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제3편
忠義篇
편집상지 삼년 을해(上之三年 乙亥). 이해는 단종 대왕이 그 숙부 수양 대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아니치 못하던 슬픈 일이 있던 해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는 삼년 전 계유년 모양으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이 떼를 지어 살육을 당하던 해 모양으로 대단히 일이 많고 끔찍끔찍한 해도 있고 또 한 해가 천년 같아서 볼 만한 아무 일도 없이 하품만 나는 심심한 해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심한 해와 바쁜 해가 새끼 오라기두 가닥 모양으로 서로 꼬여서 세월이라는 인생의 역사 바탕을 이루거니와 금년 을해년과 오는 해 병자년은 조선 역사에시 연거푸 윤달이 드는 셈으로 일 많고, 끔찍끔찍하고,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하고,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는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데 살년(殺年)이 되었던 것이다.
불과 나무들의 본성은 가을 서리 내릴 때를 당하여서야 분명히 알게 된다. 갈대는 말라버리고 참데는 더욱 푸르다. 돌피는 태워버리고 벼알갱이는 걷어 들인다. 서리치는 모진 바람이 밤을 새어 냅다 볼 때에는 멀어질 잎은 다 떨어지고 소나무, 잣나무만 까닥없이 청청하다. 이리하여 가을철은 천지의 대좌기(大坐起)로 일 년간 지내온 초목에도 마감(磨勘)을 보는 심판 날이 된다.
개인의 일생에도, 또 어떤 민족의 일생에도 몇 십년에 한 번씩 또는 몇 백년에 한 번씩 이러한 마감 날이 온다. 평상시에는 다 비슷비슷하여 별로 차별이 없는 듯하던 이들(개인이나 민족이나)도 이날 우레 같은 운명의 호령과 형무, 곤장 같은 자작얼(自作孼)의 아픈 매가 벗은 몸뚱이를 후려 갈길 때에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탈바가지도 다 집어던지고 대번에 개 개 실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좌기를 겪고 난 뒤에야 그가 갈대인지, 참대인지, 무쇠인지, 강철인지가 판명이 되는 것이다.
지나간 계유년도 그러하였꺼니와 금년, 을해, 내년 병자 양년도 조선 민족적으로 보거나 단종 대왕 때에 살아 있던---특히 조정에 벼슬하던 여러 개인들로 보거나 큰 심판 날 중에 하나다.
그날에 여러 조선 사람들은 가지가지의 본색을 탄로하였다. 혹은 끝 간 데를 모르는 욕심꾸러기가 되어서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서는 못할 일이 없는 성품을 보이고, 혹은 금일 동, 명일 서로 해바라기가 햇빛을 따라 고개를 숙이듯이 부귀 공명을 따라 어제는 이 임금의 충신이 되고, 내일은 그 임금을 박차고 다른 저임금의 충신이 되는 변통성 많은 재를 보이고, 그러나 또 혹은 의리를 위하여서는 부귀는커녕 생명까지도 초개같이 버리는 충성을 보이는 이도 있고, 또 혹은 충성을 보이기에는 너무도 겁이 많고 세도를 따르기에는 양심이 덜 무디어 무가무불가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도회술(韜晦術)도 보이고, 성안에 앉아서는 천하를 한 입에 삼킬 듯이 큰 소리를 하다가 성문 밖에 나서서적을 대하자마자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의 맥이 풀리는 겁쟁이,저는 아무것도 아니하면서 주둥이만 살아서 남의 일을 이러쿵 저러쿵 흉만 보고 훼방만 놓는 얄미운, 마땅히 한바탕 큰 반항을 일으킬 만한 이유와 분격지심이 있으면서도 남이 대신하여 주었으면 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앉았는 못난이………이러한 본색들이 아침을 받는 산봉우리들 모양으로 크게 작게 제 모양대로 제 빛깔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오백년 전에 있던 우리 조상들의 장처 단처는 오늘날 우리 중에도 너무도 분명하게, 너무도 유사하게 드러나는구나. 그 성질이 드러나게 하는 사건까지도 퍽으나 오백년을 새에 두고 서로 같구나. 우리가 역사를 읽는 재미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수양 대군은 단연히 왕의 자리를 도모할 결심을 하였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이란 셈으로 바라던 자리를 얻으면 한층 더 높은 자리를 또 바라는 법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한없는 욕심의 층층대를 허덕거리며 오르다가 마침내 끝 간 데를 보지 못하고 현기증이 나서 굴러 떨어지어 머리가 부서져 죽는 법이다. 더구나 수양 대군 같은 야심이 만만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한 층을 남겨 두고 마음을 잡을 리가 없다. 일국 정권을 한손에 거두어 쥐고 보면 부족한 것이 오직 익선관(翼善冠), 곤룡포(袞龍袍)인 듯하였다.
부대 부인 윤씨(府大夫人尹氏)가 침석간에 수양 대군에게 그러한 뜻(임금 되라는)을 비추 이는 것(이 일은 진실로 여러 번 있었다)도 수양 대군의 뜻을 정하게 한, 한 가지 원인이 되고 권람(權擥), 한 명회(韓明澮)가 무시로 권하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된다.
미상불 권람의 말이 옳다. 왕이 아직은 나이 어리시어 수양 대군의 마음대로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지마는 차차 나이 많아지어 국정을 몸소 보시게만 되는 날이면 족히 수양 대군을 물리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세종 대왕의 맏아드님 되는 화의 군영(和議君瓔)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유(錦城大君瑜), 평원(平原)대군(大君)임, 한남(漢南)군(君) 어 같은 종친들이 겉으로 드러내어 맡은 아니하지마는 속으로는 수양 대군의 야심을 미워하고 어리신 왕께 동정을 가지는 것이 사실임에랴.
그 밖에도 왕의 편이라고 볼 많나 유력자로는 세종 대왕의 후궁이요, 어리신 왕을 양육한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고 왕의 외숙 되는 권자신(權自慎=이 때에 벼슬이 예조 판서), 국구(國舅) 되는 여량부원군(礖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 왕의 가장 사랑하고 신임하시는 누님 경혜 공주(儆惠公主)의 남편 되는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같은 이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아직은 수양 대군의 권셍 눌려서 아무러한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왕이 성년 되어 권세를 찾으실 만하게 되면 반드시 왕의 팔다리가 되어 수양 대군에게 대항할 것은 권람, 한명회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명한 일이다.
만일 수양 대군이 마치 그가 항상 사람을 대하면 말하는 모양으로 왕이 성년이 되시어 정사를 친히 잡으실 만하기를 기다리어 공성 신뢰한다 하면 만사가 다 구순하게 되었을 것이다. 왕은 일생을 두고 수양 대군을 고맙게 알았을 것이요, 백성은 진실로 주공의 덕으로써 수양 대군을 비기었을 것이요, 그 숱한 사람은 원통한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수 양 대군 당신도 만년에 꿈자리 사납지 않게 지내었을 것이다. 그러하건마는 운명은 수양 대군의 가슴 속에 한 움큼 욕심의 불을 던지어 커다란 비극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수양 대군은 일변 궁금(宮禁)을 숙청(肅淸)한다고 칭하여 혜빈 양씨에게 엄중한 견책(譴責)을 주어 일체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또 문종 대왕 시절부터 왕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여 왕의 동무요, 보호자이던 늙은 내시 엄자치(儼自治)에게 없는 죄명을 씌워 금부(禁府)에 가두었다가 멀리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할 차로 보내던 중로에 사람을 보내어 주막에서 죽여버리고, 금성 대군이하 종친들도 수상(首相)인 수양 대군의 허락이 없이는 일체 궁중에 출입하기를 금하여버리고, 또 왕의 숙부 중 가장 나이 많고 가장 왕을 생각하는 화의군을 아우님 되는 평원대군의 첩 초요섬(楚腰纖)과 통간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외방으로 내어쫓고, 안평 대군이 돌아간 뒤에 가장 수양 대군에게 듣기 싫은 바른 말을 하는 금성 대군은 화의군과 좋아한다 하여 그의 집인 금성 궁 밖에 나오지를 못하게 하여 갑사(甲士)로 대문에 과수를 보게 하고, 국구되는 송현수는 소시부터 친분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회유하기를 힘쓰고 왕의 의숙권 자신도 그 환심을 사노라고 예조 판서를 주었다. 그러나 송현수, 권 자신은 언제 죽어도 죽을 사람이다. 수양 대군의 눈에 매양 걸리는 것이 송, 권 두사람이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었으면 하는 생각도 무단적인 수양 대군의 마음에 안 떠오름도 아니지마는 그것은 최후 수단이다. 될 수만 있으면 피 한방울 흘리지 아 니하고 목적을 달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 힘이 없던 이라도 죽여버리면 꿈자리 사나운 것임을 황보인, 김 종서 통에 경험한 수양 대군이다. 이 때문에 생긴 것이 수양 대군의 인재방문(人材訪問)이다.
총명한 수양 대군은 인심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또 권람과 한 명회의 지혜는 수양 대군의 총명을 돕고도 남았다. 만일 이 총명과 지혜(그것은 진실로 흔히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를 가진 이들이 사욕에 빠짐이 없이 오직 정의로 나라만을 위하는 일을 하였던들 역사에 드문 큰 공적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고 그들은 만대에 사모함을 받았을 것이다. ‘부정한 욕심과 부정한 음모’---이것이 그 좋은 총명과 지혜를 망쳐버리었다.
수양 대군은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위엄으로 눌러 버릴 종류의 사람이니, 이것은 가장 수많은 서민들과 가장 수많은 벼슬아치들이다. 이 종류 사람은 권세를 보이기만 하면 다 머리를 숙이고 모여드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이 종류 사람도 노상 안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본래 위엄으로 눌리었던 무리기 때문에 더 큰 위엄이 오는 날이면 곧 예전 주인을 배반하고 새 위엄 밑으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무리들은 자기의 주장이 굳게 서지 못하고 또 항상 현재 자기네를 누르는 권세에 대하여 원망과 의혹과 미움을 품기 때문 에, 또 게다가 흔히 무지하기 때문에 다른 권세를 약속하는 자의 선동을 받기 쉬운 것이다.
권세 가진 자의 눈으로 보면 소위 난화지맹(難化之氓)이다. 그러나 그까짓 것은 수양 대군에게 대하여 그리 주요한 일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런 무리가 근심되는 것은 권력을 잡은 시초가 아니요, 옛 권력이 쇠할 만한 때인 까닭이다. 수양 대군의 눈앞에는 끝없는 영화가 있다. 천추 만세에 연면부절하는 권세가 있다(왕의 자리만 얻고 보면 말이다).인사(人事)의 무상(無常)을 깨닫기에는 수양 대군은 너무도 젊고 너무도 순경이다. 건강하고 젊고 (사십이면 한창이 아닌가) 뜻하는 바를 못 이루어 본 적이 없는 바에 순풍에 돛을 달고 물결 없는 한바다로 선유하는 것만을 밖에는 인생이 보이지 아니하는 수양 대군에게 반성(反 省)이 있을 리가 없고, 후회(後悔)가 있을 리가 없고, 무상(無常)이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것들을 깨닫기 위하여서는 그는 얼마 더 인생의 어리석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원컨대 그가 이 쓰라린 무상의 술잔을 아니마시었과저, 그러나 십년이 얼마 더 넘지 못하여 그는 마침내 이 술잔을 집어 마시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할 권세를 수양 대군은 영원한 것으로만 여기었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하여 못할 것 없이 이것을 추구하였다.
수양 대군이 보는 둘째 종류 사람은 이름과 이로 달래어 영구히 노예적 복종을 맹세시킬 수 있는 무리다. 벼슬이라는 것, 울긋불긋하고 너덜너덜한 옷과띠와망건, 관자와 한 해에 쌀 몇 섬되는 녹이란 것으로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계급은 현재 조정에 벼슬하 는 무리의 대부분과 태학관을 머리로 하여 전국 수없는 서원(書院), 서당(書堂),사정(射亭)에 공부하는 무리와 과거에 참예할 자격을 가진, 이른바 양반의 무리---줄여 말하면 사회의 상층인 계급이다.
이 무리의 마음을 걷어 쥐는 것이 일국의 권세를 누리는 데는 대단히---아마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이 무리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도맡아 파는 도가(都家)일뿐더러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편수’로 자처하는 무리들이다. 기실 정사를 하 는 일군은 아전들이요 이 무리는 주먹심도 , , 다릿심도, 의리의 힘도 없는 무리지마는 세습적(世襲的)인 양반권(兩班權)---이런 말을 쓸 수 있다 하면---과 역시 유전적이라 할 만한 뱃심과 입심만을 가지고 놀고 먹고 대접 받는 명을 잡는 것이다.
지금 이 무리의 두목은 좌의정(左議政) 정인지(鄭麟趾)다. 정인지의 말 한 마디면 이 무리의 머리는 마치 바람 맞은 풀 모양으로 이리로 굽실, 저리로 굽실거리는 것이다. 정인지 가 이미 수양 대군의 심복이 되었으니 정인지의 뒤를 따라 수양 대군에게 충성을 맹세할 사람이 많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닭을 천을 기르면 그중에도봉이 난다는 셈으로 이렇게 덩리를 따라 동으로 가고 서으로 가는 무리들 중에도 굽혀지지 아니하는, 곧은 무리가 있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비록 수효는 적을망정 자연히 한 세력을 이루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기치를 내세우고 호령을 함이 없더라도 충의(忠義)가 있는 곳에 반드시 따르는 천연의 위엄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정색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몇 사람 안되는 무리가 곧 수양 대군이 이른바 셋째 종류 사람이다.
수양 대군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무리의 마음을 사려 한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를 누리느 데는 이 무리의 마음을 사는 것이 필요함을 아는 까닭이다. 명리지배 백 명을 얻음보다는 이러한 충의지사 하나를 얻는 것이 더욱 힘있음을 수양 대군은 잘 안다.
옳은 선비 한 사람의 뜻이 십만 강 병보다도 힘있는 줄을 잘 안다.
이 무리는 위엄으로 내려 누를수 없다. 그네는 의를 위하여서는 시퍼런 칼날을 우습게 보고 한 몸의 목숨을 터럭같이 여긴다. 몸을 열 토막에 내이고 목숨을 백 번 다시 끊더라도 그만 것을 두려워할 그네가 아니다. 박제상(朴堤上), 정몽주(鄭夢周)의 몸에 흐르던 충의의 피는 한강에 물이 마를 때까지 이 땅에 나는 사람의 핏줄에 흐른다. 외인의 피와 살이 땅 속에 스며들어 이 땅을 의의 땅을 만들고 그 무덤에 나는 풀이의인의 기운을 뿜어 이 나라의 초목까지도 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런 이들이 아니면 이 땅에 의는 죽어버리고 만다.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무리들이야말로 수양 대군의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거니 하물며 명리랴. 그가 이름을 싫어함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천하에 돌리고 천추에 돌리움이 그의 욕심이언마는 의가 아닌 때에 그는 이름 보기를 초개같이 여긴다. 그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수치와 고통은 하루라도 불의의 부귀를 누리는 것이다. 불의의 부귀를 누림으론 차라리 당장에 죽어버리기를 택한다.
비록 몸에 치국 평천하의 큰 경륜과 큰 재주를 품었다 하더라도의에 맞음이 아니면 차라리 이 경륜, 이 재주를 초토에 썩혀버린다.
위무(威武)로 굴(屈)할 수 없고 부귀(富貴)로 음(淫) 할 수 없는 이 의인의 무리는 고왕금래 에 불의의 권세를 탐하는 자들이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수효로는 비록 몇 백명, 그보다도 더 적게 몇 십 명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의의 불씨를 천추 만세의 후손에게 전하는 거룩하고도 고마운 직분을 맡아 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전 인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수양 대군은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의를 알고 의인을 알고 불의를 알고 불의한 사람을 안다. 그는 임금 중에도 가장 총명한 임금인 세종 대왕의 아드님이요, 임금 중에도 가장 인자한 임금인 문종 대왕의 아우님이다. 총명이 뛰어난 그가 무엇인들 모를 리가 없건마는 다만 그의 억제할 수 없는 욕심이 모든 덕과 모든 총명을 눌러 버린 것이다. 후일에 그의 인자함과 총명함이 다시 바로 서려 할 때는 벌써 만고에 씻어 버릴 수 없는 불의를 행한 뒤였다. 일생으로써, 생명으로써 그의 지나간 허물을 씻어버리려고 나라를 위하여 많은 좋은 일을 하노라고 무진 애를 썼으나 그의 양심의 가책은 그의 공로로 갚아버리기에는 너무 컸고 게다가 그러한 공로로 지나간 죄를 벗으라고 목숨이 오래 허하여지지를 아니하였 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후회하는 피눈물로 . 눈을 감아 벌린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이러한 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 그의 억제할 수 없는 패기는 실로 그의 숙명이었다. 이 성격의 결함 (특징이라면 특징)은 총명한 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 패기의 날랜 말에 올라앉아 그 뛰어난 총명과 예지로 자기가 달려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면서도 안되겠 다 안되겠다 하고 연해 후회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그가 마침내 굴러 떨어진 절벽 끝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수양 대군은 옳은사람에게 대하여서는 특별한 사모와 존경을 품고 있었다. 허후(許詡)에 대하여 취한 태도도 이것을 표하는 것이다. 그는 옳은 뜻을 가진 선비에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대단히 괴롭게 여기었다. 외인의 무리의 칭찬을 받는 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가 후년에 일변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같은 서적을 편찬하게 하고, 일변 유가서(儒家書), 불가서(佛家書)를 언해(諺解)하게 한 것이 그의 문화 사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지마는 자기가의를 사모하는 자인 것을 외인의 무리 에게 인정하게 하자는 뜻이 또한 적지 아니한 동기가 된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그는 의인이 되려는 간절한 소원과 권세를 잡으려는 불 같은 패기와 이 두 가지 사이에 끼어 이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려는 어림없는 큰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애인하사(愛人下士)라는 말은 동양에서는 권력 잡은 자가 누구나 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유현덕(劉玄德)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이나 남양(南陽)이라는 시골 구석에 찾아본 것을 삼고초려(三顧草廬)라 하여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수양 대군이 그의 야심을 달하는 수단으로 택한 중요한 길 중에 하나가 선비를 찾아보는 일이다.
최항(崔恒)을 새에 내세워 집현전(集賢殿)에 관계한 사람들 중에 중요한 이들을 혹은 수양 대군 궁으로 불러 보고, 혹은 수양 대군이 몸소 찾아 갔다. 여간한 사람들은 상감의 숙부요, 영의정으로 군국대사를 한 손에 걷어 쥔 수양 대군이 만나기를 원한다 하면 신을 거꾸로 끌고 달려와서 수양 대군 앞에 엎드리었다.
이렇게 수양 대군 편에서 조금도 힘들이지 아니하고 제 편에서 덜덜 굴러와 붙는 사람들을 수양 대군은 대견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사냥을 즐겨하는 수양 대군은 힘 안 들이고 잡힌 짐승을 즐겨하지 아니한다. 아침부터 온종일 산을넘고 골짜기를 건너 따르고 따라도 잡히지 아니하는 짐승이 도리어 몇 갑절이나 더 그의 마음을 끌었다. 사람을 구하는 데도 그와 같은 맛이 있었다. 단 한마디에 주르르 따라오는 사람은 비록 쓸 데는 있더라도 재미는 없었다. 아무리 끌어도 아니 끌리는 사람이야말로 끌 재미가 있었다.
전 대사헌(大司憲) 기건(寄虔)이나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 권절(權節),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題學) 조상치(曺尙治)같은 이들이 다 그런 이들이다.
기 건에 관하여는 위에 말한 일이 있다. 교리 이현로(李賢老)와 함께 종친분경(宗親奔競) 을 금하라고 상소를 하여 수양 대군의 미움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좌천(左遷)이 되었다가 시사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사랑문조차 닫아버리고 숨어 있는 사람이다.
수양 대군은 기 건의 명망과 재주를 사랑하여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하였다.그래서 세력이 당당한 수양 대군으로서 세 번이나 빈한한 기 건의 집을 찾았다. 교리 따위 작은 벼슬아치가 집에 앉아서 영의정을 불러본다는 것은 진실로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기 건은 세종조의 포의(布衣)로서 지평(持平)이 된 사람임에랴.
그리고 기 건은 자기가 청맹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한다 칭하고 수양 대군이 벼슬에 나오라는 청을 거절하였다.
수양 대군은 기 건의 거절을 당하고 기 건의 집에서 나올 때마다 기 건의 팔목을 잡고 차마 놓지 못하는 듯이 머뭇머뭇하며 앞을 보지 못하느 ㄴ이 가 계하에 내리기가 어려울 터이니 방에서 작별하지 하여 기건을 아끼었다.
“그놈이 어디 그럴 수가 있사오리까.”
하고 친근하 사람들이 수양 대군에게 기 건의 무례함을 꾸짖었으나 수양 대군은 아무 말 없이 또 한번 기 건의 집으로 기건을 찾아갔다. 이것이 세 번째다.
“나라를 보아서 기참판(寄參判)이 나서야 하지 아니하겠소? 내가 이렇게 세 번씩이나 부 탁하는 정성을 보아서라도 일어나서야 아니하겠소?”
하고 수양 대군은 권하다 못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이처럼 세 번이나 누옥에 왕림하시니 황송하외다마는 소인같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무엇을 하오리까.”
하는 것이기 건의 대답이다.
수양 대군이 보이지 않는다고 일컫는 기 건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손에 감추어 들었던 바늘 끝으로 기 건의 눈을 찌를 듯이 하였으나 기 건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멀뚱멀뚱 세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양 대군은 마침내 기 건의 뜻을 움직이지 못할 줄 알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 기건이 성날 청맹인가?”
하는 것은 수양 대군에게만 의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ㅇ게도 의문이요, 그 집 식구들까지도 의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가 정말 청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시어서는 체면을 손상하십니다. 말을 아니 듣는 놈이면 없애버리시면 고만이지. 어디 그렇게 하시어서 될 수가 있사오리까.”
하고 이계전(李季甸), 홍윤성(洪允成)의 무리가 수양대군을 보고 분개하였다.
기 건에게 세 번이나 거절을 받을 때에 수양 대군도 분이 치밀어 올라 오지 않음이 아니었다. 홍윤성의 말대로 그런 놈은 주먹으로 버릇을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자다가 말고도 가끔 그것이 분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대사를 위하여 꾹 참았다. 그러고 여전히 방문 정책을 써서 뜻 굳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정력을 다하였다.
수양 대군은 교리(校理)권절(權節)에게 또 한번 땀을 빼었다.
권 절은 자를 단조(端操)라 하고 흐를 동정(東亭)이라 한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 있다. 연조로 말하면 박팽년, 성삼문 같은 이보다도 훨씬 후배지마는 덕으로나학으로나 시문으로나 명성이 쟁쟁하였다. 이 때문에 수양 대군이 그를 끌려 한 것이다.
수양 대군이 권 절의 집에 찾아가면 그는 예를 갖추어 영접하지마는 수양 대군이 하는 말, 묻는 말에는 일체 대답을 아니하였다. 수양 대군은 여러 가지로 국가이 형편과 자기의 뜻을 말하나 권 절은 한 마디도 대답함이 없고 오직 손을 들어 귓가를 흔들며,
“소인 귀가 먹어 나으리 하시는 말씀을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소이다.”
할 뿐이었다. 수양 대군은 혹은 우스운 말도 하여보고 혹은 권절이가 들으면 성낼 말도 하여보고 혹은 불의에 무슨 말을 물어 무심중에 권절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려고도 하여 보았으나 권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한다는 듯이 창만 바라보고 딴청을 하였다.
수양 대군은 그래도 기 건이가 청맹과니가 아닌 모양으로 권 절이가 귀머거리가 아닌 줄을 믿기 때문에 그 뒤에도 여러 번 권 절을 찾았으나 마침내 대답을 듣지 못하고는 나중에는 한 계교를 내어 종이에다가 자기가 할 말과 권 절에게 물을 말을 써가지고 권절의 집에 찾아가서 그 눈앞에 펴놓고 대답하기를 요구하였다. 권절도 여기는 질색하였다. 식자우환이란 이를 두고 이름이라고 땅을 빼고 난 뒤에 그 조카 권안(權晏)과 의논하고 서울에 있다 가는 마침내 몸과 집을 안보하지 못하리라 하여 고향인 안동(安東)에 숨어 출입을 끊고 말았다. 후일에 수양 대군이 왕이 된 뒤에 지중추(知中樞)라는 벼슬로 불렀으나 미친 모양을 하여 응하지 아니하였다.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조상치(曺尙治)의 집에도 수양 대군은 여러 번 찾아갔다.
조상치의 자는 치숙(治叔)이요, 호는 정재(淨齋)라고도 하고 단고(丹皐)라고 한다. 세종 대왕 기해년에 생원문과(生員文科)에 장원(壯元)을 하여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젊어서 길 야은(吉冶隱)에게 수학하여 성리학(性理學)에 공부가 깊어 일세의 추존을 받는 터이다. 태종 대왕 때에 현량시(賢良試)에 으뜸으로 뽑히었을 적에 태종 대왕이 그를 불러 보시고,
“네가 왕씨 신하 조신충(曺信忠)의 아들이냐?”
하고 기특하게 여기심을 받음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조상치는 벌써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수양 대군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나으리가 주공의 덕을 본받으시오.”
하였다. 수양 대군이 무슨 말을 하거나 그의 대답은 오직 이 한 마디에 그치었다. 이 한 마디 속에는 외람된 생각을 품지 말라는 뜻이 품겨 있는 것을 수양 대군이 모를 리가 없다.
수양 대군이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말하고 이러한 난국에 처하려면 큰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말하여 은연히 시국이 이대로 갈 수가 없는 것과 그 시국을 처리할 사람이 자기 밖에 없는 것과 그러므로 나라에 뜻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도와야 할 것을 비추면, 조상치는 엄연히,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되 의라가 무너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고 국가가 큰 사람을 기다리거니와 그 큰 사람은 의리를 으뜸으로 하는 사람이외다.”
하고 듣기에는 비록 부드럽지마는 속에는 추상 열일 같은 무서움을 품은 대답을 하였다.
조상치의 말은 실로 사람을 감동케 할 힘이 있었다.
수양 대군도 그 외 점잖고도 겸손하고도, 정당하고도, 엄숙한 태도와 말에 옷깃을 바르게 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록 거절은 당하였더라도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다. 부왕 되시는 세종 대왕의 지우를 받던 이라 하여선생의 예로써 대접하였다. 도저히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을 알고 다시는 찾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상치는 수양 대군의 야심과 대세가 기울어지는 양을 살피고 시골에 돌아가 숨으려 할 즘음에 세조가 즉위하게 되었다. 조상치는 한 걸음 늦은 것을 한탄하였으나 병이라 칭하고 새로 즉위한 임금을 치하하는 하반(賀班)에 참예하지 아니하고 곧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행장을 수습하여 영천(永川)을 향하여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세조는 조상치가 하반에 참예 아니한 것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호조(戶曹) 분명을 내리어 동대문 밖에 조석(祖席, 송별언)을 베풀게 하고 조신을 명하여 이 늙은 지사를 정송케 하였다.
이것이 무론 세조의 진정도 되려니와 그 밖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개 조 정재라 하면 명성이 전국에 높을 뿐더러 집현전 관계자들에게는 혹은 수십 년 오랜 친구요, 혹은 스승이라 할 만한 선비다 이러한 조상치가. 서울을 떠난다 하면 전별하고 싶은 이도 많을 것이 나 단종 대왕을 사모하여금상을 아니 섬길 뜻으로 산수간에 종적을 감추는 이번 길에 누가 감히 내놓고 그를 전송하랴. 세조는 사람들의 이 심리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 함이다. 우리 임금이 이처럼 인재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인심을 수람하는 데 여간 큰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는 이만한 효과를 얻었다. 권세 잡은 이가 하는 일은 권세를 부러어하는 사람들에게 감격을 주기가 쉽다. 콧 끝에 붙은 파리를 잊어버 리고 아니 날리더라도 그것이 보통 사람인 때에는 신경이 둔한 놈이라 하려니와 높은 사람인 때에는 호생지덕이라 하여 마치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할 일같이 높이는 것이다.
조상치가 영천으로 들어갈 때에 세조 대왕이 송별연을 베풀게 한데는 이만한 효과가 있었다. 조상치를 평소에 경앙하던 사람들을 마음을 놓고 동대문 밖으로 나아가 송별연에 참예하였다. 이 송별연에 모인 사람들은 왕을 무서워하는 생각을 떼어버리고 가장 유쾌학 마시고 말하고 읊조렸다. 조상치의 높은 명성도 더욱 높으려니와 왕의 아름다운 뜻도 더욱 빛나는 듯이 생각되었다.
나중에 지필을 내어 전송하는 시와 글을 쓸 때에도 사람들은 꺼림없이 각기 자기 생각하 는 바를 썼다. 그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이라 한 것은 박팽년(朴彭年)의 말이요, ‘ ’.
이라 한 것은 성삼문(成三問)의 말이다. 이 두 사람의 글 구절 중에 우리는 오는 날에 있을 일을 짐작할 것이다.
수양 대군의 준비는 날로 갖추어 갔다.
어리신 왕의 좌우에는 왕의 심복이 될 만한 이는 하나도 없어지고 말았다. 왕이 오래 만나지 못한 혜빈을 사모하여 자개(者介)라는 궁녀를 은밀히 혜빈에게로 보내었더니 그것이 탄로가 되어 자개는 박살을 당하고 말았다. 왕의 외갓댁인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 댁과 처가 되는 여량부원군(礪良 府院君)댁과도 전혀 내왕이 끊이고 말았다. 더구나 혜빈 궁에 갔던 죄로 자개가 박살을 당한 뒤로는 궁녀들은 모두 전전긍긍하여 왕께서 무슨 말씀을 내리시면 그대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겁부터 먼저 집어먹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어느 구석에 어느 궁녀가, 또는 어느 내시가 수양 대군 궁에서 요화를 받아먹는 지 모른다. 그저 입을 다물어라, 이렇게들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궁중은 음산하고 적막하고 무시무시하였다. 열 여섯 살 되시는 상감과 열 일곱 살 되시는 왕후와 두 분이 호의를 가지 지 아니한 사람들 속에 외로이 마주 앉으시었다.
왕도 울울불락하시어 내전에 납시는 일이 별로 없으시고 매양 무엇을 생각하시는 듯하시 다가는 간혹 눈물을 떨구시는 일도 있었다.
왕은 소년 시대에 마땅히 있을 쾌활한 기운을 잃어버리고 말으시었다.
열 여섯 살이던 종달새의 봄철과 같이 즐거운 때연마는 왕은 그러한 소년의 즐거움을 다 잃어버리시었다. 계유(癸酉)년 번(수양 대군이 황보인, 김 종서 등을 죽인, 소위 계유정난)이 있은 뒤로부터 이 년이 못되는 동안이언마는 그 짧은 동안에 왕은 나이를 열 살은 더 지내신 듯이 노성하시었다.
독자는 다 아시거니와 왕은 결코 침울하신 천성을 타고 나신 어른은 아니시다. 비록 나시 며서 어머니(처음에는 현빈이다가 돌아가신 뒤에 현덕 왕후라 추숭을 받으신 권씨)를 여의 시어 사랑 중에도 가장 큰 사랑이란ㄴ 어머님의 사랑은 맛보시지 못하였지마는 조부 되시는 세종 대왕께서는 항상 팔에 안으시고 무릎에 놓으시어 곁을 떠나게 아니하시도록 귀애하시었고 부왕 되시는 문종 대왕의 인자하신 사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종의 후궁이요, 왕의 양육을 맡아서 한 혜빈은 기출이나 다름없이 어머니다운 사랑을 드렸다.이러신 동궁은 은 궁중의 사랑과 위함의 중심이 되시지 아니하였던가. 그 양반이 원하시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이 있으며,그 양반이 싫다 하신 것으로 직각에 치어지지 아니한 것이 있던가?
