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탕지 아주머니
태양은 매일 떴다가는 지고 졌다가는 다시 뜨고 같은 일을 또 하고 한다.
우리의 사는 땅덩어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몇 억만 년 전부터 매일 돌고 구르고 하여서 오늘까지 왔으며 장차 또한 언제까지 같은 일을 또 하고 또 하고 할는지 예측도 할 수 없다.
진실로 놀라운 참을성이며 경탄할 인내다.
이와 같은 땅덩어리에 태어난 인간이거니, 인간사회라 하는 것이 역시 무 의미하고 싱거운 일을 또다시 거듭하고 또 거듭하고 하는 것을 과히 조롱할 바가 아닌가 한다. 아무리 옛날 성현이 전철이라는 숙어까지 발명해가지고 사람들이 경계하나, 도대체 사람이라는 것이 생활을 경영하는 땅덩어리가 그러고 보니 사람인들 어찌 전철을 보고 주의하랴.
대관절 남의 일인 듯이 초연한 방관적 태도로 이런 소리를 쓰고 있는 나부터가 역시 지구에 사는 한 개 범인의 예에 벗어나지 못하여, 소위 소설이라고 쓰는 것이 20년 전 것이나 10년 전 것이나 지금 것이나 모두 다 비슷비슷한 소리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만 다르게 해가지고 좋다고 스스로 코를 버룩거리니 이것은 모두 우리의 숙명이라 어찌할 수가 없는가 보다.
하여간 기위 잡은 붓이니, 비슷비슷한 소리건 어쩌건 쓰려는 이야기를 하나 써보자. 같은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레코드를 틀어놓고도 매일 그만치 좋다고 덤벼대는 이 세상에서 소설쟁이라고 꼭 매번 색다른 이야기만을 쓰라는 법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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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여급, 술집의 나카이들은 그 이름 끝에 ‘코’자를 붙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나코, 유키코, 사다코, 심지어는 메리코, 보비코까지도 있는 세상이다.
그 예에 벗어나지 못하여, 내가 지금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다부코’라는 이름을 가졌다.
다부코라는 이름에 관하여 특별한 로맨스라든가 이유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 그가 어렸을 적에(젗 먹을 때 전후)무슨 기쁜 일이든가 좋은 일을 만나면,
“다 부다부…….”
하며 엉덩춤을 추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그가‘나카이’로 출세함에 임하여 이 경사스러운 말에 ‘코’하나를 더 붙여서 자기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가 나카이로 출세를 한 뒤부터 놀랍게도 살이 쪘다. 천성이 지방질로서 근심 걱정에 대한 감각이 둔한 데다가 손님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일망정 아직껏 먹어보지 못한 기름기 있는 음식이 연일 배에 들어간 탓으로 보기에 더럽도록 살이 쪘다.
살이 너무도 더럽게 쪄서 다부다부하므로 ‘다부코’라 하나 여기는 손님도 많았다.
다부코를 거꾸로 불러서 부다코라 하는 손님도 있었다. 조선말 밖에는 외마디도 모르는 다부코는 손님들이 부다코라 부를 때에도 단지 하이칼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어니 하고‘하아이이’를 길게 뽑고 술병을 들고는 총총 걸음(이라고 하고 싶지만, 뚱깃걸음이다)으로 손님방으로 들어가고 하였다. 얼마 뒤에 그도 종내‘부다’라는 것은‘돼지’라는 뜻이라고 알기는 알았지만 그의 신경은 그런 것을 꺼릴 만치 약하지 않았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술집의 나카이로 갔으니 얼굴도 하다못해 하지상이야 되겠고 몸이 뚱뚱하니 부잣집 며느리 같은가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큰 망발이다.
얼굴은 밉고 더럽게 살찐 데다가 이마에까지 살이 툭툭 쪄서‘부다’와 신통히도 같은 위에 양미간에는 살진 주름살이 잔뜩 잡혀서 추한 얼굴을 더욱 추하게 하며 눈껍질과 입술은‘왜 저다지도 두꺼운가’고 머리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흉없다.
게다가 가슴 허리로 내려오면서는 좌우보다 전후가 더 굵어서 마치 둥그런 통과 비슷하다.
허리까지 굽었다.
이 모로 뜯어보건 저 모로 뜯어보건과 연 사람보다 짐승에 가깝고 짐승 중에도‘부다’에 가까웠다.
이름이 다부코, 별명이 부다코, 만약 복 선생 과 돼지가 결혼할 수 있다면 그 가운데서 난 자식이야말로 우리의 다부코와 흡사하게 될 것이다.
