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3/깨어진 물동이

길을 가는 손으로서 평산읍 하(平山邑 下)를 지나로라면 길로 향한 대로변에 서향하여 한 개 묘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리라. 그리고 그 묘소에서 한 십여 보 오른손 쪽에 동향하여 또 한 개의 묘소가 있는 것도 능히 볼 수 있으리라.

오래 눈비에 부대끼어 묘비의 명(銘)은 똑똑히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검분하면 서향하여 있는 우하형(禹夏亨)의 묘소라는 것을 알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소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우하형의 작은 댁의 묘소이다.

어디 있는 어느 무덤이든 간에 그 무덤의 주인의 생전사를 들추어 보자면 몇 토막의 로맨스가 드러나지 않는 자가 없겠지만 이 우하형과 작은댁 새의 로맨스는 모든 로맨스 가운데도 가장 아름답고 순정에 넘치는 자이다.

그러면 그 로맨스는 어떤 것이가. 그것을 어디 한번 상고하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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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형은 武科에 급제하여 관서 방어(關西 防禦)의 임에 있는 사람이었다.

옛날에는 장상(將相)이라 하여 장수와 정승을 동등으로 치고 더우기 대장은 어전에 뵈려면 뵈올 시각을 기다려야 뵐 수가 있었지만 대장은 언제든지 임군께 뵈올 특권까지 가져서 어떤 의미로 보자면 장수의 권한이 정승보다 더 높았다.

그것이 이조시대에 들어서면부터는 유학(儒學)의 세력을 너무도 세워 주었기 때문에 차차 문신의 세력이 높아 가고 무신(武臣)은 초라하게 여기는 풍습이 생겼다.

세조대왕이 등극하신 뒤에는 나라이 문약(文弱)해 가는 것을 근심하신 나머지에 무사들을 많이 구하기 위하여 무과(武科) 과거를 끊임없이 보았다. 그리고 활을 잘 쏜다는가 돌팔매를 잘한다든가 힘이 세다든가 싸움을 잘한다는가 한 가지 재간만 가진 사람이면 모두 급제를 시켰다.

그랬는지라 무과에 급제를 하는 사람의 수효는 엉뚱히 많아진 대신에 그 질(質)은 매우 떨어졌다. 머슴살이하다가 급제한 사람 동냥질하다가 급제한 사람 쌈패 노릇 하다가 급제한 사람- 이렇듯 어중이 떠중이가 모두 무과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선비 출신의 문사들은 더욱이 무사들을 멸시하였다.

그러한 한 가지의 예로서는 임진란에 혁혁한 무공을 세워서 해신(海神)이란 칭호까지 듣던 이순신 같은 이도 한낱 이름없는 문사의 참소 때문에 증거 조사도 하지 않고 벼슬을 깎고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 주인공인 우하형은 무사 가운데도 말직(末職)이요 말직 가운데도 또한 보외(補外)였다.

이것만으로도 남의 수모를 넉넉히 살 만한 것인데 그 위에 우 하형은 가난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래도 벼슬아치니 삼순구식이야 했으랴만 관급(官給)의 박한 녹으로써 겨우 이렁저렁 죽이나 끊여 먹고 지내느니만치 가난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삼십이 지나도록 총각으로 지냈다 하니 얼마나 가세가 빈한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그가 관서에 한 한미한 말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 빈한한 노총각은 그래도 구실아치의 체면상 머리 위에 상투를 틀고 그 명색 없는 상투를 건들거리며 강변을 순시하고 있었다.

상류 쪽에서 하류 쪽으로 흐르는 물의 줄기를 따라서 차차 내려가던 이 노총각은 좀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딱 멈추었다.

이 노총각이 발을 멈춘 곳서 여남은 걸음쯤 되는 아래쪽에 강가에 돌이 하나 있었다. 그 돌 위에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었다. 적적히 말하자면 처녀였다. 좀더 적절히 말하자면 빨래하는 처녀였다. 나이는 이십 살 전후- 강을 향하여 앉아 있는 만치 처녀의 얼굴은 볼바이 없으나 삼단 같은 머리채 곁으로 약간 보이는 풍만한 뺨이며 빨래 방망이를 두르는 그 어깨의 활발스러운 운동이며 허리로 엉덩이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가 모두 청춘으로 터질 듯이 무르익은 여인이었다.

삼십 총각- 돈이 원수로 아직 장가도 못 들었지만 장가도 못 드니만치 하형의 가슴 속에는 이성에 대한 욕구가 넘쳐 쏟아질 듯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몸까지 비츨비츨 하였다. 삼십 총각-총각 중에도 신체가 건강한 무사, 눈앞에 보이는 이 처녀 때문에 머리까지 아질아질하였다.

힘있게 방망이를 내릴 때마다 찡그리는 뺨이며 빨래를 물에 헤울 때마다 쫑그리고 앉은 엉덩이의 움직이는 곡선- 건강한 노총각의 마음이 안동하려야 안 동할 수가 없었다.

