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백제의 흥기

백제의 흥기〔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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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해 삼국시대(三國時代)를 형성하였던 백제의 건국 과정은 아직도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가 그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위례성(尉禮城:한강 유역)에 정착, 개국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규모가 커지자 곧 백제(伯濟)라 개칭했다(기원전 18년)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백제는 마한(馬韓) 50여 부족 중의 하나인 백제(伯濟)를 기반으로, 고구려에서 남하한 것으로 여겨지는 유이민(流移民) 세력이 결합됨으로써 고대 국가 체제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당시 삼한(三韓)의 맹주인 목지국(目支國:月支國)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든 데다가 위(魏) 지배하의 낙랑·대방의 침략을 받아야 했던 한강(漢江) 유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은 필연적으로 보다 큰 연맹세력을 갖추어 이에 대항해야 했다. 그래서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나라가 백제(伯濟)였고, 그 과업을 맡아 백제를 고대국가 체제로 발전시킨 맹주가 고이왕(古爾王:제8대)이었으며, 온조는 고이왕의 조상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이 점은 백제가 뒤에 그 시조(始祖)로 추대하고 1년에 네 번씩 제사지냈다는 구태(仇台)와 고이왕이 동일인이라는 추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이왕 때의 여러 치적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고이왕(234

285)은 관제(官制)·복제(服制) 등을 정하고 법령을 반포하여 전제적인 왕권을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동북으로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을 막으면서 한강 상류지역으로 팽창하고, 북으로는 낙랑·대방군(帶方郡)의 세력에 대항하였으며, 남으로는 마한 지역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후반기인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346

375) 때에 이르서는 마한의 나머지 땅을 병합하고 북으로는 대방군의 지역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차지하여서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371년(근초고왕 26)에 그의 아들 근구수(近仇首)는 평양성을 쳐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사살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전진(前秦)·고구려·신라의 3국 연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남중국의 동진(東晋)과 통교하여 남조문화(南朝文化)를 수입하고, 신라와 자주 싸우는 일본과 손을 잡으면서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이 무렵 백제는 일본에 대해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 등을 보내 한학(漢學)을 가르치게 하는 등 문화적 종주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하면서 397년(阿華王 6)에 고구려에게 대패하여 서울[廣州]이 함락되고 58성 700여 촌을 빼앗겨야 했고 또한 399년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 지역 및 가야 지역에 침입하였던 왜(倭)마저도 고구려군에게 소탕되어서 백제는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 더욱이 개로왕(蓋鹵王) 때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중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백제에 침투시켜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고, 그 기회를 이용, 475년(개로왕 21)에는 백제에 침공, 남한산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22대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公州)으로 옮겼으며, 이 곳에서 4대 66년 간을 잇다가 제 26대 성왕(聖王) 때에 다시 사비성(泗?城:扶餘)으로 천도했다.성왕은 신라와 화친하고 남 중국의 양(梁)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백제 중흥에 힘썼고 551년에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북으로 쳐 올라가서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하였으나, 같이 북상하였던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에게 도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성왕은 신라를 치다가 패사하였다(554년). 이 뒤부터 백제는 그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말았으나 세력을 회복하고자 신라 지역에 자주 쳐들어갔고 고구려가 또한 한강 지역을 점령하고자 신라를 치게 됨에 따라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그러나 빈번한 싸움은 국고를 말렸고 더욱이 무왕(武王)과 의자왕(義慈王)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백제의 멸망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라가 당(唐)나라와의 외교에 성공하여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군 13만은 백강(白江)에 상륙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군은 숯재「炭峴」를

넘었다. 이에 백제 최후의 장군 계백(階伯)은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자 충신 흥수(興首)·성충(成忠)의 말을 듣지 않고 사치와 놀음에만 빠져 있던 의자왕은 한때 웅진으로 피난갔다가 사비성이 연합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660년). 당나라는 백제의 의자왕 이하 태자·대신·장사 등을 당으로 데려갔고, 백제 땅에는 5도독부(五都督府)를 두어 통치케 하였다. 그 후 한동안 치열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 역시 내부 분열로 백제 부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정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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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중앙관제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왕 밑에 오늘의 내각 비슷한 6좌평(六佐平)이 있어 행정을 분담하였는데 538년(성왕 16)의 사비(泗?) 천도와 동시에 6좌평 외에

