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3/광공자
걸핏.
방안에 앉아서 추녀 아래로 보이는 하늘을 무심히 우러르고 있을 때에 휙 지나간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낙엽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는 새 일 것이다.
소년이라 보자면 아직 소년이요 청년이라 보자면 넉넉히 한 개 청년이 되었을 나이의 공자. 현재 이 나라의 왕세자요 장차의 임금이 될 지존한 소년 공자였다.
오늘 우러르는 하늘이나 어제 본 하늘이나 같은 빛〔色〕과 빛〔光〕의 하늘이었다. 명랑하였다. 밝았다. 장쾌하였다. 천 년 전에도 그 빛이었을 것이다. 천 년 뒤에도 또한 그 빛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 꼭 이 자리에서 그 하늘을 우러르던 그 날의 심경(心境)과 오늘의 심경은 왜 이다지도 다른가.
“전하. 아버님. 상감마마.”
속으로 두 번 세 번 불렀다. 공으로 보자면 임금이요, 사로 보자면 아버님 되는 분을 속으로 부르고 또 부르는 동안, 이 소년(청년일까)의 눈시울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진실로 마음이 괴롭고 아픈 입장이었다.
어찌하랴.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동궁(東宮)이라는 지위는 결코 아깝지 않다.
아깝지는 않으나―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밝고 명랑한 하늘을 우러러보기는 하지만, 마음은 조금도 명랑하여지지 않는다.
아까도 겪은 바였다. 임금이요 겸하여 아버님되는 분에게 아침 문안을 갔더니, 아무 까닭도 없이,
“너같은 것이 장차 임금이 되었다가는 나라를 죄 망쳐 놓으리라.”
책망이었다. 이것은 아버님과 아들, 더욱 맏아들이라는 사삿 인연으로 볼지라도 좀 지나치는 책망이거니와, 더우기 자기의 현재의 위가 세자(世子)이니만치, 세자에게 대한 대접으로는 더 못할 일이다. 그 위에 아무리 살펴 생각하여도 아무 책망들을 연유도 없는 것을….
아버님의 심경을 모르는 배도 아니다. 아버님은 세자의 위를 자기에게서 떼어서 세째 동생되는 충녕(忠寧)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만한 구실(口實)이 없기 때문에 화와 역정만 내시는 것이다.
이씨 조선 건국된 지 겨우 이십 년 내외― 근 오백 년 이라하는 짧지 않은 고려 왕씨의 사직을 둘러엎은 지도 날짜가 너무 얕아서 민심이 아직도 안돈되었다고 볼 수 없는 이 때에, 장차의 왕위(王位)라는 문제로써, 군신이요 부자지간에 감정이 얽히어 돌아가단 무슨 일인가.
민망키 짝이 없었다. 어서 ‘엣다, 받아라.’ 하고 이 동궁의 위를 동생에게 내어던져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도 못할 내력이, 첫째로는, 말대(末代)까지, ‘까닭없이 세자를 바꾸었다’는 악명을 부왕 전하께 듣게 하여도 안 될 일이요, 둘째로는, 현명한 동생 충녕이, 이 까닭없이 돌아오는 세자의 위에 결코 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위를 손쉽게 내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또한 그냥 모른 체하고 있자니 그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 첫째로는, 자기도 잘 아는 부왕 전하의 성격이니 전일(부왕 전하께는 이복 동생이요 동궁에게는 삼촌되는) 방번과 방석이 왕위 때문에 부왕 전하께 해를 입었고, 그 뒤로(부왕 전하의 동복형 되는) 방간이 또한 같은 문제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서 세상을 떠났으니, 부왕 전하의 성격으로는 왕위 문제 때문에는 지친도 돌보지 않는다. 이즈음 왜 그런지, 동궁에게는 생명이라 하는 것도 그다지 귀하게 보이지 않아서, 자기가 죽고 살고 하는 것은 문제도 안 삼되, 악명(惡名)은 부왕 전하께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는, 지금 부왕 전하가 내심에 점치고 있는 충녕(忠寧)이 인격이 비범하여,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되기만 하면 그 덕화가 도저히 자기 따위는 및 지 못할 것 같았다.
비교적 숙성하고 뇌락활달한 위에, 또한 출중한 안목을 가진 동궁은, 다른 사람으로 보자면 아직 연이나 띄고 장난이나 할 나이지만, ‘사람을 알아볼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안목에 비친 동생 충녕은 결코 상린(常鱗)이 아니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지라, 한창 명랑할 나이에 명랑한 하늘 아래서도, 어둡고 침침한 기분만 느끼었다.
이렇게 지내기를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철이 바뀌었다.
가을이었다.
우수수. 한번 바람이 불 적마다 뜰에 떨어져 널리는 무수한 낙엽들은 춘방정감(春坊廷監)들이 일면 걷어치우고 쓸어버리나 끝이 없었다.
