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쇄국과 개화 정책/개화파의 개혁운동

개화파의 개혁운동〔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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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중인계급 사이에서 흡수되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차츰 양반관리들 사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갔다. 이들 양반관리들 사이에는 청의 지도와 원조에 의해 이 개화운동을 점진적으로 전개하자는 측과 일본의 원조하에 어떤 비상수단을 써서 내정을 개혁하고 독립국가의 실리를 얻자는 일파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 당시 대표적인 정치가라고 할 만한 김홍집·김윤식·어윤중·민영익(閔泳翊)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소장 지식인층으로서 척족 민씨에게 압박받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서재필(徐載弼)·서광범(徐光範)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일당을 보통 개화당(開化黨) 혹은 독립당(獨立黨)이라 불렀다. 개화당은 청불전쟁(淸佛戰爭) 발생 직후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竹添進一郞)의 종용과 원조의 약속하에 정치적 비상수단을 계획하게 되었으니 그 비상 수단은 다름아닌 쿠데타 계획이었다. 이 쿠데타는 고종 21년(1884) 10월 17일에 단행되었다.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재직하고 있는 우정국(郵政局)의 개국축하연(開局祝賀宴)을 계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 계획은 불과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제간의 문제는 더욱 착잡하게 엉클어졌다. 정변(政變)의 보고에 접한 일본 정부는 당황하여 한편으로 다케조에 공사(竹添公使)의 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시인하는 교활한 입장에서 교섭에 임하였다. 그 결과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뒤처리는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고, 청·일 양군간의 교섭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졌으며, 이 조약에 의해 양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조선의 입장은 조금도 자유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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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化黨

임오군란 전후에 형성된 단체로, 당시의 사대당과 대립하여 청과의 종속 관계를 끊고, 일본의 유신(維新)을 본받아 내정을 개혁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고 한 단체. 일명 독립당·일본당·혁신당, 중심인물은 김옥균·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이었다. 개화당은 청불(淸佛)사변 후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의 권고 및 지원 약속을 받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병의 개입으로 좌절되자,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 세력이 우세해지자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3차에 걸쳐 내각을 조직했다. 그러나 이 때의 정치는 일본인의 조종에 의한 것이고 일본의 침략을 간접적으로 방조한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친러파가 대두되자 개화당의 세력은 몰락하고 말았다.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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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 (1851

1893)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혁명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모자.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遇), 별호는 고균(古筠).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안동 김씨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출생. 1872년 문과에 급제한 후, 1881년 일본을 시찰하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사후(事後) 대책의 수신사(修信使) 박영효와 함께 부사(副使)로서 도일(渡日), 메이지(明治)유신 후의 일본의 조야(朝野)와 교제하는 동안 본국 혁신의 필요를 절감했다. 귀국 후 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 독립당(開化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씨 정권 타도를 획책하고 1884년 보수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후원하는 청국이 안난(安南)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12. 4)을 일으킨 후, 사대당의 중심 인물을 숙청,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군(淸軍)의 출동으로 3일 만에 실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 후쿠자와 유키치(小笠諭吉) 등의 후원으로 재거(再擧)를 도모하던 중, 청국을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오가사와(小笠原)에, 이어서 홋카이도(北海道)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어 도쿄에 귀환했다. 1894년 3월 수구당(민씨파)에 매수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상하이(上海)로 유인된 후, 암살당했다.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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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泳孝 (1861

1939)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 철종의 사위.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로 도일(渡日), 일본 조야(朝野)를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守舊派)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이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고종 21)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 전후영사 겸 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改名),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였고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어 자주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1895년(고종 32) 반역 음모사건으로 인해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907년(융희 1) 박제순(朴劑純) 내각의 알선으로 귀국, 죄가 용서되고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宮內大臣)에 임명되었다가,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1년

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910년 국권침탈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侯爵)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中樞院) 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 의원(貴族院議員)이 되었다.

