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2/적분재상

『으─ㅁ!』

한참 침묵─.

『영창을 열어라!』

『─ 네이.』

고요히 영창이 열렸다.

『다들 물러가거라!』

『……』

『혼자서 좀 생각해야겠다.』

『─ 네이.』

조심스러이 물러가는 발소리.

고요하게 된 뒤에 비로소 머리를 든 최영(崔塋)─.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 눈이 정기, 얼굴의 빛깔, 아직 그의 위력을 넉넉히 볼 수 있다.

머리를 든 노인, 안석에 기대인 채 저으기 눈을 들어서 열린 영창으로 뜰을 내다보았다. 춘삼월, 뜰에서 봄을 자랑하는 배꽃은 눈결과 같이….

『아─ 아, 봄이로구나.』

봄? 과연 봄이었다. 겨울이 지났으니 봄이었다. 여름이 안 왔으니 봄이었다. 그러나─.

─ 그런 일이 능히 있을까?

「이만호(李萬戶=李成桂)가 그 도당과 더불어 불궤를 도모한다…」

「지금 민간에는 주상전하를 신돈의 씨라는 기괴한 비언이 돌고 있는데, 그것도 이만호 일당이 퍼치는 바다.」

있음직한 말이다. 그러나 또한 너무도 무엄하여 믿지 못할 말이다. 이시중의 수상한 행동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경계하고 있던 바지만, 그러나 이런 무엄한 비언까지 능히 민간에 유포시켜질까?

이시중의 인물이 반심까지는 넉넉히 품을 인물이지만, 아무리 반심을 품는다기로 신자(臣子)의 몸으로 주상전하께 그런(차마 입에 담지 못할)말까지야 꾸미어 낼 수가 있을까?

신돈의 씨? 현재 자기가 임금으로 섬기는 분이며 선왕(恭愍) 재위시에 단단히 부탁까지 받은 그 분께 대하여 어쩌면 그런 말이 감히 나올까?

「고약한 놈!」

이를 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염과 불쾌에 불붙는 눈을 치뜨고 뜰앞에 봄을 자랑하는 배나무를 바라보는 최영(崔塋)─.

「봄!」

겨울이 지났으니 봄이다. 여름이 안 왔으니 봄이다. 그러나 봄다운 데가 어디냐?

배꽃이 피었으니 봄일까? 날이 따뜻하니 봄일까? 솔개가 날아다니니 봄일까? 그 밖에는 봄이 어디 이르렀느냐?

민간에서는 이시중 일당의 퍼치는 맹랑한 풍문에 갈피를 못 차리는 시민들.

정부에서는 이시중 일당의 병력(兵力)으로서의 위협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관원들.

이런 가운데서 고려 천만 생령의 마음에는 봄의 그림자도 뜨이지 않았다.

「아─아, 어쩌나?」

─ 이미 늙은 자기.

─ 한창 장년의 이성계.

비록 자기가 이미 늙었지만(일흔 셋이었다) 지금 이 고려의 조정에서 이시중의 세력에 대항할 만한 사람은 자기 하나밖에 없다. 사분(私分)으로는 비록 이시중과 친한 사이라 하 나, 공으로 보아서 인제는 서로 적대해서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늙고 그 위에 병력조차 비길 수 없는 자기지만, 왕조 위태로운 이때에 자기 한 사람밖에는 이것을 짊어질 사람이 없다.

─ 오백 년 사직, 내 눈이 아직 검은 동안에야 누가 능히 이를 엿보랴. 이성계를 처치하자!

우왕(禑王) 십사년, 명나라 홍무(洪武) 二十一년, 무진(戊辰) 춘삼월.

그래도 봄이라고 뜰 앞 배나무에는 배꽃이 눈결과 같이….

『상감마마! 그 밖에는 도리가 없을까 하옵니다.』

내관까지도 모두 멀리 치우고 침전에서 왕께 비밀히 배알하는 최영─.

왕도 수심이 가득하여 아무 대답 없이 있었다.

『상감마마, 신이 그 사이 수일 간을 숙고하온 결과, 이 일도(一道)밖에는 다른 양책이 없사옵니다.』

늙은 눈에 눈물이 머금고 어전에 끓어 엎드린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

이윽고 왕이 응하였다─.