그때에 왕은 오직 놀고 즐거우시었고 오직 뜻대로 뛰시었다. 참 어떻게나 귀하게 소중하게 나고 자라신 어른이신가. 그렇지마는 삼년 내에 할아버님과 아버님을 다 여의시고 이제는 어머님을 대신하던 혜빈마저 만나기를 금함이 되시었다. 사모하시는 누님 경혜 공주며, 매부 되는 영양위 정종도 무슨 큰일 때가 아니고는 만나심을 금함이 되었고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왕께 대하여 가장 자애가 지극할 외조모되는 화산부원군 부인 최씨(花山府院君夫人 崔氏)와 만난지도 벌써 일년이 넘는다. 외숙 되는 권자신(權自愼)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있기 때문에 하루 한 번씩 조회에서 얼굴을 대할 뿐이요, 정답게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었다. 왕은 당신이 친근하게 말 한 마디라도 하시는 것이 그에게 큰 위험이 될 줄을 아신다.
나이가 열 여섯 살이면 가장 그리운 것이 할머니, 아주머니, 누이 같은 정다운 친족들인 것은 임금이나 뭇 사람이나 다를 리가 없다. 그 아버님의 성품을 받아 애정이 자별하신 왕은 더구나 골육지정이 작별하시었건마는 이 소원조차 풀지 못하였다.
왕의 일언 일동은 하나 빼지 아니하고 도리어 좋지 아니한편으로 보태어서 수양 대군과 정인지에게 소소하게 일러바치어지었다. 그래서는 대수롭지 아니한 일을 가지고 혹시는 수양 대군에게, 혹시는 정인지에게 간한다고 말은 좋게, 듣기 싫은 책망을 받았다. 수양 대군이나 정 인지의 말대로 하면 왕은 문밖에 나가지도 말고 누구르 불러 보지도 말고 내시나 궁녀까지라도 가까이 하지도 말고 등신 모양으로 온종일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임금의 체면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 펴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시는 왕은 마치 사나운 계모 밑에 사는 며느리 모양으로 앳되고 숫된 기운이 사라지고 부자연하게 노성한 빛이 올랐다. 왕이 무슨 근심이 계시어(흔히는 수양 대군이나 정 인지에게서 불쾌한 소리를 들으신 뒤에) 문지방에 가슴을 대시고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실 때에는 그 얼굴이 마치 삼십이나 넘은 사람의 태를 보이시었다.
혜빈이 아직 궁중에서 쫓겨나기 전에 왕의 이러한 모양을 뵈옵고 비감함을 이기지 못하여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외양에만 노성한 태가 도는 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시는 데나 마음을 쓰시는 데는 더욱 그러하였다. 마음이 그러하시므로 외양에 나타나느 것이다. 얼굴은 마음의 목록이라고 한다.
오월 십 사일은 문종대왕의 첫 번 기신이다. 작년까지는 상복이나 입고 있었건마는 금년에는 벌써 길복이다. 이것이 다 희구적인 왕에게는 슬픈 일이다. 그만큼 아버님은 더욱 멀어가는구나 하고 왕은 제복 소매가 젖도록 우시었다. 이 광경을 보고 아니 운이는 수양 대군, 정인지같이 목석 같은 간장을 가진 사람들 뿐이었다.
제사가 끝난 뒤에 왕은 오래간만에 경혜 공주와 경숙옹주 두 분 동기를 만나 체면 돌아볼 새 없이 우시었다. 경혜, 경숙 두 분 누님도 가슴이 터지도록 울었다. 돌아 가신 아버님을 우는 것보다도 외로우신 오라버님을 위하여 운 것이다. 궁녀 증에도 복바치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는 이가 몇 사람 있었다. 이 일이 또 후환의 비밀 중에 하나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왕은 더욱 슬픈 마음을 가지시었다.
유월도 다 지나고 윤유월 초생 어느 날, 왕은 더위를 피하시와 경회루(慶會樓)에 오르시었다. 이해에 날이 가물고 더위가 심하여 대단히 민정이 오오하였다.
왕은 난간 가으로 거니시며 흙 타는 연기라고 할 만한 까만 기운이 안개와 같이 돌린 하늘가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가물어서 백성이 어찌 산단 말이냐.”
하고 한탄을 하신다.
“그러하오. 민정이 오오하오이다.”
하는 것은 왕의 곁에 모신 내시 이귀(李貴)다. 이 귀는 같은 내시 김충(金忠), 김인평(金印 平)과 같이 항상 왕의 곁에 모시도록 수양 대군의 명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이 본래 아무 세력없이 궁중에서 늙은 성명 없는 내시들이다. 본래 세종 대왕 때부터 왕께 친근하던 내시들은 다 쫓겨나고 아무 능력 없는 내시들을 골라 왕을 모시게 한 것이다. 그러한 십여 명 내시 중에 이 귀, 김충, 김 인평 세 사람은 가장 왕께 충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랫녘에는 비가 왔다고 아니하느냐.”
어저께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가 오른 것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내시들은 대답할 바를 모르고 다만 허리를 굽힐 뿐이었다.
“이렇게 가무는 것이 임금의 죄라 하니 예로부터 그러한 말이 있느냐?”
황송하옵신 말씀이오나 어디 전하께 죄라 함이 당하오리이까. 천종지성이시고…….“ 김 인평의 말이 끝도 나기 전에 왕은,
“너는 글을 모르는구나. 옛날에 대한 칠 년 적에 탕 임금이 신영백도하고 이 신위휘생하사도 우상림지야 하시지 아니하였느냐.”
하시고 깊이 탄식하시는 어조로,
“이 몸에 죄가 많아 음양이 불화하고 풍우가 불순하며 민생이 오오하니 어찌할꼬. 세종 대왕 어우에는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하시지 아니하느냐. 모두 불초한 이 몸의 탓이로구나.”
모신 내시들과 궁녀들은 다만 황송하여 허리를 굽힐 뿐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내시 김충이가,
“젓삽기 황송하오나 소인이 듣사오니 이 음양순사시는 재상이 할 일이라 하오니 이것이 모두 대신의 죄인가 하오.”
하고 이마가 마루청에 닿도록 한 번 허리를 굽힌다.
“소인도 그러한가 하오.”
하고 이 귀와 김인평도 말한다.
왕은 눈을 돌리어 내시들을 한 번 흘겨보시고 웃으시며,
“그런 소리를 하고 그 목이 몸에 붙어 있을까.”
하고는 달리 엿듣는 자나 없는가 살피시는 듯 얼른 사방을 둘러보신다.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내시도 염탐군인지 알 수 없고 또 저 궁녀들 중에도 왕께 가장 친근한 체하는 자가 한 명회의 끄나풀이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인의 모가지가 열 번 떨어지더라도……”
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김충을 본체만체 심서를 진정하기 어려우신 듯이 걸음을 옮기시니 연당을 바로 내려다보는 서향 난간 앞에 와 발을 멈추시며,
“세종께옵서 여기 앉으시기를 즐겨하시었거든.”
하고 추연한 빛을 띠운다.
“그러하오.”
하는 것은 이 귀의 대답이다.
“이맘때면 소인이 상가마마를 안아 받드옵고 세종 대왕마마를 모시어 이곳에 있었사외다.”
하고 늙은 궁녀 하석(河石)이가 눈물을 머금는다.
왕은 감개무량한 듯이 하석의 주름 잡힌 낯을 바라보시며,
“그랬더냐. 내가 울지나 않더냐.”
하시고 웃으신다. 적막한 웃음이다.
“전하께옵서는 어리신 적에도 성덕을 갖추시와 아프신 때가 아니면 보채실 일이 없었사외다.”
“그랬으면 다행이다. 유모도 잠을 잤겠구나.”
“황송하오.”
왕의 유모 되는 궁비(宮婢) 아가지(阿加之)와 그의 남편이오(李午)도 혜빈과 함께 궁중에서 쫓겨난 사람 중의 하나다.
“참으로 인자 하옵시고.”
“인정이 많으시와 누구 하나 책망하신 일도 없으시옵고.”
이러한 늙은 궁녀 고염석(高廉石)의 말이나 젊은 궁녀 김수동(金壽同), 이막산(李漠山)의 말은 결코 왕께 요공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왕은 더욱 비감이 새로워지는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기둥과 난간을 어루만지며,
“세종께서는 여기 거니시기를 즐겨하시더니. 지금 계시더면 오죽이나 나를 귀애하시랴.”
하시며 눈물을 떨구시었다. 그 말씀의 비창함이 듣는 사람의 창자를 끊는 듯하였다.
늙은 내시 김충은 어린 아이 모야으로 두 소매를 눈에 대고 흑흑 느껴 울었다. 다른 내시들과 궁녀들도 울었다.
이때에 내전 편으로서 사람들이 오는 모양이 보인다.
어떤 궁녀가 가만히 ‘쉬’하는 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 오는 것을 알래매 내시들과 궁녀들은 얼른 고개를 돌리어서 눈물을 씻어버리고 가장 태연스러운 태를 보이었다. 왕도 눈물을 거두시고 인왕산 가으로 떠도는 구름 조각을 바라보았다. 한 나라의 임금의 몸으로 궁중에 있으면서도 바싹만 하여도 깜짝깜짝 놀라고 궁녀나 내시만 보아도 눈치를 슬슬 보지 아니하면 아니될 당신의 가엾은 신세를 생각하면 하늘에 떠도는 구름조각이 부러웠다.
경회루로 왕을 찾아오는 이는 좌의정(左議政) 정인지(鄭麟趾)다.
인지는 공손히 손을 읍하여 눈앞에 돌고 추보(趨步)로 왕의 앞에 나아와,
“좌의정 정인ㅇ지 아뢰오.”
하고 허리를 굽혔다.
왕은 난간을 잡았던 손을 떼고 돌아서시었다. 왕은 미간을 잠간 찡그리었다. 또 무슨 귀찮은 소리를 하러 왔는고. 이번에는 또 무엇을 잘못했다는 잔소리를 하러 왔는고. 정인지 가 와서 좋은 말이야 무엇이 있으랴 하여 인지를 보시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하시었다.
“좌상(左相)은 덥지 아니하오?”
하는 것이 인지에게 대한 왕의 첫 말씀이다. 이 고열에 듣기 싫은 소리는 말라시는 듯하였다. 인지도 이외의 말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간 머뭇거리다가,
“황송하외다.”
할 뿐이었다.
“삼남(三南)에는 비가 왔다 하오?”
하고 왕이 물으신다. 마치 인지의 입에서 말이 나올 새가 없이 미리 막아 놓으시려는 듯하다. 이것도 인지에게는 의외의 물으심이다. 실상 요사이 수양 대군이나 정인지는 삼남에 비가 오고 아니 오는 것 같은 것으 생각해 볼 ㅇ가도 없었다. 그들은 요사이 야이계일로 어떤 중대한 일을 의논하노라고 나라 정사까지도 잊어버린지가 오래다. 과연 금년 같은 한재는 국가에 큰일이다. 그러나 사욕에 골몰한 자들은 국가를 생각할 새도 없었다.
“황송하오나 아직 아무 장계도 오르지 아니하였소.”
하고 인지는 등골과 이마에 구슬땀이 흐름을 깨달았다.
‘총명하고 가련한 어린 임금’ 이러한 생각이 인지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비 온다는 소식이나 있다고?”
하고 왕은 실심한 듯이 또 앞에 굽으리고 선 신하를 멸시나 하는 듯이 몸을 돌리어 인왕산 위에 뜬 구름장을 바라보시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리시며,
“양서(兩西) 각 읍에는 비가 온다 하오?”
하고 둘째번 물음을 인지에게 던지신다.
인지는 한번 더 등과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황송하오.”
할 뿐이었다.
“황송할 것 있소? 좌상같이 명철한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하고 왕은 다시 인왕산 구름장을 바라보신다. 구름장은 점점 높이 떠올라 삼각산(三角山)을 향하고 흘러간다.
“또 서풍이 부니 비가 올 리가 있나. 여름에 왜 서풍만 불어.”
하고 뒤에 선 대신이 있는 것도 잊어버리신 듯이 멀거니 가는 구름만 바라보신다.
왕의 이러하신 태도는 결코 심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왕이 정 인지에게 대한 적개심을 분명히 발로하는 표적이었다. 왕이 부왕과 조부께 대한 효성은 골육지친에도 뻗치어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도 수양 대군을 미워할 지경까지는 감정을 끌어가지 못하였다. 비록 수양 대군이 당시에게 대하여 자애심이 부족한 숙부라 하더라도 충의의 절개가 부족한 신하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아니하시었다. 아니하시었다는 것보다 그의 천품으로는 못하신 것이다.
왕의 인자하신 성품이, 게다가 어리신 마음이 누구든지를 의심하거나 미워하는 법을 배우기는 심히 어려운 공부다. 그러나 지나간 삼년 간에 왕은 이 공부를 조금은 배우시어 근래에는 좌의정 정인지의심사를 의심도 하고 미워도 하게 되시었다. 실상 왕에게서 모든 친한 사람과 편안한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이 정 인지의 손이 아니냐. 숙부인 수양 대군을 참 미워 못하시는 왕은 그의 수족인 인지를 원망 아니할 수 없었다.
정인지가 근래에 더욱 왕을 괴로우시게 하는 말을 아뢰고 가끔 일부러 왕의 화를 돋우는 말, 심지어는 왕을 멸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이 심하게 되어 아무리 하여도 왕은 정인지에게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가 없으시었다.
인지의 말에 왕이 못 들은 체하고 고개를 돌리시어 다른 데를 보시거나 좌우를 돌아보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거나 혹은 탑전에 부복한 그를 본체 만체 하고 일어나 나오시거나 하시 면(근래에 이러한 일이 수차 있었다) 그것이 또 임금의 덕이 아니라 하여 이른바 직간(直諫)의 거리가 되었다.
왕은 한 번은, 늙은이의 객적은 소리가 듣기 싫다는 “ 것이 임금의 도리에 어그러진다 하면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객쩍은 소리만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는 어그러지지 아니하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이 비록 박하지마는 선생의 가르치심을 글로 읽었고 선왕의 말씀을 이 귀로 들어서 말의 옳고 그른 것과 사람이 충성되고 아니 된 것을 가릴 줄은 아오.”
하시었다. ‘좌상의 말에 터럭끝만한 충성이 있다 하면 내 마음은 스승에게 대한 공손한 마 음으로 그 말을 듣겠소’하는 말이 복받치어 오르는 것을 그야말로 임금이 신하에 대한 체모에 어그러지는가 하여 꾹 눌러 참으시었다.
이 일이 있은지가 삼사일 되었다. 그동안 인지는 한번도 왕께 무슨 말씀이든지 주달한 일이 없었다.
“오늘은 어찌 정가가 아니 오는고.”
하고 저녁때마다 왕은 혼자 웃으시었다. 즉위하신 처음에는 왕은 지극한 존경과 신뢰로 정 인지를 대하였다. 그는 정 인지가 조부 세종 대왕이 사랑하시던 신하일뿐더러 아버님 문종 대왕이 스승으로 대접하여 당신을 부탁하신 사람인 까닭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지의 귀 거슬리는 말도 충성을 쓸 말로만 여기었으나 임금의 총명하심은 인지의 품은 악의를 간파하 여버렸다.입으로는 이 소리를 하고 마음으로는 저 생각을 하는 줄을 간파하였고, 귀찮게 하는 소리가 모두 왕의 마음을 떠보거나 왕을 못견디게 하려는 간계라고만 생각하시게 되었다.
삼사일이나 말이 없다가 오늘 이렇게 늦게 미복으로 경회루에 납신 때연만도 들어온 것을 보면 필시 대단히 듣기싫은 말이 있는 모양이라고 왕은 생각하시었다. 왕의 눈과 궁녀들의 낯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으면 그것이 또 이 충신의 말거리가 되리라 하고 처음에는 끔찍끔찍하고 지긋지긋하시었으나 몇 마디로 인지를 욕을 보이고 나시니 ‘제까진 것이’하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태연한 마음이 생긴다. 늙고 학식 많고 경험 많고 말솜씨나 일솜씨가 다 노련한 정 인지라 하더라도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학문 토론을 하거나 꾀 겨름을 한 다면 몰라도 총명이나 예지나 말에 네게 질 내가 아니라 하고 왕은 혼자 마음 속에 정 인지는 땅바닥에 기는 조그마한 벌레같이 생각하신다.
정인지 역시 처음에는 군신지분과 때때로 무심중에, 무사한 때에 발로되는 사람인 양심으로 등과 이마에 땀도 흘리었으나 왕에게 이만큼 수모를 하고 나면 그의 악할 수 있는 정인지의 마음은 매맞은 독사와 같이 빳빳하게 토라지었다.
좌의정 정 인지는 흩어지려던 용기를 수습하여 아무리 한 감동할 만한 일에도 감동하지 아니하도록 피 흐르는 것을 보더라도 그 조그마한 눈을 깜짝도 아니하도록 굳게 결심하고 소리를 가다듬어,
“전하께 아뢰오.”
하고 외치었다.
왕이 깜짝 놀라리만큼 그 소리가 여무지었다. 마치 갑자기 치는 쇠소리와도 같았다. 왕은 인제 시작이로구나 하고 몸은 여전히 인왕산을 향하고 고개만 뒤로 돌리어 정인지를 보시었다.
“은밀하게 아뢰올 말씀 있사오니 청컨대 좌우를 물리시오.”
하고 인지가 다시 아뢴다.
“은밀한 말?”
하고 왕이 반문하신다.
은밀한 말이 무슨 은밀한 말이란 “말이요? 또 내가 무어 잘못한 것이 있소? 내가 덕이 없어서 날마다 좌상에게 잔소리---아차 잔소리가 아니라 충간이라더라. 충간을 듣는 것은 세 소공지어든 곁에 사람이 있기로 어떠하오? 할 말이 있거든 하오.”
하시며 왕은 몸을 돌리시어 곁에 놓인 교의에 걸터 앉으신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도 당하자구나. 아무려면 내게야 일 있겠느냐 하시는 태다.
인지는 딱한 듯이 약간 고개를 들어 좌우에 있는 궁녀와 내시들을 힐끗 본다. 그들은 상 감님보다도 무서운 정정승의 눈살에 몸에 소름이 끼치어 왕이 명하심도 기다리지 아니하고 서너 걸음씩 비슬빗슬 뒤로 물러서다가는 그 후에는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기둥 뒤로 슬슬 몸을 감추어 버린다. 그중에 오직 김충(金忠)이가 까딱없이 본래 섰던 자리에 서서 좌의정 같은 것은 안 하에도 두지 않는 듯이 태연하다.
인지는 참다 못하여,
“너는 어찌하여 물러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어전인 것도 꺼리지 않고 독이 있는 어성으로 김충을 꾸짖었다.
“어전에서 무엄하오.”
하고 김충은 엄숙하게 인지를 흘겨보았다.
인지의 눈초리는 노염으로 빨갛게 상기가 된다. 이 순간에 김 충의 목숨이 어찌될 것은 결정이 되었다.
살기가 찬바람 모양으로 돈다. 조선 천하에 누가 감히 호랑이 같은 좌의정 정인지의 비위를 극적거릴자랴. 그의 비위를 거스리다가는 임금이라도 자리를 쫓겨날 그러한 세도 재상의 비위를 거스리는 김 충의 이 순간의 행위는 무슨 큰 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인지의 전신에는 찬 기운이 한 번 돌았다. 그 기운은 마치 서리를 몰아오는 갈바람 모양으로 천지를 숙살할 기운이다. 인지의 이 기운과 김 충의 저 기운과 그만 마주치어 버렸다. 그것은 큰 싸움의 시작이어니와 다 늙어빠진, 마치 벌레와 같이 천한, 한낱 내시 김 충과 수양 대군의 심복이 되어 군국 대권을 마음대로 잡아 흔드는 좌의정 정인지와의 씨름은 우습기를 지내서 기막히다고 할만한 말되지 않는 씨름이다. 옳은 것은 언제나 연약한 광대로 차리고 무대에 뛰어나와서 옳지 아니한 힘에게 찬혹한 피투성이가 되어서 거꾸러지어 구경군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조물의 뜻이다---심술궃은 뜻이다.
왕은 김충을 향하여,
“물러 있거라.”
하고 명을 내리시었다. 그제서야 김 충은 약간 허리 굽은 몸을 끌고 비틀걸음으로 십수 보 밖에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껌뻑껌뻑하는 눈은 항상 왕의 몸에 있었다. 제 따위가 그리한 대야 왕에게 무슨 도움이 되랴마는 오직 억제할 수 없는 충성이 그러하게 함이다.
“은밀한 말이라니 무슨 말이요?”
하고 왕은 김 충이 물러나는 양을 물끄러미 보시고 그의 앞에 반드시 참혹한 죽음이 있을을 가엾이 여기던 뒤에 인지를 향하여 물으시었다.
김충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와 궁녀들 모이어 섰는 곳을 지나가며 누구더러 말하는지 모르게,
“엿들어 보아야지.”
하였다. 늙은 상궁하석(尙宮河石)이 얼른 김 충의 말을 알아듣고 젊은 궁녀 수동(壽同)과 막 산(漠山)을 눈짓하여 앞으로 가까이 불러 정 인지 눈에 뜨이지 아니하게 몸을 숨기어 그 하 는 말을 엿들을 것을 말하였다.
영리한 두 궁녀는 늙은 상궁의 뜻을 알았다. 만일 정정승에게 들켰다가는 철여의 모둠매에 뼈다귀 하나 온전치 못할 줄을 모름이 아니지마는 평소에 사모하던 왕을 위하여 몸의 위험을 무릎쓰고 하여드릴 일이 생기는 것이 도리어 기뻤다. 두 궁녀는 작은 가슴을 두군거리고 기둥 그늘에 몸을 숨기어 살랑살랑 정 인지의 뒤로 가까이 들어갔다. 가는 길에 왕의 눈이 두 궁녀를 보았으나 그들의 뜻을 아시는 듯이 못 보신 체하였다.
왕은 비록 정 인지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태연자약할 결심은 하시었으면서도 그래도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고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래서 태연 자약하려고 애 쓰면 애쓸수록 마음이 산란함을 깨달으시었다.
정 인지도 차마 말이 나오지 아니하는 듯이 입술이 열리려다가는 닫히고 열리려다가는 또 닫히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 국보간난(國步艱難)하와 내외다사(內外多事)하옵고 민심이 돌아갈 바를 몰라 유어닙어가 항간에 성행하올 뿐더러 간신인(仁), 종서(宗瑞)의 여당이 아직도 경향에 출몰하와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모양이오니 이러다간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역성지변(易姓之變)이 있을까 저어하오며 그러하오면 위로 태조대왕과 열성조(列聖朝)의 위엄이 일조에 오유(烏有)가 될 뿐더러 무고한 창생이 도탄에 빠질 것이온즉 지인지효(至仁至孝) 하옵신 전하께옵서 이 일을 어찌 차마 하시리이까…….”
정인지는 가장 지성측달한 어조로 이렇게 지금 나라 일이 위태한 뜻을 아뢰다가 말이 막히었다. 그것이 마치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듯하였다.
왕은 인지가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며 용안에 근심하는 빛이 가득하시어 하시다가 인지가 말을 끊으매 왕은 옥좌에서 일어나시어 두 손을 가슴에 들어 읍하시며,
“내가 부덕(不德)한 탓이요. 좌상이 이러한 충성된 말씀을 하거든 내가 앉아서 들을 수가 있소? 내가 부덕하고 또 유충(幼沖)하여 조종의 유업을 위태하게 하고 창생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한다 하니 내 지금 찬땀이 등에 흐르오. 그러나 다행히 숙부 충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좌상이 또한 경국 제세지재가 있으니 부덕한 나를 보도(輔導)하여 대과(大過)가 없도록 하오.”
하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신다.
어리고 감격성이 많으신 왕은 정인지가 나라로 근심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시고는 지금껏 의심하고 미워하시던 생각도 버리시고 도리어 인지의 충성에 감동이 되신 것이다. 그러고 대신을 모만하신 생각을 후회하신 것이다.
인지도 왕의 말씀에 숨이 꽉 막히었다. 왕이 자기를 미워하시는 때에는 아무러한 말이라도 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나 자기를 신입하시는 양을 뵈옵고는 그 어른의 가슴을 아프시게 할 말씀을 사뢰기가 매우 거북하였다.
그러나 요마한 인정(인지는 그것을 요마하다고 생각한다)에 구애하여 대공을 세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왕에게 왕위를 내어 놓으라는 첫 마디는 꼭 자기 입으로 나오게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에게 그 공을 빼앗길 근심이 있다.
본래 수양 대군이 정 인지더러 왕께 퇴위하시기를 권하라는 부탁을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수양 대군이 왕위에 야심이 있더라도 이러한 부탁을 자기 입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내가 왕이 되고 싶다 하는 말을 제 입으로 할 수 없는 모양으로 왕께 물러나시기를 청해 달라는 말도 제 입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는 다 그 뜻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어서 당자는 겉으로 싫다고 하여도 그 사람이 나서서 국가를 위하여 이리이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서둘러야 하는 것이니 정 인지가 곧 이 사람이다.
입 밖에 내어서 말은 아니하더라도 그야말로 이심전심으로 수양 대군이 왕위에 야심이 있는 것을 그의 심복이 되는 총명된 부하가 알아차리었다. 그것은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 두 사람이다. 하루의 반 이상을 수양 대군 궁 밀실에서 살고 수양 대군의 심중울 취찰 하기로 직업을 삼는 이 두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주공(周公)의 마음 속에 성왕(成王)의 자리를 빼앗을 뜻이 있는줄을 분명히 알아보랴.
수양 대군이 왕이 미는 것이 두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면 두 사람은 그 뜻을 알고도 모르는 체할 것이지마는 그것이 자기네에게 크게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나서서 설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알아본 표를 보일 때까지에 수양 대군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였을 것은 진실로 동정할 일이다.
권람, 한명회가 수양 대군의 야심을 화직히 안 뒤에 첫째로 할 일은 이 뜻을 두 대신 ---좌의정 정인지와 우의정 한 확에게 전하는 것이어니와 이 일도 어려우려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마는 쉬우려면 또 무척 쉬운 일이다. 어떠한 경우에 이 일이 어렵겠는가 하면 그것을 전함을 받을 사람이 이(利)로 움직이지 아니할 사람인 경우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사 람을 휘어 넣으려면 그 일에 의리의 가면을 씌워야 하거니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마는 저편이 이에 움직이는 줄만 알면 거저 먹기다. 마치 음탕한 계집을 유혹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슬쩍 눈치만 보이면 그만이다. 오직 한 가지 어려움은 분명히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도 없고 더구나무슨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뒤에 남길 수도 없는 것이다. 자칫 잘 못하면 역적으로 몰려서 모가지가 날아날 일이다. 권람, 한명회는 이런 일을 목이 날아나게 할 사람이 아니다.
권람은 그 조부 권근(權近)의 반연으로 소시로부터 정인지와는 교분이 있었고 또 우의정한 확은 수양 대군과도 친척간이어서 두 사람에게 수양 대군이 속에 먹은 뜻을 전하기에는 편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인지나 한 확이나 다 이를 보면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권람과 한명회의 계책은 정인지, 한 확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공을 다투게 함이었다. 누 구든 먼저 왕께 퇴위를 권하는 사람이 수공(首功)이 될 것은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일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들이기로 인정이 없을 리가 없다.
어리신 임금을 생각하고 문종 대왕의 고명하신 것을 생각하면 측은한 생각이 아니 날 리가 없다---의리라는 생각도 아니 날 리가 없다. 의리라는 생각을 떼어버리기는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정을 발로 밟아버리기는 그들이라도 눈물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될 수만 있으면 이런 못할 일은 아니하였으면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소원이다.
그렇지마는 수양 대군의 뜻은 변할 리가 없은 즉, 내가 아니하면 반드시 다른 사라이 하리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시키느니보다도 내가 하리라, 내생의 지옥을 누가 보았더냐 하는 것이 정 인지, 한확 두사람이 마침내 도달한 심리였다. 이러한 결론으로 정 인ㅇ지가 한 확보다 먼저 왕께 ‘물러납시오’말씀을 아뢰려 들어온 것이다. 이윽히 잠잠하다가 마침내 좌의정 정인지는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열성조의 위업을 보시와……”
인지는 또 열성조를 팔았다.
왕은 인지가 머뭇머뭇 어물어물하는 태도에 한참 동안 스러지었던 의심을 다시 품으시게 되었다. 변변치 못한 말은 아무리 꾸며도 당당한 기운이 없었다.
“이렇게 국보가 간난하옵고 또 전하께옵서는 비록 천종지성이시와도 춘추어리시오니 국 사로 보옵든지 전하께옵서 옥체를 한가히 하시기로 보옵든지 이때에 군국 대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시고 전하께옵서는 편안히 즐거우신 일생을 보내심이 옳을까 하오.”
인지의 이 말을 왕이 차마 들을 수 있으랴. 왕은 인지가 말하는 뜻을 못 알아들으시는 듯이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물끄러미 인지의 조그마한 몸뚱이를 바라보실 뿐이었다.
인지는 말하던 김에 단단히 따질 필요를 느끼고,
“그뿐 아니옵고 만일 이대로 가오면 옥체에도 무슨 불측한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사오니 신자의 도리에 어찌 차마 보오리까. 그리하옵기 소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왕은 인제야 인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듯하였다. 그러나 설마 그 뜻이랴 하였다. 왕이 아니시라도 아무라도 설마 그 뜻이랴 할 것이다. 그렇지마는 좌이정 정인지가 신자의 도리에 차마 앉아 볼 수 없어서 죽기를 무릅쓰고 사뢰는 충성된 말의 뜻은 결국 그 뜻이요, 다른 뜻은 아니었다.
“군국 대사를 숙붕게 맡기었으니 이제 날더러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주란 말이요?”
하고 왕은 인지의 참뜻을 알아보실 마지막 길로 이렇게 물으시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보위(寶位)를 수양 대군에게 사양하시오.”
하고 인지는 무서운 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꼭 감았다. 어디서 벼락이 떨어질 듯한 무서움도 있으나 대단히 어리운 곳을 지나온 듯한 안심도 있었다. ‘왕이 대노하시기로 제 나를 어찌하랴’---인지의 머리 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지나간다. ‘이제는 왕은 벌써 거추장거리는 한 어린 아이다. 왕은 벌써 수양 대군이 아니냐’--- 인지는 이렇게도 생각하여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이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믿으려 한다. 그러고 자기의 총명과 용기와 행운을 스스로 치하한다. 이러하는 동안이 실로 순식간이다.
“좌상이 나더러 왕위에서 물러나란 말이야.”
하시고 왕은 옥좡에 벌떡 일어나시었다.
“나더러 부왕께서 전하여 주신 왕위를 버리란 말이야? 그것이 대신이 할 말이야. 그것이 어느 싱경 현전에 있는 신하의 도리야? 정 인지의 목에는 칼이 들이갈 줄을 몰라?”
왕은 용안이 주홍빛이 되시고 발을 구르시었다.
“숙부가 있거든 정인지를 시켜 이런 말을 하게 한단 말이냐. 누구 없느냐. 이리오너라!
역신 정인지를 금부로 내려가두고 전교를 기다리라 하여라! 난신 적자를 하룬들 살려둔단 말이냐. 요망한 늙은 것이 오늘따라 가장 충성이 있는 듯하기로 무슨 소릴를 하는고 하였더니 언감생심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이놈 네가 선조의 녹을 먹고 고명하심을 받았 거든 이제 이심을 품으니 천의가 없으리란 말이냐. 누구 없느냐. 이 역신을 끌어내는 놈이 없단 말이냐.”
하시는 왕의 두 눈에서는 원통한 눈물이 흘렀다.
왕이 부르시매 궁녀들과 내시들이 모여 왔으나 아무도 감히 정 인지에게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담나 눈들이 둥글하여 벌벌 떨뿐이었다. 정인지에게 손을 대는 것은 마치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정 인지도 왕이 진노하심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좀 더 어성을 높이어,
“옛날로 말씀하여 도요, 순, 우의 상(相) 전(傳)이 있었사옵고 우리 나라로 말씀하더라도 태조대왕(太祖大王)께옵서 정종대왕(定宗大王)께선위(禪位)를 하시왔고 정종 대왕께옵서는 또 태종대왕께선 위하시었사오며 또 황조(皇朝)로 말씀하와도 건문황제(建文皇帝)께옵서…….”
하고 왕으로 하여금 선위하는 일이 결코 전에 없는 일도 아니요, 또 흉한 일도 아닌 것을 해득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왕은 인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조 고명 받은 충신 정인지가 나를 요, 순을 만들려는가.”
