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기초지식/영화의 종류·형식·이론

영화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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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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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派映畵

1910년에 뮌헨에서 시작된 표현주의운동은 독일의 문학·미술·연극을 지배하고 제1차 대전 후, 그 흐름에 속하는 몇 개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일련의 작품을 표현파 영화라 한다.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이기주의자>(1919)는 그 최초의 영화이며 최고의 걸작이었다. 각본은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의 합작으로, 기괴한 범죄사건 가운데에 권력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제작자는 그것을 미친 사람의 이야기로 바꾸어 버려 반항의 힘을 약화시켜 버렸다. 그러나 일상적인 형상을 파괴한 영상은 관람객에게 이상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장치를 담당한 화가 헤르만 바름, 발터 레리히, 볼타 라이만의 힘이 컸다. 이와 같이 표현파 영화는 무엇보다도 미술가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연극인 카를 하인츠 마르틴이 감독한 <아침부터 밤중까지>, 프리츠 랭의 <죽음의 골짜기> <닥터 마브제>, 파울 레니의 <뒷골목의 괴노굴(怪老窟)> 등이 1924년까지 만들어지고 그 뒤 급속히 쇠퇴했다. 표현파 영화는 기계 문명으로 억압당했던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고 독일 사회의 산물이며 인상주의·자유주의에 반역하는 예술이었다. 만들어진 기간은 짧았고, 우수한 작품도 적었으나 그 뒤의 독일의 전위영화, 극영화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전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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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衛映畵

혁신적인 정신으로 최전선에 서서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예술을 전위예술이라 부르고, 프랑스어인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말을 적용한다. 본대(本隊)를 떠나 선두를 달리는 소부대를 가리키는 군사용어이다. 이 예술운동은 1916년에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며, 영화에서는 문학·미술·음악보다 늦어, 1920년대의 중반에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델뤼크의 포토제니설(說)과 아벨 강스의 작품 등의 영향으로 영화의 순수한 표현을 탐구하려 하는 시도가 왕성했다. 전위영화의 선구자로 1900년대 초기의 조르주 멜리에스나 1910년대의 루이 피야드를 드는 사람도 있고, 또 추상적인 영화는 1920년경부터 만들어지고는 있었으나, 전위 영화가 분명한 예술운동으로 등장하여 제작이 활발해진 것은 1923년부터이며, 주창자는 델뤼크와 그의 뒤를 이은 제르메느 뒬라크였다. 전위영화는 양식·경향이 사람마다 달라서 독일에서 만든 에겔링의 절대영화, 1923년의 르네 클레르의 처녀작 <잠든 파리>나 이듬해의 제2작 <막간(幕間)>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의 순수영화적·초현실주의적 경향, 그리고 디미트리 키르사노프의 <가을 안개>, 알베르토 카발칸티의 <항구에서>처럼 다큐멘터리적인 영화시(映畵詩)까지를 포함했으며 더욱이 그 개개가 서로 혼합되어 있는 일이 많다. 그러나 모두가 다른 예술의 지배와 속박에서 해방되어, 그 본질인 움직임과 리듬에 의하여 생명을 창조함을 영화의 공통된 목적으로 삼았다. 시각적 이미지에 의한 표현은 당연히 스토리를 부정하게 되며, 내용이나 형식도 비상업주의적이고, 일반 영화관 상영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그 대책으로서 델뤼크 등은 시네클럽을 조직하였으며, 이것은 마침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각국으로 번졌다. 또 파리의 뷰 콜롱비에 극장, 유르슈리느, 스튜디오 28 같은 극장들이 전위영화 상영의 특수 전문극장이 된 것도 이 운동을 크게 돕는 결과가 되었다. 1930년경 토키의 완성과 함께 전위영화는 급격한 내리막을 만나, 어떤 사람은 극영화의 연출가가 되고, 어떤 사람은 다큐멘터리로 전향했으며, 각국의 모든 영역의 영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그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영화의 본질에 대한 실험이나 탐구는 전후의 네오 리얼리즘이나 누벨 바그에 제2, 제3의 혁신적 정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절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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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映畵

다다이즘은 각국에서 과거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는 운동을 유발하여 마침내 영화에도 그 영향이 파급되었다. 1922년에 다다이즘의 화가 비킹 에겔링은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상만을 촬영한 <대각선 교향악>을 만들었다. 그림의 절대주의는 일체의 객관적·구체적·일상적인 형상을 추방하고 인상주의의 심리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그림의 절대(絶對) 형성을 추구하고 있으나, 한스 리히터의 <리듬>은 면(面)을 이용하고 있으며, 더구나 발터 루트만의 <작품>에서는 형상의 종류가 증가하고 파상선(波狀線)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영상의 구상성(具象性)을 부정한 이 세 화가의 영화는 마음껏 음악에 대한 커다란 접근을 보였고, 에겔링과 리히터는 그림 속에 담긴 음악을 표현하려 했으며, 루트만은 외부에 있는 현실적인 음악을 시각화(視覺化)하려 했다. 절대영화는 공간적인 절대회화(絶對會畵)가 영화에 의해 시간적으로 전개된 작품이었으나, 토키 이후 이것은 오스카 피싱거의 <빛의 교향악>, 그리고 전후의 노만 매클래런의 색채 추상만화 등에서 그 영향과 발전을 볼 수 있다.

