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3/고달산

이상한 일—? 머리를 기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마리 기르던 원숭이가 유난히도 까 부는 것. 오늘 손님이 있을 징조이다.

손님이란? 행객(行客)은커녕 초부의 발자취조차 볼 길이 없는 이 깊은 산 가운데 손님이 웬 손님일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머리를 기울였다.

안변(安邊) 설봉산(雪峰山) 토굴을 나와서 팔도를 순력하 다가 이 곡산 고달산(谷山高達山)이 준험하고 영기로운 점이 마음에 들어, 여기다가 몇 간 초옥을 짓고 거처한 이래 수년—하 깊은 산이요, 하 험한 봉우리라, 사람의 냄 새를 맡은 지도 까맣다. 길을 헛 들은 몇 명의 사냥꾼, 약 초를 캐러 다니는 몇 명의 기객, 이 밖에는 수년 해로 사 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이 초암에 손님이 찾아오리란?— 무학은 머리를 기울이 지 않을 수 없었다.

🙝 🙟

왔다— 오기도 세 사람이나.

경기 감사, 황해 감사, 평안 감사, 이 세 사람이 고달산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무학을 찾아온 것이다. 하인도 없이 걸어서 이 험로를.

『허수롭지 못한 길을 어떻게 예까지 오셨는지?』

돗자리도 없이 짚을 깐 초라한 방 안에 손을 맞아 대좌 하고 무학은 이렇게 물었다.

『스님이 무학대사시오니까?』

세 귀인은 무학의 앞에 머리를 조으며 물었다.

『네, 빈도는 무학, 아주 무학 천승이로소이다. 보아하니 얕지 않으신 관원(官員)—어떻게 이 험한 곳을 지나십니 까?』

평안 감사가 황해 감사를 보았다. 황해 감사는 경기 감 사를 보았다. 세 감사는 서로 번갈아 얼굴을 보았다. 안심 과 기쁨이 역력히 그들의 얼굴에 나타났다.

『대사, 소관들이 대사를 찾은지 두 달—』

『절간이란 절간, 산이란 산, 골짜기란 골짜기는 모두 뒤 지다가 오늘에야 겨우 존안을 대하게 됐습니다.』

『관하의 각 수령에게 영을 내리고 소관들도 이렇듯 계 심즉한 곳을 찾아다니기를 두 달—』

세 감사는 서로 지금껏 무학을 찾던 이야기를 번갈아 한 다.

『세상과 교섭없는 빈도를 또 왜 그다지도 찾으셨습니 까?』

『어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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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

어명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곳에 숨은 뒷일은 모르 나마, 수년 전의 경우로 짐작하자면 조정에서 무학을 찾 을 까닭이 없다.

직접 그 문하에 배운 일은 없지만 학식과 견식과 인격으 로 흠앙하여 마지 않던 신돈(辛旽)이 유림(儒林)의 간계에 빠져서 효수(梟首)된 이래, 고려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꽤 심하였다.

그 사이 자기는 이 심산 중에 숨어서 세상 일을 듣지 못 하였으니 모르지만, 신돈 죽은 뒤에 일어선 유림의 세력 이 벌써 꺾였으리라고는 생각히우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 정에서는 역시 불도(佛道)를 높이지 않을 것이다.

혹은 대내(大內)에서 부르는가도 할 수 있겠으나, 대내에 서 부르려면 이렇듯 방백들이 자기를 찾아다닐 까닭이 없 다.

무슨 일일까?

무학은 눈을 고요히 감고 응치 않고 있었다. 경기 감사 가 먼저 이 무학의 뜻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대사! 사직이 바뀌었습니다.』

『?』

무학은 눈을 번쩍 떴다.

『오백 년의 고려 왕조도 무너지고 지금 새 임금께서 등 극하셨습니다. 새 임금께서 존사를 불러 계십니다.』

새 임금? 새 임금이란 누구일까?

『누구시오니까?』

『네, 고려조에 문하시중으로 계시던 이—』

와의 이름까지는 입밖에 내지 못하여 머뭇머뭇하였다.

무학이 받았다—

『이성계구료?』

이 어휘를 마치 동무의 이름이나 부르듯이 내어던지는 바람에 세 감사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들의 놀라는 양을 보면서 무학은 다시 눈을 닫았다.

🙝 🙟

이성계— 기억에 있다.

이전 설봉산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에 한 번 만난 기억이 있다.

그 때에 자기를 찾아왔던 한 개의 청년장군.

『대사는 왜 이런 산골에 계시오?』

『장군에 왜 속세에 계시오?』

『나야 세상을 구원하려니 세상에 돌아다닐 밖에야.』

『빈도는 장군이 구원하시다가 반드시 실패하실 세상을 구해내고자 도를 닦는 중이외다.』

그 때 토굴에서 서로 주고 받은 몇 마디의 대화.