하시었다. 인지에게는 실패는 없었다. 먼저 말만 떼었으면 벌ㅆ 성공이어니와 한번 인지가 내어놓은 말은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것이다 . 그것은 인지의 힘이 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지가 시세의 그러한 기미를 용하게 빨리 살피고 미첩하게 그 기미를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용한 것이다.
인지가 할 말을 다 하고 물려나간 뒤에 왕을 응위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목을 놓아 울었다. 경회루가 한바탕 울음 터가 되기는 실로 개구 이래에 처음이다.
왕은 인지의 말을 들으시고 인지를 질책하실 때에는 노성한 어른이시었으나 인지가 물러 나가고 좌우가 우는 것을 보신 때에는 도로 열여섯 살 먹은 어린 고아시었다. 그래서 왕은 흑흑 느껴우시다가 궁녀들의 부측으로 정신 잃은 이와 같이 내전으로 돌아오시었다.
내정에서도 왕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우는 양을 보고 모두 무슨 일이 생긴고 하여 황황하였다. 궁녀들은 섰던 자나 걸어오던 자나 다 발이 붙은 것같이 우뚝 서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근래에 궁중에는 불원간에 무슨 큰 변이 생기리라는 예감이 돌았다. 그 변이 무 엇인지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어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속으로는 저마다 아는 듯하였으니 그것은 곧 어리신 왕의 몸에 관한 불길한 일이었었다.
“웬일인지 상가마마께옵서는 낙루하시며 드옵시오.”
하고 지밀나인이 아뢰는 말에 왕후 송씨께서도 깜짝 놀라시와,
“낙루라니? 상감마마께옵서 어째 낙루를 하옵신단 말이냐.”
고 계하로 뛰어 내리시었다.
왕은 내전에 들어오시는 길로 몸이 불편하다 하시고 좌우를 물리시고 자리에 누수시었다.
왕후는 뒤에 남아 왕이 비감하시는 까닭을 알려 하시었으나 아직 어리시고 혼인하신지 일년 밖에 아니 뒤 내외분이시라 왕후는 아직도 왕의 앞에서 수줍을 떼지 못하시어 직접으로 왕께 연유를 여쭙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왕후는 상궁 하석에서 오늘 경회루에서 일어난 일을 대강 들으시고 또 기둥 뒤에서 엿듣던 김수동, 이 막산 두 궁녀를 부르시와 좌의정 정인지가 왕께 아뢰던 말과 왕께서 인지에게 하시던 말씀을 낱낱이 들어 기절하실 듯이 괴로워하시었다.
그러나 왕후는 궁중이 어떠한 곳인 줄을 아시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곳이어서 무슨 말이나 행동을 마음대로 못하는 곳인 줄을 여자이니만큼 더 잘 아신다. 그래서 왕후는 눈물을 거두시고 좌우를 물리신 뒤에 지금 이 처지가 어떠한 처지인 것과이 처지 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에 힘을 쓰시었다. 그렇게 태연하기를 힘쓰시었으나,
“세상에 이런 말도 듣는 법이 있느냐.”하시고 왕후는 마침내 무릎에 엎드리어 우시었다.
그 슬픔은 구천에 사무치고 영원히 끝날 줄을 모르는 듯하였다. 왕의 자리를 물러남도 슬픔이려니와 남편 되시는 왕의 몸에 만일의 변이 미칠 것을 생각하면 천지가 캄캄해지는 듯하였다.
여자는 아무리 급한 때에라도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고 반드시 이해 타산을 할 여유를 가진다고 한다. 어리신 왕비로 이러한 때에 생각나시는 것은 친정 부모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친정 부모에게만 알리면 무슨 도리가 있을 듯하였다. 부모라 함은 여량부원군(礖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내외다.
그러나 송현수에게 기별을 전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궁녀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것이나 밖의 여자가 궁중에 들어오는 것이 록 절대로 금함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거의 무망이었고 섣불리 하다가는 목이 날아나는 판이다.
그렇다고 하루라도 지체할 수는 없다. 왕후는 첫째 어느 나인을 붙들고 부탁할까 애를 쓰시었다. 평소에 보면 다 심복 같지마는 이런 중대한 일을 당하고 보면 다 의심스러웠다.
“설마 막산이야 어떨라고. 막산이보다 염석(廉石)이가 날까. 이런 때에 자개(者介)가 있으 면 작히나 좋을까.”하고 혜빙 궁예 출입한다고 박살을 당한 자개를 생각하시었다. 염석은 하석(河石)과 같이 세종 대왕 시절부터, 왕이 왕세손(王世孫)이라고 일컬을 때부터 왕의 곁에 모시는 늙은 상궁이요, 막산(漠山)은 수동(壽同)과 같이 금상이 즉위하시며부터 왕께 친근히 모시는 젊은 궁녀다. 왕의 곁에 근시하는 궁녀들이 다 쫓겨나는 판에 이런 사람들은 특별히 눈에 뜨일 만하지 아니한 덕으로 이를테면 잘나지 못한 덕으로 오늘날지 왕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들은 양전마마께서 보시면 가장 오래 낯 익은 궁녀들이 어서 특별히 귀애하심을 받았다. 그렇지마는 그들을 곧 믿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래도 이 사람들 밖에 더 믿을 사람이 없다.
왕후는 마침내 여러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아니하게 막산을 부르시어,
“막산이, 너 어려운 일 하나 들어 주련?”
하고 은근히 물으시었다.
막산은 왕후의 이렇게 은근하신 태도에 너무나 황송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곤전마마께옵서 하라 하옵시면 소인이 물엔들 아니 들어가며 불엔들 아니 들어가오리까.
머리를 베어 신을 삼아 바친들 양전마마 태산 같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하고 눈물을 떨어뜨린다. 수동은 아까 경회루에서 생긴 감격이 아직스러지지 아니하였다가 왕후의 심상치 아니하신 태도에 다시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아직 왕후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느 아지 못하거니와 그것이 대단히 중대한 것인 줄은 짐작하였다.
“어떻게 하면 오늘 일을 부원군 궁에 통할 수가 있겠느냐? 믿고 하는 말이니 네가 무슨 도리를 생각하여라.” 하시는 왕후의 말씀을 듣고 수동은 이윽히 생각하더니,
“소인이 할 도리가 있으니 곤전마마는 염려를 부리시오. 오늘 밤으로 이 말씀을 부원군 궁에 통하도록 하오리이다.” 한다.
“그러면 작히나 좋으랴. 그러하면 상감마마께 아뢰와 네 공은 후히 갚으려니와 너도아다시피 이 일이 심히 큰일이니 만일 탄로되었다가는 필시 큰 변이 날 것이다.네 목숨도 위태 하려니와 잘못하면 부원군 궁에도 화가 미칠까 하니 무디 조심하여라.”
하고 왕후는 적이 마음을 놓으시는 중에도 여자다운 자상한 걱정을 하신다.
“곤전마마, 염려 부리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하오리다.”
“다행한 말이다마는 무슨 꾀가 있느냐. 어찌할 생각이냐. 그러고 오늘 밤에는 꼭 되겠느냐. 나는 새라도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거든 네가 무슨 재주로 이 기별을 통하려 하느냐.”
하고 그래도 왕후는 염려를 놓지 못하신다.
“그것은 염려 없사외다. 별시위(別侍徫) 댕기는 사람에 소인의 오라비의 친구 형제가 있사외다. 이 사람들만 만나서 부탁을 하오려 하오.”
하고 막산은 왕후를 안심시키려고 여량부원군 집에 기별전하는 방법을 말씀하였다.
왕후는 펄쩍 뛰신다---.
“그것이 될 말이냐. 네 오라비 친구가 어떠한 사람이길래 이러한 부탁을 한단 말이냐. 별시위나 댕기는 것들을 어떻게 믿고…….”
“그렇지 아니하오이다. 그 사람네 형제로 말씀하오면 비록 벌레와 같이 천한 태생이오나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아옵고 한 번 허락한 말씀이면 물불이 앞을 가리워도 변하지를 아니 하오 요새 정승 판서님네는 사재사초 . , (事齋事楚)를 당연히 알아도 소인네 천한 무리는 그러 할 줄을 모르오.”
하고 막산은 기를 내어 자기네 계급이 충성됨을 변호한다.
“옛날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살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도 있을까?”
하고 왕후는 반신 반의하시었으나 막산의 충성을 믿고 만사를 맡겨버리고 말았다.
김득상(金得祥)은 아직 삼십이 다 차지 못한 젊은 별시위다. 키는 그렇게 큰 키는 아니나 구간(軀幹)과 사지가 모두 힘있게 어울리게 불고, 빛은 검을지언정 얼굴과 이목구비가 다 바로 박히어 날래고 굳센 기운이 미우에 가득하였다. 일신이 도시 양기 덩어리 듯이 항상 유쾌하였다. 그는 동무들에게와 아는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또 여간해서는 성을 내는 일이 없이 한 마디 ‘이런!’하고참아버리거니와 한 번 성이 나는 날이면 벼락 감고 호랑이 같았다. 아는 사람은 그를 독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궁녀막산이가 이 김득상의 가장 절친한 친구 김덕산(金德山)의 누이로 이 용사 득상과 봉 내외하고 다닌ㄴ 동안에 깊이 사랑의 정이 들게 된 것은 가장 자연한 일이다. 궁녀된 막 산이가 시집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마는 득상이도 아직 장가도 들지 아니하고 궁중 으슥한 그늘에서 때때로 막산을 만나 보는 것으로마 족히 여기었다.
이러한 사람의 친구는 몇 사람 되지 아니하나 사귄 사람은 다 형제와 같았다.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사람은,
“저는 저요, 나는 나지.”
하여 내어버리고,
“여보게 동관--”
하고 우댓조로, 혹은 왕심릿조로 한 번 반갑게 부른 뒤에 손으로 아프리만큼 어깨를 툭 치는 사이만 되면,
“어, 그럼세.”
하고, 한 번 허락한 것이면 다시 두 말이 없고 어떤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 일 내어 놓고 나서서 보아 준다. 친구가 어느 놈한테 매를 맞았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는 밥을 먹다가도 자다가도,
“이런 제길. 그놈의 정강이가 성해!”
하고 뛰어나선다. 그러는 날아면 저놈의 정강이나 내 정강이나 간에 하나는 부러지고야 만다.
만일 어느 친구가 친환이 나거나, 내환이 있거나, 아환이 있거나 하여 돈이 없어 곤란한 것을 보아? 그는 곧 아내의 비녀, 속옷이라도 잡혀다가 도와 준다.
그들에게는 왕께 대한 충성이 있다. 그러나 막산이 말마따나 벌레같이 미천한 계급에 태 어난 그들로는 충성이 있어야 그것을 보일 기회가 없었다. 쥐가 사자에게 충성을 보이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고 돈에도 팔리고 이름에도 팔리고 아침에는 왕가, 저녁에는 이가를 섬기는 무리들만이 충신 열사는 도맡아 가지고 있다. 마치 소경이 보기를 맡은 것과 같다.
그날 밤은 마침 별시위 김 득상이가 대궐에 번드는 날이다. 밤 자정에 번을 들어 이튿날 오정에 나가게 되었다. 득상이 맡은 직책은 철여의를 들고 사정전(思政殿) 뒷마당을 지키는 일이었다. 사정전은 왕이 낮에 거처하시는 편전이어서 밤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지킬 필요는 없는 곳이지마는 그래도 군사 네 명이 전후 좌우 사방을 밤새도록 지키게 되었다.
윤유월 날은 밤에도 더웠다 대궐마당에도. 모기가 앉았고 경회루가 초 끝에는 북두성자루가 걸려 있다.
득상은 사정전 뒤뜰을 동에서 서으로 왔다가는 가고 왔다가는 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크나큰 대궐은 어두움 속에 보면 하늘에 솟은 괴물 같았다. 득상의 발자취 소리는 저벅저벅 전각에 울린다.
“어느새 반딧불이 났네.”
하고 득상은 발을 멈추고 귀신의 등불 모양으로 파란 불을 껐다 켰다 하며 뒷담을 넘어 사정전 추녀 밑으로 날아 가는 반딧불을 때리기나 하려는 듯이 손에 든 철여의를 내어둘러 보고는 또 걷기를 시작한다. 걷다가는 한 걸음 멈추는 것은 무엇이 들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밤에 대궐 안에서 궁녀와 밀회한다는 것은 목숨을 하나만 가지고는 못할 일이다. 한 번 들키는 날이면 그 목숨은 간 곳을 모른다. 그렇지마는 어떤 때 사람의 사랑은 죽음보다 힘이 있다. 그래서 한 해에도 몇 사람씩 죽는 양을 보면서도 궁녀는 사랑의 뒤를 따른다. 크나큰 대궐 안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감출 만한 으슥한 담 모퉁이와 나무 그늘도 많다. 두어 마디 속삭거려 보고 손 한 번 마주잡아 보고 이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것은 목숨 하나 내어댈 만한 값은 넉넉하다.
득상이와 막산이도 이렇게 만난다. 이틀에 한 번 드는 번이 삼추보다도 오랜 듯하였고, 또 번들 때마다 반드시 만나지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내전에서 (막산은 내전에 있는 궁녀 니깐) 먼 곳에 번을 들게 되어도 만나기 어렵고 또 혼자가 아니요, 이삼인이 같이 있게 되어도 만날 기회는 적었다. 그런ㄷ 오늘 저녁 같은 때는 비교적 좋은 기회다. 득상은 혼자서 종용한 곳에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윽고 담 밖에서 자박자박하는 발자취가 들린다. 득상은 우뚝 선다.
“왔다! 왔다!”
하고 득상은 그 발자취 소리가 그리운 막산의 것인 줄을 안다.
득상은 가만히 뒷문을 나서서 담그늘에서 몸이 호리호리한 여자의 팔목을 잡을 수가 있었다. 득상의 손바닥은 불같이 덥다.
“아무도 없소?”
하는 것은 어두운 속으로 앞 뒤를 바라보는 막산의 말이다.
“그럼 없지. 누가 있어? 마마님 행차에 어느 놈이 얼씬했다봐. 내님이 가만 두어?”
하고 득상은 막산이나 겨우 들을 말로 호통을 빼고는 씩 웃는다. 그러고는 자기도 안심이 아니 되어 서너 걸음씩이나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어두움 속을 살피고 나서는,
“아무도 없어. 원 이렇게 어두운 데가 세상에 어디 있담. 요렇게 내 곁에 섰건만도 우리 마누라 얼굴이 다 보이지를 않는걸. 어디 정말 우리 막산 아씨신가 어디 좀!”
하고 팔을 막산의 목에 걸어 잡아 끌며 자기 얼굴을 막산에게로 가까이 대며,
“하하 분명히야. 분명히 우리 정경 부인이신걸. 왜 우리 마누라는 정경 부인이 못되라는 법 있나?”
하고 그 무서운 용사가 마치 어리광하는 어린아이 모양으로 혼자 좋아라고 한다.
그래도 막산은 말이 없이 다만 색색 숨결만 빠르다.
“웬일이야? 말이 없어? 왜 무슨 걱정이 있나?”
하고 득상은 파홍이 되는 듯이 막산의 목을 팔에서 내어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막산은 가슴을 두군거리다가 마침내 말을 내었다---.
“무엔지 큰일 났소. 오빠헌테 어려운 청이 있어.”
“거 무슨 청이람. 말을 해 보아. 내 힘에 할 일이면야 동생 청 안 듣겠나.”
친구의 누이라 하여 동생이라 하고 오라보니의 친구라 하여 오라 부르는 것이다. 득상 이가 농담삼아 ‘마누라’라고 불러도 막산은 노여하지 아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고 깊어 내외나 다름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막산이가 구실을 물러나와 득상에게 시집을 가버리면 그만이지마는 그들의 일이 그렇게 뜻대로 되기도 어렵다. 이 사람들은 그냥 두면 언제까지든지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만나는 사랑의 생활을 보낼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 처하여진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반항적인 노력을 할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치 식물과 같이 누가 어느 곳에 갖다 심으면 일생 그 자리에서 늙는다. 이렇게 평탄의 운명의 물결에 순종하는 백성도 이따금 험한 물굽이를 만나 바위 뿌다구니에 부딪치어 피거품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득상과 막산도 지금 그러한 경우를 당한 것이다.
“꼭 내 청을 들어 주지?”
하고 막산은 애원하는 듯이 득상을 바라본다.
득상은 의심스러운 듯이 좌우를 돌아보며,
“누구 엿듣는 사람 없을까?”
“엿듣기는, 우리네 따위의 말을 밑을 들어서는 무엇을 얻어 먹겠다고.”
하고 득상은 웃는다.
막산은 오늘 낮에 왕이 경회루에 납시었을 때에 일어난 일---정인지가 들어오던 일, 좌우를 돌리라던 일, 내시 김 충이가 아니 물러나던 일, 자기가 수동이와 함께 기둥 뒤에 숨어서 엿듣던 일, 정 인지가 왕께 여쭙던 말, 왕께서 진노하시던 일, 우시던 일, 자기네도 울었단 말. 그런 뒤에 왕후께서 막산이를 부르시와 여량부원군댁에 기별을 전하라고 부탁하신 말, 그러고는 자기가 염려 없다고 장담한 말까지 여자다운 자세함으로 내려 말을 한 뒤에,
“그러니 내야 무슨 힘 있소? 그래서 오빠 말씀을 아뢰었지. 소인의 오라비의 절친한 친구 에 김 아무라는 별시위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고, 그 사람은 의리를 보고는 사생을 불구하 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께 말하면 오늘 밤으로 부원군께 기별이 갈 터이니 염려 놓읍소사고. 그랬더니 곤전마마 말씀이 그러면 부디 그 사람에게 잘 몰하라고, 그러면 후히 상을 주 시마고 그러신단 말씀이야요. 내가 잘못했지 오빠를 위태한 일에 천거해서 안 되었지?”
하고 정말 미안한 표정을 하였다.
“아니, 무어? 그놈이, 그 정가 놈이 상감마마께 어쩌고 어쩌고? 이놈을 당장에 때려 죽여야.”
하고 득상은 은밀한 말인 것도 잊어버린 듯 소리를 냅따 지르며 철여의를 어두운 허공중에 내어 두르고 금방 어디로 달려 가기나 할 듯한 기세를 보인다.
“아이 여보!”
하고 막산은 잠든 사람을 깨우는 모양으로 득상의 팔을 힘껏 잡아 흔들었다.
이때에 고루(鼓樓)에서 사경을 아뢰는 복 소리가 둥둥 울려 온다.
왕후의 친정인 여량부원군 송현수 집에서는 이런 줄은 알 까닭도 없이 상하내외가 고요히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별시위 득상이가 대문을 두드리었다.
만일 왕께서 나라의 실권을 잡으시었을 양이면 국구되는 여량부원군 집이 이렇게 소조하지는 아니하련마는 모든 권세를 수양 대군에게 맡겨버리신 왕으로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없어서 그 처가댁 대문이 명색이 솟을대문이지 줄행랑이라고는 대문 좌우에 단 한간씩 밖에 없었다.
내시 이귀 김인평(李貴), (金印平), 김충(金忠) 세 사람은 경회루에서 나오는 길로 각각 기회를 엿보아서 정 인지가 오늘 왕께 아뢴 불충, 무엄한 말을 금성대군(錦城大君),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께 전하고 또 지중추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에게도 김 충이가 평소에 친밀하던 까닭에 이 일을 알리고 일이 심히 급하니 곧 무슨 조치가 있기를 청하였다.
궁녀 하석(河石), 고염석(高廉石) 등도 곧 사람을 놓아 혜빈 양씨(惠嬪楊氏)에게 이 기별을 전하였다.
혜빈 양씨는 이 기별을 받는 대로 곧 왕의 외숙되는 예조판서(禮曹判書) 권자신(權自愼)에게 사람을 보내었다.
이러한 위태한 심부름을 한 이는 다 영민한, 충성된 여자들이었다. 혜빈의 심복으로 심부름을 한 이는 관노(官奴) 이오(李午)의 처 아가지(阿加知)다. 아가지는 왕이 어리신 적에 젖을 드린 연고로 줄곧 궁중에 있다가 수양 대군에게 혜빈이 쫓겨나는 통에 같이 쫓겨나와서 혜빈궁에 붙이어 살며 밤낮에 왕을 생각하고는 울고 혜빈과 함께 후원에 칠성단을 모으고 왕의 만세를 빌고 있다.
왕의 외조모 화산부원군 부인 최씨(花山府院君夫人 崔氏)의 심복으로 이번 일에 심부름을 한 이는 아지(阿只)와 불덕(佛德)이라는 두 비자요, 왕의 장모 되는 여량부원군 부인의 심부름을 한 이는 내근내(乃斤乃)라는 아직 열 여덟 살 된 비자였다. 그러고 궁중과 외간에 연락하는 일을 많이 하기는 내은(內隱), 덕비(德非), 용안(龍眼) 등 무당이었다. 세종 대왕 시절에 내불당(內佛堂)을 폐한 뒤로는 궁중에 여승의 출입이 없어지고 그 대신에 무당이 출입하게 되었다. 혜빈도 무당을 믿는 이었었다. 혜빈이 궁중으로부터 쫓겨난 것이 무당들에게도 타격이었으나, 그래도 궁녀들이 사는 곳에 무당은 언제나 필요하였고 비록 혜빈이 궁중에서 쫓겨나 아무 세력이 없다 하더라도 내은, 덕비, 용안 같은 무당들은 오랫동안 혜빈의 비호를 받은 옛 정, 옛 은혜를 저바리지 아니하였다.
이 어려운 처지에서 왕을 구하여 내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곧 수양 대군을 치어 바리는 것이라 함은 누구나 생각할 바다. 금성 대군이나, 송현수나, 권 자신이나 또는 혜빈이나 정인지가 왕에게 선위하시기를 권하였다는 소식은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차라리 기다리는 일이 올 만한 때에 온 것처럼 심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할 뿐더러 설사 이것이 놀라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군국 대권을 한 손에 잡은 수양 대군을 저항할 아무 준비도 없었다. 금성 대군, 한남군, 영풍군 세 분은 친형제연마는 아직은 서로 의심하는 처지다. 한 남군, 영풍군 두 분은 다 혜빈의 아드님이요, 따라서 왕과는 숙질인 동시에 형제와 같이 자라났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생각하든지 왕의 여러 분 숙부 중에 왕께 대하여 가장 큰 동정을 가질 이는 이 두 분이다. 이 점으로 보아서 이 귀 등은 곧 이 두 분에게 정인지지가 왕께선위하시기를 간하였단 말을 전한 것이다.
또 금성 대군으로 말하면 왕의 여러 숙부 중에 가장 대의 명분을 지키는 이일뿐더러 바로 석달 전인 지나간 삼월에 금성 대군궁에서 화의군(和義君), 최영손(崔永孫), 김옥겸(金玉謙) 등이 모이어 사연(射宴)을 베풀었다 하여 금성 대군이 수양 대군의 말로 고신(告身)을 당한 것으로 보더라도 수양 대군과는 서로 대적이요, 왕께는 충성과 동정을 가진 줄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지마는 이렇게 외사가 일치하면서도 금성 대군과 한남군, 두 분과는 서로 의사가 통할 지경은 아니다. 비록 형제라도 대군과 군과는 지위가 다르고 그럴 뿐더러 왕의 집 형제들은 우리네 형제와 같이 친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저편이 수양 대군 편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처지다.
송현수권 자신 금성대군, , , 한남군, 영풍군, 혜빈, 조 유례, 성문치, 영양위 정종--- 이러한 왕의 편이 될 만한 이 둘은 아무 연락 없이 모래알알이 흩어진 힘이다. 이 흩어진 힘이 얼마나한 일을 할까.
송현수(宋玹壽), 권자신(權自愼) 두 사람의 관계도 그러하다. 송현수는 왕의 장인이나 수양 대군하고는 소시부터 친한 사이다. 그러기나 하길래 수양 대군이 그딸로 왕후를 삼은 것이다. 지금도 송현수는 수양 대군에게 친근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기 때문에 금성 대군이나 권 자신 편에서 보면 송현수는 수양 대군을 없이 할 의논을 함께 할 사람은 아닌 듯 하였다. 또 사실상 송현수는 그렇게 야심이 있고 수완이 있는 사라이 못되고 또 살신성인(殺身成仁)할 만한 충의의 열정이나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득상(得祥)에게서 왕후의 전갈을 듣고도,
“으응?”
하고 쓴 입맛을 다시었을 뿐이다.
“대감, 이 일을 어찌하시려오? 글쎄 이런 변도 있을까. 곤전마마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실까. 아이, 가엾으시어라. 글쎄, 대감 어찌하시려오? 그 정 인지가 하는 놈을 가만 두신단 말요?”
하고 부인이 발을 굴러도 현수는,
“여보, 하인을 듣겠소.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오?”
하고 시끄러운 듯이 팔을 내어두른다.
“어느 세상이면 누가 어찌할 텐가. 정인지가 제가 아무리 세도를 하기로 우리를 어찌한단 말씀이요?”
하고 그래도 부인은 호기 있는 소리를 한다.
“누가 정인지가 무섭다나?”
하는 현수의 말에 부인은,
“그럼 누가 무섭소?”
하고 약간 성을 내며,
“수양 대군인들 무서울 것이 무엇이요? 다른 사람들은 부원군이 되면 무서운 사람이 없 다던데. 대감은 왜 그리 못나시었소? 그래, 그러면 중전(中殿)께서 저렇게 대감이 도와드리 기를 바라고 계시는 데도 수양 대군이 무서워서 가만히 계실 작정이요? 아버지 정리에 어떻게 그러신단 말씀이요?”
하고 현수를 몰아세웠다.
“그러니 어떻게 한담. 수양 대군이 내 말 들을 사람인가. 공연히 섣불리 그런 소리 하다 가는 봉변이나 했지 무슨 소용 있나. 다 운수지 운수야, 천운이 수양 대군께로 돌아가는 것을 어찌하나. 설마 목숨이야 어떠하겠소. 비전하한테도 가만히 계시기만 하라고, 수양 대군 눈밖에 났다가는 그야말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멸눈지환을 당한다고 말씀이나 하구려.”
하고는 도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부인은 애가 타서 공 튀듯 하였다. 따님의 장래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남편이 어쩌면 저렇게 못났는고 하고 원망스러웠다.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하리. 대감이 아니하면 누가 이 일을 막아내리. 멸분지환? 그래 금 상마마가 선위를 하시고 수양이 들어 앉으면 대감 댁은 멸문지환을 안 당할 줄 아시오? 그때야말로 멸문지환을 당한다나 대감같이.…… 무골충이가 어디 있단 말이요? 사내가 왜 한 번 나서서 수양의 역모를 막아내지를 못하고 무서워! 무서워! 가, 다 무엇이요? 부원군이 되어도 세도 한 번 못 부려 보고 무서워, 무서워하다가 멸문지환만 당하게 되니 이런 기막힐 데가 어디 있소?”
하고 발을 둥둥 구른다.
“허허, 글쎄 이게 무슨 요망이람. 이 밤중에 울기느 왜 울어? 멸문지환이란 소리는 왜 자꾸 외워? 방정맞게.”
이렇게 내의 싸움만 벌어지고 말았다. 송현수는 아무책동을 할 기미를 보이지 아니한다.
송현수가 그렇게 생각하면 부인도 어찌할 수 없을 줄을 알고 기운이 줄었다.
그러나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가하여 비자 내근내(乃斤乃)를 부러 돈과 쌀을 주어 소경 나갈두(羅乫豆)에게로 문복을 보내었다. 한 번 신명의 뜻이나 알아보고 나서 일이 될 듯하다면 그 점괘를 가지고 한 번 더 대감을 졸라 보자는 뜻이다.
“아직 밟지도 아니하였는뎁시오?”
하고 내근내는 부인의 명령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밤은 아직 오경도 아니 친 때다.
내근내근 부원군 부인의 말을 들어 이 일이 지극히 크고 은밀한 일인 줄을 알고는 자기가 그러한 일에 관계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면서 가마를 타고 뒷문으로 나아가 늙은 아비를 따라 사직골 나갈두의 집으로 간다.
나갈두는 당시 명복으로 모든 상류 가정의 부인들의 신임을 받아 문복하는 사람이 접종하는 판이었다.여량부원군 송현수 부인도 나갈두의 단골 되는 귀부인 중의 하나다. 내근내근 어리어서부터 부인의 심부름으로 이 집에를 다니었다.
소경 나갈두는 깊이 든 잠을 깨어서 내 그내를 불러들였다.
“어디서 오시어소?”
하고 소경은 의심스러운 듯이 내객에게 물었다.
“아니 저 부원군 댁에서 왔는데.”
하는 것은 소경의 아내다.
“오, 내근내야?”
하고 나갈두는 반가운 듯이 웃으며 소경이 흔히 하는 버릇으로 손을 내어 밀어 저편의 몸을 만지려 든다.
내근내는 나갈두의 손을 피하면서,
“부원군 부인 마님께서 보내시어서 금한 일로 왔으니 어서 소새나 하셔요.”
하고 책망하는 듯한 어조다.
“무슨 문복하실 일이 있나?”
하고 소경은 약간 겸연쩍어한다.
“그저 젊은 여편네 소리만 나면 사족을 못쓰지. 아이 흉해라, 병신 고운 데 없다고.”
하고 마누라가 내근내를 향하여 눈을 실쭉하며 비가지를 긁는다. 나갈두의 아내는 좀 자색이 있고 천성이 음탕하여 소경 남편에게는 결코 충성된 아내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안평 대군 궁 비자로서 안평 대군의 온 집안이 멸망하는 통에 어떻게 빠지어 나와서 돈 잘 번다는 장님 나갈두의 마누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귀한 가문에서 생장하였다 하여 마치 제가 귀한 사람이나 되는 듯이 남에게 찾아오는 사람에게 자랑하고 교만을 부리었다. 이 음탕한 계집에게는 항상 한둘씩 간부가 있어 남편이 앞 못보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다만 몸만 훔치어 주는 것뿐 아니라 나갈두가 벌어 들이는 전곡도 훔치어 내었다. 그래도 노래에 혹한 젊은 계집 앞에 나갈두는 정신이 없었다.
갈두는 소세하고 아내를 시켜 싸서 매달았던 돗자리를 내어 깔게 하였다. 이 돗자리는 어느 대가에서 문복하려 올 때에만 내어 까는 것이다. 그러고 수양 대군 부인이 해주었닥 자랑하는 화류 점상과 궁중에서 나왔다는(하사하신 것은 아니나 어찌어찌 굴려나온 것이다.
오동 향로향합과 자주 명주주머니에 넣은 거북.
상은 남향하여 놓고 소경은 상을 앞에 놓고 앉아서 거북을 두 손에 받들어 들었다 향로에 서는 향연이 피어 올라서 상 위에 양폰에 가득 담은, 내근내가 가지고 온 얼음 같은 백미와 그 앞에 은빛같이 닦아 놓ㅇㄴ 놋종발 청수 그릇 위에 구름같이 안개같이, 어리어 신령을 청하여 내린다.
천지신명에 묻는 말씀은 이것이다.
지금 조정에 세도 잡은 간신이 있어서 신기(神器)를 엿보오니 장차 어디로서 어떠한 충신 열사가 일어나서 외로우신 왕과 왕후를 돕사오리까 함이다.
“은밀히 은밀히.”
라고 하면서 이러한 소리를 비자에게 통하고 노방에서 매복하는 소경과, 그 소경의 마누라에게까지 통하느 것은 진실로 여자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따님이신 왕후를 생각하기에 골돌한 송현수의 부인은 남편인 대감을 믿을 수 없게 된 때에 천지신명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갈두는 이 심상치 아니한 큰 점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할꼬 하고 거북을 두 손으로 움키어 받들어서 피어오르는 향연 위에 이윽히 머물게 하였다. 향불 연기는 점점 더 맣이 거북을 싸고 올랐다.
내근내는 거북을 향하여 경건하게 일어나서 네 번 절 하였다.
나갈두는 이윽히 거북을 공중에 흔들더니 문득 한 손으로 점상을 땅 하고 치며,
“사흘 안으로 거사를 하여야 한다. 사흘이 지나면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하는 괘라, 궁중에 곡성이 진동하고 나라의 주인이 바뀌리라 하는 것인데 나라의 주인이 바뀌면 국척(國戚)인들 무사할 리가 있나. 상감 외갓댁인 화산 부원군 댁과 곤전마마 친정되는 여 량부원군 댁에 큰 화가 및 겠다 하는 괘요.”
