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그리스도교/그리스도교의 사상
그리스도관
편집복음
편집福音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온 하느님으로부터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이 말의 유래는 <구약성서>의 전통과 그리스인 사이에서 쓰여졌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과 신(神)인 동시에 구세주이며, 따라서 그 탄생·즉위(卽位)가 이 세상을 구하는 복음이라는 생각은 고대 동방(東方) 전체에 통하는 것으로 <구약성서>에서의 메시아(구세주) 대망도 같은 흐름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예수의 출현, 그의 생(生)과 사(死), 그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며 복음으로 되어 있다. 왜냐 하면, 오직 그만이 인류의 근본적 불행인 하느님과의 불화를 제거하고 인간 생존의 궁극적 의미를 명시하였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먼저 유태인에게 전술(傳述)되었으며, 그 후에 이방인(異邦人)에게, 특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使徒)라는 자각을 가지고 율법과 대립시키면서 복음의 파악을 심화시켰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특히 그 죽음과 부활에 연결된 구원의 일이었다.
기적
편집奇蹟
일반적으로는 기지(旣知)의 자연법칙이나 경험적 사실을 초월한 이상(異常) 현상, 특히 신들이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힘의 작용을 말한다. 예로부터 종교·전설속에는 마술적·환상적인 기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예수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기적을 경계·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에 예수 자신이 행한, 또는 그에게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기적들을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든가 현대인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해 처리한다는 것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기적은 해석되기에 따라, 즉 <성서(聖書)>의 저자가 어째서 이를 기록하고 또 그것에 의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를 탐구함으로써 적절한 취급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 중 어떤 것은 본래 비유(比喩)에서 변형(變形)되어 발전한 것이며, 또 어떤 것은 원시교회의 신앙적 요청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오늘날과 같은 기사(記事)로 형성된 것이다.
재림
편집再臨
재림의 원어는 그리스어의 '파루시아'로서 '도착(到着)' 또는 '내방(來訪)'의 뜻인데,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부활·승천(昇天)한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속에 또다시 내림(來臨)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마 예수의 죽음을 경험한 원시교회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기대라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희망은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림의 시기나 양상(樣相), 그리고 기대의 강약에 관해서는 똑같지 않았으나,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적·윤리적 준비를 해야 한다는 확신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러한 원시교회에 있어서는 재림의 희망도 그 지연으로 차츰 엷어지고, 이것은 다음 시대의 교회의 제도화·조직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재림의 절박성을 강조하고 열광적으로 이를 기대하는 가르침이나 운동은 그리스도교 사상 가끔 나타난다.
부활
편집復活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3일만에 되살아난 신앙고백을 말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행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과(罪過)를 씻기 위한 죽음이라고 한다면, 부활이야말로 인간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에 의해 하느님 스스로가 생명과 죽음의 주(主)임을 계시했다고 <성서>에서는 말한다. 바울도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선교(宣敎)는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그 스스로가 부활한 그리스도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 어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는 <성서>상으로도 일정하지 않으나 ―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계기가 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속죄
편집贖罪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이나 순교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스스로는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갔다는 신앙고백을 말한다. 속죄한다는 말의 원어는 옛날 노예나 포로를 몸값을 치르고 찾아오는 경우에 쓰여졌으며, 거기에서 전용되어 '해방한다'·'자유를 준다'는 뜻도 되며,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말해주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성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죽음이 속죄의 죽음임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원시교회는 예수의 고난의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의 죄와 죽음이 정복되고 완전한 승리자, 영광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속죄는 하느님의 독자적인 사랑의 행위이며 하느님과 신앙인과의 교류를 회복·강고(强固)히 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중핵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육
편집受肉
'탁신(托身)' 또는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예수는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인데 육체를 취하여 인간이 된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말한다. 수육의 교리(수육론)는 교리사상(敎理史上)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념,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육(肉)을 받은 것이라는 신앙은 이미 <성서>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의 인격은 예언자, 메시아(그리스도), 주(主)라고도 불렸다. 또한 그는 당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분, 즉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이 육체로 변한 분이라고 지칭(指稱)됨으로써, 고대 세계나 황제예배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성(神性)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신성(神性), 또는 그의 선재성(先在性)을 뜻하게 되었다. <성서>는 수육에 대해,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죄의 구원을 위해 또는 신앙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하느님의 아들의 수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능케 하는 인격에 대한 철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처녀강탄
편집處女降誕
예수의 탄생은 보통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성령(聖靈)에 의해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기사는 <신약성서> 중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다.
처녀강탄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영역에서도 여러가지 형태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 두 복음서의 저자는 이 기사에 의해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말하려 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있어서는 하느님 아들의 수육이 주요 내용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처녀강탄은 그 수육신앙(受肉信仰)의 독자적인 한 형상(形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처녀강탄에 관해서는 수육신앙의 단순한 시적(詩的)·회화적(繪畵的)인 표현으로 보고 그 역사성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으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사도신조(使徒信徒:근세 이후 그리스도교 각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신조)나 니케아 신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신앙이 일반적으로 수용(受容)되며, 그 후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거기서부터 여러 가지 마리아 숭경(崇敬) 풍습이 생겨났다.
로고스
편집Logos
'말씀' 또는 '이성(理性)'의 뜻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지칭하고 있다. '로고스'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수태고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마리아. 세계 또는 유태교에서도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관철하는 원리적 존재, 신과 세계와의 중개적(仲介的) 존재 등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특히 그리스도교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유태인 철학자 필론(Philon)의 경우, 로고스는 영지적(英知的) 세계로서, 또한 하느님의 첫아들·대제사장(大祭司長)·중보자(仲保者) 등의 호칭으로 나타나며, 여기에서 유태와 그리스의 두 사상에 의한 조화적(調和的) 파악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사적(史的) 인격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이 점은 종래의 모든 로고스 사상과 구별되어도 좋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에서 로고스는 인류 구제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으며 사적(史的) 예수가 동시에 영원한 하느님의 로고스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론적(宇宙論的)·사변적(思辨的) 관심 위에 서서 로고스를 범신론적(汎神論的)인 또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오히려 비(非)그리스도교적인 파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로고스·그리스도론으로서의 교리 형성은 2세기 이후에 속한다.
