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그리스도교/그리스도교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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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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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그리스어로는 '예수스 그리스토스'이다. '예수스'는 헤브라이어의 요슈아(여호수아)를 음역(音譯)한 인명인데, '그리스토스'는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메시아)의 그리스 어역(語譯)으로서 본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당시에는 '구세주'라는 뜻으로도 쓰여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라는 신앙적인 호칭이기도 하다.

예수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 자료가 매우 빈약하며, 따라서 그 생애를 전기적으로 형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 <신약성서>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는 ― 역사적인 예수전은 아니나 ― 예수의 생애를 아는 데 있어 역시 가장 유력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예수는 BC 4∼7년경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28년경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뒤를 이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다.

갈릴리 땅에서 시작되는 그의 선교활동은 차차 민중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한편으로는 당시의 지도자들의 반감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갈릴리 이외의 지방으로도 확대되어 마침내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유태교의 율법학자인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였고, 스스로의 종국적 운명을 자각하여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베풀어 그들에게 유언을 남긴 뒤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로잡혀, 유태의 최고 회의소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생애를 끝마쳤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 그의 부활을 믿고 예수야말로 진정한 구세주, 즉 인생의 궁극적인 뜻을 개시하는 자로서의 신앙으로 재생했다는 기사를 전해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예수의 언행은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일으키게 하여 여기에 새로운 운동, 즉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수의 복음 속에는 분명히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 정신을 이어나가면서 가르침을 더욱 심화시킨 설교를 엿볼 수가 있다.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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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養父). 요셉에 관한 성서의 기사는 아주 적지만 그가 다윗의 가계(家系)에 속하며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그는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 세상의 비난이나 의혹으로부터 아내를 지키고 예수를 양육하는 데서 사명을 찾은 것이라 생각된다.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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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엘리자베드(세례 요한의 어머니)와 친척관계에 있고, 요셉과 약혼했으나 결혼 전에 성령으로 잉태했으며 그 후 요셉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여행하여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 그 후 예수의 전도기간중에는 그다지 뚜렷한 존재로 등장하지 않으나 예수가 처형당할 때에는 십자가 바로 옆에, 그리고 그의 승천(昇天) 후에는 제자들 속에 끼어 있는 마리아의 만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를 특별한 여인으로 공경하는 일은 이미 <신약성서> 속에서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교가 로마로 전파됨에 따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경향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가톨릭교회(로마)에 있어서 마리아에 관한 여러 교리나 축일(祝日)의 제정 등이 현저하다.

베들레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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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lehem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 또한 다윗왕의 고향(다윗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예수의 탄생 이전부터 일부 유태인들은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남쪽 18㎞, 해발 약 800m의 아름다운 언덕 위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에는 예수가 탄생한 곳으로 전해지는 동굴 위에 현재 '성탄교회(聖誕敎會)'가 서있다.

헤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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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d

헤롯의 집안은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기원 1세기말에 걸쳐 팔레스티나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갖고 있던 가문으로, 그 중에서도 헤롯 대왕(재위:BC 37∼BC 4)은 당시 유태의 지도자였던 하스모네 가문(마카비 가문)을 타도하고, 친(親)로마정책 밑에 팔레스티나 전토(全土)의 왕이 되었다. 헤롯 가문 중에서도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11명을 헤아리며, 그 중 헤롯 대왕, 헤롯 안티파스(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1세(헤롯 대왕의 손자) 등 3명은 모두 헤롯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예수와 관계가 깊은 헤롯은 헤롯 대왕과, 예수가 여우라고 부른 헤롯 안티파스이다.

갈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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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lee

팔레스티나의 북부 지방. 동쪽은 갈릴리호와 요단강에 경계하여 있고, 상하로 나뉘어 상갈릴리는 기복(起伏)이 많은 고원, 하갈릴리는 기복이 적고 비옥한 평원으로 이어져 있다. 예수 시대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지(領地)였는데, 디베리아, 가버나움, 나사렛, 가나, 막달라 등의 마을들을 포함한 이 지방은 예수가 전도하던 주요 무대였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나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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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zareth

팔레스티나 갈릴리 지방의 마을 에스드라에론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허리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가 때때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어른이 되어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양친과 이곳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북단(北端)에는 마리아가 물을 길었다는 전설적인 유적 '마리아의 우물'이 있다. 한편 나사렛의 주민은 당시 신앙이 두터운 갈릴리 사람들이 볼 때에는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요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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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江

팔레스티나의 강. 헤르몬산 서쪽 사면(斜面)에서 시작하여, 갈릴리호(해면하 212m)를 거쳐 사해(해면하 394m)에 흘러드는 내륙하천(內陸河川)으로 길이는 약 320㎞이다. 유태민족에게는 예로부터 정치적 의의 이외에도 역사적 연상(聯想)이 많은 강으로서, 특히 예수의 선구자로 알려진 세례 요한은 이 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회개(悔改)를 위한 세례를 주었다. 예수도 그의 세례를 받은 한 사람이다. 현재의 요르단강.

세례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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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禮John

예수의 선구자이며 제사장(祭司長)인 사가랴와 엘리자베드의 아들이다. 예수가 선교(宣敎)를 하기에 앞서 그는 요단강 부근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졌음과 회개를 위한 세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가올 메시아(구세주)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의조식(粗衣粗食)을 했다. 옛날의 예언자와 같은 그의 태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의 금욕적(禁慾的)인 생활로 미루어 보아 에세네파(派)의 일원 혹은 쿠므란 교단(Qumran敎團)과 관계가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도활동 중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와의 부도덕적인 결혼을 책망하여 참수(斬首)되었는데, 그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여 죽은 후에도 제자들에게 미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후일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 많다.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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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usalem

유태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회교)의 성지이며, 이스라엘의 고도이다.

헤브라이어로 예루샬라임이라 하여 '평화의 소유'·'평화의 기초'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되며 이집트의 옛 자료(BC 19세기경)나 <텔엘 아마르나 문서 (BC 14세기경)」에도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다윗왕의 예루살렘 점령(BC 1000년경)에서 함락(AD 70년)에 이르는 긴 기간 중에는(몇 번 외국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한 일이 있으나) 유태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였다.

솔로몬왕이 신전을 세운 곳도 이 땅이며 예언자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활동한 곳도 바로 이 땅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어, 그리스도 교도에게는 예수의 선교·수난·부활의 무대로서, 더욱이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지로서 성스러운 고장으로 되어 있다.

겟세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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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hsemane

예루살렘의 동쪽, 기드론 계곡을 눈앞에 둔,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는 가끔 제자들과 이 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겟세마네는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 슬픔과 고뇌에 찬 최후의 기도를 드린 동산으로, 그리고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가 체포된 극적인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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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後-晩餐

예수가 수난의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든 마지막 식사를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는 그것이 단순한 작별의 식사가 아니라 예수에 의해 새로운 뜻이 부여된 식사로 되어 있다. 즉 이 최후의 만찬은 유태교에 있어 중요한 대제(大祭)의 하나인 제효제(除酵祭)의 '과월식사(過越食事)'와도 깊이 관련되며, 예수는 이 만찬 속에서 새로운 약속을 제정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례식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새크라멘트(예전)로 삼고 있는 이 성찬식은 바로 만찬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후의 만찬은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지님과 동시에 배교(背敎)의 일단(一團)으로 지목되어 외적 위험에 놓인 채 최후의 식사를 드는 예수와 제자들의 극적인 정경은 고대 그리스도교 미술의 중요한 주제로 되어 있다.

가룟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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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cariot Judas

12사도 중 한 사람으로 예수를 배반한 자. 다른 사도들이 거의 갈릴리 출신인 데 반하여, 그는 남부 팔레스티나의 케리오트 사람으로 예수의 일행 중에서는 재무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성서에는 유다의 배반 동기가 명확히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는 일찍이 그의 배반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의 기회가 무르익어 예수에 대한 그의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다를 혐오(嫌惡)의 인물로 보고 있으나, 초대교회 시대에는 카인파(그노시스주의의 1파)처럼 그를 숭배하고 <유다의 복음서>를 사용했다는 1파도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살했다(27장 3∼5절).

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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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ate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유대· 사마리아·이두메 지방을 통치하던 로마의 제5대 총독(26∼36). 본디오 빌라도라고도 한다. 예수를 심문했을 때 그의 정치적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민중의 폭동이나 '케사르에게 배반하는 자'라고 지목되는 것이 두려워 예수를 십자가 형틀로 보낸 것이다. 빌라도에 관한 후세의 전설에는 호의적인 것이 적지 않으며, 코프트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삼고 있다.

골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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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gotha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예루살렘 교외의 언덕. 현재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골고다(헤브라이어)는 라틴어로 칼바리(Calvary)라고 하여 해골을 뜻한다. 그 장소는 예로부터 공개 처형장이었다고 하며, 그 이름의 유래는 언덕의 지형이 두개골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근처에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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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字架

예수의 사형 때에 쓰여진 형틀. 이 형벌의 방법은 고대 동방에서 기원하여 고대 카르타고인들 사이에서 많이 쓰여졌다고 한다. 후에 로마인들도 이를 사용했으나 대체로 노예나 신분이 낮은 자에 대해서, 때로는 로마의 시민권이 없는 자에게도 가해진 잔혹한 형벌이었다.

날엔 단순히 기둥 하나만 사용했으나 로마 시대에는 T자형, 십자형, X자형의 십자가도 나왔는데 예수가 처형된 것은 십자형 십자가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받는 것은 최대의 치욕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그리스도교 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의해 처형을 받고 나서부터는 그곳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찾아내고,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겨, 스스로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자체를 뜻하는 최대의 상징으로 되어 있으며, 그 후 십자가에 관한 여러 가지 교회적 관행(慣行)이나 의식이 교회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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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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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이방인(異邦人)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사상 최초이며 최대의 학자 전도자이다. 전명(前名)은 사울로(Saulos)라 하여 명문의 유태인으로 예수와 거의 같은 연대에 소아시아의 타르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바리새파의 한 사람으로 조상전래(祖上傳來)의 유태교 가르침을 받았으며, 또한 젊어서 예루살렘으로 가, 당시의 석학인 가말리엘에게 사사(師事)했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탄생지 타르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당시로서는 실로 넓고 다채로운 세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당초 열렬한 유태교도로서 모세의 율법을 굳게 지키는 외에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만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도는 그가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행할 힘이 없는 죄인이나 환자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미친다고 설파하는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에 가담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향하는 도중, 이른바 '바울의 회심(回心)'을 체험하고 박해자로부터 선교자로 역전했다. 그 후의 바울은 세 번에 걸쳐 대전도(大傳道) 여행을 위해 지중해 세계를 누비며 선교에 힘썼고, 일설(一說)로는 스페인까지 갔었다고도 한다. 유태교의 한 분파처럼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가 널리 서방의 문화사회에까지 침투한 데는 바울의 공헌이 매우 크다. 또한 그와 같은 전도여행 기간에 쓴 그의 편지(로마서·고린도서·갈라디아서 등)는 「신약성서」의 반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 그는 예수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누구 못지않게 사도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난 이해자요, 신앙인이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것이다"라는 그의 중심사상도 그 후 충분히 이해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교 사상 여러 중요한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여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순교(67년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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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12사도 중 최대의 제자. 안드레(12사도 중의 한 사람)와는 형제이다. 본래는 어부(漁夫)였으나 예수에게 발탁되어 안드레와 함께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경솔한 행동과 사려분별(思慮分別)이 부족한 인간적인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십자가 처형 때, 예수를 부인하고 한때 도피했었으나 그가 죽은 후 다시 돌아와 최초의 증인으로 복음선교에 전력을 쏟았다. 일반적으로 바울과 함께 원시교회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또한 유태인 그리스도 교도의 사도(使徒)로서 중요시되었다. 만년에는 로마의 세계에까지 전도의 손을 뻗쳤고, 네로의 박해 때에는 로마교회의 우두머리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베드로를 전 그리스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명했다는 예수의 말씀(<마태복음> 16장 18∼19절)의 역사성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를 전 교회의 우두머리, 즉 초대 교황(敎皇)으로 간주하고 있다.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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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2사도 중의 한 사람. 그의 형제인 야고보(대 야고보)와 함께 어부였었으나 예수의 제자로 발탁되어 가장 중심적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여러 제자 중에서도 예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가끔 베드로와 야곱·요한의 세 사람만을 특별히 골라 행동을 같이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가 죽은 뒤 잠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소아시아로 가서 에베소에 살았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파토모스섬(밧모)에 유형(流刑)당했었다.

여기에서 <요한묵시록>을 집필하고, 넬바 황제 때에 다시 에베소에 돌아와 <요한복음서>·<요한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 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이른바 <요한 문서>가 사도 요한과 직접·간접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전언을 분석해 보면 그의 중요한 활동이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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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신약성서>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예수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바울과의 관계가 깊어, 바울은 그를 '동로자(同勞者)'라고 불렀으며 그의 전도여행 때에도 동반하였고, 마지막 로마로 갈 때에도 동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랑하는 의사 누가'라고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의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해도 당시의 의술에 뛰어난 교양인으로서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로마 교회는 그를 의사인 보호성인(保護聖人), 중세 이후에는 예술가(특히 화가)인 보호성인으로 부르고 있다.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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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예수의 12사도 중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등 두 사람이 있는데, 전자를 '대 야고보', 후자를 '소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1) 대 야고보는 사도 요한과 형제이며 세베대와 살로메(마리아의 자매)의 아들이라고 한다. 본래는 어부였으나 베드로·요한과 함께 제일 먼저 예수의 제자로 선택되고 가장 신뢰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예수로부터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호칭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격렬한 성품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44년경, 헤롯왕(아그리파 1세)에게 살해되어 12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2) 소 야고보에 관해서는, 알패오의 아들이라 하며 형제 야고보(사도시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와 동일시되나 오히려 이 양자는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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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별명을 요한이라고도 하며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그리스도교 집회소였다. 종제(從弟)인 바나바와 함께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한 일도 있고, 또한 베드로의 통역으로 활약하는 등 교회의 뛰어난 일꾼이었다. 예수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소식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또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창립자라는 설도 있다.

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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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12사도의 한 사람. 별명은 레위라고도 하며, 제자로 발탁되기 전에는 세리(稅吏)였다고 하는데, 그 밖에는 그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고대의 교부(敎父)인 파피아스는 마태가 헤브라이어로 예수의 말씀을 편집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전승적(傳承的)으로도 성경의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가 쓴 것이라 하는데, 오늘날에는 부정적인 견해도 적지 않다.