그 때에 무학은 같이 이야기하는 청년 장군의 범상하지 않은 인물을 보았다. 그 큰 키와 굵고 억센 손가락이며 광채나는 눈에서 뿐 아니라, 머리 뒤에 두드러진 커다란 반골(反骨)에서 무학은 이 장군의 인물을 보았다.

지금 고려 조정에 신사(臣仕)하는 장군이라 하나, 반드시 끝까지 신사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 힘만 자라면 언제든 지 고주(故主)를 배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지략으로 짐작하여 성공될 가망없는 일은 꾸미지 않는 인물인지라, 장래에 한장 볼 만한 인물이었 다.

더구나 지금 이 어지러운 고려의 정국에서는 조금 힘있 는 사람이면 넉넉히 한 개 일을 저지를 만하였다.

그때 토굴에서 한참을 이성계의 얼굴을 관찰한 뒤에 무 학은,

『장군께서는 왕골이 보입니다. 자중하소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이장군의 표정이 어떠하였나?

이 장군은 한참을 마주 무학을 보았다.

마주 보다가 지금껏 하던 농담을 걷어치우고 침통한 말 을 하였다.

『이것은 듣던 중 기쁜 말—대사는 어떤 근거로 그런 말 씀을 하시오?』

『네, 왕골은 즉 반골. 왕씨의 피를 받지 않은 장군께 왕 골이 있다는 것은 즉 반골이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올시 다.』

이장군은 이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노염이 폭발하려는 눈치였다.

그 차차 차차 거칠어가는 얼굴을 무학은 그냥 그냥 고요 히 마주 보았다. 그러매 거칠어가던 장군의 얼굴이 도로 평화로와졌다.

『대사! 대사는 예언을 할 줄 아십니까?』

『예언이란 삼척동자라도 할 줄 아는 것이올시다. 손에 잡았던 물건을 놓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요, 해가 기울면 어두워질 것이요, 이치대로 돼 나가는 세상사를 모르면 천치로소이다. 장군께서는 반골이고 반골은 왕골이요, 지 금 고려의 정국이 어지러우니 장군은 반드시 성공하리이 다.』

🙝 🙟

그 이성계가 성공을 한 것이다.

눈을 닫고 과거의 일을 머리속에서 다시 더듬을 때에 무 학은 감개무량하였다.

그 때 작별할 때에 이장군은 무학에게 향하여 만약 이 뒤에 대사의 예언이 맞는 때가 있으면, 그 때 대사가 토 굴을 나와서 이 창생을 제도하는데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 였다.

그 날의 그 약속대로 지금 삼도의 감사가 왕명으로 자기 를 찾으러 옴인가?

그러면 자기는 어떤 길을 취할까?

갈까?

말까?

가서 당년의 이장군, 지금의 왕을 도와서 왕으로 하여금 좋은 정치를 베풀어서 이 도탄의 백성을 구제하게 하나?

그렇지 않으면 이 산중에 그냥 박혀서 그런 속세의 잡된 일을 생각지 말고 오로지 자기의 덕행을 닦기에만 힘쓰 나?

속세에 들어가나? 속세와 절연하나?

🙝 🙟


『이 몸의 거취에 대해서 하룻밤만 생각해 가지고 대답 하오리다.』

삼도 감사에게 이렇게 말하여, 밝는 날 화답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세 감사는 무학의 초암에서 한밤을 보냈다. 비 단 금침도 굳고 무겁다 하던 이 세사람의 귀인이 이부자 리도 없고 돗자리조차 없이 마른 풀을 깐 방에서 한밤을 잠도 못이루고 밝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학은 초암 뒤 고 목 등걸에 가 앉아서 그 밤을 새웠다.

새우며 생각하였다. 생각하고 생각하여야 어느편이 무겁 다고 단정하기 힘들었다.

무학이 이전 젊은 시절에 이름 없는 한 작은 승으로서 편조(遍照)를 찾아본 일이 있었다. 그 때 편조는 호활한 웃음을 웃으면서

『승도(僧徒)의 입산이라 하는 것은, 자기 혼자의 덕행을 닦기 위해서지, 덕행만 닦은 뒤에는 출산하여 중생을 제 도(濟度)해야 되는 것이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을 흔히 중생을 부처에 귀의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모양이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수단으로든, 중생에게 이롭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살기 좋게 하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지, 지금의 불교는 너무도 좁 아져서 그 근본을 잊었느니라.』

이런 말을 하였다. 당년에 한창 혈기의 무학은 편조의 이 말을 도리어 타락된 승의 말로 알았다.