성령
편집聖靈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령은 일반적으로 아버지인 신(神)과 아들인 신과 함께, 살아 있는 하느님으로 간주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영(靈)'이란 본래 기식(氣息)이나 바람을 뜻하며, '말씀'과 함께 하느님의 창조의 연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즉 영(ruah)은 말씀에 수반되는 기식처럼, 자연이나 인간에게도 참다운 생명을 불어 넣는 하느님의 '기식'이었다. <신약성서>에서의 성령에 대한 사고방식도 이와 같은 하느님의 기식을 배경으로 심화(深化)·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생애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지탱되어 왔다고 말하여지듯이, 성령이란 실은 하느님의 힘이었다. 한편 성령은 예수가 생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또다른 구원주'이기도 하며, 이는 예수가 죽은 후 그를 증명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영(靈)으로서, 교회도 여기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성령(聖靈)은 삼위일체의 교리에 있어 아버지와 아들에 이어 제3의 신격(神格)이 되었고, 또한 이 성령 문제는 후일 동서 두 교회 분리의 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령발출논쟁(聖靈發出論爭)'을 야기시켰다.
삼위일체
편집三位一體
하느님은 성부·성자·성신이라는 3개의 위격(位格:Persona)과 하나의 실체(實體:Substantia)에 있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주요한 교리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 교리 가운데 형성은 원시교회 시대 이후에 속하며, 이의 용어 <트리니타스(trinitas)>도 테르툴리아누스의 조어(造語)라고 하는데, 그 근저(根底)인 삼위일체적 신앙은 이미 <신약성서> 속에서 볼 수 있다. 즉, <성서>가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에 의해 스스로를 계시하고 구제행위를 한다고 말하고 있는 한, 그 3자는 서로 나뉠 수가 없으면 하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깊고 명석한 신학적 표현을 내린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였으나, 이미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 있어서 '창조되지 않은, 동질(同質)인, 함께 영원한 삼일'이라는 삼위일체론이 일단 확립되었다.
그리스도론
편집Christ論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특히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관계에 대한 신학 이론을 말한다. 소위 그리스도론의 고전적 교리는 451년의 칼케돈 공회의에서 일단 확립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성·인성을 모두 완전히 갖추고 양자는 서로 융합되거나 혼동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의 맹아(萌芽)는 이미 <신약성서> 속에서 볼 수 있으며, 예수는 누군가 하는 물음에 대해 <성서>는 여러 형태로 신앙적 이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 이해는 교회의 성립과 성장에 따라 차츰 신학적·그리스도론적인 형태로 정리되어 갔으며, 특히 그리스도교회가 유태인에서 이방인으로 발전되어 갔을 때 이 그리스도의 이해도 지금까지의 메시아적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로고스의 수육(受肉)이라는 표현을 가능케 할 만큼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론은 신이며 사람인 예수의 인격 비밀에 대한 신앙고백에 뿌리박은 것이며, 그 고백의 기반은 그리스도교도의 공동체인 교회에 두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성장·발전에 따라 각 상황을 반영하는 그리스도론적 표현이 생겨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시교회의 그리스도론은 아직 후대(後代)의 교리나 논쟁의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때 이미 그리스도론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의 초대교회는 실로 눈부신 여러 가지 그리스도론의 출현과 논쟁의 시대였는데, 그리스도론의 결정이 교회의 원동력인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의 결정인 이상 교회의 조직이 형성도상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과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 교회가 이른바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확립하기까지는 갖가지 어려운 우여곡절과, 또한 교회 내외의 정치적 영향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단시된 그리스도론의 대부분은 "하느님이자 인간이다"라는 성서적 그리스도의 이해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고 인성(人性)을 부정하며, 또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택하고 신성을 배척하는 둘 중의 어느 한 흐름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 후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리스도론은 대부분 칼케돈의 고전적 교리의 노선을 따른 신학적 변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신 관
편집신
편집神 여러 종교의 신앙 대상이 되고 있는 성스러운 실재는 인격적인 것과 비(非)인격적인 것, 애니미즘적인 것과 마나이즘적인 것의 두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격적·애니미즘적으로 파악되는 성스러운 것이 신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심은 신의 관념이다. 유태교에 있어서는 유일절대(唯一絶對)이며 천지의 창조주인 성스러운 인격신(人格神)이 숭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도 신이란 천지의 창조주인데, 예수가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전(全)인류에 보편적인, 인류의 아버지인 사랑의 신이었다. 그러나 이 신은 무비판적인 사랑의 신이 아니라 죄인을 엄하게 심판하는 판결의 신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서 신관의 중심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아버지인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우리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신 스스로의 화해에 의해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신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인 신과 동질(同質)·동렬(同列)의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임을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수육에 의해 신성과 인간성을 통일하고 있다. 성령은 신자(信者)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키고 고백시켜 신앙을 준다. 이 아버지·아들·성령의 삼위일체의 신앙이 그리스도교의 신관(神觀)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일신교적(一神敎的)신관도 역사적으로는 변화한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기적을 행하는 구체적인 성격의 신으로부터 인간의 행동을 지적하고 계시를 주는 신으로 이행(移行)하고, 더욱이 인격성을 잃고 신성·존재의 근거 등 추상적인 말로 표현되게 되었다. 현대의 급진적인 '신의 죽음의 신학'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하여 신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무신론적인 휴머니즘에 가까운데, 이에서 우리는 유일절대라고 믿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신 자체의 관념의 변화를 알 수가 있다.
성인
편집聖人
일반적으로는 만인의 모범으로 숭앙받는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데, 종교학에서는 유치한 자기중심의 입장을 버리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알며 이상적인 목적과 가치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여 생활에 목적과 통일을 줄 수 있게 된 성숙한 통합적 인격의 소유자를 성자라고 한다.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순교나 영웅적 덕행에 의해 열성(列聖)된 사람을 말한다. 열성이란 성인으로서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성인록(canon)에 기록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우선 복자(福者)로 인정된 후에 복자의 대원(代願)에 의해 두 가지의 기적이 행하여졌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성인은 공식적인 숭교(崇敎)를 받으며 축일(祝日)이 정해지고 미사 전례문(典禮文)이 작성되며, 그 칭호를 갖는 성당이나 제단이 설치되어 조상(彫像)·그림 등이 게재된다. 한편 성인과 복자의 영혼은 연옥(煉獄)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복자
편집福者
순교와 같은 영웅적 덕행이 있고, 생전에는 특별한 성성(聖性)을 보였으며 사후는 기적을 일으켜 뛰어난 일을 나타낸 인물에 대해서 로마가톨릭 교회가 성인 칭호의 전(前)단계로 주는 칭호이다. 17세까지는 교구(敎區)의 사교나 교회회의가 인정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 후에는 상세한 열복조사(列福調査) 수속을 거쳐 교황이 인정하게 되었다. 열복이란 복자로서 공인되는 것을 말한다. 열복은 임시적인 것이며, 한정된 장소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숭경을 받는 것을 용인할 뿐이다. 복자는 특별한 인가를 얻어 성인이 될 수 있다. 복자의 초상에는 단지 머리 둘레에 환광(環光:輪光:aureola)은 없다.