돌아보면 인도가 드문 곳- 더욱기 당시의 무사들은 대우상 불평이 많으니만치 그 분풀이삼아 상민들에게는 아주 난폭하였는지라 만약 이곳서 자기가 점잖치 못한 짓을 하고 그것이 길 가는 사람의 눈에 뜨인다 할지라도 길 가는 사람이 도로혀 못 본 체하고 도망을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형은 그 위인 비교적 점잖았다. 불공평한 시대의 무사로 태어나서 가난과 수모의 반생은 보냈을지언정, 불의한 일까지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하형은 마치 그 자리에 발이 붙는 듯이 눈이 멍하니 서 있었다. 한 각이 지나고 두 각이 지나고 한 나절이 지나도록 망석중이와 같이 먹먹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황혼이 거진 되어서 처녀는 빨래를 다 하였다. 다한 빨래를 짜서 광주리에 담고 그 광주리를 머리에 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광주에 담긴 빨래가 너무도 많았다. 처녀의 힘으로는 그 광주리를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쳐들어서 머리에 일 힘은 없는 모양이었다. 머리에 이려고 거의거의 가슴까지 올렸다가는 다시 덜석 놓고 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 이렇게 몇 번을 하여보다가 종내 단념을 하였는지 돌 위에 광주리를 내려놓고 말았다. 그리고 길에 행인이라도 있으면 조력(助力)을 청하려는지 행길을 한 번 훑어보았다. 훑어보던 누너은 거기 망두석(望頭石)과 같이 서 있는 우 하형을 발견하였다. 한 순간 처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다른데로 눈을 돌릴고 말았다. 아마 남자- 더욱이 무사가 서 있는지라 질겁을 한 모양이었다.

하형은 처녀의 속을 알았다.

‘내 이어 줄까.’

목구멍까지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말이었으나 입밖에는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삼십이 지났지만 그래도 총각이노라고 수저웠다.

등에서는 식음땀까지 흘렀다.

처녀는 다른 행인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늙은이거나 여인이거나 말 붙이기 쑥스럽지 않은 행인이 지나가면 그때 이어 달라려는 셈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불행히(하형에게 다행이다) 다른 행인은 없었다. 날은 차차 어두워 가는데 하형은 망부석(望夫石)과 같이 서 있고 처녀는 행길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그리고 만약 이대로 지나다가는 밤이 되고 밤이 새고 이튿날이 되고 사흘 나흘이 되어도 하형은 망부석으로 처녀는 광주리 보초(步哨)로 지낼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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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형이 크게 결심하였다. 큰 용기를 내었다. 하형은 먼저 기침을 한번 크게 하였다. 그 기침 소리에 처녀가 힐끗 볼 때에 하형은 한걸음 나서며 또 한번 기침을 하고 그 뒤에는 두말 없이 성큼성큼 가서 광주리를 휙 쳐들었다. 그리고 자기게로 성큼성큼 오는 하형에게 놀라서 벌떡 일어서는 처녀의 머리 위에 광주리를 턱 올려 놓았다.

“자. 이고 가!”

한순간 새파랗게 질렸던 처녀는 이 하형의 성난 듯한 목소리에 그만 픽 웃음면서 힐끗 보는 눈에 넘친 애교- 그만 하형도 같이 웃어 버렸다.

이런 때에 임하여 조선 사람은 입에 발린 인사를 할 줄 모른다. 무거운 광주리를 이기 때문에 머리를 자유로 움직일 수 없는 처녀가 곁눈으로 하형을 보면서 눈가에 미소를 나타낸 것-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인사였다.

“제기랄. 몹시 무겁다. 집이 어디인가.”

하형의 음성은 역시 뚝 하였다.

“저 산 아래야요.”

양손으로 광주리를 붙들기 때문에 손으로 가리키지 못하고 턱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매, 저 건너편 산 아래 십여집 자그마한 동리가 저녁 안개틈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벌써 날이 꽤 어두웠는지라 게까지 가자면 캄캄하게 될 것이었다.

“제법 멀세. 어둡겠구먼.”

“캄캄해지겠지요.”

“왜 진작 이어 달랬더면 밝아서 가지.”

“그러시거든 좀 진작 이어 주시지요.”

“빨리 가게.”

처녀는 발을 떼었다.

차차 멀어져서 어두운 안개 틈으로 사라져 가는 처녀의 뒷모양을 하형은 강변에 서서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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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하형은 잠을 못 잤다.

이튿날 비번(非番)이라 종일 집에서 눈이 퀭하니 지냈다.

이튿날 밤은 몸에 오한이 났다.

또 그 이튿날 번을 서려 들어갔던 하형은 졸도(卒倒)를 하여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하형이 그 날의 처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것은 겨우 한순간이었다.

처녀가 광주리 이어 줄 사람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릴 때에 한 십여보 밖에서 한순간 본 그 뿐이었다. 그 전에는 겨우 머리채 틈으로 보이는 왼편 뺨만 보았다. 그뒤에는 측면만 보았다. 그러나 하형에게는 잊히지 않는 그 얼굴이었다. 눈에 흘리던 미소, 풍만한 어깨와 목과 뺨 삼단 같던 머리 복스럽던 코-더우기 하형의 말에 대답하던 그 측면의 입술- 그 음성- 삼십 총각이 삼십년 생애에 처음으로 가까이 본 이 처녀였다. 눈을 감아도 처녀의 환영이요 눈을 떠도 처녀의 환영이요 생각하느니 처녀의 생각뿐이었다. 한인(漢人)이 발명한 오매불망이라는 문자는 이때의 마음을 위하여 미리 만들어 두었던 듯 싶었다.

이틀-사흘-나흘- 그 건장하던 하형의 신체가 겨우 겨우 일간에 알아보기 힘들도록 조췌하였다.

“여보게. 자네 웬일인가. 의원 부르랴.”

“아니.”

