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기슭에 붉게 물든 담쟁이 잎새와 푸른 하늘, 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이 한 폭도 비늘 구름같이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장 먼저 가을을 자랑하던 창 밖의 한 포기의 벚나무는 또한 가장 먼저 가을을 내버리고 앙클한 회초리만을 남겼다. 아름다운 것이 다 지나가 버린 늦가을은 추잡하고 한산하기 짝없다.

담쟁이로 폭 씌어졌던 집도 초목으로 가득 덮였던 뜰도 모르는 결에 참혹하게도 옷을 벗기워 버리고 앙상한 해골만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름다운 꿈의 채색을 여지없이 잃어 버렸다.

벽에는 시들어 버린 넝쿨이 거미줄같이 얼기설기 얽혔고 마른 머룽송이 같은 열매가 함빡 맺혔을 뿐이다. 흙 한 줌 찾아볼 수 없이 푸르던 뜰에서는 지금에는 푸른 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거의 날마다 뜰의 낙엽을 긁어야 된다. 아무리 공들여 긁어모아도 다음 날에는 새 낙엽이 다시 질볏이 늘어져 거듭 각지를 들지 않으면 안된다. 낙엽이란 세상의 인총1같이도 흔한 것이다. 밑빠진 독에 물을 긷듯 며칠이든지 헛노릇으로 여기면서도 공들여 긁어모은다. 벚나무 아래 수북이 쌓아 놓고 불을 붙이면 속으로부터 푸슥푸슥 타면서 푸른 연기가 모로 길게 솟아오른다. 연기는 바람 없는 뜰에 아늑히 차서 울같이 괸다. 낙엽 연기에는 진한 커피의 향기가 있다. 잘익은 깨금의 맛이 있다 나는 그 귀한 연기를 마음껏 마신다. 욱신한 향기가 몸의 구석구석에 배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갔을 때와도 같은 풍준한 만족을 느낀다. 낙엽의 연기는 시절의 진미요, 가을의 마지막 선물이다.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타 버린 낙엽을 재를 묻어 버림으러써 가을은 완전히 끝난 듯싶다. 뜰에는 벌써 회초리만의 나무들이 섰고 엉성긋한 포도시렁이 남았고 담쟁이 넝쿨이 서리었고 국화 포기의 글거리가 솟았고 잡초의 시들어 버린 양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잎새에 가리었던 둥근 유리창이 달덩이같이 드러나고 현관 앞에 조약돌이 지저분하게 흩어졌으니 말이다.

낙엽을 장사 지내고 가을을 보내니 별안간 생활이 없어진 것도 같고 새 생활이 와야 할것도 같은 느낌이 생겼다. 적어도 꿈이 가고 생활의 때가 온 듯하다. 나는 꿈을 대신할 생활의 풍만을 위하여 생각하고 설계하여야한다. 가령 나는 아내를 대신하여 거의 사흘 돌이로 목욕물을 데우게 되었다. 손수 수도에 호스를 대서 물을 가득 길어 붓고는 아궁에 불을 넣는다.

음산한 바람으로 아궁이 연기를 몹시 낸다. 나는 그 연기를 괴로이 여기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지경이요, 숨이 막히면서도 연기의 웅덩이 속에서 정성껏 나무를 지피고 불을 쑤시고 목욕간의 창을 열어 연기를 뽑고 여러 차례나 물을 저어 온도를 맞추고 하면서 그 쓸데없는 행동, 적어도 책상에 맞붙어 책을 읽고 글줄의 쓰는 것보다는 비생산적이요, 소비적이라고 늘 생각하여 오던 그 행동을 도리어 귀히 여기게 되고 나날의 생활을 꾸며 가는 그런 행동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이요, 창조적인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정리되지 못한 가닥가닥의 생각을 머릿속에 잡아 넣고 살을 깍을 정도로 애쓰고 궁싯거리면서 생활 일에 단 한 시간 허비하기조차 아깝게 여기고 싫어하던 것이 생활에 관한 그런 사소한 잡일을 도리어 귀중히 알게된 것은 도시 시절의 탓일까.