성모
편집聖母
예수 그리스도의 생모(生母) 마리아의 존칭. <누가복음>에 의하면, 요셉과 약혼 중에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령에 의해 처녀로 수태하여 메시아를 낳을 것을 고지(告知)받고, 남편 요셉의 이해로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서 숭배되는 일은 없었으나, 4세기 이후 죄없는 '신의 어머니'로서 숭배 대상이 되었다. 중세에 들어와 마리아 숭배는 더욱 명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고대 종교에서는 여신숭배(女神崇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성자숭배가 왕성해짐에 따라 성모는 성자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죄의 용서를 그리스도에게 집행하게 하는 중보자(仲保者)로서 차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중시하게 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성모숭배가 없다. 마리아의 무원죄수태(無原罪受胎)가 교의로 된 것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의 교서에 의한다.
계시
편집啓示
어원적(語源的)으로는 '나타남'을 뜻하며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천계(天啓)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들의 자연적인 경험이나 인식에는 없는 종교적 진리가 신 스스로 열어 보임으로써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본래의 의미로는 계시란 신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인식시키는 일인데, 창조나 섭리 등의 객관적 수단으로 간접적으로 그 본성이 나타나는 경우는 이를 자연적 계시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계시는 독자적인 뜻이 부여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昇天) 등의 사실에 있어서, 로고스가 수육하여 신의 의(義)와 사랑이 일차적으로 계시되고 죄가 구제 되었다고 믿는다. 즉 예수를 통해서만 계시가 행해지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시가 일어나는 것으로 믿고 이 기초 위에서 교리·의례·조직·제도가 성립된다.
은혜
편집恩惠
가톨릭에서는 성총(聖寵),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자연·인간·문화·역사 등에 주어지는 사물(賜物)을 뜻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수여되는 신의 특별한 사물을 가리킨다. 또한 본래는 죄가 많아서 은혜를 입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받는 자애 행위를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와 관련시켜 은혜를 해석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신의 호의로 인간에게 '무상(無償)의 은혜'가 주어졌다고 주장하고, 루터는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은혜는 하느님의 작업의 총체(總體)이기 때문에 그 의미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창조나 섭리와는 달리, 죄의 구제를 위해 행하여진 신의 작업이 십자가의 사실에 나타나 있어, 이를 은혜라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다.
섭리
편집攝理
고대의 여러 종교는 자연이나 우주의 운행이 맹목적인 운명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다. 창조주인 신이 피조물을 구제하기 위한 영원한 계획을 정하고, 만물은 모두 이 계획에 의해 질서지어지며 또 지배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섭리에는 신의 예견(豫見)과 미리 설정된 배려(配慮)라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 인간은 들의 백합이나 하늘의 새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구제 계획에 참여하여 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점에서, '구제예정설(救濟豫定說)'(사람이 구제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혜에 의한다는 설)과는 다르다. 계몽주의 이후에 있어서는 이신론(理神論)이 기계론적인 입장에서 섭리를 부정하고, 역사주의가 인류의 무한한 진보 입장에서 이를 부정했다. 바르트는 섭리란 이 세계에 있어서 신의 현재의 의미라고 말하고, 어구적(語句的)으로는 죄의 구제와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화해활동을 은혜라고 불러 섭리와 구별하고 있다.
인간·시간·공간관
편집영과 육
편집靈-肉
<구약성서>에서는 영(ruah)이란 생명을 주는 신의 기식(氣息)이며, 그 영의 작용으로 천지창조라든가 예언자의 활동도 이루어진다. 육(바아살)은 살아있는 영혼의 나타남이란 뜻으로, 인간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의 영과는 대립되며 그 자체로는 신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가 수태하고 성령의 작용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황야에서 악마를 물리친 것처럼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신의 율법을 무력화시키는 죄는 육을 매개로 하여 맹위를 떨치는 것이기 때문에, 영과 육은 역시 대립된 개념에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에 있어서는 로고스가 육이 되고, 썩어야 할 육신은 썩지 않도록 변혁되어 영육(靈肉)의 2원(二元)이 통일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이 수육(受肉)의 사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구제의 독자성이 수립되는 것으로, 그리스도론의 근본 문제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죄
편집原罪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즉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한 죄. 아담은 본래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나, 자유를 오용(誤用)하여 신이 먹기를 엄금한 '선악을 아는 나무열매'를 먹어 신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였다. 인류는 아담의 죄를 2중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아담 속에 있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는 전(全)인류의 범죄가 된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한 성질이 자손에게 유전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범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이며, 그 형벌로서 인류는 죽음과 멸망을 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설은 바울에게서 비롯되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원죄설은 구제설과 밀접하게 맺어져 있는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 중 하나이다.