문을 방싯이 열어 놓고 뜰에서 춤추는 낙엽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동궁. 안색이 매우 초췌하였다. 무심히 뜰을 굽어보기를 한 각경… 두 각 경….
이윽고 별감 하나이 뜰 아래 와서 국궁하였다.
“계성군이 행차하십니다.”
“응.”
동궁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계성군(鷄城君)이라는 것은 동궁시강원(東宮侍講院)의 빈객(賓客― 벼슬 이름, 正二品이다)으로서, 동궁께 왕자(王者)의 도를 시강하기 위하여 늘 춘방에 오는 것이었다. 고려 공민왕조에 재상 신돈(辛旽)의 서슬이 푸르렀을 때에 한 새 미관(微觀)인 정언(正言)으로 있어서 신돈의 방자함을 논박한 일로 유명한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요, 고려조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가 이씨조까지 내려 와서 박포(朴苞)의 난리에 공을 세워서 봉군(封君)까지 된 사람이었다. 성명은 이래(李來)였다.
이 이래가 온다는 말을 들은 동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나서서 뜰에 내렸다.
때마침 이래는 궁문 안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동궁은 이래를 못본 채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두루 살피며, 매〔鷹〕 부르는 소리를 하면서 차차 후원으로 돌아갔다. 후원으로 돌아갔던 동궁은 그냥 매 부르는 소리를 연하여 하며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도 이래는 하인을 뒤에 달고 그냥 근엄한 태도로 춘방뜰에 서 있는 것이었다.
동궁은 이래의 직전(直前)을 그냥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래가 서 있는 것을 그냥 모른 체하고 하늘만 두루 살피며, 매 부르는 소리만 그냥 하였다.
“동궁 저하.”
그러나 동궁은 못들은 듯이 그냥 매소리를 하면서 간다.
“동궁 저하.”
이래는 뒤를 따라갔다. 연방 불렀다.
이렇듯 한참을 부르면서 뒤를 따르다가, 드디어 하릴없이 걸음을 빨리하여 동궁의 앞으로 나가서 동궁 쪽으로 돌아섰다.
“동궁 저하.”
그때야 동궁은 비로소 빈객(賓客)의 참내를 인식한 듯이 놀라는 시늉을 하였다.
“아, 언제 오셨수?”
“벌써 아까올시다.”
“흐. 나는 낙엽의 운치가 하두 좋길래 거기 정신을 잃고….”
이래는 허리를 구부린 채 조금 머리를 쳐들고 동궁을 우러러보았다. 잠시를 우러르다가 입을 열었다―.
“저하, 매의 소리는 왜 하셨읍니까?”
“?”
“아까껏 매의 소리를 하시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니까?”
“매? 매가 무엇이오니까?”
“왜 그 사냥 다닐 때에 팔에 받고 꿩이나 토끼 같은 것을 차오는 새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매올시다.”
“내가 평생에 매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 매소리를 어떻게 하겠소?”
이래는 다시 우러러보았다. 그 우러러보는 앞에서 동궁은 연방, 눈을 좌우로 굴리고 몸짓을 하며 안절부절하였다.
“저하 어디 편찮으시오니까?”
“하늘을 한참 보았더니 눈이 좀 부시는구먼요.”
🙝 🙟
그 날 계성군 이래는 여러가지 예사롭지 못한 모양을 동궁에게서 발견하였다. 글 배우기를 싫어하는 것이 현저하였다. 아직껏의 동궁은 한 글자라도 더 알려 하였고 한 구라도 더 깨달으려 하였거늘, 그 날은 웬일인지, 자기가 그 앞에서 강론을 하여도 듣는 듯싶지도 않았다. 한창 동궁의 앞에서 고성(古聖)의 가르침을 강론할 적에도 동궁은 우두머니 앉아 있다가는 뚱딴짓말을 꺼내기가 예사였다. 이래가 한창 글뜻의 해석을 설명하고 있을 때에, 동궁은 갑자기 하인을 불러서 무슨 다른 일을 분부하기가 일쑤였다. ―말하자면, 이래는 이래 혼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동궁은 동궁대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래의 생각에는 이것은 너무도 괴이한 일이었다. 시강을 끝내고 춘방을 물러나온 이래는 임금께 들어가 뵙고 “오늘 시강한 때에 뵈오니 동궁이 미령하신 듯 하오니, 의관(醫官)을 보내어 진맥합시다”고 여쭈었다.
🙝 🙟
그 뒤로부터 동궁의 태도는 나날이 변하였다.
글 배우기를 싫어하였다.
단지 글 배우기만 싫어하였다 하면 그것은 문제가 다르게 붙으나, 행동거지가 차차 수상한 점이 많아 갔다.