그러나 차차 깊이 깨달아가면서부터 이 말이 진리임을 비로소 알았다. 이 위대한 선구자의 말이 옳은 것을 차차 깨달은 것이었다.

그 편조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서 고려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고, 그의 위대한 가슴을 펴서 고려 창생 구제에 노 력을 할 때에, 무학은 거기서 교리의 진수를 감득한 느낌 을 받았다. 생자 필멸 회자 필리의 소극적 교리보다, 제도 창생 지상극락의 적극적 법열경을 거기서 비로소 발견하 였다. 그런데 무학으로서는 지금 왕의 부름을 받아 정치 계에 나서서, 왕으로 하여금 자비로운 정치를 베풀게 하 는 것은 매우 솔깃한 일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시기군(弑其君>이라는 점이 마음에 꺼리었다.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의 사직을 둘러 엎고 스 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하는 점이 무학의 마음에 꺼림칙 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저울 좌우편에 올려놓고, 어느 편이 무거운지 무학은 밤새도록 생각하였다.

🙝 🙟

이튿날 무학은 왕의 부름에 응하기로 작정하였다.

시(弑)기군이든 어떻든, 이런 소절에 구속되지 말고 왕의 부름에 응하여서, 지금 국초의 도탄 중의 백성에게 조금 이라도 좋은 정치를 주게 하려 결심하였다.

수년 전 설봉산 토굴에서 본 바에 의지하건대, 이장군은 왕굴과 기략(機略)과 패기는 가졌지만 자비심에는 얼마간 결함이 있는 듯 싶었다. 새 국가가 건설됐다 할지라도, 그 지배자에게 자비심이 부족하면 백성들에게는 아무 기꺼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의 지배자에게 좀 결핍한 듯한 자비심을 자기 힘으 로 보충하기 위하여 무학은 이 고달산의 초옥을 나서 송 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날부터 고달산 숲속에 있던 이 초라한 초옥은 주인을 잃었다.

🙝 🙟


『전하!』

송경 수창궁에서 왕께 알현하는 무학!

무학은 저으기 눈을 들어서 왕을 우러러보았다.

지금부터 수년 전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한 고려의 장군 으로 뵐 때의 그 면영과 지금과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 광채있는 눈이며 패기 있는 이마며—어디로 보든 더 늙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입은 옷이 지금은 면륜관 에 곤룡포일 따름이었다.

『전하, 축하드리옵니다.』

이 축사에 대하여 왕은 빙긋이 웃었다.

『설봉산 토굴에서 대사의 하시던 예언이 오늘 성취되었 나보이다.』

『예이, 불행히도 맞았습니다.』

눈을 딱 마주뜨고 바라보며 대답하는 무학— 왕은 놀랐다. 왕뿐 아니라 근시의 다른 재상도 모두 놀 랐다. 지금 한 나라를 이룩하고 의기가 충천한 이 왕께 대하여, 대담하게도 이렇게 대답하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놀라는 양을 보면서 무학은 말을 계속하 였다.

『전하, 불행히도 빈도의 관측이 어그러지지 않았습니 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에는 과거를 논지해서 무얼 하리 까? 장래 인군(仁君)이 됩소서. 일국의 군왕으로서 전하 는 다른 점은 부족함이 없사옵지만, 단 한 가지 인자하신 기성이 부족할까 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굴만한 이 군신의 앞에서 대담히 도 이런 말을 하는 무학— 왕은 잠시 무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격동, 흥분, 감동, 묘가지의 표정이 움직였다. 그런 뒤에 다시 빙긋이 웃었 다—

『대사!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서로 오래 막혔던 정회나 풉시다. 대사를 고달산에서 모셔 온 것은 무른 내가 내 부족을 알기에 내 부족한 점을 대사로 보충하려 함이지 만, 지금 이 자리는 오래간만의 상회의 자리라 회고담이 나 하기로 합시다.』

『예이…』

아직 왕을 우러러보던 무학의 눈이 툭 떨어졌다. 그날 무학을 위하여 수창궁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다.

🙝 🙟

수일 뒤 조용한 날, 무학은 왕과 마주 앉았다. 그 때 왕 은 비로소 당신의 마음을 터놓고 무학을 대하였다—

『대사는 아직 군왕과 신하의 지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외다. 불가의 사제지분 이상으로 군신지간 은 계급이 엄한 것. 일전 대사가 처음 입궐하신 날 말씀 하신 바를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요, 또 나도 단 한가지 자비심이라는 데 부족함이 있는 듯하기에 대사를 청하여 온 것이니까, 그 방면에 관한 대사의 의견을 근청할 마음 이지만, 대사도 주의할 점은 대사가 내게 말씀할 자리를 삼갈 것이외다. 웃사람에게 웃사람의 비행을 말하는 것은 대개 조용한 자리에서 할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 다. 대사를 사부(師傅)로 삼고 덕행 방면에 관한 지도를 빌고자 멀리 고달산에서 모셔 왔지만, 나와 대사는 군신 지간이라는 점뿐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 행하는 일에 대하여 대사가 아무런 비판을 내려도 그것은 탓하지 않으 리다만 말할 자리를 삼가주십시오.』

이에 무학은 푹 머리를 수그렸다.

