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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통일문제〔서설〕
편집韓國-統一問題〔序說〕
1954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대전이 종결되자 36년간에 걸친 식민지 통치하에 신음하던 한국인은 이를 해방과 독립의 신호로 받아들여 열렬히 환영했다. 앞서 미국·영국·중화민국의 국가원수(元首)들은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을 발표하면서 '3대국은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부여할 것을 결의한다'고 다짐한 바가 있었다. 이어 1945년 7월 26일자 '포츠담 선언'도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으며 소련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계기로 동 선언에 참가했다.
그러나 8·15 해방은 한국의 국토양단을 동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소 양군은 한국의 남·북한에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수리(受理)하는 경계선으로 편의상 북위(北緯) 38도선을 책정하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38선에서 남·북한의 교통 왕래를 일방적으로 차단시켰으며, 이에 대응하여 미군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의 의도는 북한지역의 공산주의 동조자들로 하여금 우선 민주기지를 건설케 하여 장차 남한지역까지 공산화하는 혁명기지(革命基地)로 전환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초에는 일본군 항복의 수리선(受理線)이던 것이 동서냉전의 격화과정에서 국토 양단선으로 굳어지는 추세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셈이다. 원래 한반도의 정치 지리적 위치는 대륙의 북풍과 해양의 태풍이 마주치는 고장이라고 비유되기도 했다. 게다가 2차대전 직후 지구상에는 오직 두 개의 강대국, 즉 해양방면의 미국과 대륙방면의 소련만이 남았는데 그 양대세력이 한반도에 진주(進駐)했으니 사정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소는 사상·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대조적이었는데, 1940년대 후반기 이후의 동·서냉전 과정에 각기 자유·공산 양대 진영의 지도국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남과 북은 서로 대결상태에 있던 양대진영의 최전선에서 맞서는 꼴이 되었다. 8·15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주체적인 정치역량이 거의 공백 상태였던 것도 타율적 양단을 일시적으로나마 고착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남·북 통일추진은 타율적 부조리(不條理)를 자율적으로 시정한다는 거시적인 방향을 일깨우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운동이 평화적 방법으로 본격화하는 데는 4반세기라는 장구한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 객관적 조건으로는 동·서냉전으로부터의 자유도 들어야만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선언과 9월 9일의 북한측의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선언으로 그런 대로 한반도의 내부정세에 획기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일본 군국주의의 36년간의 총독부정치와 8·15 해방 이후 3년간의 진주통치를 벗어나 통일문제도 자율과 타율의 양측면을 동시적으로 감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차원의 동·서 냉전은 그 후에도 상당한 기간 계속되었으며 또 동족의식에 바탕을 둔 자주성과 민족주체성의 각성이 정책결정에 반영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측에 의한 무력통일의 시도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동족상잔은 급기야 동·서 냉전의 상황하에 국제화되고 말았다. 미군을 비롯한 16개국은 남한을 지원하면서 유엔군 기치하에 참전하였다. 다른 한편 북한측을 지원하면서 그해 10월 25일 중공군이 무력개입을 단행했으며, 소련도 군사·경제·외교적 원조에 박차를 가했고, 동부유럽의 여러 공산국가들이 또한 북한에 상응한 원조를 제공했다.
결국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되다가 53년 7월 휴전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남북간의 국토 양단선은 종전의 38선과 별차없는 계선(界線)에서 휴전선(休戰線)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엄청난 희생 끝에 획득된 경험적 교훈은 무력통일 시도의 허망성에 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 한국전쟁은 남·북동포들 적의(敵意)와 불신을 배태(胚胎)시킴으로써 조국통일의 전망을 몹시 흐리게 했으며, 국토양단이 더욱 고착화된다는 비관론을 퍼뜨리는 데 이르렀다.
각종 통일방안의 모색
편집各種統一方案-摸索
⑴ 제네바회담과 통한방안모색-1948년부터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사실상 2개의 이질적인 정권이 배타적으로 서로 맞서 정통성(正統性)을 주장하는 가운데 민족분열상은 날이 갈수록 심각화했다. 그 배타적 대치는 한동안 정권의 공고화와 국제지위 향상을 위한 불가상용적(不可相容的)인 경쟁을 벌이다가 끝내 1950년에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빚어냈던 것이다.
