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남북교류문제
남북교류문제〔서설〕
편집南北交流問題〔序說〕
오랫동안 하나의 생활권이었던 한반도가 해방과 미·소양군의 진주로 남북으로 갑자기 분단되자, 한국국민과 지도자들은 협상이라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한국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분단이 한국민족의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 미친 불편을 먼저 덜어보자는 목적으로 남북교류를 제의하였다. 양대 점령국인 미·소, 그리고 한국의 남·북 정치세력간에 시도되었던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협상이 성공하였더라면 남북교류문제는 논의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측의 정치적 이념이나 입장의 상이로 말미암아 통일정권의 수립이 어렵게 되고 지연되자, 정치문제보다는 비교적 타협의 여지를 많이 가진 비정치적 영역의 문제를 먼저 협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과 또 분단상태하에서라도 서로의 생활에 필요한 교류만은 하여야 한다는 견지에서 비정치적 성격의 남북교류가 여러 형태로 시도될 수 있었다.
남북교류문제가 처음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946년 1월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의 예비회담에서였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문제가 주로 토의된 이 회담중에서 미국대표가 38도선의 설정으로 남·북간에 발생한 행정상 그리고 사회경제문제에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토의하자고 하면서 소련측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점의 협의를 제안하였다. ① 한국으로부터의 중요물자 반출, ② 38도선의 재래의 도(道)경계선에 의존한 변경, ③ 방송망의 일원화와 양지구를 통하여 신문의 자유로운 배포를 가능케 하는 문제, ④ 양지구간의 전화통신 재개, ⑤ 통화(通貨)의 통일 등.
소련측도 상기와 같은 미국측 제의에 관심은 보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이런 문제는 남·북간에 통일정권만 수립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정치문제의 우선해결을 주장하였다. 비교적 상호타협이 어렵지 않은 비정치적 영역, 즉 사회·경제분야에서 남북이 협력하는 데 성공한다면 거기서 얻은 협조무드와 정신의로서 궁극목적인 통일정권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이 미·소는 남북교류문제에 입장의 차이를 보였으나 소련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남북교류를 위한 중요한 제안의 하나로 남·북간의 원료교환을 제의한 사실이 있다. 북한에서 석탄을 비롯해서 남한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보낼테니 남한의 쌀과 교환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 소련측 제안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남한에도 전재민(戰災民)이 많아서 쌀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기 때문에 결국 물자교환에 관하여서도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한국전쟁 전의 남북교류 상황
편집韓國戰爭前-南北交流狀況
한국 통일정부 수립문제에 대해 남·북간 그리고 미·소간에 있었던 정치적인 입장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은 영향으로 상호간의 실리와 편의란 입장에서 보면 타협이 아주 가능했던 남북교류 문제도 쌍방 사이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분단이 남북 쌍방간에 주고 있었던 불편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돌발할 때까지는 남북간에 교류를 위한 합의를 얻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의 교류를 한 실적의 기록이 있다.
⑴ 우편물 교환 ― 1946년 3월 15일 개성역에서 미·소 양국의 군정(軍政) 당국자 사이에 우편물의 교류문제에 합의를 하여 해방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우편물 교환이 이루어졌다. 현지에서 작성된 협정내용에는 계속 2종 우편물과 서류를 교환우편 종류로서 규정하고 있고, 교환장소는 개성역이라 명시되어 있다. 이 합의에 의하여 남·북간의 우편물 교환은 1950년 6월 25일 바로 3일 전까지 약 4년 3개월간 계속 되었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에 남한에서 북한에 보낸 총우편수가 1,922만 2,180통, 그리고 북한에서 남한에 보낸 것이 총 9만 3,751통으로, 이들 우편물은 일주일에 몇 번씩 교환되었다.