한참 뒤에야 무학은 대답하였다—.

『비로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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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지위에 대하여 신돈과 같은 자리를 상상하며 왔 던 무학은 여기서 비로소 <공민왕 때 신돈>과 <자기와 현왕>과는 현저히 다른 점을 알았다.

그 전생으로 비교해 볼지라도 현왕과 공민왕과는 비길수 도 없을이만치 달랐다.

공민왕은 왕자로 태어난 한 개 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왕자답게 관인대도한 사람이었다.

거기 비하여 현왕은 당신의 손으로 당신 머리에 면류관 을 올려 놓은 사람이었다. 일찍이는 한낱 작은 군인에서 오늘날의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니만치 이

<나라>라는 살림살이를 구석구석까지라도 모두 몸소 주 무르고 만지고 건드리려는 사람이었다.

그 뒤에 또 자기와 신돈과도 그 인물이 비교할 수 없이 달랐다.

입산해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자기 딴에는 인젠 득도하 였거니 스스로 믿었다.

그랬더니 급기야 하산하여 속인들과 마주 대하니, 자기 의 득도가 신돈에게 못미치기 아직 천보다.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온갖 사물에 대하여 대하여 관대하고 활달한 눈으로 보던 신돈에게 비기자면, 자기는 아직 갓난애에 지나지 못하였다. 온갖 일에 아직도 큰 눈을 뜨지 못한 자기다.

왕이 다르고 왕사(王師)가 다른 것을, 자기 딴에는 공민 왕께 대한 신돈의 노릇을 하려고 뛰쳐나왔던 것은 실수였 다. 이러한 자기로서 인제 취할 길은 왕의 곁에 늘 경마 들에서 왕의 다른 정치에는 언급치 않고, 이 억세고 괄괄 한 왕이 간혹 범할 바의 자비롭지 못한 일에나 주의를 시 킬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써라도 이 왕의 아래 있는 백성 으로 하여금 얼마만치라도 마음 편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무학은 소극적으로 이 왕의 업적에 조력을 하려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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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매우 무학을 신임하였다.

다른 신하들의 말이면 도저히 듣지 않을 웬만한 일이라 도 무학의 말이면 들었다. 도 그만치 무학은 왕이 반드시 들을 말이 아니면 결코 하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이씨조선 전국 초의 민심 수획에 있어서는 정 치가의 힘보다도 무학의 힘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附記敎言> 왕이 처음 고려 서울 송경에서 도읍을 하 였다가 여러 가지의 문제 때문에 서울을 옮길 때에도 가 지가지의 의논이 있다가 무학의 의견을 좇아서 한양으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 뒤 이 왕의 다섯째 아드님 방원대군(뒷날의 태종대 왕)의 어떤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왕은 아드님을 보 지 않으려 멀리 함흥으로 피신하였다. 피할 때에 옥새까 지 가지고 갔다.

신왕인 태종대왕은 아버님의 노염도 풀겸 옥새도 찾을겸 하여 문안사를 함흥 아버님께 보내고 하였지만, 노염이 너무도 강하여 문안사조차 모두 활로 쏘아 죽여 버리고 하였다. 함흥으로 갔던 문안사는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 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에도 조정에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무학대사를 함흥 으로 보냈다. 조정에서 오는 문안사는 모두 죽여버리던 태상왕이었지만 이 무학대사(이전 고려의 한낱 장군시대 부터 안면이 있고 그 위에 건국 초에 당신을 도와서 어진 정치를 베푸는데 많은 조력을 한)뿐은 어찌할 수가 없어 서 노인의 고집은 꺾이고 종내 옥새를 신왕께 전하려고 드디어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었다.

고려조에 있어서 공민왕 시대의 신돈의 것만한 업적은 못 남기었지만, 이씨 건국에 무학의 힘만 없었더면 민심 이 그만치 수습되었을지는 매우 의심되는 바다.

새 조선을 이룩한 이씨의 업적에 대한 광휘가 너무도 혁 혁하여서 역사 표면에는 비교적 무학의 업적이 드러나게 보이지 않지만, 무학의 전기를 상고하면 그이 정치적 업 적의 일면도 적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수가 있다.

(一九三五年 二月 <朝鮮文壇>所載 《高達山을 내리다》改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