새로이 중앙 관직에 22부(部)가 설치되었다. 이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나뉘었는데, 내관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청이며, 외관은 국가·정부기관을 맡아 보았다. 관등급은 16관등의 관계가 있으며 복색(服色)을 달리하였다. ① 6좌평은 내신좌평(內臣佐平:수상격)·내두좌평(內頭佐平:재무장관)·내법좌평(內法佐平:문교장관)·위사좌평(衛士佐平:친위장관):조정좌평(朝廷佐平:사법장관)·병관좌평(兵官佐平:국방장관) 등이며 ② 내관 12부는 전내부(前內部:서무)·곡부(穀部:양곡)·육부(肉部:요리)·내경부(內▩部내창고)·외경부:외창고)·마부(馬部:車馬)·도부(刀部:무기)·공덕부(功德部:상훈)·약부(藥部:의약)·목부(木部:토목)·법부(法部:법규)·후궁부(後宮部:궁인) 등 ③ 외관 10부는 사군부(司軍部:군사)·사도부(司徒部:문교)·사공부(司空部:토목)·사구부(司寇部:사법)·점구부(點口部:호적)·외사부(外舍部:외척)·객부(客部:外交)·주부(綢部:재무)·일관부(日官部:관상)·도시부(都市部:시장) 등 ④ 16관등은 자주색 옷의 좌평(佐平)·달솔(達率)·은솔(恩率)·덕솔(德率)·한솔(?率)·내솔(柰率), 붉은색 옷의 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 청색 옷에 문독(文督)·무독(武督)·좌독(佐督)·진무(振武)·극우(剋虞) 등이다.지방관제는 전국을 5방(方)으로 구분, 방의 장관인 방령(方領)을 중앙의 단솔로 임명·파견하였는데, 방령은 방성(方城)에 살았다. 방령 밑에는 700

1,200 군대가 배치되었다. 각 방 밑에는 수개의 군(郡)이 있고, 군에는 군장(軍將)을 두되 상주하는 군대를 가지며, 몇 개의 성(城)들을 거느렸다. 백제 지방 조직의 특색은 행정 구역인 동시에 군사적인 임무를 가지는 데 있다. 웅진(熊鎭) 시대에는 22개의 담로(擔魯)가 설치되었다. 담로는 백제의 지방 큰 도시로서 중앙 왕족이 다스리며,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군제(軍制)는 국민개별제로, 15세 이상의 남자는 군인이 되며, 서울 5부에 각 500명의 군대를 두고, 지방 5방에는 각 700

1,200명의 군대를 두었다. 군관은 방령·군장이 있었고 군대는 보병·기병이 있되 특히 기사(騎射)를 중히 하였다.법제(法制)는 반역자·퇴군자(退軍者)·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하였다. 도둑질한 자는 3배를 배상케 하고, 유형에 처했으며, 여자를 범간(犯姦)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데, 살인자는 노예 3명으로써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다.