12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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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使徒

예수의 제자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12인의 제자를 말한다. 즉 베드로(시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대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소 야고보), 그리고 다대오와 열심당의 시몬, 가룟 유다 등 12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탈락한 후에는 그 대신 맛디아가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사도라는 호칭은 이상의 12인에만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도라고 하면 12사도가 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수가 사도로 12명을 발탁한 동기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12종족을 본떠서 그들 12인을 복음의 선교 중핵으로 기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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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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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us 大帝(BC 63∼AD 14, 재위 BC 27∼AD 14)

로마 제정(帝政)의 초대 황제. 로마 제정은 실질적으로 그에 의해서 건립되었고, 그는 광대한 판도를 잘 정비하여 문화를 융성케 하였다. 로마제국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황제예배(皇帝禮拜)도 그로부터 비롯되었고, 후일 그것이 시민적 의무로서 강요됨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와 서로 상용(相容)되지 않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한편 예수 탄생의 연대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아우구스투스가 칙령(勅令)으로 발표한 인구조사의 해와 관련되어 있다.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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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o(37∼68, 재위 54∼68)

로마의 황제.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 유명하다. 젊어서 황제가 되어 치세(治世) 초기에는 철인(哲人) 세네카와 같은 훌륭한 학자를 후견인으로 두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만년에는 심한 폭군이 되어 측근자(側近者)들로부터 버림받아 자살했다고 한다. 64년 로마시의 3분의 1을 태워 버린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 사이에 네로가 유흥을 위해 불질렀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시민들의 증오와 원한을 두려워하여 평소 사회 일반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오던 그리스도 교도에게 방화 책임을 전가(轉嫁)하여 처형하였다. 네로의 박해는 3세기 이후에 볼 수 있는 박해와는 여러모로 성질을 달리하고, 지역적으로도 로마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그 잔인한 대량학살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바울과 베드로도 네로의 박해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네로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쓴 셴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는 오늘날에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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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tinus 大帝(274경∼337, 재위 324∼337)

로마 황제. 부친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이다. 당시 제위(帝位)를 다투는 자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마침내 제국의 독재자가 되었다(324). 그리스도교 사상 교회의 확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황제의 한 사람으로서, 312년 로마의 북방 밀비우스 교두(橋頭)에서 강적 막센티우스와 싸웠을 때, 하늘에 십자가와 "이 인장(印章)으로 이겨라"는 글을 보고 승리를 얻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그 이듬해에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 황제와 공동으로 종교관용령(宗敎寬容令) 발포를 의논하였으며, 그리스도교를 공인 종교로 삼았다. 더욱이 325년에는 니케아 공회의(Nicaea公會議)를 소집하여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정통교리(正統敎理)를 결정하고 아리우스설을 이단으로 삼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점진적이어서, 그것이 얼마나 심화되었는지는 의문이나,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위해 교회의 일치단합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복잡한 심경(心境)은 임종 때에야 비로소 세례를 받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밀라노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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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ano 勅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리키니우스왕이 밀라노에서 만나 다른 여러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교도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양자 연명(連名)으로 발포한 것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미 311년, 그리스도 교도의 박해자였던 갈레리우스 대제가 중병에 걸려 관용령을 발포하여 박해를 중지했다고 하는데, 313년을 계기로 해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밀라노 칙령이라고 불리는 그 내용은 속주(屬州)의 총독 앞으로 보낸 서한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밀라노에서 칙령으로 발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313년 이후, 이른바 '칙령'에 나타나 있는 내용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며, 비록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삼지는 않았으나 그때까지의 로마제국의 대(對) 그리스도교 정책에 비하면 획기적인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니케아 공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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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aea 公會議

325년, 소아시아 니케아에서 개최된 그리스도교 최초의 세계적 회의(동서 양교회의 총회의). '제1회 세계회의' 또는 '제1회 니케아 공회의'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국가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으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전 교회의 사교(司敎)·사제(司祭) 약 300명을 니케아에 소집하여 대회의를 열었다. 회의 내용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 즉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의사내용(議事內容)은 아리우스파, 알렉산드로스파, 중간파(오리게네스 주의파)의 3파로 나뉘어 논의되었는데, 난항을 거듭한 결과 아버지와 아들을 동질(호모우시오스)로 보는 니케아 신조(오늘날의 니케아 신조와는 다소 다름)가 채택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이질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삼아 일단 결말을 보았다. 그러나 이 회의로 교리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회의에 있어서 황제의 권력이 교회내 의 문제에 개입하는 악례(惡例)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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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us(250경∼336경)

초대교회에 있어서의 대표적 이단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아리우스파의 시조이다. 안티오크의 신학자인 루키아노스에게 사사하여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로 있을 때, 그의 주장이 사교인 알렉산드로스의 노여움을 사 파문(破門)되었는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 공회의를 소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회의 결과, 논쟁에 진 그는 이단시되어 추방당했으나 그 후 아리우스파는 교회 안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이동하기 전의 게르만 여러 족속이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를 신봉한 것은 그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 아리우스파는 7세기에 그 모습이 역사에서 없어지고 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을 존중하는 아리우스 주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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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nasius(293경∼373)

알렉산드리아의 사교. 반 아리우스파의 지도적인 인물로서 '정통신앙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니케아 공회의 때에는 사교 알렉산드로스의 보좌역인 한 집사(執事)로 출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에게 큰 논박을 가했다고 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경건하고 의지가 굳은 인물로서 328년 사교가 된 후에도 끝내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그 때문에 전후 5회에 걸쳐 추방이라는 큰 곤욕을 당했으나 그 위기와 모욕을 잘 참았다. 그에 의하면 아버지(하느님)와 아들(그리스도)과 성령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항상 하나(동질:호모우시오스)라야 하며 더욱이 그 3자의 관계는 신앙의 페이도스(pathos)에 의해 파악되는 초인간적인 비의(秘義)로서, 결코 인간의 사고 대상이 아니었다. 이교적·철학적·사변적인 모든 신앙 형식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신신앙(神信仰)이야말로 그가 생명을 걸고 주장한 것이며, 그의 중요한 역사적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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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s(150경∼220경)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스승. 그는 개종(改宗)하기 전에 각지를 편력하며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배웠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판타이노스에게 사사하여, 그의 뒤를 이어 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에 대해 이전의 어떤 신학자보다도 깊은 이해와 존경을 보이고 있었다.

조직된 교회에 대해서는 여러 교부(敎父) 중 가장 냉담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유연한 사상은 초대교회에서도 귀중한 존재로 되어 있다. 한편 불교에 대해서도 언급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테르툴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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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tullianus(160경∼220경)

서방 교회의 이른바 북아프리카 학파의 신학자.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여 이를 업으로 삼았으나 40세쯤에 개종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후 엄격한 도덕적 욕구에서 이단적인 몬타누스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정통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달리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구별을 강조하고, 또 여러 라틴교회의 용어를 정하는 등 서방 그리스도교 사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오리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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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enes(185경∼254경)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며 당시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그리스도 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나 학자인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고 클레멘스에게 사사했다. 젊어서부터 성서와 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18세의 어린 나이로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서 신학교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왕성한 저작활동은 218년경부터 시작되어 약 2000권의 책자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최초의 교의학(敎義學)으로 알려진 <원리론>, 변증론(辨證論)인 <켈소스 반박론>, 또한 최초의 구약성서 본문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 <헥사플라(Hexapla)> 등이 가장 중요하며, 그 밖에도 뛰어난 성서 주석이나 강해(講解)를 수없이 오늘날에 남기고 있다. 그의 교설 중에는 이단으로 배척된 것도 있으나, 특히 신관(神觀), 로고스론(Logos論)에 대해서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교회에 남긴 그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조직적·종합적인 파악에 있으며, 최초의 조직신학자라는 호칭을 받을 만하다.

키프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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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rianus(200경∼258경)

테르톨리아누스와 한가지로 북아프리카 학파의 신학자. 카르타고의 사교였다. 수사학자(修辭學者)였으나 246년경에 개종, 바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사상적으로는 테르톨리아누스에게 힙입은 바 크나, 박해 아래 있던 사교로서는 교회 문제에 대해 많은 애를 썼으며, 따라서 그의 교회론은 후세의 카톨릭교회 조직에 큰 공헌을 남겼다. 그의 "교회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말은 유명하다.

마르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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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ion(?∼160?)

2세기 중엽의 이단적 바울주의자. 흑해 연안 시노페의 부유한 선주(船主)였다고 하는데, 그 후 로마로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 교회의 근본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 자기의 새로운 교회를 설립했다. 당시의 그노시스 주의에 영향을 받은 바 크며,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구별하여 전자를 부정했다. 또한 바울의 서한과 누가의 복음서로 이루어진 성서를 처음으로 편찬한 것은 그후의 <신약성서>를 결집(結集)하는 데 있어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몬타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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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anus

2세기 중엽의 열광적인 신앙부흥가로 소아시아 사람이다. 이 세상에 천국 예루살렘이 출현, 곧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의 교회 정치나 교의의 고정화 경향에 반항하여 성령으로 가득 찬 원시교회의 이상을 재현하려고 한 이 운동은 급속도로 각지에 퍼졌으며,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한때 큰 세력을 얻었으나, 그 후 전통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그 후에도 가끔 교회 안에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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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us(354∼430)

라틴교회 교부(敎父) 중에서 최대의 신학자. 바울과 루터 같은 쟁쟁한 인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가장 뛰어났으며,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주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로마인으로, 젊어서 명예·성애(性愛)·우정을 갈망하여 현세적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으며, 결혼 후 수사학의 교사가 되었다. 키케로에게 철학을 배워 심취했으며, 마니교(Mani敎)의 합리주의적 사상에 끌리기도 했는데, 곧 실망하여 회의가(懷疑家)가 되었다. 그러나 소년시대부터 경건한 어머니인 모니카로부터 주입된 그리스도교의 내적 결합은 끝내 유지되어 플라톤주의의 철학과 밀라노의 사교 암브로시우스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크나큰 정신적·도덕적 고투(苦鬪)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교로 회심(回心)하여 금욕생활로 들어갔다. 381년에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391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소도시 히포의 사제가 되었으며, 395년 그곳의 사교가 되었다. 그 후 반달족에게 그 마을이 포위당했을 때 죽었다.

초기의 저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고 있으나 차차 바울주의가 침투하여 양자는 단단히 융합되고, 따라서 금욕적인 요소가 강하다. 마니교의 도덕적 숙명관과 대결하여 3권의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을 썼고, 자유로운 비결정론(非決定論)을 주장했으나 원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의 상황은 실로 비참한 것이며, 선(善)에의 자유란 없고 오직 신의 은총만이 인간을 바로잡고 좋은 인간을 만든다는 은혜론을 설파하게 된다. 그의 은혜론은 후기 펠라기우스 논쟁 때에 원죄와 예정(豫定)의 교의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는 회심에 이르기까지의 정신적 고투를 전기적으로 쓴 <고백>, 하느님의 인식을 신앙과 이성에서 탐구한 <삼위일체론>, 고대교회 최후의 변신론(辨神論)인 <하느님의 나라>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들 서적이나 서간집 속에는 풍부한 사상적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는 중세의 교사이기도 했으며, 이단자나 종교개혁자들의 교사이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는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불안의 원천이기도 했다.

에베소의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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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hesus-宗敎會議

431년 에베소(에페소스)에서 열린 제3회 공회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네스토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수육(受肉)한 그리스도에게는 하느님과 인간으로 나뉜 두 인격이 있다고 설파하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1인격설(一人格說)을 주장하는 정통파 교리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론 입장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마리아 칭호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사교인 키릴로스의 도전을 받았다. 키릴로스(Kyrillos)는 에베소의 사교인 멤논의 지지를 얻어 네스토리우스파와 교황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개회(開會)하여,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고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파는 이와 같은 행동에 항의하고 키릴로스와 멤논을 파문하여 대립했으나 432년에 양파는 화해하였다. 처음에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우세했으나 칼케돈의 공회의에서는 키릴로스의 결의가 에페소스 회의의 정식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다.

네스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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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torius(5세기 중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사교(總司敎). 네스토리우스파의 교조이다.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 문제에 관한 그 구별을 설파하고, 또한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cos)'라는 칭호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총사교 키릴로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마침내 43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에베소 공회의(제3회 세계회의)에서 이단선고를 당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가 635년 경교(景敎)로서 중국에 전해진 일은 유명하다.

클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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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vis(465∼511)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프랑크족의 왕으로, 메로빙조(朝)의 프랑크 왕 킬데리크 1세의 아들이다. 스와송의 전투에서 로마령인 고올 지방, 라인, 튀링겐 지방을 얻어 프랑크족의 통일을 완성했다.

아내의 감화로 개종하고, 교황·주교(主敎)의 지지를 얻어 아리우스파의 서(西)고트족을 격파하였다. 도읍을 파리로 옮겨 오늘날의 프랑스의 기초를 만들었다. 라인 양안(兩岸)의 게르만 민족에게 그리스도교와 로마 문화를 도입, 동(東)로마 황제로부터 명예 집정관의 칭호를 받았다.

그레고리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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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一世(540경∼604, 교황 재위 590∼604)

라틴 고대의 마지막 교부(敎父), 중세 교황 정치제도의 창립자이다. 원로원(元老院) 의원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시의 장관이 되었으나, 영지(領地)를 팔아 빈민에게 주고 7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사(修道士)로서 처음으로 교황이 된 사람이다. 탁월한 행정적 수완으로 교황의 절대권을 확립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일도 있다. 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좇았으나 여러 가지 중세기적 미신(迷信)을 받아들였다.

베네딕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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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ictus(480경∼550경)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린 서방교회 수도제도의 창설자. 이탈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의 도덕적 퇴폐에서 벗어나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은자생활(隱者生活)을 하였다.

그 후 차차 공명자(共鳴者)가 생겨 12개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525년경에는 로마 남방 카시노산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동지를 위해 계율(戒律)을 정하고 수도생활의 개혁을 계획했다. 이 계율은 유럽 수도원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이며 여러 나라의 수도원이 이를 기본적 계율로 채용하였다. 이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모두 73장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생활의 목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유효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수도사에게는 청빈·정절(貞節)·복종의 기본적인 의무가 있으며, 정해진 일정한 장소에 머물 서약이 있어야 하고, 기도·명상·노동 등 생활상의 의무가 부여된다. 노동은 학예(學藝)에도 적용되어 수도원은 중세 학예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문명이 멸망하려고 할 때 고대문명의 저장소 구실을 했다.