북한 측은 남침 1주일 전인 6월 19일 남한 국회에 대해서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와 합동하는 방법으로 단일한 전국 입법기관을 구성하자고 제의한 바 있었지만, 선전적인 평화공세라고 간주되었을 뿐이었다. 1953년 7월의 휴전협정에는 한국측이 조인에 참가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통일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데 있었다. 당시의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는 북진통일론이 우세했으나 우방정부와 국제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54년 4월 26일에 한국 문제를 다루는 주네브 정치회담이 개최되어, 동·서 쌍방의 설전이 약 2개월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최종 단계에서 정리된 양측의 통일방안은 한국과 그 우방국측이 주장한 유엔감시하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 실시와 다른 한편 북한측과 그 공산배경국이 주장한 중립국 감시하의 지역대등 남북총선거 실시의 대조를 부각시켰다.
그후 한국의 집권당인 자유당은 가끔 북진통일 혹은 유엔감시하 북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으나 그 메아리는 공허했다. 1960년 4·19 혁명을 거쳐 성립한 구 민주당정권은 공식적으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 방안을 채택한다고 했으나, 유엔에 신규가입한 중립국들의 수효가 늘어남을 보고, 그 세계평화기구의 결의를 존중하되 한국에 불리할 경우라면 복종치 않을 뜻을 시사해 왔다.
⑵ 북한측의 위장평화통일공세 ― 한편 북한은 소위 그들의 전후(戰後) 인민경제 복구발전에 주력하는 과정에서 가끔 평화통일 공세를 취하면서 유엔이 한국문제를 다루는 권위와 권능을 인정치 않는다고 했으며, 따라서 유엔 한국통일 부흥위원단(언커크)의 해체를 주장하는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끈덕지게 요구해 왔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 결정서는 통일전선 결성, 남북교류, 남북합동의 상설위원회 설치, 그리고 남북조선정부 대표가 참가하는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 소집 등을 주장했다. 이어 북한측은 1958년 2월 5일에 '4개항 통일방안'을 발표했는데, 그 골자는 ① 남북에 와 있는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 ②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거, ③ 남북교류, ④ 남북군대의 감축 등이었다.
1960년 8월 14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연방제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즉 완전 통일 이전의 과도적 형태로서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양정부의 독자적 행동을 보장하면서 양 정부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남북조선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정(調整)'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1961년에는 남한에서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때의 공약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第一義)'로 삼는다고 했으며, 또 국토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을 강조하였다.
한편 북한은 그해 7월 소련 및 중국과 더불어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면서 북진 위협에 맞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5·16 이후에도 한국의 공식적 통일방안은 유엔감시하의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총선거의 실시임에 다를 바가 없었다.
하여튼 북한은 그해 9월의 노동당 제4차 당대회 결정서에서 매우 강경한 통일방안을 채택했다. 그 골자는 ① 남한에서의 공산 지하당의 조직확대, ② 그것을 핵심으로 한 반미구국통일전선의 결성과 정권탈취 투쟁의 전개, ③ 남과 북의 통일전선을 합동시키는 형식을 취한 공산화통일의 실현 등 이른바 '3단계 통일전략'으로 요약되었다.
북한측은 또 1962년의 쿠바위기와 중·소 분규의 표면화, 월남전쟁의 치열화, 그들 내부의 경제적 난국 등 여건변화가 두드러진 이후 소위 4대 군사노선을 강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즉 ① 군대의 간부화, ② 군대의 현대화, ③ 전인민 무장화, ④ 전지역 요새화가 급선무라고 했다. 드디어 1970년 11월의 제5차 당대회 결정서는 폭력방식의 남조선 혁명을 거쳐야만 통일이 가능하다고 했으며, 그 혁명의 성격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남한에서 '미군과 현정권을 그대로 두고서는 평화통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등 호전성을 드러내었다.
그러한 기조에 입각하여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1971년 4월 12일 '8개항 평화통일방안'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① 미군철수, ② 남북군대 긴축, ③ 한·미간, 한·일간 조약폐기, ④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총선거의 실시, ⑤ 정치활동의 자유보장, ⑥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연방제 실시, ⑦ 연방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남북교류의 실현, ⑧ 각 정당·사회단체들과 전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써 남·북조선 정치협상회의 진행 등이다. 이 경우도 배타성은 마찬가지인 데다가 그 방안은 북한측이 노골적으로 전쟁준비 완성을 호언하는 환경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⑶ 주체적 통일안의 모색 ― 이에 대응하여 남한에서도 1971년 12월 6일 이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한반도에 또다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감이 감돌았던 것이다.