적적히 웃는 하형의 입가에는 오륙십 살 난 늙은이같이 주름살까지 잡혔다. 병이란 것은 앓아 보지도 않았거니와 웬만한 중병을 앓은댔자 그렇듯 건장하던 몸이 삼사 일 새에 이렇게 초췌할 까닭이 없다. 하형의 몸을 이렇듯 단시일 내에 꺾어 놓은 이 병이야말로 요병(妖病)이었다.

나흘 닷새- 총각의 수저운 마음은 동관들에게 말조차 못하엿다. 그리고 혼자서 한숨을 쉬고 가슴을 두드리고 입맛을 다시고 하였다.

그러다 못하여 드디어 마지막 결심을 하였다.

처녀의 집을 찾아서 처녀가 아직 정혼을 안하였으면 자기게 달라고 애원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만약 벌써 정혼을 하였다면?

그야말로 큰 변이었다. 일천한 무사의 마음이라 한 번 굳게 먹은 생각을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러니 하형의 직한 마음은 위력으로 겁탈을 할 수도 없고 상사병에 황천길을 떠날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오육 일간을 잠도 못자고 음식도 못 먹기 때문에 귀신과 같이 된 몸을 비츨비츨 하면서 하형은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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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처녀가 턱으로 가리키던 산 아래 작다란 마을. 이르러 보니 한 십여호의 초가 오막살이가 널려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집이 그 처녀의 집일까. 이 집 딸이 일전에 강가에 빨래간 일이 있었소? 하고 일일이 물어 보짇도 못할 노릇이요 집은 겨우 십여 호라 이름 성명 모르는 처녀를 찾기가 난망하였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때는 이월 아직도 추운 시절이라 모두들 문을 닫고 있으므로 문밖에 놓여 있는 신발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자 어떻게 찾나. 여보소 처녀 처녀 하고 외치며 돌아다닐까. 하루에 한 집씩 작정하고 종일 문밖에서 지켜서 부엌이나 뒷간에 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분할까.

민망히 어름거리던 하형은 한 가지의 수룰 발견하였다.

우물에 가서 지키기로 하였다. 끼니 때가 거진 되면 여인들은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올 것이다. 먼발에서 우물을 지키고 있노라면 혹은 만나게 될는지도 알 수 없다. 웬만하면 만나게도 될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짚을 붙드는 격으로 우물에다가 일루의 희망을 붙이고 하형은 그 동리의 우물을 찾아갔다. 그리고 우물에 왕래하는 사람을 다 볼 수가 있는 곳을 얻어 가지고 먼발서나마 아닌 체하고 우물을 지키기로 하였다. 노파가 하나 우물에 다녀갔다. 그다음에는 열 두세 살 난 계집애가 하나 다녀갔다. 그 다음에는 중늙은이가 다녀갔다. 그런 뒤에는 발이 끊어졌다.

사람이 우물가로 올 때마다 하형은 가슴이 철석철석 하였다. 번히 노파인줄 알면서도 먼발인 때문에 잘못 보지나 않았나 하여 분주히 따라가서 마주 보고하였다. 중늙이에게는 별 녀석 다보겠다는 욕까지 얻어 먹었다. 그러나 그만 욕쯤은 하형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잠시 뜸하였다가 우물에 다시 사람이 왔다. 젊은 아낙 두사람이었다. 물을 길어 가기조 하나는 동으로 가고 하는는 서로 갔다. 어느편을 따라가 보랴.

하형은 갈팡질팡하였다. 그러다가 서편으로 간 여인을 따라서 마주 서서 보았다. 뚱딴지 낯짝 같은 여편네였다. 그 여인은 바람기나 있는 모양으로 하형이 마주 서서 보매 눈을 짤깃 하였다. 그러나 하형은 그런 것을 살필 처지가 못 되었다. 다시 돌아서서 동쪽으로 간 자를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서도 목적한 바 처녀를 못 발견하고 제자리로 향 할 때는 하형의 입에서는 기다란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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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혼이나 되어서 하형은 드디어 처녀를 만났다. 물길러 나온 사람이 정녕코 그 날의 그 처녀임을 알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마주보매 그 때 방흐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려던 처녀도 마주 보고 하형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처녀의 얼굴이 다홍빛이 되었다. 처녀도 비츨비츨 하였다.

머리로 올라가던 물동이가 그의 손에서 내려졌다. 철석 하니 발 아래서 깨어지며 헤어지는 동이와 물.

“에구머니나.”

처녀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물동이를 깨뜨리기 때문에 낸 감탄사일까, 혹은 하형을 보기 때문에 낸 감탄사일까.

서로 마주 보았다. 말도 없이….

드디어 처녀가 먼저 제 이성(理性)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땅도 미끄럽기도 하다.”

동이를 내려뜨린 변명이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흙 바닥이 아니요 돌바닥인 우물가가 미끄러울 까닭이 없었다.

처녀는 밭을 돌이켰다. 제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하형은 허둥지둥 처녀의 뒤를 따라갔다.

처녀는 뒤를 다라오는 하형을 모르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제 집을 갔다.

그러나 모퉁이 길을 돌아설 때는 얼른 곁눈으로 하형을 보았다. 마치 이리로 오세요 하는 듯이….

처녀의 집에 마주 앉은 주인 처녀와 하형 처녀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나이는 열아홉. 본시 관비(官婢)의 딸로서 지금은 속량이 되었지만 부모 친척이 없이 홀로이 지내는 중이었다.

“나는 무변(武邊) 우(禹)씨인데 나 역시 천리타향의 외로운 몸이요 자네도 홀로 지낸다니 같이 해로를 하면 어떤가.”