『이시중(이성계)이 응하리까?』

『일변 계약을 쓰옵고 일변 어명으로 명하오면 이시중인들 어찌 감히 표면으로야 거역을 하리이까?』

왕은 다시 입을 봉하였다.

입을 봉한 왕을 최영은 눈을 약간 치뜨고 우러러보았다.

수기한 운명의 주인공인 이 왕, 대중 이십 사오세의 한창 필 나이언만 용안 전면에 나타난 침착한 빛, 음울한 기색, 어디로 보든 삼십 전후의 중년으로 보였다.

『상감마마, 성의가 어떠하시온지?』 ─ 최영이 왕께 바친 계략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즉 그 때 고려는 그 사이 대대로 대국으로 섬겨 오던 원나라를 멀리하고(갓 이룩한)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누백 년 간을 원나라를 대국으로 섬겨 왔으니만치 고려 백성의 마음에는 지금도 습관적으로 원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데다가, 더우기 신흥 명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매우 불쾌한 일을 하나 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껏 고려의 영토로 추정해 오던 요동(遼東)을 명나라가 자기네 영토라 빼앗은 점이다.

이리하여 이 영토 문제로 상국인 명나라와 고려의 사이에는 뜻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고려의 의사 따위는 우습게 보고 요동은 명나라 영토라 정하여 버렸다.

─ 이러한 기회에 이시중을 시켜서 요동 정벌을 보내자 하는 것이 최영의 의견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로 매우 긴한 일이니 첫째로는 이시중이 원정군을 끌고 본국을 멀리 떠난 기회에 본국서는 이 시중이 개선하여 돌아올지라도 거기 대할 만한 준비를 하자 함이요, 둘째로는 이리하여 명나라에게 빼앗겼던 요동을 다시 찾자 함이다.

불행히 이시중이 원정에 실패를 하고 명나라에서 그 문책을 할지라도, 그 때는 이미 실패한 이시중에게 책임을 돌려 버리면 어차피 이시중은 몰락을 할 것이다.

이런 의미 아래서 최영은 이시중을 시켜서 요동 원정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침묵은 또 계속되었다.

봄날 저넉─ 마음을 녹이는 듯한 꽃바람이 불어들어서 건들거리는 촛불 앞에, 수심의 젊은 왕과 수심의 늙은 재상은 묵묵히 있었다.

『상감마마!』

「꼬끼오─」

벌써 첫닭이 우는 소리.

이 닭 소리에 최영은 조금 물러앉았다.

『상감마마, 벌써 밤도 깊었사오매 신은 물러가겠읍니다. 숙고합시고─.』

왕이 이때야 비로소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알리까? 수상만 믿으니 좋을 대로 하시오.』

『상감마마!』

『수상, 도와 주시오. 마음이 아프외다. 어찌해야 할지 분간하기 힘드외다. 나는 아직껏 이시중을 신임했소이다.』

우러러보니 용안에 눈물 자취가 두 줄기 촛불에 얼른거린다.

아아! 천승의 귀한 몸으로 눈물이 웬 일이냐? 조금 물러앉았던 최영은 다시 무릎걸음으로 어전에 가까이 나갔다.

『상감마마, 신 비록 늙었사오나 신의 동자(瞳子) 검은 동안에야 이시중 따위가 어찌 존엄을 범하올 생각인들 하오리 까? 안심합소서, 안심합소서. 이시중의 위력때문에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오나 이시중만 멀리하오면 일어설 적자가 고려에 아직 천 백으로 세일 수 있사오니 안심합시고 후일을 기다리옵소서.』

『수상만 믿으오.』

『성의에 어김이 없도록 보답하오리다.』

낙화를 재촉하는 봄바람에 촛불은 또 건들거린다.

닭의 우는 소리─ 봄밤은 차차 깊어서….

수일 후 정부에서는 왕의 서순(西巡)을 발표하였다.

표면의 이유는 선묘(先廟) 적부터 숙안(宿案)으로 되어 있던 천도(遷都)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서경까지 친행한다 하는 것이었다.

최영의 따님인 영비 최씨(寧妃崔氏)며 최영, 이성계도 배행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서울은 우현보(禹玄寶)로써 지키게 하고, 왕자 창(昌)이며 다른 비빈들은 중흥성(重興城)으로 가 있게 하였다.