단아한 공자였다. 문과 무에 어울러 능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동궁에 있어서는 ‘단아하다’는 점은 찾아 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눈이 한 군데 멈추어 있는 적이 없었다. 두룩두룩, 두리편 두리편, 위 아래 전후좌우로 움직이고 구을고 하여, 눈부터가 그러매 다른 행동도 거기 따라 내려앉지를 못하고, 남보기에 무슨 큰 죄나 범한 인물인 듯싶었다. 귀공자는커녕 천종 중에도 최천종집 자식 같았다.
새덫을 뜰에 장치하여 놓아두었다. 그리고 시강원 좌우 빈객이 한창 시강을 할 때에 새덫에 새가 와서 잡히기만 하면, 버선발로 뛰어 나가서 잡힌 새를 꺼내고 다시 장치하여 놓고 들어오고 하였다.
공식 조하 같은 때에 동궁이 반드시 대전을 모시고 조하를 받아야 할 경우 같은 때도,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못하겠다, 오늘은 여사여사하여 못 모시겠다, 모두 회피하여 버리고 하였다. 그래서 사실 머리가 아프든가, 혹은 모 피할 만한 사세가 있는가 알아보면, 그렇지도 않고, 춘방에 누워서 딩굴고 있거나 혹은 사냥을 나가거나 한 것으로서, 단지 피하기 위해서 꾸며낸 일시적 허언에 지나지 못하였다.
할 수 있는 껏 부왕 전하를 대할 기회를 피하였다. 매일 조석의 문안도 대개는 시종을 대리시켰다. 부득이 뵙지 않을 수가 없는 때는, 잠깐 뵙고는 즉시로 물러나오고 하였다.
무론 이 모든 행동이,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를 광인(狂人)으로 알게 하여, 공의(公義)에 좇아 저절로 폐사(癈嗣)가 되어, 첫째로는 부왕 전하께 ‘까 닭없이 동궁의 위를 바꾸었다’는 악명을 안 돌리고, 둘째로는 현명한 동생 충녕(忠寧)으로 하여금 이 백성의 위에 임하게 하여, 인군(仁君)의 덕화에 멱감기고 싶은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도 부왕 전하께 대하기가 싫었다. 대하면 반드시 화증을 내시고 공연한 꾸중만 내리므로 할 수 있는껏 피하고 싶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태를 부리는 한편으로는, 또한 동궁으로서는 행하지 못할 난행까지 자주 하였다.
동궁이 어디 나가려 하면 반드시 노부를 차리어야 한다. 그러나 이 동궁은 그렇지 않았다. 춘방별감 한둘을 데리고 걸어서 밖에 나가기가 일쑤였다.
기생집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밤에 단 혼자서 궁장을 넘어 나가, 계집을 찾아 다니기까지 하였다.
🙝 🙟
이러한 광태와 난행이 나날이 더하여 감을 따라서, 물의(物議)도 차차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뜻있는 대신들은, 동궁의 난행이 왜 생겼는지를 짐작하고 동궁의 심경을 동정하고 은근히 이를 위로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 대신이 있는 한편에는, 또한 지금 임금의 심경을 짐작하고 손빨리(장차 십중팔구는 새 동궁으로 될) 충녕대군에게 미리 아첨을 하며, 또한 임금께는, “동궁이 여사여사한 난행이 있사오니 폐우입현(廢愚立賢)을 합시사.”고 비위를 맞추어 드리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날, 그때의 이조판서 황희(黃喜)가 춘방으로 세자께 뵈러 왔다.
보통 혼자 있을 때에는 단아하다가도, 남이 오면 광태를 부리기 시작하는 동궁은, 홀로이 경서를 읽고 있다가, 황 판서가 온다는 바람에 책은 얼른 감추어 버리고 보료 위에 엎드려서 손으로 턱을 괴고, 열린 문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격식에 의지하여 내관이 들어와서 아뢸 때도, 동궁은 그냥 엎드린 채 고개만 끄덕끄덕 하였다. 뒤이어 황희가 영외에서 절할 때도, 동궁은 본 체도 않고 뜰만 내다보고 있었다. 앉으라는 분부를 기다리고 황희가 그냥 읍하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궁은 아는지 모르는지 뜰만 내다보고 있었다.
근시하는 내관이 민망하여 동궁께 채근을 하였다―.
“동궁전마마. 황 판서가 문안차로 오셨읍니다.”
“응. 무사하다고 그러려무나.”
황희도 민망하였다. 동궁의 심경을 아느니만치, 이렇듯 욕을 스스로 사려는 광태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동궁전마마. 날씨가 꽤 따스롭습니다.”
황희가 하릴없이 먼저 입을 떼었다.
“그렇습디까? 나는 나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걸….”
동궁은 그냥 엎드린 채, 그냥 손에 턱을 괸 채, 그냥 뜰을 내다보면서 대답하였다.