하형이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물을 때에 처녀는 눈을 들어서 잠시 하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승낙하는 뜻으로 머리를 숙였다.

하형은 여기서 자기의 생활 처지를 처녀에게 말하였다. 집이 가난하고 벼슬이 말직으로 아무 보잘것이 없는 자기의 처지를 감추지 않고 처녀에게 말하였다. 처녀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재산은 벌면 될 것이요 지위는 전정이구만 리니 아직 말할 바가 아니라 다만 마음 하나만 바르면 그 밖에는 다른 욕망이 없다 하였다.

물론 종의 자식이메 정실은 되지 못할 것이다. 정실은 되지 못할지라도 끝끝내 버리지만 말아 주시면 자기는 자기의 정성을 다하여 섬기겠다는 것이 처녀의 의사였다.

정실은 못되나마 하형에게 있어서도 첫 번 여인이요 처녀에게 있어서도 첫번 사내였다. 육례는 모서 갖출지라도 사주단자를 교환하고 길일을 받아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처녀의 지어주는 저녁까지 먹었다. 정성은 드린 것이지만 반찬도 없는 초라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하형은 삼십 년 평생에 그런 맛있는 음식은 먹어 본 일이 없었다. 너무도 입이 달아서 김치 국물까지 훌훌 다 들여마시매 처녀가 미안하여,

“좀더 드리리까.”

할 때에야 하형은 비로소 너무 과식한 것을 깨달았다. 무변인 줄을 알기 때문에 넉넉히 많이 준 것을 하형은 정신 없이 다 먹어 버린 것이었다.

처녀를 작별하고 그 집을 나설때는 하형의 마음은 기쁨으로 터질 듯 하였다.

우러러보면 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별들로 모두 자기의 오늘의 행복을 축복하는 듯하였다. 옛날의 어느 처녀는 시집가기 며칠 전하여 마음에는 무한히 기쁘나 차마 자랑할 수가 없어서 제 집에 기르는 개에게 향하여 나는 시집간다고 자랑하였다는 것과 같이 이 날의 하형의 마음이야말로 자기의 행복을 천하에 자랑하고 싶었다.

“별들아 나는 며칠 뒤에 색시를 맞아온단다.”

삼십 년을 총각으로 지낸 그였었다. 쓸쓸한 빈 집에 돌아와서 이부자리를 방 안에 쫙 펼 때에도 며칠 뒤부터는 이 이부자리를 펴 줄 사람이 생기리라는 기쁨 때문에 미친 사람같이 혼자서 벙글벙글 하였다.

이튿날 번에 들어가매 어제까지도 죽을 듯이 기운 없던 사람이 너무도 활발스럽고 호쾌하게 굴므로 그의 동관들은 어이가 없어서 눈이 멀진 멀진 그 꼴을 바라보았다.

하형에게는 사실 이 세상이 갑자기 너무도 밝고 광채있게 변한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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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림이 시작되었다.

벙어리의 첫서방 맛이라 하지만 하형의 첫계집 맛이 그와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는가 하면 어느덧 저녁이 된다. 저녁이 되느니가 하면 어느덧 밤이 새고 날이 밝는다. 이전 총각 시절에는 그렇게도 싱겁고 지루하던 세월이 웬 셈인지 너무도 빨리 가서 탈이었다. 마주 앉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삼분의 일도 하기 전에 잘 때가 되고 넉넉히 자지도 못하였는데 아침이 되고- 말하자면 아직껏은 하루가 열두시인 줄 알았더니 여편네를 맞은 뒤에는 하루가 너덧 시 밖에 못 되는 듯 하였다.

그 어떤날 하형은 제 새 안해에게 생활 방침의 플랜을 의논하여 보았다.

“서로 이렇게 살림이랍쇼 시작은 하였지만 어떻게 지낼까.”

사실 딱한 문제였다. 혼잣살림에도 부족하던 녹(祿)이었다. 두 사람의 입에 풀칠을 하기는 염도 낼 수가 없었다. 살림은 시작은 하였지만 이것이 가장 긘급한 문제였다.

그런데 안해는 그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치 않는 듯하였다.

“어떻게 되겠지요.”

이것이 안해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어떻게 되겠느냐 말이야.”

“생각해 보세요. 제가 오기 전에도 나리는 굶지야 않으셨겠지요. 저도 나리께 오기 전에도 굶고 지내지는 않았어요. 굶지 않던 사람 두 사람이 모여서 왜 굶게 되겠읍니까.”

이치로 따져 보자면 딴은 그렇기도 하다. 굶지 않던 사람끼리인지라 두 사람이 되었다고 갑자기 굶어질 까닭이 없다. 그러나 생활의 문제가 그렇듯 단순하게 해결될 것이 아니다.

하형은 그래도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때에 그의 안해는 얼굴에 미소를 넘쳐 가지고 하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왜 그리 잔 걱정이 많으세요. 나리께서는 나리 할 일만 넉넉히 당해 나가세요. 집안 다스리기는 여인의 할 일이니 그저 가만 두고 조시기만 하세요. 제가 본시 나리께 허락한 것은 호강을 하자고 한바도 이니요 나리를 보매 녹록한 분이 아니로서 장래 한 번 고함치실 날이 계시겠기에 그것을 보고 온 것이니까 호강을 원치 않아요. 나리 힘 자라시는껏 벌어주시면 저는 제 힘 자라는껏 공궤를 하겠사오니 아무 다른 염려 마세요,”

그리고 거기 대하여 하형이 다시 무슨 말을 하여 할 때에 안해는 딴 말을 꺼내어 하형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 뒤에도 가끔 하형이 살림살이에 대하여 걱정을 하려면 안해는 다른 말을 꺼내어서 그 말을 무시하여 버리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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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형은 내심 민망하였다. 자기도 번히 아는 바다. 자기의 녹봉이란 지극히 박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자기 혼자서는 죽이라도 혹은 끊여 먹을 수 있었거니와 지금 식구가 둘이 되었으니 앞길이 난망하였다. 그래서 나오는 녹봉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갖다 안해에게 맡기고 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혼자서도 겨우 먹던 녹봉이라 지금 두 사람에서 먹자면 그야말로 삼순구식을 하려니 하였더니 의외로 삼순구식은커녕 이전 혼자 살 때보다 나날이 생활은 풍족하여졌다.

