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조선 왕조의 성립

조선 왕조의 성립〔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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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대에는 2차에 걸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이 있어서, 한때 개경이 점령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침략에 불과하였다. 왜구(倭寇)와 같이 전국적이고 긴 세월에 걸친 것이 못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이미 고종 때부터였다. 그러나 왜구가 창궐하게 된 것은 공민왕 이후였다. 이들은 전국의 해안 지대는 물론 내륙에까지 침입해 갖은 폐해를 끼쳤다. 이러한 때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 장수들의 활동으로 왜구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에서 만든 각종 화포(火砲)로써 왜구의 함선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박위(朴?)는 그 소굴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였다.이리하여 왜구는 점차 세력이 꺾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최영·이성계 등 무장 세력이 등장하였다.한편 대외정책을 둘러싼 귀족간의 대립도 자못 심각하였다. 우왕(隅王)을 옹립하여 권세를 오르게 한 이인임(李仁任)은 이성계·정몽주(鄭夢周) 등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명책(親明策)을 버리고 친원책(親元策)으로 돌아갔다.이인임 일파가 드디어 물러나고 최영(崔瑩)·이성계 등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명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하여 왔다. 이에 분격한 최영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을 꾀하고, 우왕도 이에 동조하여 전국에 징병을 실시하였다.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左軍)도통사, 이성계를 우군(右軍)도통사로 삼아 출정하였다. 그러나 요동정벌을 반대하여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고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이성계는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마저 축출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소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인하여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케 했다.위화도 회군에서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도 장악, 최후의 반대자 정몽주를 쓰러뜨린 후 공양왕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니, 이로써 이씨(李氏)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이루어지고, 고려 왕조는 멸망하였다. 사대부 관료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왕조의 건설에 성공한 이성계는 국호를 새로 조선(朝鮮)이라 하고,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어 새 왕조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성계 집안은 함경도 변방에서 고려 조정에 등을 돌리고 살아오던 영흥(함흥) 토호로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었지만, 이성계의 아버지(李子春)가 공민왕 때 몽골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비로소 고려조정에 벼슬하기 시작한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우왕 때 문하시중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지만 고려왕조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았고 그의 밑에 모여든 인사들도 불우한 처지에 있던 북방의 무인들과 남방의 지략있는 문인들이 많았다. 특히, 고려 중기부터 민중들 사이에는 수덕(水德)의 시대가 가고 목덕(木德)의 시대가 오며, 목덕의 시대에는 목자(木子) 성(姓)을 가진 이씨(李氏)가 나와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해 준다는 예언신앙이 널리 퍼져 목자(木子)가 왕이 된다는 동요까지 유행하였다. 이성계는 바로 이러한 민간신앙으로 인하여 민중 사이에 더욱 인기가 높았다.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 후 4년 간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개혁파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한편, 1392년(우왕 4) 5월에는 민중의 숙원사업이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고 지지기반을 크게 확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 일파가 새 왕조의 개창을 민심과 천심에 순응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 감히 자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이성계 일파는 민심의 지지에 기초하여 1392년(공양왕 4년) 7월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도평의사사의 인준을 얻어냄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합법적인 방법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권교체 방식은 당시의 정치문화가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준다.

홍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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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巾賊

원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도적. 일명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홍건(紅巾)으로써 휘장(徽章)을 한 까닭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한산동(韓山童)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官軍)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劉福通)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맞아들여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이들은 만주(滿洲)로 침입하여 요양(遼陽)을 점령하였으나, 원군(元軍)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겨울에 모거경(毛居敬)을 괴수로 한 4만의 홍건적이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西京:平壤)을 점령하였다.그러나 이방실(李芳實) 등이 거느린 고려 관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水軍)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는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반(破頭潘) 등이 10여 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남침(南侵)하여 이내 절령(?嶺:慈悲嶺)의 방책(防柵)을 무너뜨리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왕가(王駕)가 이천(利川)에 도착하던 날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이해 12월 경에 복주(福州:지금의 安東)에 닿은 왕은 정세운(鄭世雲)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아 적을 토벌케 하였다.이듬해 정세운은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 등의 여러 원수와 더불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시에 잔적(殘賊)을 북쪽으로 쫓아내어 난을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東北面) 상만호(上萬戶)로 있던 이성계는 친병(親兵) 2천 명을 이끌고 그 선봉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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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

