받으셔서 집어치우셨다.

태공은 아드님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한참을 말도 없이 우러러 보았다. 한참 동안 오십에 가까운 태공의 눈에서는 너무 역하여 눈물이 나왔다.

아무리 아드님이라 하나 공으로 보아서 국왕이시요, 자기는 아무리 아버지라 하나 신위(臣位)에 있는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러러보는 동안 다만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후회 나는 것은, 며느님 선택을 잘못하였다 하는 점이었다.

민치록의 외딸─ 원친(遠親)은 있으나 근친(近親)은 없음을 다행히 여기고 이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면 장래 외척의 화는 보지 않으리라 하고 맞아들였더니, 그것은 그의 오계(誤計)라 원친은커녕 단지 민씨만 가진 사람이면 모두 끌어들여서 당신의 세력을 높이려는 놀라운 여성이었다.

너무 억하기 때문에 입을 우들우들 떨며 아드님의 용안을 우러러 볼 동안 그 뒤에서 활동하는 왕비의 환영을 역역히 보았다.

한참 말없이 용안만 우러러보다가 태공은 몸을 떨치고 일어서서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그날로 최익현은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초배되었다.

× ×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아무리 섭정이라 하나, 자기를 넘어서 왕께서 행하시는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태공은 자기의 몰락을 보았다. 돌아보건대 이 아드님을 지존의 자리에 모시기 전에 자기의 삶이 얼마나 참담하였던가?

몸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왕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그 학대와 수모는 얼마나 심하였던가.

당시의 세도 김씨 一문에게 받아오던 그 수모, 그것은 사람으로는 참지도 못할 만치 큰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외척의 세도에 대한 증오를 잔뜩 품었던 그가, (놀라운 지략으로 아드님을 이 나라 국왕으로 모셔 놓은 뒤에) 가장 내심 애쓴 것은 외척을 기르지 않으려는 일이었다. 그래서 근친(近親) 없는 처녀를 구하여 며느님으로 삼는다는 것이 오늘날 도리어 호랑이를 맞아들인 것이나 일반으로 되었다.

태공은 며칠을 입궐치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또 한가지의 기괴하고도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 ×

본시 왕은 왕비와의 새가 좋지 못하셨다. 왕은 궁녀 중의 이상궁을 총애하셔서 한 아드님까지 보셨다. 즉 완화군(完和君)이 이상궁의 몸에서 난 왕자였다.

그러는 동안에 왕비도 활동을 하여 이상궁에게 부어지던 왕의 애정을 왕비 당신에게 끌어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고 왕자까지 보셨으니 곧 순종(純宗)이시다.

그러나 왕비와 새가 좋지 못한 태공은 왕비 탄생의 왕자를 사랑치 않고 이상궁 소생의 완화군을 사랑하였다. 대내에 들어갈 때마다 완화군을 오래서 붙안고 얼리며 사랑하였다.

그랬는데 이 이상궁과 완화군이 대궐에서 그림자같이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어떤 날 태공이 대내에 들어가서 예와 같이 완화군을 안고,

『참 영특도 허다 왕손 싸군.』

하며 얼릴 때에 궁녀가 왕비 탄생의 왕자도 할아버님 앞에 모셔 왔다.

태공은 왕비 탄생의 왕자는 보지도 않고 완화군만 그냥 얼리고 있었다. 그것을 멀리서 보던 왕비가 호령하여 당신 아드님을 데려갔다.

그때 왕비의 눈초리를 보고 태공은 몸서리쳤다.

그 일이 있은 二三일 뒤에 이상궁과 완화군은 대궐에서 사라져버렸다. 대궐에서만 사라질 뿐 아니라 그 이래 이 세상에서 종적이 사라졌다.

완화군 모자가 사라진 사건이 생긴 뒤에 거기 대한 문안을 왕께 드릴 때는, 왕도 이 문제만은 매우 근심되는 모양으로 묵묵히 계셨다.

『통 내세워서 찾아보리까?』

태공이 이렇게 여쭐 때에 왕은 마리(머리)를 가로저으섰다─

『찾어도 나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공은 묵묵히 나왔다. 그러나 속으로 울고 떨었다.

어찌하나, 차차 차차 더하여 가는 왕비의 경탄할 행동에 태공은 마음만 조일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는 해와 같은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돌아보며, 태공은 발을 구르고 하였다. 정부에 들어갈지라도 이전에는 모두 펄펄 죽더니, 지금은 슬슬 눈치만 기이려는 모양이 보였다. 자기의 세력이 몰락되어 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또 한 장 들어온 최익현의 상소문(민승호의 사촉으로 된)은 태공을 결정적으로 몰락케 하는 최후의 탄환이 되었다.

거기는 아주 노골적으로 대원군의 정치를 탄핵하고 대원군을 국정에 간섭치 못하게 하란 말이 있었다.

