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5/벌번 반년

서울 중부 견평방(中部 堅平坊)

지금(1946년 현재)은 거기 서 있는 건물(建物)도 헐리어 없어져서 빈 터만 남았지만, 연전까지는 빈 벽돌집이나마 서 있었고, 그전 잠깐은 화재 뒤의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이 임시영업소로 썼고, 그전에는 수십 년간 종로경찰서의 청사(廳舍)로 사용되었고, 또 그전에는 ‘한성 전기회사’가 있던 곳.

그곳은 이태조 한양 정도 후에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두었던 곳이다. 순군만호부는 태종 이년에 순위부(巡衛府)라 이름을 고치었다가, 삼년에 다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라 칭하였다가, 십사년에 의금부(義禁府)라 다시 고친 것으로서, 속칭 왕옥(王獄) 왕부(王府) 금오청(金吾廳) 금부(禁府) 등등으로 불리우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태고 적부터 변함없이 동쪽으로 떴다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이 날도 여전히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집집의 지붕 위로 솟은 굴뚝에서는 마지막 연기까지도 사라지고 고요한 밤이 이르려 할 때였다.

고요한 밤은 바야흐로 이르려 한다. 그러나 의금부와 그 근처 일대의 공기뿐은, 어디인지 지적키는 힘드나 그다지 고요하지 못하였다. 무슨 중대한 일이 장차 벌어지려는 모양으로, 도사 나장들의 출입이 빈번하고 어디인지 불안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때는 광해주(光海主) 오년.

선조대왕 초엽에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두 사람 새의 변변찮은 시비에서 시작된 당쟁(黨爭)이, 임진난리라는 커다란 국난(國難) 때문에 잠시 가라앉았다가 난리 끝난 뒤부터 또다시 다툼이 시작되어, 그 당쟁 때문에 옥사(獄事)가 뒤달아 생겨나는 험난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니만치 금부의 공기가 평화롭지 못한 것은, 또한 한 가지의 사건이 생겨나려는 징조일시 분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전, 동래(東萊)의 어떤 은상(銀商)이 적지 않은 은을 말에 실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 오다가 조령(鳥嶺)서 불한당 떼를 만나서, 재물과 목숨을 한꺼번에 빼앗긴 사건이 있었다.

포청의 활동으로 그 불한당은 곧 잡혔다. 잡고 보니 그 불한당은, 정승 박순(政丞 朴淳)의 서자되는 박응서(朴應犀)였다. 뿐만 아니라, 그 떼거리들이 모두 서(庶)줄이나마 명문집 자제들이었다.

정부에서는 의심이 덜컥 났다. 아무리 서줄이나마 명문집 자제들만이 모여서 결당위도라는데, 의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시절이 시절이니만치, 그들의 배후에 무슨 줄이 없나 문초를 단단히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입에서 우러나온 토사는 가로되,

-역적 도모를 하였다.

-지금 임금을 내쫓고 영창대군(임금의 이복동생)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기를 꾀하였다.

-영창대군의 모후(母后)되는 인목대비(仁穆大妃)도 무론 아는 바이다.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되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도 배후의 인물이다.

놀라운 토사였다.

매에 못이겨 나온 거짓 토사인지 참말인지는 알 길이 없으되, 그들이 토사한 바의 사건만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인목대비라 하면 선왕 선조(先王 先祖)의 정후(正后)이며, 지금 임금의 생모는 아니나 당당한 적모(嫡母)였다.

또한 사정으로 따져 보자 하여도, 인목대비에게는 불평과 불만이 있을 것이었다. 당신은 선왕의 정후로서, 당신 몸에 영창대군이라 하는 적출(嫡出) 왕자가 있거늘, 적출의 왕위를 계승치 못하고 후궁(後宮) 탄생의 현 왕이 계승한 데 대하여는,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었다. 환경과 입장이 그러하니까 자식을 둔 어버이의 마음으로 혹은 어떤 다른 생각이 약간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다.

인목대비의 입장이 그러니까 대비의 친정 아버지 되는 김제남에게도 그런 불만은 무론 있었을 것이다. 그 위에 김제남은 인목대비보다는 한층 더 불평을 품게 될 이유가 따로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임금은 북인(北人)들을 더 신임하기 때문에, 서인(西人)인 김제남은 당파적으로도 또한 왕께 불평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인 위에, 박응서의 입에서 놀라운 토사까지 나왔으므로, 역적도모는 믿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이 되었다.

더우기 요로(要路)의 당직자인 정인홍(鄭仁弘)이며 이이첨(李爾瞻)등이 모두 북인인지라, 문제는 가장 나쁜 편으로 해결을 짓게 되었다.

그날 밤, 몸을 강뚱히 차린 나장 나졸의 한 무리는 의금부를 나서서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집으로 향하였다.