⑵ 물자교역(物資交易) ― 해방 후 약 2년간은 남·북간의 물자교역이 밀교역(密交易)의 형태로서 38도선상의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미·소 양국의 군정당국은 이와 같은 남·북간의 생활 필요상 이루어진 밀교역을 묵인하여 오다가 1947년 5월 이후에는 쌍방이 공식적으로 합의하여 현실화하여 주었다. 여기에 따라 북한에서는 조선상사(朝鮮商社)와 같은 몇 개의 대남교역(對南交易)의 전담상사를 설립하여 대남물자의 교역에 임하였고, 남한에서의 상인들이 각자 개인별로 대북한교역에 응하였다. 남북간 교역이 가장 활발하였던 기간은 1948년 1월부터 8월까지였는데, 이 기간의 교역물자 액수를 보면 북에서 남에 온 것이 13억 4,000여 만원,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간 것은 3억 2천여만원이었다. 이 액수는 밀교역에 의한 액수는 포함되지 않는 공식적인 교역만의 것이기 때문에 밀교역에 의한 교역액까지 합치면 상기(上記) 액수의 2배가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남·북에 양정권이 수립되고 그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1949년 3월 31일 남북교역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⑶ 연백평야통수(延白平野通水) ― 38도선으로 인해 연백평야(延白平野)가 나누어졌는데, 1946년 영농기(營農期)에 들어와서 북한측에서 38도선 북방의 상위저수지로부터 남방의 농민에게 통수(通水)를 거절함으로써 소위 연백평야 통수거부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측의 경기도지사와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 농림부장간에 회담을 가져 인도적인 견지에서 일단 통수할 것에 합의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북으로부터의 통수가 적기(適期)에 적절히 되지가 않아 남쪽에서 북의 처사에 대하여 비난하였고, 북쪽은 이에 대하여 오히려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⑷ 대남송전(對南送電)과 중단 ― 전력자원 대부분이 북한에 있으므로 국토가 분단된 이후에도 송전문제가 남·북 당국자 간에 중요한 협의의 내용이 되었다. 1946년 12월부터는 북한측에서 종전까지 송전하던 7만킬로와트를 반으로 줄여 3만 5천킬로와트 밖에는 송전하지 않았다. 이런 송전의 대가로 남쪽에서는 북쪽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보내기로 합의하여 상호의 필요를 잠정적으로 충족시켰던 것이다.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은 남한의 생활과 경제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수립 전에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던 김구·김규식 양인도 계속 송전을 북한측으로부터 약속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5·10 선거로 대한민국의 수립이 확실시된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하여 대남송전을 완전히 중단함으로써 남한지역이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전력 부족은 한국의 산업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⑸ 경평빙상 및 경평축구경기-1932년 이후 계속된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주최의 경평빙상경기(京平氷上競技)가 국토분단에도 불구하고 1946년 1월에 개최되기에 성공하였다. 아이스하키만은 서울의 창경원 연못에서 경기가 진행되었고, 속도경기는 춘천 소양강상(昭陽江上)에서 진행되었다.
1946년 5월에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경평축구경기는 역시 남·북민의 많은 관심과 흥미속에서 두 번 시합을 하였다. 이 두 번의 시합에서 첫번 시합의 심판은 서울측에서 맡았고, 두번째 시합의 심판은 평양측에서 맡아 시합을 운영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이미 좌·우파가 심히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싸우던 와중(渦中)이었으므로 운동경기에 정치성이 강하게 노출되었고, 응원도 좌·우파간의 정치대립을 크게 반영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남북교류의 성격변화
편집南北交流-性格變化
한국과 북한공산정권 사이의 대립이 악화되고 대화가 단절이 될수록 남·북간의 교류는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한국전쟁의 돌발로 남북교류는 논의될 여지도 못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류의 성격과 목적도 근본적으로 변경되었다. 초기의 남북교류는 상호협조를 위한 면을 많이 가진 교류 자체에 순수성이 있었으나, 점차 남·북간의 교류는 상대정권을 붕괴하려는 정치적 수단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전쟁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남북교류가 지하공작과 같은 정치자금 공급의 중요한 루트가 된 여러 가지 간첩사건이 일어남에 따라서 한국정부는 북쪽과의 접촉 및 교류의 길을 철저히 봉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 전쟁의 참화를 복구하면서 남·북이 점차 상대 진영과의 유대를 포기하고 해외경제와 협력하는 경제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남·북간의 교류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으로 남·북간에는 대화의 길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또 밀무역의 형태로 가능했던 남·북교역의 길마저 봉쇄된 상태에서 북한 공산정권은 대남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객관적으로 보아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내용을 담은 정치적 평화공세를 시작하였는데, 그때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남북교류를 주장하였다.