표면은 서경 순유라 하나 그 이면은 온전히 다른 뜻을 가진 바로서, 이것은 왕과 최영만이 알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바였다. 즉 이렇게 서경 순유라 하여 이시중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배행하게 하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요동 원정을 명할 예정이었다. 이리하여 이시중으로 하여금 손쓸 틈 없이 요동 정벌을 떠나게 하고 그 뒤로 제 이단의 계획을 진행시키려는 것이었다.

무진년 하사월,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서 서순의 길을 밟았다.

봉주(鳳州=지금 봉산)까지 왕의 일행은 이르렀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 우짖는 벌레 소리는 짧은 여름밤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행궁의 별실에 늙은 몸을 눕힌 최영─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전전하며 잠을 못 들었다.

밝는 아침 이시중에게 어명으로 요동 정벌을 보낼 계획이 었다. 대사를 앞두고 이 늙은 재상은 늙은이답지 않은 흥분으로 잠을 들지 못하였다.

무릎뼈가 마주친다. 만져 보매 그 건강하고 장대하던 몸집도 주름살 천지요, 돌덩이 같던 근육들도 힘이 빠졌다.

나라를 위하여 분투하기 오십 여년, 지금 이 말라빠진 늙은 몸을 최후까지 나라를 위하여 싸우자. 명일이로다. 명일.

마지막 거탄을 던질 날이로다. 어찌 되려나?

하늘이여, 도웁소서. 명일이 일대 결전이로소이다. 만약 이 사직이 과히 흉하지 않거든 도와줍소서. 신명께 밤이 새도록 최영은 빌고 또 빌었다.

『이시중은 즉각으로 군사를 정비해 가지고 요동 원정의 길을 떠나시오.』

청천의 벽력같은 이 왕명에 이시중은 아연하였다. 이시중 뿐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사유는 모르고 어전에 불린 문무대관들은 모두 아연하였다.

죽은 듯이 고요한 전내, 잠시 모두들 멍하니 있었다.

한참 뒤에야 이시중이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신은 지금 출사(出師)를 찬성할 수 없읍니다─.』

이 말을 최영이 받았다─.

『이시중! 출사하라시는 어명이지, 아마 이시중의 의견을 하문하신 바는 아닌 줄 아오.』

힐끗 흘기는 이시중의 눈. 최영은 뜻않고 몸서리쳤다. 칠십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눈초리였다. 최영의 말이 있건 없건 이시중은 자기의 말을 계속하였다─.

『지금 출사의 불가한 이유를 상계하오리다. 첫째로 이소역대(以小逆大)가 불가하오니, 변방 고려로서 상국 대명을 어찌 거슬리오리까? 이가 첫째 불가한 이유옵고, 둘째로는 하월발병(夏月發兵)이오니 여름에 발병하던 노(勞) 많고 득이 적은 것이오매, 세째 불가는 나라를 들어 원정하오면 왜 구가 허(虛)를 엄습할까 하오니 이가 삼불가오며, 네째로는 시절 바야흐로 우기(雨期) 오매 궁노교해(弓弩膠解)되옵고, 그 위에 악질이 군중에 생길 염려가 있사오니 사불가옵니다. 백해가 있고 없는 이번 출사는 그만 중지하시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안정을 들었다. 잠시 말 없이 이시중의 머리를 굽어 보았다. 그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미 작정한 바니 곧 시행하도록 준비를 하시오.』

『그러나─ 』

그냥 반대하려는 것을 최영이 받았다─.

『이시중! 어명이외다. 상감마마, 어명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이시중도 고려의 지주(支柱)인 이상 군명을 어찌 거역하 리까? 이소역대라 하지만, 고려 오백 년에 저(명나라)는 겨우 수십 년이라, 이는 이장벌유(以長罰幼)로서 당연한 일이 옵고, 요동은 북국이라 여름에 출사치 않으면 장차 엄동을 겪기 힘들 것이오며, 거국 원정이라 하지만 아직 변방을 지킬 장수 넉넉하오니, 이 때에 북벌하지 않으면 장차 한을 천추에 남길 날이 있을까 하옵니다. 우견이 이러하던 차 성의 또한 여사하오니, 이는 태조의 영령이 상감마마를 지시하심이 아닌가 하옵니다.』

연하여 날아오는 이시중의 날카로운 눈치를 느끼며 최영은 이렇게 복계하였다.