역적도모를 한 집안은 멸족을 당하는 법이었다. 김제남의 집안은 씨도 없이 없어지게 되었다.


“여보세요.”

“누구야.”

밖에서 부르는 소리, 그 소리에 응하여 안에서는 놀라 부르짖는 소리, 이와 같은 순간에 문이 황망히 열리며 무엇이 방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정신옹주(貞愼翁主-宣祖大王[선조대왕]의 庶[서] 따님)댁 내실이었다.

옹주의 남편 달성위(達城尉) 서경주는 사랑에 있고, 옹주 혼자서 그때 갓 상류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담배를 피어 물고 누워, 몸종에게 다리를 치라며 웃칸에서 읽는 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의 황급한 소리로‘여보세요’한 마디 부른 뒤에는 무엇이 방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무에냐.”

옹주는 깜짝 놀라서 화닥닥 일어났다. 그때에 뛰쳐 들어온 여인은 가슴에 품었던 것을 그 자리에 놓으며,

“부원군댁 되련님이옵니다. 부탁하옵니다.”

한 마디 하고 다시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가 도망쳐 버렸다.

돌연한 침입자에 사지가 저려졌던 옹주는, ‘부원군’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띄었다. 뜨이며 정신을 펄떡 차리고 귀를 기울이니, 담 하나 격하여 있는 이웃집(부원군 김제남의 집)에는 무슨 소란이 일어난 모양으로, 곡성이 울려 오며 우지끈 뚝딱, 변이 난 것이 분명하였다.

옹주는 사건의 전면을 직각하였다.

왕과 옹주와는 어머니는 다르나마 아버님을 같이한 오누이간이었다. 궁중과 부원군댁과의 새의 델리케잇한 관계를 짐작하는 옹주인지라, 이 밤에 생겨난 이웃집의 소란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부원군댁은 멸족이다. 멸족되는 부원군댁을, 그래도 씨나마 남겨 두고자 누구(그 집 일가든가 하인이든가)가 그 댁 도련님(난 지 몇 달이 못 된 갓난애였다)을 옹주댁으로 들이친 것이었다.

구해주지.

여자다운 인자스러운 감정 아래서, 옹주는 이 갓난애를 보호해 주기로 결심하였다.

“발설(發說)말아, 아예.”

그 방에 있던 하인들에게도 엄명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이 달성부(達城府) 대문을 부서져라 하고 밖에서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나장들일시 분명하였다.

한 갓난애의 거처를 잃어버린 포리들은, 이웃집들을 모두 뒤는 모양이었다.

“어찌하리까.”

벌떡 떠는 하인배에게 옹주는,

“내가 알아 하마.” 하고 갓난애를 몸소 그 품에 안았다.

대문에서는 나장들과 이 댁 하인들과의 새에 한두 마디 시비가 있은 뒤에는, 대문이 열리고 나장들이 우루루 들어온 모양이었다.

먼저 행랑을 다 뒤지었다. 그 뒤에 사랑을 뒤지었다. 내정까지 들어오려 하였다. 내정까지 들어오련다고 또 시비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마(駙馬)댁이라 할지라도, 역적의 족속이 숨어 있다는 혐의 아래 왕명으로 나장들을 항거할 수가 없었다.


부마궁의 내실까지 금오랑(金吾郞)의 발에 밟히우기 때문에, 억분하여 치를 떨고 있는 옹주며 이 댁 하인들.

댓돌 아래 딱 버티고 서서 내실을 감찰하는 금부 관원들.

여름이었다. 당연히 모시치마를 입었어야 할 옹주였다. 그런데 옹주의 입은 것은 열두 색 무명치마였다. 무명치마도 아침에 입은 것은 아니요, 낮에 입은 것도 아니요, 방금 입은 모양으로, 대림(火斗[화두])발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치마 아래가 유난히 불룩하였다. 금오랑이 의심을 둔 것은 옹주의 치마아래였다.

치마 아래 무엇을 감추었다. 부원군 댁에서 종적을 감춘 그 집 며느리와 손주—. 그 손주는 정녕코 지금 옹주의 치마 아래 숨어 있다.

분명히 있다고 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런 추측뿐으로 달려들어 치마를 들치고 보기에는, 상대자의 지위가 너무나 떳떳하였다.

옹주. 임금의 누이. 달려들어 치마를 들쳐 보아서, 거기에 어린애가 나서기만 하면 문제가 없지만, 헛물을 켜는 날에는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었다. 분명히 있다 보기는 보았지만, 금오랑은 달려들어 치마 아래를 검분할 용기까지는 없어서, 댓돌 아래 딱 버티고 서서 우러러보기만 하였다.

갓난애로 지금 혹은 잠들어 가만 있을지는 모르지만, 깨기만 하면 즉시 울어대리라. 치마 아래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나기만 하면, 그때야 옹주의 권병인들 무슨 용처가 있으랴.