하형이 안해를 맞은 지 일 년쯤 뒤에는 그 집에 들어서 보면 수백 석 추수하도 하는 집안같이 환하고 깨끗하고 그 음식 범절이며 의복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축잡힐 곳이 없었다.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대범한 무사의 하형이라 그다지 캐어묻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물어 볼지라도 안해는 미소만 할 뿐이지 대답치 않았다.

“남자 대장부가 가내의 그런 소소한 일을 마음에 두어서 무얼 합니까.”

이러고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때 하형은 드디어 제 안해의 요술을 발견하였다.

번에 들어갔던 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제 집으로 돌아와 보매 그때 마침 그 안해는 무슨 바단옷을짓고 있다가 하형이 오는 바람에 황황히 감추어 버렸다.

그 또 어떤 날은 무슨 낯선 빨래를 많이 하도 있다가 하형이 오는 바람에 얼른 감출 수도 없고 민망하여 삥삥 도는 것을 보았다.

안해는 삯바느질과 삯빨래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형이 보면 미안하여할까 보아서 하형이 번드는 날을 택하여 하는 것이었다.

하형은 눈물겨워졌다.

내말을 알았다. 자기의 녹봉뿐으로 두 식구의 입에 풀칠조가 힘들것이다.

그런 박한 녹봉을 가지고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지내 온 것은 전혀 안해의 삯일 덕분이다. 그러나 삯일하는 것을 남편이 알면 미안하게 생각할까봐 보아서 남편이 없는 날을 택하여 하는 것이었다.

이 정성- 목석이 아닌 이상에 어찌 눈물 없이 볼 것인가.

하형은 모든 일을 다 알고도 그냥 모른 체 하였다. 모는 체하는 것이 한해에게 대란 대접이었다. 동시에 또한 안해에게 대한 호의였다.

이것을 안 뒤부터는 어떤 일이 생겨서 갑자기 집에 들어올일이 생겨도 대문 밖에서 일부러 크게 기침 몇 번을 하고 행전이 풀어지는 체하고 다시 매고 한참을 어름거려서 안해가 치울 것을 다 치우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제집에 들어오 하였다.

이러니만치 하형이 안해에게 대한 정성은 지극하였다. 가세가 반한하매 재정적으로는 호의를 나타내지 못하나마 온갖 일에 안해에게 지극하였다.

집안은 언제든 봄날과 같았다.

그의 동관들은 하형이 너무도 안해에게 충실한 것을 비웃느라고 ‘처시하(妻侍下)’라고 놀려 대는 일이 있었으되 하형은 오히려 더욱 처시하 못 된는 점을 한하였다.

이러한 꿈과 같은 즐거움 가운데서 세월은 흐로고 또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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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형의 임기(任期)가 다하였다.

임기가 다하여 돌아가게 되었으되 하형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와 같은 빈번한 미관(微官)이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장가들 것도 아니요 명색은 비록 소실이라 하나 지그미의 이 안해가 자기의 일생의 유일의 안해로 여기었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갈지라도 함께 가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안해가 반대를 하였다. 이 반대야말로 하형에게는 의외였다.

“왜 고향으로 돌아가세요?”

안해의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면 어쩌나?”

“전도가 양양한 남아가 왜 일생을 초야에 묻혀서 무의하게 보내세요.”

“그럼 어떻게 하나”

“서울로 가세요.”

“여보게. 그건 자네 모르는 말일세. 자네가 아무리 세상에 밝다기로서니 그런 일이야 어떻게 알겠나. 자네도 아다시피 적빈한 사람이야. 서울은 친척 친지 한 사람도 없어. 서울이란 비용도 무척 걸리는 곳이야. 게다가 하루이틀 새에 어떻게 될 바가 못 되고 수년간을 대가에 청탁하고 권문에 뇌물하고 한 뒤에야 약간 승차가 되는 법이야. 그러니 그야 어떻게 생각인들 하겠나. 이것저것 할 것 없이 고향 평산에 가서 몸이 튼튼하니 농사나 짓고 있노라면 일평생 굶기야 하겠나. 그래서 그만 고향으로 가려는 것일세.”

안해는 대답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 날 하형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매 안해는 혼자서 울고 있다가 하형이 들어오는 바람에 얼른 눈물을 씻고 일어나 앉았다.

하형은 못 본 체하였다.

안해는 한참을 돌아앉아서 눈 부은 것을 다 삭인 뒤에야 하형의 편으로 향하였다.

“여보세요.”

“응.”

“저것 보세요.”

안해가 가리키는 발치 쪽에는 꽤 커다란 더미가 있고 그것을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

“무엔가.”

“가서 보세요.”

하형은 가서 보자기를 들었다.