『그러하오나─』

『신자는 군명에 복종할 의무가 있을 뿐이외다.』

늙은 눈을 들어서 이시중을 꾸짖는 최영의 태도에는 수상으로서의 위엄이 충분히 들어 있었다.

어명? 하나에서 열까지 어명으로 억압하는 바람에 이시중은 하릴없이 입을 봉하였다.

서경(평양)까지 이르러서 드디어 이시중은 왕명으로 요동 원정의 길을 밟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를 제수하고 조민수(曺敏修)로서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심덕부(沈德符) 이 무(李茂) 왕안덕(王安德) 이승원(李承源) 박위(朴葳) 등 장수를 여기 속하게 하고, 이성계로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고, 이두란(李豆蘭) 배극렴(裵克廉) 박영충(朴永忠) 등 장수를 속하게 하여, 사만 대군이 요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호랑이를 멀리 떠나보낸 뒤에 왕과 왕비며 최영 등은 서경에 머물렀다.

『수상!』

『상감마마!』

마주 보는 젊은 왕과 늙은 재상.

『인젠 환경합시다.』

『상감마마, 서경은 경치로 이름나고 고적으로 이름난 곳.

인제 환경하시면 언제 다시 이 고도를 찾아실 날이 있사오리까? 정무에 골몰하셨던 그 피로를 잠시 정양하시고, 성천온천(成川溫泉)이나 잠시 돌아서 환경하시도록─』

하사월 버들잎 푸르른 꿈과 같은 도시에서, 젊은 왕은 이 사천 년 고도를 즐겼다.

호악(胡樂)을 울리며 미희(美姬)의 나부끼는 소매자락을 바라보면 늙은 재상과 젊은 왕은, 정무에 골몰하였던 머리를 이 여름날 대동강 바람에 씻었다.

『수강!』

『상감마마!』

『어찌 되리까?』

『고려 만만세하오리다.』

『그렇기만 하면 좋겠소이다마는…』

『다시 무슨 염려가 있사오니까? 이 모는 멀리 가서 생환조차 기약하기 힘드오며, 국내에는 상감마마께 충성된 무리만 남았사오니 무슨 우려가 있사오리까?』

젊은 왕이 젊은 비(최영의 따님)과 함께 부력루에서 혹은 활을 즐기며 혹은 격구(擊毬)를 즐기는 양을 우러러보는 늙은 재상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흐르고 하였다.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는 상쾌한 바람.

유량한 호악의 멜로디─.

『아아, 고려 만만세로다!』

오월 을미(乙未)에 이 귀인의 일행은 성천온천에 이르렀다.

수일 간을 온천에서 더 정양을 한 뒤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국가 중흥의 대업을 시작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성천 온천에 머무른 지 사흘째.─ 의외의 비보(飛報)는 이 군신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시중이 회군(回軍)했다.」

「위화도(威化島=義州)까지 갔다가 자의로 회군했다.」

「사만 대군을 그대로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지금 벌써 안주(安州)까지 이르렀다.」

「원정군의 회환이 아니요. 정경군(征京軍)의 진군이다.」

반역─.

왕명을 거슬렸다. 자의로 회군한 것만하여도 역천이어늘, 창끝을 서울로 향하고 진군한다 하는 것이었다.

『수상─ 어찌할까?』

『예…』

아뢸 바가 없었다.

이 이시중의 천행(擅行)에 군신은 서로 붙들고 이를 갈며 통곡하였다.

계획이 수포에 돌아갔다.

희망도 수포로 돌아갔다.

인젠 일로 서울로 달려 돌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대가는 즉각으로 다시 평양으로 돌렸다.

자주니성(慈州泥城)을 지나면서

「요동 원정을 보냈던 이성계가 자의로 회군을 하여 돌아 오니, 노변 대소 군민들은 힘써 막으라.」

는 영을 내리고, 밤을 도와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밝는 날 대동강을 건너 이 군신 일행은 반역의 장솔들을 피해서 서울로 길을 재촉하였다.

여름날 전쟁 아닌 전쟁은 서경에서 송경까지로─.

황황히 서울로 돌아온 왕의 일행은 대궐을 최후의 아둔소로 하고 그 안에 숨었다.

