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평화운동
세계의 평화운동
편집世界-平和運動
평화운동이라는 광의의 개념보다는 일반적으로 비폭력·반전·반핵·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반패권주의 반독재운동이라는 용어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 마디로 모든 종류의 무력투쟁에 반대하고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는 평화를 회복·유지·수호하자는 대중적 운동을 일컫는다. 그 역사적 태동은 전쟁과 독재의 역사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으며 종교적 휴머니즘에서 그 사상적 기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평화운동은 지식인·종교인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대중적 규모로서의 위상을 정립한 것은 근대 이후 제국주의 단계(이것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한다)에서의 서유럽에서였다. 그 최초의 주체는 사회주의 세력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피지배민족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그를 대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인류는 전쟁의 재발없는 평화의 시대를 희구하였으나 그 앞에 도래한 것은 가공할 만한 파괴·살상력을 가진 핵시대와 이데올로기의 수호 아래 모든 것을 허용치 않는 냉전시대였으며 평화 대신에 수 없는 국지전쟁과 군사독재·무차별 테러가 연이었다. 20세기 평화 운동은 이러한 세기말적 상황과 관련, 더욱 거세지고 강화될 듯 예상되었으나 실상은 지극히 작은 목소리에 그치고 말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제스처로 이용되기까지 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전운동은 진정한 의미의 평화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1980년대 초반 유럽에 물결쳤던 반핵운동은 그 규모나 슬로건에 있어서 장기간의 침체 끝에 부활한 긍정스러운 사건이었으나 중반 이후 소진되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평화의 범위와 인식이 작금에도 특정 사상·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세계평화평의회의 성립
편집世界平和評議會-成立
1949년 4월 파리와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 평화옹호 문화활동가 회의에서 세계대회 위원회가 설치되고, 다음해 1950년 2월 바르샤바의 제2회 평화옹호자 세계대회에서 각국의 평화위원회를 기초로 하여, 각국의 평화위원회가 추천하는 세계평화평의원으로 구성되는 세계평화평의회, 대표위원회, 서기국이 성립되었다. 이것은 1950년대 가장 유력한 세계 평화운동의 중추기관이었다.
세계평화평의회는 핵무기의 사용금지를 호소하고, 4억 8,200만 명의 서명까지 얻은 스톡홀름 호소(1950년), 세계 5대국에 의한 평화달성과 독일 통일 등을 호소한 부다페스트호소(1953년), 7억에 가까운 서명을 모은 핵전쟁 반대의 빈호소(1954년),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무기 사용에 반대한 스톡홀름 호소(1954년), 핵군비경쟁에 반대한 헬싱키 호소(1955년) 등 정력적인 평화운동을 벌였다.
이와는 별도로 1955년 7월에 영국의 철학자 러셀경(1872∼1970)과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박사(1879∼1955)가 핵무기 금지와 핵전쟁거부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였고, 1958년에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호응하여 핵무기의 철폐를 부르짖는 세계 물리학자의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회의'가 캐나다에서 열렸다.
평화주의
편집平和主義
광의로 볼 때 반전쟁 상태·개념인 평화를 최고가치로 하여 그에 도달하고자 하는 입장을 뜻하는데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를 보장하려는 태도를 포함한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전쟁이란 통상 국가무장력을 전제로 하므로 이 경우 평화주의란 부전(否戰)뿐만 아니라 비무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상적 기초는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동양에서는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적·법적 주요논제로서 주장되어 왔으며 이후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국제정치에 있어서 평화협정·평화선언 등으로 일컬어지는 사례는 그 유형의 하나일 뿐 본질적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종교적·민간규모의 운동형태가 본래의 의미에 접근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국제평화국
편집國際平和局 International Peace Bureau:IPB
1892년 설립된 국제평화운동조직이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2백만 명의 회원을 가진 IPB는 주로 식민지독립·평화운동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히 정부간 조직과 비정부간 조직의 교량역할을 담당하여 성가를 높이고 있다. 이미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81년 4월 브뤼셀 NATO 본부 앞에서 일어났던 반핵·평화시위도 IPB가 주도한 것이었다.
서유럽반핵운동
편집西歐反核運動
1981년 4월 브뤼셀 NATO 본부 앞에서 시작된 IPB 주도의 반핵·평화운동은 소련의 SS20에 대항히기 위해 NATO 가 미국의 최신예 INF와 GLCM의 유럽 배치를 결정한 데서 발단된 사태였으나 그 동기와 근원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전후의 무장평화 상태는 평시에도 국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항시 전쟁의 위협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전·반핵평화운동은 시대상황 논리에 눌려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일부 학자·단체들에 의해 유지되어 왔으며, 반독재·인권운동은 국내적인 차원에 그쳤을 뿐 국제적으로는 고도의 정치성을 띠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이는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작된 서유럽의 반핵운동은, 위정자들이 주장하는 핵의 전쟁억지론·균형론의 허구를 폭로해 대중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대중운동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군사비 증대에 따른 국민경제부담 해소, 핵군비 철폐, 군비축소협상 활성화 등 구체적인 결과를 얻었다. 특히 서독을 중심으로 하여 서유럽 전역에 확산된 반핵·평화운동에 대해 미국과 서유럽 각국 정부는 이를 그릇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NATO는 미국의 최신예 INF 배치를 강행했고, 반핵·평화운동은 1983년 이후 다시 간헐적인 양상으로 축소되었다. 동시에 반전·반핵평화운동은 제도권 내로 침투되어 서독의 녹색당과 같은 정치적 결사가 태동하고, 야당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군축협상이나 미·소관계 현안에서 집권여당과 긴장을 빚고 있다. 제도권 밖에서의 평화운동도 더욱 가시화 되어 그린피스와 같은 행동적인 반핵단체가 등장, 보수주의 경향이 짙은 집권정치세력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미·소간 INF 폐기협정체결, 독일국가통합, 동유럽 공산당정부 붕괴 등 일련의 평화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평화운동은 대중적 관심 밖에 놓인 듯하다. 그러나 전기한 바와 같이 평화주의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