동궁의 심경을 잘 알기에 괜찮지, 만약 심경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담당하였다 하면, 얼마나 동궁을 욕을 하랴. 정이품 현임 이조판서에게 대하여 아무리 동궁이라 하나, 대하는 격식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는데, 마치 하례배를 대하듯 하니, 욕이 돌아갈 곳은 동궁이다. 그것을 번히 알면서도 행하는 동궁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랴. 황희는 한창의 장년으로써, 웬만한 일에는 격동이 되지 않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 올랐다.
동궁은 한참 엎드려 있었지만, 본시 그런 습관 아래 생장하지 않은 사람이라, 몸이 거북하여 하릴없이 일어나 앉았다.
“아, 참 앉읍시오. 아직 서 계셨구먼. 그러면 서 있노라고 말씀을 할 게지. 그런데 황 판서 눈에서 물이 자꾸 떨어지니 그게 무슨 물이오?”
“저하!”
“?”
“저하께서는 왜 친히 대전께 문후하시기를 게을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세자를 미워하는지라, 이 때문에 더욱 미워한다 보고, 이것을 간청하였다.
동궁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늙은이 냄새가 역해서 안 갑니다.”
황희는 가슴이 서늘하였다. 부러 부리는 광태지만 좀 과한 말이었다. 임금의 성격을 잘 아는 황희에게는, 이런 말이 임금께까지 가면 ‘폐사’는 둘째 두고 어떤 일이 생겨날지 예측키 힘들므로서였다.
지인지능(知人之能)이 있는 황희의 눈에 비친, 동궁과 충년대군 형제분의 우열(優劣)은 막상막하 난형난제였다. 동궁의 현철하기나 충녕대군의 현철하기나,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달 수 없으리만치 막상막하였다.
동궁의 위라 하는 것은 손쉽게 갈기 힘든 것이라, 약간쯤은 충녕대군이 우승하다 손 치더라도 신중히 일을 행하여야지, 경솔히 폐립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어늘, 더구나 막상막하한 이 형제분을 단지 부왕 전하의 애증(愛憎)으로써 변경하면 이는 말대까지 말썽을 남길 그릇된 일이다. 겉으로 광인을 가장하고 있는 이 동궁의 앞에, 황희는 묵연히 눈물만 흘리며 앉아 있었다.
🙝 🙟
어느 무르익은 가을날이었다.
임금은 편전(便殿)에 좌어하시고, 문무 재상들이 적지 않게 모여서 파탈하고 한담들을 할 때였다.
이 사람의 이야기, 저 사람의 이야기― 순서없이 귀를 기울이시며 밖을 내다보고 계시던 임금은, 저편 금중(禁中) 감나무로 안정을 옮기셨다. 거기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잎은 모두 떨어져서 성기게 된 나무에, 감 여름만 새빨갛게 여러 알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가마귀 몇 마리가 거기서 감을 쪼아 먹고 있다.
임금은 좌중을 둘러보셨다.
“누구, 여기서 저기 저 감나무에 앉은 가마귀를 쏘아 맞힐 사람이 없는가?”
문신(文臣)은 무론 나서지 못하고, 장신 무신 중에 누구든지 장담하고 나서려니 하고 물으신 것이었다. 일찌기 태조대왕이며 퉁두란이며 이런 명궁수(名弓手)를 익히 보신 임금은, 저기 저 가마귀쯤은, 그다지 힘들지 않으리라고 보셨던 것이었다. 그랬는데 장신이며 그 밖 무신들도 막막하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 누구 없소?”
임금은 한 번 채근까지 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임금은 속으로 약간 후회하였다. 공연한 말씀을 꺼내어 신하들을 무안을 준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에는 차차 문약하여진 세태가 근심도 안 되시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한 문제가 나서 좌중이 맥맥해 있을 때에, 황희가 이 침묵을 깨뜨렸다.―.
“조중 무부들 가운데는 맞힐 자가 없겠읍니다. 당대에, 저렇듯 먼 곳에 있는 더구나 날짐승을 쏘아 맞힐 분은, 오직 우리 동궁 저하 외에는 없소리 다.”
좌종은 모두 기운이 폈다. 세자면 넉넉히 맞히지만, 세자 이외에는 맞힐 자 없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었다.
즉시로 세자를 부르셨다.
“너, 저기 저 가마귀를 넉넉히 쏘아 맞힐테냐?”
본시 밉게 보시기 때문에 세자를 대하면 화만 내시는 임금은, 역시 용안을 찌푸리시고 물으셨다.
“쏘아는 보리다만, 웬걸 명중하리까.”
대답은 이러하였다. 그러나 그맛껏은 못 맞히겠읍니까는 의미는 분명하였다.