그런데 팽팽한 대치가 극한상황에 이르면 전쟁의 폭발 아니면 극적인 긴장완화 중 어느 하나로 결론이 난다는 것이 힘의 법칙이다. 마침내 남한의 주도로 남북간에 정책결정 레벨에서 대화의 길이 트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7·4 공동성명은 1971년 8월에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이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인도적인 차원의 대화였던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 대화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7·4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金英柱)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공동성명에서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이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 남북공동성명은 세계를 경동케 하는 가운데 분단국문제의 해결을 위한 한국적인 접근 방식을 일깨우게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던 남북관계의 막다른 상황의 타개노력 끝에 마침내 국토 양단선의 장벽을 넘어 정치적 차원에서 직접 대화의 통로가 설정된 것이다. 그리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존재양식은 대화없는 대결에서 대화있는 대결로 이행한 것이라고 정부수준에서 설명되었다. 말하자면 무력대결의 회피 속에서 이룩된 차원 높은 정치대결의 도래이며, 두 개의 체제간의 선의(善意)의 경쟁을 내다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우선 긴장완화와 교류·교역의 발전을 거쳐 조국의 평화통일을 향한 구심작용에 노력하자는 논리구성이다.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북한측을 향하여 무력행사의 시도 및 폭력혁명론의 포기를 촉구했으며 남북의 두 체제간의 선의의 경쟁을 호소한 바 있었다. 또한 7·4 공동성명 전야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비극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무릇 시대적인 요청에 견주어 당위성과 필연성을 지닌 진취적(進取的)인 운동이 일단 객관적인 행동규범으로 정립되고 나면 최초의 동기여하를 막론하고 그 자체의 독자적 발전논리는 불퇴전(不退轉)의 것으로 되는 법이다.
평화통일의 주체적 및 객관적 조건
편집平和統-主體的-客觀的條件
한국통일 문제에 대한 그와 같은 신국면에의 진입(進入)은 1970년에 들어와서 종전과 판이하게 된 객관정세 변화와 이에 대한 새 환경적응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대화의 본격화에 선행된 최근 수년간의 남북한의 동태를 볼 적에 삼엄한 남북대치선의 격절(隔絶)을 넘어 유사한 형식의 새 바람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즉 주체의식과 자주성의 일깨움이다. 남한의 경우 도시와 마을에 두드러진 구호는 자립경제·자주국방·자조정신이었다. 한편 북한의 경우에도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과 국방에서의 자위가 강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운은 강대국간에 동서냉전의 해소가 공동으로 모색되는 마당에 과거처럼 대국(大國)에의 일변도의존과 같은 종전 방식의 환경적응책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된 사정을 말해준다. 그리고 강대국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초월한 평화공존, 현상유지가 모색되는 마당에 분쟁지역에서의 국지적 긴장확산이란 어차피 부조리하다고 관측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쟁지역 당자들간에 종전 노선의 재성찰의 기운이 싹트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여건의 변화에 즈음하여 한국인의 동족의식에 바탕을 둔 양식 있는 대화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에 통일에의 접근을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방안의 주장보다 조건의 형성이 보다 더 중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지난 4반세기에 걸쳐 통일이라는 민족공통의 염원이 달성되지 못한 이유는 '방안의 결핍'이 아니라 '조건의 미비' 때문이었다.
제네바 정치회담과 북한의 위장평화공세
편집Geneva 政治會談-北韓-僞裝平和攻勢
휴전협정 4조 60항에 따라 유엔참전 16개국 및 한국대표(변영태 외무장관)와 북한·중국대표간에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한국통일 문제를 놓고 제네바에서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주장하는 유엔측과 실현성 없는 방안을 내세워 정치적 선전만 하려는 공산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한국은 이 회담에서 그 후 한국 정부의 통한원칙(統韓原則)이 된 유엔감시하의 한국헌법 절차에 따른 남북한 자유선거의 실시, 통일정부의 수립이 유엔에 의해 확인될 때 유엔이 철수하고 선거일 1개월 전에 중국군이 철수, 유엔에 의한 통일한국의 영토 및 독립보전 등을 골자로 한 14개 조항의 통한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실시, 선거준비를 위한 전조선위원회의 조직, 남·북간의 경제적·문화적 교류, 6개월 이내 외국무력 철수 등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은 유엔을 축출하는 데만 관심을 두고, 남·북한의 인구비례를 무시한 비현실적인 통일방안을 내세우면서 정치선전적인 주장만 되풀이하였다. 이리하여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참전 16개국과 한국은 6월 15일, 첫째 유엔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조사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도 정당한 모든 권한이 부여되어 있으며, 둘째 통일독립민주한국 수립을 목적으로 한 국회의원 선출방법은 유엔감시하에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총선거로 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 제9차 유엔총회에 제출하여 승인받았고, 그 후의 유엔총회에서 매년 확인되었다.