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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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토지제도는 원칙적으로 국유제여서 군왕만이 그 처분권을 가졌다. 토지는 특별한 공로자에게는 식읍(食邑)·사전(賜田)으로 분배하고, 관청에서는 관유지, 국왕에는 직할지(直轄地), 일반 평민에게는 구분전(口分田) 등으로 분배하는 제도였다. 백제는 특히 두락제(斗落制)를 실시하였다.조세제도를 보면, 일반 농민만이 조세로서 미곡(米穀)과 포 (布)·견(絹)·사(?)·마(麻)를 바치고 풍흉(豊凶)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백제의 산업은 농업정책으로는 논 개발에 힘써, 33년(2대 다루왕 6) 처음으로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짓게 했으며, 222년(구수왕 9)에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을 장려하였다고 한다. 수공업으로는 직조(織)·금속·도공(陶工)의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대외무역에 있어서는 공무역(公貿易:朝貢)과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으며 각종 수공업품이 교환되었다. 왜(倭)에서는 말[馬]·누에·직조법(織造法)·양조업 등을 배워 그들의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삼국사회의 특색은 귀족사회로서, 지배계급인 귀족(왕족 포함)과 피지배 계급인 평민·노비의 셋이 있었다. 귀족은 관직과 토지 소유의 특권을 가지고 있고, 평민은 국가 또는 귀족으로부터 받은 땅을 경작하여 납세와 군복무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또 노비는 귀족 또는 관청에 속하였다.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들은 노비로 삼았는데 이들의 인권은 무시되었다. 또한 백제는 8성 귀족제(八性貴族制:眞·解·沙·燕·?·?·木·國氏)가 있었다. 신분 계급에 따라 의복·집 등의 차별이 있고, 특히 여자는 정조 관념이 강하였다고 한다.백제는 한문(漢文)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나 제13대 근초고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이 성행하였고, 나아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로서는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등을 들 수 있다. 아직기는 근초고왕 때의 학자로서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왕인은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서 『천자문(千字文)』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 곳에서 기록관이 되었다. 기타 학자로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는 제25대 무령왕(武寧王)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일본에 유학을 전파하였다. 교육은 오경박사(五更博士)·의박사(醫博士)·역박사(曆博士)의 박사제를 두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국사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의 저자·연대 미상의 역사서가 있었다고 한다.백제의 종교를 보면, 원시 신앙에 있어서는 자연물 숭배와 조상 숭배의 사상이 행해져서 시조신(始祖神:溫祚)과 국모(國母)를 위하여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백제의 불교는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384년(침류왕 1)에 중국의 동진(東晋)으로부터 인도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처음 불교를 전하고, 385년에 한산(漢山:廣州)에 절을 세워 10여 명의 백제인을 중으로 삼은 데서 차차 퍼졌다. 성왕 때 겸익(兼益)이 인도에서 불경을 전래한 후 크게 융성하여 일본까지 불교를 전하고, 무왕(武王) 때는 왕흥사(王興寺)와 미륵사(彌勒寺)를 세워 백제 불교의 극성을 이루게 했다. 명승으로 성왕 때의 겸익(兼益)·혜현(惠現), 위덕왕(威德王) 때의 혜총(惠聰)·일라(日羅), 무왕 때의 관륵(觀勒)·도장(道藏) 등이 백제 불교의 중추를 이루었으며 그 중 혜총·관륵·도장·일라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중들이다. 불교의 전래로 말미암아 국민의 사상을 통일·정화시켰고, 사찰·석탑 등의 건립으로 건축·미술·공예의 발달에 이바지하였으며 명승의 왕래로 중국·인도와의 문화 교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백제의 도교 전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제 고토에서 발견된 산경전(山景塼:벽돌)의 무늬가 도교 사상을 표시하고, 근초고왕 때의 막고해(莫古解)의 말 가운데 ‘도가(道家)’란 말이 이미 나온 것을 보아 도교 전래를 알 수 있다. 시가(詩歌)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는 「정읍사(井邑詞)」와 『고려사 악지(高麗史 樂志)』에 전하는 「선운산가(禪雲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방등산가(方等山歌)」 등이 있으며 가명(歌名)만이 전한다. 음악가는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일본에 악사·악기를 전한 것을 보면 상당히 발달한 것 같으며 북·각(角)·공후(??)·쟁간(箏竿) 등의 악기가 있었다. 건축물에 있어서는 중국 및 서방 건축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큰 궁전·사원·탑·고분 등이 세워졌는데, 백제의 건축은 석탑을 통해서 그 모습을 살필 수 있다.전북 익산(益山)에 있는 무왕 때의 미륵사탑(彌勒寺塔),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의 오층탑[定林寺塔·百濟塔],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武零王陵:1971년 발굴) 등에서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조각으로는 마애석불(磨崖石佛)·미륵반가상(彌勒半跏像)·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산경(山景)이 새겨져 있는 벽돌 석등(石燈) 등이 유명하다. 회화로는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 벽화의 연화도(蓮花圖)와 운문도(雲文圖)는 온화하고 섬세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화가로는 아좌태자(阿佐太子)와 하성(河成)을 들 수 있다.서예(書藝)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서풍을 반영하여 고아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내지성주(奈祗城主)의 사택지적원비(砂宅智積願碑)의 단편이 해방 후에 발견되었고, 또 최근 공주 무령왕릉의 지석(誌石) 명문(銘文) 등에서 당시의 서풍을 찾아볼 수