우상숭배금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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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像崇拜禁止令

725년에 동(東)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칙령을 발포하고, 모든 성화상(聖畵像)은 우상이니 파괴해야 한다고 명령한 유명한 성화상 파괴령이다. 레오가 사라센인에게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소아시아의 농민 덕택인데, 이 농민들은 신비주의를 믿고 성화상 예배를 우상숭배라고 반대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성화상 예배는 순교자를 기념하는 습관이 성인숭배와 성유물(聖遺物)숭배로 바뀌면서 생겨난 것이다. 게르만인의 교화(敎化)를 위하여 예배 때 성화나 성상(聖像)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부인들이나 수도사의 지지를 얻어 왕성해진 것이다. 레오가 금령(禁令)을 내린 진의(眞意)는 수도원의 반항을 미리 짐작했고, 그 소령(所領)을 몰수하여 병제(兵制)와 재제(財制)를 재건하는 데 있었다. 이후 100년에 걸쳐 논쟁이 행하여져, 우상숭배가 되지 않기 위해 성화상 '숭경(崇敬)'을 공인하자는 조정도 있었다. 동방교회가 민중의 요망에 따라 마침내 성화상 숭배를 인정한 데 대해서 서방교회는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여,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이 더욱 깊어져 갔다.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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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 Roma 敎會-分裂

성화상 문제 이래 더욱 심각해진 동서 로마교회의 대립은 9세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1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분열하게 되었다. 9세기 중엽 교황권의 절대 불가침성(不可侵性)을 주장한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주교(總主敎) 포티우스의 취임을 간섭하여 두 교회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11세기에 이르러 동방의 총주교인 아크리다의 레오와 교황 레오 9세 사이에 다툼이 생겨 서로 파문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최후와 같은 분열을 보게 되었다.

이 분열에 이르는 역사는 매우 길며, 이미 3세기경부터 그 싹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문화적으로 보아도 동방교회는 그리스적인 문화의 영향이 강하여 명상적·예술적인 데 반해서 서방교회는 로마적인 문화 아래 있어서 법률적·실천적이었다. 성립된 직계제도(職階制度)에 대한 서방 여러 교회의 거부, 여러 공회의에서의 교리상 대립, 특히 아카키우스 분쟁, 정치사적(政治史的)으로 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遷都),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이 분열에 이르는 주요 원인으로 되어 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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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의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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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pin-寄贈

롬바르디아 왕 아이스툴프는 751년 동로마로부터 라벤나를 탈취했다. 로마의 위기를 눈앞에 둔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프랑크 왕국, 카롤링 왕조의 창시자인 피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롬바르디아로 원정, 이를 정복하고 754년 라벤나의 태수령(太守領)을 교황령(敎皇領)으로 하여 기증하였다.

이 일은 로마 교황권이 동로마 황제와 결별(訣別)하고 프랑크 왕권과 제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피핀의 아들 카를 대제는 서방세계의 대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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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uny 修道院

910년 아키텐공(公) 윌리엄의 손으로 건립, 기증된 프랑스의 부르고뉴에 있는 큰 수도원. 초대 원장 베르노와 후계자인 오도에 의해 엄격한 베네딕투스 계율(戒律)의 정신에 입각해서 불합리한 풍습을 제거하고 서구사회의 실정에 적합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영향은 전 유럽에 미쳐, 각지에 자파(自派) 수도원을 3백개 이상이나 갖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도 이 수도원 출신이며, 11세기 후반 교황권의 발전도 이 수도원의 개혁정신에 힘입은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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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Ⅶ (1021경∼1085, 교황 재위 1072∼1085)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의 예배당부(禮拜堂付) 사제로 발탁되었으나 교황과 함께 독일로 망명, 후에 클뤼니 수도원에서 성직자의 엄격한 생활의무를 배웠다고 전하여진다. 교황 레오 9세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 로마 교황청의 유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1073년 교황으로 발탁되어, 교회의 개혁과 도덕의 재흥(再興)에 착수하여 사제의 결혼과 성직의 매매를 엄금하였다.

또한 평신도(平信徒)에 의한 성직의 임명을 부인하고, 교황권의 지고성(至高性)을 발령(發令)하였다. 이 서임권 문제야말로 교회가 세속적 국가로부터 독립하고 있음을 뜻하며, 특히 독일왕 하인리히 4세와 대립하여, 왕이 그의 퇴위(退位)를 명한 데 대하여 그는 왕을 파문하게 된다. 이 사건은 왕의 카노사 굴욕으로 끝나 교황의 절대권이 확립되는데, 또다시 왕의 공격을 받아 그는 망명끝에 사망한다. 그의 의도는 순수했으며, 정의를 희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노사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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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ssa-屈辱

교황권에 패배한 황제권의 비극. 1076년 겨울, 독일 국왕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를 넘어 아우크스부르크의 국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북상중이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카노사성에서 만나, 그에게 내려진 파문의 용서를 빌면서 3일 동안 모자를 벗고 맨발로 수도의(修道衣)를 입은 채 통회(痛悔)의 정을 보임으로써 파문 해제를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세에 있어서의 황제권과 교황권의 최대 격돌이며, 이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1075년 평신도에 의한 성직자 서임권을 부인하는 교서(敎書)를 발령한 데서 비롯된다. 이에 대해서 하인리히는 반 교황적 분자들과 꾀하여, 왕의 전통적 직권으로 그레고리우스의 폐위를 결의하고 교황은 이에 대해 왕의 파면과 파문으로 응수했다. 독일의 제후(諸侯)가 교황편에 섰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국회에서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교황에게 용서를 빈 것이다. 이 카노사 사건은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황제와 교황이라는 유럽 중세 2대 권력의 가장 큰 싸움이었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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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字軍

성지 예루살렘을 그리스도 교도에게 탈환해 줄 목적으로 전후 8회에 걸쳐 행하여진 원정. 11세기초, 이슬람교로 개종을 한 셀주크 터키가 강해져 소아시아를 침략, 성지(聖地)를 서방(西方)으로부터 차단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안(對岸)까지 육박하니,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교황은 이 의뢰를 동서 두 교회가 재결합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회의를 소집하고, 이교도와의 성전(聖戰)과 순교의 영광을 열렬히 호소했다. 당시 교황권은 최성기에 있었고 기사도(騎士道)도 왕성했으며, 한편 황제권이나 봉건국가는 성숙치 못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부름에 따라 수천명이 종군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하였다. 그들은 '십자가가 표시된 자'라 불리었고 총칭 '십자군'이라 하였다.

제1회 십자군(1096∼1099)은 프랑스와 노르만의 기사(騎士)로 구성되어 성지 탈환에 성공했으며, 예루살렘 왕국을 만들었다. 성전(聖戰)이란 말뿐이고 이교도에 대한 잔학성이나 약탈 행위는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제2회 십자군(1147∼1149)은 이슬람교측이 에데사를 점령, 예루살렘 왕국이 위기에 놓이자 성 베르나르의 선도(先導) 아래 출발했으나 예루살렘까지 가지도 못하였다. 살라딘이 나타나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독일·영국·프랑스 왕들의 힘으로 제3회 십자군(1189∼1192)이 시도되었으나 결국 살라딘과 화해하여 예루살렘의 통행권을 얻은 데 불과했다. 제4회 십자군(1202∼1204)은 파문된 십자군으로 구원해야 할 동로마 제국을 역습하여 라틴제국을 만들었다. 그 후에 십자군은 4회나 더 시도되었으나 프랑스 왕 성루이의 병사(病死)를 계기로 종결되었다. 십자군의 동기는 성지 탈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방무역의 이익, 교회의 과세권(課稅權) 확대, 동서 두 교회의 통합 등 여러 원인이 있었다. 한편 십자군의 실패는 교황권의 실추(失墜)로 끝났지만 여기에는 국가의 집권화(集權化)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지중해 상업의 융성, 도시의 발달, 문화의 융성이 십자군과 함께 촉진되게 되었다.

아벨라르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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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elardus(1079∼1142)

초기 스콜라학의 철학자·신학자. 파리에서 샹포에게 배웠으나 스승의 극단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을 비판하고, 교사로서 유명해졌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책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교리 전승(傳承)의내부에 있는 차질과 곤란성을 분명히 하고, 변증법적 방법에 의한 가능성을 추구했다.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은혜설(恩惠說)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한 합리주의자이다. 에로이즈와의 불행한 연애로도 유명하다.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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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Francesco d'Assisi(1181∼1226)

프란체스코회의 창시자.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까지 부친의 가업(家業)을 돕고 행복한 청년시대를 보냈으나 페르시아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어 수개월 간의 옥중생활을 했다. 귀국은 했으나 중병에 걸려, 현세적 생활에 불만을 느끼고 많은 정신적 갈등을 겪은 뒤 기도와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마태의 축일(祝日)예배중, 마태복음 제10장 7∼19절이 낭독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자기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 해석하고 일체의 재산·소유물을 버리고 거지가 되어 기다란 흑의(黑衣)에 띠를 두르고 사랑과 봉사와 구령(救靈)의 생활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동지와 함께 교단(敎團)을 만들 생각은 없었으나 그의 설교에 감동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규칙을 만들고 교황의 허가를 구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현명하게도 이를 받아들여, 걸식단(乞食團) 운동이 교회에 뜻있는 것으로 인정했다. 그의 동지들은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프란체스코회를 만들어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탁발승(托鉢僧) 수도회가 되어 청빈(淸貧)·정결(貞潔)·복종의 서약을 지켰다. 더욱이 아시시의 성녀 클라레가 참가하여 여자 수도회가 태어나 제2회가 되었다. 무어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그는 남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갔으나 병 때문에 아프리카로 건너가지 못하였다. 전도여행 동안 교단에 대한 그의 관계는 변화하여, 대교단(大敎團)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이를 감독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지도자가 되기를 꺼려 하였다. 이 무렵 평속신도회(平俗信徒會)가 생겨서,제3회로 정식 단체가 되었다. 1224년 9월에 알베르나산에서 그는 성흔(聖痕)의 선물을 받았다. 병이 위중해져, 산다미노로 가서 「태양찬가(太陽讚歌)」를 지었다. 그 후 아시시에서 사망했다. 2년 후 그레고리우스 9세는 그에게 성인 칭호를 내렸다. '하느님의 음유시인(昑游詩人)' 프란체스코는 어린이와 같은 쾌활성, 자유, 그리고 독실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모방(模倣)의 이상을 가장 순수하게 실현한 사람이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정열적인 헌신, 자연에의 사랑, 깊은 겸허는 그를 현대에서 가장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노켄티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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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centiusⅢ(1160∼1216, 교황 재위 1198∼1216)

중세 교황권의 최고봉을 이룩한 교황. 귀족의 아들로 아냐니에서 태어나 파리 볼로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배웠다. 눈부신 출세를 하여 30세에 추기경으로 발탁되었고, 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이 되었다. 18년 동안의 활동으로 중세 교황권의 최성시대를 만들었다. 십자군(제1회)의 성공, 성직자 서임권 문제 이래의 황제권에 대한 승리, 더욱이 전 유럽적인 조직을 통한 막대한 조세수입(租稅收入)을 이용해서 놀라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신성 로마제국에서는 하인리히 4세가 죽은 후 발생한 왕위계승권 문제에 간섭하면서, 교황이란 '선택된 사람을 심사할 권리와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의 이혼 문제에도 뛰어들고, 캔터베리 대사교(大司敎) 임명 문제로 영국 왕 존을 파문하고 신종(臣從)의 예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제4회 십자군을 일으킨 것도 그였다. 그는 자기의 직권이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에 있으며, 하느님보다는 아래이지만 사람보다는 위에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칭했다. 결국 제사적(祭司的) 왕이라는 이념이 실현되어 유럽 전체의 지도자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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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aventura(1221∼1274)

프란체스코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238년경 프란체스코회에 들어가 파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동 대학 신학교수가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장(總會長)으로 오랫동안 일하고 만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학설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새로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도 동조하여 이성의 추상설과 아우구스티누스적 조명설(照明說)을 합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설의 특질은 하느님의 사랑을 목적으로 해서 이론을 정한 것이며, 신학은 이 목적을 향해 인간을 이끌고 철학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원조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신이라는 무한의 선(善)을 향하며, 거기에서 안식하고, 그것을 즐기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감각의 세계 속에서 신의 형적(形跡)을 보며, 영혼 속에서 신의 가상적(假想的) 모습을 구하며, 신을 인식하는 신비적 환희 속에서 신을 찾는 순례(巡禮)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3단계로 이루어진 조명(照明)의 길인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명제집주해(命題集注解)>,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영혼이 신에 이르는 도정기(道程記)>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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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quinas(1225∼1274)

스콜라학 최대의 철학자·신학자·도미니코 회사(會士). 아퀴노 백작의 아들로 나폴리 근교 로카시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가까이 있는 베네딕투스파 학교에 들어갔으나, 나폴리로 돌아와 신설(新設)된 도미니코회에 들어갔다. 파리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도 접하였다. 스승과 함께 쾰른으로 가, 학생지도자로서 스승을 도왔다. 1252년 파리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며 <유(有)와 본질에 관해서>를 써서 신학박사가 되었다. 1259년에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성청(聖廳)의 강사가 되었고, 선교사의 교과서로 계획된 <이교도(異敎徒) 논박 대전(大全)>을 저술했다. 1265년, 성 사비나 수도원에서 활약중에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에 착수하여 제1권을 완성, 제2권은 두번째 파리대학 교수시절에 완성했는데, 제3권은 나폴리의 신학교수를 하면서 집필 도중 리용 공회의에 참석하고 여행중에 사망했다. 이 서적은 중세 신학 체계의 최고의 성과이며 현대 로마가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어 있다.

아퀴나스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체계화하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균형잡힌 명료한 방법으로 포괄적인 신학적·철학적 체계를 구축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문화와 그리스도교를 잘 융합시켜 표현하였다. 지식과 신앙, 자연적 인식과 계시(啓示)에 의한 인식이 명확히 구별되어 있는데, 올바르게 이해를 한다면 양자는 조화·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명제(命題)에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은혜를 공적사상(功績思想)과, 심리학적으로 전개된 의인론(義認論)을 상세한 예전론(禮典論)과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도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윤리 면에서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교회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교황 지지자로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역설했다.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서를 많이 남겨, <진리론>과 같은 훌륭한 작품을 저술하고 있다. 보편논쟁(普遍論爭)에서는, 사물은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로 성립되어 있는 한 구체적인 것이라 보고 완화된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을 주장했다.