남북적십자회담과 조절위원회
편집南北赤十字會談-調節委員會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의 최두선(崔斗善) 총재가 북한에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한 것을 계기로 남북간의 오랜 장벽을 넘어 다시 남북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약 1년에 걸친 예비회담 끝에 4차에 걸쳐 본회담을 평양과 서울에서 장소를 바꾸어 가며 개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남북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 회담 때마다 50명이 넘는 남북 인사가 집단으로 남북을 왕래한 것은 아주 중요한 남북교류였다. 더 중요한 것은 1972년 7월 4일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를 구성할 것에 합의본 것이다. 2차에 걸쳐서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간의 회합 결과 조절위의 구성·운영에 관한 남북간의 구체적 합의사항이 1972년 11월 4일에 공표되어 남북접촉에 새 기원을 만들었다. 합의문에는 남북간에 정치·경제·문화에 걸친 광범한 교류를 실행한 것을 규정하고, 이러한 교류를 위한 사무국을 판문점에 두고 남북간에 정기적인 회의를 가지도록 하였다. 또 남북간에 직통전화가 가설되어 남북간의 문제를 협의하는 핫라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 선언'이 나오자 북한은 이를 영구분단을 획책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그해 8월 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모자로 이후락이 지목되면서 북한은 서울에서 열린 제3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조절위원회 본회담을 중단시켰다.
남북조절위원회는 비록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남북한 당사자들이 이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산가족찾기 운동과 남북적십자회담
편집離散家族-運動-南北赤十字會談
최두선 총재의 이산가족찾기 운동 제의
편집崔斗善總裁-離散家族-運動提議
최초의 남북간의 교류는 1970년 박대통령이 8·15 선언에서 제기한 평화통일의 기본원칙에 따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천만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제의한 데서 시작된다. 즉 최총재가 1971년 2월 12일 북한적십자회에 대해 순수한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간의 이산가족찾기운동을 협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南北赤十字會談)을 가까운 시일 안에 개최할 것, 본회담의 절차상의 문제협의를 위해 늦어도 10월 안에 제네바에서 예비회담을 열 것 등을 제의한데 대해 북한이 북한적십자회 손성필 위원장명으로 8월 14일 이를 수락함으로써 접촉의 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8월 20일부터 9월 3일까지 양측 파견원간에 네 차례의 대면을 통해 첫 예비회담을 9월 20일 판문점의 중립국감시위 회의실에서 개최할 것에 합의하였다.
남북적 예비회담
편집南北赤豫備會談
1971년 9월 20일 1차 예비회담을 개최하여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및 직통전화의 설치에 합의한 후 1972년 8월 12일 25차 예비회담에서 18개항 절차합의 문서를 교환할 때까지 만 1년간 계속되었다. 회담 중 논란대상이 된 것은 본회담 의제(議題), 장소, 시기, 대표단 구성문제였다. 우선 의제문제에서 한적(韓赤)은 이를 어디까지나 본회담 준비를 위한 예비회담으로 보고, 6차회담시에야 본회담 의제로서 남북이산가족의 생사·소재확인 및 소식전달, 이들의 서신교환, 재회알선 및 상호방문, 재결합 기타 부수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항을 제의한데 반해서 북적은 1차회담 때부터 가족·친척·친우의 자유내왕 및 상호방문, 이들의 자유로운 서신거래, 이산가족을 찾아주고 상봉시키는 문제 등 본회담 의제를 들고 나오는 한편 정치선전을 하여 한적의 진의를 탐색하려 하였다.
12차 회담에서 최초로 북적은 한적안(韓赤案)에 접근한 수정안을 제시하였으나 그 후에도 계속 '가장 절박한 사업부터 가장 현실적 순차에 따라' 정하자는 한적측 의견과 상호방문·자유왕래를 주장하는 북적측 의견이 대립되어, 그후 여러 차례의 조정을 거쳐 1972년 6월 16일 20차 예비회담에서야 가족과 친척의 소재확인, 방문과 상봉, 서신거래,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 5개항을 본회담 의제로 확정지었다. 본회담 장소문제는 2차 예비회담시 한적이 서울과 평양으로 하자고 제의한데 대해, 북적은 판문점을 고집하였으나 제3차 회담에서 서울과 평양으로 합의되었다. 본회담 시일문제는 한적이 예비회담 종결 직전에 결정하자고 한데 반해 북적측은 예비회담에서 본회담 의제·절차문제에 합의가 되기도 전인 1971년 내에 무조건 열자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6차 회담시 일단 보류키로 합의하였으나, 그후 의제가 확정되고 첫 본회담 장소·절차·대표단 문제에 완전한 합의도 보기 전인 1972년 7월 19일 북적측이 다시 거론하고 나와 일단 8월 5일 개최키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북한측의 무리한 주장에 의해서 불합리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모든 문제에 최종합의를 본 8월 11일에야 1차 본회담을 8월 30일 평양에서, 2차 본회담은 9월 13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최종 확정되었다. 대표단 구성문제는 1972년 7월 19일 23차 회담에서 각기 7명의 대표와 7명 이내의 자문위원 및 7명 내외의 수행원 및 지원인원으로 대표단을 구성하는데 합의하였으나, 북적은 첫 본회담에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를 상호 초청하자고 주장하여 인도적인 문제에 정치색채를 가미시키려 함으로써 8월 5일 본회담 개최를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후 25차 회담에서 첫 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이를 철회함으로써 본회담 기타 18개항 절차에 최종합의하여 비공개원칙의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남북적 본회담
편집南北赤本會談