등대되는 활을 잡고 한번 퉁겨본 뒤에, 겨냥을 하여 줄을 놓아 주매, 소리내며 날아간 살은, 한창 감을 쪼아 먹는 가마귀 두 마리를 한꺼번에 꿰었다. 임금도 약간 미소하셨다. 동궁에게 대하여 여러 해만에 보이신 미소였다.
“저하 같으신 문무 겸전하신 분을 동궁으로 모신 이 나라는, 반석 위에 앉은 것 같습니다.”
황희의 드리는 축하― 여기는 ‘이러니까 동궁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는 뜻이 다분히 포함되었다. 그 뜻을 알아보시고 용안에는 도로 불쾌한 안색을 나타내셨다. 이 날에 생긴 이맛일 때문에 마음에 깊이 잡수셨던 생각―폐사(廢嗣)가 번복될 리가 없다.
🙝 🙟
무술년에 들어서면서는 동궁의 난행이 더하여 갔다. 그 전해에, 춘방에 잡인배들이 너무 많이 다닌다고, 잡아서 몇 사람은 주(誅)하고 몇 사람은 찬 (竄)하고 하였지만, 그냥 잡인배는 연락부절하고 세자가 몰래 나다니는 도수도 더 늘었다.
일찌기 고려조의 신하로 있어 본 일이 있는 임금은 지금은, 단지, 언관(言官)들이 상소가 있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신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임금의 뜻에 맞추기 위하여 동궁의 난행을 가지 가지로 들어가지고 폐사합시사고 상소를 할 신하가 무론 여럿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임금께서는 몇 번 그것을 물리쳐 보신 다음에 ‘공의에 쫓아서’라고 폐사를 하실 생각이었다.
기는 무르익었다. 억센 성격의 주인이신 이 임금은 일단 사람을 밉게 보기만 시작하시면 그냥 끝까지 밉게만 보아서, 동정심을 결코 일으키시지 않았다. 세자의 이즈음의 난행의 연유를 번히 아시면서도, 그 심경을 동정하는 생각은 일어 보시지를 않고, 하루바삐 폐사가 되지 않는 것을 조민하게 생각하실 뿐이었다.
세자는 때때로 홀로이 밤을 새면서 울었다.
세자의 위가 그냥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말대까지 들을 자기의 악명(惡名) 때문이었다. 폐사는 지금은 눈앞엣 일로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반드시 이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가(史家)는 이 사실을 어떻게 기록하여 남길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世子[세자], 不務學業[불무학업], 淫於聲色[음어성색], 溺於娼女 [익우창녀], 不得己廢嗣[부득기폐사]’
무론 이렇게 적을 것이다.
천 년 후, 만 년 후까지도 이 악명을 들어야 하나.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통 문신(文臣)들은커녕 유신(儒臣) 가운데서라도, 세자 자기를 당할 만한 학문의 소유자가 극히 드물리라는 점은, 세자 스스로도 굳게 믿는 바이었다. 무(武)에 있어서도 궁술 검술 등 무기(武技)를 비롯하여, 삼군을 지휘할 병법 전법에 이르기까지, 세자 자기를 당할 무신(武臣)이 쉽지 않으리라는 점도 굳게 믿는 바였다. 단지 이 세상에 지금 자기가 폐함을 입으면 그 자리에 올라설 충녕(忠寧) 한 사람이 자기보다 우승하지, 그 밖에는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가 장래 영구히 ‘학업에 힘쓰지 않아서 폐사되었다’는 악명을 쓰는 것은 과연 억울하였다. 이 억울한 점을 생각하면서 밤이 새도록 느껴 우는 일이 많았다.
더우기 이즈음 소위 공론(公論)이라는 것이 차차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그 소위 ‘공론’이라 하여 ‘세자는 학업에 힘쓰지 않고, 성색을 좋아하고, 여사여사하니 폐합시사’고 상소하는 무리들도 번히 자기의 심경을 안다.
더우기 유신(儒臣)이라 하며, 소학 한 절도 똑똑히 외지 못하는 무리 가운데 ‘공론’을 세우는 자가 더 많은 것을 볼 때에 그런 무리에게 악명을 쓰는 것이 더 억울하였다.
“전하. 아버님. 동궁의 자리는 아버님의 뜻대로 충녕에게 주겠사오니, 악명 하나만은 모면케 해 주십시오.”
밤을 울어 새우면서 부르짖는 이 하소연을, 부왕 전하는 모르시는지….
🙝 🙟
드디어 ‘공론’이 공공히 일어날 때가 왔다. 무술년 유월이었다.