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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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中 (1848

1896)

조선 고종 때의 대신.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본관은 함종(咸從). 고종 8년(1871) 문과에 급제, 승지(承旨)·참판(參判)을 지내고, 박정양·홍영식 등과 일본에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동학혁명 때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되었다. 친러파의 세력이 강해지자 왕을 러시아 공사관에 옮기고 김홍집을 살해한 뒤 고향으로 도망하던 중 용인에서 잡혀 죽었다.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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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翊 (1860

1914)

대한제국의 정치가. 자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雲楣:또는 竹楣·園丁·天尋竹齊). 본관은 여흥(驪興). 태호(台鎬)의 아들. 1877년 문과에 급제, 이조참의·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1881)·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通理衙門事務)를 역임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했고, 난이 수습된 뒤 사죄사절(謝罪使節)로 일본에 다녀왔다.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텐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海關事務)를 교섭하였으나 1883년 전권대신으로 도미(渡美), 국서(國書)를 전달한 뒤 한국 최초로 서양문화를 시찰하고 귀국했다.갑신정변(1883) 때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했고,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1885년 지리국(地理局) 군무국(軍務局)의 총판·한성부 판윤·병조 판서를 역임, 1886년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 위안스카이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홍콩으로 망명했다. 뒤에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1898년 찬정(贊政)이 되었으나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다시 홍콩에 망명,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행서를 잘 썼고 묵란(墨蘭)에도 능했다.

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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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徽 (1852

1935)

조선의 정치가. 초명은 영준(泳駿).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본관은 여흥(驪興). 두호(斗鎬)의 아들로 1877년(고종 14)에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을 지내고 주서(主書)·겸설서(兼說書)·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을 거쳐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승진하여 당시 민씨 척족의 세력을 타고 정계에 등장했다. 1884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을 진압, 사대당 내각에 들어갔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도승지, 이듬해 주차 일본판리공사(駐箚日本辦理公使)를 역임, 이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1889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전직했다가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에 오르고 이어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 1891년 경리사(經理使)·이조 판서를 거쳐 연무공원판리(鍊武公院瓣理), 이후 민씨 세력의 수령으로서 1893년에는 내무부 독판·통영사(統營使)·선혜아문당상(宣惠衙門堂上)을 겸직하고 이듬해 친군경리사(親軍經理使)가 되었다.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청군의 지원을 요청, 혁명군 토벌을 기도했으며 6월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그 후 갑오경장으로써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임자도(荏子島)에 귀양가게 되었으나 탈출, 평양으로 잠행하여 벽동(碧潼)의 청나라 포대에 잡혔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대사령(大赦令)으로 귀국,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시종원경(侍從院卿)·헌병대 사령관·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등 역임, 1910년 국권 침탈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子爵)이 되었고 거액을 투자하여 천일은행(天一銀行;商業銀行 前身)과 휘문학교(徽文學敎)를 설립했다.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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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光範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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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 자는 서구(敍九), 호는 위산(緯山), 본관은 대구. 고종 17년(1880) 문과에 급제, 김옥균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여 사대사상을 일소하고 신정(新政)을 수립코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했으며 갑오경장 후 법무대신이 되었으나 친러파의 등살에 못이겨 주미 공사로 축출되어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태극기의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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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極旗-使用

고종 19년(1882) 제물포조약의 사후처리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船上)에서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국기 문제가 논의된 것은 이보다 앞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회담에서 이미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후 동왕 20년(1883) 태극기의 사용을 정식으로 채택하고 공포하였다.

『한성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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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旬報

고종 20년(1883) 10월 1일에 창간된 신문.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의 효시(嚆矢)로서,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순간잡지(旬刊雜紙) 체제로 발간한 것인데, 관보(官報) 성격을 띠었다. 본래 국한문체를 목표했으나 활자 준비와 구수파의 반대로 결국 순한문으로 표기했다. 고종 23년(1886)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바뀌었다.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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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政變

1884년(고종 21) 10월 사대파(事大派)인 수구당(守舊黨)과 혁신파인 개화당(開化黨)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변란(變亂).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대원군(大院君)의 쇄국(鎖國)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閔泳翊)·민승호(閔升鎬)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金弘集)·김만식(金晩植)·어윤중(魚允中) 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은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윤웅렬(尹雄烈) 등의 소장파들이었다. 이 대립은 당시 청나라의 알선으로 내아문(內衙門)의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M