어두운 아궁 속에서 새빨갛게 타는 불을 보고 목욕통에서 무럭무럭 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이 생활이다, 이것이 책보다도 원고보다도 더 귀한 일이다, 이것을 귀히 여김이 반드시 필부의 옹졸한 짓은 아닐것이며 생활을 업시여기는 곳에 필부 이상 뛰어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고 두서 없는 긴 생각에 잠겨도 본다.

이윽고 더운 물 속에 몸을 잠그고 창으로 날아들어와 물 위에 뜬 마지막 낙엽을 두 손으로 건져 내고 안개같이 깊은 무더운 김 속에 몸과 마음을 푸근히 녹일 때 이 생각은 더욱 절실히 육체 속에 사무쳐 든다.

거리의 백화점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거피를 갈아서 손가방 속에 넣고 그 욱신한 향기를 즐기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물론 이러한 생각으로부터이다. 진한 차를 탁자 위에 놓고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그 넓은 냉방에다 난로를 피우고 침대 속에는 더운 물통을 넣고 한겨울 동안을 지내게 할까 어쩔까 그리고 겨울에는 뒷산을 이용하여 스키를 시작하여 볼까 어쩔까 하고 겨울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기를 아내와 의논한다.

시절이 여위어갈수록 꿈이 멀어갈수록 생활의 의욕이 두터워짐일까. 생활, 생활, 초목 없는, 푸른 빛 없어진 멀숭하게 된 집 속에서 나는 하루의 전부를 생활의 생각으로 지내게 되었다. 시절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일가. 심술궃은 결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푸른 시절은 일종의 신비였다. 푸른 초목에 싸인 푸른 집속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제목은 반드시 생활이 아니었다. 그날 그날은 토막토막의 흐트러진 생활의 조작이 아니요 물같이 흐른 꿈경이었다.

푸른 널을 비스듬이 달고, 가는 모기둥으로 괸 갸우뚱한 현관 차양에도 담쟁이가 함빡 피어올라 이른 아침이면 넓은 잎에 맺힌 흔한 이슬방울이 서리서리 모여 아랫잎 위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란 산골짜기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아서 금시에 시원한 산의 영기를 느끼게 되었다. 머루 다래의 넝쿨 대신에 드레드레 열매 맺힌 포도넝쿨이 있고 바람에 포르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대신에는 슷한 잎새를 가진 대추나무가 있다. 뜰은 그림자 깊은 지름길만을 남겨 놓고는 흙 한 줌 보이지 않게 일면 화초에 덮이었다. 장미, 글라이올러스2, 해바라기, 촉규화3, 맨드라미, 반금초, 금잔화, 제비초, 만수국, 프록스, 다알리아, 봉선화, 양귀비, 채송화의 꽃발이 소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황양목, 앵도나무, 대추나무, 능금나무, 배나무의 모든 나무와 어울려 뜰은 채색과 광채와 그림자의 화려한 동산이었다.

유리창에까지 나무 그림자가 깊고 방안에까지 지천으로 푸른 빛이 흘러들었다. 화단에는 나비와 벌이 날아들고 풀숲에는 가을 벌레들이 일찍부터 울기 시작하였다. 나뭇 가지에는 새들이 몰려오고 집에는 진귀한 손님이 왔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로 비늘구름과 같이도 쉽게 지나가 버렸다. 나뭇잎이 가고 푸른 빛이 없어지고 그늘이 꺼져 버렸다. 지금에는 벌써 벌레 울지 않고 나비 날지 않고 헐벗은 나뭇가지에는 새들도 드물게 앉게되었다. 지난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에 아리숭하게 멀어졌다. 꿈이 지나고 생활의 때가왔다. 손수 목욕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의 향기라는 것이 있다. 파도의 물결이 길게 주름잡혀 가듯이, 꺼진 음악의 멜로디가 오래도록 귀에 울려 오듯이, 푸른 집과 푸른 뜰의 향기가 아련하게 남아서 흘러온다.