반 각, 반 각이 일 각이 되도록 그냥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불룩한 치마는 그냥 불룩한 채로 아무 변동도 없었다.

“야, 다들 갔나부다. 문 닫고 금침 펴라, 졸린다.”

뻔히 자기네가 그냥 있는 것을 굽어보면서도, 옹주가 하인에게 이렇게 분부할 때는 금오랑들도 더 버티고 있을 핑계가 없어서 부마댁을 나왔다.

금오랑들이 다 물러간 뒤에 옹주는 치맛자락을 고요히 들쳤다. 그 아래서는 김제남 댁의 유일의 혈사인 어린애가 그냥 콜콜 자고 있었다.

“야, 하늘이 너를 살리셨다. 그동안 네가 깨지 않고 그냥 잤으니, 이것은 하늘이 너를 죽이기 싫어하심이다.”

갓난애를 품에 품어 올릴 때는, 옹주의 얼굴에는 이 너무도 신기하고 기이한 일 때문에 감격된 빛이 역연히 나타나 있었다.

이리하여, 멸족을 당한 김제남의 집안이건만 정통 후사는 끊기지 않았다.


정권(政權)은 완전히 임금과 및 이 임금의 신임하는 북인(北人)에게로 들어왔다.

남, 서(南西)인들은 연하여 멀리함을 받았다.

정권에서 쫓겨난 서인이며 남인들은, 삑삑이 여기저기로 숨어 다녔다. 이 임금이 그냥 위에 있을 동안은 자기네의 신상에는 다시 꽃필 날이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利)를 따르고 권을 좇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라, 이와 권에서 쫓겨난 서인이며 남인들은 자기네의 손아귀 안에 다시 권과 이를 잡아넣기 위하여서는, 이 임금을 위해서 내어보낼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이리하여 삑삑이 숨어 다니며 꾀를 꾀한 결과, 이 임금 십오년에 서인(西人) 김류 이귀 등 일파가 군사를 일으켜서 이 임금을 위에서 내어쫓고 정권을 자기네의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이 서인의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북인(北人)의 종자라고는 씨도 없이 없애 버리려고 얼마나 극단의 처치를 하였던지, 북인이라 지칭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려서, 겨우 스물여덟 집만이 액화를 면하였다. 후에 이르는 바 북인 이십팔 가(北人二十八家)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렇듯 북인이 참패를 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는 동시에, 그때부터 구년 전 정신옹주의 치마 아래서 겨우 죽음을 면한 이래, 지금껏 행방을 숨겨가면서 겨우 모진 목숨만 붙여 오던,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후사 소년도, 다시 광명한 일월 아래 머리를 내놓게 되었다. 뿐더러 인목대비의 친정 조카요 옛날 희생된 명가의 유일한 혈손으로서 서인 일파의 환호와지지 아래서, 이 소년은 다시 귀현의 열(列)에 서게가 되었다.


그로부터 일백육십여 년간, 정권은 오로지 서인들의 독점한 배 되었다. 때때로 남인이 머리를 끼어본 일이 있지만 이것은 예외요, 서인 홀로써 일백 육십 년간을 호화로운 꿈 속에 잠겨 살았다.

북인?

겨우 이십팔 가만 남은 북인들은, 낙향을 하여 정권에는 다시 손 대볼 염도 내지를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광해주 오년 김제남 사건이 일어날 때 이웃집인 달성위 댁에서 옹주의 치맛자락 아래서 겨우 모진 액화를 면한 갓난애의 후손들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일백육십 년간을 흘러 내려와서 정묘(正廟) 초엽.

때의 정승 김욱(金熤)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봉사손이었다.


“자. 인젠 바둑은 밀어 놓고 이야기들이나 하지.”

“그러세.”

여기는 약현(藥峴), 지금으로 이르자면 중림(中林)동 천주교 예배당이 있는 그쯤이었다.

세칭 약현대신(藥峴大臣)으로 불리는 김욱 상공댁 작은 사랑에는 이 댁 아들 김재찬(金載瓚)을 비롯하여 몇몇 소년 공자들이 놀고 있었다. 아직은 모두 당하관(堂下官)이나마, 원임(原任) 혹은 시임(時任) 대신들의 자제로서 장래의 상위(相位) 한 자리씩은 염려없이 돌아올 집안 자손들이었다.

“이야기 말이 났으니 말이지, 참 이창운(李昌運) 영감이 등단(登壇)을 했다지?”

“흥.”

소년 공자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조소(嘲笑)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했다나부데.”

“등단? 흥.”

문신(文臣)으로 상열(相列)에 오르는 것을 대배(大拜)라 일컫고, 무신으로 대장(大將)에 오르는 것을 등단(登壇)이라 한다.