평안남도 순천군에 속한 어떤 농촌 가난한 농가의 5남 8녀 합계 13남매 중에 제10째로 태어난 것이 다부코였다. 그의 아래로는 사내만 셋이요 그의 위로는 사내가 둘이요 계집애(어른도 있다)가 일곱이었다. 수모와 미움은 받을 대로 받고 살 대로 사고 자랐다. 물론 숫밥이라고는 먹어본 적도 없거니와 숫밥, 남은 밥이나마 배에 차도록 먹어본 적이 없었다. 윗동생들이 많으니 낡은 옷은 충분하였으리라 생각하기도 쉬우나 첫째의 것이 낡으면 둘째가 입고 그 다음은 셋째로…… 이렇게 내려오는 동안은 어느덧 해져서 아랫동생은 윗동생 여럿의 해진 옷을 모아 만든 합작물이라, 왼 소매는 붉고 오른 소매는 퍼렇고 가슴은 누렇고 등은 검은…… 이런 옷으로 유년시기와 소녀 시기를 보냈다.
이러한 소녀 시기를 보낸 뒤에 그는 우연히 나카이라는 직업여성이 되었다. 그가 나카이가 된 것은 그 자신의 창안도 아니요 그의 부모의 창안도 아니요 또는 유혹에 빠지거나 남에게 속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동무 가운데 고을에서 나카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집에 있어 야 구박만 받고 참견하는 윗사람도 없는 그는 멀지 않은 고을에 자주 드나 들고, 고을에 가면 나카이 친구를 찾게 되고, 찾아 가면 거기서 맛있는 음 식 부스러기나 얻어먹는 재미에 동무의 권고에 술상 앞에도 나가보고…… 이렁저렁하다가 사내라는 것도 알고 그러다가 어름어름 나카이가 되어버렸다.
부모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 딸이 있었는지 어떤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 다. 입치기에 골몰한 그들이라 혹은 자기네가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았는지 모르기도 쉽다. 이리하여 나카이가 된 그, 이름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다부코’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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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은 평양에서 동북쪽. 기차가 평양을 떠나서 순천까지 와서 북으로 올라가면 강계요동으로 벋어가면 양덕으로서 그 갈림길이다. 강계는 지금 만포선 철도 공사에 분망한 한낱 토목공사의 장소이지만, 양덕은 온천지대로 서 양덕군 내만 하여도 대탕지ㆍ소탕지ㆍ돌탕지 등 세 군데나 온천이 있고, 그중에도 대탕지(大湯地)는 양덕온천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평양 원산 등지는 물론이요 멀리는 호남 방면에서도 오는 사람이 많다.
조선의 온천은 여관의 자탕(自湯)이 쉽지 않고 여관은 밥장사만 하고 손님은 공동탕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지라 따라서 겨울에는 여관에는 공동탕까지 왕래가(춥기 때문에) 불편하여 조선 습속은 봄과 가을을 온천 절기로 친다.
그러나 양덕은 그렇지 않다. 워낙 고지대이니만치 기후가 서늘해서 피서지 로 적당하다. 피서지에 온천이 겸하였으니 더욱 나무랄데가 없다.
여름은 음란한 시절이다.
첫째로 의복의 무장이 엄중하지 못하여 샐 틈이 많다.
둘째로 녹음이 남의 눈을 가려주어서 숨을 곳이 많다.
셋째로 아무 데서 아무렇게 하고 놀지라도 고뿔 들릴 근심 없다.
양덕은 피서지인 위에 또한 온천이다. 온천이란 곳은 사람들이 예법과 체면을 집어치우고 겨우 가장 비밀한 곳 한 군데만을 감춘 뒤에는 남녀노소가 태연히 거리를 다니는 곳이다.
여름 피서지 온천장 , , ……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갖춘 때의 양덕은 장관이라는 한마디로 끝이 날 것이다.
평양 오입쟁이, 원산 오입쟁이, 장거리 오입쟁이, 본바닥 오입쟁이…… 천하의 오입쟁이는 여름의 단 하루라도 양덕을 가지 못하면 면목이 서지 못한다는 듯이 꼬리를 이어서 양덕으로 모여든다.