고려 중기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연안(沿岸)을 무대로 많은 인명과 재산을 해치고 또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 우리나라에서의 이들의 활동시기는 고려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구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있었으나 그 때만 해도 그 수(數)와 피해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고려 중기에 와서 갑자기 들끓기 시작하였다. 여·원(麗元) 연합군의 일본정벌이 실패한 후로 그들의 노략질은 더욱 심하여지고,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동·서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침범해 들어와서 강화(江華)·교동(喬桐)·예성강구(禮成江口)로 출몰하여 개경의 치안(治安)까지 위협하게 되晥?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출진하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좌우군 3만 8천 8백여(10만이라는 설도 있음)를 이끌고 평양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위화도회군으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후 오랫동안의 요동회복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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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고려 말기의 장군. 우왕 때 김해 부사가 되었고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냈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전함 100척을 인솔하고 대마도를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유배당했으나 곧 사면되었다. 조선 건국초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으나 이흥무(李興茂)의 옥사로 파직되었다.

이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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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任 (?

1388)

고려의 권신(權臣).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공민왕 8년(1359)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막았으며, 1등 공신에 올랐다. 동왕 13년(1364)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으로 이를 격퇴했고, 동왕 17년(1368)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원의 동녕부를 토벌,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동왕 23년(1374) 공민왕이 살해된 후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親元政策)을 견지하여 친명책을 주장하던 신하들을 추방했다. 그 후 지윤(池奫)·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 심복을 요직에 앉히고 탐학을 자행하였으며, 경복홍을 무고하여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이성계 등에 의해 그 일당과 함께 사형되었다.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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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周 (1337

1392)

고려의 정치가·학자.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연일(延日).1357년(공민왕6)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 검열(禮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내고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의 토벌에 참가하고 전농시승(轉農寺丞)·예조 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 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호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13일 동안 사선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귀국했다.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규수(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了俊)에게 가서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1379년 예의 판서(禮儀判書)·전법판서(戰法判書)를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제학·상의회의도감사·보문각제학·상호군(密直提學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上護軍)이 되었다.1381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입국 거부로 요동에서 돌아왔고, 1383년 동북면 조전 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 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문하찬성사·지서연사(門下贊成事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문학 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했다.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져서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어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 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또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追贈), 익양 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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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竹橋

개성시에 있는 돌 다리.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방원(太宗)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있어서 정몽주의 핏자국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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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瑩 (1316

1388)

고려의 명장(名將). 시호는 무민(武愍). 원직(元直)의 아들.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楊光道都巡問使)의 휘하(麾下)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며, 1352년(공민왕 1) 9월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같이 그 일당을 죽여 호군(護軍)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1354년(공민왕 3)에 중국 산둥(山東) 가오유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성(張士誠)을 치기 위해 원(元)나라에서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그는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정병(精兵) 2천 명을 인솔, 그 선봉(先鋒)이 되어 적을 거의 전멸시켜 그 용맹을 대륙에 떨쳤다. 뒤에 2차에 걸친 대대적인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워 훈 1등,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다. 1358년(공민왕 7)에는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光全羅道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吾乂浦:長淵)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 1365년(공민왕 14)에는 왜구가 교동(喬桐)·강화(江華)를 노략질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 있다가 신돈(辛頓)의 참언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었으나,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처형되자 곧 소환되어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1376년(우왕 2)에는 역사상 유명한 홍산(鴻山)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피봉, 이 뒤부터 왜구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몹시 무서워하게 되었다 한다. 또 1378년(우왕 4)에는 왜구가 승천부(昇天府:豊德)에 쳐들어와서 개경까지 위태하여 한때 그 형세가 자못 불리하였으나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힘을 합하여 적을 쳐서 섬멸시키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그는 이 밖에도 여러 번 왜구를 격파하여 국가에 크게 공헌을 하였거니와, 안으로도 조일신·김용(金鏞)·최유(崔濡) 등에 의한 모반(謨叛)을 모두 분쇄시켰으며, 한편 제주의 목호(牧胡)들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여 제주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 뒤에 명(明)나라와의 대외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던 중,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이른바 철령위 문제(鐵嶺衛問題)를 계기로 최영은 요동정벌(搖動征伐)을 주장, 그 계획이 서자 그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우왕과 함께 평양에까지 출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계 일파에 붙잡혀 이내 고봉(高峰:高陽)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죽음을 당하였다. 아들 담(潭)은 대호군(大護軍)의 벼슬을 지냈으며, 딸은 우왕의 영비(寧妃)이다.

