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고구려의 성장

고구려의 성장〔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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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국 세력과의 투쟁 과정 및 태조왕과 고국천왕 사이의 정복 사업 추진으로 점차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이어서 미천왕(美川王) 때 이르러서는 낙랑·대방을 축출하여 한족(漢族) 세력의 아성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慕容氏)의 만주 진출과, 고대 왕국으로 발돋움한 백제의 북진으로 이들과 혈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는 수도가 함락되고, 뒤이어 동왕 41년(371)에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백제는 고이왕(古爾王) 이후 약 1세기 뒤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그는 동왕 24년(369)경에 마한을 병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 고국원왕을 격살할 만큼 강성한 정복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백제는 현재의 경기·충청·전라도의 전부와 강원·황해도의 일부까지를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중국의 동진(東晉), 남으로는 왜(倭)와 통교하여 한반도의 다른 세력을 견제하면서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했다.이 정복군주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하여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의 단서(端緖)를 열었고, 국사(國史)인 서기(書記)를 편찬,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에 침류왕(枕流王) 때는 불교를 유입하여 새로운 관념 체계를 수립하였다.고구려군의 연패(連敗)는 군사 조직의 재정비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국가 체제의 재정비를 필요로 했다. 이를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 때는 국가 체제의 재정비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불교를 유입하여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기하고, 태학(太學)을 세우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확립했다. 북진을 가다듬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정복 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고구려의 대외적인 정복 사업을 강력하게추진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영토를 확대하고영락(永樂)이란 독자적인 연호(年號)를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하였다. 그는 요동을 점령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켰으며, 백제를 정벌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대시켰다. 또한 신라를 침공한 왜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했다. 이어서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부왕의 사업을 계승하여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平壤)으로 천도하고 집권 체제를 정비, 극성기(極盛期)를 현출하였다. 중국의 남·북조와 각기 통교하면서 두 세력을 견제·조정하고 한반도에서는 남진책을 폈다. 장수왕 63년(475) 백제의 수도를 함락하였고 개로왕(蓋鹵王)을 살해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양만(南陽灣)에서 죽령(竹嶺)에 이르는 영토를 포함하고, 안팎으로 제도가 완비된 일대 왕국으로 동아시아에 등장하였다.백제는 고구려의 세력에 영토를 탈취당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중국 북위(北魏)와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이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 475년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었다. 문주왕(文周王)은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으며, 동성왕(東城王) 때는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무녕왕(武寧王)을 거쳐 성왕(聖王) 때에 이르러서는 국가 부흥의 기운이 일어났다. 성왕 25년(538)에는 새로운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사비(泗?, 부여)로 다시 천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아마 그의 천도와 더불어 중앙의 22부(部)·지방의 5부(部)·5방(方) 제도가 갖추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또 불교를 진흥시켜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남조 및 왜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렇게 길러지고 조직된 힘을 가지고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하여 한강 유역의 국토 회복의 목적을 일시 달성하였으나,오히려 신라의 공격을 받아 오랫동안의 노력의 결정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분격한 성왕이 관산성(管山城, 沃川) 싸움에서 패한 후 백제는 신라를 최대의 원수로 여겨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이 새로운 국제 관계를 조성하게 되었다.

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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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川王

고구려 제15대 왕(재위 300

331), 일명 호양왕(好壤王). 고추가 돌고(?固)의 아들로 봉상왕(烽上王, 제14대 왕)이 돌고를 죽이자 민간에 숨어 있었다. 봉상왕이 폐위된 후 왕이 된 그는 302년에 현도군을, 33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합병하였다.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3년에 낙랑군을, 이듬해 대방군을 침공하여 한의 거점을 축출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안악 삼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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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岳三號墳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소재. 1949년 제 1, 2호에 이어 발굴되었다. 고분의 기저(基底)는 남북이 33m, 동서가 약 30m, 높이 약 6m이다. 석실의 내부구조는 연실(羨室)·전실(前室)·후실(後室)·서측실(西側室)·동측실(東側室) 및 동랑·북랑으로 되어 있다. 석실은 각각 그 크기와 장식이 다른데, 각실의 벽화는 연실에 주인공의 호위병, 전실에는 무장·의장대·악대·장사, 후실에는 실내가무·곡예도, 화랑에는 행렬도, 천장과 돌기둥에는 태양·달·구름 등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발견된 자료에 의해서 고찰하면 약 1,600여년 전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능이라고 추정된다.