숫오입쟁이가 모여들면 또한 암오입쟁이가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다. 숫오입쟁이의 목적하는 바는 계집이요 암오입쟁이가 목적하는 바는 돈이다. 암 오입쟁이들은 이 여관 저 여관에 거미줄을 치고 장차 무엇이 와서 걸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해 여름을 잘 벌면 매일 1원 50전의 숙박료며 잡비를 쓰고도 가을에는 돈 100원이나 차고 가는 수단가도 적지 않다. 여름 한산기에 공짜로 피서하고 재미보도 돈 잡고…… 여자 된 자 한번 해볼 만한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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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이로 나선 지 3년. 다부코로보다도 부다코로 알려지고 몸집 뚱뚱하기로 소문나고 웃을 때에도 우는 표정으로 웃기로 소문나고 얼굴 못생기기로 소문나고 사람덜나기로 소문나고 노래 못하기로 소문나고 술병을 두 손으로 들기로(외손으로 들었다가는 반드시 내려뜨리므로) 소문나고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굳은 힘 오륙 회 이상 쓰기로 소문난‘다부코’도 이 돈벌이 시원찮은 여름 한철을 피서 겸 돈벌이 겸 놀기 겸 양덕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그가 그사이 모으고 또 모았던 돈 8원 60여 전과 동무 나카이에게서 6원 각수를 취하고 주인 어머니에게 또 5원 각수를 꾸어, 합계 20원이라는 대금을 품에 품고 커다른 희망을 갖고 양덕으로 떠났다.
그의 방에도 (약간 얼룩은 있지만) 거울이 있거늘 왜 거울에게라도 의논을 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뜻으로 떠났는지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가 신용할 만한 거울에게 의논만 하였더라면 거울은 그에게 향하여 피서 중지를 충고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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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비교적 단순한 다부코는 생각도 또한 단순하였다.
순천에서 나카이로 있을 때에 매일 술꾼이 있었고 남자들이 있었던지라 양 덕을 가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양덕에서 급기야 여관(조선 사람의 여관 중에는 가장 큰 집에 들었다)에 들고 보니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
술집에서 남자를 보던 것은 나카이의 처지로 객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여관에 들고 보니 남자도 객이려니와 자기도 역시 객이다. 술집에서는 객이 나카이를 부르고, 설사 부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카이 스스로 객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관에서는 그렇지 못하니 저쪽이 객이면 자기도 객이라 저쪽에서 자기를 호령하여 부르지 못할 것이고 자기 또한 남의 방에 불고염치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또한 그의 예상 외의 일은 이곳 객이 다부코가 예상하였던 바와는 종류가 좀 다른 것이었다.
병인이 가장 많았다. 자기 몸 건사조차 귀찮아하는 병인이 계집에게 곁눈질할 리가 없었다.
병인이 아닌 사람은 대개 제 짝을 제가 데리고 왔다. 쌍쌍이 밀려 다녔다.
그 위에 도대체 이 온천장에는 사내보다도 여인이 더 많았다.
모두가 다부코의 예상과는 달랐다. 하이칼라 청년들이 많이 와서 여인이 지나가면 슬슬 곁눈으로 보며 간간 뒤도 밟으며 말도 걸며…… 이런 것을 예상하였던 다부코에게는 의외였다. 도대체 다부코가 듣기에는 남자들이 많고 낚시질만 잘하면 상당한 수확이 있다더니 그것이 전혀 헛말인가 보다.
다부코는 차차 등이 달았다.
하루에 1원 50전씩이다. 가만있노라면 어느덧 1원 50전씩이 흭흭 없어져나간다.
나카이 3년간에 간신히 8원 각수를 모았거늘, 여기서는 하루에 1원 50전씩 (점심은 굶고)이 저절로 없어져나가니 3년 벌이가 며칠 동안에 날아간다.
이리저리 변통해가지고 온 돈이 20원인데, 오는 차비 2원 장차 갈 차비 2원을 제하면 16원이다. 점심 굶고 담배 굶고 탕에도 못 들어가고 열흘 밥값이 다. 좋은 봉을 첫날로 물지 못하고‘첫날로야 쉬우랴’고 자위하며 이튿날 기다리고 또 그 이튿날을 기다리고 이렇게 기다리기를 벌써 엿새, 밥값으로 9원, 자기의 3 년간 번 돈보다도 엿새 동안의 밥값이 더 크게 되었다.
인제 나흘 안으로 봉을 하나 물지 못하면 20원은 비상천 이로다. 이런 데 나와서 보니 20원이라는 돈은 우스운 액수지만 자기가 그간 3년간을 번 생각을 하고, 또한 주인 어머니와 동무에게 12원 각수라는 돈을 장차 갚을 생각을 하니 꿈에나 어떻게 될지 그전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밥값이 이제 나흘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나흘 동안에 무슨 변통을 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름 한철에 100원? 꿈에도 생각지 않을 일이다. 기위 밥값과 내왕 차비가 원이나 소모되었으니 13 그것이라도 누구 적선해주지 않나. 순천 땅에 다시 내려서 자기 주머니에 12원이 그대로 있도록…… 그것이나마 누구 당해주지 않는가.
내왕 차비까지라도 희생하고 하다못해 밥값만이라도 담당해주는 적선가는 없는가.
자고 깨면 이레…… 밥값만 벌써 10원에 꼬리가 달린다.
이레째 되는 날 낮에 다부코는 종내 여관 주인 마누라의 방을 찾아갔다.
