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단 군 신 앙/대종교의 역사

대종교의 역사〔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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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歷史〔槪說〕

대종교는 한민족(韓民族:배달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한배)을 교조(敎祖)로 하는 한민족의 고유종교이다. 대종교는 그 기원을 신화시대에서 찾는다. 즉 지구에는 약 3만년 전에 마지막 개벽(開闢)이 있었는데, 이 개벽으로부터 366갑자(甲子) 되는 해 상당, 상날(10월 3일)에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큰 뜻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천부삼인(天符三印)을 가지고 사람의 몸으로 화신하여 백두산에 강림했다.

이 하느님, 즉 한울사람(神人)을 대종교에서는 환인(桓因)·환웅(桓雄)·환검(桓儉)의 삼위(三位)를 한몸에 지닌 3신1체(三神一體)의 '한배'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이 한배는 3선4령(三仙四靈)에게 각기 직책을 내리고 5훈(五訓)으로써 신도(神道)를 펴며, 5사(五事)로써 배달나라를 개국(開國)하여 3천단부(三千團部)의 무리를 하나의 신정(神政)에 들게 하였는데, 이때가 지금(1999년)으로부터 4,332여년 전 (開川元年:BC 2,333)으로 대종교가 개교(開敎)된 해라고 한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천신신앙(天神信仰)이 체계화된 것은 정교일치(政敎一致)의 단군시대에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에 제천단(祭天壇)을 마련하고 인민에 제천보본(祭天報本)의 대의(大義)를 뚜렷하게 한 때부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하여 이 전통신앙은 교명(敎名)이나 의식(儀式)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즉, 단군시대에 이어 부여시대에 내려와서는 교명을 대천(代天)이라 하고 음력 10월에 영고(迎鼓)라는 제명(祭名)으로 제천식(祭天式)을 거행하였으며 진한·변한에서는 제명을 계음이라고 불렀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경천(敬天), 신라에서는 숭천(崇天)이라는 교명으로 불리었으며, 그 계명은 고구려에서 동맹(東盟), 백제에서 교천(郊天)이라고 불리어 매년 10월에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이루어졌다.

그뒤 고려에서는 왕검교라는 교명으로 신라의 팔관회 의식을 이어받았으며, 조선에 와서는 이것이 종교(宗敎)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10월이 되면 집집마다 고사를 올려 제천(祭天)하였다. 대종교는 바로 조선(朝鮮)에 와서 이름붙여진 이 종교를 계승하고 이 종교(倧敎)라는 교명 위에다 대(大)자를 더하여 대종교라 한 것이다. 이 작업을 한 사람이 흥암대종사 나철(羅喆)이다. 즉 그는 1909년 오기호(吳基鎬) 등과 더불어 당시 일제(日帝)의 침략에 의한 망국(亡國)의 비운을 예감하고 전통적인 민족종교의 부흥을 원하는 사회적인 요구가 일자 단군교의 중광(重光)을 공포하고 대종교라 개칭하였던 것이다.

나철은 한일합방 후 1916년 구월산(九月山)에서 순교조천(殉敎朝天)하고, 그 뒤를 이은 2대 교주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은 일제의 박해 때문에 1917년에 총본사를 만주 허룽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노령의 동포들에게 포교하는 한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으나 항일 무장투쟁을 위하여 교통(敎統) 계승을 사양한 백포종사(白圃宗師) 서일(徐一)은 김좌진(金佐鎭) 등과 중광단(重光團)이라는 대종교 교도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3·1운동 직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독립군 부대를 편성, 1920년에는 청산리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만주에 세력을 뻗친 일제(日帝)의 박해와 보복 때문에 김헌은 총본사를 다시 1919년에 북만주 닝안(寧安)으로, 1920년에는 소(蘇)·만(滿) 국경의 미산(密山)으로 옮겨 수난을 겪다가 1923년에 조천(朝天:死亡)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서일(徐一)은 독립군 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대종교 교리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회삼경(會三經)>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김헌의 뒤를 이어 3대 교주가 된 단애종사(檀崖宗師) 윤세복(尹世復)은 1928년 삼시(三矢)조약에 의한 대종교 금지령을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통한 대(對) 국민정부 외교교섭으로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대종교를 사수하기 위하여 1934년에는 총본사를 발해의 고도(古都)인 닝안현(嶺安縣) 둥징성(東京城)으로 옮겨 대종학원을 세우고 대종교 선도회를 하얼빈(哈爾濱)에 설치하는 등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발악으로 무단강(牧丹江) 액하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의 수난을 겪고 순교10현(殉敎十賢)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윤세복은 해방과 함께 옥중에서 나와 둥징성에서 대종교 중흥을 시도하였으나 공산당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총본사를 다시 서울 저동으로 옮기니 32년 만의 환국이었다. 그후 그는 교당설치·고적수집·학교설립·단군전 봉안운동(檀君殿奉安運動) 등을 계속하면서 교통(敎統)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교에 의한 총전교(總典敎) 제도를 채택하여 스스로 제1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0년 윤세복이 조천한 후로 정관(鄭寬) 등 원로들이 총전교를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姜 天 奉>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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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喆(1863∼1916)

대종교의 제1세 도사교(都司敎:敎主). 홍암대종교(弘巖大倧師)라고 부른다. 본명은 인영(寅永), 홍암은 그의 아호이다. 전남 보성군 금곡 출신. 29세 때 문과에 장원(壯元)하여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승문헌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되던 해에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오기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 정계의 요로에 전달하고, 궁성 앞에서 3일간의 금식항쟁(禁食抗爭)을 하기도 했다.