구제
편집救濟
일반적으로 불행·죄악·질병·고통·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염원에 응하여 종교가 지향하고 약속하고 있는 최고의 경지(境地) 혹은 지복(至福)의 상태를 말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아직 현세적(現世的)·외적(外的)인 곤고(困苦)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색채가 강한데, <신약성서>에는 죄의 사면에 의한 구제로 내면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구제는, 신을 배반한 인류가 구세주 그리스도에 의해 또다시 신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의 죄로 인해 은혜의 상태를 상실한 인류는 신이 보낸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해서 원죄를 속죄받고, 또다시 은혜의 길이 열려 구제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죄·은혜·예정 등과 관련시켜서 구제설의 기초를 확립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입장을 전개시켰으나, 현대에서는 종말론(終末論)과의 관계에서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구제예정설
편집救濟豫定說
일반적으로는 세계와 인간생활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일이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되고 완전히 지배된다는 생각을 예정설이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특히, 인간의 구제가 완전히 신의 자유로운 은혜의 선택에 기인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구제예정설이라고 한다. <신약성서>에서는 바울의 <로마서> 9장 이하에 기술되어 있으며, 펠라기우스 논쟁(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벌어진 원죄와 은혜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신학적인 문제로 취급하였다. 중세에서는 구제의 확실성은 주로 교회의 권위에 의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생명이 상실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는 특히 캘빈이 이를 강조하고, 신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 어떤 자는 구제되고 어떤 자는 영원히 멸망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설이 자본주의의 정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예정설은 특히 인류의 구제사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일반 피조물의 역사에 관계되는 섭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유의지론
편집自由意志論 자유의 문제가 자연의 필연성에 대해서만 채택되게 된 것은 18세기 이래의 일이며, 그 전까지는 다만 절대자(絶對者)와의 관계로서 논의되어 왔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처음으로 자유의지를 신학의 문제로 논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담 이래 인간은 원죄를 짊어지고 있는데,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고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죄인 동시에 죄가 아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담이 자유를 오용하여 신을 배반하고 전인류를 죄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하고, 그러나 신은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원죄설(原罪說)·은혜설(恩惠說)·구제설과 관련시켜 자유의지를 역설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이나 데카르트, 홉스, 라이프니츠의 자유론은 모두 이 신학적 배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천복년설
편집千福年說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 재림날에 죽은 의인(義人)이 부활하여 지상에서 평화의 왕국이 건설되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이 나라를 1000년 동안 통치하며, 그 후에 일반 죄인들이 되살아나 천년왕국이 끝난 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교설(敎說). 1000이라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의 어원(語源)에 의해 'Chiliasm' 또는 'millenarianism'이라 하며, 지복천년설(至福千年說)·천년기설(千年期說)로 호칭된다. 이 신앙은 유태교의 메시아 대망에서 생겨나 그리스도 교회에 전해진 것이며, <요한계시록> 20장에 쓰여져 있다. 그노시스파(Gnosis派:유태·그리스·近東의 여러 사상이 혼합된 것으로 지식을 중시하고 의지를 경시하며 예수를 완전한 지식의 교사로 삼았다)를 비롯하여 고대교회의 여러 교부(敎父)가 이 설을 채용하였으나 오리게네스 등이 반대하여 4∼5세기경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스도 교회가 정통적인 교설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근대에 와서도 열광적인 교파에서는 이 설을 주창하고 있다. 1000년 단위로 선을 긋는 페르시아인의 우주론의 유산이며, 재앙이 닥쳤을 때에는 가끔 이 설이 일시적 행보의 시기로서 갈망되어 부활한다.
최후의 심판
편집最後-審判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상은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으나, 유태교에서는 특수한 종말론과 결합되어 말세(末世)에 있어서의 신의 심판이 믿어져 왔다. 그리스도교는 이 사상을 계승하여 부활·승천한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1000년 동안 지배한 후 죽은 자는 부활하고 전인류가 재판을 받아, 선인(善人)은 영원한 축복을 받고 천국으로 올라가며 악인은 영원한 형벌을 짊어지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었다. <신약성서>에서는 '노여운 날'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고지(告知)되고 있으며, 하느님의 아들이 이 재판의 집행자로 나타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유래(由來)에서 중세의 그리스도관은 주로 심판자로 되어 있다. 소년시절의 루터가 그리스도라는 이름 앞에 공포를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을 할 때에 구제가 완성되며, 또 영원한 생명이 얻어진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점에 유태교와의 차이점이 있다.
신국
편집神國
예수의 설교 중심 제목. 유태교에서는 종말 때에 나타나는 신의 지배를 뜻하며,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왕으로 하는 이 세상의 왕국이었으나, 예수는 이 유태교의 종말론적 신국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했다. 예수에 있어서 신국은 가까운 장래로 임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회개하고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으로 새로운 생활에 들어서기를 강력히 권했다고 생각된다. 예수가 죽은 후에는 교회가 지상에 있어서의 신국이라고 믿어졌고, 예수가 피로 속죄한 신도(信徒)의 단체로서 신국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에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닌 신국이 여전히 존재하기를 바랐다. 이리하여 종말에 있어서의 완전한 신국의 출현이 믿어지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저서 <신국>은 신국과 지국(地國)의 대립 및 신국의 승리를 묘사한 역사철학이다.
종말론
편집終末論 최후의 일(eschaton)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세계와 인류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교설을 말한다. 명확히 완성된 형태의 종말론은 페르시아의 종교에서 성립되고 있다. 천복년설, 세계 대화재, 최후의 심판, 인류의 육체적 부활, 정의가 지배하는 신천지 등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유태교의 예언자 신앙에서도 볼 수 있지만, 후기 유태교에서는 정치적으로 압박되어 있는 상태의 종결과 세계 개조에의 열렬한 기대를 메시아의 사상과 연결시켰다. 즉, 이스라엘인은 메시아 통솔 밑에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여러 민족의 불의(不義)가 심판되며, 지상에 신국이 출현한다고 믿었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이 종말론을 계승하였으나, 유태교의 민족종교적인 성격을 버리고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삼음으로써 세계적 종교·윤리적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 재림시, 즉 종말 때에 신국이 실현된다고 믿고 있다.
연옥
편집煉獄
정죄계(淨罪界)라고도 하며 로마가톨릭의 교리로서, 이 세상에서 범한 작은 죄에 대한 속죄를 다하지 못한 사자(死者)의 영혼이 불에 의한 형벌의 맛을 보고 정화될 때까지 머물러 있는 장소를 말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미사 등의 도움으로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단테의 <신곡(神曲)> 제2편은 이 신앙에 의거한 문학이지만,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비(非)성서적인 것으로 보고 연옥을 부정하고 있다.
지옥
편집地獄
일반적으로는 생전의 죄업(罪業)으로 죽은 자가 책고(責苦)를 받는 장소로 믿어지는 지하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사후에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겁(永劫)의 형벌을 받는 장소로 되어 있다. 전통적으로는 지옥은 신과의 단절 상태이며 불이 고뇌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데, 근대 신학에서는 신의(神意)에 반항하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빠지는 상태로서, 축복이 완전히 상실된 현세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패러다이스
편집paradise
둘러싸인 뜰 또는 낙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의 'pairi-daeza'가 어원이다. 유태의 묵시문학(默示文學)에서는 의인(義人)의 영혼이 옮겨지는 장소로 되어 있는데, <에녹서(書)>에서는 지상에 있는 어떤 장소로 생각되고 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가 도둑에게 약속한 패러다이스는 심판의 날까지 영혼이 머물러 있는 죽은 후의 중간상태를 지칭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 문학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는데, 근대에서는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이 유명하다.