훤출하고 쓸쓸한 뜰에서 한 떨기의 푸른것을 발견한 것을 나는 더없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꿈의 찌꺼기이므로 꿈보다 한결 더 귀하게 여겨짐인지도 모른다. 화단 한구석에 남은 푸른 클로우버의 한 줌을 말함이 아니요, 현관 양편 기둥에 의지하여 창기슭으로 피어올라간 두 포기의 줄기 장미를 나는 의미한다. 단 줄의 장미이던 것이 어느결에 자랐는지 낙지 다리같이 가닥가닥 솟아 올라 제법 풍성한 포기를 이루었다. 민출한 푸른 줄기에 마디마다 조그만 생생한 잎새를 달고 추위와 서리에도 상하는 법 없이 장하게 뻗어올랐다. 신선한 야채에서 오는 식욕을 느끼어 잘강잘강 먹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창기숡으로 올라와 창에 어린 맑은 잎새와 줄기, 푸르면서도 붉은 기운을 약간 띤 줄기와 가시, 붉은 가시의 생각이 문득 나에게 한 폭의 환상을 일으킨다. 깊은 여름 밤, 열어젖힌 창으로 나의 방에 들어오다 장미 줄기에 걸리고 가시에 찔려 하아얀 팔과 다리에 붉은 피를 흘리는 낮 모르는 임의의 소녀---가시와 소녀와 피---이것은 한 폭의 꿈일는지 모른다. 글로 썼거나 머릿속에 생각하여 본 한 폭의 아픈 환영일는지 모른다---가시와 소녀와 피!

그러나 꿈 아닌 환영 아닌 피의 기억이 있다. 장미의 붉은 줄기와 가시에서 나는 문득 지난 기억을 선명하게 풀어낼 수 있다. 나머지 꿈의 아픈 물결이다. 무르녹은 여름의 하룻날 아침 일찌기 가족들과 함께 집을 나와 뒷산으로 소풍을 떠났다. 여름은 짙고 송림 속은 그윽하였다. 드뭇한 소풍객들 속에 섞여 그림자 깊은 길을 걸으면서 동물원에를 들어갈까 강에 나가 배를 타고 하루를 지울까 생각하다 결국 동물원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짐승들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 잠시 동안이라도 근심을 잊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비위 좋은 생각은 여지없이 짓밟히고야 말았다.

동물원이라고는 하여도 이름만의 것이지 운동장과 꽃밭 한 구석에 덧붙이기로 우리 몇 간이 있을 뿐이다. 물새들이 못이 되고 원숭이와 독수리와 곰의 우리가 있을 뿐이다. 비극은 곰의 우리에서 왔다.

드문 사람 속에는 휘적휘적 우리와 우리 사이를 돌아치는 요정의 머슴 비슷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다. 큰 눈이 둥글둥글 굴고 입이 반쯤 열린 맺힌 데 없는 허술한 사나이는 번번이 일행의 앞은 서서 우리 안의 짐승을 희롱하곤 하였다. 제 흥도 제 흥이려니와 그 어디인지 그런 철없는 거동을 우리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듯한 허물없고 어리석고 주책없는 생각이 숨어 있음이 눈치에 보였다. 원숭이를 희롱할 때에도 새들을 들여다볼 때에도 너무도 지나쳐 납신거리는 것을 우리는 민망히 여기는 끝에 나중에는 불쾌히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불쾌한 감정은 곰의 우리 앞에 이르렀을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철말 사이로 손을 널름널름 들여 보내면 검은 곰은 육중한 몸을 끌고 와서 앞발을 덥석 들었다. 희롱이 잦을 수록 곰은 흥분하여 나중에는 일종의 분에 타오르는 듯한 험상스런 기세를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안을 대중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눈치였다. 몇 번째인가 사나이의 손이 다시 철망 사이에 들어같을 때 짐승은 기어이 민첩하게 왈칵 달려들어 앞발로 손을 잡자마자 입을 대었다.

사나이는 문득 꿈틀하며 소리를 치고 손을 빼려 애썼으나 손은 좀체 빠지지 않았다. 겨우 잡아 나꾸었을 때에는 무서웠다. 손가락 끝이 보기에도 무섭게 바른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손톱이 빠지고 끝이 새빨갛게 으끄러졌다. 사나이는 금시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넋잃은 사람같이 한참 동안이나 멍숭하게 섰다가 비로소 피흐르는 손을 쥐고 어쩔 줄 모르고 쩔쩔 헤매었다.