일백육십 년 전 북인이 함멸을 당하고 겨우 이십팔 가가 남았던 그 한 사람의 후손이 이창운이, 이 서인의 서슬 푸르른 시절에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오른 것이었다. 여기 모인 소년들은 모두 서인의 자제요 문신의 자손이라, 무신 따위는 우습게 보고 북인 따위는 존재도 인정치 않는 소년들이었다.

“흥. 등단이 다 뭐야.”

“등단이나 했지 대배야 염엔들 내겠나?”

“등단도 분에 넘치지.”

“호반(虎班) 자리야 다 차지하라지.”

한결같은 조소가 나왔다.

무론 이 소년들에게 대장의 인부를 준다 할지라도, 도로혀 싫어할 것이었다. 사내 세상에 나서, 백면의 선비가 될지언정 대장이 되랴 무신(武臣)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북인의 한 사람이 대장의 인부를 띠게 되었다 할 때에, 그들은 약간 불쾌하였다. 저 먹기는 싫어도, 개 주기도 싫은 것이었다.

“여보게, 그런 변변찮은 이야기를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들이나 하세.”

주인격 되는 김재찬이가 말머리를 돌려 놓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으로 놀라운 소식, 소식이라기 보다 영(令)이 이 소년 공자 김재찬에게 온 것이었다.

이창운이 등단을 하고서 종사관(從事官)을 뽑는데 김재찬을 지적한 것이었다.

무신이 등단을 하면, 당하문관(堂下文官) 중에서 종사관 한 사람을 지적하여 뽑아간다. 이것을 ‘자벽(自辟)’이라 한다.

이 대장은 하고많은 당하문관 중에서 김재찬을 종사관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이것은 김재찬이며 김재찬의 아버지 약현대신뿐 아니라, 온 장안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서인의 서슬이 푸르른 시절에, 북인이 등단을 한 것만 하여도 기적이어늘, 등단하여서 자벽을 하려면, 이름 없는 문관 하나를 뽑아갈 것이지, 서인 중에서도 최고 명문댁 사자(嗣子)를 지적하단, 너무도 대담 무모한 짓이요 의표 외의 일이라, 온 장안이 깜짝 놀란 것이었다.

이 자벽에 김재찬이 출사(出仕)치 않으면 상관된 도리로서 천하에 얼굴을 들지 못할 수치라, 자결이라도 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재찬이 출사할 듯싶지도 않았다. 만약 출사를 하면 이 또한 서인집 자손으로 정승의 자식으로, 북인 무장의 막하가 된다는 일이라, 연안 김씨 문중의 수치이었다. 태평시대에 배를 두드리고 있던 온 장안은, 이 의외에 던져진 한 개 거파(巨波)에 눈을 휘둥그렇게 하였다.

과연 김재찬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자벽 지휘를 받은 그날 밤, 재찬은 역시 벗들을 자기집에 불러 가지고 질탕한 놀이만 하였다.

“여보게, 종사관.”

친구들이 농담삼아 이렇게 비웃으면 재찬도 역시,

“응, 왜 그러나.” 함께 웃어주고 하였다.


이튿날 또 그 이튿날, 어영청에서는 연방 출사하라는 영이 왔다. 그러나 재찬은 모른 체하고 친구들과 모아 가지고 놀기만 하였다.

그런데 제 사흘째 되는 날은 놀라운 보도가 뛰쳐 들어왔다.

습진령(習陣令)이 내렸다 하는 것이었다. 진은 동작(銅雀)이었다.


군관의 인솔한 군졸들이 우루루하니 약현대신 댁에 일로 몰려 들어올 때에, 대신은 퇴조하여 마침 사랑에 있을 때였다.

대신은 군관을 앞마당으로 불러들였다. 인제는 단단히 벌어진 일이었다.

이창운이 등단을 하고 자기의 아들을 종사관으로 자벽을 하였다 할 때에, 대신도 속으로는 외람되다 보았다. 자기의 아들이 거기에 응치 않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에 이창운을 아니꼽게 보던 차이라, 아들에게도 톡톡히 이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신으로도 자기의 가문과 권도를 믿느니만치 이창운이 차마 최후의 수단이야 쓰랴고, 그냥 두었던 것이었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이창운은 최후의 수단을 쓴 것이었다.

군관을 뜰 아래 불러 놓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고는 대신은 겨우 눈을 떴다.

“어떻게들 왔느냐.”

“다름이 아니오라 종사관 김재찬을 잡아 올리라는 사또의 분부로 왔습니다.”

“잡아다가는 군율로 시행할 테지?”

“……”

대신은 잠시를 또 생각하였다.

“응, 대문 밖에 나가서 잠시 기다려라. 종사관을 내보내 주마.”

“네이….” 도로 물러가는 군관의 뒷모양을 보면서 대신은 청지기를 불렀다.