“피서 오는 손님이 금년에는 얼마 안 됩니다그려.”
다부코가 주인 마누라에게 한 말의 안목은 이것이었다.
눈치 빠른 주막쟁이는 다부코가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을 다 알아들었다.
“왜요? 상게 방학 때가 안 됐기에 이렇게 방학 때만 되면 많이 와요. 데 아래 ○○여관(가장 더러운 여관)꺼정두 만원이 되구 하는데…….”
“방학은 언제나요?”
“아, 양력 스무하룻날, 이제 니레 남았쉐다.”
방학을 기다려서 오는 손님이란 것은 가족 동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생이다. 여관 주인에게는 달가운 손님일지나 다부코에게는 쓸데없는 손님이 다. 그러나 단순한 다부코는 방학 뒤 손님의 종류여하를 고려하지 않고 ‘방학 뒤’에 요행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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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방학은 아직 이레요, 다부코의 주머니에는 인제 사흘 밥값 외에는 남지 않았다. 방학을 기다리랴 혹은 몇 원이라도 남아있는 동안에 고향으로 달아나랴. 그렇지 않으면 돈 다할 때까지 버티고 기다리랴.
오늘도 달아날까고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오늘 밤으로라도 어떤봉이 하나 걸려들 것같이 생각되어 그냥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돈 다하는 날까지 기다리려 하면 그날까지 실컷 기다리다가 동전 한 푼 맛보지 못하고 뼈를 갈아낸듯한 20원을 홀짝 다 쓰고 빈손으로 고향에 들어서기가 원통하였다.
아아, 어찌할까? 망설이며 주저하는 동안 하루가 가고 또 하루 가고 또 하루 가니, 인제 밥값을 셈 치르면 겨우 고향까지 돌아갈 기차삯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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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졌다.
어제도 비가 왔다. 오늘도 온다.
그 못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다부코.
주인에게 오늘 셈을 치렀다. 치르고 나니까 2원 13전…… 기차삯, 노리아 이 삯, 그리고 약간 남는다.
셈을 치를 적에 주인은 다부코에게,
“왜? 방학 때까지나 기다려보지요.”
탁 터놓고 하는 말이었다. 다부코도 탁 텄다.
“밥값이 인젠 없어요.”
“밥값이야 있으믄서 벌디.”
여기 대하여 다부코는 씩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꽤 유혹되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비가 그냥 온다. 노리아이는 11시 조금 지나서 여기까지 와서 손님을 내리고 새 손님을 태우고는 곧 다시 떠난다.
장맛비는 그냥 온다. 11시…….
“에라, 비 와서 못 떠나겠다. 오후 노리아이로 가자.”
오후 4시 반에 또 노리아이가 있다. 그것으로 가겠다는 생각이다. 핑계는 비에 있다. 그러나 다부코의 진정 내심을 진맥하자면 비 온다고 못 떠날 바가 아니다. 11시에서 4시 반까지 약 다섯 시간 동안, 그사이에라도 행여 좋 은 봉이 하나 안 걸려주나. 20원을 갖고 100원을 만들어가지고 돌아가려고 왔다가 100원커녕 미끼까지 잘리고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면목도 없을 뿐더러 절통하였다.
다섯 시간 내외에라도 봉이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아아, 비를 싫다고 노리아이까지 안 탄다 부코가 장맛비를 맞으면서 이 여관 앞 저 여관 앞으로 배회하였다. 그 얼굴은커녕 몸집, 팔, 다리, 어느 곳 한 군데 미라는 것이 혜택을 받지 못할 꼴이로되 ‘여인’이라는 명색 하나를 무기 삼아가지고 행여 100원은 그만두고 이미 없어진 20원의 벌층이나마 할 봉 없는가 하여……. 그러나 무정한 남자들은 다부코의 이 쓰라린 심정을 몰라보고 웬 댄서 비슷한 계집의 뒤꽁무늬만 따르느라고 야단이었다.
4시 반 노리아이.
인제는 하릴없이 다부코는 짐을 들고 나왔다.
장맛비는 그냥 줄줄 내린다. 자동차 정류소 앞 어떤 여관 추녀 아래 짐을 부등켜안고 선 다부코는 얼빠진 사람같이 노리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를 적게 맞으려고 덤비며 자동차에 오르는 손님들. 노리아이는 거진 만 원이 되었다.
‘만원이 됩시사. 됩시사.’ 만원이 되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다부코는 못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노리아이를 보기만 하면서 탈 생각도 않았다.
드디어 노리아이는 만원이 되었다. 만원이 되면서 뿌 ― 소리 한 마디를 남기고 달아나버렸다.