아퀴나스에 있어, 자연과 초자연의 조화에 바탕을 둔 중세 통일문화가 이룩되었으나 이 문화 속에 포함된 모순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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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ster Eckhart(1260경∼1327)

독일 도미니코회에 속하는 신비사상가. 튀링겐 호흐하임에서 태어나 에르푸르트·스트라스부르·쾰른에서 수학하고, 파리에 유학하여 마이스터(석사)가 됐다. 수도원의 지도자, 파리대학 교수, 스트라스부르 신학교 교장을 거쳐 쾰른대학 교의학(敎義學) 교수가 되었다. 높은 학식과 깊은 신비 사상이 깃들인 독일어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쾰른의 대사교에 의해 이단자로 피소되었는데, 소송중에 사망했다. 그의 근본사상은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탄생한다는 신비사상이다.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교제를 그는 강조하고, 영혼을 우선 피조물의 다양성으로부터 떠나서 그곳을 하느님의 말씀이 탄생하는 장소라 했고, 모든 것이 하느님 속에서 탄생되며, 온갖 인간적인 계획이나 꾀를 버리고 자신의 행복에도 무관심해질 것을 가르쳤다. 그의 선교는 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구제의 역사적 의의는 상실되고 있으나, 그의 사상을 범신론(汎神論)으로 단정할 수는 없고, 인격주의적으로도 해석하게 되었다.

둔스 스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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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s Scotus(1266∼1308)

영국의 스콜라 철학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며 옥스퍼드에서 철학을 연구한 후 동 대학 교수를 거쳐 파리·쾰른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수학적·과학적 정신과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아퀴나스의 학설을 크게 개변(改變)했다. 지식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과 의지의 우위성을 역설하고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확립했다.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회태설(無原罪懷胎說)의 변호자로 유명해졌다.

오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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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of Occam(1300경∼1349경)

영국 유명론(唯名論)의 철학가. 살리주 오캄에서 태어나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동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후기 스콜라철학 유명론의 건설자로서, 보편적인 것은 말이나 관념뿐이며 이들은 실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개물(個物) 위에 붙여진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신앙을 이성으로부터 구별하고, 신의 존재나 속성(屬性) 등의 진리는 신앙에 속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종교개혁, 특히 루터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교황의 아비뇽 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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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皇-Avignon 幽閉

1307∼77년의 70년간 프랑스의 강압에 굴복한 교황청이 남프랑스 로느 하반의 법왕령(法王領) 아비뇽으로 주거를 옮긴 사건을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로니아 유폐의 고사(故事)에 견주어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한다. 교황권 최성기에 가장 위대했던 최후의 교황인 보니파티우스 8세의 죽음으로 정치적 국면이 달라져, 교황권의 우위는 흔들리고 로마는 프랑스 왕권의 압력에 대항할 힘을 잃었다. 보르도의 대사교가 클레멘스 5세로 교황 자리에 앉게 되자 필리프 4세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와 교황의 아비뇽 체재를 지연시켰고, 다수의 추기경이 프랑스인 중에서 임명되어, 교황권은 프랑스 왕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프랑스 왕의 정책에 복종하고 그 괴뢰(傀儡)가 되어 교황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 로마로 돌아오긴 했으나, 이듬해에는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따로 교황이 선출되어 양자의 정통성을 다투는 추태가 연출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대분열이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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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us Cusanus(1401∼1464)

독일의 추기경·철학가. 모젤 하반의 쿠에스에서 출생. 하이델베르크와 쾰른 대학에서 수학한 후, 코블렌츠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바젤(Basel) 회의에 참석한 이래로 교회정책과 교회개혁을 위해 진력했으며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프릭센의 사교가 되었다. 학문상으로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이며 주요 저서로는 <학식 있는 무지>가 있다. 여기서 '학식 있는 무지'·'반대의 일치' 등을 역설했다.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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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 d'Arc(1412∼1431)

영불 백년전쟁 시대에 나타나 프랑스를 구원한 애국소녀. 오를레앙의 소녀라고도 불린다. 샹파뉴의 돔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소리를 들었으며, 천사·성인의 소리를 들어 분간하고, 프랑스를 영국군으로부터 해방시킬 사명을 받았다.

그녀가 행한 어떤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에 샤를 7세와 회견하였고, 한편 신학자들에게 조사를 받은 다음 오를레앙 원정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녀는 흰 갑옷을 입고 삼위일체의 상징과 '예수·마리아'라는 글이 적힌 깃발을 들고 진격하여 이상한 전술로 그 마을을 구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프랑스군은 연승하고 거의 전토에 걸쳐 영국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녀는 오를레앙 이후의 싸움에서는 패하여, 적군에게 사로잡혀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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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스의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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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ce-宗敎會議(1414∼1418)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드의 교사(敎唆)에 따라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남독일의 콘스탄스에서 소집한 회의. 후일 제16회 공회의라고 불렀다. 목적은 교회 대분열의 해결, 교회개혁과 이단심사(異端審査) 등 여러 문제를 논하는 데 있었다. 회의는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사교·성직자·귀족·공사(公使)의 참가로 진행되었고, 당시 병립하고 있던 3교황(로마교황, 아비뇽 교황, 대립교황)의 퇴위를 의결하고 새로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했다. 교회개혁에 관해 합의를 본 것은 직위겸유(職位兼有)의 제한, 성직매매의 금지, 교황의 10분의 1 세금 과세권 제한 등이었으며, 동 시대의 이단심사에서 위클리프의 200개 명제를 단죄하고 황제의 보호 아래 회의에 소환되었던 후스를 이단자로 화형(火刑)에 처했다. 이 회의로 대분열의 종지부가 찍혔으나 교회의 참다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 중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위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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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ycliffe (1329경∼1384)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종교개혁자. 리치먼드 근교(近郊)의 위클리폰티즈에서 영주(領主)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밸리얼의 학료장(學寮長)이 되었다. 한편 캔터베리 홀의 교장과 동일 인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어 필링검의 교구목사가 되고, 루터워드로 옮겨 그 곳에서 죽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보냈으며, 1374년에는 교황청과 절충하기 위해 부르주로 파견되었다. 처음엔 둔스 스코투스 오캄의 유명론(唯名論)을 비판하고 철학자로서 유명했다. 주권의 교리로 명성을 얻고, 로마교회의 타락은 참다운 주권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교회의 대분열로 비판이 과격해져 교황을 반(反) 그리스도인이라 불렀고 성서만이 올바른 행동의 기준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성찬의 화체설(化體說)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성서의 영어 번역을 완성하고 성서는 자유롭게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죽은 후 콘스탄스 회의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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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Hus(1370∼1415)

보히미아의 종교개혁의 선구자. 보히미아의 후시네츠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하고 학위를 얻어 인문학 교수를 거쳐 총장이 되었다. 그 동안 사제가 되었는데, 그의 설교는 유명하였다. 당시 위클리프의 저서가 전하여져, 그의 정치학설·예정설·교회론에 공감하고 저서의 일부를 체코어로 번역했다.

성직자의 도덕을 비판하는 과격한 설교 때문에 설교를 금지당했다. 당시 교회의 대분열이 국내에 반영되었을 때, 그는 반 독일적 체코 국민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교황 요하네스 23세에게 파문되었다. 그 후에는 프라하를 떠나 저작생활로 들어가 <교회론>을 썼다. 교황의 파문을 공회의에 호소하기 위해 콘스탄스 회의에 황제의 보호도 없이 참가했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를 경애하고 있던 보히미아의 체코인들이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후스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프라하 대학은 그를 순교자로 삼았으며, 현재의 체코 교회는 후스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사보나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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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olamo Savonarola(1452∼1498)

이탈리아의 열렬한 설교가·종교개혁자. 페라라에서 수학한 후 볼로냐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으로 들어가 처음부터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 후 상마르크 수도원으로 옮겨, 당시의 부도덕한 사회를 격렬하게 비난하여 주목을 끌었으며, 부수도원장이 되었다.

피렌체 멸망의 예언이 적중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3년 동안 종교적·금욕적 원칙에 의거한 민족적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행하였다. 이 정치의 원리는 <피렌체의 규칙과 정치>에 씌어 있다. 그러나 너무 엄격하여 적이 많아졌으며, 추방되어 있었던 메디치가(Medici家)와 교황의 결속으로 그의 입장은 불리해졌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소환을 거부하고 교황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기 때문에 파문을 당했으나, 오히려 교황의 퇴위를 논하기 위한 공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다수의 시민과 프란체스코회의 반격에 봉착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자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졌다. 저서로는 가톨릭주의를 변명한 <십자가의 승리>가 유명하다. 그는 성인으로 존경을 받는 반면, 광신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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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dano Bruno(1454∼1600)

이탈리아의 자연철학자. 나폴리 근교의 놀라에서 태어나 젊어서 나폴리의 도미니크 회사(會士)가 되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의 영향으로, 신앙상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도망하여 17년 동안 여러 나라를 방황하였다. 옥스퍼드에서는 영혼불멸과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해서 강의했으나 이를 금지당하였고, 런던에서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초대에 응하여 고국(故國)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배반당하여 종교재판에 회부, 로마로 송치되어 7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도 학설을 취소하라는 요구에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는 "선고를 듣는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자네가 겁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에서 화형 처분을 받았다. 그는 근대학문의 순교자이다. 자연에 대해 큰 감격을 갖고 극단적인 형태의 범신론적(汎神論的) 내재주의(內在主義)를 취하여 신적인 것의 내재, 세계의 무한성, 개체적인 것의 독립을 역설했다. 진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미(美)의 감격에 살고 죽은 사람이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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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leo Galilei(1564∼1642)

이탈리아의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피사에서 태어나 피렌체 근교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피사에서 수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흔들이의 등시성(等時性) 발견, 유체실험(流體實驗) 등으로 주목을 받고 피사의 수학 강사가 됐다. 피사의 사탑에서 낙체의 법칙을 세웠다. 이 실험적 방법의 성공은 추상적 원리에서 연역(演繹)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자연학에의 도전이 된다.파도바에서 수학 교수를 하고 있는 동안에, 당시 발명되었던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이용하여 목성(木星)의 위성, 태양의 흑점, 금성(金星)에 만결(滿欠)이 있음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을 지지했다. 교황청의 불만을 사면서도 <프톨레마이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체계 대화>를 저술하고 천동설(天動說)을 공격했다. 이단심문을 받고 로마로 소환되어 자설(自說)의 철회를 강요당했을 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는 브루노와 같은 순교자가 되기보다는 조용히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고, 피렌체에서 저작 활동에 종사했다.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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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改革

일반적으로는 교회 혹은 신앙의 집단을, 그것이 성립된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 참다운 본질을 바로세우고, 악용(惡用)을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를 말한다.

그러나 협의(狹義)로는 루터의 개인적·종교적 체험에서 출발하고,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교권조직(敎權組織)을 성서에 따라 비판하고, 새로운 교리와 교회를 형성한 정신상(精神上)의 운동을 말한다.

종교개혁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낡은 정치적·교회적·인문주의적·문화적 개혁운동과 결합되어 전 독일에 파급되었으나, 황제 및 반농민전쟁(反農民戰爭) 때에 동맹했던 제후(諸侯)의 반대에 부닥쳐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의 종교화의(宗敎和議, 1555)에서 나라를 단위로 한 종교적 통일을 보기에 이르렀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는 독일·루터파 교회를 본떴으나, 스위스에서는 우선 츠빙글리에 이어 캘빈이 나와 개혁파 교회를 형성하고, 이에 의해 종교개혁은 세계사적인 영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의 영향과 낡은 국교회적(國敎會的) 가톨릭의 전통이 융합되었다.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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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1483∼1546)

독일 종교개혁의 지도자.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부 출신으로 후에 광부가 되었다. 루터는 단순하고 엄격한 가톨릭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평범한 청춘시대를 보냈다. 그러나 1505년 갑자기 뇌우(雷雨)를 만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원(誓願)을 하고, 부친의 뜻을 어기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사의 교육을 받아 오캄파(派) 스콜라학 신학자가 되고, 1508년 당시 신설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일반 교양과목을, 이어 성서학(聖書學)을 담당했다. 그동안 루터는 자신의 선행(善行)으로도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어 자기의 죄에 절망하는데,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신으로부터 수여되는 신의 의(義)를 발견한다. 이와 같은 그의 개인적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성서를 강해(講解)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정해진 가톨릭적 성예전(聖禮典)에 의문을 가지며, 당시 그의 관리 아래 있던 작센 지방에서 판매되던 교황의 '면죄부(免罪符)'를 학문적으로 논할 생각으로 유명한 '95개조의 논제(論題)'를 교회의 대문(당시 이 대문은 대학의 게시판이었다)에 게시했는데, 이 제제는 곧 전독일에 퍼져나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초기는 루터의 인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루터의 힘있는 문서는 사람들을 감격시키고 매료하였다. 1520년에는 가장 중요한 여러 논문 <선행(善行)> <그리스도인의 신분 개선에 대해서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줌>·<교회의 바빌론 유수(幽囚)>, 그리고 신앙에 의한 의(義)와 사랑의 행위를 역설한 아름다운 소품(小品)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했다. 이듬해 보름스의 국회(Reichstag zu Worms)에 소환되어 카를 5세의 면전에서 이들 서적의 취소를 거부했다. 루터의 생애는 투쟁으로 일관되어,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의 유명한 논쟁에서는 신의 은혜의 절대성을 <노예의지론(奴隸意志論)>에서 주장하였고, 대농민전쟁(大農民戰爭)>에서는 과격한 분자에게 말려들어 실패하였으며, 복음주의자인 제후(諸侯)의 보호 아래 각 지역 교회제도의 확립, 교회내의 조직화를 위해 분투하였다.

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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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alvin(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신학자. 프랑스 소도시 노용(Noyon)에서 교회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과 인문학 교육을 받고 파리·오를레앙에서 신학을 배웠다. 24세 때 교회를 초대(初代)의 순수성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사명을 자신이 받았다고 믿는 '돌연적 회심(突然的回心)'을 경험하고, 그 후로는 복음적 신앙 때문에 프랑스에 머물 수가 없었다. 친구와 함께 스위스의 바젤로 도망하여, 연구에 뜻을 두고 <그리스도교 강요(綱要)> 초판을 내었다. 1536년 제네바시의 종교개혁에 참가, 활약했는데 너무 엄격한 규정을 부과하여 추방되었다.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설교자·신학교수로서 교회의 지도를 맡았다. 그 후 <로마서 강해(講解)>를 냈는데, 이것이 유명한 성서주해서(聖書注解書)의 출발이 된다. 1541년 제네바로 돌아와, 이후 14년 동안에 걸쳐 시(市)의 종교개혁을 신정정치(神政政治)와도 같은 엄격성으로 행하여 개혁파 교회의 모범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개혁파 교회의 형성에 힘썼다.