『수상! 어찌 되리까?』

『상감마마!』

더 할 말이 없어서 마주 붙들고 목을 놓아 우는 군신.

여름, 제철이라고 우거진 녹음. 지저귀는 새의 무리, 날아드는 나비의 떼─ 그러나 이런 것을 완상할 수도 없이 대궐 내전에 숨어서 몸만 떠는 왕과 재상이었다.

창황중에 군사를 부르나 군사도 없었다. 죄 이시중에게 주어 원정으로 떠나보내고, 인젠 모집을 해야 할 터인데 모집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할 때에 이시중의 사만 대군은, 유월 초하룻날 드디어 서울 근교에까지 이르렀다.

왕령으로 이성계 조민수 등 반역 제상의 벼슬을 깎았다.

그러나 실력 없는 왕의 삭관(削官)쯤이 무슨 효력이 있으랴? 사만 대군은 겹겹이 서울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포위군의 대장인 이시중에게서 왕께 한 장 글발이 들어왔다.

가로되 최영을 내쫓읍시오─

『수상!』

『상감마마!』

『분하옵니다.』

『어찌리까?』

늙은 대장은 한참을 생각한 뒤에, 머리를 들었다.

『상감마마, 신이 이 모의 진중으로 가오리다.』

『수상이 가면 이 뒤를─』

『우현보(禹玄寶)에게 후사를 맡기옵고─』

『안됩니다. 이 모가 단지 수상 한 사람만 목적한 바가 아닌 줄은 나도 잘 아는것…. 어디 이 모의 의향을 한 번 들어 봅시다.』

왕은 설장수( 長壽)를 이시중의 진중에 보내서 왕명으로 파군(罷軍)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파군은커녕 더욱 진군하여 도문(都門) 밖에 진을 쳤다.

왕은 하릴없이 서울 안의 군사를 되는 대로 모아서 네 문을 지키게 하였으나, 이 급모의 군사가 정예의 이시중의 군사를 대적할 듯있을 까닭이 없었다. 조민수의 이끈 군사는 숭인문(崇仁門)으로 물밀 듯─ 반군은 드디어 서울 바닥으로 쓸어 들어왔다.

아우성 소리.

군마의 어지러운 소리.

소란의 송경 장안에는 조민수의 검은 대기(黑大旗)와 이시중의 황룡대기(黃龍大旗)가 동서로 나부끼었다.

아우성 소리! 소란 소리!

그 가운데 백성들의 울고 부르짖는 소리.

이러한 동안에 황룡대기는 어느덧 선죽교를 거쳐서 남산(南山) 마루로 올라갔다.

늙은 몸이 그래도 좀 더 버티어 보려고 군사를 몸소 지휘하며 이시중의 반역군을 대항하던 최영─.

남산 마루에 휘날리는 황룡대기를 눈에 보고는 최영의 군사들은 더 기운을 못 썼다. 부르짖고 호령하고 독려하여도 인젠 겁 먹은 군심을 돌이킬 길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껏은 칼도 들고 싸움 비슷이 하던 관군들도 남산 마루에 황룡대기를 보고는, 질겁을 하여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인젠 어쩌나?

어지러운 군마 틈에서 장군도를 높이 들고 군사를 지휘하던 회영도, 인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서 남북으로 도망하는 군사들을 보면서 최영도 그만 말고삐를 돌렸다.

향하는 곳은? 대궐이었다.

칠십 생애에 그 오십 여년 간을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친 늙은 재상의 눈에는 앞일이 환하니 보였다.

─ 자기는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 자기 죽으면 고려의 사직은 이시중의 손아귀 아래서 놀아날 것이다.

똑똑히 보이는 이 두 가지의 사실에 뺨을 흐르는 눈물. 어지러이 헤지는 군졸 가운데서, 늙은 재상은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말고삐를 채며 수창궁으로….

대궐로 돌아와 보매 정전 편전 침전이 모두 텅 빈 가운데, 환관 말직들만 몇 명이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돌아가고, 왕 이하의 귀인들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시냐? 전하는 어디 거둥합셨냐?』

한 환관을 붙들고 물어 보았다.