한일간에 신협약(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는데, 그때 서울 서대문 근처의 노상에서 낯모르는 백발노인에게서 단군 초상화 한 폭과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두 가지 책을 받았다고 한다.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이른바 5적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 주모자로서 자수하여 10년의 유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정배되었다가 그해에 고종의 특사를 받고 풀려나왔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정치를 단념하고 귀국, 대종교를 중광(重光)하여 제1세 도사교에 올랐다.

그리하여 1911년 <신리대전>을 발간하고 종령 제1호로 종규(倧規)를 발포하여 마니산 제천단과 평양 숭령전(崇靈殿)을 봉심(奉審)하였으며, 백두산 제천(祭天)차 만주 허룽현에 갔다가 그곳 청호(靑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여 그곳의 교도를 거느리게 했다.

그후 흥암대종사는 대종교를 통하여 단군이 다스렸던 만주평야의 옛강토를 회복하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을 실현할 목적으로 1914년에 총본사를 아주 백주산의 동록에 있는 청호로 옮겼다. 그 후 이곳을 중심삼아 동북 아시아 일원을 4대교구로 나누어 각각 도본사(道本司)를 두고 이 이외의 지역을 교구로 하는 외도교구(外道敎區)를 정했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대종교가 불법화되자 다음해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司)에서 순교조천(殉敎朝天)하였다.

5적암살미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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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賊暗殺未遂事件

대종교를 중광하기 이전에 나철이 이른바 매국 5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의 철회를 위하여 두 번씩이나 일본으로 건너갔던 나철은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경세(警世)의 일념으로, 조약에 찬동했던 5적을 주살하기로 결심하고 전 내부대신 이용태·윤주천 등이 찬조한 자금 2000원으로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권총 50여 정을 사고 <동맹서(同盟書)>와 <참간장(斬奸狀)>을 뿌려 동지 수십 명을 모아 이를 6조의 결사대로 나누어 1907년 3월 26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5적을 주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부대신 권중현을 쏜 것이 빗나가 실패하고 동지 19명이 체포되자 나철은 동지들의 석방을 탄원하고 자수, 10년의 유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정배(定配)되었다가 그해 10월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왔다.

중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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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光

중광이란 어둠에 잠겼던 대종교를 다시 밝혔다는 뜻으로 대종교의 제1세 교주인 홍암대종사 나철이 1909년 음력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 대례(大禮)를 행하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종교는 반만년 전 단군이 세운 한민족의 고유종교인 단군교를 이은 것인데, 고려 원종(元宗) 때에 와서 단군교의 전통이 일시 끊겼던 것을 조선말 홍암대종사가 다시 드러내 밝힌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단군교 재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 대종교의 창립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재건·중흥의 의미로 중광이라는 말을 쓴다.

단군교포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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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敎佈明書

나철이 동경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에게서 받았다는 글. 1904년에 두일백 등 교제(敎弟) 12명이 백두산에서 백봉(白峰)이라는 신선을 모시고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내용은 "금일은 유아(惟我) 대황조 단군성신의 4237회 개극입도지경절야(開極立道之慶節也)라"는 말로 시작하여 단군 탄강의 역사, 단군교의 신앙유습, 단군교를 신봉해야 할 이유 등을 설명하고, 우리 민족은 동일민족으로서 동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단기 기원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대종교불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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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總督府-大倧敎不法化

대종교의 포교운동이 국내에서 그 본거를 만주로 옮긴 후, 신도수가 30만에 달하게 되자 이에 대한 대책 수립에 부심해 오던 총독부에서는 1915년 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신교포교규칙에 준한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으나 총독부는 대종교가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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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獻(1868∼1923)

대종교의 제2세 도사교. 무원종사(茂園宗師)라고 부른다. 본명은 교헌(敎獻), 호는 무원(茂園)이다. 경기도 수원의 구포 출신. 18세에 과거에 올라 대종교가 중광되던 해에는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으로 있었다. 국사연구의 대가였던 그는 대종교가 중광된 그해부터 신자가 되어, 내외 문헌에서 사적을 찾아내어 대종교의 역사를 정립했다. 총본사 전강(典講)으로 있던 1916년에 홍암대종사의 영선(靈選)에 뽑혀 대종교의 제2세 도사교에 취임했다.

