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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흥종교〔개설〕
편집韓國-新興宗敎(槪說)
신흥종교의 개념
편집新興宗敎-槪念
신흥종교란 단어는 한 사회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새롭게 발흥된 종교의 모습을 지칭한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이며 어두운 면으로,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며 밝은 면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전자는 신흥이란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걷잡을 수 없는 풍조 속에서 한때 발생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타고 우후죽순격으로 발흥·유행하다가 또 다른 사조가 일어날 때에는 풍전등화격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하며, 후자는 역사적 창조성을 지닌 종교라고 이해하고 풀이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 본 관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고등종교가 창교되던 당시 석가나 공자나 예수의 활동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듯이 신흥종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신흥종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기성종교와 대치해서 쓰여진 상식적 용어이며, 그 의미는 '새로운 믿음의 집단'이 형성되어 가는 상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한국 고유신앙 전체를 일괄하여 유사종교(類似宗敎)라고 단정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직후 혼란상을 틈타 또다시 많은 신흥종교가 발흥되었을 당시 민심을 현혹시키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하여 치안국에서 그들을 조사할 때 붙인 이름은 국산종교(國産宗敎)였다.
한국사회에서 신흥종교란 말의 개념은 문학적 반성없이 자기 종교 아닌 타종교를 저열시하려는 데서 한때 유사종교란 말로 무차별하게 통용되기도 했다. 사실상 신흥종교의 개념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학문적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신흥종교의 계보
편집韓國新興宗敎-系譜
그러면 한국에 있어서 신흥종교란 어떠한 분야인가?
첫째, 유교·불교·그리스도교 등과 같은 기성종교가 오랫동안 전통화되어 나온 가운데 토착화 과정에서 시대적·사회적·여건에 따라 분파 현상으로 파생된 새로운 종파를 신흥종교라 할 수 있다. 유교에서 분파된 신흥종교는 김항(金恒, 1826∼1898)의 영가무도교, 강대성(姜大成)의 일심교(一心敎) 등 6종파이며,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는 천화불교(天華佛敎)·불입종(佛入宗) 등 64종파(계룡산하 40종)나 되고, 그리스도교에서 분파된 신흥종교는 세계일가공회(世界一家公會)·새일수도원 등 25종파로 나뉘어 있다. 둘째, 근세에 일어난 종교사상 중 특히 동학사상과 단군숭배에서 연원(淵源)하여 분화된 각종파들을 들 수 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동학사상은 최시형(崔時亨)을 거쳐 손병희(孫秉熙, 1861∼1923)에 이르러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건전한 민족종교로 성장하여 왔다. 그러나 손병희대에서 분화현상이 시작되어 지금은 천진교(天眞敎)·수운교(水雲敎)를 비롯하여 20여 종파의 신흥종교가 있으며, 또한 민중 고유의 단군신앙 역시 나철(羅喆, 1864∼1916)에 의하여 민족사상을 근간(根幹)으로 하는 건전한 민족종교로 발전하는가 하면 극히 기본적이고 은둔적인 방향으로 전락한 광명대도(光明大道) 불아신궁(亞亞神宮) 등 17여 종파의 신흥종교가 형성되어 있다.
셋째, 한국 고유의 민간신앙을 토대로 기성종교의 교리나 어떤 다른 사상들을 습합하여 새 종단을 형성한 습합적(習合的:Syncretism) 신흥종교 '신명사상(神明思想)을 주축으로 한 유합적 신흥종교'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강일순(姜一淳, 1871 ∼1909)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집단으로서 보천교(普天敎)·태극도(太極道) 등 47종과 봉남계(奉南系) 12종, 각세도계(覺世道系) 10종, 계통불명 10여 종파인데 이들은 모두 습합적 신흥종교들이다. 넷째, 토속성이 강한 샤먼적 신흥종교들이 형성되고 있다. 이를 무속숭신계(巫俗崇神系) 신흥종교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치병(治病)·요행(僥倖)·기도(祈禱)로써 약자의 심리를 풀어 주며, 주술성이 많은 영험한 인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집단화하여 조직된 종교들이다. 여기에서는 사회봉사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교리는 전무한 상태이다. 이 집단을 신흥종교 분야로 취급하고 있으나, 특히 이런 집단 속에서 유사 종교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속하는 것은 관성묘(關聖廟) 등 20여 종파에 달한다.
한국신흥종교의 유형
편집韓國新興宗敎-類型
한국신흥종교의 여러 가지 유형을 발생원인적·구조적·사회심리적·현상학적으로 각각 분류한다.
발생원인적으로 분류하면, 첫째 기성종교의 성립 과정, 즉 발생초기에서와 같은 창조성(創造性)과 보편성(普遍性)을 가진 절실한 참 종교가 있고, 둘째 기성종교에서 부식된 '섹트(sect)'나 '싱크레티즘(Syncretism)'의 준종교(準宗敎)도 있고, 셋째 종교적 형태는 갖추었으나 주술(呪術)로써 사회 여건과 수준에 맞추어 부식(腐殖)하려는 종교, 즉 '샤머니즘'적 민간신앙을 토대로 한 종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구조적 유형으로 보면, 첫째 기성종교와 동일한 구조를 갖춘 신흥종교, 둘째 교주를 두지 않고 어떤 원리를 신앙의 본거(本據)로 삼아 조직된 신흥종교, 셋째 무당의 당골집과 같이 신(제)단(神<祭>壇)을 차려 제(祭)행위를 하며 간판은 내걸고 있으나 고정 신도(信徒)를 갖지 않은 신흥종교로 나눌 수 있다.
사회심리적 분류, 즉 신도들의 사회에 대한 성향(性向)을 보고 분류해보면 첫째 공격형, 둘째 타협형, 셋째 도피형으로 나눌 수 있다. 신흥종교는 사회적으로 눌린 사람들의 원망복합체(願望複合體)이므로 하층민(下層民)의 좌절과 소망이 반영된 거울이라 하겠다.