소수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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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獸林王

고구려의 제17대 왕(재위 371

384). 고국원왕의 아들. 동왕 2년(372)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 불상과 경문을 보내오자 이에 사례하였고 태학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동왕 3년(373)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불교의 유입은 물론 토착화에 노력하는 한편 백제의 수곡성(水谷城:현 新溪)을 공격하는 등 정복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고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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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原王

고구려의 제16대 왕(재위 331

371). 미천왕의 맏아들. 동왕 6년(336) 진(晉)에 사신을 보냈으며 동왕 12년(342)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같은 해 연(燕)의 모용황(慕容?)이 침입하여 미천왕의 묘를 파헤쳤으며, 환도성에 불을 지르고 왕모(王母)를 잡아갔다. 소수림왕 1년(371) 백제의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불화가 계속되었다.

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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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王 (375 413) 고구려 제19대 왕(재위 391

413).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고국양왕(故國壤王, 제16대 왕)의 아들. 생존시는 영락대왕(永樂大王)으로 호칭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웅대하고 뛰어난 뜻을 가졌던 그는, 즉위 후 정복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광개토왕 3년(393) 백제의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고, 동왕 6년(396)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함락하였다. 동왕 10년(400) 사신을 연(燕)에 파견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나 그 예가 오만하다고 연의 모용희(慕容熙)가 쳐들어오자 이를 반격, 신성(新城)

·남소(南蘇)를점령하고, 동왕 12년(402)과 14년(404) 연을 공격했다. 한편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자 보기병(步騎兵) 5만을 보내 신라를 도와 격퇴했다. 동왕15,16년(405·406) 연의 공격을 받았으나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격퇴하였다. 동왕 18년(408) 북연(北燕)과 수호를 맺었으며, 동왕 19년(409) 독산성(禿山城) 등 여섯 성을 축조하였다.이듬해 동부여를 쳐서 64성을 격파하였다. 그는 재위 동안 사방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성공했으며,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하였다.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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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壽王 (394

491)

고구려 제20대 왕(재위 413

491). 광개토왕의 아들. 부왕(父王)의 사업을 계승, 중국의 진(晉)·송(宋)·위(魏)와 국교를 맺고 장수왕 15년(427)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에서 평양(平壤)으로 천도하여 남진책에 착수하였으며, 백제·신라의 북변을 침범하던 그는 중 도림(道琳)의 계략을 들어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동왕 63년(475)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을 함락, 개로왕(蓋鹵王)을 격살하여 선대(先代)의 한을 풀었다. 동왕 68년(480)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의 고명성(孤鳴城) 등 7성을 탈취했다. 그는 영토를 점점 확장하여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양에서 죽령에 이르는 일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의 극성기를 이룬 희대(稀代)의 호걸 영주(英主) 장수왕은 대륙과는 견제·조정의 외교를 펴면서, 한반도에서는 남진책을 수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위협했다.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기도 했다. 장수왕은 또 종전의 부족 제도를 지방 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종전의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관제를 개혁하여 고구려를 대국으로 등장시켰다.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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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

평남의 남서부 대동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는 대도시. 전설에 의하면 단군 이래 위만조선까지의 도읍지였으며, 낙랑군의 중심지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당시 유물·유적이 평양 부근에 많이 산재해 있다. 한(漢)의 세력이 물러나고 고구려가 발흥할 때 장수왕은 서울을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보장왕 27년(668),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고구려의 수도로서 번성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다스렸으나 그 후에 축출되었고, 통일 신라 때 방치되었다. 그 후 고려가 건국하자 평양은 부흥되었고, 서경(西京)이라 하여 개경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공민왕 때 평양부(平壤府)라 하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통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