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에게 3

기림 형

인천 가 있다가 어제 왔소.

해변에도 우울밖에는 없소. 어디를 가나 이 영혼은 즐거워할 줄을 모르니 딱하구려! 전원도 우리들의 병원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이 아닙디다.

독서하오? 나는 독서도 안 되오.

여지껏 가족들에게 대한 은애(恩愛)의 정을 차마 떼이기 어려워 집을 나가지 못하였던 것을 이번에 내 아우가 직업을 얻은 기회에 동경 가서 고생살이 좀 하여볼 작정이오.

아직 큰소리 못 하겠으나 구월 중에는 어쩌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소.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 일 저 일 의논하고 싶소. 고황(膏肓)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의, 이 도취의―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할 수 있는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化)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할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컨디션, 사표(師表), 시야, 아니 안계, 구속, 어째 적당한 어휘가 발견되지 않소만그려!

태원[1]은 어쩌다나 만나오. 그 군도 어째 세대고(世帶苦) 때문에 활갯짓이 잘 안나오나 봅디다.

지용[2]은 한 번도 못 만났소.

세상 사람들이 다 제각기의 흥분, 도취에서 사는 판이니까 타인의 용훼는 불허하나 봅디다. 즉 연애, 여행, 시, 횡재, 명성―이렇게 제 것만이 세상에 제일인 줄들 아나 봅디다. 자― 기림 형은 나하고나 악수합시다. 하, 하,

편지 부디 주기 바라오. 그리고 도동(渡東) 길에 꼭 좀 만나기로 합시다. 굿바이.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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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가 박태원(1909~1987)을 가리킴.
  2. 시인 정지용(1902~1950)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