현상학적(現象學的) 유형을 분류해 보면 분파적(分派的) 신흥종교와 습합적(習合的) 신흥종교로 대별할 수 있고, 전자를 다시 분파형(分派型)과 탈피형(脫皮型)으로, 후자를 '히어로(Hero)'형과 '길드(Guild)'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분파적 신흥종교에서 어떤 기성종교를 모태(母胎)로 하여 성장하려는 경우는 '분파형'이며, 모태로 했던 기성종교와는 전혀 다르게 그 모태 종교와는 관계 없이 성장하려는 경우는 '탈피형'이다. 이 분파적 신흥종교는 기성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실패할 경우 발생한다.습합적 신흥종교란 기성종교와 같으려는 표준형이 전무하고 완전 자기중심적으로 유합하여 설립된 종교 단체이다. '히어로형'은 어떤 탁월한 인물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적절한 교리(敎理)·교강(敎綱)을 마련하고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며 추종자를 규합하려는 형이다.
'길드형'은 사회 이면에서 극도로 현실에 불만을 품고 방황하던 몇몇 사람들이 어떤 인연으로 만나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구가하는 의지를 통합하여 결합되는 일종의 '길드사회주의'적 형식을 취하는 종교이다.
한국에 있어서 이같은 신흥종교의 격증은 조선의 패망, 일제의 침략, 8·15해방, 한국전쟁 등 대변환(大變換)의 악순환 상태에서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일어난 신흥종교와 같은 현상은 일찍이 어느 때 어느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니 점차 한국 사회의 특수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발생적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신흥종교의 발생원인
편집新興宗敎-發生原因
신흥종교의 발생원인은, 세계의 모든 종교 발생 과정이 그렇듯이 한 사회가 가치판단의 서열이 뒤바뀐 상태가 될 때 민중들은 신념체계(信念體系)의 확립을 요구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기성종교가 스스로 새로워지면서 민중 속에서 종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신당할 때 거기에는 또 다른 종교의 발생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노미(Anomie)' 현상이 만연되고 기성종교의 불신도가 강할수록 신흥종교 발생을 자극하게 된다. 특히 논리에 '카오스(Khaos)'와 비약이 심한 동양사회에서는 발생 가능성이 더욱 짙다.
한국의 신흥종교는 구한말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출현한 종교들이 그 효시가 된다. 정치의 타락과 유교의 부패와 아울러 천주교는 토착화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하층민(민중) 사이에서 일어났다. 역사적 전환기와 사회적 급변기에 정국의 혼란, 사회적 불안, 가치관의 붕괴, 지배종교(支配宗敎)의 부재(不在), 기성종교의 외면(外面) 등등 복합적 사회병리를 요인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오늘날 신흥종교는 기성종교의 과거성이나 고루성, 교리의 진부성(陳腐性), 행실의 불륜성·경제성 또는 경전(經典) 해석 차이 등으로 한없이 분화되어 나아간다. 한국 신흥종교의 발생은 눌려사는 민중들이 빈곤·질병·무지에서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한사회에서의 신흥종교의 증가율은 사회적 '아노미'현상과 정비례하는 것이며, 반대로 안정된 사회일수록 신흥종교의 자연 소멸률은 높아지는 것이다.
한국신흥종교의 특성
편집韓國新興宗敎-特性
신흥종교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종교유합으로, 신흥종교의 대부분이 타종교의 교지(敎旨)를 절충·종합하여 교리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분파한 계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유(儒)·불(佛)·선(仙) 3교의 융합·합일을 주장하여 기성종교의 무력에 실망한 민중의 요구에 응하려 했던 것이니 그 시원(始源)은 동학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이니 현재까지의 시대를 선천시대(先天時代)로, 현재 이후의 시대를 후천시대로 구분하여 전면적인 변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는 세사(世事)와 인사(人事)를 옛날과 오늘날의 세계로 구분하여 시운(時運)으로 관찰하려는 일종의 운명관이며, 최제우(崔濟愚)의 선후천개벽, 김항(金恒)의 정역사상(正易思想), 강일순(姜一淳)의 후천세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후천 개벽사상은, 기성종교에서 주로 내세(來世)의 천국을 말하는 데 대해 현세적 지상낙원을 지향하는 데에 큰 특징이 있으며, 오랫동안 불안과 고뇌 속에 살아오던 민중들에게 희망과 동경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극락선경·용화도운 춘원선경 등으로 표현되는 각종
이상세계를 제시하였으나 교도들이 현세 이익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는 교주숭배(敎主崇拜)이니 신자들이 교리를 실천하고 교법을 신봉하는 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교주를 신격화하여 그 초월적인 능력을 받는 데에 치중하였던 점이다. 여기에서 교주는 하늘에서 강림한 천신 또는 하늘이 내린 신인(神人)으로 받들어져서 인간화한 신 또는 신화(神化)한 인간으로 숭앙되었다. 그리하여 교주는 영술(靈術)·기적(奇蹟) 등을 행하여 널리 중생을 구원하는 일을 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교도는 교주에 절대복종할 것이 요청되어 후에 많은 폐해를 가져왔고, 절대권위를 가진 교주가 죽으면 자연 교세가 사분오열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넷째, 정감록(鄭鑑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점이다. 정감록 사상은 음양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 고유한 민간신앙으로 말세가 되어 세상이 혼란하면 정도령이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일종의 '메시아'적 사상과 한국적인 택지사상(擇地思想)에 근거한 10승지(十勝地)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상은 오랫동안 평화롭지 못했던 당시의 세태에서 빛을 보기에 적합한 사상이었고, 10승지사상은 각종 신흥종교에서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발전하여 계룡산을 한국의 중심으로, 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사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다섯째는 신명(神明)사상이니 사람이 신명과 동화해 신적 권능을 얻고 신의 조화를 부릴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토속적 샤먼의 다신(多神)·다령(多靈) 신앙을 기초로 성립된 것으로, 특수한 수련을 통해 신과 접화(接化)하는 것을 바라는 사상이며 신화도통(神化道通)·통령(通靈)·성령강림 등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柳 炳 德>
신종교·신흥종교
편집新宗敎·新興宗敎
하나의 종교현상은 자연종교(自然宗敎)와 성립종교(成立宗敎)로 구분되며, 성립종교는 이를 다시 기성고등종교(旣成高等宗敎)와 신흥종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립종교란 '교조(敎祖)가 새로운 교설(敎說)을 베풀고 그 밑에 조직된 단체'라고 정의해 본다.