“안사랑에 들어가서 서방님 부른다고 여쭈어라.”

“네이—.”

이윽고 나와서 웃목에 읍하고 서는 아들. 사건의 경과를 벌써 안 모양으로 얼굴이 창백하였다. 아버지는 한참을 아들을 쳐다보다가야 입을 열었다.

“너 아무리 선비일지라두, 군령을 어기면 어떤 율(律)을 쓰는지는 알지.”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냥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읍하고 서 있다. 아버지에게 구원하여 달라는 표정만은 분명하였다.

“나도 일국의 대신으로 앉아서 군법을 물시하라고는 할 수가 없어.”

“…….”

“너 들어가서 가묘(사당)에 하직하고, 어머님과 처자 권속에게도 작별을 하고, 의관 모두 벗어두고 죄인다이 하고 다시 나오너라.”

재찬이 들어가서 하직 작별 다 하고, 맨상투 맨저고리 바람으로 나올 때에, 대신은 무슨 편지를 하나 재찬에게 주었다.

“되진 않으리라마는, 사또께 드려나 봐라.”

편지를 아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동작리 습진터.

당상에 높이 않은 이 대장은, 맨상투 바람으로 결박지고 땅에 꿇어앉아 있는 소년을 굽어보았다.

재상가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리만치, 미우에 교양은 넘쳐 있지만, 그 준수한 얼굴이며 명민한 눈은, 잘 가꾸기만 하면 장차 국가에 큰 기둥이 될 것이다. 자기도 일찌기 이 소년의 비범한 기상을 들었기에 종사관으로 자벽까지 하였던 바였다.

소년의 등뒤에는 환도를 뽑아 들고 영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형졸.

잠시를 말없이 재찬을 굽어본 뒤에야 이 대장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죄를 알지.”

“황공하옵니다.”

“누구를 원망치 말아. 내가 너를 죽이는 게 아니고, 국법이 죽이는 게로다. 마지막 소원이나 있으면 말해 보아라.”

땅 위에 죄인은 결박진 채 몸을 약간 움찔움찔 하였다.

“무에냐.”

죄인은 그냥 몸만 움찔거렸다. 그때 그의 품에 품었던, 아버지 대신의 편지 끝이 옷깃 밖으로 비죽이 나왔다.

대장은 그것을 보았다. 죄인이 움찔거리던 것도 그 때문인 줄 짐작이 갔다.

“그게— 서간이냐?”

“네이.”

“네게 오는?”

“네이.”

“야, 그 서간 이리 올려라.”

군관이 재찬의 품에서 뽑아다 올리는 약현대신의 서간을, 대장은 받았다.

대장은 고요히 편지를 폈다.

“?”

백간(白簡)이었다.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었다.

대장은 백간을 펴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남보기에는 거기 씌어 있는 세세사정을 다 읽는 듯이.

백간의 뜻은 명료하였다.

일국의 재상으로 앉아서, 군율을 어긴 자기의 자식을 살려달라고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그것은 법을 어기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임 있는 재상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사지(死地)에 나아가는 아들을 그냥 무심히야 어찌 보내랴.

살려달라고는 할 수 없고 죽는 것을 묵시할 수도 없어서, 아무 사연도 적지 않은 흰 종이를 대장에게 보낸 것이었다.

한참 동안을 빈 종이를 들여다본 뒤에야 대장은 종이를 접어서 치우며 입을 열었다.

“오냐. 대감의 당부도 계시고 하니, 특별히 참(斬)은 면하여 주마, 그 대신 오늘부터 반 년간을 벌번(罰番)을 들렸다.”

땅에 꿇어서 칼이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재찬은, 이 이외의 처분에 안색이 한순간 창백하여졌다.


번(番)이라는 것은, 번갈아 들기 때문에 번이라 한다. 그러나 벌번이 되면 그 기간 동안은 줄곧 대두고 번을 들어야 한다.

번이라 할지라도 군졸의 번과는 달라서, 종사관의 번이라, 밤을 새는 것이 아니고, 영 안에서 밤을 지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벌번의 첫날, 동관(同官)이라 할지라도 무식한 무인(武人)들이라 함께 이야기할 거리도 되지 못하고 하여, 동관들이 놀음들을 하며 좋다고 지껄일 동안, 재찬은 먼저 자리에 들었다.

이리하여 한잠을 풀껏 자고 나니까 군졸이 들어와서 깨운다. 대장이 재찬을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장댁에서 부르느냐고 불어 보매, 댁이 나니라 벌써 출쳥하셨다 하는 것이었다.

재찬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면에 별만 반짝이는 품이, 아직 밝으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할 것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쯤이나 되느냐.”

“축시(丑時) 조금 지나겠습니다.”

재찬이 의관을 쓰다듬고 대장에게로 가니까 대장은 기다리고 있었다.