제1차 본회담은 이범석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 7명, 자문위원 7명, 수행원 20명 및 기자 20명, 합계 54명이 남북분단 후 최초로 평양을 방문한 가운데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개최되어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주소·생사 등을 알아내며 알리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와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서신거래를 실시하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문제,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항을 본회담 의제로 결정하는 합의문서(合議文書)를 교환하였다. 김태희 단장을 위시한 34명의 대표단과 20명의 기자가 수행한 북적대표단(北赤代表團)이 서울을 방문하여 개최한 제2차 본회담은 본회담이 끝난 다음날이 9월 14일에야 막후 접촉 끝에, ① 쌍방은 온겨레의 의사와 염원을 반영하여 남북적십자회담의 의제로 설정된 모든 문제들의 해결에 있어서 민주주의적 원칙과 자유스러운 원칙, 남북공동성명(南北共同聲明)의 정신과 동포애, 그래고 적십자인도주의적 정신을 철저히 구현한다. ② 쌍방은 제1차 및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통하여 더욱 다져진 쌍방간의 신뢰와 신뢰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3차회담부터는 의제에 관한 토의를 진행한다. ③ 제3차 남북적십자본회담은 1972년 10월 24일 평양에서, 제4차적십자회담은 1972년 11월 22일에 서울에서 진행키로 한다는 합의서에 서명·교환하였다.
이같이 1·2차 적십자본회담은 일단 무사히 끝났으나 양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설전만을 계속하다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후 1984년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남한의 수재민을 위하여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해 왔고, 남한 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실무자 접촉을 계기로 3차례의 본회담이 재개되었다. 1985년 5월 27일∼30일에 열린 제8차 본회담에서 8·15 광복 40주년을 전후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그해 9월 20일∼23일 남북적십자 총재는 각기 151명씩의 방문단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였다. 현재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문제로 교류가 재개되고 있다.
1990년 이후 남북 당국간 회담
편집-南北 當局間 會談 남·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 여섯 차례 당국간 회담을 가졌다. 현 정부 들어 이번 정상회담을 제외하고 두 차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세 차례, 그리고 노태우 정부 때 한 차례 열렸다. 가장 최근 회담은 작년 6월 22일부터 7월 3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던 차관급 회담이다. 이 회담은 같은 해 4월부터 5월까지 한달 간의 비공개 차관급 접촉에서 비료 20만t 지원과 이산가족 문제 논의에 합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을 불과 1주일 앞두고 서해교전이 일어나 비료 10만t만 지원하고 이산가족 문제는 논의조차 못했다. 또, 현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 11일부터 18일까지 차관급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려 비료지원과 이산가족 문제를 연계해 논의했으나, 상호주의가 쟁점이 돼 결렬됐다. 김영삼 정부 때에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당시 실무절차 합의서까지 타결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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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남북교류
편집-年代-南北交流
1971년 9월에 시작된 남북적십자 회담과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의 남북대화는 1980년대에는 대화와 각 분야별 교류를 통한 대결구조 극복으로 진전되었다. 1979년 '10·26' 이후 남측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북측은 파상적인 선전공세를 전개, 1980년 1월 남측에 '남북한 총리(總理) 회담'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동년 9월 북측의 일방적인 중단선언으로 끝나고 11월 북측은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제시해 왔으나 그 전제요건으로 미·북한간의 평화협정체결 등 필요 이상의 조건을 제시, 남측이 받아들일 수 없게 함으로써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제5공화국 출범 후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 '남북한 당국 고위책임자 상호방문'과 동년 6월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회담'을 북측에 제의하고 1982년 1월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 통일헌법을 제정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통일민주공화국을 완성하고 통일까지의 공존과 민족화합을 실현하기 위해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체결'을 골자로 하는 '1·22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북측에 제의했다. 이 제의는 사실상 지금까지의 남북대화에 있어서 남측이 제시한 최초의 체계적인 통일방안으로서 1980년대의 기본 원칙이었다는 점에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북측의 반응은 냉담했고, 1982년 '1·22 통일방안' 실현을 위한 '20개 항의 시범사업', '남북한 고위대표 회담' 등 일련의 제의에 대해 북측은 거부와 동시에 '남북한 정치인 연합회의'를 들고 나와 실질적인 접촉은 없었다.