신 학
편집역사신학
편집歷史神學
일반적으로는 역사학적 방법을 써서 자료를 엄밀하게 음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신학의 일부분이다. 계시(啓示)는 초(超)역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역사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학적 방법에 의해서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 진리의 학적 파악(學的把握)인 신학이 관련되는 기초적 사실은 계시가 생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우리들의 신앙이나 신학 자체가 역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어서 역사신학의 기능성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는 계시의 역사로서의 성서학(聖書學)과, 교회의 성립과 전개를 연구하는 교회사학(敎會史學)으로 대별된다. 전자에는 구약학(舊約學)·신약학·성서사(聖書史)·성서주석학 등이 있으며, 후자에는 교회사·교리사·전도사·신조사(信條史)·고고학·그리스도교 미술사·음악사 등이 있다. 특히 성서학은 모든 분야에 관계를 갖는 기초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성서신학으로서 역사신학에서 독립시키는 학자도 있다.
조직신학
편집組織神學
신학의 3부문 중에서 이론적 부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시대·장소·개성의 제한 없이 보편타당한 필연적인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철학적 방법을 써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부문은 변증학(辨證學)·윤리학·교리학의 3개로 구분된다. 변증학은 진화론·자연과학·유물론 등 각 시대의 사상에 대해서, 신으로부터의 계시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가 올바름을 변호하고 증명하는 학문이다.
윤리학은 그리스도교의 죄·사랑·구제 등의 윤리를 연구하며, 이에 대해서 교리학은 교의학(敎義學)으로도 불려 자기의 신앙 내용을 학적(學的)인 형식을 취해서 연역적(演繹的)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교리학에서는 자기의 신앙의 입장에 서서, 신이란 무엇인가, 구세주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된다. 한편 교리학을 조직신학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비신화화
편집非神話化
불트만(R.Bultman, 1884∼1976)은 <신약성서>는 신화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기적(奇蹟) 이야기로 불리는 사건들은 사적(史的)으로 통용되는 보고가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이나 실존을 위해 무엇인가를 증언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죽은 자를 부활시켰다"고 하는 것은 "예수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줄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부활의 사신(使信)은 "죽은 자가 다시 생명을 찾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 해도 끼칠 수 없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 의 텍스트가 무엇을 말한 것인가를 성실하게 추구함으로써 시대에 제약된 신화적 형식으로부터 사신(使信)을 해방하고, 사신을 실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비신화학(非神話化)이다. 따라서 신화적인 것을 제거하기보다는 선교(宣敎)의 올바른 이해를 문제로 하고 있다.
양식사적 연구
편집樣式史的硏究
구약(舊約)학자인 군켈은 "구약의 텍스트의 참다운 성격은, 그 텍스트가 기술되었을 때 실제생활에서 이룩한 역할(생활의 지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여 문체의 유형사적(類型史的) 방법을 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이 방법이 <신약성서>에 대해 적용되어, 디벨리우스가 양식사적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방법의 목적은 복음서의 텍스트를 텍스트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복음서의 각(各) 전승 역사적(傳承歷史的)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교단에 의한 전도를 동기로 해서 양식화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즉, 양식화의 법칙은 설교이며, 예수를 따른 사람들이 기억으로 보존하고 있던 것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유례(類例)·설화·비유 등의 문체를 갖는 양식유형(樣式類型)을 발견했다. 더욱이 불트만은 분석적으로 단화(短話)·어록(語錄)·기적 이야기 등을 구별했는데, 예수의 사적(史的) 사실보다 선교에 중심을 두었다.
신의 죽음의 신학
편집神-神學
알타이저, 반뷰렌, 해밀튼, 바하니언 등 네 사람이 제창한 급진적 신학으로서, 새로운 무신론적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대요(大要)는, 세속화되고 비(非)종교화되어 있는 20세기에서는 신은 죽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신이 죽어 일체의 구원이 사라진 절망적인 시공(時空)에서도 역시 뜻을 가져야 하므로, 금후의 그리스도교는 신 없이 해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론적 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에서 인간 예수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 '신의 죽음의 신학'인 것이다. 이 신학은 20세기 전반의 변증법 신학에 대한 부정이며 신 중심에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되찾으려는 것으로서, 현대 미국에서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과도기적인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
편집自由主義神學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의 철학에 원류(源流)를 갖는 근대 신학으로서 특히 리첼학파(Ritschl學派)가 대표이다. 정통적 신학이 성서나 교회의 교리를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함으로써 양심의 압박과 속박이 생겨나는 데 대해, 이 학파는 인간의 주체적인 활동의 의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징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신앙과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고 비판적·과학적인 연구를 행하였으며, 예수의 인격적인 의(義)와 사랑의 계시를 그리스도교의 본질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그 때문에 강한 윤리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성서의 종교사적 연구는 역사주의에까지 전개되었다. 변증법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항의로 출현한 것인데, 네오오소독시(neo-orthodoxy:현대신학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주류로서, 이성으로는 신을 충분히 알 수가 없고 인간의 구원은 신의 은혜에 의하며, <성서> 속에 있는 신의 말과 사람의 말을 구별한다는 것 등이 그 특색이다)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저류에는 자유주의적인 색채가 짙다고 볼 수 있다.
위기신학
편집危機神學 --> 변증법 신학
변증법 신학
편집辨證法神學
슐라이어마허 이래의 자유주의적인 19세기 신학을 비판하고, '하느님 말씀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을 말한다. 중요한 요점은, (1) 신학과 인간의 연속성을 가정하는 내재적인 신관념(神觀念)을 부정하고 신의 초월성을 주장, (2)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낙관주의적인 인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죄와 악을 강조, (3) 인류의 진보와 지상에서의 신국(神國)의 출현을 꿈꾸는 낙천적 역사관을 부정하고 종말론적 입장을 강조, (4) 그리스도교와 근대 문화와의 조화를 구하는 입장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교와 문화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등의 4가지이다. 1922년의 <시간(時間)> 지(誌) 발간이 이 신학운동의 자각적인 출발점이었다. 이것은 19세기 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되나, 새로운 신학의 형성이라는 과제에 있어서는 바르트, 브루너, 고가르텐, 틸리히 등의 의견은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적인 변증법을 신학적 표현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실천신학
편집實踐神學
응용신학(應用神學)이라고도 하며, 전도학(傳道學)·목회학(牧會學)·예배학(禮拜學)·교육학·교회법·사회사업 등으로 구분된다. 역사신학이나 조진신학의 부문에서 이루어진 이론적·역사적 연구를 실제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는 부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서도 포교전도(布敎傳道)를 하는 지방의 종교사정 조사 또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뛰어남을 변증하기 위해 전도학에서 종교사나 비교종교학이 탄생되었다. 또한 목회(牧會)를 위해서는 신자(信者)의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신자의 욕구 또는 계층(階層)을 조사·연구하는 종교심리학이나 종교사회학 등이 목회학(牧會學)으로부터 탄생되었다. 이처럼 실천신학은 목사의 실천을 위한 학문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
편집그리스도교 윤리
편집Christ敎倫理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인간이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물음은 예로부터 되풀이하여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도 동서고금의 여러 입장에서 제시되었는데, 그리스도교 윤리도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윤리는 어떤 입장에 서서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그것은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 근본적인 특징의 하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반적 이성의 입장에 선 여러 윤리와는 달리, 신의 계시에 대한 신앙을 직접적인 전제로 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이성을 문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신의 계시에 비추어진 이성(理性)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현실을 파악하고 반성하려고 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의 사고(思考)에 지배적인 지위를 주지 않고 그것을 신의 계시에 복종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신의 계시의 매개체로서의 <성서> 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입장'의 근본적인 여러 규범을 찾아나가는 곳에서 그리스도교 윤리의 특질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성서> 속에는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비롯한 여러 교설이 신의 은혜의 선물인 동시에 신의 요구(계명)로서 명시되어 있다.