종교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종교학적 입장에서는 기성종교나 신흥종교는 모두 신흥종교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탈피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종교라 할지라도 타지역에 들어가 아직 토착화(土着化)되지 못했을 때 그 지역에서는 신흥종교의 '카테고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예사이며, 이와는 반대로 신흥종교라 할지라도 그 종교의 가르침이나 활동 속에 ① 진리성 ② 역사성 ③ 대중성이 들어 있는 종교는 이를 신종교(新宗敎)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의 종교현상을 놓고 그 집단이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면 그것은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라는 개념으로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한 종교집단이 저속한 것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려는 현상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난다. 이와 같은 가치판단이 작용되는 시민의식은 종교학적 입장에서는 다룰 수 없다.
유사종교
편집類似宗敎
한국에서 유사종교란 말은 국법(國法)의 공인과는 관계없이 대중 사이에서 갑자기 퍼져나간 종교 집단들을 지칭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그리하여 신흥종교와 구별 없이 사용될 경우가 많다. 기성종교인 또는 일반지성인들로부터 저열시(低劣視)된 신흥종교의 한 국면(局面)을 지탄하려는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유사종교란 말을 쓰게 된 것은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1919년에 비롯된다. 즉, 그 당시의 문무성(文務省) 종교국의 통첩으로 "신(神)·불(佛)·기(基)의 종파에 속하지 않고 종교유사(宗敎類似)의 행위를 하는 자를 조사 통보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그들은 한국인의 종교를 조사 정리할 때 신·불·기에 속하지 않는 민족종교의 양상들을 일괄하여 '조선의 유사종교(類似宗敎)'라고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타종교(他宗敎)나 신흥종교를 저열시하려는 데서 유사종교라는 말을 쓰는 경향이 있으나 그 개념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의식구조는 그때 이루어진 조사자료가 나돌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사종교란 말은 그 어휘에서 두 가지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유사성(類似性), 또 하나는 사이비성이다. 유사성은 모방성과 의사성(擬似性)을 내포하고, 사이비성은 권모술수가 심한 집단이거나 반사회성을 지닌 집단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두 개념을 종교적 기성종교를 모태로 비슷하게 움직여 나가는 종교로서 모태의 종교에서 불만을 품고 탈피하여 자기수법의 가르침을 현실화하려는 경우(模倣性)이며, 또 하나는 많은 종교를 역방(歷訪)하고 좋은 점만을 섭취·흡수·조화하여 만든 종교(擬似性)이다.
이 유사성(類似性)에 입각한 종교들은 현대사회에 새롭게 발돋움하고 일어서려는 신흥종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사종교이다.
둘째, 사이비성에 입각한 종교는 거짓과 권모술수로 행해지는 종교, 즉 종교의 본질이 전혀 없는 것을 종교인 것처럼 위장하고 벌이는 사회운동으로 영웅숭배교를 형성하는 모습이며, 또 하나는 비판기준이 전혀 없이 현실을 반대하고 자연과 동화(同化)하며 역정(逆情)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또한 현실을 기한부(期限附)로 보려는 등의 자연종교를 들 수 있다. 이는 원시종교(原始宗敎)의 잔존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나 내면에 반사회적 2중교리(二重敎理)를 지닌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감록
편집鄭鑑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된 예언서(豫言書)로서 국가운명과 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풍수(風水)사상과 도참(圖讖)신앙이 합쳐져 이루어진 난해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미래의 이상적 주권자(主權者)가 나올 지기(地氣)를 예측한다는 점에서 눌려사는 민중의 '메시아' 사상이기도 하다. 정감록에 암시된 계룡산(鷄龍山)의 신도안(新都內)은 오늘날 신흥종교에 깃들인 대망(待望)사상과 결부되어 작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신도(新都)신앙·진인(眞人)신앙·10승지(十勝地)신앙 등이다. 이 <정감록>은 조선 왕조의 선조 이담(李湛)이 정씨의 조상 정감(鄭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왕조(王朝)의 흥망대세를 추측하여 이(李)씨·정(鄭)씨·조(趙)씨의 순으로 왕조가 바뀐다고 논하고 그 동안 일어날 민심 등을 예언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서 발췌를 포함한 것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① 기존체제 비판과 새시대 예언의 전거(典據)로 내세워졌고, ② 피압박 민족의 말세적 구원신앙으로 발전하여 많은 신흥종교의 연원이 되었으며, ③ 재난이 있을 때마다 자기들과 관련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비결로 삼았고 신도 천도설이 유언비어로 나돌게 될 때가 있었으며, ④ 조선 왕조를 비판하는 서민 대중의 소박한 혁명종교로 발전하여 동학혁명에까지 연결되었다.