『화원(花園) 팔각전(八角殿)에 계시옵니다.』

팔각전으로 돌아가보매, 왕은 이비, 영비, 왕자 및 수삼 내관을 데리고,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상감마마!』

『정승! 어찌 되었소?』

『상감마마! 패군지장이 용안을 우러를 면목이 없사옵니다.』

전에서 굽어보는 젊은 왕과 전 아래 꿇어 엎드린 늙은 재상─ 잠시 말이 끊겼다.

경호하는 군사도 없는 이 화원은, 인제 저편에서 발견만 하면, 한 칼을 둘러 보지 못하고 넘어갈 것이다.

문득 암방사( 房寺) 북녘에서 한 마디 나팔 소리가 높이 울리었다. 쳐다보니 황룡대기가 거기서 펄럭거리며, 벌써 이 화원을 발견하였는지, 이 곳을 가리키는 모양까지 역력히 보였다.

『수상!』

『상감마마!』

무릎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댓골까지 가서는 역시 무릎걸음으로 전에 올라갔다.

예의에 벗어난 일이나 위급한 이때에 예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상감마마!』

『정승!』

마주 꽉 손을 잡고….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눈물도 못 흘리고, 단지 떨기만 하는 소년 임금. 곁에 못시고 있는 비며 궁녀들도 울지도 못하고 떨기만 한다.

드디어 영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신이 이성계의 진으로 가오리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벌써─』

보매 화원 울타리 밖에는 벌써 저편 군사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피할 도리가 없읍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하올 이상, 이 아깝지 않은 늙은 몸을 이성계에게 내어 맡기옵고 마지막 당부나 해볼까 하옵니다.』

『그래도─』

……』

드디어 화원은 저쪽 군사에게 둘러싸였다.

둘러는 쌌지만 그래도 이 안에는 국왕이 들어 있는지라 탁 달려들지는 못하고, 포위의 겹만 연하여 더하여 아우성 소리만 천지가 진동할 듯이 울리었다. 화원 중앙의 팔각전에서는 한 인물이 아래로 내려왔다.

최영이었다. 뒷걸음쳐서 댓돌을 내린 영은, 아래 엎드리어서 왕께 마지막 하직을 고하였다.

무언의 하직이었다. 엎드리어서 눈물만 잠시 흘리고 있었다. 그 뒤에 몸을 고요히 일으킨 최영, 화원 밖에 둘러싼 군졸들을 휘살펴 보고 황룡대기가 있는 편으로 고요히 힘있는 발을 떼었다.

『온다!』

『최적(崔賊)이 온다.』

『최정승 오신다.』

가지각색의 소리가 밖에서 들리는 그 울안까지 이른 영은, 울 밖의 군사에게 명하였다─.

『이 울을 끊어라.』

군졸들이 끓어 놓은 울 틈으로 울 밖에 나선 영, 좌우편으로 갈리며 길을 내어 주는 군사들 틈으로, 황룡대기 쪽으로 갔다.

『이시중!』

고요하나 힘있는 소리.

정면으로 자기를 부르면 오는 정승에게 이시중은 열정적인 모양으로 싱겁게 웃었다.

『이시중─ 이 포위는 나를 목적한 바요? 혹은 주상 전하를 목적한 바요?』

『시생이야 무슨 혐의가 있소리까만, 군심이 너무 소란하와─』

『이시중도 고려의 중신, 이시중의 마음만 든든할 것 같으면 나같은 노물은 있으나 없으나─ 자, 내 몸을 이시중께 맡길 테니 마음대로 하거니와 국가의 죄인은 되지 말우.』

『……』

『주상전하는 지금 팔각전에 계시오. 성념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니니, 어서 포위군을 풀으오. 나는 내 집에 가서 있을 테니 필요 있으면 언제든 오오.』

한 마디 내어던지고는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고 발을 떼었다. 이 위풍에 길을 비키는 군졸들의 틈으로….

최영이 이렇듯 마주 나와서 효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이시중은 망연히 그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일국 정승의 집이라고 볼 수 없는 초라한 자기 집에 돌아온 영─ 가족이며 가묘에 하직할 겨를도 없이 뒤따라 온 군졸들에게 붙들려서 다시 진중에 갔다.

그 날로 고봉현(高峯縣=高陽)으로 유배를 갔다.

큰 기둥이 꺾인 뒤의 고려의 조정은 난잡탕이었다.