이들 교설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며, 더욱이 이것은 예수에 의한 두 가지 신애(神愛)의 요구로 응집(凝集)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主)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든가 "자기를 사랑하듯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윤리는 그 구체적인 삶의 방법이나 윤리의 표현에 있어서는 반드시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개의 사회적·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결단(신에게의 응답)으로서, 당연하다고 말해야겠지만 그 윤리의 구체성과 다양성이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도 그리스도교 윤리의 특질이 있다고 하겠다. 즉, 그리스도인은 현실상황에서의 결단에 있어서 항상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계시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항상 자신의 죄와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를 요청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명
편집召命
소명의 원어는 '불러낸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인간을 불러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이 신의 부름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신의 구원의 부름을 받은 인간, 즉 소명을 받은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어부(漁夫)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고 제자로 삼은 것은 소명의 전형적인 예로 간주되고 있으며, 바울도 "소명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소명이라는 말이 신학 용어로서 특히 중요시된 것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인데, 그들은 특정한 사람들만이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의 힘으로만 사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각자의 분수에 맞는 소명을 얻고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소명이라는 말을 직업에도 적용시켜, 이른바 세속적 직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이해한 것도 그들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의론
편집決疑論
도덕(道德) 신학상의 용어. 도덕규범을 개개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시키는 방법으로서, 주로 도덕규범을 외적(外的)·율법적으로 규정하고, 여러 의무·행위양식(行爲樣式)·관심 경향 등에 충돌이나 모순이 생길 때 이 규범에 비추어 개개 경우의 가치판단을 하는 방법이다. 이미 초대 교회 이래 예수의 교설을 결의론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특히 중세 이후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시되었다. 아마도 '고해비적(告解秘蹟)'이 일반화됨에 따라, 고해의 대상이 되는 개개 행위의 도덕적 평가를 명확히 할 필요성에서 차츰 체계적 결의론으로 발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국 국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결의론을 채용하는 신학자가 적지 않은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인간 개개의 행위는 신에 대한 자기의 인격적 응답 면에서 해야 한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회개
편집悔改
신에 대한 인간의 내적(內的)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서, 죄에서 벗어나 신을 향하는 인간 심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여러한 내적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을 배반하여 죄적 존재(罪的存在)가 된 데 대한 슬픔, 그리고 그 죄의 고백과 죄로부터 회복되려는 염원이 있어야 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의 첫번째 선교는 "때가 왔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었듯이,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기능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신의 작용 없이 인간은 자신이 죄적 존재임을 알 수도 없고, 그 죄에서 벗어나 신으로 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회개 자체가 신의 은혜로 되어 있다. 이처럼 회개는 신앙에 들어서는 최초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교회는 이것이 인간을 구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에 대한 응답으로 보고 항상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가페와 에로스
편집agape-eros
모두 그리스어로서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각기 다른 사랑의 특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아가페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에로스는 그리스적인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 취급되고 있다. 에로스는 본래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로마 신화의 Cupid)에서 유래하며, 자기중심(자기긍정)적인 또는 대상의 가치에 의존한 유발적(誘發的)·유상적(有償的)인 사랑이며, 그것은 그리스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아가페는 <신약성서>가 사랑을 나타낼 때 거의 이 말을 쓰고 있는 것처럼, 타자(他者) 중심적(자기 부정적)인 또는 대상의 가치와는 관계가 없는 자발적·무상적인 사랑을 뜻하며, <성서>는 이 아가페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受肉)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 속에 아주 완전한 형태로 현실화되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이와 같은 아가페를 뜻하며, 그리스도교는 또한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애정과는 달리 매우 실현하기 어려운 사랑이면서도 인간의 참다운 사랑, 참다운 교제의 원리임을 역설하고 있다.
산상수훈
편집山上垂訓
<마태복음> 5장 3절∼7장 27절에 명시되어 있는 예수의 설교. '산상의 설교'라고도 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로 시작된다.
이 긴 설교의 내용은 매우 여러 갈래인데, 그 중에는 '주의 기도'를 비롯하여 비(非)그리스도인에게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여러가지 말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속에는 분노·간음·복수·애적(愛敵) 등에 관한 아주 엄한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다면적인 내용을 가진 산상수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논의가 있어 왔으나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윤리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산상수훈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예수의 교설을 한 곳으로 모았다고 볼 수도 있어, <누가복음>을 보면 이를 '평지(平地)의 설교'라 하여 그 내용도 각장에 흩어져 있다.
인인애
편집隣人愛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며, 근본적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최대 요구(계명)로서 '신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인인애'를 역설하고 있으며, 바울 또한 아무리 많은 율법이 있다 해도 "결국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귀일(歸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성서가 말하는 인인애는 인류애나 인류평등사상과는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성서적인 인인애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싸여 있고, 지탱되고 있는 질서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 즉 인간이 신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인간이 착하다든가 혹은 인간의 공적(功績)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존재(죄인)로서 신을 배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역설하고 있다.
