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옥희 보아라

동생 옥희 보아라 - 세상 오빠들도 보시오


팔월 초하룻날 밤차로 너와 네 연인은 떠나는 것처럼 나한테는 그래놓고 기실은 이튿날 아침차로 가 버렸다. 내가 아무리 이 사회에서 또 우리 가정에서 어른 노릇을 못하는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기로서니 그래도 너희들보다야 어른이다.

'우리 둘이 떨어지기 어렵소이다.' 하고 내게 그야말로 '강담판(强談判)'을 했다면 낸들 또 어쩌랴. 암만 '못한다'고 딱 거절했던 일이라도 어머니나 아버지 몰래 너희 둘 안동시켜서 쾌히 전송(餞送)할 내 딴은 이해도 아량도 있다. 그것을, 나까지 속이고 그랬다는 것을 네 장래의 행복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네 큰오빠 나로서 꽤 서운히 생각한다.


예정대로 K가 팔월 초하룻날 밤 북행차(北行車)로 떠난다고, 그것을 일러 주려 하룻날 아침에 너와 K 둘이서 나를 찾아왔다. 요 전날 너희 둘이 의논차 내게 왔을 때 말한 바와 같이 K만 떠나고 옥희 너는 네 큰오빠 나와 함께 K를 전송하기로 한 것인데, 또 일의 순서상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았더냐.

그것을 너는 어쩌면 그렇게 천연스러운 얼굴로

"그럼 오빠, 이따가 정거장에 나오세요"

"암! 나가구말구, 이따 게서 만나자꾸나"

하고 헤어진 것이 그게 사실로 내가 너희들을 전송한 모양이 되었고 또 너희 둘로서 말하면 너희끼리는 미리 그렇게 짜고 그래도 내게 작별 모양이 되었다.


나는 고지식하게도 밤에 차 시간을 맞춰서 비 오는데 정거장까지 나갔겠다. 내가 속으로 미리미리 꺼림칙이 여겨 오기를,

'요것들이 필시 내 앞에서 뻔지르르하게 대답을 해 놓고 뒤꽁무니로는 딴 궁리들을 차렸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개찰도 아직 안 했는데 어째 너희 둘 모양이 아니 보이더라. '이것 필시(必是)!' 하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기다려보았으나 종시 너희 둘의 모양은 보이지 않고 말았다. 나는 그냥 입맛을 쩍쩍 다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와서는 그래도

'아마 K의 양복 세탁이 어쩌니 어쩌니 하더니 그래저래 차 시간을 못 대인 게지, 좌우간에 무슨 통지가 있으렷다'

하고 기다렸다.

못 갔으면 이튿날 아침에 반드시 내게 무슨 통지고 통지가 있어야 할 터인데 역시 잠잠했다. 허허― 하고 나는 주춤주춤하다가 동경서 온 친구들과 그만 석양판부터 밤새도록 술을 먹고 말았다.

물론 옥희 네 얼굴 대신에 한 통의 전보가 왔다. 옥희 함께 왔어도 근심 말라는 K의 '독백'이구나.

나는 전보를 받아 들고 차라리 회심의 미소를 금할 수 없을 만하였다. 너희들의 그런 이도(利刀)가 물을 베이는 듯한 용단을 쾌히 여긴다.

옥희야! 내게만은 아무런 불안한 생각도 가지지 마라!

다만 청천벽력처럼 너를 잃어버리신 어머니 아버지께는 마음으로 잘못했습니다고 사죄하여라.

나 역(亦) 집을 나가야겠다. 열두 해 전 중학을 나오던 열여섯 살 때부터 오늘까지 이 허망한 욕심은 변함이 없다.

작은오빠는 어디로 또 갔는지 들어오지 않는다.

너는 국경을 넘어 지금은 이역(異域)의 인(人)이다.

우리 삼 남매는 모조리 어버이 공경할 줄 모르는 불효자식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갔다 와야 한다. 갔다 비록 못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서도 또 네 애인을 위하여서도 옳은 일을 하였다. 열두 해를 두고 벼르나 남의 맞자식 된 은애(恩愛)의 정에 이끌려선지 내 위인(爲人)이 변변치 못해 그랬든지 지금껏 이 땅에 머물러 굴욕의 조석(朝夕)을 송영(送迎)하는 내가 지금 차라리 부끄럽기 짝이 없다.


너희들의 연애는 물론 내게만은 양해된 바 있었다. K가 그 인물에 비겨서 지금 불우(不遇)의 신상(身上)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행히 K는 밥 먹을 걱정은 안 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 그렇다고 밥이나 먹고 지내면 그만이지 하는 인간은 아니더라.