공론이라는 것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누구나 다 동궁의 억울함을 아는지라,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다. 하릴없이 임금께서는, 좀더 공론을 재촉치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날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동궁이 너무 실덕(失德)을 해서, 동궁은 폐하고 동궁의 맏아들(즉 당신께는 맏손주)을 세울까보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 대하여 모였던 신하들은,
“전하께서 친히 동궁을 교양키를 무소부지하왔지만 그래도 실덕을 하옵는데, 인제 동궁의 손 아래서 길러난 어린 손주님이 당하겠읍니까. 더우기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세우신다는 것은 의(義)에도 옳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내 여러 아들 중에 누가 가장 현철해 보입디까.”
“지자지신(知子知臣)은 막여군부(莫如君父)올시다. 성심에 달렸을 따름이옵니다.”
이리하여 군신의 새에는, 폐립문제가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이리하여 비공식으로 폐립은 결정이 되었는데, 이 폐립에 희생된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황희였다.
황희는 이조판서로 있어서 여러번 임금께, 폐립하실 생각을 중지하시라고 간하다가 임금의 노염을 사서,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좌천이 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떨어졌다가, 폐립이 결행될 때에 서인(庶人)으로 떨구어, 교하(交河)로 쫓았다가, 대간(臺諫)이 청죄를 하여 또다시 남원으로 옮겼다.
이직(李稷)도 또한 판서로서 폐립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갔다.
그때에 벌을 받은 이 두 사람은 그 뒤 새 임금은 서신 뒤에도 그냥 죄를 벗지 못하였다가, 상왕(그들을 벌주신 임금) 승하하신 뒤에야 불려서 새 임금의 명신이 되었다.
이렇게 비공식으로 폐립이 작정된 이삼 일 후에, 삼공 육경 삼공신 문무백관 종친이 쭉 늘어서서 동궁 폐하기를 계상하였다.
오래 벼르던 일은 여기서 비로소 성공을 하였다. 동궁은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이라 하고, 충녕대군을 동궁으로 책립하고, 폐세자 양녕대군은 광주(廣州)로 내쳤다.
유월에 동궁을 갈고, 그 해 팔월에 임금은 은퇴하셔서 상왕(上王)이 되시고, 충녕대군이던 동궁이 새 임금으로 보위에 앉으셨다.
이 새 임금이 세종대왕이시다.
양녕대군을 폐한 교서에 하기를,
“현(賢)한 자로써 사를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으면 폐하는 것은 국가의 항규라. 과인이 일찌기 맏아들되는 제(禔)로서 동궁을 삼았더니, 나이가 차도 글 배우기를 싫어하는 위에 더우기 성색을 좋아하는지라, 그러나 과인의 생각으로는 나이가 더 들면 고치려니 하였더니, 나이 이십을 지나면서는 더욱 자심하여 부량 잡배들과 사통하기가 과심하므로, 지난해 봄에 복주(伏誅)한 자로 여럿이 되더라. 그때 동궁은 자기의 잘못을 모두 써서 종묘에 고하고 과인에게도 상서하여, 회개하는 듯싶더니, 얼마 안 지나서는 또 간신 한로(漢老―동궁의 장인이다)의 꾀를 받아서 난행이 다시 여전하게 되더라. 이에 과인은 부자의 은으로 한로와 거래를 못하게 하였더니, 동궁은 회개는커녕 도리어 원망하는 생각을 품고 분연히 상서하는데 그 글 뜻이 매우 패만하여 군신의 예가 전혀 없더라. 정부, 훈신, 육조, 대간, 문무백관이 합사서장하여 써하되, 동궁의 행동이 사직을 잇지 못할 것 같고 충녕대군은 영명공검하고 효우온량하며 학업에 힘써서 가히 동궁의 직을 감당하리다 하기에, 과인은 그 말을 좇아서 동궁을 폐하여 광주로 내어쫓고 충녕대군을 세워서 세자를 삼노라. 운운.”
🙝 🙟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시고 당신은 상왕이 되셨으니 상왕의 희망은 다 폈다. 그러나 상왕이 맏아드님을 미워하시는 생각은 결코 변하지 않아
“나는 이제부터는 양녕(讓寧)을 아들로 보지 않을 터이니, 법에 걸리거든 정부에서 잡아와도 좋고 육조에서 잡아와도 좋다. 법대로 시행하라.”
고까지 분부하셨다. 내의(內意)는 좀 잡아 골려다고 하시는 뜻이었다.
🙝 🙟
고금동서에 다시 보기 힘든 명군 세종대왕은, 이러한 불상사를 보신 뒤에 등극을 하신 분이다.
이 아우님을 보위에 모시기 위하여, 스스로는 광주(廣州)로 쫓겨난 양녕.
인제는 속세의 온갖 군잡스러운 문제를 다 털어버리고 나선, 그야말로 인선(人仙)이었다.
단지 아직도 남아 있는 근심은 소인배들의 잡간이었다.
지금은 임금이 되신 동생의 효우(孝友)하시는 마음을 잘 아는지라, 그다지 염려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잡인배의 잡간이 과하면 아우님의 성덕(聖德)에 누가 및는 일이나 안 생겨날까.