캘빈의 설교는 주저(主著) <그리스도교 강요>(결정판 1559년)에서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서 신학자인데, 자기의 사상을 명확히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율법과 복음의 사이를 루터보다 더욱 접근시켰고, 죄를 용서하는 신이 항상 심판자·지배자로 나타나며 이 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구원과 파멸과의 2중예정설(二重豫定說)을 강조하며 이를 선교(宣敎)하고 변호하는 것이 진정한 캘빈주의의 특징이 되어 있다. 또한 종교개혁의 기초가 된 교회 규정에서는 교회의 직제를 목사·교사·장로·집사의 넷으로 구별하고 교회의 조직화를 완성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엄격한 법규를 행사하여, 세르베토스의 화형과 같은 일도 단행하게 되었다. 캘빈주의의 개혁파 교회는 루터파 교회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공공의 정치생활에 작용하여, 서유럽에 있어서 종교개혁이 발전해 나가는 형태가 이루어졌다. 캘빈주의의 정신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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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dreich Zwin(1484∼1531)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토겐부르크 지방의 작은 마을, 빌트하우스의 부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루터와는 달리 수도사나 스콜라학자가 아니라 인문주의적인 교육을 받아 교구사제(敎區司祭)가 되었다. 루터의 영향으로 복음주의적 확신에 이르렀으나 스위스인다운 합리주의의 독자적인 신학적 입장을 설정하여, 뛰어난 설교가로서 큰 영향을 주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단식(斷食)의 계율을 배격하는 데서 시작되어, 67개조의 논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와 같은 개혁을 스위스 이외의 다른 도시에도 발전시키고, 더욱이 헤센의 방백(方伯) 필립과 맺어 정치적 동맹 계획을 세웠으나 성찬론에서 루터와 대립하여 좌절되었다. 그의 신학은 루터보다 합리적 요소가 강하며, 인문주의적이고 교회와 정치가 스위스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후에 츠빙글리의 취리히와 캘빈의 제네바는 성찬론의 조성에 성공하여 개혁파 교회로 합동했다.

에라스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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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derius Erasmus(1466년경∼1536)

북방 인문주의의 왕자.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으나 정실(正室) 자손은 아니었다. 공동생활 형제단(共同生活兄弟團)의 학교에서 배우고, 실천적 신앙과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1487년 시타인의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회로 들어가 성직자가 되었다. 파리와 영국에 유학, 콜레트의 강의를 듣고, 토머스 모어와 우정을 맺고 성서와 교부(敎父)의 신앙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파리로 돌아와 <고전 격언집>·<그리스도인 기사 필휴(騎士必携)>를 출판했다.

이탈리아 여행,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치우신예찬(痴愚神禮讚)>을 썼다. 또한 신약성서 그리스어판은 고전 라틴어에 의한 신역(新譯)과 함께 신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521년 이래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았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을 썼으며 루터와 유명한 논쟁을 하였다. 그는 인문주의적인 교양이 풍부한 근대적인 자유인이며, 당시의 교회와 신학을 풍자하고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했으나 여기에 끼여들지 않고 종교적 화해를 역설했다.

멜란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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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 Melanchthon(1497∼1560)

종교개혁가, 루터의 동료이며 친구. 직관적·논쟁적인 루터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조직화한 인물이다. 또한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의 친척으로서,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받고 어려서부터 천재아로 알려져 있었다. 1518년 튀빙겐 대학가에서 비덴베르크 대학으로 초대되어, 대학 교육을 개혁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그리스어 교수로 일하게 된다.

그 후 루터의 영향을 받아 철학에서 성서학으로 전향한다. 1521년 <신학총론(神學總論)> 제1판을 내고, 복음적 설교의 주요한 개조, 특히 윤리적 내용을 강조하여, 이를 명확하게 해설하였다. 그는 높은 교육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이후 복음주의적 신학과 철학 교사가 되었다. 성격은 온화하며 겁이 많고, 루터의 생존시에는 양자의 차이가 감추어져 있었으나,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인 특질은 루터교회와 캘빈주의의 결합이라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16세기 말까지 계속된 이와 같은 경향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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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nox(1505경∼1572)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해딩턴에서 태어나 글래스고와 세인트 앤드루즈 대학에서 공부하여 성직자의 직을 얻은 듯한데, 공증인(公證人)으로 출발했다. 루터주의자 위샤아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의 원리를 체득했다. 세인트 앤드루즈의 설교사, 에드워드 6세의 궁정부(宮廷付) 목사가 되었으나, 메어리 1세가 즉위한 후에는 대륙으로 망명하여 제네바 영국인 교회의 목사가 되고 캘빈과 친교를 맺었다. 그후 여왕이라는 지배 형태가 신의 계명과 자연법(自然法)에 위반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예정론(豫定論)>이 출판되어 캘빈주의적인 개혁파 교회의 설립을 위해 힘을 다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조 및 예배규칙서를 작성하는 한편, 메어리·스튜어트 여왕의 미사 시행과 궁정의 세속성을 비판하고 과격한 설교를 행하였다. 마리경이 암살된 후에는 그의 정치력이 감퇴되었다. 주요 저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는 미완성에 그쳤다.

레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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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Ⅹ(1475∼1551, 교황 재위 1513∼1521)

피렌체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이미 1489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교황제(敎皇制)의 마지막 대표자이다. 정책으로는 교황권의 보존과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라파엘을 애호하고, 전교황으로부터 계승한 성(聖)베드로 교회의 건축에 그의 그림을 채용하고, 그 막대한 건설비를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免罪符) 판매가 행하여졌다. 그는 루터의 의의(意義)를 인식하지 않고,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 정치적 고려에 보다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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免罪符

속유장(贖宥狀)이라고도 번역된다. 후기 스콜라 신학에 의해 형성된 설에 의하면 면죄란 가톨릭 교회의 회개교리(悔改敎理)의 4부분, 즉 통회(痛悔)·고백·죄사(罪赦)·배상(賠償) 중 최후의 것을 면죄라고도 하였다. 면죄는 회개의 벌을 면제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나 성자들이 축적한 많은 공적(功績)의 여분이 있어, 교회나 특정한 조건 아래 이 공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죄부의 효력은 연옥(煉獄)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교황청의 수입원(收入源)으로 면죄부가 이용되었고, 로마의 성베드로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 독일에서 면죄부가 대규모로 판매되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면죄부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되고 있는 점을 비난했다. 그는 회개란 마음을 돌리는 것을 뜻한다고 역설하고, 가톨릭적 회개의 대계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항의가 있은 후, 면죄부의 본질은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개혁되었다.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부차적(副次的)인 역할을 갖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시말칼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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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malkalden戰爭(1546∼1547)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영지의 자치권을 폐기하고 독일에다 합스부르크가(家)의 절대권력을 안정시키려고 프로테스탄트를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諸侯) 및 도시가 시말칼덴에서 동맹을 결성하여 대항했다. 헤센의 방백(方伯)인 필립이 이 동맹의 정치적 수장(首長)이며,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 부체르가 그의 고문으로 활약했다. 동맹의 성격은 방위적이며, 가맹자가 종교적인 일로 공격을 받았을 경우 서로 돕기로 했으며, 루터도 이를 인정했다. 이 동맹은 프랑스·덴마크·영국에까지 뻗어가 전 유럽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헤센 방백인 필립의 중혼문제(重婚問題), 작센공(公) 모리츠의 배반 행위 때문에 힘이 약해져, 루터가 죽은 후 황제는 이 동맹에 전쟁을 선언했다. 이리하여 프로테스탄트는 패배했으며,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가칙령(假勅令)에 의해 임시로 전쟁을 끝냈으나 반대에 부닥쳐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和議)를 보게 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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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sburg 宗敎和議(1555)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맺어진 황제와 프로테스탄트 제후(諸侯)간의 강화. 시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테스탄트의 망명자들이 작센공 모리츠의 마그데부르크 소탕을 명령했다. 모리츠는 이 잔인한 처사를 참을 수가 없어, 토벌군을 이끌고 황제를 향해 진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파사워의 화해를 맺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퇴위하고 동생인 페르디난드가 대신하여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종교화의를 맺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을 갖는 교회가 인정되고, 군주가 받드는 종파(宗派)에 영민(領民)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주의 자유는 인정되었다. 더욱이 제국의 자유도시에서는 양파의 공존이 인정되었다. 이리하여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신구(新舊) 양파의 싸움은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방 영주제(領主制)의 승리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트리엔트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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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ent宗敎會議(1545∼1563)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들의 요청으로,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소집된 제19회 공회의를 말한다. 대항개혁(對抗改革)의 정신과 이상이 확립되었는데, 이 회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전과 로마 교회의 교의적·도덕적·행정적 개혁의 필요성에 의해 열렸다. 회장(會場)이 한때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옮겨지곤 하여 장기간을 끌어 3개의 시기로 나뉘는데, 이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교회 정치적인 여러 난제(難題)를 반영하고 있다. 중요한 결정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를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한 일,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등가치(等價値)로 삼은 것, 교회가 성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 것, 구원은 신의 은혜와 인간 행위에서 생겨난다는 것, 7개의 성예전(聖禮典), 성찬에 관한 화체설(化體說)의 확인, 교회 개혁에서 직위의 겸임을 금지한 일 등이다. 가톨릭 교회는 신학적·교회적인 근본적 재조직을 하게 되었고, 근대 가톨릭 교회의 기초가 세워졌다.

대항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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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抗改革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엽에 걸쳐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로마가톨릭 교회 내부에 일어난 개혁운동.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로마에 성청(聖廳)이 설치되어 이단심문과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의한 루터주의의 배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카를 5세에 의한 시말칼덴 전쟁은 프로테스탄트 제후에 대항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대항개혁의 본 정신은 스페인적 경건(敬虔)과 교황 지상주의와의 결합으로 생겨난 로욜라의 예수회파에서 발달된 것이다. 예수회는 교황인 파울루스 3세에 의해 수도회로서의 인가를 받고 엄격한 규율과 적극적 전도와 교육활동에 의해 유럽 여러 나라에 세력을 뻗고 남부 독일의 제후를 로마로 복귀시킴으로써 실지회복을 꾀했으며, 폴란드에서도 대항개혁을 성공시켰다. 한편 트리엔트 종교회의에 있어서도 가톨릭 교회의 체제 확립에 노력하고 해외전도를 강력히 추진하여 종교개혁 세력에 대항했다.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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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atius de Loyola(1491∼1556)

예수회의 창립자이며 대항개혁의 중심 인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귀족의 아들로서 로욜라성(城)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는데,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예수의 생애와 성인의 전기를 읽었다.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기를 결의하고 만레사에 은퇴, 기도와 금욕생활로 들어갔다. 신비적 체험에서 심안이 열려 <심령수업>을 썼다. 로마에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도중 학문에 뜻을 두어, 스페인 여러 대학에서 고학했으며, 파리로 가서 사비에르 등 6명의 동지들과 예수회를 창립하고 청빈·정결, 예루살렘 순례를 맹서했다.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자 교황에게 절대복종하겠다는 봉사의 맹세를 하고 파울루스 3세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얻어 초대회장이 되었다. 수도회의 조직화에 힘쓰는 한편, 교육과 성예전(聖禮典)의 사용에 의한 교회 내부의 개혁, 새로 발견된 이교지에서의 전도, 이단과의 싸움을 통한 대항개혁 운동을 추진했다. 1622년 성자에 열성되었다.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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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Ⅷ (1491∼1547, 재위 1509∼1547)

영국의 왕. 헨리 7세의 둘째아들로 그리니지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문화적 영향을 받고 음악에 뛰어났으나 젊어서부터 신학에 흥미를 가져, 루터의 <교회의 바빌론 유수(幽囚)>를 비판하고 성예전을 변호한 논문을 씀으로써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왕비 캐서린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음을 우려하여, 캐서린이 형수(兄嫂)임을 기화로 이 결혼을 무효로 하려다가 로마 교황청과 대립, 드디어 로마와의 단절을 결의하고 의회가 왕을 '영국 교회의 보호자며 지상 유일·최고의 수장(首長)'임을 승인케 하여 영국 국교회(앵글리칸 처치)를 독립시켰다. 독립 후 일찍이 왕을 지지하였던 에라스무스주의자 토머스 모어를 멋대로 처단하고, 제2 왕비를 아들을 못 낳는다고 하여 참형에 처하였으며, 6회나 결혼을 하는 등 횡포가 심했는데, 영국의 중앙집권화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수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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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長令

영국왕 헨리 8세가 로마가톨릭 교회와 분리하려고 의회를 통과시킨 것. 영국의 국왕을 '영국교회의 지상 유일·최고의 수장'으로 하는 내용인데 여왕 메어리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 때에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회의 수장'이 아니라 '성속(聖俗) 양면의 최고 통치자'로 표현이 부드러워졌다.

이에 덧붙여 크랜머가 작성한 '보통기도서(普通祈禱書)', 더욱이 '39개조의 신앙고백'에 의해 국교회의 기초가 정해졌다.

위그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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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uenot戰爭(1562∼1598)

프랑스의 내란. 프랑스의 캘빈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위그노라고 불리고 있었다. 캘빈은 조국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발전에도 노력하여, <그리스도교 강요>를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獻呈)하였다. 그의 가르침이 귀족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캘빈주의는 정치적 항쟁으로 말려들어갔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톨릭 귀족의 두목은 귀즈가(家)였으며, 부르봉가는 정치적 위그노에 속해 있었다. 귀즈가는 프랑수아 2세의 즉위와 함께 세력을 얻었으나, 다음 왕의 모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처음에는 귀즈가를 누르기 위해 위그노 편을 들었으나 1562년 바시에서 신교도를 대량학살한 귀즈공 편에 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약 30년에 걸친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다. 1572년의 성 바돌로매 축제일의 학살은 역사상 유명한 참극으로 알려져 있다. 위그노의 세력은 차차 강해져,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내란은 일단 끝났다.

낭트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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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tes勅令

1598년에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종교상 내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낭트에서 서명한 칙령. 프랑스의 신교도(新敎徒) 위그노에 대해서 2,3개 도시를 제외하고 프랑스 전토에서의 예배의 자유와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고, 국가로부터군대와 목사를 양육하는 원조를 받았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종교적 관용을 실현한 국가가 되었으나 리슐리외는 위그노의 정치적 권력을 빼앗고 더욱이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가톨릭교로의 개종을 강요했기 때문에 수십만의 유능한 인물이 국외로 망명했다.