하고 나갈두는 신명의 뜻을 전하는 어조를 끊고 보통 어조로,
“나라에 큰 일이 있는 때에는 신하가 점을 이니 하는 법이야. 점해서 쓸 데가 없거든, 정말 임금께 충성이 있으면야 오는 일을 미리 알아 보아 무엇하나. 수인사(修人事)대천명(待天命)으로 죽든지 살든지 할 일을랑 하고 보는 법이야. 일이 될까 아니 될까 점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어, 세상도 말세로군.”
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거북을 손으로 두어 번 쓸어 보고 자주 명주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내시들의 내통으로 정 인지가 왕에게 한 말을 들어 알았다. 그러고는 주먹을 들어서 서안을 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이 망하는구나!”
금성 대군은 독자가 이미 아시거니와 왕의 숙부요, 수양 대군의 친아우님이다. 불행히 충의(忠義)와 강직(剛直)을 가지고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서 하루 가슴 끊지 아니할 날이 없다. 왕께 충성을 다하려면 골육의 형을 원수로 삼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안평 대군이 돌아간 뒤로 종일 중에 그래도 수양 대군과 겨눌 사람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금성 대군 한 분밖에 없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수양 대군은 벌써부터 금성 대군을 미워하여 가만히 사람을 놓아 그 행동을 살피어 안평 대군 모양으로 처치해 버릴 기회만 엿보았 다 요전에 금성 대군 궁에서 . 화의군(和義君)이며 누구누구와 사연(射宴)을 배풀었다 하여 처벌을 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들은 말과 같은 말이 있을 줄을 금성 대군은 미리 짐작하였었다. 만일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 하면 금성 대군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금성대군은 신전에 아침도 아니 먹고 수양 대군 궁으로 달려갔다. 금성대군이 수양 대군 궁에 가기는 설에 세배 간 뒤로는 처음이다. 그래서 금성대군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여름 해가 아직 뜨기고 전에 달려드는 것을 보고 수양 대군 궁 사람들은 놀랐다.
금성 대군은 형님인 수양 대군의 붙들어 앉히고,
“형님, 어저께 정인지란 놈이 상감께 선위하시기를 청하였다. 하니 이것이 정가 놈의 생각이요? 형님이 시키신 게요?”
하고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발하였다.
수양 대군은 안색을 변하며,
“네가 미쳤느냐. 그게 웬 소리냐.”
하고 뚝 잡아떼었다.
“그렇거든 오늘로 정가를 삭탈 관직하고 내어 베이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정가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라 하더라도 세상에서는 형님이 시키신 것으로 알 것이요. 워낙 정가란 할 수 없는 소인(小人)이요, 간신이요. 그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형님까지도 누명을 쓰시리다. 어떡 허실테요? 형님의 대답을 듣고야 가겠소이다.”
하고 금성 대군은 따지었다.
“상감 처분이지. 정인지가 대신이어든 낸들 어찌하나.”
하고 수양 대군은 어디까지든지 모르는 체한다.
금성 대군은 형님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하는 눈으로 수양 대군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형님이 그런 간신 놈들의 꾀에 넘어서 외람한 뜻을 두면 우리 집안은 망할 것이요. 금왕의 숙부로서 군국 대권을 다 잡으시었으니 무엇이 부족하단 말씀이요? 형님이 만일 잘못된 뜻을 품으시면 천하가 명고이공지할 것이요. 나부터도 형님의 목에 칼을 겨눌 것이외다.”
하였다. 금성 대군은 수양 대군이 잡아떼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지마는 그 이상 더 말해야 쓸데 없을 줄 알고 다만,
“형님, 매양 주공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시오? 부디 주공이 되시오. 그러고 충의를 모르는 간신밸랑 모두 물리 치어 버리시오.”
하고 물러 나왔다.
금성 대군이 다녀간 뒤에 수양 대군은 대단히 불쾌하였을 뿐더러 또 놀래었다. 왜 불쾌한 고 하면 안평 대군이 없어진 뒤로 누가 감히 자기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더니 나이로 말하면 십 사오년이나 어린 금성 대군이 얼러대는 품이 안평 대군 이상인 까닭이다. 괘씸한 것을 보아서는 다장 한 마디로 호령하여 버리겠지마는 금성 대군의 말이 옳고 보니 옳은 말의 힘에는 수양 대군의 패기도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허, 그것도 없애버려야 되겠는걸!”
하고 수양 대군은 나가는 친 아우 금성 대군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안평 대군을 죽이자고 정 인지, 권람, 한명회의 무리가 진언할 때에는 골육의 정도 생각하고 세상의 물도 염려가 되었으나, 한 번 이러한 일을 저질러 놓은 뒤인 오늘날에는 그것 다 우스웠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그러한 일은 예사요’하고 권가, 한가들의 말이 과연 그럴듯하게 돌리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라도 정 인지가 어저께 경회루에서 벽좌우하고 왕께 아뢰었다는 말이 이렇게 빨리 외간에 흩어진 것이 놀랍지 아니할 수 없다.
“원, 누가 말을 내었담.”
하고 수양 대군은 매우 초조한 빛을 보인다. 왕이 사람을 시키어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에게 정 인지의 말을 전하였는가. 그렇다 하면 그 심부름은 누가 하였을까. 이 일을 금성 대군 외에 또 누가 아는가. 수양 대군은 이 생각 저 생각에 매우 신기가 불평하여 조반도 자시는 듯 말 듯하였다.
부인 윤씨가 수양 대군이 수색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나으리 무슨 근심이시오? 천운이 나으리께 돌아 왔거든 무슨 근심이시오? 대사를 하시는 양반이 소소한 걱정을 버리시오.”
이것은 수양 대군이 무슨 근심을 할 때마다 그 부인이 격려하는 말이다. 더구나 ‘천운이 나으리께 돌아 왔거든’ 하는 것은 입버릇 모양으로 반드시 하는 말이다. 부인의 이 말은 미상불 수양 대군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수양 대군은 그렇게 굳굳한 사람이면서도 어느 한편 구석에는 내약한 데가 있었다. 때로 그는 냉혹하기 철석 같아도 때로는 또 더운 눈물을 흘리는 이였다. 윤씨 부인이며 정가, 한 가, 권가 같은 이들이 돕지 아니하였던들 그는 제왕의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하고 외로운 조카님을 도와 주공을 본받았을는지도 모른다.
“벌써 누설이 되었구려.”
하고 수양 대군은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도 잠간은 놀란다.
수양 대군은 금성 대군이 와서 하던 말을 하였다.
“그거 누설되었기로 걱정하실 것 있소? 성사하면 더 말할 것 없거니와 만일 일이틀어지면 정 정승이 한 말이니 정 정승께 밀으시오그려.”
하고 부인은 태연하다.
수양 대군은 부인의 바르지 못한 생각이 불쾌하여 입을 다물어버리었다.
식후에는 한남군과 영풍군이 와서 금성 대군 모양으로 정인지를 엄벌하고 수양 대군은 어디까지든지 주공이 되어서 어리신 상감의 몸과 자리를 옹호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다음에는 또 송현수가 와서 그와 같은 뜻으로 수양 대군에게 간청을 하였다. 송현수는 부인의 조름을 못이기어 우선 수양 대군한테 한 번 말이나 하여 보자고 오기 싫은 길을 온 것이다.
수양 대군의 화는 상투 끝까지 올랐다. 은밀하게 한다는 노릇이 이렇게 그날 밤으로 누설이 되니 화가 아니 날 수 없다. 오늘 안으로 몇 놈의 모가지가 날아나고야 말 것을 수양 대군은 생각하였다. 그 눈에는 살기가 있다.
한남군, 영풍군 도수양 대군을 만나 보고 나서는 분개하기는 하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의 외숙권 자신도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일이 되어 가는 양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많고 부인의 지혜를 가진 혜빈도 섣불리 이 사람 저 사람과 뜻을 통하다가 발각이 되면 한남군, 영풍군 두 분 아울러 자기 삼 모자가 화를 면하지 못할 뿐더러 왕께까지도 누가 미칠 것을 알았다.
오직 따님을 생각하고 여량부원군 부인이 밖에서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궁중에서는 내시 김 충 등과 궁녀 막산 등이 발을 동동 굴러 애를 썼다. 그러나 경제가 엄중하고 염탐이 많아서 비록 뜻이 같다 하더라도 서로 의사를 통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여편네들 이 새에 나서서 입으로 말을 전하였으나 힘 있는 대감네들이 겁을 집어먹고 쉬쉬 하니 수양 대군을 반대하여 왕을 옹호하는 큰 운동을 일으킬 가망은 없었다.
이래서 온 하루 동안이나왔다 갔다 하던 끝에 세워진 계획이란 것이 무당을 시키어서 수양 대군과 정 인지가 죽어버리도록 예방을 하는 것, 인왕산에 사람을 보내어 칠성과 산천에 왕과 왕후를 위하여 기도를 올리는 것 등이요, 가장 유력한 계획이라 할 것이 지중추 조유례(知中棰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 등이 중심이 되어 일변 장사를 사서 수양 대군과 정 인지 등을 습격하고 일변 격문을 돌리어 천하에 민심을 일으키자는 것인데 금성 대군을 머리에 떠받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다 준비도 되기 전에 김득상(金得祥)이 어제 밤 밖에 나갔던 것이 발각이 되고 경회루에서 정 인지가 왕께선위를 청하는 말씀을 아뢸 때에 먼 발체 모시고 있던 내시들과 궁녀들이 왕과 왕후의 목숨을 해하려 음모를 하였다는 혐의로 엄형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김 득상은 대장부라 뼈가 부러지어도 실토할 리가 없지마는 젊은 궁녀막산이 가 매에 못이기어서 왕후의 명으로 김 득상에게 말 전한 이야기며, 늙은 상궁 하석, 고렴석의 명으로 궁녀 수동과 함께 기둥 뒤에 숨어 정인지의 말을 엿들었단 말이며, 그 밖에 인왕산에서 기도하는 말, 수양 대군과 정 인지를 저주한다는 말까지 다일러 바치어버렸다. 다만 왕께서 시키더니 하여 시키시었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그것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또 조 유례, 성 문치 등이 하는 계획은 막산이가 몰랐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막산이가 실토하는 중에 든 사람들은 모조리 붙들려버렸다.
사건은 이만하고 말았을 것을 소경 나갈두(羅乫豆)의 처 변씨(邊氏)가 그 남편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그 정부요, 금부(禁府)에 나졸(邏卒) 다니는 홍갑룡(洪甲龍)에게 여량부원군 댁에서 이러이러한 일로 점치려 왔더란 말을 고하여서 내근내(乃斤乃)가 붙들리게 되고, 왕의 유모 아가지(阿加之), 권자신의 비자 아지(阿只), 불덕(佛德), 무녀 내은(內隱), 덕비(德非), 용안(龍眼) 등이 인왕산 기도소에서 붙들리게 되었다.
조유례, 성문치(成文治) 등은 일이 탄로될 줄을 알고 조 유례는 장사 김득성(金得誠)을 구 종 모양으로 복색을 시키어 데리고 수양 대군을 찾아가고, 성문치는 장사 윤갯동(尹㖋同)을 데리고 정 인지를 찾아 갔다. 이것은 기회를 엿보아 각각 하나씩 때려 죽이자는 꾀다.
수양 대군은 조 유례가 금성 대군 문객인 줄을 알기 때문에 보지 아니하고 궁노를 시키어 그가 데리고 온 구종으로 차린 김 득성을 묶어서 죽도록 때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조 유례를 욕보이어 금성 대군으로 하여금 분통이 터지게 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무예와 여력이 파인한 김 득성은 감추었던 철여의를 내어둘러 달려드는 수양 대군 궁노들을 수십 명이나 두들겨 누이고,
“역적 수양 대군 나서라!”
소리를 치며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김 득성이는 임금의 원수와 아우(김 득상)의 원수를 한꺼번에 갚으려는 듯이 성난 범 모양으로 철여의를 두르며 수양 대군 궁 안마당으로 뛰어 들어 간다. 만일 수양 대군이 득성의 눈에 번뜻 보이기만 하였던들 득성의 성난 철퇴에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 대군은 벌써 뒷문으로 도망하고 부인과 두 아들과 맏며느리 한씨(우의정 한 확의 딸)와 여러 비복이 크게 놀래어 좁은 구석을 찾았다.
그래도 부대 부인 윤씨가 태연히 대청에 나서서,
“이놈! 어떤 놈이완데 어디라고 무엄하게시리…… 이봐라, 저놈을 끌어내어 단개에 때려 죽이지를 못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른다.
“어머님! 어머님!”
하고 열 아홉 살 되는 맏아드님(이름은 숭(崇)---후에 왕세자 된 뒤에 이름은 장(暲)---이니, 후에 덕종대왕(德宗大王)--이라는 추숭을 받았다)은 황황하게 어머니 윤씨의 소매를 끌어 만류하고 일곱 살 되는 둘째 아드님(이름은 평보(平甫)--아버지 수양 대군이 왕이 되신 뒤에 이름은 황(晄)--세조 대왕의 뒤를 이어 예종대왕(睿宗大王)--이 되시었다.)은 어머니의 치마에 매어달리어 득성을 바라보며 울었다.
부인은 두 팔로 두 아들을 안으며,
“이놈 어디 한 걸음만 올라서 보아라 천벌이 내릴 터이니!”
하는 소리에 득성은 기운이 꺾이었다. 어차피 인제는 죽는 몸이니 닥치는 대로 수양 대군 식구를 때려 죽이리라 하였더니 부대 부인 위풍에 눌리어서 수양 대군을 찾는 모양으로 뒤꼍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젖먹이 (나중에 월산대군(月山大君))를 안은 수양 대군 맏며느님 한씨를 만나 철퇴를 들었으나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미처 뒷문을 다 나서서 못하여서 밖에 매복하고 섰던 수양 대군 궁 호위하는 삼십여 명 갑사(甲士) 한 떼의 포위를 받아 반이나 죽도록 얻어맞고 잔뜩 결박을 지웠다. 조 유례는 벌써 수족을 묶이어 문 밖에 넘어지어 있다가 득성이가 갑사들에게 끌리어 나오는 것을 보고,
“수양은 잡았지?”
하고 물었다.
득성은 못잡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흔들 때에 이마며 두 귀 밑에서 흐르는 피가 빗방울 모양으로 좌우로 흩어진다.
“으으응! 역적을 놓치었구나!”
하고 으쩍 깨문 것이 조 유례 자기의 혓바닥이다. 수양 대군을 못 죽이었으니 자기는 죽는 몸이어니와 죽기 전에 국문을 받으면 혹시나 정신 없는 소리로라도 금성 대군을 부를까 겁이 나서 차라리 말ㅇㄹ 못하도록 혀를 끊어버린 것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 빈발이 반백이나 된 조 유례, 그는 결코 국은을 많이 받아 영달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내려 반 백인 수염을 적시고도 땅바닥을 물들이는 피는 그의 임금께 대한 충성이다.
정인지가 왕께선위를 청한 것보다는 조 유례가 수양 대군 궁에 야료한 것이 큰 변이다.
입으로 피를 흘리는 조 유례와 전신이 도시 피투성이가 된 김 득성은 반은 끌리고 반은 채워서야주개와 황토마루를 지나 의금부(義禁府)로 왔다. 끌려 가는 그들의 다리는 두 마디 세 마디로 부러진 듯하여 바로 서지를 못하였다. 아이들이 구경 삼아 뒤를 따랐다.
금부에는 벌써 성문치(成文治)와 윤갯동(尹㖋同)이 역시 반생반사가 되어 분들려 와 있다가 조 유례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성문치도 장사 윤 갯동을 데리고 정인지를 찾아 갔으나 정인지 집 대문과 사랑에는 수십 명 갑사가 옹위하고 있어 사람을 들이지를 아니하므로 성 문치는 윤 갯동을 데리고 병문 어귀에 숨어 있다가 정인지가 평교자를 타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 들었으나 정인지는 얼른 뛰어 내려 길갓집 행랑으로 뛰어 들어 가고 중과부적하여 붙들려온 것이다.
이튿날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 좌찬성 이사철(左贊成李思哲), 우찬성(右贊成) 이계린, 좌참찬(左參贊) 강맹경(姜孟卿)이 비청에 모여 이번 사건을 의논할제 영의정 수양 대군과 좌의정 정 인지는 일부러 의논에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직접 사건 관계자인 까닭인 것도 있거니와 또 하나는 어저께, 당한 일이 자못 창피한 까닭이기도 하다. 뒷문으로 도망한 수양 대군이나 길갓집 행랑에 숨은 정인지나 결코 남ㅂ기 부끄럽지 않지 아니하였다.
수양 대군과 정인지가 비록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하다 하더라도 여기 모인 자가 다 그들의 심복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직 한 확이 정 인지와 공명을 다투는 일은 있으나.
수양 대군과 정 인지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왕과 왕후에게까지 돌리고 싶었으나 왕은 사실상 이번 일을 아시지도 못할 뿐더러 아직 일반의 물론을 두려워하여 동지(同知) 중추(中樞) 원사(院事)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를 역적으로 몰고 그들이 한남군(漢南 君) 어, 영풍군 선(永豊君璇) 등과 부동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왕위에 올리려고 한 것같이 꾸미었다.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수양 대군과 정 인지가 욕을 당하였다는 소문은 번개같이 퍼지어 ‘고소하다’ ‘통쾌하다’는 생각을 주었기 때문에 만일 이제 조 유례, 성 문치를 대신할 습격한 죄로 다스린다 하면 세상의 동정은 도리어 조, 성동에게로 돌아 가고 수양 대군과 정인지는 불이익한 처지에 서게 된다. 그러나 조, 성을 역적으로 몰면(그렇게 백성의 눈을 속일 수가 있을까)몰지 못할 것도 없을 뿐더러 자기네는 도리어 왕을 옹호하는 충성으로서 왕을 위하여 조, 성의 욕을 당한 것으로 볼수가 있을 것이니,이야말로 저 편의 화살로 저편을 쏘는 격이다 하는 것이 권람, 한명회의 헌책이었고, 또 정부에서도 그럴듯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리하여 조 유례, 성 문치는 고만이야 왕을 해하려던 음모자로 몰리고 혜빈 양씨, 금성 대군, 한남군, 영풍군등은 수양 대군한테 찾아 갔던 죄로 조, 성의 머리라 하여 삼남 각처로 귀양을 보내었다. 전혀 애매한 사람을 차마 죽이지는 못한 것이다.
윤갯동(尹㖋同), 김득성(金得誠), 김득상(金得祥), 왕의 유모, 이오(李午)의 처아가지(阿加之), 궁녀 하석(河石), 고염석(高廉石), 김수동(金壽同), 김막산(金漠山), 내시 이 귀(李貴), 김인평(金印平), 김충(金忠), 소경 나갈두(羅乫豆), 송현수(宋玹壽)의 비자 내근내(乃斤乃), 권자신(權自愼), 비자아지(阿只), 불덕(佛德), 무당내은(內隱), 덕비(德非), 용안(龍眼) 등은 다 사형을 받았다.
이번 통에 요행으로 벗어난 것은 송현수와 권자신이니 이것은 부득이하여 면하여진 것이다. 왕이나 왕후가 수양 대군을 없이하기 위한 일이면 왕의 외숙과 장인이 참예도 하려니와 금성 대군의 무리가 왕을 없이하려고 하는 일에 그들이 관계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 알 수 없는 일은 이번 통에 영양위 정종(零陽尉鄭悰)을 유배(流配)한 일이다.
어느 편으로 생각하더라도 그는 이번 사건에 관계한 형적도 없고 또 관계할 리도 없건마는 청천벽력으로 순천부(順天府)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 종이 귀양길을 떠나기 전에 경혜공주(儆惠公主)는 오라버님이신 왕께 마지막으로 하직이나 사뢰려 하였으나 국가의 죄인(?)으 로는 그러한 특전을 허함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 어머니의 피를 나눈 단두 동기인 왕과 공주는 남북 천리에 이별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와 은 유폐(幽閉)되나 다름이 없었다. 궐내에서도 마음대로 출입을 못하시고 어느 한 전각에 계시라는 강제를 받아 왕은 항상 사모하옵는 조부 세종 대왕께서 즐겨 거처하시던 자미당(紫薇堂)에 숨으시와 왕후와 마주 보시고 우시는 세월을 보내시게 되었다---그러한 세월도 며칠이 없었다.
금성 대군은 순흥부(順興府)에, 영양위는 순천부(順天府)에……이 모양으로 왕의 편이 될 만한 이들은 다 먼곳으로 치어버림이 되었다. 왕의 곁에 모시던 낯익은 내시와 궁녀들조차 다 비평에 죽어버리니 궁중은 왕과 왕후에게는 지옥보다도 더욱 적막하였다.
“상감마마, 모두 소인이 경솔하와……”
하고 왕후 송씨는 당신이 이번 일을 저지르신 것을 왕의 앞에 후회하고 운다.
“이만만 하고 말겠소? 이보다 더한 일이 올 터이지. 그렇게 눈물을 흘려서 되겠소.마음을 철석같이 가지고도 견디어내이기가 어려울걸. 그렇지마는 불서(佛書)에도 인생은 헛된 것이 라 하였고, 또 속담에도 우리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 하였으니 꿈이 오래면 얼마나 오래요?
그저 가위 눌린 줄 알고 지납시다그려.”
왕은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마치 인생의 쓴 맛 단맛을 다 보고난 노성한 사람 모양으로.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태연한 생각으로 계실 수는 없었다. 원래 인자하신 성품에 왕후가 슬퍼하시는 것을 보실 때에는 웃는 얼굴을 지으시고 불경 생각도 하시어 태연하신 태도로 위로 하는 말씀도 하시지마는 그것도 한때지, 혼자 촛불을 대하실 때나 어원(御苑)에 새 소리를 들으실 때에도 눈물이 앞을 가리움을 금하실 수가 없었다. 조부님 생각, 아버님 생각, 용모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불쌍하신 어머님 생각, 남편라 죄없이 먼 시골에 귀양간 누님 생각, 애매한 원혼이 된 근시하던 내시와 궁녀들 생각, 믿던 숙부 수양 대군 생각, 막막한 앞길, 가엾은 왕후의 신세, 모두 불길한 생각, 피눈물을 자아내는 생각뿐이다. 밤에 주 무시다가도 경회루에서 정 인지를 꾸짖으시던 꿈을 꾸시고는,
“이놈! 늙은 놈이! 그것이 임금 섬기는 도리냐.”
하고 소리를 지르시고 목으 ㄹ놓아 우시었다.
“상감, 꿈이시오, 꿈이시오.”
하시고 왕의 옥체를 흔들어 깨우시는 왕후도 울음을 참으시노라고 입술을 물으시었다.
“내가 칼을 빼어서인지놈을 치려는 서슬에 나를 깨우시었구려.”
하시고 왕은 아까운 듯이 입맛을 다시었다.
잠을 깨어서 가만히 눈을 감고 계시노라면 죽어버린 늙은 김충, 김인평, 이귀 같은 내시들이며 수동, 막산 같은 젊은 궁녀들의 모양이 방안에 어른거리는 듯하여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으신다. 그러다가는 수양 대군과 정인지가 횃불을 돌리고 칼 빼어 든 군사를 데리고 두분이 주무시는 침전으로 들어와 두분의 목에 칼을 겨누는 모양도 보인다.
왕은 이러한 불쾌한 환상(幻像)을 떼어버리려고 베개 위에서 머리를 흔드시고, 흑은 잠드신 왕후를 흔들어,
“마마마마, 자오!”
하고 깨우시기도 한다.
그러한 때에는 두 분 사이에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아니 할 만한 말씀, 어리신 때에 지내시던 일, 혼인하신 후에 생긴일 중에도 유쾌하던 일을 골라서 말씀하시나 어느덧 차고 무서운 현실 문제에 이야기 끝이 돌아와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그리고는 서로 위로하시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는 피차에 저편이 먼저 잠드시기를 기다리시었다.
한 번 왕께서 어떤 산 밑, 강가에 정결한 초당을 지으시고 농가 생활을 하신다는 꿈을 꾸 시다가 깨어서 왕후를 깨워 그 꿈 말씀을 하시고는,
“그런데 꿈에 그 집에 마마는 아니 왔거든. 그 어째 아니 왔을까. 내가 있는데 마마가 아니 올 리가 있소?”
하고 웃으신다.
“새로 집을 짓는 꿈을 꾸면 흉하다는데.”
하고 왕후는 민간에서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였으나 그런 말을 아뢰지 아니하고,
“김씨는 꿈에도 상감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어요?”
하시고 잠간 질투하시는 생각을 발하였다. 김씨라 함은 왕후와 동시에 권완(權完)의 딸과 함께 후궁으로 들어온 이니 김사우(金師寓)의 딸이다. 왕은 김씨를 특히 사랑하시는 까닭이다. 김씨는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웠던 까닭이다.
“마마, 내가 왕위를 버리고 일개 농부가 된다면 마마는 어찌하려오?”
하고 왕은 더욱 잠이 달아나시는 모양으로 왕후께 농담 삼아 말씀하신다.
“상감께서 농부가 되옵시면 소인은 지어미가 되지 아니하오리까……그런데 왜 그러한 흉한 말씀을 하옵시는지.”
왕후는 심히 염려되시는 모양이다.
“농부 된다는 것이 흉한 말일까. 나는 왕가에 태어나지 말고 농부의 집에 태어났으면 하오. 농부들 속에야 수양 숙부와 같이 무정하고 정인지 모양으로 고약한 사람이 있을라고.
산에고 들에고 마음대로 다니고 백반종탕이라도 마음 편히 끓여 먹고 앉았는 것이 도리어 살찔 것 같단 말이요.”
왕의 말끝은 흐린다.
“그야 상감께서는 인자하시와 백성을 생각하시기에 그러하시거니와……어찌하여 그런 슬픈 말씀만 하옵시는지.”
하시고 왕후는 지극히 슬퍼하시는 모양으로 몸을 상감 무릎 위에 엎드리신다.
왕은 손을 들어 왕후의 등을 만지시며,
“농담이요. 부러 하는 말이요.”
하고 위로하시나 왕후의 등을 만지시는 손은 떨린다.
왕은 일래에 심히 수척하시었다. 밤에 잠을 잘못 주무시고 수라도 원체 많이 잡수시는 편은 아니시지마는 요새 며칠 동안에 술으 ㄹ드시는 듯 마는 듯하시었다. 그래야 왕후 밖에는 왕이 이러하심을 근심하여 드리는 이조차 없다.
내시나 나인이나 모두 권람, 한 명회가 고르고 골라서 드린 것들이니 왕이나 왕후를 편안 하시게 모신다는 것보다는 두 분의 동정을 염탐하고(설마 그렇기야 하랴마는)도리어 일부러 두 분의 심사를 불편하시게 하는 듯하다. 그렇게까지는 아니 간다 하여도 지밀(至密)에 있 는 이로는 두 분께 대하여 정성을 가지는 이ㅡㄴ극히 적었고 설사 있다 하더랃 그러 빛을 드러내는 것은 생명이 위태한 일이었다.
이렇게 불쾌하고 답답하고 외롭고 괴로운 세월을 보내시는 왕에게는 날마다 정 인지, 신 숙주(申叔舟), 이계전(李季甸), 권람(權擥), 이사철(李思哲)의 무리가 번갈아 들어와서, 혹은 달래고, 혹은 타이르고, 혹은 가장 충신인 체하고 울며 간하고, 혹은 위협하여 수양 대군에게 선위하시는 길 밖에 없는 것을 귀찮게 아뢰인다
“또 그 말이야?”
하고 왕은 마침내 화를 내시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저 무리는 예정한 계획이라 화를 내시거나, 말거나 진노하시거나 말거나 그것을 교계할 바가 아니다. 왕을 귀찮으시게 하여 자리에서 물러나시게만 하면 그만인 듯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선위하시게 한 공을 어떤 사람 하나에게만 돌리는 것이 못할 일이니 나도 나도 mr공에 한몫 끼이자 하는 것이 이 충신들의 심리다. 이대로 오래 감녀 칼을 품고 달려 들어 왕으 ㅣ목을 베어들고 수양 대군 앞에 공 자랑을 할 사람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너무 남보다 뛰어나는 공을 세우려다가 자칫하여 모가지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바로 전 사람이 왕께 여쭌 말씀정도보다 한 걸음만큼 더 나가게 하는 것이 약은 것이었다. 그래서는 갑보다는 을이 더 들으시기 어려운 말씀을 왕의 앞에 아뢰면 병은 을 보다 한 층 더 심하게 하고 다시 갑은 병보다 더 심하게 하여 이렇게 끝없이 들락날락 점점 더 무엄하게 되었다.
왕께서는 처음에는 괘씸하게도 무섭게도 생각하시었으나, 나중에는 그 무리가 모두 파리떼와 같고 모기떼와도 같아서 귀찮고 성가시기만 하시었다.
저놈들도 사람인가. 인형은 썼지마는 모두 개, 돼지만도 못한 놈들이다. 모두 더럽고 염치 없고 음흉하고 간교하고 은혜 모르고 야멸치고…… 평소에 그렇게 번드를하게 공자, 맹자 다 된 듯이, 이윤(伊尹), 주공(周公) 다 된 듯이 글던 놈들이 일조에---일조에---일조에 똥 묻은 개가 다 된 것을 생각하시면 도리어 우스꽝스럽고 통쾌하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얼마큼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도 하시었다.
아무리 여러 신하들이 성가시게 선위하시기를 아뢰어도 왕께서는 한결같이 물리치시었다.
그러나 하루는 정 인지가 왕께 최후의 경고를 하였다. 그것은 왕께서 만일 자진하여 선위하시지 아니하시면 ‘국가를 위하여’ 강제로라도 선위하시도록 할 터이니 생각하시라는 것이다. 이때에 정 인지는 몸소 들어오지 아니하고 신숙주를 시키어서 말씀하게 하였다. 정 인 지가 몸소 예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킨 것은 실로 무례하였으나 그는 병탈을 하였고 또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이제는 왕께서 그런 것을 책하실 힘이 없으시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정 인지의 뜻을 아뢰고 나서는 자기 뜻으로 선위하심이 왕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가장 온편한 계책임을 아뢰었다. 다년 외교관으로 닦은 변설로 신 숙주는 어리신 왕의 뜻을 움직임이 컸다. 그의 말은 마치 충성된 신하로서 임금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부득이한 처분을 청하는 은근한 태도를 가지었다. 은근한 대도만 하여도 왕께는 한없이 고마웠다. 그동안 왕께 진언(進言)한 대관들은 군신의 분의를 지키는 것은 처음뿐이요, 왕께서 자기네 말을 거절하실 때에는 가장 무엄한 태도와 말로 지존을 위협하였다. 인정 반복이 어찌하면 이대도록 심하랴 하고 왕은 우시었다. 그런데 신 숙주는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모야, 귀에 거슬리는 말은 아니하였다.
“저놈인들 내게 무슨 충성이 있으랴.”
하시면서도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가리지 아니하는 모양으로 은근한 태도만이 고마웠다.
이때에는 왕은 신 숙주의 아뢰는 말씀에 화도 아니 내시고 가만히 듣기만 하시었다. 신 숙주도 왕께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근심에 잠기신 것을 뵈올 때에 가슴에 측은한 생각이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숙주의 청랑한 기억 속에는 왕께서 왕손으로 계실 때에 세종께서 품에 안으시고 집현전으로 오시와 자기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을 바라보시고,
“이 어린 것을 부탁한다.”
하시던 것이며 또 문종 대왕께서(문종 대왕은 신 숙주의 무리와는 군신지의가 있을 뿐 아니라 죽마고우라 할 만한 친구였다. 문종이 동궁으로 계실 때에 얼마나 신 숙주의 무리를 애경하시었다. 공부를 같이 하시고 사업을 같이 하시지 아니하시었던가)승하하시기 얼마 전에 그때 동궁이신 왕의 등을 만지며 눈물겨운 말씀으로,
“부탁한다.”