“지금 광주에 가 있는 양녕은, 여사여사한 비행이 있는 사람이오니, 멀리 귀양을 보냅시사.”
혹은,
“양녕이 폐사가 된 것을 분히 여겨서, 지금 누구누구를 끼고 못된 생각을 먹고 못된 일을 하려 하오니 잡아다 주(誅)하십사.”
무론 그런 무리가 많을 것이다. 그래야만 새 임금이 신임을 하여줄 줄 알고 그런 참소를 하는 소인배가 많이 생겨날 것이다.
아우님을 잘 알거니, 웬만한 참소가 들어갈지라도 움직이지 않으실 줄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참소가 과하여 성덕에 누가 및는 일이 생겨나면 어쩌나.
어떤 명랑한 날 아침이었다. 한가하고 자유로운 신문인 양녕은, 즐기는 사냥이라도 나가볼까 하고 그 준비를 시키고 있을 때에, 대궐에서 별감이 달려왔다. 동교(東郊)까지 좀 오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지금 광주에서 외로이 있을 형님을 생각하시고, 오래간만에 한번 만나고 싶으신 생각도 간절하시어, 그 날 갑자기 동교의 추경(秋景)을 보러 갈 노부를 꾸미게 하시면서, 일변 먼저 형께 동교로 와 달라고 별감을 보낸 것이었다.
양녕대군도 웬 영문인지 모르고 가마를 동료로 달리고, 정부 백관들은 단지 단풍구경 놀이로 알고 따라갔다.
그랬더니, 동교에는 대궐에서 먼저 보낸 하례배들이 잔치를 차리고, 광주적소(謫所)에 있어야 할 양녕대군이 또한 그리로 온 것이었다.
임금 형제분은 그 새 막혔던 소회도 풀며 유쾌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임금은 대궐로 양녕은 광주로 각각 헤어졌다. 작별 때에 임금은 삼연히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날 밤 양녕은 적소의 달을 우러르는 비창한 감회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 새는 그런 것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더니 오늘 아우님을 뵙고 돌아오매, 자리의 냉락하기가 짝이 없었다. 하늘 나는 기러기의 소리가 유난히도 구슬프게 들리고, 어디서 누가 부는지는 모르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단소의 소리가 가슴에 서리기 한이 없었다.
아버님 어머님이 그냥 생존해 계시고, 아우님이 임금으로서 그 위에 지극히 효우(孝友)하시고, 자기 또한 아무 죄도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이렇듯 적소에 와 있지 않으면 안되는가.
객회가 지극한 가운데 한편으로는 근심되는 일이 또한 있었다.
오늘 눈치로 보매, 임금은 오늘 자기와 동교에서 만날 것을 재상들한테 예통을 안 하였던 모양이다. 아까도 말썽 잘 부리는 언관들이, 좋다고 먹기는 먹으면서도 수군거리는 눈치가 수상한 데가 있었다. 오늘의 문제 때문에 말썽꾸러기 유신들에게 곤경이나 겪지 않으실까.
근심, 객회, 뒤서리어 양녕은 그날 밤 한잠을 못 이루었다.
🙝 🙟
이튿날 과연 정부에서는 문제가 일어났다. 안 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국왕이 죄인을 접견하시는 것은 안 됩니다, 이것은 논지였다.
임금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입시한 신하 중에, 우의정 맹사성(孟思誠)과 형조참판 신개(刑曹參判 申槪)는 임금께 ‘안 됩니다’ 소리를 안 하였다고까지 말썽이었다.
“맹사성은 정승으로 앉아서, 신개는 법조(法曹)의 당상(堂上)으로 앉아서, 불가한 일을 보고도 아무 말도 없으니 그 연유를 설명하라.”
는 것이었다.
맹 정승은 거기 대하여,
“이전에 일찌기 양녕을 보시지 말라고 계상한 일이 있어서 어제는 가만 있었노라.”
고 대답하고, 신 참판은,
“본시 풍절이 없으니 이미 때가 늦었는지라, 법대로 죄를 받겠노라.”
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직을 하여싿.
이렇게 벌어지는 사건을 임금은 겨우 진정시키셨다. 그리고 속으로 탄식하셨다. 신하로 국록을 먹는 것들이, 임금께 간할 다른 말이 없어서, 이런 것을 가지고 이렇듯 으르렁거리는가…고.
🙝 🙟
연해 연방 양녕에 대한 참소가 임금의 앞에 들어왔다.
사헌부, 사간원, 정원, 홍문관, 이 무리들에게서 끊임없이
“양녕을 국문합시사.”
“양녕을 죄를 더 줍시사.”
“양녕에게 대접이 너무 후합니다.”