그는 1917년 봄에 총본사를 동만주 허룽현으로 옮겼으며 제2회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고 홍범규제(弘範規制)를 공포하여 교세확장에 진력하였다. 3·1독립만세 직후 만주에서도 교도들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이 심해지자 총본사를 북만주 닝안(寧安)으로 옮겼다. 소위 경신년 대학살로 수많은 교도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자 이를 통분하는 가운데 발병, 1923년 교통을 단애종사에게 전수하고 조천(朝天:死亡)하였다. 그의 업적으로는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고 대종교의 역사를 고증·정립했다는 두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저서에는 <신단민사(神檀民史)>·<단조사고(檀祖事攷)>·<홍암신형조천기(弘巖神兄朝天記)> 등의 역사적 저술이 많다.

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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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一(1881∼1921)

교통을 전수받지 않은 대종교의 종사. 백포종사(白圃宗師)라고 부른다.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에서 출생. 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왕청현으로 가서 동명학교를 창설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1912년에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으며, 그후 1916년 총본사 전강이 되어 홍암대종사의 교통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 까지 올랐다.

1919년에 제2세 도사교 무원종사가 그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려고 했으나 그는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전심하기 위해 5년 후로 미루기로 했다. 3·1운동 이후 동지를 규합하여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와 연결을 맺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설립하여 그 총재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대종교의 신도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자금으로 2000명의 독립군을 양성. 유명한 청산리 싸움을 치렀으며 그후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 비적단에 의한 불의의 습격을 받아 많은 청년들이 전사하게 되자 이를 비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대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서 성인으로 숭앙받는다. 저서에 <5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윤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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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世復(1881∼1960)

대종교의 제3세 도사교이며 초대 총전교(總典敎). 단애종사(檀崖宗師). 본명은 세린(世麟)이며 단애는 그의 호이다.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출생하였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대종교 신자가 되어 그의 친형 윤세용(尹世茸)과 상의, 수천 석의 가산(家産)을 정리해 가지고 남만주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종교의 포교에 헌신하는 한편 사재를 들여 동창·백산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1924년 무원종사의 유명(遺命)을 받고 연안현에서 제3세 도사교로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후 4년째인 1928년 지린(吉林)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인 장쭤린(張作霖)에 의해서 대종교 금지령이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총본사를 미산(密山) 당벽진으로 옮기고 박찬익(朴贊翊)으로 하여금 남경 국민정부의 장개석과 절충케 하여 1930년에 동북 4성(東北四省:奉天·吉林·黑龍江·熱河)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31년에 소위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종교활동이 정지되는 바람에 이 해금령은 실효를 보지 못했다. 그 동안에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으며 1930년에는 서울의 남도 도본사마저 폐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교세의 갱장(更張)을 위하여 재기할 것을 결의한 그는 1934년에 닝안현 둥징성(東京城), 즉 발해의 옛 도읍으로 총본사를 옮겨서, 단군 천진전(天眞殿)을 모시고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세웠다. 또한 일본 총영사의 인가를 얻어 하얼빈(哈爾賓)에 대종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의 추진, 거대한 단군 천진궁의 건축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임오교변을 당했다. 일경(日警)에 체포된 그는 무기형(無期刑)을 선고받고 복역중 일본의 패전과 함께 출옥하여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귀국하여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그 뒤로 교당설치, 교적(敎籍)의 수집과 간행, 홍익대학의 설립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돌아온 원로 교인인 이시영을 맞아 단군전 봉안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단애종사는 교통전수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총전교(總典敎)제도를 채택하여 제1대 총전교에 취임했다. 1960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종교 금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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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禁止令

1925년 당시의 지린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인 장쭤린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소위 삼시조약(三矢條約)을 체결했는데 그 부대조항(附帶條項)에 중국측에서 대종교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조약의 이행이라는 명목으로 1926년 만주내에서의 대종교 금지령이 발포되었다.

대종교에서는 금지령 해제운동에 착수하는 한편 총본사를 미산현 당벽진(密山縣當壁鎭)으로 옮겼다. 해금운동(解禁運動)은 임시정부 요인으로 있던 박찬익(朴贊翊)이 주로 맡아했는데 동3성 정권(東三省政權)과의 교섭에서는 실패, 중국 중앙정부와 직접 교섭을 전개하여 금지령이 발포된 지 4년 만인 1930년에 포교금지령 해제에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해에 소위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이 금지령 해제는 실효를 보지 못했다.

임오교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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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敎變

1942년 11월 19일 일경은 국내에서의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소위 '잠행징치반도법(暫行懲治叛徒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대종교의 교주 단애종사 이하 간부 20여 명을 일제히 검거했는데 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한다.

투옥된 간부 중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種)·강철구(姜鐵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 등 열 사람이 일경(日警)의 악독한 고문과 체형으로 인해서 옥사했는데 이를 순교10현(殉敎十賢)이라고 한다. 그 밖의 간부는 단애종사의 무기형을 비롯하여 15년에서 7년까지의 유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출옥했다.

<姜 天 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