민망한 생각도 불쾌한 느낌도 잊어버리고 우리는 순간 무서운 구렁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신경을 퉁기는 지릿한 느낌이 전신에 끔찍한 꼴을 더 보기도 싫어서 주저하고 있는 동안에 사나이는 사람 숲에 쓸려 문을 나가 나무그늘 아래 쩔쩔매고 섰는 것이었다.

이윽고 나가 보았을 때에는 근처 집에서 얻어온 석유에 손가락을 잠갔다가 반석 위에 내놓고 피흐르는 손가락을 돌멩이로 찧는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미련한 그 거동이 도리어 화가 버럭 날 지경으로 측은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의 그 어리석고 철없는 거동이 우리들의 눈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 얼마간의 허물이 우리 편에 있듯이 짐작되어 마음이 더한층 아파졌다. 될 수 있는 대로의 것을 그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느끼고 나는 속히 집으로 데려가서 응급의 소독을 해 줄까 느끼다가 그보다도 떳떳한 방법을 생각하고 급스러운 어조로 소리쳤다.

얼른 병원으로 뛰어가시오.

소리만 치고 쩔쩔매기만 하는 나보다는 휠씬 침착한 구원자가 있음을 알았다. 아내였다. 그는 지니고 있던 새 손수건을 내셔 붕대삼아 사나이의 피 흐르는 손을 감기 시작하였다. 사나이는 천치 같은 표정에 손을 넌지시 맡기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아내의 날렵한 자태에 접하여 아름다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나친 감상이었을까.

병원을 뙤어 주기는 하였으나 사나이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주머니 속을 들치다가 나는 또한 그날 지갑을 잊은 것을 알았다. 집에까지 가서 비용을 가지고 그를 병원에까지 인도하려고 생각할 때에 이번에도 또 아내가 진실한 구원자가 되고 말았다. 지갑 속에서 손쉽게 은화 한 닢은 잡어 내어 사나이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물끄러미 그의 자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 사람의 모르는 사나이를 구원함에 공연함 마음의 주저뿐이었고 결국은 두번 다 앞을 가로채이고 길을 빼앗긴 것을 생각하고 겸연쩍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는 마지막 한 가지의 봉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천치 같은 사나이를 근처 병원으로 인도함이었다. 나는 병원을 가리켜 주는 길로 아울러 집에 들러 지갑을 가지고 반날의 뱃놀이를 떠나기를 계획하며 아이들의 송림 속에 남겨 둔 채 사나이를 이끌고 길을 걸어내려 갔다.

아름다운 장면이 머릿속에 쉽사리 꺼지지않았다. 휜 손수건과 붉은 피가 아름다운 한 폭을 이루었다. 피와 수건의 붉은 것과 흰 것의 조화가 맑고 진하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물결치게 되었다.

수풀 속을 거닐 때마다 기억이 새로와지고 반석 위에 피 흔적을 살필 때마다 지난 때의 광경이 불같이 마음속에 살아났다. 근처 집에서 사나이의 그 뒷소식을 물어 무사하다는 것을 듣고 일종의 알 수 없는 안심조차 느꼈다. 시절이 갈려 가을이 짙고 수풀 속에 낙엽이 산란하게 날릴 때 오히려 기억은 더 새로왔다.

가을이 다 지난 흙빛만의 뜰에서 잠간 잊었던 피의 기억을 장미의 붉은 가시로 말미암아 다시 추억해 낸 것이다. 마음을 빛나게 하는 생생한 추억.... 늦게까지 남아 있는 장미 포기와 함께 늦가을의 귀한 마지막 선물이다.

푸른 집 속에 남은 철 늦은 꿈의 물경이다.

생활의 시절이 단란의 때가 왔다.

어린것을 데리고 목욕물 속에 잠기는 것도 한 기쁨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오색 전기를 장식하고 많은 선물을 달아맬 것도 한 즐거운 기대다. 책상 위에는 그림책을 펴놓고 허물 없는 꿈에도 잠길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재료로 될 수 있는 대로의 풍성한 꿈이 이 시절에 맡겨진 과제이다. 생활의 재주이다. 낙엽의 암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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