다부코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인제부터는 빚이로구나.’ 매일 1원 50전씩 늘어나갈 빚이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매일 늘어 나갈) 빚에 대하여 커다란 공포심과 자포적 기분을 내던지며 다부코는 어슬렁어슬렁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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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코의 비통한 생활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돈은 비록 떨어졌으나 그래도 여관에서 사먹는 밥이지 동냥밥은 아니어늘 여관에서 벌써 푸대접이 시작되었다. 다른 손님들이 다 먹고 난 뒤에 남은 음식을 모은 것이 다부코의 상이었다. 다부코가 있던 방은 다른 손님이 쓰겠단다고 다부코는 뒷간 곁방으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오직 용한 다부코는 어떤 일을 겪든 간에 그 못생긴 얼굴에 못난 웃음을 한번씩 웃고는 그냥 맹종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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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다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결과를 주는 것으로서 다 부코에게는 세월이 흐르는 것은 매일 1원 50전의 빚을 늘여가는 것일 따름이었다. 더욱이 이곳의 여관업자는 모두가 그 당자 혹은 아버지의 대에는 화전민이라는 특수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니만치 아침밥이 놀랍게 이르고 저녁밥이 놀랍게 늦었다. 조반과 저녁과의 중간 열네 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주림을 면하기 위해서는 손님들은 금전이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이 먹을 것 없는 동리에서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부코는 주머니가 벌써 빈 몸이라, 점심은 먹을 염도 못내고, 그의 다식성 인 위를 움켜쥐고 길고 긴 낮을 하늘이나 쳐다보며 지낼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각 여관의 주인들이 무척이도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이르렀 다. 여름방학이 이르면 어떻게 좋은지는 잘 모르지만 여관 주인들이 하도 기다리므로 혹은 부잣집 철없는 도령들이라도 많이 오는가고 다부코도 적지 않게 기다렸다.
7월 21일.
하늘의 심술이 곱지 못하여 전부터 계속되던 장맛비가 이날도 새벽부터 쏟아졌다. 여관 주인들의 얼굴은 음침해졌다. 그러면서도 11시 반 노리아이 때는 사환애들을 모두 자동차 정류소로 내보냈다. 다부코도 슬며시 뒷길로 나와서 집 모퉁이에 서서 자동차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나 노리아이는 고을에서 모깡하러 오는 손님을 두세 명 싣고 온뿐이었다. 오후부터는 날이 개었지만, 오후 4시 반 노리아이도 빈 차로 다녀간 뿐이었다.
장마는 여관 주인들에게 실망의 예고를 주며 스무하룻날로 걷어치우고 스무이튿날부터는 맥빠진 해가 장마에 젖은 세상을 말려보려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국의 커다란 그림자는 이런 산촌이라고 그저 넘기지 않았다. 작년까지의 경험으로는 청춘 남녀들이 우글우글 끓어들어서 한동안씩 질탕히 놀고 돌아가고 하였으므로 여관 주인들은 금년도 그러려니 하고 기다렸는데, 일지사변 이라는 거대한 영향과 거기 뒤따르는 보도연맹의 번득이는 눈은 이런 곳까지도 넘기지 않아서 스무이튿날부터 몇 명 왔다는 학생(전문학교) 은 그사이 1년간의 공부 때문에 건강을 상하여 할 수 없어서 온 몇 명뿐이었다.
그 밖에는 어린 자식들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족 전부가 밀려와서 여관의 방을 두셋씩 차지하고는 밥은 겨우 두 상이나 세상밖에는 안 사는 여관 주인에게도 질색이거니와 다부코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이 쓸데없는 손님뿐이었다. 그 밖에도 돈냥이나 있는 집 딸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온 것도 한둘 있으나 다부코에게 쓰임직한 손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들은 봉사노동에 얽매여 몸을 떼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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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어쩌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은 여관 주인들에게는 실망을 주었거니와 다부 코에게는 절망을 주었다.
그날 밥값의 셈을 치른 날짐까지 꾸려가지고 자동차 정류소까지 나갔거늘 무슨 미련으로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던가. 그날 떠나버렸더면 손해는 20원에 지나지 못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빚에 얽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부코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온 듯한 여인들이 이 여관 저 여관에 거미줄을 늘이고들 있다. 그들은 혹은 다부코 자신보다 흥정이 있는지. 다부코는 거기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을 갖고 관찰해보았다. 불경기의 바람은 이런 사회 전체에 미친 모양으로 깊은 밤 이른 새벽 어느 때나 홀로이 자고 홀로 이 일어나는 여인의 떼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부코와 같이 ‘밥값 없기 때문에 수모를 받지 않고’ 그냥 태연자약히 지내는 것은? 밥값을 그렇듯 충분히 준비해 가지고 왔음인가 혹은 빈 주머니를 감추고 시치미를 떼고 있 음인가. 하여간 다부코는 자기의 입으로 밥값 떨어진 것을 주인에게 알렸으므로, 주인에게는(맞돈은 아니지만 거지 먹이는 밥도 아니건만)다부코에게 마치 식객과 같이 수모를 퍼부었다.