K가 내게 말한 바 K의 이상(理想)이라는 것을 나는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도 인생의 한 방도리라. 다만 그것이 어디까지든지 굴욕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인 것이니 그렇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인정해야 하리라.

나는 차라리 그가 나처럼 남의 맏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사뭇 떠나겠다는 '술회'에 찬성했느니라.

허허벌판에 쓰러져 까마귀밥이 될지언정 이상에 살고 싶구나. 그래서 K의 말대로 삼 년, 가 있다 오라고 권하다시피 한 것이다.

삼 년― 삼 년이라는 세월은 상사(相思)의 두 사람으로서는 좀 긴 것 같이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옥희 너는 어떻게 하고 가야 하나 하는 문제가 났을 때 나는―.

너희 두 사람의 교제도 1년이나 가까워 오니 그만하면 서로 충분히 서로를 알았으리라. 그놈이 재상(宰相) 재목이면 무엇하겠느냐, 네 눈에 안 들면 쓸 곳이 없느니라. 그러니 내가 어쭙잖게 주둥이를 디밀어 이러쿵저러쿵할 계제가 못 되는 일이지만―.

나는 나 유(流)로 그저 이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정도로 또 그래도 네 혈족의 한 사람으로서 잠자코만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삼 년은 과연 너무 기니 위선 삼 년 작정하고 가서 한 일 년 있자면 웬만큼 생활의 터는 잡히리라. 그렇거든 돌아와서 간단히 결혼식을 하고 데려가는 것이 어떠냐. 지금 이대로 결혼식을 해도 좋기는 좋지만 그것은 어째 결혼식을 위한 결혼식 같아서 안됐다. 결혼식 같은 것은 나야 그야 우습게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계시고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니 그저 그까짓 일로 해서 남의 조소를 받을 것도 없는 일이요―.

이만큼 하고 나서 나는 K와 너에게 번갈아 또 의사를 물었다.

K는 내 말대로 그러만다. 내년 봄에는 꼭 돌아와서 남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 결혼식을 한 다음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 말은 이와 다르다. 즉 결혼식 같은 것은 언제 해도 좋으니 같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해야지 타역(他域)에 가서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냥 입을 딱 벌리고 돌아와서 데려가기만 기다릴 수 없단다. 그러고 또 남자의 마음 믿기도 어렵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라난 제가 고생 한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네 결의였다.


아직은 이 사회 기구(社會機構)가 남자 표준이다. 즐거울 때 같이 즐기기에 여자는 좋다. 그러나 고생살이에 여자는 자칫하면 남자를 결박하는 포승 노릇을 하기 쉬우니라. 그래서 어느 만큼 자리가 잡히도록은 K 혼자 내어버려 두라고 재삼 내가 다시 충고하였더니 너도 OK의 빛을 보이고 할 수 없이 승낙하였다. 그리고 나는 너 보는 데서 K에게 굳게굳게 여러 가지로 다짐을 받아 두었건만―.

이제 와서 알았다. 너희 두 사람의 애정에 내 충고가 낑기울 백지 두께의 틈바구니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내 마음이 든든하지 않으랴.

삼 남매의 막내둥이로 내가 너무 조숙(早熟)인 데 비해서 너는 응석으로 자라느라고 말하자면 '만숙(晩熟)'이었다. 학교 시대에 인천이나 개성을 선생님께 이끌려가 본 이외에 너는 집 밖으로 십 리를 모른다. 그런 네가 지금 국경을 넘어서 가 있구나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어린애로만 생각하던 네가 어느 틈에 그런 엄청난 어른이 되었누.

부모들도 제 따님들을 옛날 당신네들이 자라나던 시절 따님 대접하듯 했다가는 엉뚱하게 혼이 나실 시대가 왔다. 오빠들이 어림없이 동생을 허명무실(虛名無實)하게 '취급'했다가는 코 떼일 시대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망치로 골통을 얻어맞은 것처럼 어찔어찔한 가운데서도 네가 집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첫째, 너는 네 애인의 전부를 독점해야 하겠다는 생각이겠으니 이것이야 인력으로 좌우되는 일도 아니겠고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다.

둘째, 부모님이 너희들의 연애를 쾌히 인정하려 들지 않은 까닭이다. 제 자식들의 연애가 정당했을 때 부모는 그 연애를 인정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연애를 좋게 지도할 의무가 있을 터인데―. 불행히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늙으셔서 그러실 줄을 모르신다. 네게는 이런 부모를 설복할 심경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행동으로 보여 주는 밖에는 없었다.

