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에게 6

기림 대인

여보! 참 반갑습디다. 가지야마에마치(鍜治屋前町)[1] 주소를 조선으로 물어서 겨우 알아가지고 편지했는데 답장이 얼른 오지 않아서 나는 아마 주소가 또 옮겨진 게로군 하고 탄식하던 차에 반가웠소.

여보! 당신이 바레[2] 선수라니 그 바레 팀인즉 내 어리석은 생각에 세계 최강 팀인가 싶소그려! 그래 이겼소? 이길 뻔하다 만 소위 석패를 했소?

그러나저러나 동경 오기는 왔는데 나는 지금 누워 있소그려. 매일 오후면 똑 기동 못 할 정도로 열이 나서 성가셔서 죽겠소그려.

동경이란 참 치사스러운 도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디다.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分子式)이 겨우 여기 수입이 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오.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卑俗)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

한화휴제(閑話休題)―나도 보아서 내달 중에 서울로 도로 갈까 하오. 여기 있댔자 몸이나 자꾸 축이 가고 겸하여 머리가 혼란하여 불시에 발광할 것 같소. 첫째 이 가솔린 냄새 미만(彌蔓) 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하여간 당신 겨울 방학 때까지는 내 약간의 건강을 획득할 터이니 그때는 부디부디 동경 들러 가기를 천번 만번 당부하는 바이오. 웬만하거든 거기 여학도들도 잠깐 도중하차를 시킵시다그려.

그리고 시종이 여일하게 이상 선생께서는 프롤레타리아니까 군용금을 톡톡히 나래하기 바라오. 우리 그럴듯하게 하루저녁 놀아봅시다. 동경 첨단 여성들의 물거품 같은 '사상' 위에다 대륙의 유서 깊은 천근 철퇴를 내려뜨려 줍시다.

〈조선일보〉 모 씨 논문 나도 그 후에 얻어 읽었소. 형안이 족히 남의 흉리를 투시하는가 싶습디다. 그러나 씨의 모랄에 대한 탁견에는 물론 구체적 제시도 없었지만―약간 수미(愁眉)를 금할 수 없는가도 싶습디다. 예술적 기품 운운은 씨의 실언이오. 톨스토이나 기쿠치 간[3] 씨는 말하자면 영원한 대중 문예(문학이 아니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신 듯합디다.

그리고 〈위독〉에 대하여도―

사실 나는 요새 그따위 시밖에 써지지 않는구려. 차라리 그래서 철저히 소설을 쓸 결심이오. 암만해도 나는 십구 세기와 이십 세기 틈사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이십 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십구 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이곳 삼십사 년대의 영웅들[4]은 과연 추호의 오점도 없는 이십 세기 정신의 영웅들입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에게는 오직 선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생리(生理)를 가지고 생리하면서 완벽하게 살으오.

그들은 이상도 역시 이십 세기의 운동선수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이십 세기를 근근이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로구려! 아!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여.

생―그 가운데만 오직 무한한 기쁨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미 옴짝달싹 못 할 정도로 전락하고 만 자신을 굽어 살피면서 생에 대한 용기, 호기심, 이런 것이 날로 희박하여 가는 것을 자각하오.

이것은 참 제도할 수 없는 비극이오! 아쿠타가와[5]나 마키노[6] 같은 사람들이 맛보았을 상싶은 최후 한 찰나의 심경은 나 역 어느 순간 전광같이 짧게 그러나 참 똑똑하게 맛보는 것이 이즈음 한 두 번이 아니오. 제전(帝展)도 보았소. 환멸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일장의 난센스입디다. 나는 그 페인트의 악취에 질식할 것 같아 그만 코를 꽉 쥐고 뛰어나왔소. (중략)

오직 가령 자전(字典)을 만들어냈다거나 일생을 철(鐵) 연구에 바쳤다거나 하는 사람들만이 훌륭한 사람인가 싶소.

가끔 진자 예술가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생활거세씨(生活去勢氏)들은 당장에 시궁창의 쥐가 되어서 한 이삼 년 만에 노사(老死)하는 모양입디다.

기림 형

이 무슨 객쩍은 망설을 늘어놓음이리오? 소생 동경 와서 신경쇠약이 극도에 이르렀소! 게다가 몸이 이렇게 불편해서 그런 모양이오.

방학이 언제나 될는지 그 전에 편지 한번 더 주기 바라오. 그리고 올 때는 도착 시간을 조사해서 전보 쳐주우. 동경역까지 도보로도 한 십오 분 이십 분이면 갈 수가 있소. 그리고 틈 있는 대로 편지 좀 자주 주기 바라오.

나는 이곳에서 외롭고 심히 가난하오. 오직 몇몇 장 편지가 겨우 이 가련한 인간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이오. 당신에게는 건강을 비는 것이 역시 우습고 그럼 당신의 러브 어페어에 행운이 있기를 비오.


29일 배(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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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림이 유학 중이던 센다이의 동네 이름.
  2. 발리볼·배구.
  3. 일본의 극작가·소설가(1888~1948)
  4. 〈삼사문학〉 동인들을 가리킴.
  5.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6. 일본의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1896~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