있다. 공예품으로는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금관이 있다. 이것은 쓰기 위한 것보다 머리의 장신구인 듯한데 이쌍사엽(二雙四葉)으로 된 금화식조라관(金花飾鳥羅冠)이다.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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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비록 멸망하였으나 그 유민은 당의 군정에 반대하여 치열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존성(任存性:大興)에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3만여 명의 의용군을 거느리고 당군을 격파하여 200여 성을 탈환하였다. 한편 주류성(周留城)에서는 구왕족 복신(福神)과 승려 도침(道琛) 등이 의용군을 조직하여 사비성을 포위·공격하였다. 당 고종은 당군을 응원하기 위하여 유인궤(劉仁軌)를 보내었고,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이 친히 출정하기까지 하였다. 사비성에서 임존성으로 후퇴한 부흥군은 왕자 풍(豊)을 일본에서 맞아들여 백제국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을 근거로 하여 웅진성(熊津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백제 왕조의 부흥을 기도하는 귀족간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복신(福神)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은 왕자 풍에 의해서 살해됨으로써 그 운동이 수포로 돌아갔다. 항쟁 4년 만에 그 주력이 무너지자 당은 백제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웅진도독부 이 외의 도독부(都督府)를 폐지하고 포로로 데려갔던 백제의 왕자 융(隆)을 웅진 도독에 임명하였다.백제 문화는 일본에 이식되어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왕인(王仁) 등은 유교 문화를, 혜총(惠聰) 등의 고승은 불교 문화를 전파·이식하여 그들의 고대 문화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근초고왕 때 아직기(阿直岐)는 일본 태자[?道太子]의 스승이 되었고, 근초고왕 때 왕인(王仁)은 『논어』 『천자문』을, 무령왕 때 단양이(段陽爾)·고안무(高安茂)는 오경박사로 유학을 전하고, 성왕 때 노리사치계(奴利사嘶致契)는 불상과 불경을, 위덕왕 때 혜총(惠聰)은 계율종(戒律宗)을,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지리를 각각 전했고, 도장(道藏)은 『성실논소(成實論疏)』를 찬술하였다.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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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肖古王

백제 제13대 왕(재위 346

375).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 위대한 정복군주였으며, 익산(益山)으로 중심지를 옮긴 마한을 동왕 24년(369)경에 멸하고, 동왕 26년(371),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였다. 이어 한산(漢山, 현 남한산성)에 천도하여 한성(漢城)이라 했다. 북으로는 황해도에 미치고 한반도의 서반부를 세력권에 넣었으며, 바다를 건너 왜(倭) 및 중국의 동진(東晋)과 통교, 백제 왕국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수입하여 일본에 전하였으니, 특히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을 파견하여 일본에 한문(漢文)을 전파하였다. 또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백제의 국사인 서기를 편찬케 하였다.

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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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流王

백제 제15대 왕(재위 384

385). 근구수왕(近仇首王, 제14대 왕)의 맏아들. 진(晋)과 통교하였으며,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를 국가적인 문화사절로 맞이하였다. 이것이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시초이다.

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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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鹵王

백제 제21대 왕(재위 455

475). 개로왕은 당시 영토 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고구려의 세력에 대항하여 동왕 14년(469) 고구려 남쪽을 침공하는 한편, 쌍현성(雙峴城)·청목령(靑木嶺:개성)을 개축하고 북한산성의 방비를 굳건히 했다. 또 중국 위(魏)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고구려의 중 도림(道琳)의 간계(奸計)에 넘어가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영토의 일부와 서울 한성을 잃고 피살되었다.

동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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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城王 (?