하시던 것이 역력히 생각난다. 그날 밤에 술이 대취하여 입직청에서 잘 때에 문종 대왕은 손수 어의로 숙주의 무리를 덮어 주시지 아니하였던가. 이것이 얼마나한 은혜며, 얼마나한 우정인고. 그때에 숙주는 잠이 깨어 눈물을 흘리며,
“이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안 버리고 어이하리.”
하고 성삼문과 함께 맹세하지 아니하였던가. 그것이 겨우 삼년 전 일이다. 그런데 신 숙주는 수양 대군의 수족이 되어 선왕에게 고명받아 도와야 할 왕을 보좌에서 떠밀어 내는 것으로 갚으려 한다.
나도 뜻을 정하였으니 다시는 “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수상(首相)과 좌상(左相)에게 말하오.”
하시고 신숙주를 내어 보내시었다.
신 숙주가 나간 뒤에 왕은 목을 놓아 통곡하시었다. 자미당 첩문을 나서다가 신 숙주는 왕의 곡성을 듣고 추연히 배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가 이미 어리된 바에 부질 없이 왕께 동정하는 양을 보이다가 장래에 화를 사는 것이 극히 어리석은 일인 것을 깨닫고 빨리빨리 걸음을 옮기어 무서운 데서 달아나는 사람과 같았따. 이날 이때의 말할 수 없이 슬픈 인상은 일생 신 숙주의 가슴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를 괴롭게 하였다. 그가 임종(그는 오래 살지도 못하였다)에 가장 괴로움 받은 것이 이때 생각이었다.
왕후는 불시의 곡성에 놀라시었다. 이날에 두 분은 마주보고 마음놓고 우시었다. 자미당에서는 느껴우시는 소리가 온종일을 두고 때때로 울려 나왔다. 비록 무심한 내시들과 궁녀들도 비감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에 왕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시었다---.
하룻밤을 울음으로 지내신 왕이 잠을 이루시기는 짧은 여름 밤이 다 지나고 훤하게 먼동이 뜰 때였다. 왕은 옷도 끄르지 아니하시고 안식에 비스듬히 기대신체 그만 잠이 들어버리신 것이다. 왕께서 잠드시는 것을 보고야 왕후께서도 눈을 붙이시려 하였다.
그러나 왕후는 마침내 잠이 드시지를 못하시었다. 그것은 왕께서 슬퍼하심의 심한 것이 염려될 뿐더러 또 왕께서 어떠한 결심을 하시었는지 조금도 발설치 아니하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어떠한 생각을 하시느냐고 물으시기도 어렵고 다만 한 마디 한 마디 눈치만 떠보려 하 나 왕께서는 털끝만치도 왕후에게까지도 뜻을 보이심이 없으시었다. 그것이 왕후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다만 왕후에게 한 가지 대견한 것은 이러한 큰 슬픔이 생긴 뒤로부터 왕이 왕후께 대한 애정이 눈에 뜨이게 깊어짐이다. 어리어서 혼인하신 까닭도 있지마는 왕과 왕후는 그리 정 다우신 내외분은 아니시었다. 왕후가 다소 샘을 가지시는 바와 같이 후궁 김씨에게 대한 애정이 더 많으시었다. 그러하던 것이 최근에 와서는 눈물겹도록 왕후를 측은히 여기시었다.
싱상 왕에게 이때에 애정이니 무엇이니 할 여유가 없으시었지마는 이러한 인생의 어려운 일, 아픈 일을 당하시매 본래 인정을 통찰하는 밝은 마음을 가지신 왕은 임금이라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지위를 뛰어나서 벌거벗은 사람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경계를 터득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정 인지 같은 사람까지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는 양반이시기 때문에 왕은 남보다 갑절 인생의 슬픔을 맛보시는 것이다.
왕은 인정이 많으심으로나 인생을 속 깊이 통찰하심으로나 시인(詩人)이시었다. 그러나 시인만 되시었던들 다행일 것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지어내기 어려운 큰 비극의 가장 비참한 주인공이 되시었다. 그래서 왕은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생의 슬픔을 감수할 여가가 없이 당신 스스로의 아픔과 쓰림을 감수하시게 되었다. 그 어리고 연연하고 인자하고 깨끗하고 죄없는 몸이---마음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수난(受難)을 하심은 너무 애연한 일이 다.
윤유월 초 십일. 가믐은 아직도 끝날 바를 몰라서 대궐 마당에 풀 입사귀도 노릇노릇 시들 지경이다. 대궐 추녀 끝에 지저귀는 참새들도 더위를 못이기어 입을 벌리고 할딱거리고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갔던 왜가리, 따오기도 헛걸음을 하고 어원 수풀로 돌아갔다. 더구나 날개도 흔들지 아니하고 마치 날개를 잊어버린 듯이 휘 공중에 떠도는 소리개의 백년 풍상에 다 떨어진 거무데데한 날갯죽지가 숨이 막히는 더위를 내어뿜은 듯하다. 경회루 연당에 비추이는 흰 구름 조각, 그 그림자에 흔들리는 가는 물결 그것조차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듯하거든 몇 천년에 두 번도 있기 어려운 큰 슬픔은 --- 왕의 가슴이야 오죽이나 답답하시었으랴. 돌아보는 이 하나도 없는---참으로 하나도 없는 외로운 처지---잡아먹으려는 흉물에게 에워싸인 처지---그것은 백날 가무는 여름날보다도 더욱 숨막히는 일이다.
그러한 윤유월 초 십일 오정이 지나서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이 왕께 알현하였다. 사흘 만에 뵈옵거니와 왕은 몰라보게 수척하시어 진실로 차마 뵙기 어려웠다. 왕과 연배가 같은 자녀들을 둔 한 확은 왕의 이렇게 초췌하신 양을 뵈옵고 측은한 정이 발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용안이 초췌하옵시니 옥체미년 하옵시니까.”
하고 한 확은 진정으로 왕을 동정하였다. 실상 이번 선위 문제에 대하여 공이 정 인지에게 돌아가 장차 세도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한 확은 그윽히 불쾌하게 여기었다. 될 수만 있으면 이번 정 인지가 머리가 되어서 하는 선위 문제를 방해하여 정의 세력을 때려 누인 뒤에 서서히 자기가 중심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왜 그런고 하면 한 확은 성격으로 보든지, 수양 대군과 인척 관계로 보든지 그보다도 그 딸을 명나라 황제의 후궁에 넣어 광록사(光祿寺) 소경(少卿)이라는 명나라 벼슬을 가진 것(이것은 당시에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으로 보든지 한 확은 정인지의 하품에서기를 달게 여기지 아니한다.
“몸보다 마음이 아프오. 마는 나 같은 사람이 아프거나 쓰리거나 경 같은 사람에게 무슨 상관있소?”
하고 왕은 전에 없이 한확의 말을 빈정거리었다.
“황송하오.”
하고 한 확은 허리를 굽힌다.
“우상은 명나라에도 다녔고 명나라 벼슬도 하였으니 알 만하오마는 그 나라에서는 대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소?”
하고 왕은 이상한 말씀을 물으신다.
“하문합시는 뜻을 소신이 알지 못하오나 황조(皇朝)기로 신하의 도리에야 국조(國朝)나 다름이 있사오리까.”
“같단 말요?”
“예, 같은가 하옵니다.”
하는 한 확은 어떻게 아뢸바, 임금의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그러면 명 나라에서도 대신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번갈아 돌며 나며 임금더러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기로 일을 삼소?”
하시고 낭랑하게 웃으신다.
“소신이 지존 앞에 무슨 죄를 범하였사온지?”
하고 한 확은 울고 싶도록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에게는 그만큼 내약한 구석도 있었거니와 또 왕이 이상하게 태연하신 태도로, 마치 노성한 사람 모양으로 풍자를 하시는 것이 모두 심상치 아니하여 그 태연하신 위엄ㅎ과 열일곱 살답지 아니하신 지혜에 놀린 것이다.
“우상이 무슨 죄가 있겠소? 세울 공을 못 세웠으니까 오늘 그 공을 세우려 왔나 보오.”
“소신이 세울 공이 무엇이든지, 만일 소신더러 하라시는 일이 있다 하면 소신이 분골 쇄신을 하옵기로 견마지역을 다하려 하옵거니와 어리석은 소신이 무슨 일을 하올 바를 알지 못하옵니다.”
왕은 한확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아니하는 듯이 눈을 들어 이글이글 불길이 일어난 듯 한 뜰에 까치와 참새가 뛰어다니는 것을 바라보시다가 한 확에게로 얼굴도 돌리지 아니하시고, 흥 내게 견마지역을 하여서 공될 “, 것이 있소? 좌의정본을 받아서 새 임금 밑으로 돌아 가야지…….”
이때에 마당에 앉아서 무엇을 주워먹던 참새 두 마리가 물고 차고 오르락내리락 서로 싸우는 것을 보시고,
“어, 조놈들이 왜 싸울까. 넓은 천지에 조그만 몸둥이가 무엇이 부족해서 서로 싸울까. 요 놈, 고얀놈들로고.”
하시고 궁녀를 시키어 싸우는 참새를 날려버리라고 분부하신다.
한 확도 고개를 들어 뜰을 바라보았다. 궁녀의 ‘후어! 후어!’하는 소리에 싸우던 참새들은 싸움도 원수도 다 잊어버리고 날아서 지붕을 넘어버린다.
“새 임금이라 하옵시니 어쩐 말씀이시온지?”
하고 한 확이 왕께 여쭙는다.
왕은 참새들이 날아가는 양, 붉은 잠자리가 오고 가는 양, 하늘의 구름, 모두 무상을 아뢰는 듯한 자연을 바라보시매 인생 만사가 다 귀찮은 것만 같이 생각이 되어 아보다도 더욱 냉정하신 어조로,
“우상, 내가 만기(萬機)를 수양 숙부에게 맡기려오. 놓은 일이 있소. 정인지가 나를 내어쫓은 공을 혼자 차지할 터이니 경이 가서 내 다짐을 받고 왔노라고 하오.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오?”
하시고 또 하하 웃으신다.
한 확은 엄연히 위엄을 갖추어,
“상감께 아뢰오. 아까 정 인지가 새 임금 밑으로 돌아갔다 하옵시고 이제 또 만기를 수양 대군에게 맡기신다 하옵시니 그것이 어찌한 말씀이옵신지? 수양 대군은 이미 군국 대사를 다 맡았사온즉 다시 더 맡기옵실 것은 무엇이오리까. 수양 대군이 매양 주공되기로 자처하오니 혈마 이지를 품을 리 없사온즉, 모르옵거니와 좌의정 정인지가 무슨 무엄한 말씀을 아뢴 것이나 아니온지 도무지 소신은 어찌 아뢸바를 알지 못하옵니다. 설사 조정에 딴 뜻을 품는 자가 있다 하오면 목을 베어 천하에 보이심이 지당하옵거든 만기를 맡기옵신다 하옵심은 어찌한 성의(聖意) 이온지?”
하고 한 확은 음성에는 충분(忠憤)이 떨리는 듯하다.
이튿날 왕은 정식으로 내시 전균(田鈞)을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에게 보내어, 이라는 뜻을 전하였다.
한 확은 어제 아뢴 대로 그러시지 마시기를 전균을 통하여 계청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은 굳었다---.
“내 전일부터 이 뜻을 가지었노라. 계교 이미 정하였으니 가히 고치지 못할지라. 속히 모든 절차를 차비할지어다.”
하시는 교지를 다시 내리시었다.
이날은 단종대왕 삼 년 을해(乙亥) 윤유월심 일일이다.
이왕 선위를 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면 정인지배에게 위협을 당하여 창피한 꼴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정정 당당하게 내 편에서 내어던지리라 한 것이 왕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을 내시는라고 왕은 지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몇 번을 우시었다. 우의정한 확에게 선위하신다는 전교를 내리신 뒤에는 부랴사랴 간략한 노부(盧簿)로 종묘에 하직까지 하시었다.
신시(申時)!
정원(政院), 정부(政府), 육조(六曹)할 것 없이 대신으로부터 아래 서리(書吏)에 이르기까 지 난리를 당한 모야으로 꿇었다.
신시!
백관은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모였다. 아무도 가슴만 두근거릴 뿐이요, 입도 벙긋하지 못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큰일이 생기지 아니하느냐, 발가락만 달싹하여도 무슨 큰 변이 날 것만 같았다.
부슬부슬 안개비가 온다. 음산한 바람이 이따금 연당에 마르나 남은 물에 가는 물결을 일으킨다.
승지(承旨) 성삼문(成三問)은 명을 받아가지고 내시 전균(田鈞)을 데리고 대보(大寶)를 가지러 상서원(尙瑞院)으로 달려간다.
삼문이 대보를 내시 전 균에게 돌리고 경회루로 돌아 올 때에 사정전(思政殿) 뒷문 밖에 서도총부(都摠府) 관노(官奴)를 만났다. 관노는 삼문에게 절하고 종이 조각 하나를 전한다.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으로 입직(入直)한 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의 필적이다. 다른 말 아무것도 없고,
“참인가.”
하는 두 자뿐이었다. 무론 오늘 왕께서 선위하신다 하니 참이냐 하는 뜻이다.
경회루 밑 박석 위에 아무것도 깔지도 아니하고 남향으로 옥좌를 설하고 앞에는 정원(政院), 정부(政府), 육조(六曹), 집현전(集賢殿),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중요한 대관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도 오늘 무슨 일이 있는지 분명히 아는 이는 몇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다. 다만 왕께서 급히 부르신다고만들었을 뿐이다. 무론 무슨 일인지 속으로는 다 알았다. 그처럼 창졸간에 이 일이 생겼다.
나중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좌의정(左議政) 정인지(鄭麟趾)를 데리고 위풍이 늠름하게 뚜벅뚜벅 걸어 들어 왔다. 수양 대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대관들은 모두 약간 허리를 굽히어 경의를 표하였다. 모두 마음이 그를 무서워하는 생각이 났다. 수양 대군은 일동을 휘 둘러보고 옥좌에서 댓 걸음 앞에 읍하고 섰다.
이렇게 기다리기 한참. 음산한 바람만 이슬비를 돌아 연당 위로 오락가락한다.
이윽고 왕이 사정전 뒷문을 납시와 초췌하옵신 용안이 경회루를 향하시고 옥보를 옮기시었다. 상감으로는 마지막 걸음을 걸으시는 것이다.
왕은 익선관(翼蟬冠),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시었다. 감개무량하신 모양으로 경회루와 연 당과 인왕산을 한 번 돌아보신 뒤에 약간 걸음을 르게 하시어 권설한 옥좌에 좌정하신다.
수양 대군, 정 인지, 한확을 비롯하여 대소 관리가 다 이마가 땅에 닿으리만큼 허리를 굽힌다.
승지(承旨) 성삼문(成三問)은 대보를 안고 옥좌에서 두어 걸음 오른편에 시립하였다.
이날에 문관만을 부르고 무관을 부르지 아니한 것은 수양 대군의 의사다. 무신의 곧고 굳센 성정이 이 광경을 보면 어떤 변을 일으킬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도총관 성승(成勝)이나, 훈련도감(訓鍊都監) 유응부(兪應孚)나, 용양위 대호군 송석동 같은 이는 수양 대군이 이날에 꺼리는 사람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요, 금영대장(禁營大將) 봉석주(奉石柱)도 반드시 수양 대군의 심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권람(權擥)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한명회(韓明澮)는 어느덧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모두 불차(不次)로 엽등하여 의기양양하게 수양 대군 뒹 서 있다.
우찬선 강맹경(右贊成姜孟卿)은 계유 사변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수양 대군에게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의 계획을 일러 바친 사람이요, 그 밖에 옥좌앞에 늘어선 대소 관인들은 다 수양 대군이나 정인지와 무슨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신숙주(申叔舟)가 온 것은 물론이요, 승지(承旨), 사관(史官)이 시립하고 박팽년(朴彭年)도 집현전(集賢殿)에 입직하였다가 불리웠다.
박팽년은 성삼문, 하위지(河緯地)등과 아울러 수양 대군이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 중에 하나다.
왕은 태연하려 하시나 그래도 흥분한 빛을 감추지 못하여 손을 가만 두지 못하시었다. 사 람들은 무슨 처분이 내리는가 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왕은 일어나신다. 그 아름다우신 얼굴가 빛나는 눈!
“영의정!”
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부르시니 수양 대군은 서너 걸음을 추보(趨步)로 옥좌 앞으로 나와 부복한다.
“오늘 대임(大任)을 숙부께 맡기오.”
하시고 예방승지 성삼문을 향하여 국새(國璽)를 올리라는 뜻을 보이신다.
성삼문은 두 팔로 받들었던 옥새를 힘껏 부둥켜 안고 그만 실성통곡한다.
수양 대군은 부복하여 있다가 머리를 들어 성 삼문을 흘겨본다.
삼문은 두 눈에 눈물을 거들 수도 없이 왕명을 거스르지 못하여 슬행(膝行)하여 국새를 받들어 왕께 드린다.
왕은 삼문에게서 국새를 받으시와 수양 대군에게 전하신다.
시립한 사람들 중에서는 느껴우는 소리가 들린다. 한 확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비록 밖에서는 왕의 선위를 주장하던 무리라도 손에 옥새를 들고 서 계신 왕을 우러러 뵈옵고 그 심사를 미루어 볼 때에는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다.
수양 대군은 이마를 조아려 세 번 사양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일어나 옥좡 앞에 꿇어앉아 왕의 손에서 국새를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부복하였다. 수양 대군도 마음이 설레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으나 조금도 슬프지 아니하였다. 손에 오랫도안 바라고 바라던 옥새가 있지 아니하냐. 이것은 꿈이 아니라야 한다.
왕은 명하여 수양 대군을 부축하여 나가게 하라 하시고 당신도 모든 시름,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이, 그러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옥좌에서 일어나시어 왕이 위의도 다 끝났다 하는 듯이 걸어 나가신다.
박팽년은 억새갛여 안색이 죽은 사람 같더니 와이---인제는 왕이 아니시다---듭신 뒤에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그러다가 성 삼문에게 붙들린 바 되었다.
“이 사람, 참으소. 비록 신기(神器)는 옮기었다 하더라도 상감께서는 아직 상왕(上王)으로 계옵시니 우리네는 아직 죽지 말고 할 일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다가 성사가 아니되면 그때 에 죽더라도 늑지 아니할 것이 아닌가. 이 사람아 참으소.”
하고 손을 마주잡고 통곡하였다.
남산과 낙산에 무지개가 서고 인왕산 머리에 걸린 햇빛이 구름 틈으로 흘러 경회루와 울고 섰는 두 사람을 비추인다.
수양 대군은 곧 근정전으로(勤政殿) 올라가려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고 대군청(大君廳)으로 나왔다. 이때에는 벌ㅆ 수양 대군이 아니요, 상감마마시어서 백관이 좌우에 시립하고 군사가 겹겹이 시위하였다.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 일변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김 예몽(金禮蒙)을 시켜 선위(禪位), 즉위(卽位)의 교서(敎書)를 봉하게 하고 일변 유사(有司)를 시켜 근정전(勤政殿)에 헌가(軒架)를 베풀어 즉위식 차비를 시켰다. 그동안이 실로 순식간이다.
수양 대군은 미리 준비하였던 익(瀷) 선(蟬)관(冠),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위의 엄숙하게 백관의 옹위를 받아 근정전 뜰로 돌아가 수선(受禪)하는 의식을 마치고는 정전에 올라가 옥좌에 앉아 백관의 하례를 받고 이내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상왕(上王)께 뵈오려 하였으나 상왕은 받지 아니하시었다.
그날 밤으로 왕(수양 대군)은 근정전에 대연을 배설하고 백관을 불러 질탕하게 노시었다.
오늘 밤에는 군신지분을 파탈하고 놀자. 누구든지 마음대로 마시고 마음대로 노래하고 마음대로 춤추라, 무슨 일이나 허물치 아니하리라 하시었다. 그리고 왕이 친히 잔을 들어 정 인지, 신숙주, 강맹경, 한 확 같은 공신들에게 ntf을 권하고 좀 더 취하게 되매 몸소 무릎을 치고 노래를 부르시었다.
신하들도 한없이 기쁜 듯하였다. 아까까지는 영의정이요, 같은 신하였지마는 지금은 삼감이 되신 수양 대군이 손수 권하시는 술잔을 받을 때에 황송하고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고, 우리 성주(城主)께 충성을 다하리라고 술취하여 어눌한 음조로 맹세하는 것은 저마다였다.
질탕한 풍악이 울려올 때에 사정전(思政殿)에 계옵시던 상왕(上王)께서는 왕대를 돌아보시 고 말없이 낙루하시었다. 새 임금을 모시고 질탕하게 노니느 옛 신하들은 흥겨 옛 주인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따. 어떻게 하여서라도 새 임금의 마음에 들자, 어떻게 하여서라도 옛 임금을 사모하는 표를 보이지 말자 하고 그들은 없는 취흥도 돋우었다. 더구나 정 인지, 강 맹경 같은 사람들은 회색이 만면하여 새 임금의 성덕을 칭양하였다.
권람과 한확 같은 무리는 여러 사람들 새에 끼어앉아서 술을 마시고 즐기는 체하면서도 누가 불편한 기색을 가지는가 하고 속으로 치부하여 두었다. 그중에 성 삼문, 박팽년의 무리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이 자리에 허 후(許詡)나 살아 있었던들 한바탕 풍파를 일으켰을 것이나 그러한 노인은 이미 씨를 끊었다. 오직 청년 학사들 중에 비분강개한 눈물을 머금고 끓어 오르는 창자를 둘 곳을 몰라 할 뿐이다.
잔치가 더욱 질탕하고 군신 간에 취흥이 더욱 무르녹았을 때에 성 삼문은 참다 못하여 뒷 가에 간다 핑계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이개(李塏)도 나오고, 유 성원(柳誠源)도 나왔다. 나중에 박팽년(朴彭年)도 나와서 뜰에 서서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그러나 말을 없었다.
오직 김예몽(金禮夢)이 이번 선위, 측위의 교서를 짓는 사람으로 뽑힌 것을 자랑삼아 의기 양양하고 홍윤성(洪允成), 양정(楊汀) 같은 무리가 호기 당당하여 공신의 머리인 것을 자랑 하였다.
“숙부!”
하고 왕은 연해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돌아보고 마치 그의 승인을 얻으려는 듯이 환심을 사려 하였다. 양녕 대군은 오래 산 것과 공연히 서울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고 내일로 금강산을 향하여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태평건곤이 열린 한 편 구석에 거의 아무도 모르게 상왕은 왕대비와 함께 대궐을 빠져 나시어 수강궁(壽康宮)으로 몸을 피하시었다.
왕은 이날 밤을 이 대궐 안에서 지내시기를 원치 아니하시었다. 조부님, 아버님이 계시던 곳이라 떠나기도 어렵지마는 지나간 삼년 동안 지낸 일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무엇하러 한 시각인들 이곳에 있으랴. 더구나 이제는 남의 집이 아니냐.
“마마, 우리는 나갑시다.”
하고 상왕은 왕대비를 향하여 마치 이사 가자는 예사 사람 모양으로 말씀하신다.
“나가다니 어디를 나가시오?”
하고 대비도 놀라신다.
“기왕 쫓겨나는 몸이 내어쫓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있소? 나라라기 전에 먼저 나갑시다.
수강궁(壽康宮)은 선조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에 오래 계시었으니 그리로 갑시다. 또 혜빈이 바로 얼마 전까지 거기 계시었으니 아직 퇴락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요.”
이 말씀에 대비는 새로운 슬픔이 또 솟아오르시오 그만 방송통곡하시었다.
상왕은 내시 전균(田鈞)을 부르시와,
“내가 지금 수강궁으로 갈 터이니 차비하라.”
하시는 명을 내리신다.
전균은 황공하여,
“것삽기 황송하오나 지금 상감께서 잔치를 베푸시와 백관이 다 근정전에 입시하오니 차비를 하라 하옵신들 누구를 불러 하오리이까. 밤도 깊었사온즉 명일로 하심이 어떠하올지.”
“그럴 수 없다. 오늘 밤에 여기서 지날 수가 있느냐. 어서 수강궁으로 갈 차비를 하여라.
차비라야 별 것 있느냐. 네 사람이 타고 갈 것이나 장만하려무나. 아무리 쫓겨나가는 임금 이기로 이 밤에 장안 대도상으로 걸어갈 수야 있느냐. 또 탈 것이라 하여도 나는 이미 서인(庶人)이라 무엇인들 계관하랴. 너희들 타고 다니던 것이라도 넷만 내려무나.”
“그러 하와도…….”
하고 전균은 차마 못할 듯이 주자한다. 전균은 실상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아까까지 왕으로 계시던 양반이 이 밤중에 초초하시게 대궐에서 나가신다는 것도 말이 아니요, 또 그냥 나가시게 하였다가는 새 왕에게 어떠한 변을 당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왕의 재촉하심이 심하시므로 부득이 궁녀를 타고 다니는 보교 넷을 준비하여 사정전(思政殿) 앞뜰에 들여 대었다.
상왕은 무엇을 아까와하시는 빛도 없이 대비와 후궁 권씨, 후궁 김씨 두분을 데리시고 초초한 보교에 오르신다.
전 균 이하로 내시 몇 사람과 저번 통에 갈아들여 지척에 모시던 궁녀 칠팔인이 울며 네 가마 뒤를 따르고 뒤에 떨어지는 내시와 궁녀들은 울고 땅에 엎드리어 배송한다.
“광화문(光化門)으로 가오리이까?”
하고 여싸온즉 상왕은 침음양구하시다가,
“건춘문(建春文)으로 나가자.”
하신다. 이 말씀이 뒤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슬펐다.
윤유월 열 하루. 송편 개보다도 배가 불룩한 달이 비오다가 개인 하늘에 떠 있다. 근정전 전정에 불빛 조용한 것이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인다.
네 분이 타신 가마는 동관과 통안으로 마치 반우 들어오는 행렬같이 소리도 없이 수강궁(壽康宮) 대문에 다다랐다.
텅텅 빈 수강궁은 대문이 열리었을 리가 없다. 본래 수강궁은 창덕궁 각까이 있어서 별궁 모양으로 쓰던 조그마한 대궐이다 궁을 . 지키는 군사들도 다 잠이 들어서 한참이나 대문을 두드리기 전에는 일어나지도 아니하였다.
“누구야?”
하는 졸리운 소리는 마치 사삿집 행랑아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쉬! 상감마마 거동이시다."
하고문 두드리던 관노(官奴)가 열리는 대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 제친다.
쓸쓸한 수강궁에는 번드는 군사의 방 밖에는 볼 켜놓은 방도 없다. 우거질 대로 우거진 뜰, 뜰에서 제 세상으로 알고 우짖던 늦은 여름 벌레 소리가 난데없는 사람의 발자취와 등을 빛에 놀라 끊이락이으락 한다. 달빛이 휑뎅그렇게 빈 대청들과 방들을 더욱 캄캄하게 만든다.
대비와 두 분 후궁은 두 걸음도 서로 멀어지지 아니하고 상왕의 뒤를 따라서 곰팡 냄새 나는 장마 지낸 방으로 들어가신다. 몇 번을 거미줄이 얼굴에 걸리었고 날아나는 박쥐에게 놀람이 되시었다. 방에는 먼지가 켜켜이 앉았다. 이러한 황량한 곳에 길 잃은 사람들 모양으로 한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초롱불 빛에 어른어른 춤을 추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 같지도 아니하다.
“이거 어디 사람 앉겠느냐. 방을 좀 훔치어라!”
대비는 이러한 말씀까지 하시게 되시었다. 남치마 입은 궁녀들이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며 방을 치운다.
초를 사오려 하나 돈이 없다. 한 나라의 왕으로 주머니에 돈을 지니랴. 내시들이나 궁녀들도 궁중에서 돈 쓸 일이 없었다. 관노의 돈을 꾸어서 초를 사왔다. 대관절 이것이 웬 일인고. 이런 법도 있나 하고 군사들과 관노들도 어찌된 영문을 몰랐다.
새 왕이 상왕께서 수강궁으로 옮아가신 줄을 안 것은 상왕과 대비가 수강궁에 마주앉으시 어 새로운 눈물을 흘리실 때였다. 왕은 상왕이 이렇게 하신 것을 불쾌히 여기었으나 더 어찌할 수 없어서 급히 명하여 상왕이 쓰실 것을 넉넉하게 수강궁으로 보내라 하시었다.
이튿날 윤유월 십 이일은 수양 대군이 왕으로 첫 번 조회를 받고 정사를 하시는 날이다.
차마 그날로 집을 옮기어 대궐로 들어올 수는 없어서 아직 며칠 동안은 수양 대군 궁에 계시기로 하고 아침마다 위의를 갖추어 경복궁으로 오시되기치와 창검이 황토마루에서 광화문까지 닿았다.
이날에 상왕의 이름으로 이러한 교서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김예몽(金禮夢)이가 지은 것이다. 이번에도 유성원(柳誠源)더러 지으라 하였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였다. 손을 끊기로 맹세한 것이다.
이 교서로 보건대 상왕은 나이 어리시고 일을 모르시므로 jerakd이 맣고 국가에 공로가 큰 숙부 수양 대군엑 무거운 짐을 옳기신다는 뜻이다. 어리신 왕이 그대로 가시면 흉악한 무리들 때문에 장차 종묘와 사직이 위태할 것이니 이때를 당하여 종묘와 사직을 안보할 사람은 수야 대군 밖에 없다 하여 스스로 마음이 나시어 선위하신 것 같다. 그렇지마는 실상 에 들어가 보면 이렇게 하고 싶어하는 선위가 있을 리가 없다. 또 이 교서라는 것은 정 인 지가 앉아서 시키고 수양 대군이 한 번 읽어 본 것이요, 왕(상왕)은 한 번 보신 일도 없는 것이다. 만일 상왕이 보시었던들 반드시,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으랴.”
하고 찢어버리시었을 것이다.
후에 왕(수양 대군)은 상왕을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기고 공의온문(恭懿溫文) 태상왕(太上이라고 존호를 받들고 王) 대비 송씨는 의덕(懿德) 왕대비(王大妃)라고 하였다. 그리고 매삭 삼 차 일일, 심이일, 이십 이일에 왕이 친히 창덕궁에 나아가 상왕과 대비께 문안을 드리 기로 하고 칠월에 처음으로 면복(冕服)을 갖추시고 왕후 윤씨(본래 수양 대군 부대부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크게 위의를 갖추어 창덕궁에 뵈오러 가시었으나 상왕과 대비는 받지 아니하시었다.
왕(수양 대군)이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진안하실 때에 상왕이,
“마땅치 아니하오.”
하고 거절하신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첫째로 창덕궁 든화문 밖에서 왕후와 왕자들과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기를 거절당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창피한 일일 뿐더러, 둘째로 이번에 상왕이 왕의 진알을 거절함으로 하여 민간에서 상왕의 마음에 동정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게 되었다. 아무리 상왕이 자진하여 금상에서 선위를 하시었다고 선전하더라도 이 사실이 있은 뒤에 그 선전은 아무 효과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누가 상왕엑 이런 꾀를 아뢰었는가. 이것이 반드시 어리신 상왕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니 응당 책략을 아뢴 자가 있으 리라는 것이 왕과 한 명회의 추측이었다. 그렇지마는 이 말은 상왕께 여쭈어볼 수도 없는 일인즉 다만 많이 사람을 놓아 염탐할 뿐이었다.
상왕이 왕의 알현을 물리친 뒤로 뜻있는 사람들의 불평이 더욱 높아진다. 성승(成勝),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박(朴)정(靖),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윤 영손(尹鈴孫), 김질(金礩), 권자신(權自愼), 송석동(宋石同), 이휘(李徽), 성희(成熺) 등이 금상을 폐하고 상왕을 복위하도록 맹약한 것도 이때 일이다.
이상에 적힌 사람들 중에 성승(成勝)은 도총관(都摠管)으로 성삼문의 아버지요, 성희(成 熺)는 당숙이요, 박정, 유응부, 송석동은 다 장신(將臣)으로 병권을 가지었고, 권 자신은 상왕의 외숙으로, 윤영 손은 상왕의 이모부로 창덕궁에 출입할 수가 있고 나중에 동지를 팔아서 공명을 산 김질과 이 휘는 다 성 삼문, 박팽년 등과 막연한 친구일 뿐더러 그중에도 김질은 그 장인 되는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상왕 복위에 대하여 가장 열렬한 패다.