'이웃 사람'이란 이와같이 신의 사랑을 자기에게 가져다 주는 자를 말하며, 따라서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무(無)'와도 같은 자신이 신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서로 상대에 대해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교환하는 이웃이 되라는 것이며, 인간의 진지한 인격적 공존(共存) 원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전
편집구약성서
편집舊約聖書
그리스도교 정전(正典)의 하나이며, <신약성서>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고 있는 경전. 대소 39개의 문서로 되어 있으며 모두 기원전 약 1000년 동안에 걸쳐 유태민족이 탄생시킨 신앙적 문서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래 유태교의 정전으로, 3개의 단계를 거쳐 성립되어 있다. 제1의 '율법'으로 알려진 <모세 5경(五經)>이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제2의 주로 예언자들의 문서로 이루어진 '예언자'가 기원전 2세기 초에, 그리고 서기 1세기경에 제3의 '제서(諸書)'를 포함한 전문서가 최종적인 정전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그 정전을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호칭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만 가능하다. <신약성서>를 정전으로 인저하지 않는 유태교에서는 신약·구약이라는 호칭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교회가 유태교의 정전을 <구약성서>의 이름 밑에 스스로의 정전(正典)의 일부로 삼은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독자적인 새로운 뜻을 이 정전에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신약이라고 하는 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옛 약속'·'새로운 약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옛 약속이란 신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폐기되고 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아니라 전인류에 대해서 새로운 약속을 하였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 교회가 처음부터 이 정전을 <성서>로 중시한 것은 거기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하느님의 구제의 역사에 기초를 두는데, 그 구제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작용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구약성서>도 <신약성서>와 함께 구제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으로 신앙의 규범이 되어야만 했다. 한편 <구약성서>의 본문 언어는 아주 작은 부분이 아람어(Aram語)로 기록되어 있는 외에는 모두 헤브라이어이다. 한편 가톨릭교회가 제2정전으로서 <구약성서> 속에 수록하고 있는 문서류는 본래 '셉투아긴타(Septuaginta)'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구약외전(舊約外典)>이라고 불리며 <구약성서>로부터 제외되고 있다.
신약성서
편집新約聖書
<구약성서>와 함께 그리스도교 정전.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유래하는 호칭으로서, 구약이 인간에게 주어진 구제 준비의 약속인 데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분량적으로는 <구약성서>의 3분의 1도 되지 못하나, 27개서의 많은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적으로는 신앙의 눈으로 본 예수의 전기라고도 할 수 있는 4개 복음서에서 시작하여, 다음은 원시교회에서의 사도들의 선교활동을 기술한 <사도행전(使徒行傳)>, 그 외 모두 최후의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교회 혹은 개인에게 보낸 편지의 종류이며, 더욱이 그 편지의 약 반수는 바울이 쓴 것이다.
이들 문서가 처음부터 정전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복음서가 사신(私信)의 종류가 많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 문서가 정전으로서의 권위를 갖기 시작한 것은 겨우 2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유태교처럼 이른바 정전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정전중심주의(正典中心主義)에 반대한 것이 예수이며 바울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의 정전의 특질이라든가 성립 요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현행의 <신약성서> 이외에 이와 비슷한 많은 문서가 유포되었고, 어느 그룹은 이들 문서를 스스로의 신앙의 거점으로 삼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여 신도가 혼란에 빠지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도 교회는 문서의 음미, 선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현재의 27권을 정전으로 공인하게 된 것은 최종적으로는 카르타고 회의(397년)였으나, 대개의 윤곽은 이미 서기 200년 전후에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서가 복음적·사도적인 점과 신앙생활의 규준으로서 의의가 있는 점 등이 정전으로서의 요건이 되었다. 한편 <신약성서>의 본문이 코이네(Koine) 그리스어, 즉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던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은 이 문서의 보급상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셉투아긴타
편집Septuaginta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어역 <구약성서>이다. '셉투아긴타'는 70이라는 뜻이다. 유태인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2세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위하여 그리스어역의 유태교 율법서(律法書)를 원했으므로, 72명이 이 번역에 종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더 적은 인원이며,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에 걸쳐 번역된 것으로서, 그것도 그리스어 권내(圈內)의 유태인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성서는 그리스어역의 성서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초기의 그리스도 교회는 대부분 이것에 준거하고 있었다. 또 이 성서에는 보통 구약외전(舊約外典)이라 부르고 있는, 유태교의 정전(正典)에는 없는 귀중한 여러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셉투아긴타>는 본문 비평에 있어서나, 각종 고대어역(古代語譯) <성서>의 모체로서나, 또 코이네 그리스어의 언어학적 연구에 있어서나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불가타
편집Vulgata
라틴어역 성서 중 가장 유명한 서적이며 가톨릭 교회의 표준 성서. 4세기 후반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Jerome)가 당시의 교황 다마수스 1세의 의뢰로 종래의 라틴어역 <성서>의 수정에 손을 댄 데서 비롯된다. <신약성서>로부터 착수되어 곧 <구약성서>에 미쳤고, 더욱이 구약의 태반은 헤브라이어를 번역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새로운 라틴어역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점차 그 진가(眞價)가 인정되어 중세에는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불가타>란 일반용 또는 공인의 <성서>라는 의미로서, 예전에는 <셉투아긴타>도 그렇게 불리었으나 곧 이 새로운 역서가 <불가타>로 되었다. 특히 16세기의 트리엔트 공회의(公會議) 이후, 이 <성서>는 가톨릭 교회의 표준적 공인성서로서 부동의 위치를 획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더구나 이 사이에 교정(校訂)이 자주 행하여졌고, 1907년에 시작된 비평적 교정본 출판의 대(大)기획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로마서
편집Roma書
<신약성서> 중의 한 문서. 바울이 58년경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로 보낸 편지로서, 가장 잘 정리된 신학적인 문서이다.
지중해 동부의 전도여행을 일단 끝낸 바울은 다음에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는 전도여행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이방인 여러 교회로부터 받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방문하려고 한 로마 교회에 대해서 미리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것이 이 편지이다. 처음의 1∼8장에서는 신의 은혜에 의한 구원에 대해서 박력있고 정연한 해명을 하였다.
이른바 신앙의인(信仰義認)의 복음을 전형적으로 역설하고 또 신앙과 소망, 신앙과 사랑 등의 관계가 설파되어 있는 것도 바로 여기이다. 다음의 9∼11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원의 희망에 대해서 기술하고, 최후의 부분(12∼16장)에서는 교회 내부의 여러 문제와 관련시키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로마서>에는 바울의 희망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바울 신학의 강요(綱要)로서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편집聖書
성스러운 책이라는 말이며, 특정한 서적을 다른 모든 서적과 구별하려는 점에서 이미 신앙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가 <성서>라고 부르는 서적은 교회가 그리스도(구세주)에 관한 서적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된다.
한편 성서의 원어(原語)인 '비블로스(Biblos)'는 본래 지명이었는데, 종이나 서적의 뜻으로 변하였고, 더 나아가 <성서>를 뜻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지명인 비블로스란 시리아의 항구 도시로서,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 파피루스(Papyrus)와 서적을 만들어내는 일대 중심지였다고 한다.