이 너무도 심한 상소문에 정부는 놀라서 최익현을 잡아서 금옥에 가두었다.

무론, 참(斬)될 줄 아무도 믿었다. 익현의 아들 영조(永祚)까지도 자기 아버지가 이번에는 꼭 참이 될 줄 알고 금오문(金吾門) 밖에 기다렸다.

아무리 태공의 세력이 꺾이었다 할지라도 이렇듯 노골적으로 태공을 욕한 이상에는 국법이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익현이 살아날 줄을 믿은 사람이 없었다. 다만 왕비와 민씨 一족과 최익현 당자만이 결과를 짐작하였을 뿐이다.

짐작은 하였다 하나 무론 명백히 알 배는 못 되었다. 왕비의 힘으로 구조해 내기로 되기는 되었지만, 아직 태공이 섭정으로 있는 이상에는 「꼭」 구원해 낸다고 단언은 못할 일일 것이었다. 이 투쟁에 있어서 왕비가 이기면 그것은 완전한 「태공 몰락」에 다름없었다. 왕비의 운동이 허사로 돌아가서 최익현이 참이 되면 아직 태공의 세력이 얼마 남아 있다는 것을 증좌함이다.

× ×

대각(臺閣)은 극형을 주장하였다. 거기 대하여 민씨 일족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왕의 결재를 구하였다.

왕은 이날 안색이 매우 창백하셨다. 왕의 곁에 있는 태공의 얼굴도 창백하였다.

왕은 묵묵히 한참을 계시다가 곁눈으로 아버님 태공을 한순간 보신 뒤에 곧 외면을 하시면서,

『최모의 행동은 국체를 문란케 하며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가증한 행동이니.』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잠시 주저하는 기색이 계시다가,

『제주에 유배를 하오.』

하고 맺으셨다.

태공은 칵 얼굴로 피가 솟아오르는 것을 참노라고 얼굴을 깊이 묻었다.

너무도 경한 이 처분에 조신들도 어안이 벙벙하였다.

전내는 죽은 듯, 기침 소리 하나 없는 가운데 태공은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한참 억제하고 있다가 겨우 머리를 좀 들었다─

『전하. 최모의 행동은 적성에서 나온 배니 영의정을 제수합시면 어떠옵니까?』

왕도 무안하신지 응답이 없으셨다.

태공은 일어섰다. 그냥 모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가운데로 태공은 발을 쿵쿵 울리며 나왔다.

남여를 달려서 운현궁으로 돌아오는 동안 태공의 눈에서는 억분으로 말미암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 ×

태공은 그날부터 청병하고 다시 입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왕비에게는 도리어 다행이었다. 왕비는 내의원(內醫院)에 명해서 태공을 가서 진찰하게 하고 또한 내의원에 밀령해서 「태공의 병환이 침중하니 얼마간 산수 명미한 곳에 가서 정양할 필요가 있습니다」고 상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一변으로는 내각을 전부 갈아서 공의 신임하던 사람은 모두 내몰고, 당신의 세력권 하에 들을만한 사람으로 새 내각을 조직하게 하였다.

이 기민한 왕비의 행동에 태공이 경악의 눈을 던질 때는, 태공의 세력은 이미 모두 부서저 나가고 왕비당으로 새로운 세력을 세워 놓은 뒤였다.

태공이 좀 어리석다 하여 돌보지 않던 (태공의 형이요 남연군의 셋째 아들) 흥인군 이최응을 붙들어다가 영의정을 삼고, 전조(前朝) 재상 이유원과 김병국을 좌우의정을 삼고 당신 一당 민규호를 이조판서 겸 무위도통사로 삼고 조대비의 작은 조카 조녕하를 훈련대장으로 삼고, 그밖 문무관에 모두 정략(政略)적으로 인물을 써서 튼튼한 내각이 되었다.

그러고 태공이 중용하던 인물을 모두 없이 함과 동시에 태공이 시설하였던 정치도 모도 꺾어 버렸다.

태공은 왕비의 이 기민하고 놀라운 행동에 입을 딱 벌렸다.

이제 그래도 단 한 가지 약간한 희망을 붙이고 있는 것은 왕 한 분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사람의 핏줄뿐 변치 않는 것. 아드님이야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하실 때가 계시겠지.

이 한 가지의 희망을 품고 태공은 분연히 서울을 떠나서 양주 별장으로 갔다. 표면은 정치의 번잡에 너무 고단해서 몸을 정양하러 온 것이라 하고 낚시질로 한세월을 보내는 체를 꾸미나, 내심으로는 인제 아드님이 부르실 날을 기다리노라고 마음은 늘 긴장하여 지났다.

그러나 아드님은 이 아버지를 잊으셨다. 비로소 지금 당신 손에 들어온 정권을 두르시는 자미에 아버지의 생각을 하실 겨를도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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