얀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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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is Jansen(1585∼1638)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루방대 학에서 수학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신학을 연구했으며, 대학 개혁 시대의 가톨릭 비판에 뜻을 두었다. 후에 루방 대학교수가 되어 거작 <아우구스티누스>를 저술했고, 신의 은혜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가톨릭 교회 내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에서는 뒤베르제, 아르노, 파스칼이 이 설에 동조하였고, 예수회의 교의와 도덕에 관한 비판을 하였다.

크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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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er Cromwell(1599∼1658)

영국 청교도 혁명의 중심적 정치가, 호민관(護民官). 헌팅턴의 부유한 가정에서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후,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부터 성서를 배워 열렬한 퓨리턴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에서 선출되어 의회로 나갔으며, 내란 때에는 의회군(議會軍)에 가담하여 유명한 '철기대(鐵騎隊)'를 이끌고 왕당군(王黨軍)을 격파했다. 혁명 후, 장로파와 독립파가 대립했을 때는 공화정치를 주장하는 독립파에게 의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는 처음에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론자였으나, 왕이 있으면 내란이 그치지 않고 왕도 순교(殉敎)를 각오하여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에 찬성했다. 이리하여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치가 성립된다. 그는 열렬한 청교도로서 군대에 있어서나 의회에 있어서 신앙과 정의를 존중하고, 도덕적 개선에 힘썼다.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원정, 항해조령(航海條令)에 의한 네덜란드와 영국간의 전쟁 등으로 동분서주하다가 군대의 지지로 호민관이 되었으며, 중앙집권 확립을 위해 독재정치의 경향이 강해졌다. 죽은 후 왕정복고(王政復古) 시대가 되자, 그는 국왕 살해자로 낙인 찍혀 시체를 다시 꺼내어 단죄를 받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으나 칼라일의 명저 <크롬웰의 서한과 연설>로 그의 위대성이 인식되었다.

30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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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年戰爭(1618∼1648)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간의 종교적·정치적 전쟁. 제국의 내부붕괴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가 있은 후의 종교적 동란이 원인이 되어 전란이 계속되었다. 전쟁은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의 귀족이 황제에게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킨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반란은 파르츠 백작을 보헤미아의 왕으로 맞이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의 연합국과 황제 중심의 가톨릭 연맹국 사이에 확대되어, 일단 황제 측의 승리로 끝나는가 했으나 덴마크왕 크리스찬 4세가 영국의 원조를,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는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구원할 목적으로 독일에 침입하여 국제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황제군은 명장 발렌슈타인이 강대한 용병군(傭兵軍)을 이끌고 결사적인 싸움을 되풀이했으며, 여러 나라의 군대에 짓밟혀 독일의 도시와 마을이 황폐한 것은 이 시대였다. 황제와 신교제후(神敎諸侯) 사이에 타협이 성립된 후로는, 황제인 합스부르크가(家)와 프랑스 부르봉가의 국제전쟁으로 발전하였다. 30년에 걸친 전쟁으로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600만으로 격감하고 촌락의 6분의 5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결국 베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 종결을 보았다.

베스트팔리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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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falia條約(1645∼1648)

30년전쟁을 종결시킨 조약. 회의는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두 도시에서 열렸는데, 프랑스는 뮌스터, 스웨덴과 신교 여러 나라는 오스나브뤼크에서였다. 군주(君主)의 종파에는 영민(領民)이 속한다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결의가 확인되고 캘빈파를 포함한 신교도에게 가톨릭교도와 똑같은 권리가 인정되었다.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고, 반면 신성 로마제국의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독일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청교도의 북미 이주 淸敎徒-北美移住

청교도 중에서도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박해를 만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12월, 북미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상륙하여 청교도 신앙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했다. 이들을 필그림 파더즈라고도 한다. 그 후 많은 청교도들이 이주하여 캘빈적 이념에 의한 교회와 국가의 통합이 이루어져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청교도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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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敎徒革命(1642∼1649)

영국의 왕당파(王黨派)와 회의파(會議派)의 내란에서 시작하여 찰스 1세의 처형으로 정점에 이른 정치적 혁명. 캘빈주의를 신봉하는 프로테스탄트는 영국 국교회 국가적 종교개혁을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복음주의적 여러 원리의 실현을 요구하여 국교회의 교황의 영향을 깨끗이 씻어내자고 역설했다. 이 때문에 청교도(퓨리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본래는 종교적 운동이었으나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영역에 걸쳐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신흥 중산계급이 왕후귀족이나 성직자의 횡포에 반항해서 일으킨 혁명이 되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캘빈파를 누르고, 국교회 세력을 부식(扶植)할 자금을 얻으려고 의회를 소집했으나 두개의 의회에서 선출된 청교도와 대립하고, 크롬웰 등의 항의에 부딪혀 의회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란이 되고 말았다. 의회파가 승리를 거두어 왕이 체포되니, 독립파는 왕과 타협적인 장로파를 누르고 왕을 처형하게 되었으며 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치가 확립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청교도혁명이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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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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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會議 전세계의 사교, 그 밖의 교회 대표가 모여 교의·의식·규율 등을 결정하고, 회의의 결정 사항은 모든 그리스도 교도를 구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회의. 이 회의를 가톨릭에선 공회의, 프로테스탄트에선 총회의(總會議)·대회의라고 부르고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는 787년 제2니케아 회의 후의 동서교회 분열 이래 공회의는 없다고 생각하나 로마교회에서는 제2바티칸 회의까지 모두 21회를 헤아리고 있다.이들 공회의 중 제1에서 제4까지가 특히 중요하며, 그리스도론이나 삼위일체론 등의 교의가 확립되었다. 또한 종교개혁 전후의 제16·제19회의는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로마가톨릭 교회법으로는 공회의는 교황에 의해 소집되며, 회의의 의결은 교황청에 의해 인가·공포되어야만 구속력을 갖게 된다. 투표권은 추기경과 사교 등에게 있으며, 일반 신도나 신학자에게는 없다.


공회의의 명칭과 주요의제

 


횟수


개최연대


명칭(개최지명에 따른)


주   요   의   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325

381

431

451

553

680∼1

787

869∼70

1123

1139

1179

1215

1245

1274

1311∼2

1414∼8

1438∼9

1512∼7

1545∼63

1869∼70

1962∼65


제1회 니케아

제1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에베소(에페수스)

칼케돈

제2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제3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제2회 니케아

제4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제1회 라테라노

제2회 라테라노

제3회 라테라노

제4회 라테라노

제1회 리용

제2회 리용



콘스탄스

페라라·피렌체

제5회 라테라노

트리엔트

제1회 바티칸

제2회 바티칸


아리우스주의의 이단문제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이단문제

네스토리우스파의 이단문제

유티케스주의 문제

삼장논쟁(三章論爭)

단의지론(單意志論)의 이단문제

성화상숭경(聖畵像崇敬)

포티우스의 분리문제

성직자 서임권논쟁

브레이샤의 아르놀두스, 기타

교황선거법, 기타

쿨드파, 십자군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동서 교회의 합동, 기타

템플 기사단문제

교회개혁, 후스의 처형

그리스 교회와의 합동문제

교회개혁

프로테스탄트문제, 교회개혁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 기타

교회와 신앙의 개혁

에큐메니칼 무브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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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umenical Movement

에큐메니칼이란 그리스어로 오이쿠메네, 즉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며 전세계적·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운동을 말한다. 세계교회적 경향을 가진 그리스도교의 운동은 YMCA를 비롯하여 그 밖에도 많지만 에큐메니칼 무브먼트(세계교회운동)는 세계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WCC)를 통해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회의를 효시로 하여 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본래 하나의 성스러운 공동교회를 지향하고 있으나, 동서 로마 교회의 분열과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독립 이래 종파(宗派) 대립으로부터 이질적인 교회의 분립에까지 이르렀으며, 해외 선교활동을 통해 이 결함을 깨닫고 세계교회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 '선교' 부문과 병행하여 네덜란드의 신학자 제델브롬이 교회의 세계회의를 제안함으로써 생겨난 '생활과 실천' 또한 '신앙과 직제(職制)'의 부분이 조직되었으나 이들이 194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통합되어 세계교회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회의의 주제는 '신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였으며, 1954년 에반스턴 회의의 주제는 '세상의 희망인 그리스도', 또한 1961년 뉴델리 회의에서는 '세계의 빛인 그리스도', 1968년의 웁살라 회의에서 '보라,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주제가 제시되고 있다. 뉴델리 회의에서는 러시아와 동유럽 여러 나라의 정교회(正敎會)가 정식으로 가맹하여, 문자 그대로 전세계적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제2바티칸 회의 이래, 로마가톨릭 교회와의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232개 교회, 약 80개국이 가맹하고 있으며, 회원은 3억 5천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 운동은 여러 교회나 교파를 강제적으로 통합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여러 조건 밑에서 분열된 교회가 각기 세계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세계와 인간의 현실을 교회의 책임으로 여기고 공동으로 복음 선교에 임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옥스퍼드 무브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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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Movement (1833∼1845)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국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17세기 교회의 이상을 재건하려던 운동. 그 원인으로는 국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 특히 교회생활의 쇠퇴와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擡頭)를 들 수 있다.

한편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키블이 대학에서 설교한 '국민적 배교(國民的背敎)'에서 정부의 교회축소정책을 비판한 일인데 뉴맨 등의 문필활동으로 급속히 진전하였다. 키블, 뉴맨, 퓨지, 프루드 등이 이 운동의 대표자들이었다. 그 후 자유주의 신학자나 주교(主敎)들이 반격해 와서 운동의 내부에서도 로마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뉴맨도 옥스퍼드에서 물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 운동은 끝이 났다. 이 운동은 교회의 예배와 성예전의 의식을 강화하고, 성직자의 존엄과 책임성을 강조하며 국교회를 쇄신했다. 한편 지도자들은 고대 그리스도교 교부(敎父)의 연구자이기도 하며, <교부총서(敎父叢書)>를 편집한 공적도 크다.

바티칸 공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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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tican公會議

제1회(1869∼1870), 제2회(1962∼1965). 제1회 바티칸 공회의(제20공회의)는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소집, 로마에서 열렸다. 목적은 신앙·교의·교회규율·교회법·교회의 직제·동양의 여러 교회·해외전도·교회와 속권(俗權)의 관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논의하는 데 있었다. 개회 전부터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교황 무류설을 확정하려고 하는 다수파와 영국의 뉴맨, 하바리아의 델링거 등의 자유주의적 소수파가 대립하였다.

회의에서도 대립이 계속되어 소수파는 교황의 무류성을 교회의 무류성으로 연결시키고자 애썼다. 교황의 무류성은 압도적 다수로 의결되었다. 다음날, 보불전쟁(普佛戰爭)이 발발하여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이탈리아군이 이를 점령하여 회의를 중단시키고 말았다.

회의의 의결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반대가 일어나 소(小) 그룹이 복고적(復古的)인 가톨릭주의의 입장에 섰고, 한편 교황권의 증대에 대해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文化鬪爭)이 발생했다. 교황의 수위(首位)와 무류에 관한 의논은 콘스탄스 공회의 이래 계속되어 왔으나 마침내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제2회 바티칸 공회의(제21공회의)는 교황 요하네스 23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회의의 목적은 '가톨릭의 신앙 증대와 그리스도인의 도덕 쇄신, 교회제도, 우리 시대에 필요한 규율과 보다 적합한 조건'이었다. 아시아·아프리카에서도 대표가 참가하였고 2,400명의 사교가 모여 공회의 사상 최대가 되었으며, 그리스 정교회나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신학자들, 그리고 다수의 업저버들이 초대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3회기로 나뉘어 17개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교회가 현대의 세계에 있어서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내부혁신이 이루어지고, 외부적으로는 세계교회 일치 운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세계 여러 종교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도록 결정하였으며, 한편 교회의 독신적 태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교도의 일치뿐만 아니라 전인류의 일치단결도 염원하였다.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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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ight Lyman Moody(1837∼1899)

미국의 대전도인. 매사추세츠주의 노스필드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학업을 위해 보스턴으로 갔다. 회심하여 조합교회(組合敎會)로 들어갔고 시카고로 옮겨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주일학교를 통해서 전도에 종사했다.

남북전쟁과 스페인 전쟁 때에는 YMCA의 기치 밑에 부상자에게 전도했다. 미국 국내는 물론, 3회에 걸친 영국 전도도 하였다. <생키-무디 찬송가집>도 출판하여, 리바이벌 성가(聖歌)로 사용했다.

또한 노스필드 여자신학교, 마운트허몬 남자학교를 창설했다. 복음의 설교자로서 반대세력에 굴하지 않고, 회심자(回心者)를 찾는 두려움을 모르는 그의 용감성이 성공의 원인이며, 구도실(求道室) 그 밖의 리바이벌파(派)의 방법을 써서 솔직하고 열렬하게 전도하였다. 유명한 그의 설교집은 널리 애독되고 있다.

루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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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rdes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유명한 순례지. 1858년 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스비르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그녀가 처녀임신을 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곳에 곧 우물이 생겼다고 한다.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즉시 퍼져, 신도는 떼를 지어 루르드에 모여들었다. 그 후 순례지로서 교회에서 인가한 큰 회당과 의무국(醫務局)이 생기게 되었다. 루르드에 관한 기록은 여러 책에 나와 있는데, 그 대부분은 논란(論難)하는 내용이었다. 1907년 교황 피우스 10세는 성모 마리아의 루르드 출현의 축일을 인정했다.