왕은 누구며 재상은 누구냐? 왕이 최영에 버금가게 신임하다니 우현보도 곧 벼슬이 깎였다.

뿐만 아니라, 회군 때에 왕명으로 벼슬을 깎았던 조민수, 이성계 이하의 각 장령들은 누구의 명으로인지 모두 복직이 되었다.

『전하!』 정전에서 왕께 사변 평정의 축하를 드리는 이시중─

『신이 일찍 손을 씻삽기 최적의 흉수에서 고려를 구원해냈읍니다.』

『가상하오.』

『최영의 의견대로 요동 원정을 시작하였던들 황사를 어찌 당하오리까? 하마터면 오백 년 고려 사직이 사라질 뻔하였읍니다.』

머리를 끄덕이는 왕─ 그러나 내심으로는 억분하여 떨었다.

유월 염천에 왕은 내전에 꾹 박혀서 나지 않았다. 문을 굳이 닫고….

정전에 나면 반드시 만난 이시중 이하의 장령들이 만나기 무서웠다. 대궐을 마치 자기 집 사랑 드나들 듯 무시로 함부로 드나드는 그 무리들─ 괘씸하기 짝이 없고 분하기 짝 이 없으나, 막을 도리도 없었고 막을 힘도 없었고 막을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이시중을 만나면 마치 네 생명이 아직 붙어 있는 것만 요행으로 여기어라 하는 듯이─.

「아아─」

재위 십 사 년 간. 열 두 살에 등극을 하여 스물 여섯 살 나는 지금까지, 이인임(李仁任), 최영 등 충신 아래서 어지러운 정국이나마 그래도 수습해 오던 이 사직도 이젠 종말이냐?

무르녹이는 더위─ 문을 열어 젖혀서 한 점 바람이라도 맛보고 싶지만 그것도 못하는 가련한 형세이었다.

드디어 최후의 날이 이르렀다.

『상감마마! 대궐 수호하던 병사를 이시중이 모두 불러내어 갔읍니다.』

무얼? 깜짝 놀라서 어쩔 바를 모를 동안, 내전 앞으로 말을 달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대궐─ 더구나 내전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는 자 누구냐? 대궐 영조 이래로 아직 말의 발에 밟히러 보지 않은 이 대궐 안뜰까지 말 타고 들어오는 자 누구냐?

문득 함성이 들렸다─.

『최영의 딸 영비(寧妃) 나오너라!』

떨리는 전내에서 왕과 영비 이하 궁녀들은 끽 소리 없이 숨까지 죽였다.

『대역무도한 최영의 딸 나오너라!』

왕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왕은 몸을 일으켰다. 노염과 공포로 떨리는 사지를 겨우 지탱해서 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말을 탄 조인옥이 험상궂은 눈을 흘근거리며 열리는 문을 바라본다.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가 수창궁 내전이오.』

맞서는 대답에는 할 말이 없었다.

『영비는 왜 찾느냐?』

『영비는 죄인의 딸이라, 도당(都堂)에서 폐하기로 되었소!』

만약 이런 일이 갑자기 이른 일이라 하면, 왕은 반드시 분통이 터져서 그 자리에 넘어졌을 것이다. 나날이 전전긍긍히 지내던 터이라 능히 여기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왕은 굽어보았다. 아무 표정도 없는 눈으로 잠시 인옥을 굽어보았다.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왕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뒤따라 장졸 서너 명이 또 말탄 채 들어왔다.

『이시중의 명령이오. 영비가 나오지 않거든 올라가서 끌어내라는 명령이오.』

사실 전에도 넉넉히 올라올 만한 기세였다.

이리하여 마지막 파탄은 생겼다.

왕은 마지막에 사정까지 하였다. 영비를 끌어내면 나도 함께 가겠다고 이렇게까지 말해 보았다. 그러나 그 말이 설 까닭이 없었다.

먼저 대궐의 의장병을 없이하고 그 뒤에 영비를 잡아낸 뒤에, 장령들은 왕을 호령하여 정전에 나게 하였다.

그 사이 한 동안 나지 않았던 정전에 나오매 조시중, 이시중 이하의 재상들이 기다리고 있고, 뜰 아래는 왕의 사랑하던 말까지 등대되어 있었다.