“다 부코상, 심심한데 아이나 업고 개천가에나 나가보지.”
주인 마누라는 조금만 바쁘면 마치 다부코를 아이보개인 듯이 애를 업혀 내보내고 하였다.
“다 부코상, 5호실 손님들이 맥주를 잡숫는데 좀 들어가 따라드리구려.”
주인은 마치 자기 집 여급인 듯이 부려먹었다. 이런 때마다 다부코는 내가 공밥을 먹는가고 내심화도 내보았지만, 겉으로는 두꺼운 얼굴 가죽에 미소를 띠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치 발목 잡힌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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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부코가 이 온천지대에 와서 봉을 기다리는 짧지 않은 동안에 순전한 과부로 지낸 바도 아니었다. 몇 명의 사내를 관계하였다. 그러나 다부코의 얼굴이 워낙 그 꼴인 위에 그의 환경이 지금은 한 개 유명한 이야기로 이 온천 지대에 퍼진 만치다부코를 찾는 손님들은 공짜라는 선입관과 더러운 호기심으로 찾는 것이라 충분한 인사는 염도 안 두는 바요 잘해야 일이 원, 못하면 먹던 담뱃갑이나 남겨두고 뺑소니치고 하였다. 이런 박약한 벌이로 어떻게 1원지폐장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다부코는 자기도 돈이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기 위하여 가게로 나가서 캐러멜을 사먹고 사이다를 사먹고, 담배를 사고, 탕에 들어가고 하여 당일로 다 써버리고 하였다.
그것은 순전한 자포자기의 생활이었다. 간간 걸어서 자기 고향 순천까지 도망질을 할까고도 생각해보았지만 그의 육둔하고 거대한 몸집은 이 무더운 여름날 단 10리를 갈 자신이 없었다. 나날이 1원 60전씩의 빚은 저절로 늘어가고 갚을 도리나 가망은 전혀 없고 동서남북 사면이 막힌 가운데서 주인집 아이나 업고 뜰 혹은 마루로 배회하며 못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간간 다른 객식들을 엿보는 그의 꼴을 과연 가련하였다.
진퇴유곡의 경에 빠진 그는 그의 총명하지 못한 머리가 안출할 수 있는 온갖 전술을 다 써보았다. 일변 가고 일변 오는 많은 손님 중에 옷이나 깨끗이 입은 손님이 여관에 들게 되면 다부코는 염치주머니를 꽉 봉해버리고 그 방 앞마루에 가 앉아서 그 청아(?)한 음성으로 유행가도 불러보고 혹은 방 안을 돌아보며 말도 건네보았다. 그러나 워낙 생김생김이 하도 못생긴 위에 더욱이 다부코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은 다부코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이었 다 생김생김은 비록 못생겼으나. 객지의 심심 소일로 호기심을 일으켰던 손님도 일단 탕에 들어가기만 하면 탕 안에서 너무도 유명한 화제의 주인인 다부코의 소문을 들으면, 자기까지 이야깃거리가 될까 봐 겁이 나서 손을 떼고 하는 것이었다.
‘대탕지 아주머니.’ 인제는 다부코도 아니요 부다코도 아니요, 여기서 새로 얻은 이름이 이것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이 대탕지에서 본지방인 이외의 손님으로서는 다부 코가 가장 원로였다. 다부코보다 먼저 왔던 손님은 물론 다 가고 뒤에 왔던 손님도 다 가고, 다부코가 가장 오랜 손님이었다. 말하자면 대탕지 아주머니였다.
이 대탕지 아주머니인 다부코가 얼굴(가뜩이나 두꺼운)에 소가죽을 뒤집어 쓰고 남성군에게 돌진 또 돌진을 개시한 이래 이 전술에 걸려든 남성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남성과의 문제의 덕으로 다부코의 이름은 더욱 높아 져서 인제는 대탕지뿐 아니라 양덕 신읍에까지 알려져, 대탕지를 찾아보는 손님은 먼저 양덕 정거장에서 대탕지로 오는 노리아이에서 운전수에게 그의 성화를 들으리만치 되었다.
하나는 이 대탕지에서‘넙적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 어떤 광업자와 의 관계였다.
어떤 날 넙적이가 다른 두어 동무와 화투를 하고 있을 때에, 봉(봉이 안 걸리면 하다못해 담뱃값이라도 벌 닭이나마)을 물색하던 다부코는, 이 화투판 등 뒤로 돌아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두 합시다그려.”