빌리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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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Graham(1918∼

)

미국의 전도인. 무디와 같은 대전도자의 계승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북캐롤라이나주 샬로테 근교의 농가에서 태어나 모딜카이 함이란 유명한 전도자의 집회에서 결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지금은 트리니티 대학으로 불리는 플로리다 성서학원에 입학하는 한편, 일리노이주의 휘튼 대학에서 인류학(人類學)을 전공했다. 한편 목사일을 보며 라디오 방송 등에서 활약했다. 대학을 나와서는 '청년을 그리스도에'라는 운동에 참가, 국내를 비롯한 영국·유럽 대학 등에 전도여행을 하여 많은 회중을 모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성공으로 미국 그리스도교회로부터 절찬을 받아 그의 설교는 미국 방송협회를 통해서 전국에 방송되고, 50개의 외국 방송국에서도 방송을 하고 있다. 한편 종교영화로도 '세기반(世紀半)의 십자군'을 비롯하여 여러 편을 제작하였다. 현대 미국의 신앙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이며, 영적 선물의 소유자로서 많은 회중을 모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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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가톨릭 신앙의 전통을 근대의 인식론(認識論), 비판적 역사학 등에 관련시켜 재해석하려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운동.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으나, 공통적인 프로그램은 없으며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서의 비판적 견해를 전면적으로 적용하여 성서 내의 모순을 조정하는 시도를 버리고, 성서의 기술자(記述者)가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음을 주장하여 프로테스탄트의 학자들보다 더욱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배격하고 교의보다 실천을 중요시하여 행동철학(行動哲學), 프래그머티즘을 채용하고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생명 속에서 파악하였다. 더욱이 역사의 목적론적 해석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발전을 파악했으나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자인 르와지는 하르나크를 비판한 책 <복음과 교회>를 내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영국에서는 폰 휘겔과 티렐이, 이탈리아에서는 무리가 유명하다. 교황 파우스 10세에게 이단으로 몰려 모더니즘은 단죄되었다(1907).

그리스도교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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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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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eo Ricci(1552∼1610)

로마가톨릭의 중국 전도 선구자가 된 예수회 회사(會士).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고, 19세 때 예수회에 들어가 1577년에 인도에서 전도, 1595년에는 마카오로 건너가 후에 광둥(廣東)으로 옮겼다. 1598년에 난징(南京), 1601년에는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가 이후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전도 방법은 우선 황실과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유럽의 학술공예로 신종(神宗)의 신임을 얻고,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 고관·학자들을 교화시켜 중국인의 상제숭배(上帝崇拜)·조상숭배 등을 이용해서 전도했다. 중국어를 잘하여 <천주실의(天主實義)>·<기하학원본(幾何學原本)> 등을 내었고, 사상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저서는 쇄국(鎖國)중 일본에도 흘러 들어갔다. 신종은 그의 죽음을 국장으로 대접했다. 사망 당시의 중국인 신도는 2,500명에 달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예수회 수사(修士)들은 천문·지리·어학·수학 등의 학문으로 명조(明朝)에 봉사했다.

서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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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光啓(1562∼1633)

영명(靈名)은 요한이다. 명조 말기의 그리스도 교도이며 학자로 상하이(上海) 교외의 서가회(徐家匯) 출신으로 진사(進士)·상서(尙書)·대학사(大學士)가 되었다. 1601년에 예수회 회사(會士)인 마테오 리치가 신종 황제에게 접근하자 그에게서 유럽의 학술을 배우고, 1603년에 세례를 받아 가톨릭 교도가 되었고 천문·역학(曆學)·수학 등을 연구했으며, 리치와 <기하학원본>을 공역(共譯) 출판했다. 오랫동안 중국 가톨릭 교회의 주석(柱石)이었고, 마테오 리치의 전도를 용이케 한 공로자였다.

전례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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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禮問題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도와 중국의 전통·습관 문제에 관한 논쟁. 마테오 리치를 통해 중국에 전도를 한 예수회는 유교를 용인(容認)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을 천주 또는 상제라고 불렀으며 공자를 숭배하는 의식을 인정, 중국의 전통·습관 사이의 마찰을 피하고, 나아가서는 학술공예 등 문화적 공헌으로 명조·청조에게서 우대를 받아 전도를 독점하여 왔다. 리치가 죽은 후 1632년에 도미니크회, 1633년에 프란체스코회가 필리핀에서 중국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스페인령인 필리핀에서는 전혀 종래의 습관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회의 전도 방침에 반대하였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스페인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예수회는 이탈리아인과 포르투갈인을 주로 하고 있었던 관계로, 수도회의 세력다툼과 민족감정 대립이 생겨 유교의 습관을 어느 정도 용서하는가에 대해 100년간 논쟁이 전개되어 중국 전도사상 전례문제로 큰 사건이 되었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로마교황에게 호소하고 특사(特使)인 톨논은 1705년 강희제(康熙帝)에게 그 주장을 상주했으나 각하(却下)되었으며 톨논은 마카오에서 옥사했다. 이리하여 불리해진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이 문제에 대해 교황의 재결(裁決)을 요구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도미니크회·프란체스코회의 주장을 지지하고, 예수회 쪽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재결을 내렸다. 문제는 이것으로 해결된 듯이 보였으나 대청제국(大淸帝國)으로서는 교황의 금지명령이 자국(自國) 내에 미치게 되므로 이를 주권의 침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692년에 공인한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도의 자유를 취소하고 허가제(許可制)로 하였으며, 전례문제에 관해 강희제의 훈령(訓令)을 받드는 선교사에게만 체재(滯在)와 전도를 허가하고 그 밖에는 국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여, 여기서 중국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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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片戰爭(1840∼1842)

영국이 중국에의 아편 밀수를 보호함으로써 발발한 전쟁. 18세기 이래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고 있었던 영국은 수입의 격증으로 인한 은(銀)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도에 면제품(綿製品)을 수출하고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는 3각무역(三角貿易)을 시키고 있었다. 청조(淸朝)는 아편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아편 중독이 퍼지고 은은 대량으로 유출되어 국가재정에까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1839년 임칙서(林則徐)를 광둥(廣東)으로 파견하여 이를 단속케 했고, 그는 영국 상관(商館)의 아편을 몰수하여 소각해 버렸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16척의 군함과 4천명의 병사를 보냈으나 광둥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베이징(北京)에 가까운 백하(白河)에 육박했으며 또한 상하이(上海)·전강(鎭江)을 점령하자 청조는 난징조약(南京條約)을 맺고 홍콩을 할양(割讓)했으며, 상하이·광둥 등 5대 개항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러한 사태는 더욱 발전하여 추가조약으로 주룽반도(九龍半島)의 조차(租借)가 성립되었고, 미국·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도 치외법권(治外法權)과 조계(租界)를 승인하는 결과가 되어 중국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가 시작되었다.

태평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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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天國

만주인의 중국 지배 반대와 한인 관리·지주·호상(豪商)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혁명. 아편전쟁의 실패와 광시성(廣西省)의 기근 등 천재(天災)로 사회 불안이 증대했을 때, 일찍이 상제회(上帝會)라는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고, 그리스도교 서책의 영향을 받아 예언·신유(神癒), 아편과 술의 금지를 주창하고 있던 광둥성 화현(花縣) 출신의 홍수전(洪秀全)이 1851년에 태평천국을 세운다고 선언하고 광시성에서 병사를 일으켰는데, 이에 빈농·비적(匪賊)이 가담하여 1853년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장발(長髮)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장발적이라고도 한다. 당시 간행된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이용해서 홍수전은 신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칭했다. 처음에는 군율(軍律)이 바르고 가난한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1856년에 내분이 일어나 계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때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 이홍장(李鴻章)의 군사가 청조의 정규군(正規軍)을 대신하여 태평천국군을 각지에서 격파하고 영국인 고든의 상승군(常勝軍)도 이에 가담하여 1864년 난징은 함락되고 홍수전이 자살하자 태평천국(太平天國)은 멸망했다.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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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orrison(1782∼1834)

중국 전도의 선구자로 중국명은 마예손(馬禮遜). 영국의 노덤벌랜드에서 태어나 1807년 런던회의 선교사로서 광둥으로 가, 얼마 후에는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되었다. 당시에는 광둥만의 통상이 인정되고 있었는데, 외국상인은 마카오에 살며 광둥으로 출장을 나갔다. 그는 광둥에 숨어 살면서 중국어를 배웠으나 건강을 해쳐 마카오로 돌아왔다. 여기에서도 포르투갈 정부가 프로테스탄트의 전도를 꺼렸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어려웠으나 성서의 중국어역을 시도, 1813년에 <신약성서>를 완전히 번역하고 그 후 밀른(W.Milne)과 협력하여 1822년에 구·신약성서의 중국어역을 완성하고 이를 말라카에서 간행했다.

귀츨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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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1803∼1851)최초의 루터파 중국 선교사로서 중국 이름은 곽실렵(郭實獵) 또는 선덕자(善德者). 독일의 폰메른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신학과 의학을 수학하고 모리슨에게 동양 전도의 권고를 받아 1826년 네덜란드 전도회에서 파견되어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본 전도를 뜻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있던 메드하스트와 가까이 지내며 일본 전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후에 싱가포르·방콕에 전도, 마침내 전도회(傳道會)를 떠나서 1831년 중국에 상륙했다. 그 후에는 마카오에 옮겨 살았는데 여러번 오지여행(奧地旅行)을 시도했고, 제3회째는 광둥·푸저우(福州)·조우산열도(舟山列島)·톈진(天津)·타이완(臺灣)·한국·만주·오키나와를 돌았다. 그는 마카오에서 표류(漂流)한 일본인 선원이나 어부로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1837년 이 표류민을 반송하는 배에 편승했으나 상륙할 수가 없어 다시 마카오로 돌아갔다.

그는 일본인 선원의 도움으로 <약한복음지전(約翰福音之傳):요한복음>과 <요한 제1·제2·제3서>를 싱가포르에서 출판했다. 또 메드하스트와 협력하여 모리슨역 성서를 개정(改訂)하고, 더욱이 혼자 힘으로 중국어역 성서를 완성했다. 그는 어학에 뛰어나, 26종의 동양어를 말할 수 있고 54종의 전도문서(傳道文書)를 내었다. 그가 마카오에서 통역관을 하고 있을 때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전후에는 조우산열도의 행정장관(行政長官)이 되었으며, 1843년에는 홍콩 정부의 상무관을 거쳐 화민정무사(華民政務司)라는 고관까지 지냈으나 평생을 전도에 몸바치고 홍콩에서 죽었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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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udson Taylor(1832∼1905)

영국의 선교사. 중국명은 대덕생(戴德生). 영국 요크셔 지방 번슬리에서 태어났다. 중국 전도회의 선교사로 1854년 상하이에 도착, 상하이·닝보(寧波)에서 어려움과 싸우며 문서전도를 시작했으나, 한때 건강을 해쳐 귀국했다. 1865년 또다시 중국 오지에 전도하려고 초교파적 중국내지회(China Inland Mission)를 조직하여 협력자들과 함께 항저우(杭州)·양저우(楊州)를 비롯한 넓은 땅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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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Livingstone(1813∼1873)

남아프리카에 전도한 영국의 선교사·탐험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근처 블랜티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동을 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중국 전도를 위해 런던 전도회로 들어갔으나 아편전쟁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동안 의학·천문학·지질학·동식물학을 수학했다. 모파트의 권유로 아프리카 전도를 뜻하고, 28세 때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1853년부터 시작된 여행에서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인을 사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도왔으며, 또 풍부한 학식으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1858년부터 6년에 걸친 여행 때에는 영국 영사(領事)의 자격으로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해안으로 가는 통로와 전도지(傳道地) 발견에 힘썼다. 제3회 때는 혼자서 나일강의 수원(水源)을 탐험하려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1871년에 미국의 탐험가 스탠리(H.M.Stanley)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그대로 여행을 계속하다가 치탐보에서 죽었다. 아프리카의 암흑세계에 광명을 가져다 준 사도(使徒)로 불리며, 그의 활동으로 영국 안에서 아프리카 전도의 기운(機運)이 일어나게 되었다.

근대 그리스도교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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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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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ise Pascal(1623∼1662)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신학자. 법복귀족(法服貴族)의 일원이며, 징세관(徵稅官)의 아들로 클레르몽에서 태어났다. 후일에는 파리로 옮겨 살았는데, 수학자인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여 16세의 나이로 <원추곡선시론(圓錐曲線試論)>을 저술하여 수학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더욱이 파스칼의 원리(수압기의 원리)를 발견했다. 부친에게 신앙의 대상과 이성의 대상은 다르다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1646년 얀센주의의 영향으로 제1회 회심(回心)을 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포르루아얄 수도원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다른 한편 과학 연구와 파리 사교계에서 즐겼다. 1654년에는 '결정적인 회심'이 생겨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신이 아닌' 신을 발견하였고, 이듬해 파리 교외의 포르루아얄 드 생에 잠시 은퇴했으나 은둔자(隱遁者)가 된 것은 아니다. 1655년 대(大)아르노가 소르본의 신학자에 의해 단죄(斷罪)되자, 그는 예수회파를 공격한 문서로 이루어진 <시골 사람에게 주는 편지>를 써 은혜에 대해 쉽게 논하였으며, 방종한 도덕을 비판했다. 그의 주저(主著)인 <팡세(명상록)>는 이에 앞서 쓰여진 미완성의 단편적 초안으로 그의 사후에 편집된 것인데, 과학적 시대정신의 무관심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변호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포르루아얄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그늘 밑에서 성장하여 인간 자체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모럴리스트의 입장에서 발언한다. 즉, 위대함과 불행의 중간에 선 인간의 비참함을 지적하고, 여기에서 도망하여 기분을 전환하든가, 신앙에 의지하여 해방되든가의 어느 쪽임을 역설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洞察), 신앙모험(信仰冒險) 강조 등은 체험과 풍부한 사색의 결과이다. 그는 세계를 '3개의 질서'에서 관찰하고, 권력자가 지배하는 물체적 세계 위에 학자가 지배하는 정신의 세계, 또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사상인 사랑의 세계를 세우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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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1703∼1791)

영국 메서디스트 교회의 창립자. 영국 국교회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학료(學寮)에서 배웠다. 그 후 동 대학의 학생 지도교사가 되는 동시에 부친의 교회 부목사(副牧師)로 일하는 한편, 동생인 찰스와 신앙인의 학문적 집회 '성령클럽', 별칭 '메서디스트'를 조직했다. 1735년 동생과 함께 선교사로서 북미의 조지아로 출발했으나, 이 전도는 실패했다. 그 동안에 모라비아 형제단(兄弟團)의 영향을 받아 루터의 저서에 의해 회심하고, 신앙에 의한 의(義), 선물로서의 성화(聖火)를 이해하고, 살아 있는 실천적 종교와 영혼 속에 하느님의 생명을 육성하는 것이 목표임을 공언(公言)하였다. 국교회에서 쫓겨나 킹스우드의 탄광부에게 가두에서 설교를 하여 성공했다. 위대한 설교자·전도여행가이며, 그의 <설교집>·<신앙일지>는 유명하다. 신앙에 의한 하느님의 인도 아래, 사랑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을 역설했다. 그가 죽은 뒤 메서디스트 교회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슐라이어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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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

독일 현대신학의 아버지. 브레슬라우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경건주의(敬虔主義)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할레 대학에서 수학하고 베를린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낭만주의 문학가와 친교를 맺었고, 계몽주의 정신에 대해서 종교를 변호한 <종교론>을 썼다. 이것은 교양 있는 사람들을 종교에 귀의(歸依)시키려는 시도이며, 종교를 직관(直觀)과 감정에 바탕을 두게 하여, 교의로부터 해방되어 무한자와 일치된 감정이 일어나는 고차적(高次的)인 실재주의(實在主義)를 역설하고 있다. 그는 할레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고, 그 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대에 조직신학(組織神學)의 대저(大著)인 <신앙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에서는 종교란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예수에 의한 구제론(救濟論)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신앙의 내면적인 심정을 강조한 점에 그의 신앙론의 특징이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금세기의 바르트나 브룬너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플라톤의 번역도 유명하다.