501)

백제 제24대 왕(재위 479

501). 삼근왕(三斤王, 백제 제23대 왕)의 뒤를 이어 즉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신라·남제(南齊) 등과 화친을 맺었으며, 특히 동성왕 15년(493)에는 신라와 혼인동맹(婚姻同盟)을 맺고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항했다. 만년에는 호화방탕한 생활로 재정을 탕진, 백성의 생활이 궁핍해졌다.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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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王

백제 제26대 왕(재위 523

554). 무녕왕(武寧王, 제25대 왕)의 아들. 웅지를 품고 즉위한 그는 523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격퇴하고 성왕 3년(525) 신라와 수교를 맺어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동왕 16년(538) 사비(泗?, 부여)로 천도하고 한때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치는 등, 국세 회복을 꾀했다.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했으며, 중국의 남조 및 왜와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고 문화 교류에 힘썼다. 또 불교를 일으켜 겸익(謙益)과 같은 걸승(傑僧)을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하였다. 또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키고, 여러 부문의 기술자를 보내어 문화상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배양된 힘으로 한강 유역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동맹, 554년 고구려의 내분(內紛)을 틈타서 북진하였다. 그리하여 일시 한강 유역의 빼앗겼던 땅을 탈환하였으나 도리어 신라의 공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왜(倭)에 원군을 청하는 한편 왕자 여창(餘昌)과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管山城) 싸움에서 전사했다.

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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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

백제의 마지막 수도. 현 충남 부여읍(扶餘邑). 사비란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사비성은 부소산(扶蘇山) 남쪽으로 퍼진 금강을 자연의 성벽으로 삼아 동쪽은 나성(羅城)을 쌓고, 그 밖은 청마산(靑馬山)을 따라 요새를 만들었다. 백제 성왕이 이곳에 천도한 것은 동왕 16년(538)이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일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 신라 경덕왕이 부여로 개칭하고 군(郡)으로 한 이후 지방제도의 변개(變改)가 있었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있다.

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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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納土城

서울 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소재. 백제 시대에 축조. 주위 약 3.5km, 남북 약 1.2km, 동서 약 0.6km이다. 동쪽 성벽에는 성문지(城門址)로 추측되는 곳이 남아 있고, 성문에는 삼국시대의 토기 파편이 널려 있으며, 이곳에서 백동경(白銅鏡)·청동노기(靑銅弩器)·금반지 등이 발굴되었다. 사적 제11호로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이다. 서벽은 1925년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새로 제방을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으며 내부는 돌이 거의 없고 고운 모래로 쌓아올려 외부의 경사면이 2단으로 축조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토성은 다수의 주민이 생활하던 주거지로 추정되며 1999년 9월부터 재발굴 사업이 추진되어 풍납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 보존할 계획이다.

풍납동식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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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納洞式土器

풍납토성 안에서 출토된 토기로 원삼국시대에서 백제 초기에 걸친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는 주로 풍납토성 안 포함층의 바닥층에서 나오며 토질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 비슷하나 점토가 보다 곱고 색깔은 밝은 갈색이며, 붉은기가 감돌고 구운 온도도 약간 높아진 듯 표면이 단단하고 벗겨지거나 부스러지지 않는다. 그릇의 형태도 무문토기와 같고 두께는 0.7cm 정도가 가장 많다. 순전히 손빚음으로 그릇을 만들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렇듯 개량된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가 개량된 형식으로 원삼국시대의 이른바 김해식 토기와 공존한 것으로 믿어진다.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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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村土城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사적 제 297호. 둘레 약 2.7km, 높이 6

7m. 3세기 초에 축조한 것으로 1984, 1985년의 2차례 발굴조사 결과, 목책구조와 토성 방비용 해자로 되어 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토성 구조임이 밝혀졌다. 유물은 2개의 합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복원가능한 원통형 토기·적갈색 연질토기·회백색 연질토기·갈색 회유전문도기편·토제 어망추·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다. 그 중 문살무늬·승문을 새긴 두드검무늬 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 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그 외에 중국 서진시대의 갈색 회유전문도기 파편도 이 토성의 축조 연대가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이 밖에도 구릉과 구릉 사이의 저지대에서는 5m두께의 흙을 차례로 쌓아 만든 판축·움집·지하 저장혈 흔적도 발견되었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풍납토성·삼성동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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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寧王