김일부의 정역사상
편집金一夫-正易思想
김일부(본명:金恒, 다른 이름:道心, 1826∼1898)는 논산군 연산에서 출생, 36세때부터 역학자 이운규(李雲圭)로부터 주역을 공부하다가 깨친 바가 있어 스스로 역철학을 연구, 역(易)의 한국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1885년 <정역(正易)>을 저작하여 후천개벽설의 근거가 된 정역사상(正易思想)을 확립하였다. 그는 종교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며, 그에게서 정역을 전수할 자가 없으므로 그 당시 흉흉한 세속을 피해 계룡산 국사봉 밑에 들어가 초당을 짓고, 제자들에게 정역을 강론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몇몇 제자들이 신흥종교를 일으켰는데 강일순(姜一淳)의 증산교(甑山敎), 하상역(河相易)의 대종교(大倧敎), 황대순(黃大淳)의 대동교(大同敎), 성주탁(成周鐸)의 정경학회(正經學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신흥종교의 교리 형성에 있어서 김일부의 정역사상(正易思想)은 크게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나온 한말기로부터 일제시대에 이르는 동안 남한 일대에 발흥한 모든 신흥종교들이 후천도수의 논리적 근거를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주창한 사상은 당시 동학사상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후에 발생된 신흥종교들의 교리적 토대가 된 사상이다. 그 사상사적 연원은 중국 선진성학(先秦聖學)에 두었으나 도리어 주역(周易)사상의 논리적 연원이 정역사상이라고 하여 주체성을 철학적·논리적으로 강조하였다. 정역의 근본사상은 과거 중국의 역학사상과는 반대로 선후천의 개념을 다시 설정하고 후천 개벽사상을 역리적(易理的) 논리 형식으로 체계화하여 천도의 일월개벽사상(日月開闢思想)으로는 윤변위정(潤變爲正)의 원리를 주창하고 인도의 신명개벽사상(神明開闢思想)으로는 패화위륜(悖化爲倫)의 원리를 내세워 역수원리(歷數原理)를 기본으로 한 고금불변의 우주사적 원리를 규명하려 한 것이다. 정역사상에 의하면 우주에는 생장기(生長期)가 있는데 생장기는 초초지력(初初之曆)에 따라서 움직인다. 지금까지는 일월이 운행하는 천지도수에 따라 만물이 성장하였는데 그 도수(度數)가 다 되어서 이후부터는 정력도수(正曆度數)에 따라 만물이 결실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인 신명성(神明性)을 계발함으로써 인간이 완성되고 신인일여(神人一如)의 세계가 되어 조화된 이상세계가 열린다고 한다.
후천개벽사상
편집後天開闢思想
일종의 운도사상(運度思想)에 의한 역사 이해의 한 방법으로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선·후천을 구분하고 선·후천이 교역(交易)하여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사상이다. 김항(金恒)은 정역사상에서 논리적 체계를 세워 선·후천이 천지운도에 의해 자연히 교역하는 것을 말하고, 이때는 외적인 일월개벽(日月開闢)과 내적인 인간의 신명계발(神明啓發)이 병진 일치하여 조화된 이상세계가 전개된다고 했다. 최제우(崔濟愚)는 구체제의 시대를 선천시대로 규정하고 그때에는 하늘이 무공(無功)하였으나 신체제의 시대는 후천시대로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원리를 체득하여 하늘의 뜻이 널리 구현되는 시대라 하였다. 강일순(姜一淳)은 음양 조화의 이법에 따라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운도(運度)이며 이 운도에 따라 선·후천이 교역함을 말하였으나 이 운도는 상제(上帝)의 권능에 의해 바꾸어질 수 있다고 보아 상제는 천지공사를 행하여 말세를 구원하고 지상선계를 이룩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후천 개벽이라는 것이다. 낡은 시대, 어두운 시대는 가고 밝은 시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이 사상은 거의 모든 신흥종교에서
주장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영가무도교
편집1830년 전일부란 이가 충북 영동 상촌면에 와서 영가무도교를 세우고 포교하다 교세가 부진하여 창교 5년 만에 해체된 일이 있고, 그후 1960년경 송철화(宋喆和)가 정역공부를 하며 수도하던 중 득도하여 교조 김일부(金一夫)의 정사(精舍) 옛터에 허공 산제당(虛空 山祭堂)을 짓고 영가무도교를 창설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이것은 우주의 원리인 5행성(五行聲)에 맞추어 노래부르고 춤추며 엑스터시에 들어가게 하고 이로써 만병통치가 된다는 것이다. 교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새로운 이해를 근거로 정역의 원리와 실천으로써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고 지상천국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둔다. 5행5음성 방법으로 수도하며 정역을 강습한다. 포교는 입산수도자가 대상이며 특별한 조직적 포교는 없다.
천진교
편집天眞敎
김연국(金演局, ?∼1944)이 세운 동학의 일파이다. 최시형(崔時亨)이 동학란의 책임을 지고 교수형에 처해진 뒤 김연국(金演局)과 손병희(孫秉熙)는 천도교라는 새로운 교명을 선포하고 교체 확립에 나섰으나 서로간에 뜻이 맞지 않아 결별하게 된 데서 교단은 양분되었다. 김연국은 스스로 정치와는 결별할 것을 선언하고 천도교로부터 물러나와 시천교(侍天敎)를 세움으로써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과 손잡았으나 이들이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일제에 협력하자 시천교는 본부로부터 탈퇴, 양파가 되었다. 마침내 김연국이 1928년에 두 파를 통합, 본부를 신도안으로 옮겨 상제교(上帝敎)라 명명하고 신도안 개척자가 되었다. 구암이 향년 88세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친 다음에 4세 교주인 김덕경(金德卿)은 진리의 시대적인 조화를 도모코자 1958년 교명을 천진교(天眞敎)로 개명하였다.
기념일은 1월 11일 지일기념(대법사 도통 전수일) 등 10일이 있고, 경전으로는 <동경대전(東經大典)>·<시천교전(侍天敎典)>·<정리대전(正理大典)> 등이 있으며, 일상수련과 생활태도는 영성단련(嶺性鍛鍊)과 기도·주문 등을 하며 시운을 기다린다.
수운교
편집水雲敎
수운교는 동학계의 일파로서 이상룡(李象龍:일명 出龍 선생)과 박성호(朴性昊)가 동학(東學)의 다른 일파를 만든 데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같은 뜻으로 설립하다가 박성호가 또 다른 한 파를 설립하려고 별립하여 박성호의 수운교 별파가 생기게 되었다.
수운 본파 이상룡은 11세 때 부모를 잃고 사찰로 돌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업할 때 관세음보살(가사를 입은 승려나 뱀·호랑이 등으로 나타남)이 나타나 정진하라고 격려했다. 이상룡이 이곳에서 대각하여 1920년 서울에 교를 세웠으나 수운교 사칭 문제로 본부를 충남 대덕으로 옮겼다.
신앙의 대상은 한울님·천도옥황상제 외 11가지로 습합적 신앙관이다. 시천교·천도교·불교·'샤머니즘'을 바탕으로 교리가 형성되었다. 경전으로는 <동도전서(東道全書)>·<훈법대전(訓法大典)> 등이 있다.
