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15~16세기경의 한국

15~16세기경의 한국〔槪說〕

편집

고려가 물러나고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의 1세기, 즉 15세기는 건설과 발전의 시기였다. 이 동안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들 나름의 이상적인 체제를 수립하여 갔다. 그러나 16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조선 왕조의 지배 질서는 동요·붕괴되어 가는 일대 변화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현저하게 진행되었다.조선 왕조는 고려의 귀족사회와는 달리 보통 양반사회라고 일컫는데, 이들 양반층은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벌써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서 역사를 주도할 수 있게 된 능문능리(能文能吏)의 독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 양반층은 고려시대의 향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지방의 중소 지주에 불과했고, 정치적으로는 일부 신진 관료로서 정계의 일부분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흥 사대부들은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내세워 중세의 신분주의적 계층 사회 질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조선 왕조의 수립에 있어서 내면적인 추진력이 되었던 것은 전제 개혁이었다. 즉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관료층의 전제 개혁은 토지 지배 관계의 변질을 가져옴으로써 조선 왕조 성립의 물질적 기반을 형성했던 것이다. 전제 개혁의 결과 과전법이 나타났으며, 이 과전법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수성(守成)의 군주 태종·세종의 제반 중앙집권화 시책과 더불어 표리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과전법의 실시로 말미암아 조선 왕조 통치 질서의 상부층을 형성했던 양반층의 균형 있는 생활체제가 마련될 수 있었으며, 하부층인 농민들로 하여금 노예제적인 수탈에서 벗어나 전호(佃戶)로서의 지위와 생산력의 확보를 기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또한 이 과전법을 통해 상부 지배층의 경제적 안정과 농민들에 대한 합리적인 파악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15세기의 통치질서 확립기에 수립된 기본적 상공업 정책은 극히 제한된 것으로, 정부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도회지 시전(市廛)이 대표적인 상업기관이었으며, 수공업은 강한 관장제(官匠制) 조직하에 놓여 있었다. 이리하여 상업에 있어서는 극히 한정된 약간의 해상활동이 지방의 물품 교류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정부가 허용한 상업 활동의 전부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 초기 사회의 상공업은 상부 지배층의 어용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그들 지배층의 수요와 공급을 위한 정도에 따라 일정한 상공업의 범위가 규제되었다.또한 이 시기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특기할 사실은 한글의 제정을 들 수 있다. 흔히 훈민정음이라고 일컫는 한글의 창제로 조선왕조는 정치·경제·사회적인 측면에서 훈민정책이라 할 수 있는 농민 파악의 새로운 지표를 설정하였던 것이며, 이후의 농예·농학 등 농업에 관한 지식의 확대 보급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켜 나갔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편찬하여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유학적 도덕질서의 밑바닥에는 하부층에 대한 중세적 생산관계의 합리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논리(論理)가 깔려 있었다.15세기의 생산력 향상과 사회적 안정은 궁정 중심의 과학문물 또한 현저하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세조·성종 때에는 민족 문화의 황금 시대가 도래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왕조의 상부구조를 형성했던 양반층은 자기 분열의 양상이 현저해졌다. 이는 양반 수의 증가에 비해 관료기구는 제한되어 있는 데서 기인한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토지의 결수(結數)가 제한되어 있는 데 반하여 그 수급 대상자는 점차 증가하는 현상이 노출되었다.16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통치질서 전반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상업제한 정책도 그대로 유지될 수가 없게 되었다. 도회지에는 관설(官設)시전 이외에 많은 사상(私商)이 나타나서 상권(商圈)을 넓혀가고 있었으니, 이들은 대개 농토를 잃고 도회지로 몰려든 농민 출신이었다. 이 무렵 농촌 사회에서도 커다란 상업적 변화가 초래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각 교통의 중심지에 장시(場市)가 발달한 것이었다. 16세기 초엽부터 비롯된 이와 같은 상업계의 변화로 16세기 전반에는 대납(代納)이나 방납(防納)의 문제 및 장문(場門)·시전·고공(雇工)의 문제들이 상당할 정도로 논의되었다. 또한 연산·중종조(朝)를 전후해서는 관장제수공업도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맞이해서는 결정적인 붕괴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신유학, 즉 주자학이 사회적으로 널리 보급되었고,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유명한 학자들이 계속 출현하여 신유학의 이론적 연구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남부에 기반을 둔 이황의 학파와 중부에 세력을 가진 이이 학파는 차차 그 번쇄한 이론과 형식적인 예법의 논쟁을 일삼게 되었고, 이 논쟁은 또한 정치상의 당파싸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되어 양반, 즉 사대부 계급 자체의 분열·분화 과정을 더욱 촉진시켜 갔다.성종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토지 사유와 함께 당시의 숭유 정책으로 인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한 사림(士林)은 훈구대신과 대립을 보이기 시작하여 연산군 때부터는 사화(士禍)라는 이름의 정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곧 신진세력인 사림은 지방의 중소 토지 소유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타격 속에서도 착착 그 지위를 구축하여 갔고, 선조초에 와서는 중앙 정계를 완전히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도 동인·서인의 당쟁과 그 뒤 붕당의 분립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사림이 세력을 잡는 것과 때를 같이해 그 지방적 근거로서 서원·향약 등이 발달하여 갔으니 이 역시 지방의 중소 토지 소유층 양반들의 거점인 점에 유의할 것이며, 특히 서원은 1550년에 풍기의 소수서원에 대한 사액을 시초로 서원에 대한 국가의 공인이 시작되고 그 물질적 토대로서 면세전인 서원전이 공인되어 갔고, 그 밖에 공인되지 않은 서원도 갈수록 팽대해 갔다. 1592년에 시작된 7년 간의 왜란은 국토를 참혹하게 황폐케 했으며, 이를 거점으로 하여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