마치 도소에 들어가는 소의 걸음으로 왕이 용상으로 나아갈 때에 이시중이 가로막아 섰다─.

『용상은 당신이 갈 곳이 아니오. 저 뜰 아래 내려서 말께 오르오.』

─ 너는 현릉(玄陵=前王 恭敏)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辛旽)의 아들이다.

─ 너는 전 국민의 의향에 좇아서 폐한 바 되었으니, 즉각으로 배소 강화로 저 말을 타고 떠나거라.

─ 영비 최씨와 연쌍비(燕雙妃)는 함께 가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니 데리고 가거라.

… 이것이 이 왕께 내린 재상들의 명령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석양─ 저녁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갈 때였다.

어찌 할까? 마음만 설레일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무서운 꿈과 같을 뿐이었다. 어지러운 꿈 속에서 노는 듯, 너무도 의표 외의 일이라 갈피를 차릴 수가 없었다.

말 채찍을 들고 왕은 초연히 뜰에 내렸다.

말께 가까이 가서 두어 번 갈기를 두드려 주었다. 기꺼운 듯이 이 오래간만에 보는 주인을 향하여 코를 풀럭이는 말.

말께까지는 갔다. 그러나 날이 이미 저물은 이때, 길을 어떻게 가나? 앞길이 막막할 뿐이었다. 잠시 말갈기만 두들기 다가 왕은 겨우 눈을 좀 떴다.

『날도 기울었으니 밝는 날 떠나면…』

거기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이시중 이하의 장령들은 못 들은 체하여 버려서 왕의 말을 묵살하였다.

개중에는 오늘 이 자리에 위협에 못이기어 나왔던 재상들은 참을 수 없어서 머리를 돌리고 울었다.

흐느끼는 재상들, 흐느끼는 비빈이며 내관들, 이런 처참한 가운데서 말갈기를 두들기고 있던 왕은 할 말 없이 말에 올랐다.

날이 이미 기울었는데 인제 길을 떠나서 배소 강화로─.

대궐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왕이 왕비를 거느리고 군사들의 호위아래 압송되는 양을 본 개경 인구들은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이 통곡의 조상을 받으면서 왕의 일행은 초연히 황혼의 길을 더듬었다.

최영 이미 꺾인 고려의 조정은 이시중의 손아귀 아래서 놀아났다.

왕과 왕비를 신돈의 종자라고 폐위시킨 이시중의 일당은 그 왕의 아드님 아홉 살난 소년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기네 일당의 위에 연하여 벼슬을 높이고, 자기네 뜻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두 제하여 버렸다.

그 해 섣달에 최영도 드디어 배소에서 참하기로 하였다.

일흔 세 살의 긴 생애를 한결같이 고려를 위하여 분투하던 충성된 혼도, 충주(忠州=충주로 옮겼다) 배소의 원혼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재상의 아래서 삶을 즐기던 고려 백성들은, 최영의 부모를 받고 모두들 전을 걷고 조의를 표하였다.

「내가 살았을 때 추호만이라도 사심(私心)으로 행동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리라.」

과연 후일 최영의 무덤에는 한 오라기의 풀도 돋지 않아서, 적분(赤墳)이란 이름을 들었다.

뒤 이어 소년왕도 또 폐하여 버렸다.

선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하였으니 선왕이 신돈의 아들이면 지금 왕은 신돈의 손주일 것이다. 이 자가모순을 발견한 그들은 소년왕까지 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뒤에는 이전 신종(神宗)왕의 칠대손이요, 왕의 먼 일가되는 정창군(定昌君)을 끌어다가 왕으로 올려놓았다. 등극한날 밤의 신왕의 탄식─.

「─ 내 평생에 의식이 족하였거늘, 지금 어떤 까닭으로 이런 무거운 짐을 지어야 되는가?」

그리고 밤 새도록 울었다.

고려 지주(支柱) 최영이 죽은 일주기가 되는 이듬해 섣달, 선왕과 소년왕도 또 배소에서 죽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정국을 극도로 어지럽게 만들어서 생민으로 하여금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그 이면으로는 자기 지반을 든든히 닦아 놓은 이시중은, 허수아비 신왕을 사년 간 허위에 놓아 두었다가, 그마저 폐하여 버리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조선 태조 이성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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