애초에 윤유월 열 하루 상왕께서 선위하시던 날에 성승이 몇 십 차례나 정원에 사람을 보내어 아들 삼문에게 선위 여부를 묻다가 마침내 삼문이 앙천낙루하더란 말을 듣고는 그는 곧 병을 일컫고 집에 돌아와 사랑 문을 굳이 닫고 집안 사람도 들이지 아니하였다. 밤에 삼문이 돌아온 뒤에야 삼문을 불러놓고,
“네 어찌 살아 있느냐?”
하고 꾸짖었다---.
“후설지관(喉舌之官)이 되어 상감 지척에 모시었을 뿐더러 네가 선조의 고명을 받았거든 이제 네 손으로 수양(首陽)에게 국보를 전하고 또 그 잔치에 참예하였다가 살아서 집으로 놀아온단 말이냐. 내 평소에 너를 절의 있는 사람으로 여기었더니 내 집에 불행이로구나.”
하고 피눈물로써 엄히 꾸짖었다.
삼문은 그 아버지가 죽기를 결심한 줄을 알아차리고 머리맡에 놓인 칼을 보았다. 이 칼은 일찍 세종 대왕께서 하사하신 것이요, 성 승이 평소에 사랑하던 칼이다. 그는 반드시 칼로 자문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서 죽을 결심인 줄을 알았다. 성승은 그러한 사람이다.
삼문은 아버지 앞에 엎디어 느껴 울다가 아버지의 꾸짖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소자가 구차히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요 죽을 곳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죽기는 쉽거니와 상왕을 도와 보위를 회복하기는 뉘 있어 하오리이까. 다행히 우리 사형제 다 무엇이나 할 만하고 또 밖에도 충의지사가 없지 아니할 것이오니 오늘 구차한 목숨을 살려 가지고 돌아온 것은 이 까닭이옵니다.”
하고 경회루 밑에서 박팽년과 서로 맹약한 이야기도 하였다.
삼문의 말에 성승은 주먹으로서안을 치고 기뻐하였다.
그러하더냐 진실로 그러할진댄 나도 “ . 죽지 아니하고 너희가 하는 일에 한 몫 참예하리 라. 사람이라고 다 믿지 말아라. 큰일 그르칠라.”
백발이 성성한 성승의 눈에서는 대장부의 피눈물이 흘렀다.
왕은 무슨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 하루바삐 그 지의를 굳건히 하기를 힘썼다. 이러하기 위 하여서 첫째로 한 일은 요새 말로 하면 선전이다. 왕이 왕이 되고 싶어서 되신 것이 아니라 상왕이 사양하심과 국가의 사정이 부득이 하므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는 것이다. 왕은 첫째로 이러한 즉위 교서를 내리시었다---.
이것 역시 국가 다사한 이때에 이런 임금으로는 종사를 지켜 나갈 수 없다 하여 상왕이 굳이 사양하시고 또 종친과 대신들이 ‘다 말하기를’ 종사 대계를 사양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진다고 하므로부득이 여론을 좆은 것이라 한 것이다.
둘째로 할 일은 이때에 있어서는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어서 속히 받는 것이다. 이러한 때의 준비로 상왕이 즉위하실 때에도 당시 수양 대군으로 명 나라에 가시기를 전력을 다하신 것이다. 또 명나라 황제의 후궁의 아버지 되는 한 확도 유력한 사람이다. 비록 이번 선 위에 대하여 한 확이 속으로 반대하는 뜻을 가지었으나 일이 이렇게 된 뒤에야 보신책으로 하더라도 새 왕께요공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왕은 곧 예조 판서 권자신(상왕의 외숙)을 파면하고 김하(金何)로 대신하여 정사(正使)를 삼고, 형조 참판 우효강(禹孝剛)으로 부사(副使)를 삼아 명 나라로 보내었다. 예조 판서 권 자신을 보낼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번 사신은 상왕이 선위하시기 전에 이를테면 조선 왕이라는 벼슬을 사면한다는 사면청원을 하는 사신이다. 이것이 절차로도 당연하거니와 또 새 왕에게도 편한 일이 많다. 첫째 이번 선위가 상왕이 자진하여 하신 것이요, 결코 새 왕이 찬역(簒逆)하신 것이 아닌 것을 보이는데 편하고, 둘째로는 이번 기회에 황보인, 김 종서의 죄를 역설하여 어디까지든지 새 왕이 옳으신 것을 발명하기에 편한 것이다. 미상불 계유정란(癸酉靖亂)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계유 사변은 명나라에서는 매우 시비거리가 되었다. 누구나 이 일은 당시 수양 대군이 자기의 야심을 펴려는 준비로 생각하였고 더구나이번 선위로 말미암아 그것이 증명된 것같이 알게 되었다.
재래의 관례로 보더라도 명 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한 일은 없었으므로 이번 상왕이 선위하신 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명 나라 조정에서 간섭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나, 명 나라 조정에서 조금이라도 새 왕의 행동을 비난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곧 조선 민심에 반향이 되어 새왕께는 적지 아니한 손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청사위(請辭位) 주문(奏文)의 필자가 문제가 되었다. 가장 글 잘하는 사람,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의 손으로 이 글을 짓게 하는 것이 또한 왕에게 유리한 일이요, 될 수만 있으 면 문종 대왕의 고명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택하고 싶었다. 이래서망에 오른 것이 사헌부집의 하위지(河緯地), 숭정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성균관 사예 유성원(柳誠源)과 및 상왕의 선위 교서를 지은 김예몽이었다. 박팽년도망에 올랐으나 그때 병탈하고 집에 누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하위지 성삼문 유 성원은 심히 곤란한 , ,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준걸히 거절한다 하면 우스운 일에 생명 문제이므로 이번 일에 붓을 들 사람이다 하여 김예몽을 천하였다. 왕은 세 사람의 뜻을 모름이 아니나 그들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리기를 힘쓰시기 때문에 더 강잉하 지도 아니하시고 김 예몽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고 정인지가 지휘하게 하시었다.
그 소위 청사위 주문(奏文)이란 것은 이러하다---.
이 글은 다섯 가지 부분으로 되었다. 첫째는 왕이 어려서부터 항상 몸이 약하고 병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건강으로 보아 왕될 자격이 없는 것을 말하고, 둘째로 이러한 몸을 가지고 열 두 살에 왕이 되어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모든 일을 신하들엑 맡기었다는 것을 말 하고, 셋째로 그랬더니 간신이 역모를 하는 것을 수양 대군이 먼저 왕께 고하여서 그 공로로 나라를 안보하였다는 것, 넷째로 그런데 아직도 흉한 무리가 남아 있고 왕 자기는 왕될 자격이 없고 숙부 수양 대군이 학문이 도저하고 덕이 높고 공이 많고 만민의 숭앙을 받으니 그가 아니면 안되겠기로 지나간 윤유월 십 일일에 명나라 황제의 윤허도 없이 벌써 왕의 자리를 수양 대군에게 물려 줄었다는 것, 그러하니 ㅈ발 허하여 달라는 것이다.
“과연 일대 문장이다!”
하고 왕은 이 글을 보시고는 격절탄상하시었다.
이 글로 보건대 과연 상왕은 선위 아니하실 수가 없고 수양 대군은 왕이 아니 되실 수가 없었다. 아무 억지도 없이 일이 순순히 된 것 같다. 이 주문에 대한 대명 황제의 조칙은 반 년이 넘어도 오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주의를 쓴다 하더라도 명 나라 조정에는 이론이 있었던 까닭이다. 첫째는 상왕이 결코 병약하지 아니하시다는 것이다. 상왕이 비록 수양 대군과 같이 장골은 아니시고 의탁을 하시와 몸이 작으시고 여자 모양으로 용모가 단아하시와 약질이신 듯하지마는 별로 병환은 계시지 아니하였고, 그뿐더러 근년에 와서는 혼인하신 뒤로 도리어 건강이 증진하시는 형편이시었다.
명 나라 조정에서 또 한 가지 이번 선위에 의심을 낸 것은 상왕께서 명철하시다는 것이다. 비록 교통이 불편한 당시라 하더라도 명나라에서는 결코 조선 사정을 알기를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상왕이 왕손으로 계실 때부터 장차 명군이 되실 자질을 가지시었다는 정보가 명 나라 조정에 아니 들어갔을 리가 없다.
셋째로 이 사위 주문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황보인, 김 종서 등이 역모를 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황보인은 명 나라 대관들도 많이 아는 이다. 그들이 수모가 되어서 역모를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승인이 지체된 것이다.
명 나라 조정에 이러한 이론이 있는 것이 얼마쯤 걱정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렇다고 그 다지 크게 걱정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새 왕은 식구를 데리고 당당하게 경복궁으로 들어와 부인 윤씨는 곤전마마, 열 아홉 살 된 맏아드님 도원군(桃源君)은 왕세자, 여섯 살 되는 둘째 아드님(장래 예종 대왕)은 해양대군(海陽大君)을 봉하시어 왕의 영화를 누리시고 정인지, 한명회, 권람, 신숙주 이하 사십 일인은 좌익공신(左翼功臣)이라 하여 모두 작록을 받 아 갑자기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다만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것은 상왕의 일이다. 아직도 민심은 상왕에 있고 상왕이 왕께 대하여 품으신 노여우심과 원망하심은 풀리지를 아니하시어 선위 후 첫 번 원조인 병자 년 설날에 왕이 또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세배차로 오시었을 때에도 상왕과 대비는 단연히 거절하시고 받지 아니하시었다.
왕은 도저히 상왕의 마음을 풀 수 없는 줄을 깨달으시고 심히 걱정하시었다.
상왕을 현재의 지위에 계시게 하고는 도저히 화근을 끊을 수가 없었다. 크나큰 창덕궁 대궐에 수백 명 사람이 왕을 시위하고 또 외척과 상왕이 신임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니 그것도도리어 전에 상왕이 왕으로 계실 때보다도 금하기가 국난하였다, 상왕이 선위하신지 반년이 넘도록이다지도 왕을 두려워하시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반드시 뒤에 상왕을 충동하 는 무리가 있는 것이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혹시 상왕을 받들어 복위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왕은 상왕을 창덕궁에서 어디 조그마한 곳으로 옮겨 모시고 아주 교통과 통신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때에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가 육조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왕께 아뢰었다---.
“소신등이 전부터 매양 아뢰옵는 바이옵거니와 상왕을 지금과 같은 지위에 모시오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하오니 복원 전하는 속결무류(速決無留)하옵시오.”
정 인지의 주장은 상왕의 지위를 왕보다도 높이하여 창덕궁에 거처하시게 하지 말고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군(君)으로 강봉(降封)하여서 어느 먼 시골에 계시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 하면 첫째로는 민심도 상왕에서 떨어질 것이요, 둘째로는 흉악한무리들이 상왕을 끼고 흉모를 할 수 없으리라 함이다.
정 인지는 두어 번이나 왕께 상왕의 생명을 없이하여 아주 화근을 끊어버릴 것을 진언한 일도 있었으나 왕은 말엇이 고개를 흔드시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민간에 상왕을 사모하는 생각이 점점 간절하여지고 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소문도 들리어 정인지의 뜻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만일 상왕이 다시 정권을 잡으시거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상왕을 복위하시게 할 도모를 한다 하면 반드시 정인지 자기가 미움의 관력이 될 것을 잘 안다. 항간에 전하는 말에도 ‘정가’를 좋지 못하게 말하는 일이 많았다. ‘정가’라 하면 곧 정인지를 가리키었다. 이러한 줄을 밝은 정인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죽기를 한하고 상왕을 제거하고 새 왕의 업을 왕성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싱 정 인지 개인의 보신지책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 인지뿐이 아니다. 정란공신(靖亂功臣)이니, 좌익 공신(左翼功臣)이 하는 수양 대군의 뒤를 따라 부귀를 누리는 측들은 다 정인지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모양으로 이해가 상동하므로 한데 뭉칠 수가 있 어서 그들의 독한 눈매는 밤낮으로 창덕궁을 향하였다. 원컨대 무슨 급한 병으로 상왕이 돌아가시었으면 하는 이도 불소하였다.
후환을 두려워하는 것뿐 아니라 마치 사람을 때려서 채 죽이지 아니하고 돌아선 사람이 어디를 가나 그 사람이 따라올까 따라올까 겁이 나는 모양으로 또는 옳은 사람을 모해한 무리들이 하늘 어느 구석에서 이제나 무슨 천벌이 떨어질 듯한 불안이 있는 모양으로 이 정란 공신들과 좌익 공신들이 창덕궁에 계옵신 상왕을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겁과 불안이 있었다.
이래서 그들은 하루라도 바삐 상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자면 왕의 뜻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은 상왕에 대한 말이 날 때마다 항상 말없이 고개를 돌리시었다.
왕도 상왕이 후환의 근원이 되실 줄을 모름이 아니나 골육의 친조카에게서 이미 나라를 빼앗고 이제 다시 목숨을 빼앗을 뜻은 없으시었다. 될 수만 있으면 현상대로 영원히 가고 싶다고 생각하시었다.
이에 정 인지는 상왕을 제거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필요를 느끼었고 또 그것은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 이유란 무엇인가. ‘ 첫째는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서요, 둘째는 상왕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서’라 함이었다.
국가를 위하여서 상왕을 서울 밖에 계시게 함이 좋다. 상왕이 일생을 편히 지내시기 위하여 높은 상왕의 지위를 때고군으로 강봉하는 것이 좋다 하는 것이 인제는 왕께 요공하는 백판의 말투가 되었다 정인지가 상왕의 목숨을 . 끊어버리기를 진언하는 때에는 그것은 극히 은밀한 때의 귓속이요, 큰 소리로 하는 말은 역시 이것이었다.
이번에 육조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왕의 최후의 결심을 재촉한 때에도 그 내용은 상왕의 지위를 낮추고 상와을 어느 조그마한 시골에 가두어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경들의 말이 옳거니와 자고로 제왕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천명이니 내가 일어난 것도 천명이어든 간사한 놈들이 있더라도 어찌 상왕을 힘입어 못된 도모를 할 수가 있나. 망진자 호야(亡秦者胡也)라 하였거니와 천명을 어찌할 수가 있나.”
하시었다. 왕이 천명이 당신에게 있는 것을 믿으신 것도 사실이다. 그는 본래 자부심이 많 은 이신 까닭에, 그러나 이렇게 천명에 미루고 태연하심을 보이심에는 다른 정책이 잇느 것 이 물론이다. 그 정책은 무엇인가. 정인지 등 신료로 하여금 더욱더욱 상왕 처치할 것을 발론케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의 왕자의 경동하지 아니하고 태연한 태도와 상왕께 대한 골육 지정이 깊음을 보이려 하심이다. 그렇지마는 왕의 속은 그렇게 편안하실 수가 없었다. 정 인지, 한 명회 무리보다도 더 조급하신 것이 사실이다.
정인지, 한명회의 무리도와의 이러하신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왕께서 거절할수록 더욱 졸랐다---.
“전하 일어나옵심이 천명인 것이야 다시 말씀 하오리이까 마는 천명에만 맡길 수 없사옵고 마땅히 인사를 다할 것인가 하오. 상왕은 밖에 나아가 계시게 하여 혐의를 피함이 마땅한가 하오. 만일 늦으면 후회막급이 되올까 하오.”
하고 정 인지가 물러나지 아니하고 다시 아뢴다. 지극히 충성을 보임이다.
왕은 지필을 올리라 하시와 이렇게 적어 정 인지를 보이시었다---.
왕에게는 이러한 결심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비어 있는 금성 대군 궁을 수리하고 그리로 상왕을 옮겨 모시자는 것이다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궁에 옮겨 모신다는 것은 안방에서 행랑으로 내어 모신다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게다가--- 바깥과 통하지를 못하시게 하 고 모시는 사람을 부쩍 줄이자는 것이다.
만일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군을 봉하고 어느 시골로 귀양살이를 시킨다 하면 민심을 경동할뿐더러 왕의 성덕에 하자가 될 근심이 있거니와 서울 안에서 거처만 바꾸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아니할 듯함이다.
이튿날 영의정 정 인지는 다시 솔백관(率百官)하고 상왕출외(上王出外)를 청하였으나 왕은 다시 붓을 드시와, 라 하고 쓰시었다. 이 일에 관하여 말씀으로 하시기는 퍽 비편하시었던 까닭이다. 하기 싫은 말인 까닭이다.
이 일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정인지와 함께 상왕 출외를 주청하지 아니치 못할 사세사 된 까닭이다.
왕은 이에 제종(諸宗)과 백관(百官)의 뜻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상왕을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었다. 금성 대군은 벌써 순흥(順興)에 귀양 가 있는 것은 독자가 기억하실 바이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는 일도 크게 슬픈 일 중에 하나였었다.
상왕과 대비 두 분이 창덕궁에 오신지 거의 일년이 되어 집과 동상에 다 낯이 익고 마음을 붙이실 때쯤하여 한 번 상왕께 여쭈어 보지도 아니하고 벼란간 거마를 보내어 두 분을 모시어 내었다 그것은 마치 잡아내는 것과 . 같았다. 쓰시던 물건 하나도 마음대로 못 나르시고 부리시던 사람들조차 마지막으로 불러 보실 사이도 없으시었다. 그러나 왕은 반항하실 길도 없어 오직 분을 참고 금성 대군 집으로 끌려 오시었다. 금성 대군 집이 바로 원골이기 때문에 궁장 밑을 돌아 초초하게 행차하시니 백성들도 누구신지 알아 뵙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상왕과 대비 두 분께서 금성 대군 궁ㅇ 옮아오신 뒤에도 얼마 동안 백성들은 두 분이 창덕궁에 계시거니 하였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고는 왕은 상왕의 거처 범절에 관하여 이렇게 규정하시었다---.
첫째 삼군진무(三軍鎭撫) 두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열씩을 거느리고 번갈아 과수하여 잦ㅂ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상왕전(上王殿)두 사람, 차비수 고적 네사람, 별감(別監) 네 사람을 두되 반씩 잘라 번갈게 하고 시녀(侍女) 열 두 사람, 수사 다섯 사람, 복지 두 사람, 수모(水母) 두 사람, 방자(房子) 각 두 사람, 수사각 한 사람을 두고 각 색장(色掌) 십이인은 돌에 갈라 번갈게 하고 덕녕부(德寧府) 관원이 차례로 낮에 입직하기로 하고 대비 한 분, 별실 두 분 본댁에서 내왕하는 환관, 시녀의 출입이며, 무슨 물건 진납은 사흘에 한 번 씩 덕녕부에서 승정원에 고하여 허가를 얻은 뒤에야 하도록 명하시었다.
이렇게 되니 존호는 비록 상왕이라 하여도 갇힌 죄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찮고 눈칫밥 잡숫는 식구가 되시었다.
성 삼문 부자는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더구나 야심 후면 마주앉아 통곡하였다.
“저렇게 해놓고 어떤 짓을 할는지 알 수 있느냐.”
하는 성승의 말은 옳은 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상왕을 가두어 놓은 것은 다른 뜻이 있음 이라고 수군거린다. 혹시나 음식에 독을 넣어드리지나 아니할는지, 독약은커녕 아무렇게 죽이더라도 그 속에서 하는 일을 아무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돌아가시게 한 뒤에 어떠어떠한 병환으로 승하하시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닐까 하였다.
성승이나 기타 상왕을 생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염려 한 것은 이것이다. 상왕이 살아 계시고야 보복도 하고 어떠한 날에 흑백을 가리어 통분한 것을 씻기도 하려니와 상왕 한 분이 돌아가시고만 보면 만사가 수포에 돌아가고 불의의 무리들은 제 세상이라고 발을 뻗고 누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의인들--- 황보인, 김 종서 이하로 장차 죽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 이 영영 누명을 쓰고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성 삼문의 무리는 매우 초조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왕이 이들의 음모를 알리는 없지마는 그래도 그들이 마음 놓이지 아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서울에 모여 있지 못하게 하는 방책으로 박팽년을 전라 감사로 보내고 하 위지를 경상 감사로 보내고, 그 밖에도 다 상당히 높은 벼슬을 주어 하나씩 하나씩 외방으로 보낼 경륜을 하였다. 제일착으로 박팽년은 전라 감사로 갔으나, 하 위지는 비록 권도라 하여도 수양 대군 조정에 벼슬을 아니 받는다 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라는 상왕 때의 직함을 띤 채로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돌아가 자제들을 데리고 농사 일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그러하는 동안에 한 기회가 온다. 그것은 상왕이 선위하고 수양 대군이 즉위하신 문제에 대한 명 나라 조정의 의논이 정하여 수양 대군 아무로 조선 왕됨을 승인한다는 조칙을 가지고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명 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은 유월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 김하(金何)등이 갔던 일---상왕이 선위하시는 것을 승인한다는 명나라 조서(詔書)가 온 것은 두 달 전인 사월이다. 김하가 명 나라에 갔던 것이 지난해 윤유월이니까 거의 열 달이나 넘은 셈이다. 비록 말썽되던 일이지마는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새 왕을 승인하게 된 것이다. 왕이 상왕을 창덕궁에서 옮기어 금성 대군 집에 가둘 용기를 내신 것도 이것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소위 천사(天使)라는 명나라 사신이 오는 것은 정식으로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전하기 위함이다. 이때 명나라 사신은 윤봉(尹鳳)이었다.
윤봉은 의주(義州)에 건너서는 날, 조선 조정에서 마주 간접반원 신 숙주를 보고,
“신왕(新王)이 상왕을 유폐(幽閉)하였다 하니 참인가.”
하고 책망다운 질문을 하였다.
그 접반원은 땀을 흘렸다. 대개 명 나라 황제가 지난 사월에 왕께 보낸 조서 중에, 이라 한 구절이 있는 까닭이다. 왕은 항상 상왕을 우대하되 모름지기 소홀히 함이 없어라 한,이를테면 명령이다. 그런데 창덕궁에 계시던 상왕을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신 것은 결코 우대가 아니었다.
이 시절에 명나라 사신의 말이라면 실로 하늘 말과 같이 무서웠다. 실상 윤 봉이가 이런 말을 끌어낸 것은 한 번 트집을 잡아 보자는 속이요, 왕도 이러한 어려운 트집이 나올 줄 짐작하였길래 신 숙주 같은 중신을 국경까지 관반(館伴)으로 파견하시었던 것이었다.
“아니, 왕이 상왕을 유폐하신 것이 아니요. 상왕이 가끔 궁에서 나오시기를 즐겨하시기로 나오신 때 거처하실 곳을 권정(權定)한 것이 아마 간인(奸人)의 입으로 천조(天朝)에 오전된 가 보오.”
하고 말 부족한 신 숙주가 아니라 극력하여 변명하였다.
그러고는 사람을 달리어 서울에 이 뜻을 급보하였다.
의주에서 신 숙주가 올린 장계는 일천 백리 길을 밤 사흘, 낮 사흘에 땀 흐르는 파발말편에 실리어 서울에 올라 왔다.
이 편지에 왕의 놀라 심도 적지 아니하였다. 명 나라 사신이 그만한 트집을 잡는다고 대세에 무슨 변동이 있을 것도 아니지마는 그래도 그에게 책을 잡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일변 사람을 명하여 창덕궁을 정하게 수리하게 하고, 일변 친히 금성 대군 궁에 상왕을 뵈오러 가시었다.
왕이 마지막 상왕을 뵈오러 가신 것은 지나간 설날이니 벌써 반년 전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와을 뵈옵지는 못하였으니 정말 서로 대면하시기는 작년 윤유월 열 하루, 경회루에서 선위하시고 나서 사정전에 듭시었을 때다. 그동안이 일년이 되었다.
왕이 상왕을 뵈오러 오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상와은 놀라시었다. 상왕 따위는 다 잊어 버리었을 만한 때에 왕이 몸소 온다는 것이 웬일인고 이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실상 그동안 두어 달---금성궁에 이이하신 뒤로 말하면 상왕의 지위는 어느 대군 하나만도 못하였다.
상왕은 거절하실 것을 생각하시었다. 그러나 이 처지에 상왕은 거절하실 힘이 없으시다.
비록 오너라 하고 부른다든지 관노를 보내어 붙들어 가더라도 대항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왕은 왕을 만나시었다. 일년 동안에 두 분의 용모는 무척도 변하시었다. 상왕은 수양 숙부의 얼굴이 과연 왕자답게, 더욱 위엄과 윤택한 빛이 생긴 것을 놀라시고, 왕은 상왕의 얼굴에서 소년다운 빛이 전혀 사라지고 마치 인생의 고초를 다 겪은 중년 남자의 얼굴과 같이 노성하고도 초췌한 빛을 띤 것을 놀라시었다. 마음의 한 편 구석에 심히 감동되기 쉬운 인정을 가지신 왕은 기구한 인생의 행로에 감개가 아니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왕은 상왕을 위로하는 말씀을 많이 하시고 또 이튿날부터 다시 창덕구응로 이어하실 것과 지금 계신 집이 창덕궁과 연장하여 있으니 어느 때에나 소창하러 나오실 것도 권하시었다.
상왕은 창덕궁으로 다시 가라는 것도 귀찮게 생각하시고 또 이집에 가끔 소창하러 나오라는 것도 우습게 생각하시었다 이집 . ---숙부 되는 금성 대군이 상왕 당신을 위해서 쫓겨난 집이 잠시인들 상왕의 마음을 편안하시게 할 리가 없다.
그렇지마는 상왕께서는 입 밖에 내어 반대도 아니하시고 그저 들을 만하실 뿐이었다.
“여기도 좋소.”
하신 것이 유일한 대답이시었다.
마지막으로 왕은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과 그때에는 상왕께서도 왕과 함께 태평관(太平館)에 천사를 방문하실 것을 말씀하시었다.
“내가 무엇하러 가오?”
하고 상왕은 거절하시었으나 마침내 왕이 오늘 찾아오신 일이 이 일 때문이요, 창덕궁으로 도로 가시라고 하시는 것도 다 이 때문인 줄을 상왕도 대강 짐작하시었다.
왕은 상왕이 태평관에 명나라 사신 방문하기를 거절하시는 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신다.
새 왕이 상왕을 홀대한다. 두 분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 하는 것이 거짓 선전이요, 도리어 상왕과 왕과의 사이가 극히 친밀하신 것이 사실인 것을 명 나라 사신에게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까닭이다. 이것은 오직 명 나라 조정의 여론을 완화시키기 위하여서보다 조선 내의 민심을 완화하기 위하여서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왕은 잊어버림이 되시었던 상왕궁에를 몸소 찾아오시었고 상왕께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을 드린 것이다.
상왕은 마침내 왕의 청을 들으시어 왕과 함께 명사를 태평관에 방문하시었다. 그러할 뿐더러 상왕이 결코 창덕궁에서 쫓기어나신 것이 아닌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심일 후에는 상왕이 주인이 되어 창덕궁에 명사를 환영하는 어연을 배설할 것까지도 상왕이 허락하시었다. 실로 이 일이 성공된다 하면 왕이 상왕에게서 무리하게 왕위를 찬탈하고 또 그 후에도 상왕께 대하여 우대함이 부족하다는 시비를 명 나라에게서나 본국에서나 덜 듣게 될 것이다.
일거양득이란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왕은 매사가 뜻대로 되는 것을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으시었다.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과 훈련(訓練)도감(都監) 유응부(兪應孚)가 이날에 운검(雲劒)으로 뽑히게 된 것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의 계략에는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대개 운검이라 하면 검을 빼어 들고 왕의 뒤에서 왕을 호위하고 섰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운검으로 섰는 사람이 왕을 죽이려면 그야말로 일거수로 될 것이 아닌가. 이날에 왕이 동구 을 곁에 앉히고 명나라 사신을 대하실 예정이니 실로 왕과 동궁과의 생명을 성승과 유응부 두 사람의 칼날 밑ㅇ 있다 할 것이다.
“수양 부자는 응부가 담당할 것이니 다른 놈들을 군둥이 말으소.”
하고 장담한 유응부의 말은 조금도 보탬 없는 가장 확실한 말이다.
“그 담에 죽일 놈은 신숙주(申叔舟)야. 숙주는 나와 평생지교마는 죄가중하니까 불가부주(不可不誅)야.”
한 것은 성삼문이다.
“그렇고 말고. 숙주의 죄는 인지(麟趾), 명회(明澮)보다도 가중한 바 있어.”
하고 자리에 있던 동지들이 웅성하였다. 대개 명나라와 본국 민간에 대하여 선위 사건의 거짓 선전을 말은 자가 신 숙주인 까닭이다.
신 숙주는 “내가 맡으리라. 그놈의 모가지는 내가 베리다.”
하고 나서는 것이 형조정랑(刑曹正郞)이요, 상왕의 이모부되는 윤 영손(尹鈴孫)이다.
“정인지(鄭麟趾)의 늙은 모가지는 내가 맡았소.”
팔을 뽐내고 나서는 것은 김질이다. 그는 이번 모사에 가장 열렬한 급진주의자였다.
“가안(可安)인가. 이번 성사하면 수상(首相)은 자네 장인이 되어야 할 것일세.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하는 것은 성삼문이다. 가안(可安)은 김질의 자다. 그의 장인이라 함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을 이름이다. 대관 중에 이 일에 내통한 이는 정창손 뿐이다.
---이러한 의논을 할 것은 창덕궁에 어연이 있을 전날 밤이다.
이 밖에 장신(將臣) 박정(朴靖), 송석동(宋石同)이 각각 밖에서 창덕궁과 경복궁을 엿보아 안으로서 무슨 군호만 있으면 동하기로 하고 궁내에서는 잔치 중간에 일제히 일을 일으키어 왕과 세자와 정 인지, 신 숙주 등의 중신을 죽이고 명 나라 사신이 증인으로 앉은 자리에서 상왕을 복위하게 하시고 왕의 죄를 성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여반장이야.”
하고 그들은 맹세하는 술을 마시었다.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두 놈은 내가 담당하마.”
하고 늙은 성승의 눈에 불이 난다. 삼문은 정다운 듯이 아버지의 주름 잡힌 얼굴을 바라본다.
이튿날 창덕궁 광연전(昌德宮廣延殿)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큰 잔치가 벌어지었다. 대청 동쪽이 주인측의 자리가 되어 남으로부터 복에 차례로 처음에 상왕, 다음이 왕, 그 다음 이 동궁의 자리가 되고 서쪽이 객의 자리가 되어 역시 남으로부터 복에 차례로 윤봉(尹鳳) 이하부사 아울러 명 나라 사신 세 사람이 늘어 앉게 되고 복벽과 주, 잭석 좌우로는 본국 대관과 명 나라 사신의 수원이 벌여 서게 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좌의정(左議政)한 확(韓確), 우의정(右議政) 강맹경(姜孟卿), 좌찬성(左贊成) 신숙주(申叔舟), 이조판서(吏曹判書) 권람(權擥),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 병조판서(兵曹判書) 양정(楊汀)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현 공조판서(工曹判書) 김하 (金何),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나서 도리어 도승지(都承旨)가 된 한명회(韓明澮), 좌승지(左承旨) 박원형(朴元亨),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질(金礩),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 명나라 사신과 글 짓는 접반이 되기 위하여 전라감사(全羅監司) 박팽년(朴彭年)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이개(李塏) 등이 주인 편 좌우에 입시하게 되고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 훈련도감(訓練都監) 유응부(兪應孚)는 명예로운 운검(雲劒)으로 왕의 뒤에 칼을 빼어 들고 모시게 되었다.
광연전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풍악과 춤을 아뢰게 될 것임 삼천 궁녀 중에서 고르고 고른 꽃같이 아름다운 궁녀들은 비단 소매를 너흘거리며 배반 사이에 주선할 것이다. 어찌하였으나 조선의 힘으로 차릴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차린 잔치다.