복음서
편집福音書
<신약성서> 가운데 첫 부분의 문서를 복음서라고 한다. 즉 마태·마가· 누가,·요한의 4 복음서를 말한다. 그리스도 교도에게 있어서 구세주 예수의 언행을 기록한 이들 문서만큼 참된 의미에서 기쁨을 주는 음신(音信)은 없었다.
그런데 이들 <복음서>는 그 성격상으로 모두 예수의 역사적 전기라고 할 수는 없고, 오래 전부터 그 사실성(事實性)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복음서>가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보아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순으로 6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에 되어진 듯하다. 18세기 이후 요한을 제외한 세 개의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公觀福音書)>라고 말한다. 공관(公觀)이라 함은 그리스어로 <시놉시스(같이 보는 것)>라는 말로 네 복음서 중 이 세 가지가 자료면이나 문서의 성격으로나 특히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약의 외전
편집新約-外典
외전(아포크리파)이라고 하는 것은 정전(正典)에 대한 말로서 일반적으로 정전에 가까운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생활에도 유익한 것으로 인정된 정전 이외의 문서를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외전의 경우에 있어서는 정전 이외의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의 대부분을 총칭하는 말로 쓰여지는 수도 있으며, 구약외전과 같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그 수치도 매우 일정치 않다.
이것들을 대별하여 보면 정전과 마찬가지로 (1)복음서류, (2)사도들의 사적류, (3)편지류, (4)묵시문학류 등으로 일단 분류할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전기와 같은 것 중에는 예수의 유년시대 이야기와 예수의 저승 체험기 등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공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대체로 이들 외전은 정전과 비교하여 종교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가치면으로나 떨어지는 것이 많지만 초기의 교회를 아는 데 있어 직접 간접으로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사도행전
편집使徒行傳
<신약성서> 중의 한 문서. 사도시대, 즉 원시 그리스도 교회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본서의 전반부(1∼12장)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후반부(13∼28장)에는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대전도(大傳道)가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개별적인 일로서는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 스테파노의 순교, 바울의 회심(回心),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바울의 전도여행 등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면에서 성령에 가득찬 사도들의 활동에 의해 복음이 유태로부터 그리스·로마 세계에 진출, 당시의 주요한 도시에 차례차례로 교회가 세워지는, 말하자면 그리스도 교회의 성립 과정을 그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하여는 19세기 이래 심각하게 비판되어 왔으나 본서는 여전히 헬레니즘 시대의 훌륭한 역사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저작·연대에 관하여는 <누가복음>의 저자와 같은 누가에 의하여 80년대에 쓰여졌다고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기도서
편집祈禱書
매일 일정한 시간에 드리는 기도와 일요일의 예배 순서, 제전례(諸典禮)의 기도문 따위를 수록한 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식문(式文)'이나 '전례서(典禮書)'도 <기도서>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기도서>는 <성서>와는 다른 것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각 교파가 거의 전부 각각 독자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각 교파의 교리적 입장과 특색 또는 그 역사적 연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예배, 성찬식의 기도 등이 공적 기도로서 성문화된 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고, 3세기의 교부 히포리유토스의 저서 중에는 세례·견신례(堅信禮)·성찬식·성직안수식(聖職按手式) 등의 식문(式文)이 보인다. 특히 중세의 서방교회에서는 6∼9세기 사이에 전례(典禮)를 집행하는 사람의 역할에 따라 각각 별책의 <기도서>가 수없이 만들어져서 9세기경부터는 각 전례의 종류에 따라 각기 별도의 <기도서>가 쓰여지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서(전례서)>는 오늘날에도 대개 이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기도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로서 영국 국교회는 다른 교파에 비하여 <기도서>를 가장 중요시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즉 종교개혁 때 종래 라틴어로서 전례의 종류에 따라 분류되어 있던 중세적 <기도서>를 개혁하여 성서적으로 신도 일반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영문 <기도서>를 만들어 교회 전체가 일치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에드워드 6세의 <제1기도서>라고 하며, 그 개정판이 오늘날 영국 국교회의 정식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기도서는 교회력, 성서·시편의 일과표로부터 시작하여 결혼식·병자방문식(病者訪問式)·매장식(埋藏式)·산후감사식(産後感謝式) 등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공식 예배의식 일체를 포함하며, 교리의 전거로서 또 신도의 교회생활 지침으로서 필수불가결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도서>는 <성공회 기도서>라고도 하며 영국 국교회 계통에 속하는 각국 성공회 <기도서>의 모체이다.
공교요리
편집公敎要理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세례 또는 견신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 또는 아이들을 위하여 쉽게 풀이하여 놓은 책, 즉 <카테키즘>을 말한다. 이 <카테키즘>을 가톨릭 교회에서는 보통 '공교요리(公敎要理)' 또는 '가톨릭요리'라 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스는 '교리문답'·'신앙문답' 또는 '공회문답(公會問答)'이라고 한다. 카테키즘이란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카테케오'― 들려주다 혹은 가르쳐주다의 뜻 ― 로서 원래는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과 아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내용을 구두로 가르쳐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점차로 그러한 가르침을 포함하는 서책을 뜻하게 되고 중세(11세기)에는 문답체로 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왈드파(왈드가 일으킨 대중종교운동), 후스파(교회와 교직의 타락·면죄부·교직의 토지소유를 비난한 후스 일파), 위클리프파(종교개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위클리프 일파) 등의 여러 분파에 의하여 이러한 종류의 책이 많이 사용되어 종교개혁 이후에는 유명한 복음주의적 <카테키즘>이 많이 출판되었다. 즉 <루터의 교리문답(1529)>은 루터파 교회의 표준서로, 캘빈의 <주네브 교리문답(1542)>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2)>은 개혁파 여러 교회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1647)>은 장로교회의 표준서가 되었다. 가톨릭 교회도 이에 대항하여 여러 새로운 <카테키즘>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서도 카니시우스의 '공교요리(1556)'는 2세기 이상에 걸쳐 가톨릭 교회의 주요한 카테키즘이 되었고, 19세기 중엽부터는 데하베의 '공교요리'가 가장 표준적인 것으로 되었다. 성공회의 '공회문답'도 16세기로부터 17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서 성공회 기도서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카테키즘>은 각 교파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각 교파의 입장과 특색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 모두가 사도신조·십계·주기도문 등에 관한 설명을 중요한 부분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