셋째, 너는 확실치 못하나마 생활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여자에게도 직업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언제든지 독립해 보일 실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부모님 마음에는 안 드는 점이었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기집애 몸 망치기 쉬우니라.'는 것은 부모님들의 말씀이시다.

너 혼자 힘으로 암만해도 여기서 취직이 안 되니까 경도(京都) 가서 여공 노릇을 하면서 사는 네 동무에게 편지를 하여 그리 가서 같이 여공이 되려고까지 한 일이 있지. 그냥 살자니 우리 집은 네 양말 한 켤레를 마음대로 사 줄 수 없을 만치 가난하다. 이것은 네 큰오빠 내가 네게 다시없이 부끄러운 일이다만―. 그러나 네가 한 번도 나를 원망한 일은 없는 것을 나는 고맙게 안다.

그런 너다. K의 포승이 되기는커녕 족히 너도 너대로 활동하면서 K를 도우리라고 나는 믿는다.


기왕 나갔다. 나갔으니 집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너희들이 부끄럽지 않은 성공을 향하여 전심(專心)을 써라. 삼 년 아니라 십 년이라도 좋다. 패잔한 꼴이거든 그 벌판에서 개밥이 되더라도 다시 고토(故土)를 밟을 생각을 마라.

나도 한 번은 나가야겠다. 이 흙을 굳게 지켜야 할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직책과 나가야 할 직책과는 스스로 다를 줄 안다. 네가 나갔고 작은오빠가 나가고 또 내가 나가버린다면 늙으신 부모는 누가 지키느냐고? 염려 마라. 그것은 맏자식 된 내 일이니 내가 어떻게라도 하마. 해서 안 되면―. 혁혁한 장래를 위하여 불행한 과거가 희생되었달 뿐이겠다.


너희들이 국경을 넘던 밤에 나는 주석(酒席)에서 '올림픽' 보도를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썩어서는 안 된다. 당당히 이들과 열(列)하여 똑똑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신 차려라!


신당리(新堂里) 버티고개 밑 오동나뭇골 빈민굴에는 송장이 다 되신 할머님과 자유로 기동도 못 하시는 아버지와 오십 평생을 고생으로 늙어 쭈그러진 어머니가 계시다. 네 전보를 보시고 이분들이 우시었다. 너는 날이면 날마다 그 먼 길을 문안으로 내게 왔다. 와서 그날의 양식(糧食)거리를 타 갔다. 이제 누가 다니겠니.

어머니는 "내가 말[馬]을 잃어버렸구나. 이거 허전해서 어디 살겠니." 하시더라. 그날부터는 내가 다 떨어진 구두를 찍찍 끌고 말 노릇을 하는 중이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비판 못하시는 부모는 그저 별안간 네가 없어졌대서 눈물이 비 오듯 하시더라. 그것을 내가 "아 왜들 이리 야단이십니까. 아 죽어 나갔단 말입니까." 이렇게 큰소리를 해 가면서 무마시켜 드리기는 했으나 나 역 한 삼 년 너를 못 보겠구나 생각을 하니 갑자기 네가 그리웠다. 형제의 우애는 떨어져봐야 아는 것이던가.


한 삼 년 나도 공부하마. 그래서 이 '노말'하지 못한 생활의 굴욕에서 탈출해야겠다. 그때 서로 활발한 낯으로 만나자꾸나.

너도 아무쪼록 성공해서 하루라도 속히 고향으로 돌아오너라.

그야 너는 여자니까 아무 때 나가도 우리 집안에서 나가기는 해야 할 사람이지만 일이 너무 그렇게 급하게 되어 놓아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놀라셨다 뿐이지, 나야 어떻겠니.

하여간 이번 너의 일 때문에 내가 깨달은 바 많다. 나도 정신 차리마.


원래가 포류지질(蒲柳之質)로 대륙의 혹독한 기후에 족히 견뎌낼는지 근심스럽구나. 특히 몸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이 하나가 유일 최후의 자산이니라.

편지하여라.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이 글이 실리거든 『중앙』 한 권 사 보내 주마. K와 같이 읽고 이 큰오빠 이야기를 더 잘하여 두어라.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오 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 준 옥희, 방탕불효(放蕩不孝)한 이 큰오빠의 단 하나 이해자(理解者)인 옥희, 이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만리 이역 사람이 된 옥희, 네 장래를 축복한다.


이틀이나 걸렸다. 쓴 이 글이 두서를 잡기가 어려울 줄 아나 세상의 너 같은 동생을 가진 여러 오빠들에게도 이 글을 읽히고 싶은 마음에 감히 발표한다. 내 충정(衷情)만을 사다오.


닷새 날 아침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