“응, 이리 가까이 오게.”

“……”

지위가 현격히 다르니만치, 아무리 가까이 오라 하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재찬은 그냥 읍하고 서 있었다.

“자, 이리 가까이 와.”

서너 차례를 불리우고야 재찬은 가까이로 내려갔다.

대장은 다른 말이 없었다. 품에서 무슨 종이를 꺼내었다. 쭉 펴는데 보니까, 사면 한 간은 넘을 만한 커다란 지도(地圖)였다.

“여기 와서 앉게.”

재찬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수삼차 불리고, 그 앞에 앉았다.

대장은 재찬을 곁에 앉히고 지도를 펴놓은 뒤에, 재찬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황평(黃平) 양도(兩道)의 지도.

여기서 여기까지가 몇 리(里)인데 그 가운데는 주막집이 몇 군데 있고, 이 장거리에서 저 고을까지는 이 길로 가면 몇 리로 지름길로 가면 몇 리며, 어느 장거리에는 장날마다 모여드는 나락이 대개 몇 석이 되며, 어느 촌락에는 군사 몇 명이 가서 얼마 동안을 지낼 만한 군량을 거둘 수 있으며, 어느 재는 높이가 얼마로서 넘기가 어떠할 것이며, 어느 산은 휘돌자면 며칠이 걸리고 넘자면 며칠이 걸리는데, 군사 몇 명 이내면 넘는 편이 쉽고 몇 명 이상이면 휘도는 편이 낫고….

아침 해가 꽤 높이 오르기까지, 이 대장은 재찬을 앞에 앉히고 이것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반 년간, 이 대장은 축시(丑時)가 조금 지나면 꼭 어김없이 나왔다. 그리고는 재찬을 불러 놓고 황평 양도의 지리 풍속 산물을, 그야말로 세미한 점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가르쳤다.

처음 며칠은 귀찮기도 하였지만, 차차 재찬도 탄복하였다.

선성(先聖)의 말씀에나 깊은 뜻이 잇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더니 아주 평범한 지리 산물 등도 연구하자면 끝이 없는 것이구나. 얼마나 연구하고 얼마나 생각하였기에 황평 양도의 좁지 않은 지역을 이다지도 골골히 다 알게 되었누.

한창 정신 좋은 나이였다. 게다가 새벽 정신이 드는 그 시각에 하루도 건너지 않고 배운 바였다.

벌번(罰番) 반 년, 반 년 뒤에는(아직 가보지도 못한 황평 양도거니와) 재찬은 눈만 감으면 황해도의 맨 앞부리로 비롯하여, 평안도의 맨 뒷부리까지가 서언히 눈앞을 보이고, 한 채의 집 한 그루의 고목까지라도 모두 볼 수가 있게끔 되었다.

이리하여 벌번 반 년도 끝난 그 마지막 날이었다.

이 대장은 재찬을 앞에 앉히고 감개무량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이 대장은 남들이 보는 것과 조금 다른 눈으로 시국을 보았다.

—지금 대국(大國, 즉 淸國[청국])에는 꽤 깊이 침입된 천주학(天主學)을 관찰하여 보았다. 결코 정녕코 천주학과 동방예의지국과의 새에 한 개 분규가 날 것으로 보았다. 일어난다면 싸움의 무대는 당연히 황평 양도로 볼 것이다.

자기가 대장으로 있는 동안에 사건이 전개되면, 자기 스스로 담당할 것이지만 자기 없는 뒤에 폭발되면 거기 당국할 만한 인재는?

이 대장은 당연히 순서로서 먼저 무신(武臣)들 중에서 장래 큰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을 물색하여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 한 사람도 그럼직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무신이 그럴 만한 인물이 없으면 문신 가운데서라도 골라야 하겠는데, 문신 가운데서 고르자면 여러 가지의 조건이 붙는다. 인재(人材)도 인재려니와 그 집안 문벌(門閥)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문신으로서 벙어사든가 순무사를 삼을 수는 없는 바요, 문신이 난리에 맡을 벼슬은 체찰사(體察使)인데 체찰사는 정승 가운데서 뽑는 것이요 정승은 명문집 자질이고야 된다.

이리하여 이 대장은 명문집 자제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결과, 종사관으로서 김욱 상공의 사자 김재찬을 골라낸 것이었다.

이 이 대장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재찬은 감격하여 잠시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였다.


그 뒤에 김재찬은 종사관 재직도 끝나고 수삼 곳 방백살이를 한 뒤에, 내직으로 들어가 정경(正卿)에 오르고, 정조(正祖)조를 지나서 순조(純祖)조에 들어서는 드디어 배상(拜相)을 하였다. 이 새 대신의 아버지 김욱 상공은 정조 말엽(末葉)에 세상을 떠났다.

우상에서 다시 좌상으로, 이리하여 재찬이 좌상의 위에 있을 때였다.