요동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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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征伐

요동(遼東)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이 일대는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의 쟁탈지역이 되어 왔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에는 연(燕)나라가 동호족(東胡族)을 물리치고 이 지방을 점령하였으며, 다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漢)나라 때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는데, 고구려가 일어나 반도 내의 한사군(漢四郡)을 몰아내고 이어 요동지방마저 점령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고구려는 요양 지방에 요동성(城)을 쌓고 중국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 수(隨)나라 양제(揚帝)가 대군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다음 645년 당(唐)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함락한 다음 안시성(安市城)으로 향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요동 지방은 다시 중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후 원(元)나라가 망하고 명(明)나라가 일어나 여기에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만주 경략을 꾀하매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1387년(우왕 13)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돌아온 설장수(楔長壽)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명나라 영토로 삼겠다는 명나라 뜻을 전하매 조정에서는 강경론이 대두하여 드디어 거국적인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을 일으키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 3월 8도에 소집령(召集令)을 내리니, 각도에서는 소연(騷然)한 상태를 이루었다.오랫동안 왜구의 침해를 받아 곤란을 당하던 백성들은 또 농사 때를 잃게 되므로 경향 각지에서의 원성(怨聲)은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일파의 전횡시대보다 더 하였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영(崔榮)은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출진하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좌우군 3만 8천 8백여(10만이라는 설도 있음)를 이끌고 평양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위화도회군으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후 오랫동안의 요동회복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조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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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敏修 (?

1390)

고려 말의 무신. 공민왕 10년(1361)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2등 공신에 올랐다.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왜구를 물리쳤으며, 동왕 9년(1383)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동왕 11년(1385) 사은사(謝恩使)로서 명에 다녀왔으며, 동왕 14년(1388) 요동 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그 후 특사되었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유배당했다.

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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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淳 (?

1402)

조선의 무장. 본관은 음성(陰城). 1388년(우왕 14) 랴오둥 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등급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주(咸州·咸興)에 머물고 있자 수차 사자(使者)를 파견, 귀환을 요청했으나 모조리 사자를 죽이므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그는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 함주에 내려 가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나서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자의 간청에 못이긴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을 무렵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면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박순은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 간신히 배를 탔으나 결국 뒤를 쫓아온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태종은 그의 공(功)을 녹(錄)하고 관직과 토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忠臣)·열녀(烈女)의 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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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化島回軍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搖動征伐)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開城)으로 회군(回軍)한 사건. 본래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시기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함을 왕에게 상소하였으나 최영(崔瑩) 등이 받아들이지 않아 부득이 출정(出征)하였다. 그의 요동정벌 불가의 이유인즉 첫째 소국(小國)이 대국을 침이요, 둘째 여름철 농번기를 택함이요, 셋째 거국적 원정의 틈을 타서 왜구의 침입이 우려됨이요, 넷째 시기가 무더운 장마철이라 활이 풀리고 군대 내에 질병이 심할 것이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출정은 본래 그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경에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들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_) 조민수(曹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며, 또 습기로 인하여 활이 풀려 싸움을 할 수가 없다는 이유와 함께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며, 명나라에 보낸 사신 박의중(朴宜中)이 돌아오기도 전에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 등을 들어 상서(上書)로써 회군(回軍)을 청하였다.그러나 평양에 있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5월 20일 군사를 국내로 돌이켰다.이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松都)로 급히 귀경, 회군 반격에 급급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최영은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高陽)에 귀양보내졌으며, 왕은 강화도로 추방당하였다.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擧事)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조선 왕조 창건의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사전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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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田改革

고려 공양왕 3년(1391)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실시된 전제개혁. 고려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노출된 토지 겸병은 점차 확대되었고, 그 결과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는 고려의 재정 곤핍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에 신진 관료층은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화도 회군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한 신흥 관료층은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고, 그들 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기에 부심했다. 또한 목전에 임박한 관료의 녹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전개혁이 필요했다.우왕 14년(1388) 7월 조준(趙浚)이 전제의 문란과 토지의 겸병에 따른 폐해를 들어서 사전을 혁파하여 전제를 바로잡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토지 제도의 개혁을 상소하는 자가 많았으나 이색(李穡)을 비롯한 구세력의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 등이 사전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는 강력히 이를 추진,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다.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공양왕 2년(1390)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권문세족의 경제적 토대는 무너지고, 이성계 일파의 경제적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새로운 왕조의 물질적 기초가 확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