하형은 깜짝 놀랐다. 탁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손발,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보자기 아래는 돈- 돈도 짐작컨대 육칠백 냥의 큰 돈이 있는 것이다.

“이게 뭐인가.”

“여보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 새 수년간을 나리께 몰래 한 일이 있읍니다.

“….”

“삯바느질, 삯빨래, 부부는 일신이라 감추는 것이 도리가 아니지만 그래도 부끄러워서 차마 바른대로 여쭙지 못하고 몰래 했읍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하형도 이미 아는 일이다.

“게서 푼푼히 버는 돈으로 의식에 보태고 남는 것은 변놓이까지 하여 모은 것이 진합태산(塵合泰山)으로 육백여 냥이 되었읍니다. 그것을 가지고 서울로 가세요.”

무슨 말을 하랴. 하형의 눈에서는 눈물만 좔좔 쏟아졌다.

“서울로 가서 입신(立身)을 하세요. 뵙건대 참란된 말씀이나 녹록지 않으신 분으로 왜 일생을 초야에 묻혀서 보내리까. 이름을 천하에 날리세요.”

하형은 한참 눈물만 흘리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엇이라 할 말이 없네. 그러면 어서 상경할 준비를 하게.”

“나리 혼자서 상경하세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유를 아뢰리다. 첫째로는 제가 따라가면 구사(求仕)에 방해가 되겠삽고 둘째로는 나리 아직 미장가 전에 친첩이 있다면 출세에 방해되게 삽고 셋째로는 서울이 예와 달라서 낯선 곳에서 갑자기 품팔이가 마음대로 될 듯싶지도 않은데 두 사람이서 앉아서 먹자면 육백 냥이라도 부족이 쉽겠으니까 나리 혼자 올라가셔서 잘 공부하시고 장래 영달 하세요. 저는 여기서 나리 출세를 기자리겠읍니다.”

말마다 이치 있는 말에 더 우길 바이 없었다.

“그러면-.”

“십 년 한하고 공부하시면 금석인들 가히 뚫으리다. 어서 성공하세요.”

그 이별하던 가련한 정경을 여기 적어서 무엇하랴. 그것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하형은 안해를 시골에 남겨 두고 큰 뜻을 품고 혼자서 서울로 올라갔다.

시골에 혼자 남은 안해.

세상이 무너진 듯 일월이 없어진 듯 눈앞이 캄캄아호 막막하였다.

하형의 인물을 보매 잘하면 장래 크게는 되겠지만 크게 될 날까지 홀로 기다리기가 딱하기 끝이 없었다.

이전에는 그렇듯 빨리 가던 세월이 웬일인지 갑자기 무한 길어졌다. 밤이 길면 낮이 짧고 낮일 길면 밤이 짧은 것이 하늘으 정한 이치어늘 하형을 보낸 뒤에 여인에게는 무한히 긴 낮과 무한히 긴 밤이 교체될 뿐이었다.

서울로 따라가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래 출세에 방해가 될 일을 생각하면 그도 못하고 그냥 기다리자니 간장이 녹는 듯- 괴롭기 한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 하형에게서는 연달아 기별이 왔다. 연달아 오는 기별은 모두 한결같이 보고 싶고 그립다는 말뿐이었다.

낭군을 서울로 보내기는 하였다. 크게 성공합시다 제 마음을 죽이고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경한 남편이 만날 자기를 이렇듯 그리워면 심로(心勞) 때문에 병이나 나지 않아을까. 병이 안 난다고 할지라도 공부에는 정녕코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서울로 올라가랴.

그러나 올라갈지라도 출세에는 정녕코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나.

이도 못하고 저도 못할 처지에서 여인은 마음으로 발을 굴렀다.

이렇게 얼마를 지내다가 이 영일한 여인은 드디어 한 가지의 꾀를 내었다.

어떤 늙은 영리(營吏)에게 소실로 들어가시로 한 것이었다.

-본시 천한 태생이오며 더욱이 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고 그 위에 고독하여 의지할 곳이 없사오매 선들을 위하여 수절할 바이 없어서 팔자를 고치었으니 하해 같으신 마음으로 널리 용서하시고 장래 귀히 되셔서 현철하신 부인을 맞으셔서 길이길이 행복되게 지내옵소서.

이러한 한 장의 편지를 서울로 던지고 다른 남편을 구하여 갔다.

가기 전날 울었다. 밤이 새도록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였다. 팔자가 기박하여 서로 마음에 있으면서도 남편을 배반치 않을 수 없는 제 운명을 저주 하였다.

남편은 얼마나 자기를 욕하랴. 더러운 계집이라고 밉게 여기랴. 그러나 이것도 남편에게 대한 자기의 정성이었다.

🙝 🙟

마음씨 고운 사람은 하늘이 돌보셨다.

이 여인의 새 남편도 아주 마음 착한 사람이었다. 비록 소실이라 하나 큰댁은 없이 홀로 지내던 사람이라 집안을 온통 소실에 맡겼다. 그리고 그 집안도 부자라 할 수는 없었지만 먹고 지내기에는 부족이 없을 만하였다.

여인은 그 집의 주부로 들어앉으면서 즉시로 그 집의 재산을 조사하여 따로이 기록하여 두었다. 그리고 치산(治産)에 능한 이 여인은 역시 그 집도 또한 남의 집으로 여기지 않고 정성과 힘을 다하여 다스렸다.

그의 늙은 남편은 이 안해를 맞은 뒤에 가산이 나날이 풍부하여 가는데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단지 그다지 군색치나 않게 지낼 만하던 재산이 새 안해를 맞은 뒤부터는 부쩍부쩍 늘어 갔다.