백제 제25대 왕. 재위 501

523. 휘는 사마(沙摩)·융(隆)·여륭(餘隆), 시호는 무령(武寧).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 즉위하자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둔 역신(逆臣) 백가(?加)를 쳐서 백강(白江)에서 죽이고, 512년(무령왕 12)에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으며, 521년(무령왕 21)에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영동대장(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冊封)되었다. 523년(성왕 즉위)에는 인우(因友)·사오(沙烏) 등에 명하여 한북주군민(漢北州郡民)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1972년 7월 공주(公州) 송산(宋山)에 있는 왕릉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나왔다. 왕과 왕비의 두 왕관을 위시하여 금팔찌, 금귀걸이 등 순금제 3kg의 정교한 금세공품과 도자기, 철기 등 총 88종 2천5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왕릉 구조, 지석명문(誌石銘文)으로 백제 문화의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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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寧王陵

백제 무령왕(462

523)의 능.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시 증산동 고분군(古墳群)에서 발굴. 왕릉은 남쪽을 향하여 경사(傾斜)된 구릉지맥(丘陵支脈)의 말단 가까이 위치한다.능의 형식은 원형분(圓形墳)으로 그 직경은 복원해서 약 200m 내외. 봉토(封土)의 높이는 묘실(墓室)의 바닥에서부터 분구(墳丘)의 최고 부분에 이르기까지 7.7m. 분구의 최고처(最古處)는 현재 묘실의 중심보다 북쪽으로 5.8m 이동하여 후방에 위치하였는데, 이것은 내부 구조에 대한 토량(土量)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당초부터 취해진 방법으로 생각된다.분구의 주연부(周緣部)는 평지에 쌓은 원분(圓墳)처럼 수평을 이루지 않았으며 후반부에서는 지형의 경사에 따라 분구의 기저부(基底部)도 함께 경사를 이루고 있다. 봉토를 쌓기 위해 사용된 흙은 석회를 혼합한 흙이며, 분구의 동남쪽 기슭에는 봉토의 유실(流失)을 막기 위해 쌓은 호석렬(護石列)이 있다. 이 석렬의 전체 길이는 6m, 전체 원주(圓周)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형태가 불규칙한 잡석(雜石)을 4

5층씩 쌓아올렸는데, 높이는 60

70cm 가량. 묘실은 전축(塼築)의 단실묘(單室墓)이다.내부의 규모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묘실 내부엔 관대(棺臺)가 설치되어 있고, 관대 상면부터 천장의 중앙까지 높이는 2.93m. 묘실의 벽면에는 북면((北面)에 1개, 동·서쪽 벽에 2개씩 모두 합해서 5개소에 작은 벽감(壁龕)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등잔(燈盞)을 두기 위해 설비된 것이다.그 외의 구조로는 연도, 묘도(墓道) 배수구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부장품(副葬品)으로는 왕의 소유물로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 금제(金製) 뒤꽂이 1개, 금모곡옥(金帽曲玉) 및 심엽형수식부이식(心葉形垂耳飾) 1개,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1개, 금제화형장식(金製花形裝飾)[소형(小型)] 28개, 감금탄목제편옥(嵌金炭木製扁玉) 총 87개, 탄화목수형패식(炭化木獸形佩飾) 1개, 금제원형장식(金製圓形粧飾)[영락부 소형(纓珞附小形)] 970개, 금제나선형장식(金製螺旋形裝飾) 1개, 금제구옥(金製球玉) 265개 등 모두 23종이 있고, 왕비의 소유물로는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 초실형(草實形) 및 탄환형수식부 금이식(彈丸形垂飾附金耳飾) 1쌍, 금제이식(金製耳飾) 1쌍, 금제경식(金製頸飾) 1연(蓮), 금동식리(金銅飾履) 1쌍, 영락부 금제사각형장식(金製四角形裝飾) 39개, 금제소주(金製小珠) 171개, 오각형초화문은장식(五角形草花文銀裝飾) 2개, 청동제이차구(靑銅製二叉具) 2개, 유리제곡옥(曲玉), 유리 연리관옥(練理管玉) 2개, 탄화목조옥(炭火木棗玉) 19개, 호박조옥(琥珀棗玉) 7개 등 31종이 있고, 기타 부장품으로는 금속제품으로 수대경(獸帶鏡) 1면(面),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1면(面) 등 16종이 있고, 도자기류로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1개 등 4종이 있으며, 두침족좌(頭枕足座) 6종, 석제품류 2종이 있다.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이 출토품들은 한국 고대사, 특히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