제네바회담 후부터 북한측은 평화통일 의사는 전혀 없으면서도 심리적 효과 및 대외선전을 위해 간헐적으로 평화통일 공세를 벌여왔다. 특히 1956년 소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을 끝내고, 제1차 5개년계획을 책정한 후 이러한 위장평화 공세는 더욱 활기를 띠어 동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 결정서의 형식으로 남·북간의 접촉과 통일문제를 토의할 상설위원회의 설치, 미군을 비롯한 모든 외군철수와 남·북한 정부가 참가하는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 소집 등을 내용으로 한 통일 방안을 내세웠다. 이어 1958년 2월에도 첫째 남·북한에 있는 외국군대의 동시철수, 둘째 중립국 감시하의 남북총선거, 셋째 남북간의 경제·문화·서신교류, 넷째 남·북 군대의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한 4개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유엔이 인정하는 일반적 통한원칙을 부정하고 중립국의 이름으로 소련 등의 공산국가를 통일문제에 개입시키는 동시에, 유엔군을 철수시켜 군사력의 우위를 점하여 게릴라 활동 등 직접·간접적인 무력수단에 의해 적화통일을 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자유당정부는 유엔감시하의 자유선거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한만의 선거실시 또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여 북한의 위장된 평화통일 공세가 남발되도록 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마치 한국은 공격적이고 북한은 평화적인 듯한 본말이 전도된 인상을 준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한국의 평화통일 기반조성 정책과 북한의 3단계 통일전략
편집韓國-平和統一基盤造成政策-北韓-三段階統一戰略
1960년 4월 혁명의 결과 성립된 민주당 정부는 제네바 원칙인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토착인구비례 총선거에 의한 통일의 공식방안으로 반공통일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한편 공산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못한 일부 계층에서 중립화 통일론(中立化統一論)이 대두하게 된 것을 이용, 북한은 이를 적화공작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은 그 원인을 남한내 북한의 지하당(地下黨) 조직부재에 있다고 판단, 그 재조직을 꾀하는 한편 김일성은 8·15 경축대회 석상에서 총선거가 불가능하면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한의 연방제, 즉 남한에 존재하는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한국정부와 북한측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동시에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한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자는 연방제통일안을 내세웠다. 이러한 평화공세는 북한을 하나의 정부로 인정시키고 한국의 사회적 혼란을 조성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고,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해서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정책목표가 수립되었다. 이미 공화당정부는 경제건설, 민주적 주체역량의 형성, 국제지위의 향상 등에 큰 성과를 올려 상황이 점차 북한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북한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소련·중국과 군사 동맹을 새로이 체결하고, 1961년 9월 17일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외세의 간섭없는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 총선거 이전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완전한 정치활동 보장 등 평화통일방안을 내세우는 한편, 첫째 남한에서의 지하당조직의 재건·확대, 둘째 지하당을 핵심으로 광범한 반미통일전선(反美統一戰線)의 형성과 정권탈취 투쟁, 셋째 남·북의 통일전선을 합동시키는 형식을 거치는 적화통일의 실현이라는 강경일변도의 소위 3단계의 통일전략을 세웠으며, 그 일환으로 1968년 무장공비 서울 침입 등 일련의 무력도발을 계속하였다.
이같이 북한측은 표면적으로는 평화통일을 내세우면서 내면적으로는 무력적화통일을 지향하는 양면성을 띠어 왔음에 반하여, 한국정부는 국제적 일반원칙인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토착인구비례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원칙을 1964년 11월 29일 국회결의로 확정시키고 대통령의 연두교서(年頭敎書)·담화·장부성명 등을 통해 이 원칙을 계속 고수하는 한편, 종래와는 달리 적극적인 통일기반 조성작업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외교관계의 확대에 노력하고 대내적으로는 1966년 국회내에 국토통일연구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1969년에는 통일방안연구 등을 위해서 국토통일원을 창설하였다. 또한 통일을 위해 북한보다 경제적 우위를 점한다는 정책하에 양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괄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다각적 노력에 의해 주도적·현실적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8·15 선언과 7·4 남북공동성명
편집八·一五宣言-七·四南北共同聲明
8·15 선언은 1970년 광복절 제25주년을 기해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측에 제의한 것으로, 북한에 대해서 무력도발을 포기하고 북한의 소위 4대 군사노선 등 모든 무력대결의 요소를 제거하며 그를 행동과 실천으로 실증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우리의 자유민주체제와 북한의 공산체제 중 어느 사회제체가 과연 보다 잘 살 수 있는 체제인가를 실증하기 위해 개발과 창의의 경쟁, 즉 체제·이념을 초월한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선언은 닉슨 독트린 이후 극동정세가 급격히 화해무드를 나타냄에 따라, 우리의 국력이 북한을 능가한다는 자신에서 조국통일의 날을 앞당기고, 또한 한국의 평화지향성(平和指向性)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정책방향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려는 데서 나왔다. 박대통령은 그후 1971년 7월의 대통령 취임사, 1972년의 연두기자회견, 6·25 기념사 등을 통해 기회있을 때마다 북한에 대해 무력도발과 무력대결의 지양, 평화통일 선행조건 5개항의 실행을 촉구하여 평화적 조국통일 접근 노력에서 주도권을 잡아왔다.