전토가 늘고 집이 늘고 세간이살이가 늘고, 보기에 놀랄 만치 늘어가는 것이었다.

이렇듯 치산에 힘쓰는 한편으로는 안해는 남편에게 청하여 아중(衙中)에서 관보(官報)를 좀 얻어 오라 하여 늘 관보를 보기를 게을리지 않았다.

🙝 🙟

세월은 흐로고 흘러서 여인이 새 남편을 맞은 지 칠 년이 지났다.

그 어떤날 여인은 드디어 목적하였던 바를 관보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관보에는 선전관 우하형(宣傳官 禹夏亨)이 부정(副正)으로 승차하여 관서모군(某郡)으로 내려온다 하며 그 날짜까지 뚜렷이 기재되어 있어었다.

여인은 읽던 관보를 내려뜨렸다. 여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았다.

종내 성공하셨구나. 녹록치 않은 분이라고 보았던 내 눈동자에도 틀림이 없어 거니와 칠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곳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내려오시는구나.

춘풍추우 칠 개 성상, 몸은 표면상 비록 다른 이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하루 한때인들 잊어 본 때가 있었으랴. 오늘의 이 영화를 보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이와 칠년간을 함께 살지 않았던가.

자기는 이미 더러운 몸이니 다시 이 더러운 몸을 그이에게 의탁할 염치도 없고 생각도 없거니와 인제는 이 집안에서는 더 살기가 싫었다. 그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어버리게 할 방편으로 여기 시집을 왔던 것이매 그이가 성공하신 지금은 그냥 여기서 살 필요도 없었다.

품팔이 하여선들 이 한 입이야 풀칠을 못하랴. 그이 성공하신 지금에는 마음에 없는 안해 놀음은 그만두고 조용히 어떤 산골을 찾아가서 안온한 일생을 보내며 그이의 더욱 큰 성공이나 축원하자.

그날 저녁 여인은 제 늙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집안의 재산 목록을 그의 앞에 내어 놓았다.

“이보세요. 제가 이집에 올때는 이 집 재산이 얼마얼마였는데 지금은 얼마얼마로서 칠 년간을 한 너덧 곱이 되었읍니다.”

남편은 이것을단지 한낱 자랑으로 여겼다.

“용하이. 우리 동관들한테도 늘 말하는 배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다시 없어. 한 가지 흠이 자식 없는 것뿐일세.”

“여보세요. 오늘 이렇게 목록을 내놓는 것은 칭찬듣고 싶어서 하는 노릇이 아니야요. 오늘이야 말씀하거니와 저는 인젠 이 댁을 나가겠읍니다. 나가는 사람이 이 댁에 들어와서 칠 년간을 치산을 하다가 한 푼이라도 손해가 있으면 어지 마음이 편하겠읍니까. 지금 제가 들어올 때보다 사오 배가 되었으니 나갈지라도 부끄럼이 없읍니다.”

남편이 이 의외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거기 대하여 여인은 비로소 자기의 심경을 말하였다. 칠 년 전 우 하형을 서울로 보낸 뒤부더 오늘까지의 심경을 말하고 겸하여 지금의 우 하형이 태수가 디어 근읍(近邑)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니 인제는 절도사(節度使)도 눈 앞에 이리이요 대장도 또한 못 바랄 바이 아니니 이는 훌륭한 성공이라 자기의 숙망(宿望)이 이루었으니 마음에 없는 남의 집 치산은 인젠하기가 싫으며 그 앞에칠 년간을 신임하고 사랑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기 그지 없다고 사례를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계획으로 그의 훌륭한 위엄이나 한번 가서 뵙고 이 더러운 몸이나마 용납해 주신다면 이는 더할 바 없는 만족이요, 그렇지 못하면 어느 조용한 임자라도 찾아가서 선전관이 대장으로 승차하기나 축원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늙은 남편도 안해의 이 정성에 감복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여인을 다 시 구할 가망은 없었으되 그 정성에 감복하여 겸하여 그 마음은 도저히 꺾지 못할 것임을 알고 드디어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배반하는 안해와 배반 당하는 늙은남편은 그래도 마음에 불만이 없이 서로 장래를 축복하면서 깨끗이 헤어졌다.

🙝 🙟

태수(太守)로 부임한 우하형은 칠 년전 까지 이 근읍에서 동거하던 안해를 잊었다.

물론 기억까지 사라진 바는 아니었었지만 자기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인이라 알뜰히 생각나는바가 아니었다. 배반당한 당시에는 분하고 억울하여 홧김에 술도 먹도 난폭한 생활고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모두 자기의 지위가 미약한 탓이라 하고 그 뒤부터는 구사의 길을 잘 다듬어서 본시 녹록치 않던 위인이 드디어 오늘날 이 지위에까지 이른것이었다.

그 새에 장가도 들었다. 들어서 자식도 낳았다. 그러다가 불행히 상배(喪配)를 하자 태수(太守)로 제수되었으므로 미처 새로 장가도 못 들고 부임을 하였던 것이었다.

부임한 이튿날 하형이 동헌에 좌정해 있을 때에 웬 백성 하나이 무슨 송사할 일이 있다고 한다. 하형이 뜰 아래 불러들이매 그 백성은 비밀히 직소 할 일이 있으니 당에 오르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부임한 이튿날 생긴 사건이라 좌우간 불러올렸다.

백성은 올라왔다. 올라와서 끓어 엎드렸다. 눈물이 좔좔 흐르는 모양이었다. 엎드려 있는지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측면으로 약간 보이는 그뺨.