1983년 남북관계는 '사할린 상공에서의 소련전투기에 KAL기 격추사건',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묘소 폭탄테러 사건', '울릉도·다대포·월성·임진강 무장공비·간첩선 침투사건' 등 북한·소련에 의한 일련의 대남테러·무력도발 사건으로 급격히 냉각되었는데, 1984년 서울·중부 일원의 홍수피해에 대해 북측이 구호에 필요한 물자제공을 제의, 남측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유화되었다. '수재물자 인도인수'를 계기로 '남북한 경제회담', '남북한 체육회담',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 예비접촉'이 진행되고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무접촉이 본격화되었으로 11월 판문점에서의 소련인 망명사건과 그에 수반한 총격사건, 1985년 1월 실시예정이었던 '팀 스피릿 훈련'을 이유로 북측이 회담진행을 거부, 다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제8차 남북한 적십자 본회담 재개를 계기로 대화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나 북측이 제의한 남북한 국회회담은 북측의 선전공세로 성과가 없었고 '88서울 올림픽에서의 북한의 참가를 의제로 했던 체육회담 역시 저들의 억지주장으로 사실상 무산되었다. 다만 동년 9월 20일∼23일 사이에 이루어진 '남북한 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은 오랜 인내와 각고 속에 얻어진 결실이었으나 남측의 동사업 계속 제의가 북측의 거부로 합의에 실패했고 1986년초 '팀 스피릿 훈련'을 빌미로 북측은 또다시 모든 회담을 일방 연기하였다.
이후 북측은 기존의 모든 회담이 정지된 상황에서 '군사회담', '비핵 평화지대 창설', '남북한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하는 등 일련의 평화공세로 나왔는데 이는 당시 남측의 사회정세를 노린 의도가 짙었다. 특히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은 그 군사적 전용성으로 인해 남측의 '평화의 댐 건설'과 남북관계의 경색을 가져왔다.
1987년은 남측의 정치적 상황을 노린 북측의 평화공세와 대남비방, 각종 테러로 점철되었다. 북측은 '고위급 정치군사 회담', '다국적 군축협상 회담', '남북·미(美) 3자 외무장관 회담'을 일방제의하는가 하면 남측의 국내문제를 빌미로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는 등의 파상공세를 펴는 한편 동년 1월 '동진호 납치', 10월 '진영호 충돌침몰', 11월 'KAL 858기 폭파' 등 대남무력도발을 자행하였다.
1988년 북측은 'KAL기 사건'과 관련, 역선전과 대남·대미비난 공세를 펼치는 한편 '남북한 연석회의', '남북한 학생회담'을 제의, 학생과 남측 정부 사이의 갈등을 선동하고 나섰는데 그 의도는 '88 서울 올림픽의 저지에 있었다.
동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 동반자적 인식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의하는 동시에 후속조치를 취해 국내에 통일논의를 확산시켰다.
1990년대의 남북교류
편집-年代-南北交流
1990년 제1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1년 반의 회담을 거쳐 1992년 평양 제6차 회담에서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1991년에는 남북체육회담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여 그해 4월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에 출전, '여자 단체전 우승'이라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세계 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에서도 8강에 진입하는 개가를 올렸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3단계 통일방안'을 제안, 남북연합의 과도기를 거쳐 1민족 1체제의 완전통일 지향을 표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남북교류는 1996년 강원도 잠수함침투 무장간첩사건 이후 위기감이 극에 달하는 듯했다. 그후 경수로 협정이나 4자회담 등 다각도로 교류를 재개하고 있으며, 잇따른 탈북자와 북한 고위간부의 망명, 심각한 식량 문제에 따른 지원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1998년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직접 평양을 방문해 남북경협의 물꼬를 텄다. 또한 분단 이후 남북간 인적·물적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며 시작된 금강산 관광유람선 출항은 1998년 11월 18일 이후 현재 500여 회를 돌파했으며 금강산 관광객 수는 25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경축하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이 90년 이후 10년 만에 개최되었다. 1998년 서울 리틀 엔젤스 예술단의 평양공연의 답방 형태이기도 한 이번 공연은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과 우리 문화의 전통성을 강조한 점에서 우리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과 호응을 얻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체육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남북교류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남북통일축구대회가 10년 만에 부활되며 유례 없는 대규모의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