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선사시대의 미술/낙랑의 미술

낙랑미술의 주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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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美術-主體性

낙랑은 한(漢)이 설치한 동방군현(東方郡縣)의 하나로서 본국과 긴밀한 연락을 맺으며 오랫동안 현저한 문화자취를 남기면서 존속해왔다. 그들 문화의 주체성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의 발달한 문화의 이식(移殖)에 머물며, 한(漢)문화의 재판(再版)에 불과했다. 따라서 낙랑의 문화는 중국 문화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낙랑을 해동(海東)의 소(小) 중국이라 부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낙랑문화가 중국문화의 재판이기는 하지만 다음 시대의 문화, 즉 삼국시대의 문화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의의(意義)만은 무시할 수 없다. 또 낙랑의 옛 도읍지인 대동강 남안(南岸)일대의 유적에서 나온 유품 중에는 중국 본토에서도 보기 드문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어 낙랑미술의 또 다른 일면, 즉 독자성(獨自性)을 의미하고 있는데, 은연중 우리나라 풍토에 적합한 특수성마저 띠게 된다. 낙랑미술은 대륙민족의 취향에 따라 견고한 우월감에 사로잡힌 귀족미술의 편모도 보인다.

목곽분과 전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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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槨墳-塼築墳

낙랑고분의 외형은 대개 주한시대(周漢時代)의 방대형(方臺形)을 따르고 있는데, 내부구조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목곽분은 지표면 아래에 구조를 두고 곽실(槨室)을 광저(壙底), 벽 모두 각목재(角木材)를 써서 쌓아 두른 가옥형 분묘 곽실 밖의 다른 곳에 부장품을 수용했고 별곽(別槨)을 따로 둔 분묘도 있다. 목질은 부패하기 쉬우나 일부 분묘는 봉토(封土)를 통해 괴어 든 지하수가 목질보관을 용이하게 하여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관된 예도 있다. 전축분은 묘실의 기저(基底)는 지표면 아래에 두었으나 묘실의 반 이상이 지상에 노출되도록 축조하였다. 묘실의 광저(壙底)는 두겹으로 전(塼)을 깔았고, 그 주변에 약간 배가 나온 전벽(塼壁)을 둘렀으며 천장은 궁륭형, 입구는 아치(arch)식이다. 연도가 달렸고 묘실이 단실(單室)로 된 것과 복실(復室)로 된 것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목곽분이나 전축분 모두 단장(單葬)하는 경우와 합장(合葬)하는 경우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석암리 제9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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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巖里 第九號墳

낙랑군의 군치지(郡治址)로 추측되는 평안남도 서남부의 대동면 석암리 소재 낙랑고분. 박산로 등 우수한 부장품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며, 분묘형식은 목곽분이면서 일반 목곽분과는 다른 형식을 지니고 있다.

박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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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山爐

석암리 제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향로. 중국 본토의 박산(博山:山東省靑州 소재)의 산모양을 향로 뚜껑의 형태로 따온데서 '박산로'로 명명되었다. 이것은 산악숭배(山岳崇拜)의 일단으로도 보여지나 보다 더 종교적인 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시 제(齊)에 속했던 박산이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중심지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거북이 등 위에 봉황새를 세우고 그 머리로 향로를 떠받들고 있는특수한 의장과 수법을 보이는데 새와 거북의 사실적인 표현이 주목된다. 기법은 간결하게 처리되었으나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낙랑 귀족들의 아름다운 꿈을 상상할 수 있는 용기이다. 기형은 한 대(漢代)에 생긴 것이며 용도는 제기(祭器)로서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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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들이 화장용구를 넣어 쓰던 분곽의 일종으로 낙랑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용기. 염신은 기수(奇獸) 또는 괴수(怪獸)로 조각된 세 개의 다리에 의해 세워지고 뚜껑 또한 괴수의 머리로 조각되어 있어 대조를 이룬다. 뚜껑의 중앙에는 철기에서도 볼 수 있는 네 잎의 갈마형이 교차되는 무늬가 음각되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두 마리의 괴수와 괴조(怪鳥) 등이 대립적으로 음각되어 있다. 제9호분에서 출토.