“글쎄요.”
이것이 인연이었다. 주머니에 동전 한 닢도 없는 다부코로 되 시치미를 떼고 돈내기 화투를 시작하였다.
결국에 있어서 다부코는 18전을 땄다. 다른 사람은 본전이요, 넙적이가 18 전을 잃었다. 다부코는 넙적이의 돈 18전을 딴 셈이었다.
“아주머니, 그래 내 돈이 곱게 삭을 것 같소?”
“글쎄요.”
“18전…… 십○돈이야. 그 돈은 그저 못 먹어.”
“몰라요.”
이리하여 인연은 맺어졌다. 광업가이니 돈 잘 쓰렷다, 얼굴이 넓적하니 마음도 너그러울 것이렷다, 이만한 기내를 가지고 넓적이를 맞았지만, 다부코가 넓적이에게서 얻은 소득이라고는 그 음(音)이 설명하는 바 단 18전(화투에 딴)뿐이었다.
다부코로 보자면 넙적이의 마음은 당초에 알 수가 없었다. 넙적이는 숨김 없이 제 동무들에게도,
“난 저 아주머니하구 결혼했다네.”
하며 다부코에게는,
“마누라, 여보 마누라.”
라 불렀다. 그러나 밤에 찾아오라는 군호는 그 뒤에는 좀체 없었다. 웬일인지 다부코는 넙적이에게 마음까지도 약간 끌린 듯하였다. 마누라라 불러 주는 것이 은근히 기뻤다. 그 반대로 넙적이는 낮에는 다부코를 마누라라 부르고 술을 먹을 때는 따르라 명하고 하였지만 밤에는 다시 다부코를 찾지 않았다. 아마 다 부코의 기름때로 미끄러운 몸에 진저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음으로든 또는 다른 요행심으로든 그렇듯 무관심할 수가 없는 다부코는 기다려보아 만나지 못하고 이번은 자기 편에서 찾아가보았다.
두 번 세 번, 밤 깊어서 이층 넙적이의 방을 찾아가보았으나 그 매번을, 잠에 취한 체하고 다부코를 쫓아버리고 하였다. 이런 일을 두 세 번 겪은 뒤에 한번은 다부코는 염치를 불구하고 네 마키까지 벗어버리고 넙적이의 자리(잠자는 체하는) 속에 들어갔다. 동시에 다 부코는 부르짖는 사내의 함성과 동시에 넓적다리에 무서운 아픔을 느끼며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이 동리에는 남의 자리에 들어오는 예편네들이 많다더니 옳은 말이로군.
이 집게는 그런 예편네를 집는 집게라나.”
사내의 억센 손으로 넓적다리를 힘껏 꼬집힌 다부코는 비명을 내며 네마키 도 집을 겨를이 없이, 문밖으로 뛰쳐나와 층층대를 굴러 떨어지며 아래로 도망해왔다.
이 사건의 덕택으로 다부코는 일층 더 유명해지고, 넙적이는‘집게장사’ 라는 별명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다부코가 음침한 얼굴로 나다니면 여기 저기서 집게 집게 하며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게 사건이 있은 이틀 만에 제2사건의 실마리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 4시 반 노리아이로 얼굴이 곱살히 생긴 양복쟁이 청년 하나가 이 여관 다부코의 곁방에 들었다.
시골 술집 나카이 다부코는 그 양복이 고급품인지 저급품인지 소지품이 어떤 것인지 전혀 구별할 줄을 몰랐다. 단지 양복쟁이인 위에 얼굴이 곱살하 니 돈냥이나 있는 집 젊은이거니 하였다. 그의 유혹 전술은 즉시로 이 청년에게 향해졌다. 그의 숙련되지 못한 전술로도 비교적 손쉽게 청년은 함락이 되었다. 그날 밤 다부코의 방에는 사람 둘이 자고, 청년의 방에는 빈 이부자리가 쓸쓸히 밤을 지냈다.
이튿날은 이 새로운 원앙은 득의양양히 탕에 들어가고, 간스메 장사에게 간스메를 사먹고 개천가를 거닐고 하였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경이의 눈……. 이전 같으면 다부코는 스스로 쑥스러웠을 것이지만, 하도 벼르던 일이라 쑥스러운 줄도 모르고 자랑하는 얼굴로 부러 광고하러 돌아다녔다.
또 그날 밤 한방에서 지냈다. 그 밝는 새벽이었다. 두선두선 뜰에서 무엇을 힐난하는 듯한 소리에 다 부코가 곤한 잠에서 깨매, 사내는 어느덧 일어나서 황황히 옷을 입는 중이었다. 동시에 문이 벼락같이 열리더니 웬 아이 업은 여인 하나가 쑥 들어섰다.
“여보, 이게 뭐요.”