왕은 미상블 다소의 근심이 없지 아니하시었다. 연락하는 석상에서 명 나라 사신한테 상 왕의 선위에 대하여 무슨 책이나 잡히지 아니할까 하는 것도 걱정이려니와 그보다도 이 자 리에서 상왕이나 또는 상왕을 사모하는자 중에서 누구가 상왕의 선위하시지 아니치 못하게 된 내막---즉 왕이 정 인지의 무리를 시키어서 하신 음모를 발설이나 아니할까 하는 것도 염려요, 그보다도 한 층더 나아가서 이 기화---명 나라 사신이 오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민심이 흥분되어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아니하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기회를 타서 왕 의 목숨을 엿보는 일이나 아니할까 하는 것도 근심이 되시었다. 본래는 무서움이 없던 왕도 왕이 되신 뒤에는 겁이 많이 늘으시어 주무실 때면 사벽에서 칼날이나 아니 나오는가 하시 고 의심 내실 때도 있었다. 그중에도 상왕(왕이실적에도)을 없이 할 말씀을 정 인지, 한명회 같은 무리에게서 들으신 때나,또는 혼자서 그러한 생각을 하신날 그러한 의심이 더하여 잠이 들지 아니하시었다. 비록 심복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때에는 의심이 난다. 어느 신하는 문종 대왕이나 상왕의 신하가 아니던가. 상왕을 배반하고 돌아선 정인지, 신 숙주의무리는 지금 왕을 배반하고 돌아 서지 말라는 법이 있나---이렇게 생각하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였다. 왕이란 결코 마음놓이는 자리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상감, 내일 운검을 폐하시겨오.”
하는 한명회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는 듯이 왕에게 들리었다. 등 뒤에 칼 빼어 들고 섰을 두 장수---분명히 속을 믿기 어려운 성승과 유응부---왕은 생각만 하여도 전신에 찬 기운이 돌았다.
“또 동궁께옵서는 명일 본궁을 지키심이 옮은가 하오.”
한명회는 이런 말씀도 아뢰었다.
왕은 밤을 잠 없이 지내시와 매우 신기가 불편하신 대로 경복궁을 납시어 운종가를 지내 시와 창덕궁으로 거동하시었다. 동궁은 명회 말대로 경복궁에 있으라 하시었으나 운검을 폐하라는 명회의 말은 듣지 아니하시었다. 대개 그것은 예에 어 그러질 뿐더러 또한 세상에 너무 비겁하다는 치소를 들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성승, 유응부, 제가 감히 나를 어찌하랴. 천명이 낵 잇지 아니하냐---이렇게 생각하시고 마음은 진정 하시려 하시었다.
예정대로 상왕이 수석에 앉으시고 다음에 왕이 앉으시고 그 다음 동궁이 앉을 자리는 비 이기로 되었다. 성 삼문은 그 빈 자리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침을 삼킨다.
운검 성승이 칼을 차고 바야흐로 전에 오르려 할 때에도승지 한명회가 문을 막아서며,
“운검 들지 말라 하옵시오.”
한다. 명회의 그 태도가 심히 오만무례하였다.
성승은 분김에 칼자루에 손을 대었으나 명회 뒤에 서있는 삼문이 눈짓하는 것으 f보고 말없이 계하로 내려서서 뒷문 밖으로 물려 나왔다. 뒤를 따라 삼문이 나온다.
“명회놈부터 먼저 죽일란다.운검을 안 들이는 것을 보면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이니 닥치는 대로 한 놈이라도 죽이는 것이 옳지 아니하냐.”
하는 것은 성승이 삼문을 보고 하는 말이다. 성승의 목에는 핏줄이 불룩거린다.
“아니올시다.”
하고 삼문은 손을 들어 아버지를 막는 모양을 하며,
“세자가 아니 왔으니 명회를 죽이면 무엇합니까. 오늘 일은 틀리었습니다. 후일 다시 기회를 보지요.”
한다. 이때에 유응부가 역시 칼을 들고 들어온다.
삼문이 유응부를 막으며,
“아니외다.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아니하니 하늘이 시키는 것이외다. 만일 여기서 거사를 하더라도 세자가 경복궁에서 기병을 하면 승패는 미가지니까 다른 날 상감과 세자가 함께 있는 때를 타서 일을 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한다. 유응부가 삼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어 화를 내며,
“아닐세. 일은 신속해야 하는 것이야. 공연히 지연하다가는 일이 누설이 될 염려가 있지 아니한가.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다 하더라도 모신적자(謀臣賊子)가 다 수양(首陽)을 따라 여기 있지 아니한가 오늘 그놈들만 다. 죽여버리고, 상왕을 복위하시게 한 뒤에 무사를 시켜 일대병을 거느리고 경복궁으로 지치어 들어가면 세자가 제가 어디로 도망한단 말인가.
설사 지략있는 놈이 있다하더라도 별 수 없을 것이야. 이 천재일우를 잃어버린단 말인가 이 사람아.”
하고 발을 구른다.
전정에서는 풍악이 일어난다. 이 풍악 한 곡조가 그칠 만하면 상왕전에 계시던 상왕과 왕이 가지런히 광연전으로 납시고 또 다른 전각에서 시각을 기다리던 명나라 사신도 광연전으로 들어올 것이다.
“늦네, 늦어.”
하고 유응부가 부득부득 들어가려는 것을 박팽년이 또 황망히,
“대감, 이게 만 저지계가 아니외다.”
하고 막았다.
“만전지계? 만전지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온 때를 놓지면 또 어느 때가 있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고 응부는 하릴없이 물러나왔다.
이렇게 일이 중지된 줄도 모르고 신숙주 죽일 것을 담당한 윤영손은 편상에 앉아 망건을 다시 쓰고 있는 숙주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역시 삼문이 눈짓하여 막아버렸다.
“왜? 왜?”
하고 윤 영손은 성삼문이 막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이번 일에 주장되는 삼문의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일이 모두 중지되는 것을 보고 김질은 그저 부정 창손에게로 달려갔다. 이때에 정창손은 우찬성으로 예복을 갖추고 바로 광연전으로 들어오려 하는 때였다---.
“오늘 운검을 폐하시고 세자께서 수가(隨駕) 아니하신 것은 천명이요, 오늘 일은 다 틀렸으니 먼저 상감께 고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그러면 부귀가 유여할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정창손은 잠간 주저하였으나 가만히 있다가 화를 당하는 것보다 왕께 이 일을 아뢰어 부귀를 누리는 것이 또한 전화위복하는 상책이라 하여 사위 김질을 데리고 왕이 계신 궁전으로 달려갔다.
때에 마침 왕은 곤룡포에 익석관을 벗으시고 명 나라 황제가 보낸 면류관(冕旒冠)과 황포(黃袍)를 입으시고 백옥홀을 드시고 연회장인 광연전으로 납시려 할 때였다.
정창손이 김질을 데리고 희망히 들어오는 거을 보고 왕은 무슨 일인가 하여 일변의아하고 일변 놀라운 생각으로 창손과 질을 바라보신다.
“소신 정창손 아뢰오. 지금성 삼문의 무리가 역모를 하오니 상감께옵서 시급히 처분 계옵시오.”
하고 정창손이 가장 근심스러운 빛을 보인다.
“무엇이? 성 삼문이?”
하고 곁에 섰는 한 명회를 돌아보신다. 한 명회는 오래전부터 성 삼문, 박팽년의 무리가 간흉하여 이심을 품을 염려가 있음을 누누이 왕께 아뢰었고 또 오늘도 세자를 본궁에 두고 운검을 물리라는 말씀을 아뢴 까닭이다.
한 명회는 자기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역모라 하니 그래 어떻게 삼문배가 역모할 줄을 정 찬성이 알았단 말요?”
하고 왕이 창손을 노려보신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의 사위 김 “ 질이가 평소에 삼문, 팽년의 무리와 추측하와 이번역모에도 참예하였다가 황천이 살피시와 제 마음을 돌리시와 소신께 말하옵기로 여기 데리고 왔사옵거니와 죄당만사요. 소신까지도 죽여줍시오.”
하고 눈물을 흘린다.
왕이 김질을 흘겨보신다.
김질을 무릎을 덜덜 떨고 이마로 마루 바닥을 두드리며,
“소신 죄당만사요. 죽여줍시오.”
하고 느껴 운다.
“그래 분명 역모를 하였단 말이냐?”
하고 왕의 음성도 흥분으로 떨린다.
“소신이 무엇을 아오리까마는 따라다니며 삼문, 팽년의 무리가 의논하는 것을 들었습니 다.”
“그래 무어라고 하더냐? 들은 대로 말하여라.”
하시는 왕의 눈에서는 불이 나려고 한다. 역모란 말도 불쾌하거니와 더구나 오늘과 같은 날 ---조선의 만인이 기껍게 왕을 추대하는 양을 사실로 보이려 하고, 그중에도 상왕과 왕과 사이에 왕위를 주고 받은 일이 가장 의합하게 된 것을 실지로 보이자는 오늘에 이러한 불쾌한 일로 파홍과 망신을 아울러 하게 된 것이 분하였다.
김 길은 성삼문 등이자초로 의논하던 것과 오늘 하려던 계획이며 하려다가 중지하게 된 연유를 아뢰되 극히 자세하게 아뢰었다. 그러나 자기가 그중에서 가장 열렬한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은 털끝만치도 입 밖에 눈치지 아니하였다.
“그래 너도 그 역모에 참예했더란 말이지?”
하고 왕은 당장에 김질을 죽이기라도 할 것같이 노려 보신다.
“전하, 김질이 아니면 누가 이 역모를 사전에 아뢰오리이까. 김질의 죄는 용서하시오.”
하고 한 명회가 곁에서 김질을 변호한다.
“환궁하리라.”
하고 왕은 오늘 연회도 다 잊어버린 듯이 부랴사랴 경복궁으로 돌아오시었다. 명 나라 사신과 백관에게까지도 왕이 갑자기 미령하시어 환궁하신 줄로 말하게 하시고 권람과 한 명회와 신 숙주 등 극히 심복인 몇 중신만 따르라 하시었다. 그리고는 상왕이 주인이 되시고 제양 군과 정 인지가 왕을 대표하여 사신과 수작이 있었으나 흥이 날 리가 없었다. 사신은 무슨 비치를 채었는지 곧 사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환궁하신 왕은 편전(便殿)에 좌정하시고 숙위장사(宿衛壯士) 모으신 뒤에 명을 내리어 제 승지를 부르라 하시었다.
승지 구치관(具致寬), 윤자운(尹子蕓), 김질등이 들어온 뒤에 성삼문(成三問)이 무슨 일인 가 하고 달려 들어와 추보로 옥좌 앞에 나아가,
“좌부승지 성삼문이요.”
하고 왕의 앞에 부목하려 할 때에 왕의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 邦霖)이 달려들어 우선 철여의로 삼문의 어깨를 한 개 후려갈기고 발을 번쩍 들어 삼문의 목을 낼 밟으며,
“이놈, 바로 아뢰어라.”
하고 외친다. 충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삼문은 일이 탄로가 난 것을 깨달았고 오늘 왕이 갑자기 복통이 난다고 하여 어연에 참예 도 아니하고 급거이 돌아온 연유도 알았다.
“이놈, 네가 죽을 죄를 몰라?”
하고 왕이 발을 구르신다.
조 방림은 손수 삼문의 두 팔을 잡고 발로 삼문의 뒷가슴을 으스러지어라 하고 냅다 차서 붉은 오라로 잔뜩 결박을 지운다.
“무슨 일인지 모르거니와 이것은 과하지 아니하오?”
하고 삼문은 고개를 들어 조 방림을 바라본다.
왕이 물으시는 말씀에는 대답이 없고 조 방림에게 말을 붙이는 삼문의 태도는 왕의 오장을 뒤집어 놓는 듯이 더욱 미웠다.
“이놈 듣거라. 네 내 녹을 먹거든 무엇이 부족하여 오늘 우리 부자를 해하려고 역모를 하였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
하시는 왕의 말씀에 삼문은 이윽히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허허 하고 웃으며,
“그런 말씀은 누가 아뢰었는지 아뢴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시오.”
하고 얼굴이 홱 풀리어 태연하게 된다.
“김질아, 네 나와 삼문과 면질하여라.”
하시는 왕의 명을 받자와 김질이 덜덜 떨리는 무릎을 끌고 나와 삼문의 옆에 두어 걸음 떨어지어서 선다.
삼문이 김질을 바라보며,
“이 사람,상감께 무슨 말씀을 아뢰었나?”
하고 빙그레 웃는다.
“자네가 그러지 아니하였나. 승정원 입직실에서 그러지 아니하였나. 그때에……근닐에 혜성이 뜨고 사옹원(司饔院)에서 시루가 울었으니 반드시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 자네가 날더러 그러지 아니하였나. 내 말이 거짓말인가?”
“그래서?”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자네같이 요새에 상왕께옵서 창덕궁 복문을 열고 유(瑜=금성 대군)의 구가에 왕래하시게 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필시 한 명회같은 놈들이 상왕을 좁은 골목에 드시게 하고 역사를 시켜 담을 넘어 죽이게 하려는 꾀라고---자네가 날 더러 안 그랬나, 바로 승정원 대청에서.”
“그래서?”
하고 삼문은 옳다는 듯 비웃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러고 자네가 날더러 네 장인헌테 이 말을 하라고, 그래서 우선 윤사로(尹師路),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의 무리부터 없애버리고 상왕을 다시 세우면 뉘라서 좇지 아니하랴 고 그러지 아니하였나. 내 말이 다 옳지 아니한가.”
하고 김 질의 얼굴은 처음에는 붉었으나 삼문의 눈살에 전신에 피가 다 말라 버리는 듯이 점점 얼굴이 파랗게 되고 입술이 말라 경련하고 망건 편자에는 수없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자네 장인 정창손헌테 그 말을 전하였던가.”
하고 삼문은 또 한번 웃는다.
김질은 대답이 없다. 두 무릎이 마주친다.
“그래 그뿐인가. 더 한 말은 없나?”
하고 성 삼문의 말은 아직도 부드럽다. 하도 어이없고 기막혀서 나오는 부드러움이다.
성삼문과 김질의 양인 대질하는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울려날 때마다 왕과 좌우에 입시 한 신하들의 등골에는 찬 기운, 더운 기운이 번갈아 흐른다.
김질이 아무쪼록 자기는 빼어가면서, 또 왕이 듣기 싫어하실 말씀을 빼어가면서 지루하게 모복하려던 전말을 말하는 것을 삼문이 고개를 흔들어 막으면서,
“그만해라. 네 말이 다 옳지마는 좀 깐깐하다.”
하고 다시 왕을 바라보며,
“더 말할 것 있소. 상왕께옵서 춘추가 높으시어서 선위하신 것도 아니시괄못하심이 있어서 하신 것도 아니시오. 나으리라든가 정 인지,신 숙주, 한 명회 같은 불충한 무리들에게 밀려서 선위를 하옵신 것이니까 복위를 원하는 것은 인신소당위(人臣所當爲)가 아니요? 다시 물을 것 있소. 그래서 오늘 나으리 부자를 죽여서 천하의 공분을 풀려고 하였더니 일이 뜻 같지 못하여서 이 꼴이 되었소.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왕을 삼감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왕은 삼문의 태연한 태도와 불공한 말에 더욱 진노하시와,
“이놈 네가 입으로 충효를 부르며 감히 나를 배반하니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하시고 무슨 말씀을 더 하시려는 것을 삼문이 막으며,
“배반이란 말이 되어. 내가 어찌하여 배반이란 말이요? 우리네 심사는 국인(國人)이 다 아는 것이야. 나으리 같이 남의 국가를 도적하는 사람도 있거든 삼문이 인신이 되어 그 군 부가 폐함이 되심을 차마 보지 못함이지 배반이란 말이 되오? 앗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언필칭 주공(周公)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였소? 어디 주공이 이런 짓 하였읍네까. 성 삼문이 한 일은 천무이일(天無二日)이요, 민무이주(民無二主)인 연고요. 앗으오, 그리 마오.”
하고 왕을 책망한다.
왕이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시어 발을 구르시고 소리를 높이시어,
“그러하거든 네 어찌하여 수선(受禪)하는 날 막지를 못하고 오늘 와서 나를 배반한단 말이냐.”
하신다. 명 나라 사신이 온 날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왕께는 더욱 한이 되는 까닭이다.
“힘이 못 미쳤소. 마음이 없었겠소? 내가 나서야 막지도 못할 것이요. 돌아가 죽으려 하였으나 죽기만 하면 무엇하오. 도사무익(徒死無益)이겠기로 훗일을 도모하려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이 옥이구려.”
하고 삼문은 분과 한을 못이기는 듯 한숨을 쉬고 힘없이 고개를 숙여버린다.
“이놈, 네가 칭 신(稱臣)을 아니하고 날더러 나으리라 하니 웬 말인고? 네가 내 녹을 먹었거던 녹을 먹고 배반함이 반복이 아니고 무엇인고? 상왕을 복위한다 하나 실은 사욕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냐.”
하신다. 삼문이 고개를 번쩍 들어 노한 눈으로 왕을 노려보며 소리를 가다듬어,
“상왕이 계시거든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를 삼는단 말이요? 또 나는 나으리의 녹을 먹은 일이 없소. 내 말이 못 믿거든 내 집을 적목하여다가 계량하여 보오. 나으리께 받은 것은 고대로 쌓아 두어씅니 도로 가지어 가오. 나으리가 하는 말은 다 허망무가취(虛妄無可取)야. 그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요?”
하였다. 왕은 참다 못하여,
“이봐라 네 이놈을 불로 지지어라.”
하고 발을 구르시고 앉으락 일락 하신다.
무사(武士)는 청동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일두와 화젓가락을 묻어서 달인다. 번쩍 빼어 드는 인두는 불핀 숯과 같이 뻘겋게 달았다.
무사가 달려들어 삼문의 옷을 찢어 벗긴다. 왕은 속히 하라고 성화같이 재촉하신다.
왕은 일변 성 삼문을 인두로 지지어가며 이번 역모에 공모자가 누누 누구냐고 국문을 계속하고 일변 승지 윤자운(尹子蕓)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성 삼문 등이 상왕을 죽이려는 역모가 발각된 일과 시방 공모자를 공초받기로 하여 국문한다는 말을 전하게 하여 가로되,
“성 삼문이 심술이 불초하지마는 뙈기 학문이 좀 있기 위 정원에 두었삽더니 근일에 ldf에 실수하는 것이 많사옵기로 예방 승지를 공방승지로 고치었삽더니 그것을 마음에 분히 여기 어 말을 지어 가로되 상왕이 유의 집에 왕래하시며 그윽히 불측한 일을 도모하신다 하고 또 대신들을 다 죽이려하옵기로시방 국문하나이다.”
하시었다. 이로 보건대 성 삼문이 상왕을 해하려 하는 음모를 하기 때문에 괘씸하여 국문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전하려 온 윤 자운에게 상왕은 술을 주시었다. 혹시 상왕은 윤 자운이가 전하는 왕의 말씀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대개 삼문 등은 이 일을 도모할 때에 상왕께는 아시게 하 지 아니한 까닭이다. 만일 상왕이 이 일을 아신다 하면 불행히 일이 패한 뒤에 화가 상와께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음이다.
삼문의 팔과 다리에는 불같이 뻘건 인두가 번갈아 닿아지글지글 살이 타고 기름과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아니하고 누구와 같이 하였다고 불지도 아니하였다. 또 불어낼 필요도 없다. 김 질이가 일러바치었으면 다 알 것이다. 그렇지마는 그렇다고 자기의 입으로 둥지를 불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왕은 삼문의 입으로서 잘못했다는 말과 또 누구누구와 함께 하였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뻘겋게 단 화젓가락으로 넓적다리와 장딴지를 뚫기도하고 두 팔과 손바닥을 뚫기도 하였다. 고기 굽는 냄새와 같은 살과 기름 타는 냄새가 대궐 마당에까지 들이고방 안에는 노란 연기가 피어 오른다.
뻘겋게 달았던 화젓가락과 인두는 삼문의 피와 기름으로 하여 순시간에 식어버린다.
뿌지직뿌지직한는 소리가 그칠 때마다 삼문은,
“이놈들아, 쇠가 식었구나. 더 달게 하려무나.”
하고 소리를 지른다.
왕은 더욱 진노하여,
“이봐라, 그놈이 본시 흉악한 놈이라 불이 뜨거운 줄을 모르나보다. 네 쇠꼬창이를 불이 다 되도록 달궈서 놈의 배꼽을 쑤시어라. 그래도 아픈 줄을 모르고 제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가 보리라. 그러고 저놈이 만일 기색하거든 냉수를 뿜어서 깨워 가며 지지어라.”
하신다. 이는 성 삼문이 아픈 것을 못이기어 가끔 꼬빡하고 조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불같이 뻘건 쇠꼬창이가 삼문의 배꼽을 지진다. 기름이 보글보글 끓고 그 기름에 불길이 일어난다. 꼬빡 졸던 삼문은 번쩍 눈을 떠서 자기가 당하는 것이 무언인 것을 보더니,
“성 삼문의 몸뚱이가 다 타서 없어지기로 성삼문의 가슴에 박힌 일편 충성이야 탈 줄이 있으랴.”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다.이 소리에 놀래어 쇠꼬치는 무사가 한 글음 뒤로 물러선다.
삼문의 배에서 붉은 피가 한없이 흐른다.
이때에 신 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씀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능께옵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 만세에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 지 극흉 극악하게 도니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든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 듯 싶으냐.”
숙주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감히 삼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왕은 숙주를 명하여 전후(殿後)로 피하게 하신다.
삼문은 점점 기운이 엇어진다. 힘써 몸을 바로 잡으려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눈이 감긴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할 때에 왕이 무사를 명하여 냉수를 몸에 끼얹으라 하신다.
삼문이 깜짝 정신을 차리어 옥좌에 앉으시어 숨소리가 높으신 왕을 바라보며,
“나으리 형벌이 너무 참혹하구려.”
하고는 그만 기절하여 쓸어진다.
왕은 기절한 삼문을 한편을 비켜 다시 피어나도록 약을 쓰라 하고 다음에 박팽년을 앞으로 불렀다.
왕은 이번 일에 잃어버릴 인재를 아끼거니와 그중에도 박팽년을 더욱 아끼었다. 그도 그럴 만하다. 집현전 문학지사 중에 가장 이름난 사람으로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석형(李石亨),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등이 있어 삼문의 문(文), 위지의 책소(策梳), 성원(誠源)의 경사(經史), 개의 이 모양으로 각각 특장이 있었지마는, 그중에도 팽년은 모든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경학, 문장, 필법 어느 것이나 깨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 까닭으시 왕은 박팽년을 아끼었다.
그뿐 아니라 세조가 정란을 마치고 영의정이 되어 부중에 대연을 베풀었을 때에 이러한시를 지은 것이 있었다.
왕은 이 시가 자기의 공업을 칭송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현판에 새기어 부중에 걸게 하였다. 이 때문에도 박팽년은 아까왔다.
그래서 한 명회를 시키어 팽년더러,
“네, 내게 항복하거나 이 일을 모르노라고만 하라. 그러면 살리리라.”
하고 귓속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었다. 그러고 마루에 흐른 성 삼문의 피를 가리키며,
“나으리, 이 피를 보시오. 이것이 충신의 피요.”
하고 무릎을 꿇어 감히 그 피를 밟지 못할 양을 보인다.
나으리란 팽년의 말에 왕의 비위는 와락 뒤집힌다.
“삼문이 나를 불러 나으리라 하더니 너도 나으리라 한단 말이냐. 어찌하여 네 내게 칭신을 아니한단 말이냐.”
하고 무사를 tlztj 주먹으로 팽년의 입을 쥐어지르게 하신다. 그래도 팽년은 굴치 아니하고 말끝마다 왕을 불러 나으리라 하고 자기를 불러 나라고 한다.
“네가 이미 내게 신을 일 걸었고 또 내 녹을 먹었거든 이제 와서 칭신을 아니하면 무엇한단 말이냐.”
하고 왕은 팽년을 비웃으신다.
“내가 상왕의 신하요, 나으리 신하가 아니어든 나으리 앞에 칭신할 리가 있소. 죽여도 안 될 말이요.”
하고 팽년이 입으로 피를 뿜는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지금까지는 칭신을 하였단 말이냐.”
하고 왕의 어성은 높인다.
칭신을 할 리가 있소 내가 충청 감사가 “. 되어 나으리에게 게목을 보낼 때에 일찍 신이라고 한 일이 없고, 또 나으리가 주는 쌀 한 알갱이도 먹은 일이 없소. 내 말을 못 믿거든 제 목을 고람이라도 하시구려. 또 나으리가 녹이라고 준 것은 딴 곳간에 꼭꼭 쌓아 두었으니까 이제는 도로 가져가시오. 박팽년이 굶어 죽을지언정 두 임금의 녹을 먹을 사람이 아니요.”
하고 엄숙하기 추상과 같다.
“이봐라. 그놈의 입에서 나으리란 소리가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저리 밀어 놓아 다시 생각하여 보라 하여라.”
하시고 왕은 유응부(兪應孚)를 부르신다.
유응부는 정이품(正二品)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위풍이 늘름한 군복을 입고 투구 밑으로는 희뜩희뜩한 반백의 귀 밑 터럭이 보인다.
왕은 유응부를 보시고,
“너는 나깨나 먹고 귀 밑이 허연 것이 의리를 아람즉하거든 저 무지한 놈들의 꼬임에 든단 말이야? 그래 어찌할 작정이냐?”
하시고 효유하는 어조로 물으신다.
응부는 허리도 아니 굽히고 고개도 아니 숙이고 옹녀히 왕을 바라보며,
“오늘 한 칼로 임자를 없애버리고 옛 임금을 회복하려다가 불행히 간사한 놈의 괍ㄹ한 바가 되었으니 인제 하길 무엇하오. 임자는 빨리 나를 죽이오.”
하고 노한 눈을 부릅떠 왕을 흘겨본다. 왕은 응부의 눈에서 불이 번쩍함을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놈, 무엇이 어찌하여? 상왕을 핑계로 사지긍ㄹ 도모하고서는…….”
하시고 왕은 분을 못이기시어 주먹을 불끈 쥐시고 이를 가신다. ‘나으리’란 말도 비위가 뒤집히려는 하물며 ‘임자’라고 함이랴. 당장 유응부의 간ㅇ르 내어 씹고 싶도록 분하시었다.
“사직을 도적한 것은 수양 자넬세. 우리네는 무너진 강상을 바로잡으려다가 이렇게 자네 손에 붙들린 것일세. 잔말 말고 어서 죽이게 죽여.”
하고 응부가 발을 탕 구르니 대궐이 흔들린다. 전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실색한다. 지금 이라도 손에 칼이 하나 있었으면 하였으나 인제는 결박된 몸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은 ‘자네’라는 응부의 말에 참다 못하여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시며 입에 거품을 무시고,
“이 놈을--이 대역 무도한 놈을 세워 놓고 껍직을 벗기되 개 껍질 벗기듯이 하여라.”
하시고 발을 동동 구르신다.
무사들이 번쩍번쩍하는 식칼 같은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응부의 옷을 찢어 벗기고 세워놓은 대로 목에서부터 등과 가슴과 팔로 껍질을 내려 벗긴다. 칼이 지나간 뒤를 따라 방울방울 피가 흘러내리고 껍데기 벗겨진 살은 씰룩씰룩 경련한다. 쩍쩍 하고 껍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응부는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몸도 꼼짝 아니하고 꼿꼿이 서 있다. 응부가 삼문, 팽년 등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서생은 불가여모사라더니 과연이로구나. 아까 내가 한 번 칼을 써 보려 할 때 에 니희 놈들이 굳게 막아서 천재일시를 놓치어버렸으니 이런 분할 데가 있나. 이 놈들 날더러 만전지계가 아니라고 하였지? 그래 이 꼴 되는 것이 만전지계냐. 엑끼 못생긴 놈들 같으니 너히 같은 놈이 사람이 무슨 사람이야. 개 같은 놈들, 못생긴 놈들.”
하고 이를 간다.
누구누구와 함께 역모를 하였느냐고 묻는 데는 유응부는 다만 한 마디, 무슨 물을 “말이 있거든 저 썩어진 선비놈들헌테 물으려무나.”
하고는 이내 굳게 입을 닫히어버리고 만다.
왕은 더욱 노하여 단근질을 하라고 명하신다. 성 삼문을 지지던 쇠꼬창이를 뻘겋게 달게 하여 응부의 불두덩을 지지니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그 기름에 불이 붙어 번쩍분쩍 불길이 일어나고 살점이 익고 타서 문들어지어 떨어진다.
“이놈, 그래도 항복을 아니해? 그래도같이 한 사람을 안 불어?”
하고 왕은 소리를 지르시고 앉으락 일락 진정을 못하시도록 분통이 터지신다.
응부는 왕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대답도 아니하고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꼿꼿이 서서 흥종 같은 어성으로,
“이놈들아, 쇠꼬창이가 식었구나. 더 달궈 오너라.”
하고 종시 항복을 아니한다.
왕은 하릴없이 응부르 물리라 하고 이개(李塏)를 끌어내어 단근질을 시작한다. 이 개는 서서히 왕을 바라보며,
“여보, 이게 무슨 형벌이요?”
하고 물었다. 과연 이런 형벌은 걸주 이후에는 없는 것이다. 왕은 무료하여 더 물으시지 아 니하고 하위지(河緯地)를 불러낸다.
하 위지는 상왕이 선위하신 뒤에 벼슬을 버리고 선산항제로 내려갔었으나 이번에 동지들에게 불려 올라왔던 것이다.
왕은 위지를 보시고,
“이놈, 너도 저놈들과 같이 역모를 하였지?”
하고 물으신다.
“참칭왕(僭稱王)을 패하고 상왕을 복위하시게 하려고 하였지요.”
하고 위지는 한숨을 쉰다. 불행히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어찌해서 그랬어? 벼슬이 부족해서 그랬느냐?”
하고 다시 물으신다.
“벼슬? 나으리가 영의정을 주기로 받을 내요? 악을 치고 의를 붙들자는 것이요.”
하고 극히 선선하게 대답한다. 그는 본래 침묵하고 또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문종대왕이 승하하시고 상왕께서 사위하신지 얼마아니 되던 어떤 날 박 팽년이하 위지를 찾아 왔다가 비를 만나서 위지에게 우비를 빌어 입은 일이 있다. 그때에 위지는 시 한 수를 지어서 팽년을 주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이란 것이다. 첫 연(聯)은 남아가 예나 이제나 모름지기의를 위하여 살고 죽을 것을 말한 것이요, 아래 연은 사생을 같이 하자는 뜻을 말한 것이다. 이 시를 받은 팽년은 다만 눈으로 알았다는 뜻을 표하였던 것이다.
왕이 다른 사람과 같이 위지에게도 악형으로 항복을 받으려 할 때에 위지는 다만,
“내가 반역일 것 같으면 죽일 것이지, 더 물을 것이 무잇이요?
하고 다시 말이 없다.
왕은 악형도 지리해지고 또 악형했자 신통한 것이 없을 것을 알아서 화로를 물려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성삼문을 향하여 그 같이 한 사람이 누구누구인 것을 물었다. 일이 이렇게 다 발각이 된 뒤에 숨길 것이 없다고 삼문은 선선하게 대답한다.
지금 나으리가 다 물어보지 안 했소 “ ? 박팽년, 유응부, 하위지, 이개가 다 내당이요.” 한다.
“네 아비 승이 운검으로 들어가면 나를 죽이려 하였지?”
하고 왕이 물으신다.
“그랬소. 내 아버지가 이 일에 아니 참예할 리가 있소.”
하고 삼문이 자긍하는 듯이 대답한다.
“또 그 담에는 누가 있어?”
하고 그래도 더 알아보려고 왕이 물으실 때에 삼문은,
“내 아비도 아니 숨기거든 다른 사람을 숨기겠소? 그 밖에는 더 없소. 오, 김질이 있군.”
하고 웃는다. 김질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때에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붙들려 들어온다.
왕은 그를 고문하였으나 그는 모른다고 한다. 왕이 삼문을 보고,
“희안도 네 당이지?”
하고 물었다.
“희안은 참말 애매하오. 나으리가선조 명사를 다 죽이고 인제 이 사람 하나 남았으니 이 사람을랑 죽이지 말고 쓰시오. 현인이 멸종이 되면 나라 꼴이 되겠소? 희안은 현인이요. 또 애매하니 후일에 죽이더라도 아직은 살려 두고 쓰시오.”
하는 삼문의 말은 실로 간절하다.
왕은 삼문의 말을 옳이 여겨서 희안을 놓기로 하였다.