어떤날, 어떤 시골 노인 하나이 김 대신을 찾아 왔다.

사랑에는 문객 겸인의 무리가 그득히 차 있을 때였다. 그 늙은이는 영외에 읍하고 섰다.

“소인 문안 드리오.”

“?”

누구일까. 꽤 희뜩희뜩한 머리며, 많은 고생 때문에 얼굴 전면에 생긴 주름살로 보아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딘지 막연히 낯익은 점이 있었다. 대신은 누군가 판단하려는 듯이 위아래를 연하여 훑어보았다.

“생각이 잘 안나는데, 누구더라.”

“네이. 그러실 것이 올시다. 대감과 동문수학하온, 평안도 우군측(禹君則)이올시다.”

“오오!”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하였다. 너무도 반가웠다. 반가웠다기 보다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어서 들어오게.”

감감한 그 옛날 한 스승의 아래서 업을 닦던 학우(學友)였다. 한 스승의 아래서 학업을 닦던 적지 않은 학우들 중에, 당년의 소년 공자인 김재찬에게 온갖 방면으로 경쟁자이던 자가 우군측이었다. 뿐만 아이라, 경쟁에 있어서 열이면 여덟은 우군측이 승하였다.

그만치 쉽지 않은 천품을 타고난 우군측이었건만, 그 스승의 문하를 떠나서는 어찌 되었나. 한편은 그 가벌(家閥)의 덕으로, 오르고 올라서, 지금은 좌상(左相)이요 눈앞에 영상(領相)의 위가 걸려 있거늘, 다른 한편 쪽은 일생을 유전에 또 유전으로 지금껏 때국 흐르는 도포에 찌그러진 갓 하나를 튀켜 쓰고, 인생의 거친 길을 비츨거리며 걸어왔구나.

“자. 어서 들어오게. 그 새 어떻게나 지냈나.”

“죽지 않으니 살아 왔습니다.”

“여보게. 우… 우….”

무엇이라 부를지 몰랐다.

“자. 들어오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동문수학한 사이라 할지라도, 한편은 일국의 대신이요, 한편은 이름 없는 선비, 어찌 감히 영내로 들어오랴.

“자, 정자(亭子)로 나가지.”

대신은 거기 있는 문객 겸인들을 모두 그냥 버려두고, 우군측과 함께 정자로 돌아갔다.

“파탈하고 노세. 이야기라도 하세. 어려서 보고, 늙어서 다시 만났네그려.”

파탈하자 파탈하자 하지만 좀체 파탈이 되지 않았다. 대신은 얼마만치 가슴이 도로혀 송구하였다. 일찌기 어린 시절에는, 학업으로 도로혀 자기를 누르던 수재(秀才). 지금은 그 지위가 전도되기도 너무 과하였다.

그 날 술기운도 들어가고, 대신도 할 수 있는껏 파탈하려고 애를 써서, 군측의 마음도 얼마간 펴진 뒤에, 군측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것이었다.

“여보게 대감. 평안감사에게 수서(手書)를 하나 써 주게.”

“무슨?”

“환곡미(還穀米) 오천 석만 내게 잠깐 돌려주라는 편지 하나만 써 주게. 그렇게 하면, 나는 그것을 돌려 취리(取利)를 해서, 일 년간에 오천 석은 도로 갚고, 그간 남긴 것은 그래도 이 늙은 입을 굶기지는 안 겠구먼.”

“갚기야 한다면야 그것쯤 못하겠나. 내게 손해 없구. 생색 나구, 친구 하나 살리구, 자네가 갚지 않는다면 내가 갚긴들 못하겠나. 그렇게 하세.”

“그럼 하나 써 주게.”

이리하여 우군측은 김재찬에게서 평안감사에게로 보내는 편지 한 장을 받아 가지고, 치사하고 치사하며 대신댁을 하직하였다.

그날 밤 자리에 든 대신은,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나라의 제도(制度)상의 커다란 결함이 새삼스러이 느껴졌다.

지금 조정을 둘러보건대, 과연 어중이 떠중이들이 단지 그 집안의 문벌 때문에 금관자(金貫子)니 환옥(還玉)관자니 하고 높은 수레에 올라서 장안을 활보하고 있다.

그러한 한편에는, 단지 양반의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였다는 죄로, 아까운 재질을 품고도 헛된 일생을 보내다가 그냥 묻혀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랴.

더우기 이 나라의 제도는, 평안도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다. 평안도 사람이라면 상통천문 하달지리 어떠한 기재(奇才)이든간에 절대로 높이 써주지 않는다.

여기 불만이 생겨나지 않을까. 불만이 쌓이면 폭발될 날이 있지 않을까?