수운교의 별파 교조인 박성호(일명 犯虎 선생, 1898∼1969)는 민족정신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상룡의 가르침으로 최제우가 부처의 종신(終身)임을 깨우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광제창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앙면은 한울님·천주·상제·천지귀신 내유신령 등의 명칭으로 하고 있다. 경전은 <동경대전(東經大典)>·<용담가> 외 5가지 정도가 있다.
강증산
편집姜甑山(1871∼1909)
본명 강일순(姜一淳), 호가 증산(甑山)이며 자는 사옥(士玉). 전북 정읍군 이평면 출생.
그는 어릴 때부터 신기를 부려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구도한 지 9일 만에 성도하였다. 성도 후 증산은 신화영통(神化靈通)하여 신명계(神明界)와 인간계의 모든 일을 알 수 있고 천지운도(天地運道)의 윤회로 미래를 예측하는 혜식(慧識)을 가지고 도술조화·둔갑 등을 한 기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세인들은 그를 미친 도인이라고 했는가 하면, 옥황상제의 강림이라고도 하였고, 미륵불 화현으로 금산사에 내려올 것이라고도 하였다.
증산은 제자들과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한다 하여 기이한 행위를 하곤 했으며, 더불어 현실계가 평온해지려면 인간세계를 조정하기 전에 옥황상제가 신명세계를 조정해야 한다는 신명공사를 행했다. 그리하여 신계에 원귀로 존재하는 막힌 신명들을 잘 융화하여 통일신단을 성취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산은 39세의 짤막한 생애를 살고 갔지만 천지공사(신명공사)를 했으므로 한국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세계는 지상선경이 도래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관문은 무서운 병겁(病劫)이 최후로 남아 있다는 위기설을 남겨 놓고 특별 수련을 하는 제자들을 통해 자기의 의통(醫統)을 전수하겠다고 약속하고 세상을 떠났다.
증산의 선지적인 면은 종전 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잡다한 민간신앙의 신관을 고차원으로 이끌었음과 동시에 기성종교의 영역까지 융화시키려는 종교운동을 전개한 점이다.
특히 한말사상의 대변인인 김일부의 정역사상과 수운 동학사상, 나아가 무당의 사상까지 종합시킨 대표적 습합 종단의 형성자라고 볼 수 있다.
천지공사
편집天地公事
강증산이 깨달은 새로운 이념에 의하여 진행된 일로서 말세운의 운도(運度)를 뜯어고치기 위하여 과거의 모든 이념·이법·질서를 개혁, 수정한다는 의미로서 이를 성공시키려면 발생한 근본사상이나 원인을 완전히 전복해야 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 지방신이 있고 문명신이 있어 이들의 조화로 세상이 혼란을 이루었다. 이 혼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증산은 세계 각 지방신·문명신·만고역신·만고원신 등 제신을 소집하여 통일신단을 결성하고 이 통일신단에서 선후천 교역기의 세계정세의 변천계제와 선천의 모든 불합리한 이법·규범·질서 등을 해소하고 후천세상의 모든 이법·규범·질서 등을 새로 규정하는 일을 천지공사라 하였다.
이 천지공사에는 신정정리공사·세운공사·교운공사 등 3대 내용이 있고 신정정리공사에는 다시 해원공사·지방신 통일공사·문명신 통일공사·지운 통일공사의 4대 내용이 있다. 천지공사는 말하자면 선천시대에 천지간의 그릇된 모든 이치를 뜯어고쳐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천지공사의 첫째는 만고원신·역신의 맺힌 원한의 기운을 해소한 해원이념이다. 둘째는 모든 신명을 보은줄로 연결하게 하는 보은이념이다. 셋째는 모든 신명을 대전 협동으로 화협집결케 하는 상생관념이다. 넷째는 후천의 새 이념과 새 규범과 새 질서를 창조하여 새 세계를 진화케 할 조화이념이다. 이상 4가지 이념으로 통일신단이 결성되고 천지공사가 행해졌다. 여기서 액운공사란 <대순경전>에 의하면 인간계에 발생하는 온갖 재난과 액운을 제거하여 공사중 신명의 해원·의통 등이 있고, 세운공사란 대혼란·상극전쟁에 빠진 이 세상을 상생상화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당시 서구 열강의 동양침범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교운공사란 증산교의 교의를 세계에 두루 펴고 교세를 발전시킨다는 것. 증산에 의하면 유교·불교·기독교의 정수를 뽑아 모아 후천문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교리를 분석해 보면, 증산교는 선가의 신도와 음양 풍수 등 전래의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유·불·선·동학·서학 등 기성종교의 교의를 곁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보천교
편집普天敎
보천교는 강증산의 고제였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증산이 죽은 후 최초로 형성한 교단이다.
차경석은 증산의 사후 처음에는 증산의 제2부인인 고씨(高氏)를 교주로 받들었으나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분립하여 스스로 후천개벽의 문로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자부하고 교단을 세워 1921년에는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했으며 1922년에는 교명을 보천교로 바꾸었다. 또한 보천교는 교화 방식에 60방주(方主)라는 강력한 조직을 갖추어 한때 전국에 걸쳐 신도수가 60만에 이른 때도 있었다. 당시 그는 정읍(井邑)에서 조선을 종주국으로 하고 정교 양면에서 세계통일의 신정부가 세워질 것이라 선전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정감록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등극하여(등극설), 그 권위를 시현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자체 내의 분열 등으로 쇠퇴하였다. 차경석이 죽은 후 보천교에서는 신파·구파의 분열이 일어났다. 차경석의 교의를 신봉하고 그를 보천교의 교조로 받드는 신파와 증산을 교조로 하고 차경석을 교주로 보는 구파는 차경석 생존시부터 세력이 나뉘어 있다가 1954년에 성서간행(聖書刊行)과 교주의 영위본안(靈位奉安)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완전히 분리하였다.