악형도 다 끝난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가 한 편 구석에서 나서며,
“소인이 삼문 배의 역모를 아옵고 진즉 진계하려 하였사오나 사실을 더 알아보려고 늦었사옵니다. 여량부원군(礪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와 그 아내 민씨와, 또 전 예조판서(禮曹判書) 권 자신(權自愼)과 그 어미 최씨가 다 이 일에 간참한 줄로 아뢰오.”
하고 일러바친다.
이휘(李徽)는 성 삼문 등과 같이 일을 의논한 사람중에 하나다. 이 일이 탄로되어 성 삼문이 국문을 당하게 되매 혹시나 자기 이름이 나오지나 아니할 하여 전전긍긍하였으나 삼문은 이미 알려진 사람 밖에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유성원(柳誠源)도 늙은 어머니가 계신 것을 생각하고 말하지 아니하였고 이 휘는 늙은 아버지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지 아니 하였다.그러므로 가만히만 있었으면 이 휘도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휘는 안심이 되지를 아니하였다. 더구나 김질이 큰 공명을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 공명을 못한 것이 분할뿐더러 또 어느 때 김질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송현수, 권 자신을 걸고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공조참의 이 휘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기한 바와 같은 칭찬을 이 휘는 받지 못하고 성 삼문 등의 무서운 눈질만 받아 몸에 오한이 나도록 몸서리를 치었다. 그는 집에 돌아오는 길로 병이 나서 누웠다. 그는 악한 일을 먹고 삭일 만한 뱀의 똥집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송현수, 권 자신을 이번 기회에 없이할 결심을 하였으나, 해도 이미 다 간 오늘에 계속하여 잡아다가 국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만하고 내전에 들어가 편히 쉬고 싶으시었다.
왕도 너무 격렬한 흥분과 참혹한 광경예 진저리가 나고 심신이 피곤하신 것이다. 맥이 풀리는 듯하시었다.
“이놈을 끌어내어 오차를 하여라.”
하는 명령을 도승지 한명회에게 내리시고는 옥좌에 일어나시어 뒤도 안 돌아보시고 내전으로 듭시었다 성 삼문 유응부 등은 눈을. , 들어 왕이 문으로 나가시는 뒷모양을 바라본다.
여름날 기나긴 해도 인왕산에 거의 올라앉고 대궐 추녀 끝에서는 저녁까지가 짖는다. 구경하면 여러 신하들도 모가지와 팔다리 힘줄이 들과 같이 굳어진 듯하였다.
성삼문은 형장으로 가는 길로 무사들엑 끌려 나서고 박팽년, 유응부, 이 개, 하위지의 차례로 끌려 나선다.
삼문은 옛 친구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현주(賢主)를 도와 나라를 태평케 하소. 삼문은 지하에 돌아가 옛 임금께 뵈오려네. 자 가자.”
하고 대궐을 나섰다. 영추문(迎秋門) 협문 밖에는 죄수를 실을 수레가 놓이고 죄수의 가족들이 죽기 전 한 번 마지막 볼 양으로 모여 섰다.
조그마한 판장문이 열리고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성 삼문이 먼저 사람들의 눈앞에 나서서 그의 눈이 지는 별에 번쩍할 때에 가족이나 아니나보는 사람들이 다 소리를 놓아 울었다.
이 개와 하위지 두 사람은 제 발로 걸어나오나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성승, 박정 등은 모두 몸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여 군사들에게 붙들려 나온다.
삼문은 수레에 오르며 소리 높이 시 한 수를 읊는다---.
번역하면 이러하다 ---.
“북을 쳐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날이 저물었구나. 황천에 주막이 없으니 오늘 밤을 뉘 집에서 잘꼬?”
다 읊고나니 삼문은 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내리고 보고 듣는 자도 느껴울지 않는 자가 없다.
죽을 사람들의 수레는 삐걱 소리를 내며 육조 앞 넓은 길로 나서서 천천히 나간다. 수레에 ‘역적 성 삼문’이라 이 모양으로 먹으로 대자로 쓴 기를 걸고 또 등에도 죄목과 성ㅁ여 을 써 붙이었다. 길 좌우에는 장안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모여 섰다.
“충신들이 죽는구나.”
하는 한탄겨운 속삭임이 사람들 사이로 바람과 같이 돌아가고 그 피투성이 된 참혹한 모양이 바로 앞에 지나갈 때에는 다들 입술을 물고 고개를 돌린다.
삼문의 다섯 살 된 딸이 아버지의 수레 뒤를 따라가며,
“아버지, 아버지! 나도 가, 나도 가요!”
하고 발을 구르고 운다.
삼문이 돌아보며,
“오, 울지 말아. 네 오라비들은 다 죽어도 너는 계집애니까 살 것이다.”
하고 종이 따라 울리는 술을 허리를 굽히어 받아 마시고 또 시 한 수를 읊는다---.
이개(李塏)도 수레에 오를 때에 한 시를 읊었다---.
첫 연은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때에는 목숨이 우정같이 중하지마는 의를 위하여 죽을 때에는 새털같이 가볍다는 뜻이요, 아래 연은 문종 대왕의 고명을 저버리지 아니하여 오늘의 죽음을 취하노라는 뜻이다.
일행이 황토마루를 지날 때에 왕은 김질(金礩)과 금부랑(禁府郞) 김명중(金命重)을 시켜 한 번 더 성 삼문 이하 여러 사람이 뜻을 돌리기를 권하였다. 뜻만 돌리면 죽기를 면할 뿐더러 높은 벼슬로써 갚으리라 하심이었다.
삼문은 붓을 들어, 이 모 미 주거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삼각산 “제 이봉에 락락쟝송되어이셔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 한 편을 지어 쓰고, 이 개도 붓을 들어,
“가마귀 눈비마자 희는 듯 검느미라야광명월이 야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주리 이시랴.”
하였고 박팽년은,
“금생려슈라 한들 믈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유이나며 아모리 녀필종부라 한들 님마다 조츨소냐.”
하였다. 김명중이 팽년을 향하여,
“글세 왜 노친이 계신데 말 한 마디면 펴일 일을 이 화를 당하시오?”
하고 다시 마음 돌리기를 권할 때에 팽년은 입이 아파 말은 못하고 다시 붓을 들어,라고 써서 보였다. 김질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 하였으나 팽년은 더러운 말은 아니 듣는다 하는 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유응부는 말이 없이 다만 눈만 한 번 흘겨볼 뿐이요, 김질, 김명중 등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아니한다. 성승과 박 정도 그러하였다. 하위지는 오직 잠잠할 뿐, 아니 움직이기 산과 같았다.
형장이 군기감(軍器監) 앞에는 상왕의 외숙되는 권자신(權自愼)과 그 어머니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부인(夫人) 최씨(崔氏)의 김문기(金文起), 윤 영손(尹鈴孫), 송석동(宋石同) 등이 잡혀와 있었고 성삼문의 아우 삼고(三顧), 삼빙(三聘), 삼성(三省),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아우 대년(大年), 기년(耆年), 영년(永年), 인년(引年)등이 벌ㅆ 결박되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성원(柳誠源)과 허후(許詡)의 아들이요, 이개(李塏)의 매부인 허조는 잡히기 전에 자살하였다.
그날 유 성원은 성균관에서 여상하게 제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무론 오늘 일이 감쪽같이 되리라고 믿고 그 결과가 알아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밖에 나갔던 어떤 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와 유성원을 보고 성 삼문 등이 잡히어서 국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에 성원은 명륜당 앞 뜰 은행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성원은 학생이 전하는 말을 듣고 손에 들었던 부채를 던지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성원은 곧 나귀를 내어 타고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의아하는 부인더러 술을 내오라 하여 그 노모께 한 잔을 드리고 부인께도 술을 권하고 귀련 (貴蓮), 송련(松蓮) 두 아들을 불러 남아가 언제 죽을 때를 당할는지 모르는 것이니 아무 때에 죽더라도 비걱한 모양을 보이지 말고 태연 자약하게 죽어야할 것을 말하고는 아무도 뒤를 따르지 말라 하고 혼자 사당으로 올라가 배례한 뒤에 찼던 칼을 빼어들고,
“불효 성원이 두 번 가명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죽습니다.”
하고 그 칼로 목을 찌르고 자진하였다.
오늘 남편이 하는 일이 수상하고 또 사당에 첨배하고 오래 돌아 오지 아니하는 것을 근심 하여 달려갔을 때에는 성원은 벌써 피에 떠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부인은 성원의 목에서 칼을 빼었으나 가버린 목숨은 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금부 나졸이 달려들었다. 아들 귀련, 송련 형제를 잡아 앞세우고 성원의 시체를 지우고 군기감 앞으로 돌아왔다.
유 성원의 시체가 형장에 왔을 때에는 성 삼문은 벌써 사지를 찢기고 목을 잘리어 전신이 모두 여섯 토막으로 나뉘었었다 그러고 . 그의 눈 감지 못한 머리는 상투로 끈을 삼아 그의 죄명과 성명과 함께 높다랗게 새로 세워 놓은 시렁에 대롱대롱 매어달리었다.
성삼문의 다음이 박팽년이다. 그 다음이 이 개, 유응부,하위지, 성승, 박정, 송석동, 권자신이 차례로 찢어 죽이고, 그 다음에 상왕의 외조모인 화산부원군 부인 최씨를 찢어 죽이고, 다음에 유 성원의 시체를 찢고 그 나머지는 날이 저물어서 내일에 죽이기로 하고 황쇄 족쇄하여금부로 옮겨 가두었다.
이 일이 있는 동안에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이휘(李徽)등 문무 백관이 벌여 서서 형벌 행하는 것을 감독하고 구경하였다.
밤이 들어 백관이 각각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어디선지 모르게 돌팔매가 날아오고 ‘정 인 지야’, ‘신 숙주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드릴어서 대관들은 모든 군사와 무사의 옹위를 받았다.
피비린내 나는 형장에는 창검 든 군사 수십인이 죽은 이들의 머리와 몸뚱이를 지키노라고 파수를 보았다. 여름 달빛이 피묻은 머리를 비추어 감지 못한 눈이 번쩍 번쩍할 때에는 군사들도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튿날은 도리어 더욱 참혹하였다.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죽던 피묻은 자리에서 육십여 명 어린 자손들과 연루자들이 죽었다. 젖 먹는 어린것까지도 죽여버리라는 엄명이요, 만일 그들의 아내 중에 잉태한 자가 있거든 해산하는 것을 지키어 나오는 대로 남자여든 죽이라 하였다.
그때에 죽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그중에서 중요한 사람들 몇을 들면 이러하다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거든 거기 무슨 중요하고 중요치 아니한 차별이 있으 랴마는 가장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이를 골라서란 말이다).
첫째 성 삼문이 집안을 말하면 삼문 부자가 이번 사건에 주범으로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삼 형제는 그 조부 성승과 아버지로 하여서, 현, 택(澤), 무명(無名), 금년생(今年生) 네 어린 아이들은 그 증조부 승과 조부 삼문으로항 서 참혹하게 죽었고, 삼문의 아우 되는 부사(府使) 삼빙(三聘), 정랑삼성(正郞 三省), 장신삼고(將臣三顧)는 그 아버지 성승으로 하여 주검이 되었다.
박팽년의 집으로 말하면 그 아버지 판서중림(判書 仲林)은 팽년과 같이 역모에 간련하였다 하여 죽고, 팽년의 아들 헌(憲), 순(珣), 분(奮), 삼 형제와 손자 점동(占同), 갯동(㖋同), 파록대(波彔大), 산흔(山欣), 금년생(今年生) 오형제와 팽년의 아우 인년(引年), 검열(檢閱) 영년(永年), 수찬(修撰)이요 호를 동재(東齋)라 하는 기년(耆年), 박사대년(博士大年) 사형제 가 다 한 자리에서 죽었고, 유응부의 아들 사수(思守), 박정(朴靖)의 아들 숭문(崇文), 손자 계남(季男), 칙동(則同), 권자신(權自愼)의 아들 구지(仇之), 허조의 아들 연령(延齡), 구령(九齡), 송석동(宋石同)의 아들 창(昌), 영(零), 안(安), 태산(太山)등이 다 죽고 우습고 불쌍한 것은 권 자신, 송현수를 고발한 이휘(李徽)가 붙들려 죽은 것이다. 김질(金礩)은 좌익 공신을 봉함이 될 때에 이 휘는 역적으로 효수를 당한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 위지의 가족은 선산 시골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은 며칠 뒤에 선산에서 죽었다.
하 위지의 집은 선산부(善山府) 영봉리(迎鳳里)에 있었다. 금부 도사가 위지의 가족을 잡아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종을 만들려고 서울서 내려왔다. 호(號), 박(珀), 연, 반(班) 사 형제 중에 연과 반은 아직 철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요, 호는 장성하였으나 박은 불과 십 육칠 세의 소년이었다.
금부 도사가 거느린 선산 관속이 사 형제를 잡아 앞세울 때에 박이 금부 도사더러 모친에게 마지막 한 마디 할 말이 있으니 잠간만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금부 도사는 박이 연소하면서도 태연 자약하며 군자의 풍이 있는 것에 감복하여 허하였다. 박은 안으로 들어가 모친 앞에 꿇어 앉았다. 모친은 흘리던 눈물으 ㄹ거둑 태연하게,
“왜 남아답지 못하게 어미를 한 번 더 보려고 들어왔느냐?”
하고 꾸짖었다.
박은 어머니 앞에 이마를 조아리며,
“소자가 죽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죽임을 당하시었거든 소자가 살 리가 있습니까. 비록 조명이 없다 하더라도 소자가 마땅히 자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우리 동기 중에 오직 누이 하나, 저도 이미 과년하였는데 적돌 되어 종이 되면 천한 몸이 부인의 의를 지키기가 극난할 것입니다.비록 죽을지언정 반드시 한 남편을 좇고 개 돼 지으 행실을 아니하도록 어머님께서 잘 훈계하십시사고, 그것이 소자가 마 짐낙으로 여쭙는 말씀입니다.”
하고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온다. 그때에 곁에 있던 누이가,
“소매가 아녀자지마는 하씨 집 가명을 더럽게 할 사람이 아니니 오라버님 염려 놓으시오.”
하였다. 누이는 열 다섯 살이었다.
선산부 객사 앞 넓은 마당에서 하위지의 아들 사 형제가 일시에 교형을 당하였다. 사형제를 가지런히 늘어 세워놓고 금부 도사와 선산 부사의 감형으로 사형제의 목에 올개미를 씌울 때에 일곱 살 먹은 연까지도 조금도 두려워함 없이 종용히 서 있었다. 선산부에 하 위 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 위지의 덕행에 감복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형장에는 수천 명 부민이 모여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그때에 마침 태중에 있던 이가 박팽년의 며느리 한 분과 허 조의 아들 연령의 아내였었다.둘이 다 만일 남아만 낳은 날이면 그 아이는 죽을 운명을 가질 것이나 박팽년 집에는 마침 종에 상전과 같이 해산한 이가 있어서 상전이 낳은 아들은 종의 아들을 삼고 종이 낳은 딸은 상전의 딸을 삼아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남았고, 허연령의 처가 낳은 아들은 자란 뒤에 죽이기로 하고 연령의 처와 함게 괴산부(槐山府)에 맡기어 두었다가 세조 대왕의 분한 마음이 풀린 뒤가 되어 아니 죽이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이로부터 칠 년 뒤 일이다.
이렇게 칠십여 명 사람이 죽은 것을 병자(丙子) 원욱이라고 일컫거니와 이 일이 있은 뒤에 계속하여서 죽이는 일은 한참 동안 끊이지 아니하였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혜빈 양씨(惠)嬪楊氏)와 그의 몸에서 난 두 아드님 한남군(漢南君) 어, 영풍군(永豊君) 천의 죽음이다.
이 세 분은 성삼문 사건에 관계되었다고 드러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왕이 생각하시기에나 정인지, 신숙주, 권람, 한 명회 등이 생각하기에 혜빈 양씨 세 모자와 세종 대왕의 아드님으로 나이 가장 높은 화의 군영(和義君瓔)과 안평대군이 돌아간 뒤에 종실에 가장 명망이 높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상왕이 가장 정다와 하시고 또 신임하시는 영양위 정종, 여량 부원군(礖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등은 아무렇게 죄목을 만들어서라도 이번 기회에 없애버려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죽일 죄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혜빈 삼 모자로 말하면 가장 상왕과 관계가 가까울 뿐더러 매양 말썽이 되어 왔다.
독자가 이미 잘 아는 바여니와 혜빈은 세종 대왕의 후궁이요, 한남군(漢南君), 수춘군(壽春君), 영풍군(永豊君) 세 분의 어머니일뿐더러 세종 대왕의 명을 받들어 상왕을 양육하였고 후에 문종 대왕 승하하실 때에는 동궁을 향하시와 혜빈을 궁중의 어른으로 존경하실 것을 명하시었다. 그래서 비록 수렴 청정은 아닐지라도 군국 대사에 어리신 왕의 자문을 받는 지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혜빈이 덕과 지혜를 갖추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 수양대군에게 대하여 서는 한 큰 적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 그의 아드님이요 수양 대군에게는 친아우님 되는 한남, 수춘,영풍 세 분으로 말하면 항상 대의명분론을 주장하여 수양 대군의 야심을 달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중에도 상왕 선위 전에 돌아간 수춘군이 더욱 충성과 우애지정이 지극하였다. 한남군은 일시 대세라 무가내하다 하여 수양 대군이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찬성하는 태도까지 취하였으나 당시 아직 이십 미만이던 수춘군이 눈물을 뿌리며 상왕께 신절을 지켜야 할 것을 극언함으로부터 다시 마음이 돌아섰다고 한다. 한남, 영풍 형제분이 선 위를 전하는 날 아침에 수양 대군을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수양 대군의 야심이 옳지 아니한 것을 극언한 것이 수춘군의 정성에 힘입음이 많다고 한다.
어디로 보아도 혜빈 삼 모자(수춘군이 살았더면 사 모자)의 목숨은 부지한 길이 없었다.
성삼문 등이 죽은지 사흘 뒤에 이 세 분은 화의군과 함께 성삼문의 당이라 하여 사형을 받았으나 다만 종실이라 하여 걸형을 면하고 교형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은 안평대군과 아울러 친동기네 분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금성 대군은 왕과 어머니가 같은 덕에 아직 죽기를 면하고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를 당한 대로 두고 송현수와 정종은 상왕의 극히 가까운 척분이 있다 하여 아직 목숨은 보전하여 후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정종은 광주(光州)에 귀양을 보내었다.
이렇게 성 삼문 등을 죽이고 난 뒤에 왕은 이러한 반교문(頒敎文)을 내리시었다.
이라 한 것이다. 이 반교문은 왕이 이번 성 삼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자 하는가를 보이는 중요한 글이니 고대로 번역하여 보자---.
“저즘께 용(안평 대군)이 역적을 도모하매 널리 당파를 심거 서울과 시골에 아니 박인 데가 없더니 남은 못된 놈들이 다 죽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 난을 도모하도다.”
여기까지는 사 년 전에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의 무리를 죽인 이른바 계유정란을 끌어 이번 역모도 그때 그 못된 놈들 죽다 남은 것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것은 한 팔매에 두 마리를 맞히자는 것이다. 즉 세상이 다 애매한 것을 아는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을 한 번 더 역적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하나요, 이번도 계유년 역모의 계속 이라 하여 이번 성 삼문 등의 역모가 뿌리가 깊은 것을 말하려 함이다.
“근자에 여당이개(李塏)가.”
하필이 개를 중심으로 내어 세운 심사는 성삼문을 머리라기 싫은 까닭이다.
“근자에 여당 이 개가 흉악한 생각을 품어 주장하여 난을 지울 제 그의 무리 성 삼문 등이 그윽히 궁중과 통하여.”
여기가 상왕을 물고 늘어지는 데다.
“내외가 서로 웅하여 날을 정하고 일을 들어 장차 내 몸을 해하고 어린이를 끼고 제 마음대로 하려 하더니.”
또 한번 상왕을 껴들었다. 이것이 심히 중요한 일이니 이번 일의 근원을, 책임을 상왕께 돌리려 하는 것이 왕과 정인지, 신숙주, 권람, 한명회 등의 일치 협력하여 애를 쓰는 바다.
그러나 종묘와 사직이 붙들고 도우시는 “힘을 입어 큰악이 스스로 나타나 죄 있는 놈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번에 참혹하게 주근 칠십여 명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다.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써 신민과 정사를 같이하리라.”
하는 것으로 끝을 맺았으나 이것은 역적들이 다 죽어 없어지어 국가에 이만한 경사가 없은 즉 백성에게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모든 죄인에게 대사, 특사의 은전을 주자는 말이다.
이 반교문ㅇ 내리자 과연 전국 수천의 죄수는 지옥과 같은 옥에서 나옴을 얻었다.
또 이 사건 덕으로 좌익 삼등 공신이던 정창손은 이등 공신으로 올라가고 김질은 좌익 삼 등의 녹훈을 받아 상락 부원군(府院君)이 되고,나중에 좌의정으로 문정공(文情公)이란ㄴ 시 호까지 받도록 귀한 사람이 되었다.
이 통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이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정보(鄭 保)요, 하나는 이석형(李石亨)이다. 정보는 독자도 기억하시려니와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손자요, 그 서매가 한명회의 첩이 된 사람이다. 천성이 방랑하여 주색으로 일을 삼았으나 그래도 가슴에 한 점 내조(乃祖)의 기맥을 받은 것이 있어 비록 궁화되 결코 권문세가에 아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현감(縣監) 한 자리를 얻어 한 것이 한명회 덕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만은 사실인 듯하나 궁해서 한 일이라 그리 책망할 것은 아니라고 성삼문이나 박팽년도 용허하여 주었다. 성, 박 등과는 매우 친하게 지내었다.
성삼문 사변이난날 그는 명회의 집을 찾아서 그 누이를 보고 명회가 간 곳을 물은즉 누이는,
“대궐에서 아직 안 나오셨어요, 죄인을 국문한다나.”
하였다.
“죄인?”
하고 정보는 손을 두르며,
“죄인이 누가 죄인이야. 대감 돌아오거든 그래라 내가 그러더라고.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에 죄인이 되리라고.”
하고는 옷을 떨치고 일어나 나갔다. 정보는 다시 이 집에 아니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국문이 끝난 뒤에 명회가 집에 돌아와서 첩 정씨에게 정보가 하던 말을 듣고 분이 나서 저녁상도 아니 받고 대궐로 뛰어 들어가 왕께 뵈옵고 정보의 말을 아뢰었다.
왕께서도 분함을 이기지 못하시와 곧 정보를 잡아둘 이어 친히 국문을 하시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였느냐?”
하시고 왕이 물으실 때에,
“네, 과연 하였소.”
하고 정보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저런 괘씸한 놈이 있단 말이냐. 어찌하여 감히 그런 난언(亂言)을 하여?”
하시고 왕이 소리를 높이신다.
“옳은 말이니 하였소. 상감도 이 사람들을 죽이시면 만고에 죄인이 되시오리다.”
하고 정부는 까딱 없다.
“이놈, 그러면 성가 박가놈들이 성인 군자란 말이야?”
“그러하오.”
이때에 곁에 섰던 정인지, 신숙주, 한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제 입으로 제 죄를 자복하였사온즉 청컨대 형벌을 바로 하소서.”하였다.
“그놈을 찢어라!”
하고 왕은 노함을 누르시지 못하시었다.
정보가 무사에게 끌려 장차 형장으로 나가려 할 때에 왕은 하도 정보가 태연한 것이 심상치 아니하게 생각하시고 왕은 좌우에게 물었다---.
“그놈 뉘 자손이냐?”
한명회는 감히 자기의 첩이 형이라고 대답은 못하였다. 그리다가 자기까지 봉변하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이었다.
이때에 곁에서 누가,
“정몽주의 손자요.”
하고 아뢰었다.
왕도 정보가 정몽주의 자손이란 말을 들으시고는 놀라시었다. 이 사람을 죽이면 또 선비들 사이에 무에라고 말썽이 많을 것을 생각하신 까닭이다. 이때에 만일 정보 하나는 살리면 왕이 충신의 후예를 존중한다는 칭찬을 천추에 남길 것이라고생까하시고 선선히 사형을 감하여 연일현(延日縣)으로 유배하라신 처분을 내리시었다. 이리하여 정보는 목숨을 보전하여 연일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로 죽을 뻔한 이는 이석형(李石亨)이다. 이석형은 그 지조로 보든지 성삼문, 박팽년 등과의 교의로 보든지 반드시 죽었어야 옳은 사람이언마는 그가 병자 사변에 들지 아니 한 것은 전라 감사로 외임에 있었던 까닭이다.
각 읍을 순행하던 길에 익산(益山)에 들러서 비로소 성삼문, 박팽년 등 구우들이 다 죽었단 말을 듣고 여관 벽상에 글 한 수를 써 붙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이 대와 같은 절개를 가지었으면 나도 솔과 같은 절개를 가지었다. 그대들과 함께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속에 품은 뜻은 같다는 말이다. 원체 글줄이나 하는 선비의 객쩍은 짓이다. 이런 글을 써 붙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글귀가 어떻게 서울에 굴러 올라와서 대간(臺諫)의 탄핵 구실이 되었다. 이때에나 지금이나 잡아먹기를 장기로 알았다. 그러나 왕은 --라 하시고 대간의 계목을 물리치시었다.
이야기는 좀 뒤로 돌아간다.
성 삼문 등의 국문과 처형이 끝나고 무사와 갑사의 호위를 받아 신 숙주는 저물게 집에 돌아왔다. 신 숙주가 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성 삼문의 문전을 통과하였다. 이제 이 집에 누구가 있나? 성 삼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아버지와 형제, 다 신 숙주의 눈앞에서 죽어버리었다. 숙주의 교자가 삼문의 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안에서 살아 남은 부녀들---삼문의 어머니와 아내와 제부들과 딸들---의 울어 지친 느끼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 숙주의 등골에는 찬 땀이 흘렀다. 세상에 친구가 많다 하더라도 숙주와 삼문과 같은 사이는 드물었다. 소년시로부터 성부동 형제와 같이 지난 것이다. 안에서까지도 다들 친하였다.
아까 대궐에서 삼문이 자기를 노려보던 눈을 숙주는 어두움 속에 보는 듯하여 눈을 감았다---가슴이 두근거리었다. 삼문의 원혼이 자기의 뒤를 따르지나 아니하나하는 어림없는 생각까지도 나서 소르이 끼침을 깨달았다.
숙주가 집에 다다르니 중문이 환히 열렸다. 어찌하여 중문이 열렸는고 하고 안마당에 들어서서 기침을 하여도 부인이 내다 봄이 없었다. 평일 같으면 반드시 대청 마루 끝에 나서서 남편을 맞던 부인이다.
숙주는 안방에 들어왔다. 거기도 부인이 없었다. 어디를 보아도 부인의 그림자도 없었다.
“마님 어디 가시었느냐?”
하고 집사람더러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숙주는 다락문을 열었다. 둘이 쏘는 등잔 불빛이 소복을 하고 손에 긴 베 한 폭으 ㄹ들고 울고 앉은 부인을 비추었다.
숙주는 놀랐다. 의아하였다.
“부인, 어찌하여 거기 앉았소?”
하고 숙주가 물었다.
부인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대감이 살아 돌아오실 줄은 몰랐구려. 평일에 성 승지와 대감과 얼마나 친하시었소? 어디 형제가 그런 형제가 있을 수가 있소. 그랬는데 들으니 성 학사, 박학사 여러 분의 욕사가 생기었으니 필시 대감도 함께 돌아가실 줄만 알고 돌아가시었다는 기별만 오면 나도 따라 족을 양으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대감이 살아 돌아오실 줄을 뉘 알았겠소?”
하고 소리를 내어 통곡한다.
부인의 이 말에 숙주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겨우 고개를 돌며,
“그러니 저것들을 어찌하오?”
하고 방에 늘어선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때에 숙주와 부인과 사이에는 아들 딸 형제가 있었다. 나중에 옥새를 위조하여 벼슬을 팔다가죽임을 당한 정이 그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숙주가 이 말을 하고 고개를 든 때에는 부인은 벌써 보국에 목을 매고 늘어지었다.
숙주가 놀래어 집 사람들과 함께 부인의 목 맨 것을 끄르고 방에 내려 눕히었으나 그렇게 순식간이언마는 어느새에 숨이 끊어지어 다시 돌아오지를 아니하였다. 부인 윤씨는 죽은 것이다.
윤씨는 성 삼문 등을 국문하노라는 기별을 전하러 상왕께 심부름 갔던 승지 윤자운(尹子 蕓)의 누이다. 자운 온 후에 숙주의 당이 되어 영의정까지 지내었다.
비록 윤씨가 이렇게 죽었건마는 숙주는 집사람을 신척하여 이말이 세상에 흘러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말이 나는 것은 체면에 큰 수치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목 매어 죽은 윤씨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고령부(高靈府) 원군(院君)의 부인으로 비단에 씌워 가장 영화로운 장례로써 땅에 묻힘이 되어다.
한편으로 죽은 사람들의 집은 어떠하였나. 오직 눈물과 분함과 욕봉뿐이라 할 수 있다.
살아 남은 부인과 딸들은 그날부터는 종이 되어 다른 집에도 가지 아니하고 정인지, 신숙주, 김질, 한명회, 권람, 홍 윤성, 양 정 같은 소위 공신의 집으로 분배가 되어 가게 되고 그중에도 과년한 처자는 서로 가지기를 원하여 다투는 형편이다.
그중에도 가장 불쌍한 이는 유응부의 부인이었다. 유응부는 본래 청렴하여 재물을 알지 못하므로 몸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되 집에 문짝이 없어 기직을 늘이고 일찍 그 밥상에 고기 가 올라본 일이 없다 하며 유시호조식 지을 양식이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고 그 부인이 육십이 되도록 깁것을 몸에 걸어보지 못하였다. 아들이 없고 오직 딸 형제가 있었으나 다 출가하고 부인 혼자 집을 지니고 있다가가 산과 몸을 적물을 당할 때에 부인은,
“생전ㅇ도 굶주리다가 죽을 때에까지 이 화를 당하다니.”
하고 통곡하였다. 이 정경을 보고 이웃과 군사들까지도 울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차하면서도 상왕이 선위하신 뒤에 받은 녹은 곡식 한 알갱이, 피륙 한 자 건드리지 아니하고 철 찾아 내리는 부채, 체력 등속까지도 꽁꽁 모아 쌓아 두었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도 받은 녹은 다 봉하여 두었음을 발견하고 왕이,
“독한 놈들이다.”
하고 한탄하시었다.
유응부, 성승, 박 정 같은 이외부인들은 다 연로하여 아무도 욕심 내는 이가 없으므로 도리어 여생을 보내기가 그리 힘들지 아니하였으나 가장 곤경을 당한 이는 박팽년 부인 이씨와 성삼문 부인 김씨다. 그들은 다 후실이어서 아직 이십 사오세의 청춘이었고 또 자색도 있었기 때문에 간 곳마다 유혹과 위협이 있었으나 죽기로써 절을 지키었다.
왕은 세종 대왕이래로 인재 양성의 기관이 된 집현전(集賢殿)을 혁파하고 거기 있던 책을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기었다. 왜 집현전을 혁파하였으냐.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 성원, 하위지 등이 모두 집현전 학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집현전이라 하면 왕의 잇사이에 신물이 돌았던 것이다.
다시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시고 전보다 대우를 낮추고 단속을 엄하게 하여 일체로 의간과 교통하심을 금하였다. 잡수시는 것까지도 전에는 왕으로 계실 때와 같이 하였으나 지금은 보행 객주의 손님이나 다름없이 하라 하시었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다시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실 때에 정인지는, ---이라고 상소를 하였다.
상왕이 성 삼문 등의 도모를 미리 알았다고 하는 것은 정인지의 멀쩡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상왕을 없이하려면 이것을 핑계로 삼는 것이 가장 편하겠기 때문에 이렇게 상왕이 미리 안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라 함은 어서 죽여버리자는 말이다. 상왕을 벌써 죽여버리었더면 이번 성 삼문의 일 도 아니 생기었을 것이라고 정 인지는 자기의 선견지명을 자랑한다. 이제라도 죽여버리지 그냥 살려 두면 또 제이 성 삼문 사건이 납니다. 하고 정 인지는 왕의 결심을 재촉하려 하였으나 왕은 아직도 애매한 상왕의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까지는 나지 아니하였다.
맨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