llendorf:穆麟德)의 의견에 따라 사대당이 당오전(當五錢)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악성(惡性) 인플레이션을 야기시키고, 경제계를 혼란시킨 데서 더욱 격화되었다. 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밀의(密議)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士官生徒)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때마침 신관제(新官制)에 의하여 신설된 우정국(郵政局) 개국(開局) 축하연회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열림을 계기로 내외고관(內外高官)을 초청하고,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케 하는 한편, 매복한 군졸들로 하여금 사대당의 요인들을 모조리 암살하려 하였으나, 민영익에게만 중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즉시 창덕궁으로 달려가 사대당과 청나라 병사가 변을 일으켰다고 왕께 거짓으로 고하고 왕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모시고는 일본 병사들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하고, 입시(入侍)하려던 윤태준(尹泰駿)·한규직(韓圭稷)·이조연(李祖淵)·민영목(閔泳穆)·민태호(閔台鎬)·조영하(趙寧夏) 등의 사대당 일파를 죽였다. 다음날 12월 5일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독립당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新政府)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좌의정에 이재선(李載先)·우의정에 홍영식·호조참판에 김옥균·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한성판윤(漢城判尹)에 박영효·좌우(左右)양영사 겸 서리외무독판(署理外務督瓣)에 서광범을 임명하였다. 6일에는 제정(諸政)의 혁신을 논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는 문벌을 폐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을 확립하고, 내시부(內侍府)·규장각(奎章閣)·혜상공국(惠商公局) 등의 불필요한 관제(官制)를 없애고 환상(還上)을 폐하고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재정을 오로지 호조에서 총할(總轄)하며 4영(四營)을 1영으로 통합하고 순사(巡査)를 설치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개혁은 청나라 병사의 무력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원세개(袁世凱)는 청나라 병사 2천명을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6일 오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昌慶宮) 후원 일대에서 호위 중인 일본 병사와 싸웠다. 일본 병사는 후퇴하고 왕은 박영효·김옥균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민비가 있는 북관종묘(北關宗廟)로 돌아갔다. 김옥균·서광범·서재필 등은 후퇴하는 일본 병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난하였고, 청나라 병사와 북묘로 달려가 왕을 모시고 있는 홍영식·박영교(朴泳敎) 및 사관생도들을 죽였다. 이날 일본 공사관은 조선 병사과 난민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일본 사람이 학살당하였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은 다케조에 공사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독립당의 집정은 소위 삼일천하(三日天下)가 되어 개혁의 뜻은 실패로 돌아갔다.

『갑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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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日錄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 때의 일을 김옥균이 기록한 일기. 저자 자신이 고종 18년 12월에 국내외의 정세를 통찰하던 기사와, 임오군란 및 그 영향 등을 썼고, 갑신년 10월 30일 우정국 낙성식(郵政局落成式)으로부터 정변의 시작·경과 등 12월 6일까지의 기사를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필사본으로 된 것을 한 장(漢裝)하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비장하고 있다.

한성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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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條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뒤처리를 위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1884년(고종 21) 10월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일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국군대의 출동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흥분된

민중이 서울에 있는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 거류민들을 죽였다. 이에 일본은 11월 이노우에 전권대신에게 2개 대대의 병력을 주어 조선에 파견, 11월 18일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로 진주했다. 이노우에는 직접 낙선재(樂善齋)로 고종을 예방하고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니 고종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협상에 응하게 하였다. 22일부터 양국 대표는 의정부(議政府) 안에서 협상을 개시했으나 사건의 책임 소재를 양국이 서로 상대국에게 전가하여 논란이 격화되다가 드디어는 일본측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 24일 조약을 체결케 되었다. 전문 5개조로 된 이 조약의 요지는 ① 조선은 국서(國書)로써 일본에게 사의를 표명할 것 ② 조선은 일본인 피해자 전원에 대한 보상금으로서 총 11만원을 지불할 것 ③ 일본군의 이소바야시 대위를 살해한 자를 잡아서 처단할 것 ④ 일본 공사관 신축기지 및 신축비 2만원을 지불할 것 ⑤ 일본 호위병의 영사(營舍)는 공관부지(公館附地)에 지을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 일본은 한국침략의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톈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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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津條約

고종 22년(1885) 조선내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청·일 양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는 청·일 양국간의 교섭을 통해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입장을 더욱 유리하게 전개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일 양국은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신으로 하여 톈진에서 회담, 이른바 톈진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청·일 두 나라는 ① 4개월을 기한으로 공동 철병할 것 ② 조선에 외국인 무관을 고용하도록 권고할 것 ③ 조선에 중대사가 생겨 청·일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를 다른 한 나라에 통지하고 그 사변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할 것 등 세 가지 사항을 규정했다. 이 조약에 의하여 청국은 조선에 더욱 강력한 세력을 침투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