태극도
편집太極道
태극도는 조철제(趙哲濟, 1895∼1958)에 의하여 만들어진 증산계의 종교이다. 15세 때 항일 투쟁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부친을 따라 그곳에서 살다가 보천교 교인 김혁(金赫)에 의하여 강증산의 교리를 듣고 입산수도하여 개안(開眼)이 되었다. 23세에 귀국하여 증산의 매씨인 선들부인을 맞아들여 증산제와 인연을 맺어 기세를 올리고 개척사업 등 경제기반을 닦았다. 다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라고 했다가 '태극도'로 개명하였다. 교의강령은 경천수도(敬天修道)·성신양성(誠信養成)·안심안신(安心安身)이며 도규(道規)에 의한 교체조직도 신태인에 교당이 설립된 후 공포되었다. 그는 신도에게 태을주(太乙呪) 등을 읽게 하여 전성기엔 신도수가 10만이 되기도 했었다. 교세의 약화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비롯되고, 1930년에는 평북 무산 국유림을 벌채하기 위해 400여 명의 신도를 보내기도 했으며, 충북 유성에 무극광산(無極鑛山)을 채굴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약화된 교세를 8·15 이후 복고하려고 노력했으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조철제 별세 이후에는 부산의 조영래(趙永來), 서울의 박한경(朴漢慶) 교단으로 나뉘어졌다.
보화교
편집普化敎
김환옥(金煥玉:호는 淸山, 1896∼1954)이 형성한 교단. 김환옥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서 2세 때 부친을 여의고, 14세 때 모친을 여읜 다음 상업에 종사하다가 25세 때 보천교에 입교, 30세 때 보천교 문정삼(文正三)의 수방(水方) 12임(任)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탈퇴하여 수도에 들어갔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보천교를 탈퇴하여 입산수도·수운신명(水雲神明)에 접했다고 하는 서상근(徐相根)을 만나 그의 지도 아래 수운·증산을 통합할 수 있는 신명(神明)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가 35세이며, 득도 내용은 시천주(侍天呪)를 3일간 읽으니 수운을 아버지로, 증산을 어머니로 하여 자신은 맏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수운과 증산의 신명이 계시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제시(日帝時) 포교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협의로 한때 투옥되었는데 해방 후 출옥하여 백암리에 교당을 지었다. 그는 증산교단통정원을 조직할 때 부통교를 지낸 일이 있으며, 6·25전쟁 중 1952년 교본부를 백암리에서 신태인읍으로 옮겼다가 다시 금산면 쌍용리로 옮겼다. 처음에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교명으로 포교하다가 1953년 보화교(普化敎)라고 개칭하였다. 1954년 김환옥이 58세로 별세하자 남정선(南井仙)·김재헌(金在憲) 순으로 교통이 계승되었으나, 교화 원장 김명환(金明煥)이 실제 교무를 운영하였다.
동도교가 조직될 때 보화교도 여기에 가입했는데, 서울 종로 견지동에 있던, 동도교 본부를 쌍용리 보화교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화교는 삼단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를 세우고, 즉 단군(單君)·수운·증산을 각각 단군대성조(單君大聖祖)·수운대도주(水雲大聖祖)·증산대법사(甑山大法師)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단군대성조는 국조 단군(檀君)이 아니다. 개벽에는 소개벽·중개벽·대개벽이 있는데 소개벽은 항시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개벽은 4320년 만에, 대개벽은 6만 년 만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중심교리를 상징하는 표어로 수심정기(守心正氣:수운의 도)·해원상생(解寃相生:증산의 법)의 두 표현이 특징이다.
광명도
편집光明道
광명도의 교조 정교순(鄭驍橓:宋樂, 1913 ∼
)은 함북 성진에서 출생하여 일제하에서 교육을 받고 부유한 향락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경북 풍기, 금강산 등을 전전하며 수도와 명상을 한 후 1947년 대전에 정착하여 단군시대연석서허동학원(檀君時代演釋序虛洞學院)이라는 학교를 세워 교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많은 강습소·학원 등을 설치하여 민족정신 앙양과 구국신도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스스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교단은 학우(學友)와 지우(誌友)로 구성된 식자와 도정(道正)·도덕사(道德師)·법사(法師)의 3계제(感階梯)로 구성된 성직자로 이루어진다. 신앙 대상은 한얼님이며 수련은 '각진도(覺眞道)의 수련'과 '형이상념파방송(形而想念派放送)'을 주로 하고 계율을 지킬 것을 주장한다. 경전은 <죄인(罪人) 없는 세계>로서 세계인류 정신구제의 신사상을 담았다고 한다.
윤리관은 인간을 한얼님의 공기(公器)로 보는 것이며, 인간관은 인간을 소우주 또는 천인합일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존재로 본다. 공업 등 도시생활을 부정하여 소극적인 생활양식을 강조한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무명옷을 입으며 짚신을 신을 것을 강조하여 속칭 수건부대라고 불렸는가 하면 술·담배를 끊을 것을 철저히 강조한다. 이상에서 볼 때 광명도는 국조단군신앙(國祖檀君信仰) 계통으로 형이상념파방송이라는 현대적인 독특한 표현의 수련방법을 말하나 신명을 받는 토속적 샤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며, 과학문명을 부정한다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일심교
편집一心敎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1929년 7월에 회문산(回文山) 금강암(金剛庵)에서 수도중 득도하여 1936년 3월에 창립한 종단.
정식 교명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 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라고 했었다.
