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열강세력 속의 조선

열강세력 속의 조선〔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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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호 개방은 열강 세력의 조선 침투를 돕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것은 조선 국내의 정세와 조선을 에워싼 국제 정세에도 새로운 국면을 만들었던 것이다. 청국은 중간 알선을 통해서 조선이 구미 제국에 문호를 개방케 함으로써, 일본 세력의 독점적 침투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려 하였다. 영국은 극동에 있어서 러시아의 남하 기세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고종 21년(1884)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통상조약을 맺은 것을 계기로 외교적 수완이 능란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고종과 조신(朝臣)들 사이에 친러시아 세력을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고종과 민비는 친러항청책(親露抗淸策)으로 기울어지고 러시아와의 비밀협정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세력의 남하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위협을 느끼던 청국은 대원군을 귀국시켜 조정내(朝廷內) 친(親)러시아 세력을 견제시키는 한편, 묄렌도르프를 파직·소환하고 새로이 미국인 데니를 외교고문으로 조선에 보내왔던 것이다. 이렇게 청(淸)·러시아·영(英) 여러 나라의 야욕 속에 포위된 조선은 커다란 국제적 고민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조선 정부가 민영준(閔泳駿)을 주일공사로, 박정양(朴定陽)을 주미공사로 파견한 것 등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일본은 기선을 제압하여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그 세력이 실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경제적 진출은 놀랄 만큼 비약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상관(商館)은 개항장에 즐비하였으며, 조선에 입국하는 상선(商船)은 일본 것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므로 무역 액수에 있어서도 일본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리하여 조선은 일본의 상품시장으로서, 또 본원적인 부(富)의 축적원으로서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진출에 대한 반항으로서 조선 정부에서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리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철회할 수밖에 없었으며,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은 더욱 가열한 침략의 촉수를 내밀게 되었다.

거문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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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文島事件

고종 22년(1885) 영국이 전라남도에 있는 거문도를 불법 점거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당시 아시아에서 영국·러시아의 양국 관계는 미묘하였고, 또 한·러 밀약설이 있었던만큼 영국은 돌연 동양함대에 명하여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러시아는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만약 청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시인한다면 러시아도 한반도의 일부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영국에 항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청국 정부를 통해서 영국에 항의를 하게 되고 청국 정부도 중간 알선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러시아도 장차 조선의 영토를 점거할 의사가 없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고종 24년(1887)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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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修好通商條約

1882년(고종 19) 미국과 처음으로 통상할 것을 협정한 조약.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Commodore R. W. Shufeldt)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와 수호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오(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방문하고 자기의 내한 목적이 통상수호에 있음을 밝히고 서계(書契)를 조정에 올려 주기를 청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내에 있어서 김홍집을 비롯한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은 미국에 대한 지식과 통상의 이익을 인식케 되었다. 이때에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일본의 우리나라 진출을 막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호통상을 권고하고 있었다. 이때 슈펠트는 이홍장에게 조선과의 수호통상을 알선해 주기를 청했다. 그 동안 수차의 회합과 사신 파견 등을 거쳐 1882년(고종 19) 3월 슈펠트 제독은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 등과 인천에 도착하여 그들의 알선으로 정부의 전권대관 신헌(申櫶), 부관(副官) 김홍집 등과 4월 4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구미 제국과 맺은 최초의 수호통상조약이며, 이후의 다른 구미 국가와의 통상조약 내용도 이것과 비슷하다. 최혜국(最惠國)조약, 치외법권(治外法權) 인정 등의 모순점도 보이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점도 보이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서 그 이듬해 4월 7일에 초대 미국 전권공사(全權公使) 푸트(H. Foote)가 인천에 도착하여 13일 조약에 비준(批准)하였다. 그 후 6월에 조선 정부에서도 민영익을 전권대신에 임명하고 부관 홍영식·서광범 등을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한불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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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佛修好通商條約

1886년(고종 23)에 프랑스와 맺은 조약. 프랑스는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견하여 수차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종교문제로 인한 오해와 마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늦게 국교를 맺게 되었다.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청나라로 탈출하여 교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1875년(고종 12)에 대원군이 물러나고 한국 내의 정세가 변동되자 다시 입국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종전보다 훨씬 완화되었다. 그 후 1882년(고종 19)에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영국·독일과도 조약을 맺게 되니 프랑스도 조약을 맺기 위하여 서두르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886년 3월에 코고르당(F. G. Cogordan 戈司當)을 전권위원으로 인천에 파견, 조선에서는 전권대신 김만식(金晩植)과 회담하게 하여 5월에 13관(款)으로 된 한불수호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善後續約) 등에 조인을 완료했다. 조약

내용은 한·영조약을 모방한 것인데,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은 제9관 2항의 규정에 교회(敎誨)라는 2자를 삽입하여 포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이것은 선교사업을 통한 교육문화에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 한불조약은 1887년(고종 24)에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葛林德)가 와서 김윤식(金允植)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였는데 조선에 대한 외교교섭사무는 당분간 주한노국공사(駐韓露國公使)에게 대리시켰으니 이것은

선교사업(宣敎事業)을 중시하고 통상관계는 경시한 때문이다.