청동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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銅鏡

거울은 고대인에게는 모든 물상을 반영하는 마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여 매우 신성시하였고, 따라서 이를 만드는 기술도 특수한 발달을 했다. 낙랑시대의 청동거울은 대체로 용호(龍虎), 괴수(怪獸) 계통의 거울과 내행화문경(內行花紋鏡)이 가장 많고 한 시대의 대표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명문(銘紋)의 각기(刻記)가 들어 있는 것도 많은데, 그 중에서 내행화문거치경(內行花紋鉅齒鏡)은 현존 청동거울 중 가장 오랜 것에 속한다.

순금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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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金帶鉤

제9호분 관속에서 출토된 것으로 순금판 위에 한 마리의 어미용(母龍)을 중심으로 아용(兒龍) 일곱 마리를 돌기상(突起狀)으로 타제한 위에 금실(金縷)과 금립(金粒)을 붙이고 사이사이에 녹색 보석을 감입(嵌入)한 정교한 세공품(細工品)이다. 낙랑인의 유목민으로서의 야성과 신비스러운 원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채화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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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가치로서도 드물게 보는 낙랑시대의 대표적인 칠기. 낙랑의 고분 묘실은 칠기 보존에 적당했기 때문에 완품(完品)에 가까운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제작 연대를 밝힌 것이나 칠기의 명칭, 용량, 제작자 이름, 감독관의 이름까지 자세히 박힌 것도 많다.채화칠협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고, 뚜껑, 신부(身部) 모두에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칠협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은 신부의 상위(上位)에 그려진 각종 인물군상이다. 검은 옻칠을 한 위에 자주색·빨강·노랑·짙은 녹색·다갈색 등의 채색을 써서 그린 이들 군상은 정련(精練)된 수법이나 표현의 감각적인 요약이 뛰어나고 작은 화면에 비해 뚜렷한 개성표현을 보인다. 30을 헤아리는 이들 인물군상의 인물마다에 각기 방서(榜書)가 붙어 있는데 내용은 당시의 민간에 전해 내려오던 효녀열녀(孝女烈女)의 설화, 혹은 역사상의 삽화를 테마로 한 것이며, 후한(後漢)의 독특한 경학존중(經學尊重), 절의존중(節義尊重)의 풍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채협총에서 출토. 폭 16cm, 길이 34cm의 크기를 가졌다.

채문칠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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彩紋漆匣

채협총에서 출토된 칠기의 하나로서 구형(矩形)의 용기. 뚜껑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을 한 인롱(印籠) 뚜껑의 식을 따랐으며 검은 옻칠을 한 위에, 자주·노랑·파랑의 3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고아하고 유현(幽玄)한 표현의 용운문(龍雲紋)이 그려져 있다.

장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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葬玉

중국의 문헌에 죽은 자의 신체의 구규(九竅)를 구슬로 막는다는 것이 전해져 내려왔고, 또 그에 해당하는 유물이 전해내려 왔는데 낙랑의 제9호분에서도 그 실례가 보인다. 옥의 용도에 따라 종류를 나누면 죽은 자의 입에 넣는 옥으로서 매미 모양을 가진 함, 눈을 막는 안옥(眼玉), 코를 막는 비색저(鼻塞杵), 귀를 막는 충이(充耳), 항문을 막는 데 사용하는 색옥(塞玉), 저(杵) 등이다.

동증·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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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유물 중 최대형에 속하는 동제용기(銅製用器)로서 귀족들의 취사구이다. 증(甑=시루)은 높이 15cm, 구경 30cm나 되고 음식물을 찌기 위한 찜솥의 역할을 한다. 복(=가마)은 높이 24cm, 구경 19cm인데 직접 불 위에 놓여졌던 것인지 쌓아올린 부엌 위에 놓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증기를 발산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불이 닿는 면을 넓게 만든 것이 특색이다. 이 두 개를 상하로 결합시켜 사용했고 각종 연회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