강대성은 득도 후 여광여취(如狂如醉)하여 사방을 걸식하면서 활인도수(活人度數)를 맞추고 다니다가 회문산에 다시 돌아와 유·불·선 교리를 삼합하여 유교를 주로 하는 교리로 일심교를 창립한 것이다. 신앙 대상은 선당궁(仙堂宮:강대성 사진)이며, 교리강령은 유·불·선에 근거하여 동서학을 합일, 다시 유교의 도로 세상을 구원하자는 것이다. 구원관과 우주관은 강대성 자신을 신앙하면 구원을 받고 인도환생하거나 갱생한다고 말한다. <해인경(海印經)> 외 14가지 경전이 사용되고 있다. 연 1회 집단수련이 있고 정기예배는 없으며, 수련시에는 독경하고 유가의 경전과 성전을 주로 보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생활모습은 유교성이 강하며 어릴 때 남녀 구분 없이 머리를 기르고 선인이 되어 갓 망건을 하는 게 특징이다. 치성 때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성금으로 교를 운영하고 30여 개의 지방 포덕당이 있기도 했지만 개인신도·개인소유 건물에 간판을 걸어 놓아 유야무야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용화교
편집龍華敎
서백일(徐白一:호는 眞空·玄武, 1893∼1966)이 불교의 법상종(法相宗) 사상을 계승하여 1932년 용화종이라 개칭하였다. 그는 전남 구례군 문천면 금정리에서 탄생하여 11세 때 선암사(仙巖寺)에 들어가 15년간 수좌(首座)로 있다가 강원도 일대와 전국 사찰을 두루 편력하고 전북 금산사(金山寺)에 들어가 '금산사미륵불교 포교소'라는 간판을 걸고 용화신앙의 재가(在家)수도를 권장하며 포교했다. 1950년 전주 원각사(圓覺寺), 완주 남일사(南一寺) 등을 짓고 본격적 포교활동으로 남녀 수좌 200여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대승불교를 표면화하고 내면으로는 강증산의 사상과 접하여 미륵불과 함께 증산을 숭배케 하며 1950년 이후 전북 금산사 일대와 전주 완산동을 근거로 교세를 폈다. 추종자가 늘어남에 따라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려고 가공 인물과 현실이 아닌 이상경지(理想境地)를 설정하여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였다.
만법전 (萬法典)·득관불화론 (得觀佛化論)·각주진경 (覺州經)·현무실기(玄武實記)·성화진경(聖化眞經) 등 7∼8종의 비밀경전을 만들어 일반신도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최고 간부만이 갖게 하였다. 1966년 용화교 간음사건이라는 추문이 보도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서백일이, 신도였던 소윤하(蘇閏夏)에게 원각사에서 피살됨으로써 교세는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의 비밀 경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강증산의 사상을 교묘히 융합치시킴으로써 용화동을 근거로 종교왕국을 꿈꾸었던 점이다.
서백일의 행적으로 인하여 파멸상태에 이르렀던 용화교는 1963년 문교부에 '대한불교용화종'으로 등록하고 2대 교주 김덕연(金德淵)에 의하여 존속되었다.
천화불교
편집天華佛敎
이숙봉(李淑峯)·이정봉(李貞峰)·이희수(李喜秀) 3인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세 사람은 해방 전에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에서 깊이 느낀 바 있어 국조 단군과 역대 창업주·순국선열의 신령 앞에 조국 광복을 기도하여 온 일이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세 사람은 뜻을 모아 남산에 단군제단을 축조하다가 6·25전쟁으로 중단, 천안읍내 월봉산에 광명사(光明寺)를 세우고 포교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1954년 서울 인왕산 및 누상동에 용화사를 창건했다. 1960년에 옛 사직단이 있던 사직공원 한곁에 단군전을 세우고 국조 단군과 아울러 역대 창업주를 봉안하고 단군 탄신일인 10월 3일 개천절에는 추계사직제(秋季社稷祭)와 단군이 승하하신 3월 15일에는 춘계(春季)사직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국토수호정신과 국민주체의식을 기르고 애국심과 도의심을 북돋아 참다운 인간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천화불교는 유가밀교(瑜伽密敎)로서, 비로자나불(大日如來)을 근본으로 하여 그 덕상(德相)으로 석가·약사(藥師)·미륵·미타의 4불(四佛)과 문수·보현·관음·세지·금강수·허공장·마리지·지장의 8대보살로 구현된 약사만다라(藥師蔓多羅)로 결정(結晶)되었다. 그리고 4불 8보살의 수적(垂跡)인 약사 12신장과 개국신인 단군과 호국신·호생신인 사직과 인류 모성애의 화신인 사리제모(詞梨帝母)를 하나의 호국 호생신으로 만다라(蔓多羅)에 봉안한다. 이는 토착화된 국민불교로서 민간신앙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인데 전국에 4개의 사찰이 있다.
세계일가공회
편집世界一家公會
최초에 '하나님의 집공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세계일가공회는 1964년 성결교회의 이름난 부흥사 양도천(梁道泉, 1924∼
)이 스스로 목사직을 탈퇴 선언하고 세운 신흥종단이다. 양도천은 신학교 졸업 후 심한 위장병으로 남해의 고도에서 몇 해 수도하면서 한님(하느님)의 세계를 체험, 자신이 통일 평화세계를 건설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31세 때에 사명의 길에 나섰다.
기본적인 교리는 평화선언서·공회송가·공회기본이념·세계일가공회안내서 같은 것에서 볼 수 있고 개조·개혁·개선으로 지상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4대강령·7대신조가 기본원리이다. 특색은, 그리스도교 계열이면서도 세례가 없고, 예배일도 안식일(토요일)로 환원하였으며 연호도 천기(天紀)로 바뀌었는가 하면 3위일체를 신과 인과 물의 통일체로 해석한다. 양도천은 '이스라엘'적인 '한국'을 얘기하면서 한국은 새역사가 일어날 곳이라고 확신한다. 단군숭배와 정감록 풀이가 교리에 크게 작용하여 이미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벗어난 상태이다.
새일수도원
편집-修道院
일명 '여호와새일수도원'이라 하는 새일수도원은 그리스도교계 신흥종단으로, '말세비밀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이유성(李琉性, 1915∼1972) 목사가 1965년에 세운 수도원이다. 이유성 목사는 부산·강원도·충남 등지에서 침례교회 소속으로 10여 년간 목회활동을 하였고, 1963년 9월경에는 대한예수교 말세복음선교회를 조직하여 수련자를 수련시켜 오다가 선교회가 해산되면서 더욱 열심히 수도 정진할 결심을 하고 계룡산으로 옮기어 새로운 계시를 받고 묵시록 1장에서 14장까지를 새롭게 해석했다.
