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爲堂)은 시조작가(時調作家)로 자처(自處)하지 아니할 것이오, 또한 그러한 일컬음을 받기도 원ㅎ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위당(爲堂)은 시조(時調)를 지었고, 짓고, 또한 훌륭히 짓는 것이 사실이다.

위당은 시조 짓기를 가르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조를 통하여 시조 짓기를 배운 이도 많을 것이요, 위당의 시조를 애독하는 이는 더 많은 줄 안다. 위당 자신이야 시조 작가로 자처하거나 말거나 아름다운 시조를 지은 그 사실이 있으니, 우리는 위당에게 시조 작가라는 일컬음을 하나 더 덧붙이지 아니할 수 없다.

필자(筆者)는 시인(詩人)도 아니요 문사(文士)도 못된다. 나는 이 시조의 권두(券頭)를 더럽힐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나 나는 위당의 시조를 애송(愛誦)하는 사람 중의 하나는 된다. 그것은 내가 시조를 시조로 좋아할 줄 알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위당의 사상(思想)·이념(理念)을 좋아하고 감정(感情)에 동감하고 그 제재(題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신 임을 그리워하는 데 드러난 효성과, 이 강산 이 겨레를 사랑하는 애국애족심과 높은 지개(志槪), 갸륵한 의(義), 영원의 진리(眞理), 괴벽한 듯한 교모하게 짜 만든 문장을 좋아한다. 나는 위당의 글이나 시(詩)를 읽을 때마다, 내가 발표하고자 하는 뜻을 내가 발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표시하여 주는 것을 느끼어서 읽고 또 읽는 때가 많다.

위당이 시조(時調)를 지어 지우간(知友間)에 나누어 보기를 시작하기는 그 어머님을 여의고 지은 시조일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 이전 작품은 얻어 읽은 것이 없다. 위당은 자기가 지은 글을 남더러 읽어 달라는 것은 외람한 일이라 생각한다. 자기의 작품을 모아 두는 예(例)가 없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필요한 문서(文書)를 모아 두는 버릇이 있어, 위당의 시조 몇 편이 전화(戰禍)를 치른 서광(書筐)의 밑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낭자(曩者)에 위당의 영애(令愛) 나를 찾아 위당시조집(爲堂時調集)이 편집됨을 고하고 존편(存篇)이 있음을 묻기로 곰팡쓴 시조 백여 수(首)를 내주었더니 이제 그 편찬이 끝나 기궐(剞劂)에 부(付)한다 하며 차편(此篇)의 유래를 적어주기를 구하기로 위당시조집이 간행되어 강호(江湖)의 독자로 그 높은 이상(理想), 맑은 정취(情趣)를 같이 나눌 것을 기뻐하는 나머지에 권두(券頭)에 일언(一言)을 변(辯)하여 이 책의 유서(由緖)를 기(記)한다.

정해(丁亥) 계추(季秋)
용재(庸齋) 백 낙 준(白樂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