바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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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Christian Baur(1792∼1860)

독일의 신학자. 튀빙겐학파의 창립자. 대학에서 신학을 수학한 후 브라우보이렌에서 역사와 언어학을 가르쳤으며, <상징과 신화(神話)>를 썼다. 1826년 이래 튀빙겐 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어 수많은 업적을 쌓아갔다. 초기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헤겔의 역사관에 의거하여 원시 그리스도교에 독자적인 해석을 내렸다. <사도 바울의 이른바 목회서한(牧會書翰)에 관한 여러 고찰>에서 비로소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를 신약성서에 적용시켰다. 원시 그리스도교를 방향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념간 싸움으로 표현하고, 이들 이념의 종합이 가톨릭 교회라고 하였다. 이와 똑같은 원리를 그는 그리스도교의 교의사(敎義史)에 적용했다. 이리하여 <화해론(和解論)>·<삼위일체론>·<그리스도교 교의사 교본(敎義史敎本)>이 나오게 되는데 그의 서술 방법은 체계적이 아니고 역사적이며, 현대 교의사의 창조자(創造者) 중 1인으로 되어 있다.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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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ren Kierkegaard(1813∼1855)

덴마크의 실존적 철학자. 그리스도교적 저술가. 부유한 모직물상의 아들로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고독하고 불행한 소년시대를 보낸 다음, 그곳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국가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어느 고관의 딸인 레기네 올센과 약혼했으나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얼마 후 약혼을 파기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성이라는 형태로 그의 저작생활이 시작된다. 1843년에 완성된 <이것이냐 저것이냐>·<공포와 전율>·<반복(反覆)>등에는 자기 체험의 심각성이 표현되고 있다. 자신의 생활체험에서 생겨난 독자적인 사상은 그를 현대 제1급의 철학자로 만들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지방어인 덴마크어가 장애가 되어 오랫동안 그의 존재가 알려지지 못했었다. 1846년 신문 코르사렌에 의한 인신공격이 계기가 되어 그의 사회비판서 <현대의 비판>이나 덴마크 국교회를 비판한 <순간(瞬間)>등이 발간되었다.

그는 가장 주체적인 사상가였으며, 그의 저작은 미적(美的)인 것으로부터 윤리적인 것으로, 더 나아가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선 낭만적 신비주의를 비윤리적·미적인 것으로 보았고, 나아가 헤겔적 사변(思辨)과 대결하여 종교적·윤리적 실존의 입장을 강조하였으며, 단독자(單獨者)를 역설함으로써 그의 입장이 확립된다. <철학적 단편>·<철학적 단편 후서>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저서이다. 죄와 속죄를 테마로 하여 심리학적으로 깊은 통찰을 한 저서로는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다.

철학적 저작과 대비해 보면 그의 순수한 그리스도교적인 작품과 설교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는데 실제적으로 이들 작품은 신앙상 큰 가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나 십자가의 의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았다. 교회는 문화적 낙관주의 밑에 자신을 배반하고 있다. 참다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질적 차이, 죄의 철저한 인식, 예수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의 변증법신학,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하르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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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 von Harnack(1851∼1930)

독일 최대의 교회사가(敎會史家)·신학자. <루터신학>이란 명저를 내어 알려져 있는 테오도시우스 하르나크의 아들이다. 라이프치히, 기센, 마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다. 50년 이상의 긴 연구 업적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탁월한 교부학(敎父學) 관련의 여러 연구이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학사의 텍스트와 연구>지(誌)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교의사 교본(敎義史敎本)> 3권의 대저(大著)를 내었다. 이 서적은 그리스도교의 교의사를 종교개혁 때까지 고찰한 것인데, 특히 초기 교의사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이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 잘 표현한 것으로서, 교의의 성립을 '복음의 헬레니즘화'라는 그리스 정신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1900년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출판하여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측면을, 특히 교의적인 것을 배제하고 인류의 형제애(兄弟愛)를 주장했으며,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교를 역설하여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밖의 저서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문학사> 4권, <초기 3세기의 전도사>, <마르키온> 등이 있다.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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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Tillich(1866∼1961)

미국의 신학자·종교철학가. 독일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베를린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고, 독일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활약했으나 나치를 비판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 1933년 미국에 이주, 뉴욕시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서 철학적 신학을 강의했다. 틸리히의 사상은 현대의 정치적·역사적 현실에의 깊은 관심으로부터 생겨났으며, 더욱이 미국적 시야의 넓이와 이론과 실천과의 상호적 의존(依存)에 의해 이를 전개하고, 동시에 실존주의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학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영원한 진리의 규범과 변화하는 역사적 현실의 여러 문제 사이를 조정하는 데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 양자가 접촉하는 경계선상에서 사색을 전개한다. 철학은 인간의 역사적 실존의 해명으로 여러 가지 궁극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적인 사신(使信) 속에서 주어져 있는 것이 신학의 해답이다. 그리고 철학의 질문과 신학의 해답 사이에는 상호 의존 관계가 있으며, 여기에 서서 신학사상을 전개하는 그의 방법은 '호응(呼應)의 방법'이라 불리고 있다.

이리하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탄생한다. 그가 속해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는 신율(神律)이라고 역설된다. 그것은 세속적인 휴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자기만족적 자율문화(自律文化)나 중세 후기의 가톨릭에서 볼 수 있는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과 같은 타율문화(他律文化)와 대비된다.

신율(神律)이란 실존(實存)의 구극적 의미가 사상이나 행동의 모든 상대적 형(形)을 통해서 빛나는 문화이다. 또 역사의 종교철학적 해석으로서 카이로스(Kairos:瞬間時)가 영원에 의한 시간의 충실과 역사의 의미의 중심으로 설명된다. 주저(主著)에는 <조직신학(組織新神)> 3권이 있고, 그 밖에 종교·철학·문화·역사 윤리에 대한 심오한 사상을 전개하여 현대적 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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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Schweitzer(1875∼1965)

독일의 신학자·철학자·의사·오르가니스트. 알사스 지방 카이저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하고, 베를린과 파리에 유학했다. 1899년 <칸트의 종교철학>으로 학위를 얻은 이래 스트라스부르에서 목사로 봉직하는 한편, 1901년 <메시아와 수난의 비의(秘義)>를 발표했다. 예수의 설교는 세계의 종말을 확신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고 보고, 철저하게 종말론을 역설했다. 그 후 신학 강사가 되었으며, 1906년에는 <예수전 연구사>를 발표하여 지금까지의 예수전 연구를 비판하고, 예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후기 유태교의 종말론을 바탕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논하였다. 1911년에는 이와 같은 종말론의 원리를 바울 신학에 적용시켜 <바울 연구사>를 펴냈다. 같은 해에 의학 국가시험에 합격,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인 람바레네의 의료전도(醫療傳道)에 종사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1921년에는 <물과 원시림(原始林) 사이에서>를 출판하였다. 의료전도를 하면서 <문화철학>(1923년)을 펴내어 이를 통해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에 입각한 윤리사상을 발표하고, 더욱이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1927년)에서는 바울의 설교 중심점을 그리스도와 신도와의 결합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를 중개(仲介)하지 않은 신비주의와 이를 구별했다. 세계평화에 공헌한 공적으로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또한 뛰어난 바흐의 연주가이며 연구가로서 1905년에는 명저 <바흐>를 출판했다.

그의 신학상의 학문적 업적은 학계에 광범한 영향을 주어, 예수의 인격에 대한 그의 사상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프리카에서 의료전도에 종사하면서부터 차차 문화나 윤리에 대한 사상이 깊어져 '생명의 외경' 윤리를 역설하게 된다. 인간 및 세계는 살려고 하는 의지에 의해 긍정되며, 이 의지를 어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이 윤리여서,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선이며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악이다. 그리고 문화의 본질이란 바로 '생명에 대한 외경'이 인간들 사이에 침투하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이러한 그의 사상의 표현이다.

볼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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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Bultmann(1884∼1976)

독일의 신약성서학자. 올덴부르크의 비펠스테데에서 태어나 마르부르크·튀빙겐·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고 마르부르크대학 강사, 브레슬라우, 기센을 거쳐 마르부르크 대학 신약학(新約學) 교수가 되었다. 종교사학파의 연구 방법을 배우고 디벨리우스와 함께 공관복음서의 양식사적 연구를 추진하여 극단적인 회의론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공관복음서 전승의 역사>에서 복음서 자료의 상세한 연구를 행하여 유명해졌다. 마르부르크의 동료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양식사적인 연구와 실존적 사상과의 결합이 <예수>에 명시되어 있다.

복음서의 전승은 원시 그리스도교단의 신앙의 소산으로서, 예수 자체의 역사에 힘입은 바는 적고, 그의 생애를 구성하는 데는 불충분하다. 역사 연구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는 우리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실존적 역사 해석에 전향(轉向)된다. 예수는 제자들을 하느님에의 결단과 복종에로 이끄는 사명을 가지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업(業)이 경시되어 있다.

제2차대전 후, 볼트만은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선교의 실존론적 해석을 비신화화(非神話化) 방법에 의해서 행할 것을 주장했다. 성서의 서술이나 사건(예를 들어 處女降誕)이 신화적인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 이야기 전체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우주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복음서의 세계는 하늘과 땅과 명부(冥府)의 3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만일 신화적 요소가 배제된다면 복음서 역사의 참다운 의미가 명확해진다. 즉 선교 내용을 순수하게 파악하고, 실존철학의 도움을 빌려 우리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독일 및 유럽 신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종교사적인 방법을 구사하면서 실존론적 해석을 적용한

<요한복음서> 주해나 신약 연구의 체계적 성과를 가진

<신약신학(新約神學)> 등의 뛰어난 업적이 있으며, 논문집 <신앙과 이해>도 4권이나 있고 이 밖에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강의 <역사와 종말론> 등의 저서가 있다.

고가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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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Gogarten(1886∼1967)

독일의 대표적 신학자.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신학을 배우고 목사로 봉직한 후 1927년에 예나 대학, 1935년 이후에는 괴팅겐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트뢸치의 역사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가담했으며, 그 정신에 의거하여 문화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창했다. 그는 독일 관념론의 철학, 특히 피히테 철학의 비판과 루터 연구를 토대로 하여 날카로운 신학적 사색을 전개하고, 후에 신학을 인간학 위에 세우게 되어 바르트와 헤어졌다. 진실로 역사적인 일은 자아(自我)가 구체적으로 '그대(汝)'의 무조건적인 여러 요구를 받아들일 때, 즉 신앙에 순종함으로써만 생긴다고 했다.

인간은 하느님과 세계의 사이에 서 있으며, 역사적인 상황 아래 조직적인 힘을 갖는 세계 속에서 복음에 의해 신을 신으로 받듦으로써 세계의 여러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 그는 세속적인 문화 속에서 복음에서부터 문화에로의 관계를 논하였다. 저서로는 <나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다>·<하느님과 세계 사이에 있는 인간> 등이 있다.

브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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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Brunner(1889∼1966)

스위스의 변증법 신학자. 취리히 근처의 빈터투르에서 탄생했다. 취리히와 베를린에서 수학하고 목사를 거쳐 취리히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다. 카알 바르트의 주요 지지자 중 한 사람이며, 종교에서의 내재주의(內在主義)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1934년의 <자연과 은혜> 이래 바르트와 대립했다.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에게는 응답책임(應答責任)이라는 자연적 소질이 있어, 이것이 신과 인간의 결합점이라 한다. 오직 하느님에게만 주체성을 인정하려는 바르트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성도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해후점(邂逅點)의 진리>에서 그는 신과 인간의 접촉에 있어서의 인격주의적 사유(思惟)에 따라 성서의 진리적 성격을 논하였고, 3권의 <교의학>에서는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학·윤리학·교회론으로 되어 있다.

니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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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hold Niebuhr(1892∼1971)

미국의 신학자. 미주리주 라이트 시티에서 태어났다. 이든·예일 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1915년에는 디트로이트시 복음교회 베텔의 목사가 되었으며, 1928년에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초대되어 그리스도교 윤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현대 미국의 종교개혁적 신학의 부흥자로서 '살아 있는 예언자적 그리스도교'를 해명하고,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올바르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디트로이트의 근대 산업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사회문제의 고찰과 연결된 사회적 윤리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적 신앙을 현대사회에 적용시켰다.

그 때문에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바르트에게 반대하여, 그리스도교는 문화에 대해 직접 예언적 사명을 갖는다고 역설했다. 주요 저서로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기포드 강의)이 있으며, 그 밖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 적사회>·<그리스도교 윤리>·<신앙과 역사> 등이 있다. 그의 영향은 아주 커 미국의 정치·외교에까지 미치고 있다.

본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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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trich Bonhaeffer(1906∼1945)

독일의 목사·신학자. 프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베를린 대학의 정신병리학 교수였으며, 신앙과 학문의 명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21세에 베를린 대학의 신학부에 <성도(聖徒)의 교제>를 제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동 대학 강사가 되었고, 그동안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곧 그의 반(反) 그리스도적 성격을 간파하고 교회투쟁으로 들어갔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교회 일에 종사하는 한편, 히틀러에 대한 지하 저항운동과 암살계획에도 참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학문상으로는 그리스도교 윤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교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기를 지향하는 윤리학을 역설했다. 그리스도는 교회 속에 있으며 그 우두머리일 뿐 아니라 세계의 주(主)이며, 신이 없는 세속세계의 주이기도 하다고 역설했다. '성인(成人)이 된 세계'·'깊은 이 세성(世性)'·'저항과 신종(信從)' 등 주목할 만한 사상과 문제를 그는 전후의 교회에 주었다. 주저로는 <윤리>·<복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