옛날, 대신 자신의 집안 조상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죽은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던가, 그것은 이 나라의 제도상, 서자(庶子)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간이 있을지라도 높이 안 써주는 불만에서 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의 무리가 반항적 행동을 위한 데 얽히고 들어, 액화를 보지 않았던가.

서자를 써주지 않는다는 데서도 그런 변란이 일어났거늘, 한 지역(地域) 평안도 사람이면 그저 써주지 않는다면, 그런 제도가 끝끝내 서 나아갈까. 더우기 평안도 사람의 괄괄한 성미로서.

은인(恩人) 이창운 대장이 황평 양도의 지리를 자기에게 가르쳐줄 때 말에는 외국에 방비함이라 하였다. 그러나 외국도 외국이려니와 평안도라 하는 지역을 삼가는 마음에서 그리 한 것은 아니었을까.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뒤섞이어 나와서, 대신은 밤새도록 전전불매하였다.


순조(純祖) 십일년 섣달.

설 준비라 새해맞이 준비에 눈코 뜰 새 없는 이 장안에, 놀라운 소실이 뛰쳐 들어왔다.

평안도 사람 홍경래(洪景來)가 가산(嘉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는 것이었다.

삼백 년간 쌓이고 쌓였던 분만과 불만이었다. 평안도인은 모두 경래의 산하로 모여들었다. 정주, 곽산, 삽시간에 함락되고 사면에서 홍장군 환호성이 우레같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랐다. 단지 가벌의 덕으로 벼슬깨나 얻어 하고, 공자 맹자나 외울 줄 알던 재신들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이러한 변란에 직면하여 대신들 가운데 군사에 정통한 사람은, 오직 좌의정 김재찬뿐이었다. 김재찬의 의견으로 장신(將臣) 이요헌(李堯憲)으로 순무사를 삼아 토벌군을 떠나보냈다.

동시에 김재찬은 영의정 도체찰사(領議政都體察使)를 배수하였다.

온 문무 재상들이 깜짝 놀란 것은, 수상 갬재찬이 황평 양도의 지리를 그야말로 그 근처의 사람보다도 더 밝히 아는 점이었다.

도체찰사로서 토벌군을 지휘함에 있어서, 어느 주막거리 어느 동네에서는 군량 얼마를 징수할 수 있으리라는 그 지휘까지, 여합부절히 맞을 때에, 토벌군의 장졸은 도체찰사의 귀신 같은 지혜에 놀라는 동시에 이런 제찰사의 지휘 아래서 행동을 하는지라 반드시 이기리라는 굳은 신념으로써 행동하였다.


도체찰사로서 마음에 송구한 것은 우군측(禹君則)의 사건이었다.

우군측이 평안감사에게 환곡미 오천 석을 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홍경래의 난리가 일어났다. 동시에 홍경래의 참모(參謀)는 우군측이라는 보도도 이르렀다. 그러면 그 오천 석은 반군의 군량이 됨이 분명하였다.

말하자면 재상이 반군의 군량 오천 석을 마련하여 준 셈이 되었다.

이것이 만약 깐땃 뒤집혀 잡히기만 하면, 역당의 일인으로 몰리기가 십상팔구일 것이다.

이 난리 평성에, 도체찰사의 귀신과 같이 밝은 지휘가 커다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면, 김재찬은 반드시 역당의 군량을 뒤대어 주었다는 혐의로 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너무도 놀라운 지식으로써 역당을 평정하였으니만치,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이 난리에 있어서 도체찰사의 놀라운 지휘만 없었다면, 이 세상은 반드시 한번 뒤집히었을 것이었다. 평안도 사람의 괄괄한 성미로써, 일시에 일어나고 향응하였던 홍경래군은, 넉넉히 조선천지(문약하고 우매한)를 한번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도체찰사의 귀신 같은 지휘와 온 국력을 다하여서도 반 년간을 끄을다가야 겨우 평정이 되었다.

논공행상을 한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영상 김재찬은 눈시울을 흐르는 까닭모를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홍경래며 우군측을 그르다 할 수 없었다. 자기도 그런 입장에 있으면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리라고 보증할 수 없었다. 이 나라에 제도가 고약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은 은인 이창운 대장이었다.

이 대장께 벌번 반 년간을 들면서 배운 지식만 없었더면, 오늘날 이 국가의 평화는 다시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홍씨라는 임금이 서고 평양이 서울이 되고 국호는 고려 혹은 고구려 쯤으로 되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평화- 이것은 전혀 고 이 대장의 덕이다. 이 대장은 혹은 전혀 다른 견해 아래서 자기에게 그런 지식을 전수하였는지 모르지만, 국가에 유익하게 사용되기는 마찬가지로, 다시 평화와 조선 왕국을 회복한 것은 전혀 이 대장의 덕이다.


눈 좌우편으로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늙은 대신-.

황혼의 해는 차차 서편 산 뒤로 기울어지려는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