한편 북한은 여전히 비무장지대의 요새화와 4대 군사노선 강화 등을 추구하여,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전쟁준비 완료를 공공연히 거론하고, 한국의 평화통일 노력을 무력 적화통일에 역이용하려 하였으나 1971년 11월 박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선언 등을 통한 총력 안보태세의 강화, 국민의 강한 반공의식, 전쟁억제력의 향상 등에 의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실증되자 한국정부의 평화주도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8월 11일 최두선(崔斗善)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가족찾기운동 제의에 동의, 민간주도하의 인도적인 남·북 대화인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르렀고, 한국정부 주도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정치적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3월 30일 박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 선결조건 5개항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성명에서 발표해 온 민족주체성, 평화지향성, 체제·이념을 초월한 민족단합, 개발과 창의의 경쟁 등의 방안이 밑받침되어, 1972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북한의 제2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을 방문하여 그 교섭이 타결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⑴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⑵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⑶ 쌍방은 끊어졌던 민주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촉진시키기 위해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⑷ 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 데 합의하였다.
⑸ 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⑹ 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 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⑺ 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이 7·4 공동성명은 한국정부의 자주적이며 민족적인 자주역량이 뒷받침되어, 무력대결 지양과 전쟁억제를 전제로 한 대화로써 국가위난의 돌파구를 터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7·7 선언과 통일논의확산
편집七·七宣言-統一論議擴散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그 주체는 양측 모두 정부간 차원이었고 따라서 그 실체적 성과획득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헤게모니 획득이 주요 관심사였다. 제5공화국 초기 1·22 통일헌법제정제의 등 획기적인 대북제의가 잇달았으나 북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 이후 양측은 쌍방 계속적으로 새로운 제안이나 기존제의의 수용을 촉구하는 공방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남북 모두 양보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리고 상대방이 응할 수 없거나 고려하지도 않을 속 빈 내용의 제안을 내놓은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국내외에서 정치적 선전효과는 얻었을 망정 가시화된 성과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6공화국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 남북통일 문제가 재야·학생·종교계로 확산 파급되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이 틈을 노려 북측은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전개, 제6공화국은 소위 통일논의 파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통일논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확대나 의사결집은 지극히 소망스러웠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와 남한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북한에 대한 환상을 지니거나 양 사회의 동질·동일성을 고집한다면, 더욱이 북한의 미화된 선전공세에 편향된다면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그것은 양측 모두 지순무구한 노력을 기울이고 모두가 책임져야 할 현실의 문제로서 기대나 희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작금에 있어서 우려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무지이다.
1988년 7월 1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 선언'으로 통칭되는 새로운 대북제의안은 ①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들의 자유로운 남북왕래, ② 이산가족들의 생사확인 및 상호방문, ③ 남북한 교역문호개방, ④ 비군사적 물자에 대한 우방의 북한교역 용인, ⑤ 남북한 대결외교의 종결, ⑥ 북한의 미국·일본 등과의 관계 개선 협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동선언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의 대북제의들이 북측의 수용태세 여부에 따라 실행이 가능한 내용들이었지만 7·7 선언의 내용들은 북측의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남측이 의사만 있으면 언제든지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정부는 7·7 선언에 따른 후속조치를 마련, 7월 19일부터 휴전선과 KBS 사회교육방송을 통하여 실시해 왔던 대북 비방방송을 중지했으며, 9월 3일부터는 공산권자료 일부를 일반에 개방했다.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
편집南北頂上會談-六一五南北共同宣言
새천년 한반도의 미래를 화해와 평화의 산실로 만든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 동안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이루어졌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一) 국방위원장이 분단 반세기여 만에 첫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남북한은 화해협력의 새 역사가 열린 것이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당사자간에 자주통일과 협력 방향을 합의하고 이를 실천할 과제를 제시했다. 역대합의서와 6·15 공동선언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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