뒤를 이어서 들어오는 이런 의논에 임금은 언제든 힘있게 머리를 가로저으셨다. 한번은 김종서(金宗瑞)가 또 그 이야기를 꺼낼 때, 임금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러번째 양녕의 일로 말하지만, 이것은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까닭인 모양이외다. 천륜의 순서로 보자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위가 양녕의 것이 아니오? 그것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느니만치, 미안하고 거북한 생각은 가졌을망정, 조금이나 미워하거나 의심할 생각은 없소이다. 게다가 형제의 정의로 보자면 저 필부(匹夫)들도 저의 형제끼리 서로 좋은 것은 드러내 주고, 나쁜 것은 감싸주며, 어떻게 불행히 죄라도 지어서 관가에 갇히면 뇌물을 써 가면서 애걸을 하면서 구해내려고 힘쓰지 않우? 그게 형제의 정의라는 것인데, 내가 임금으로 앉아서 한낱 필부만도 못해서 되겠소? 더우기 이 위가 본시 내 형의 것이었는데…. 장차 상왕 전하의 노염만 풀리시면 서울로 모셔다가 매일 만나 보겠소.”
그리고 누구가 무슨 말을 하든간데, 그것이 양녕에게 관한 일이라면, 절대로 안 들으셨다.
이 갸륵한 신하들은 양녕과 무슨 원수를 그렇듯 지었든지 양녕의 아들 때문에까지 문제가 생긴 일이 있었다.
형 양녕에게 미안한 생각을 품으신 임금은, 양녕의 아들이 약간 자라는 것을 보시고, 순평군(順平君)이라 봉군(封君)을 하시고 무슨 직에 붙여주려 하셨다. 그러매 대간이며 정부에서 들고 일어나서,
“양녕의 아들도, 저의 아비 있는 데로 내쫓읍시다. 벼슬이란 절대로 안 됩니다.”
고 야단이었다. 임금은
“양녕은 종사에 죄를 지었으니 하릴없이 내보냈거니와, 내 조카야 무슨 죄가 있는가.”
고 하셨다. 그러나 너무들 야단을 하므로 마지막에는 성 밖에 나가 살게 하였다.
이렇게 지나기를 여러 해― 이 신하들도 마지막에는 드디어 알아차렸다.
이 임금께는 양녕을 참소한다고 더 사랑을 받지를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심정만 보이는 것에 지나지 못함을―. 그리고 그 뒤로부터야 비로소 양녕 참소의 주둥이가 닫혀졌다.
🙝 🙟
수년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배소의 양녕은, 그것만을 눈을 크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자기의 몸을 빼내고 대신 모신 이 임금이, 과연 자기의 본 바에 벗어나지 않아서 훌륭한 치적을 남기실까. 혹은 부왕 전하의 노염을 무릅쓰고라도 그냥 자기가 버티어서 자기가 임금이 되었던 편이, 이 백성들에게 이(利)로웠을까.
눈을 크게 하고 기다리던 업적은 차차 나타났다.
가로되 집현전 설치.
가로되 찬술과 제작.
가로되 국문 창제.
가로되 육진 개척. 무엇…. 무엇….
찬란한 이 임금의 업적은, 끝이 없이 뒤밀리어 나왔다.
신하에는 명신도 열신(劣臣)도 없었다. 이 임금의 아래 가만 있기만 하며, 저절로 명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렇듯 훌륭하고 많은 안(案)이 뒤밀려 나오는지. 임금이 급급히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신하들을 못 견디리만치 구사(驅使)하는 것도 아니었다. 홍그럽게 시키시는 일을, 홍그럽게, 지휘하시는 대로만 하여 나아가면, 한 개의 훌륭한 업적은 생겨나고 하는 것이었다.
이조 오백여 년― 임금의 덕화가 향대부(鄕大夫)의 이하인 서민(庶民)에게까지 미쳐본 임금은 이 분 단 한 분뿐이다. 오백여 년간에, 정치가의 업적으로서 서민에게까지 미쳐본 이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뿐이었다.
근 삼십대의 임금이 군림하셨고, 그 가운데는 명군 현군도 많으셨지만 임금의 덕이 서민에게까지 내리는 적이 이 임금의 대 이외에는 없었다.
‘광인(狂人)’이라는 악명을 쓰면서 ‘불무학업하고 음어성색이라’는 욕을 들으면서, 이 임금을 군주로 용상에 모신 양녕은, 이 임금의 나날이 진척되는 업적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결코 헛되이 악명을 쓰지 않았노라고 자기에게 대하여 큰 소리로 자랑할 만한 자신이 넉넉히 생겨났다.
“아아, 충녕아, 동생아, 전하여.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영구히 벗지 못할 악명을 쓰고도 양녕은, 만족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악명을 쓴 덕에 너희는 고금에 다시없는 훌륭한 임금을 가졌다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고함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