한러밀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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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露密約說

조선말 청·일 양국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의 보호를 위하여 러시아의 협력을 얻으려던 전후 2차에 걸친 비밀교섭. ① 러시아는 1884년(고종 21) 한러수호통상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 체결 이후 급속도로 우리나라에 대한 세력이 강대해지던 중 갑신정변으로 인한 청·일 양국의 정세가 험악해지자 조정은 불안을 느끼고 러시아와의 접근을 꾀하게 됐다. 이에 1884년(고종 21) 조정의 일부 친러파는 묄렌도르프(M

llendorf:穆麟德)를 중계로 하여 러시아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교섭을 시작하였다. 그 동안의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부 일본측 사료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 기사의 내용이 모두 일치되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사실이 폭로되자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묄렌도르프는 면직(免職)되고 청·일 양국은 대원군(大院君)을 다시 귀환시켜 친러파인 민씨일파의 세력과 맞서게 하였다. ② 그 동안 청나라는 원세개(遠世凱)를 주한총리(駐韓總理)로 임명하여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한편 대원군을 입국시켜 민씨일파에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사태에 당황한 척신(戚臣)들은 또다시 러시아와의 접촉을 꾀하여 새로 부임한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韋具)에게 보호를 요구하고 군함의 파견까지 간청하였다. 이에 베베르가 문서를 요구하자 민비 등은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部事) 심순택(沈舜澤)의 명의로 문서를 만들어 국보(國寶)와 총리대신의 도서(圖書:도장)까지 날인해 보냈다. 이러한 교섭에 대하여 미리부터 반대하던 민영익은 사태의 진전을 우려하여 원세개에 통고하니 문제는 또다시 중대해졌다. 이 사건은 명으로 문서에 날인한 심순택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고 한편 러시아 정부도 이를 부인하였으나 원세개는 이를 중대시하여 임금의 폐위를 주장하기까지 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의 사정으로 폐위는 실현되지 않고 밀약설을 추진한 조존두(趙存斗) 등의 유배(流配)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한러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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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露修好通商條約

1884년(고종 21)에 조선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조약. 1884년 5월 베베르는 한국과 국교를 맺기 위하여 조선에 들어와 묄렌도르프(穆麟德)를 설복하여 그로 하여금 알선을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외무독판(外務督辦) 김병시(金炳始)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베베르와 회담하여 조약을 맺고 1885년 7월 7일(양력)에 한·로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조약의 중요 내용은 우호관계의 유지, 최혜국(最惠國) 대우, 선박왕래의 관세(關稅)에 관한 규정, 밀무역(密貿易)의 금지, 치외법권(治外法權)의 인정, 통상장정(通商章程)은 만국(萬國)의 통례에 따를 것, 특권의 균등한 부여 등이었다.

한독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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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獨修好通商條約

조선 말기 독일과 우리나라 사이에 체결된 통상조약. 독일이 조선과 교섭을 시작한 것은 1870년(고종 7)부터로, 당시 도쿄(東京) 주재 독일대리공사 본브란트(Von Brandt)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통상을 교섭하였으나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있던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1882년(고종 19) 미국이 우리나라와 통상조약의 체결이 성공하자 청나라에 전근되었던 브란트는 다시 청나라 북양아문(北洋衙門)의 직예총독서리(直隸總督署理) 장수성(張樹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입국, 마건충(馬建忠)의 알선으로 전권대신 조영하(趙寧夏)·부관 김홍집과 1883년(고종 20) 14관(款)의 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이듬해 10월 27일 조선 전권대신 민영목(閔泳穆)과 독일 전권대신인 요코하마(橫濱) 총영사 자폐(Ed. Zappe:?具) 사이에 정식으로 조인을 완료하였다. 조약의 중요한 내용은 우호관계의 유지, 최혜국(最惠國)대우, 선박의 왕래 및 관세(關稅) 규정, 치외법권(治外法權)의 인정, 밀무역의 금지, 특권에 대한 균등한 참여 등으로 이에 따라 1884년(고종 21)에는 독일 총영사가 부임하였다.

묄뢴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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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llendorf, Paul George Von (1848

1901)

조선 말기의 외교 고문. 독일 삭소니아 출신. 할레 대학에서 동양어와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 후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던 중 1882년(고종 19) 이홍장의 추천으로 통리아문 협판에 부임하였다. 갑신정변 때는 수구파에 협력하여 독립당과 반목, 한성조약이 성립되자, 정부의 특파전권대신 서상우의 부대신으로 도일하여 외교활동을 했다. 1884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 협조하여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성사시켰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에 있어서의 청국과 일본의 세력이 러시아에 의해 견제당하게 되매, 이홍장이 청국으로 소환하였다.

방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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防穀令

1889년(조선 고종 26) 이후 2·3차 행한 바 있는 미곡수출 금지령. 조선 고종 때에는 농민들의 부담이 많아져서 논밭 5·6두락(斗落)의 토지당 4섬 이상의 조세를 바쳐야 된 데다 관리들의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란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은 물물교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촌사회에 침투하여 갖은 수단으로 양곡을 사갔으므로 흉년을 당하면 양곡의 부족을 해결할 방책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1888년(고종 25) 큰 흉년을 만나자 각지에서는 폭동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炳式)은 1889년 9월에 원산항을 통하여 해외로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였다. 한편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默)은 일본 대리공사 곤도에게 그해 10월부터 1년 간 수출 금지에 협조하도록 요청했으나 곤도는 이 조처가 한·일수호조약에 위배된다 하여 방곡령 해제를 요청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함경도에 그 해제를 명했으나, 오히려 일본 상인들에게 곡물을 압수하는 등, 더욱 강력하게 나왔다. 이에 일본은 조병식의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므로 조병식을 강원 감찰사로 옮겼다. 그러나 1890년(고종 27) 함경도

관찰사 한장석(韓章錫)의 보고에 의하여 다시 방곡령을 시행케 되었으며, 그 해에 황해도에도 방곡령이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