우 태수는 몇 번눈을 섬벅섬벅 하였다. 무슨 기억을 일으키려는 듯하였다.

드디어 기억이 소생하였다. 그 측면으로 보이는 뺨-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이 근읍 어떤 강변에서 본 일이 있는 어떤 처녀의 뺨과 흡사하였다.

태수는 화닥닥 달려들었다. 백성의 머리를 추겨들었아. 들고 보니 비록 칠 년 새에 얼마간 변하기는 하였지만 틀림 없는 옛날의 자기의 안해였다.

“이게 -누군가!”

“영감!”

태수는 황황히 전 안해를 붙들어 가지고 내아로 들어갔다.

서로 마주 앉아서 펼쳐 놓는 그 회포.

무사 우아형의 눈에서도 한 없이 눈물이 흘렀다. 자기의 성공을 바라는 정성으로 칠 년간을 마음에 없는 시집살이를 하던 그 정경이며 그 성성이며 그 심려(深慮)에 비교적 마음이 단순한 무사 기질(氣質)의 하형성은 목을 놓아서 통곡하였다.

더러운 몸? 아아 그것이 과연 더럽힌 몸일까? 비록 다른 남편을 섬기는 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성공을 위하여 마음에 없이 다른 남편을 섬긴 것이 과연 더러운 몸일까.

“오늘날의 이 성공이 모두 우리 조상의 덕으로 알았더니 지금 보니 전혀 자네 덕이로세. 더 할 말 없네.”

태수는 자식들을 불렀다. 그리고 한미하던 시대의 일을 다 말하고 그때의 내조하던 공을 말한 뒤에 내아에 거처하게 하고 가정을 온통 들어서 여인에게 맡겼다.

🙝 🙟

그 뒤에 하형은 차차 승차를 하여 위가 절도사에까지 이르렀다.

여기까지 이르는 데는 내조의 힘이 매우 큰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하형은 다시 장가를 안 들었다. 소실의 은공을 잊지 못하여 그 시대의 제도상 소실을 정실로 승차는 못 시켰지만 대우와 권한에 있어서 정부인과 차별이 없었다.

그리고 또 여인의 사람됨이 그만한 만치 출신은 한미하다 하나 치가(治家)에 있어서 하인배들에게까지도 손가락질을 한 번 받아 보지 않을 뿐더러 주인 영감의 지휘보다 소실의 지휘가 더욱 권위가 있었다.

자식들도 서로모 대접하지 않았다. 계모 같지도 않았다. 친모나 다름 없이 대접하였고 또한 은위(恩威)가 친모나 다른 데가 없었다.

🙝 🙟

이리하여 하형은 자기의 역량과 내조의 힘을 아울러서 위는 절도사까지 이르고 나이가 칠십이 지나서 부귀를 극진히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 🙟

인제 더 무엇을 바라랴.

한 개 비자(婢)의 자식으로 아장(亞將)의 안해까지되어 부와 귀와 권을 마음껏 누리고 나이도 이미 회갑이 가까워으니 인젠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영감의 성복(成服)날 안해는 적자(嫡子)들을 앞에 불렀다.

“망극한 가운데 앞뒤 순서는 가릴 수 없손마는 내가 시골 천한 집 태생으로 선영감의 덕택으로 일생을 부긔와 영화로 지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소. 내가 그 새 가정을 맡아서 도살핀 것은 영감님께서는 국록지신으로 집안을 보살필 여가가 없으시고 상주(喪酒)님들도 유소하세서 마음에 없고 권한에도 없는 일을 했거니와 지금 상주들도 연만(年滿)하시고 착한 가실(家室)들도 계시니까 늙은 내가 무슨 용훼를 하겠소. 오늘부터 상주께서 이 댁을 맡아 주시오.”

그리고 울면서 사양하는 상주의 말을 듣지 않고 상주 내외에게 정당을 내어 맡겼다.

그리고 자기는 후당-후당 가운데서도 가장 초라하고 항용 쓰지않던 침침한 방으로 들어가 숨었다.

🙝 🙟

그로부터 수일 그는 일체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끼니 때마다 하인들이 음식상을 가져오면 안에 들여놓으리라고 하는 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둑침침한 방이라 안이 똑똑히 보이지도 않아서 하인들은 지시하는대로 할 뿐이었다. 하인들이거나 자식들이거나 막론하고 그 방에서는 들어오기를 엄금하였다.

그런지라 그 방 안에서는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애통하여 하는 그 심경은 누구든 짐작하는배라 참견하는 것이 도로혀 예의가 아니라 하여 하라는 대로만 하였다.

이리하여 얼마를 지나서 드디어 장례날이 이르렀다.

이 날 상주는 서모의 거처하는 방 앞에 가서 서모를 불러 보았다.

“서모님. 서모님.”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좀더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래도 대답이 없으므로 문을 열고 보았다.

문을 열었으나 어둑침침한 방 안이라 잘 보이지 않으므로 기침을 한 번 하고 들어가 보았다.

상주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였다.

서모마저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한 알의 밥, 한 모금의 물도 넘기지 않고 단식을 하여서 남편의 뒤를 따라간 것이었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일문이 모여서 의논을 한 결과 서모를 소실로 대접치 않고 부인의 예를 갖추어서 그의 남편의 주검과 함께 발인을 하였다.

이리하여 평산 대로변에 그 두 주검은 지금껏 의좋게 나란히하여 앉아서 행인들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