고을 본마누라가 달려온 것이었다. 와지끈 툭탁 한바탕의 부부싸움은 물론 일어났다. 그리고 고래로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 하거니와, 이 부부도 한바탕 싸우고 나서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온 김에 조반이나 먹구 탕에나 들어갔다가 갑시다그려.”
남편의 이 제의에 대하여 아내도 승낙을 하였다.
“얘.”
조반상을 받음에 임하여 큰어머니(?)가 다부코를 부르는 말씨였다.
“조반 먹을 동안 이 아이나 업구 개천에 나가서 기저귀나 빨아 오너라.”
또 아이보개기…… 내심 역하고 분도 났지만 마음이 오직 착한, 착하다기 보다 덜난 다부코는, 눈살을 찡그려 미소하고 아이를 받아 업고, 기저귀를 받아들고 들썩들썩하며 개천으로 향하여 내려갔다.
“그건 또 웬 아이요?”
다부코가 묵고 있는 여관 주인은 이곳 본토박이로 일가친척이 적지 않았다. 그 집들이 모두 아이 볼 일이 있으면 다부코를 꾸어다가 보도록 하였다. 그래서 다부코의 등에 올라본 아이는 꽤 많았다. 그런데 웬 또 낯선 아 이를 업고 나오므로 동리 여인들이 농 삼아 묻는 말이었다. 거기에 대하여 다부코는,
“우리 일갓집 아이야요.”
기저귀를 두르며 내려갔다.
🙝 🙟
곱살한 양복쟁이는 자기 본마누라에게 끌려가면서도, 다부코에게 몰래 일 간 또 오마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의 본마누라의 의복이 허술하고 어린애의 옷이며 기저귀가 더럽던 점을 모두 잊고‘곱살한 양복쟁이니 돈냥이나 있으려니’하는 선입견에 지배되는 다부코는 일간 또 오마는 약속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인제는 . 벌써 밀린 밥값이 오륙십 원…… 웬만한 잔돈으로는 생각도 못낼 큰 빚을 등에 지고 있는 다부코였다.
일지사변의 예비적 부분인 방공연습은 이 산촌에도 실시되었다. 4일간의 등화관제.
이 등화관제를 감독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고을에서 순사 한 명과 소방수 세 명이 대탕지에 왔다. 저녁 8시쯤 경계관제가 시작되어 30분쯤 뒤에 공습 관제, 11시쯤 해제, 그리고는 순사며 소방수는 11시반 노리아이로 고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첫날 캄캄한 세상이 11시쯤까지 계속되고 관제는 해제되었다. 다시 광명한 세상이 나타났다.
그 캄캄할 동안,
“좀 쉬어서 갈까.”
하면서 다부코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소방수였다. 소방수인 동시에 일전 다녀간 곱살한 양복쟁이였다. 돈냥이나 있을 곱살한 양복쟁이라고 내심 적지 않게 기다리던 사람의 정체는, 박봉 생활자의 한 사람인 소방수였다.
그의 품에 안겨서 눕기는 누웠지만, 다부코는 이곱살한 양복쟁이가 왁살스러운 소방수로 홀변한 현실에 대하여 마음으로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소방수 부인.”
더구나 다부코가 어떤 날 성냥을 잘못 그어 통째 불을 일으키고 올라 뛰며 내려 뛰어 그 불을 끌 때에 뭇 사내들은 이 새 별명을 부르며 웃어주었다.
이런 괴변들을 겪고 난 뒤에는 다부코는 다시는 남성에게로의 돌진을 중지 하고, 매일 개천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두꺼운 얼굴 가죽을 잔뜩 찡그리고 흐르는 물만 굽어보고 있다. 혹은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자기의 고향 순천의 앞도 지나갈 것을 부러워서 굽어보고 있음인지.
상한 건강을 쉬기 위하여 대탕지에서 달포를 지낸 뒤에 나(작자)는 그곳을 떠날 때에, 이 대형 노리아이가 사람을 만재하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바야흐로 떠나려 할 때 저편 여관 모퉁이에 그의 두꺼운 얼굴을 찡그리고 부러운 듯이 노리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다부코를 보았다.
그 뒤에 그가 어찌되었는지는 알 바 없지만, 엔간한 자선가가 나타나서 그의 밥값을 갚든지, 그렇지 않으면 여관에서 밥값을 탕감해주고 차비까지 주어서 돌려보내든지 하지 않는 이상은 다부코가 아무리 ‘여인’이라는 보배로운 무기를 가졌다 하나 거기 어울리는 체격과 얼굴을 믓 가진 이상은 지금껏 매일 1원 60전씩의 빛을 늘여가면서 동리 아이보개 노릇이나 하며 개천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흐르는 물이나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