종말의 사명봉사를 통하여 선택한 백성을 살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새일(새로운 날)을 이루자는 것이 종단의 강령이다. 기본교리는 이유성이 펴낸 '말씀의 칼' 외에 다수의 책에 잘 나타나 있고,신관·인간관·종말관이 그 주된 내용이다. 신비적 체험을 특히 강조하고, 열광주의가 강조되어 수도장은 언제나 울음바다로 변한다. 이 종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생수(生水)가름'인데 이것은 신흥유사종교에서 보는 비밀교리로 혼음행사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말세의 재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40일씩 굶고 공부하는 제도가 있기도 하다.
찬물교(봉남교)
편집-敎(奉南敎)
교조 김영근(金永根:호 奉南, 1898∼1950)은 제주도 구좌면 우도에서 탄생.
8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식상(食傷)으로 인한 위장병에 걸려 만성이 되었다. 그러자 이것을 혹은 귀신들린 병이라 하여 무술치료와 기도수련을 계속한 지 수년, 38세 때인 1936년 기장(機長) 연화산에서 시작한 두 차례의 백일기도 수련이 끝난 1937년 1월 15일 천상으로부터 '물법'을 받고 15세 이후 괴롭던 숙환이 퇴치되면서 지각과 영력을 얻게 되었다. 봉남교는 1943년 기장의 죽도사에서 교단이 형성되어, 해방 후 부산 영도에서 제법 큰 교세를 이루었으나 이렇다할 교명은 없었다. 찬물교란 이름은 봉남의 교법이 물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비신도들이 조소, 비방의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지만 그대로 교명이 되었다.
신도들의 신앙 대상은 곧 물이었으나 물질로서의 물이 아니라 '물법'이라는 신비를 믿었다. 기념치성에는 법단에 공물(供物)로서 찬물과 과물만 올리고 어육 등 기타 잡다한 제공(祭供)은 올리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제식이 끝나면 법단에 올렸던 법수(法水)를 나누어 음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주문은 대개 한문 글귀로 10여 가지가 있다.
천지대안교
편집天地大安敎
1952년 부경순(夫敬順:호 海月仙, 1900∼1965)에 의해 부산 영도에서 설립되었다. 찬물교의 일파이다. 부경순은 대마도 근해에서 해적사건으로 남편과 자식이 살해당하고 1남 1녀만을 살렸는데 그 사건으로 정신이상이 생기고, 아들이 피를 토하는 중병에 신음하던 중 마침 물법시술(施術)을 하고 있던 김영근을 찾아 치료, 병이 낫자 자신이 그 물법을 사용하여 아들의 병을 고쳤다. 부씨는 봉남의 교법을 받고 도통공부를 하여 1948년 득도했다. 1950년 김영근 사망 후 부경순은 자신에게 태상부군(太上夫君)이 강림하였다 하여 흩어지는 신도를 모으고, 자신을 해월선(海月仙)이라 자칭하며 1952년 천지대안교라는 교명을 내건 뒤로는 봉남과의 교연이 있음을 일체 부정하였다. 주문은 "바다햇자 해월선님 소술조화 지하지리 통일통령 물비소시 소원성취"라는 28자를 외게 하고 자신을 옥황상제 미륵존불 조화주(造化主)로 신봉케 하였다. 1956년 충남 계룡산에 천지인 3합운수(天地人三合運數)가 오고, 3령운수(三靈運數)가 온다 하여 이에 대처해서 계룡산 신도안 삼신당(三神堂)에서 도수공사(度數公事)를 행하였고, 또 계룡산이 세계의 중앙으로 새 운수를 받아 새 정부가 해월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여 본부를 계룡산 신도안 부남리(夫南里)로 옮겼다. 새 교운을 알린다는 <계운전(啓運典)>이란 경전이 있다. 교단 분포는 제주도에 17개 지부가 있어 전국의 8할을 차지하고 있다. 1965년 6월 부경순이 사망하자 김태순(金泰順:백일선녀) 여인이 교주직을 계승하였다. 이 교의 포교사를 선녀(仙女)·선관(仙官)이라 한다.
각세도
편집覺世道
각세도는 도조(道祖)인 이선평(李仙坪, 1882 ∼1956)에 의하여 창설된 것으로 충북 영동에 자리잡고 있다. 10세 미만에 양친을 여의고 고아의 몸으로 유랑하다가 중국으로 넘어가던 중 주인 없는 원두막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곳에서 독경소리를 듣고 일어나 보니 밤하늘에 '천하대보 정진무외 무궁조화 각재자기(天下大寶 正眞無外 無窮造化 各在自己)'라는 글귀가 떠 있었다. 이것을 보고서 느낀 바 있어 구월산에 들어가 10년간 공부하던 중 대오하여 각세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양주신(陽主神:天父)과 음주신(陰主神:地母)이 천지를 주재한다고 하며 오늘날의 전환기에 사자(使者) 이선평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선평이 천지로 가는 각세로(覺世路)를 닦아준 위대한 분이라고 신앙을 하고 있다. 신앙방법은 주문이 강력하고 수련에서는 돼지·닭·말고기를 금식시키며 입산기도하면 소원성취한다고 말한다. 그뒤 각세도는 동관·서관·남관·북관·천성도(天性道)·진정도(眞正道)로 갈라졌다.
관성교
편집關聖敎
관성계(關聖系) 신흥종교는 서울 동대문 숭인동에 자리잡고 있는 '동묘(東廟)'와 충남 공주군 계룡산에 자리잡고 있는 '무량천도(無量天道)'가 있다. 이들은 모두 관운장의 신명을 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내며 묘를 지어 관운장의 위엄신(威嚴身)을 봉안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그 신명을 받들면 관운장신이 현몽된다고 믿는다.동묘의 신앙상태를 보면 관성제군(關聖帝君)을 연 4회로 제사한다. 제군은 지령(至靈)·지상(至上)·지존(至尊)이고, 삼계복마대제(三界伏魔大帝)이며, 대자(大慈)·대비(大悲)·대원(大願)·대성(大聖)한 천존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