순수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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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粹映畵

독일을 중심으로 한 절대영화는 일체의 구상적인 영상을 부정하고 기하학적인 추상도형(抽象圖形)에만 의지해서 영화를 만들었으나, 프랑스를 주로 한 순수영화는 모든 물체를 영상으로 다룬다. 따라서 현실의 물질을 촬영한 구상적인 영상이 많이 쓰이지만, 그것은 리듬에 의하여 사실의 논리나 물체의 현실성에서 떠나, 미지의 다른 비전을 낳는다. 이것은 다다이즘과 퓨어리즘의 영향을 받아 영화의 포토제니설(說)을 창작화(創作化)하려 하는 것으로 영상의 리드미컬한 운동을 극도로 발휘하여 영화의 순수화함을 목적으로 했다. 1924년경부터 나타난 주된 영화는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무용>, 앙리 쇼메트의 <반사(反射)와 속력의 장난>, <순수영화의 5분간>, 우제느 데스라프의 <기계의 행진>, 제르메느 뒬라크의 <아라베스크> <레코드 번호 957> <테마와 베리에이션>, 르네 클레르의 <탑> 등이 있다. 순수영화는 시각의 순수성을 뜻하며, 그 중에도 레제는 속력의 베리에이션과 리듬, 특히 다이내믹한 리듬을 강조했다. 그들이 개척한 기법은 그 뒤 극영화에 채용되었다.

초현실주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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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現實主義映畵

프랑스에 들어간 다다이즘은 기욤 아폴리네르 등의 신문학 운동 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선언'의 발표에 의하여 조직적인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이 되었다. 이것은 정신의 자동성에 따라 이지(理知)를 배제하고, 일상적인 현실을 뒤엎고 인간의 숨겨진 의식을 탐구하려 하는 예술운동으로서, 그 영향은 바로 영화에도 나타났다. 같은 해에 초현실주의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쓴 각본을 르네 클레르가 연출한 <막간(幕間)>이 발표되고, 그 뒤 30년대 초까지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화가·사진가인 만 레이는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의 이야기를 연출하여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만들었다. 시인·극작가인 앙트낭 알토의 각본, 제르메느 뒬라크 연출의 <조개껍데기와 수도사>는 영상(映像)으로 정신의 심층을 추구하려 한 시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에스파냐 사람 루이스 부뉴엘이 같은 나라 사람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합작한 각본을 자신이 연출한 <안달루시아의 개>는 이 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착란과 신비와 꿈이 구상적인 영상에 의하여 비현실적인 정경으로 나타나, 감각에 세차게 호소한다. 같은 두 사람의 <황금시대>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 모인 인간의 무리와 한 사람의 사나이에 의하여 종교, 사회, 그리고 사랑의 추구를 나타내고 있다.

초현실주의 영화는 30년대에 들어와서 급격히 소멸한다. 그러나 전위영화나 그 밖의 유파(流派)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현재의 영화에 가끔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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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映畵

영화의 탄생은 이야기거리를 지닌 극영화가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을 촬영한 실사활동(實寫活動)으로 말미암아서였다. 이와 같이 비극영화(非劇映畵) 중에서 뉴스 영화를 제외한 정보·선전·PR·과학·교육 등 광범위한 영화의 총칭으로 쓰이는 것이 기록영화라는 말이며, 이 말은 다큐멘터리 필름의 번역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은 일찍이 프랑스에서는 기행영화(紀行映畵)를 뜻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영국의 존 그리어슨이 기록영화 전반에 대하여 다큐멘터리란 단어를 사용한 이래, 일반적으로 이 말이 쓰이게 되었다. 기록영화로서는 이미 1912년에 영국의 H. 폰팅의 <스코트의 남극탐험>과 같은 대작이 있었고, 미국의 로버트 플라허티가 에스키모를 촬영한 <북극(北極)의 괴이(怪異)> (원명:北地의 나누크, 1922)는 영화사상의 획기적인 걸작이었다. 그리어슨 등 영국 작가들은 플라허티의 영화를 더욱 발전시켜, 산업이나 사회문제의 제재(題材)로 이용했다.

그들의 방법론은 '현존하는 사물의 창조적인 취급'이라는 데에 있으며, 정어리잡이를 그린 그리어슨의 <유망어선(流網漁船)>(1929)을 최초로 우수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 이론과 창작은 러시아의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안(映畵眼)' 설(說)이나, 같은 러시아의 몽타주론, 그리고 프랑스의 전위 영화에서 배운 바가 많다. 2차대전 전의 대표적인 기록영화로는 영국의 배질 라이트와 해리 와트의 <야간우편열차>, 와트의 무전(無電)과 어선에서 취재한 <북해(北海)>, 러시아의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가진 사나이>, B. 투링의 철도건설 기록 <툴크시브>,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의 전위적인 <철교> <비>, 역시 전위적인 프랑스의 장 비고의 <니스에서>, 미국의 플라허티가 영국에서 만든 <아란> 외에 마틴 존슨의 열대동물 기록, 파르 로렌츠의 농촌영화 <평원을 개척하는 쟁기> <강(江)>, 에스파냐의 루이스 부뉴엘의 빈농지대의 기록 <식량 없는 땅>, 독일의 발터 루트만의 전위적인 <베를린>, 레니 리펜시탈의 올림픽대회 기록인 <민족의 제전> 등이 있다. 대전 중에는 정보·선전과 그 밖에 장편 전쟁기록을 만들었고, 전후에는 영국에서 프리 시네마파(派)라 불리는 린제이 앤더슨, 카렐 라이스 같은 신인들, 프랑스에서는 <게르니카> <밤과 안개>의 알랭 레네에 이어 장 루쉬, 크리스 마르케르 등 시네마 베리테라 불리는 작가들이 나타나 기록영화발전의 새로운 일꾼이 되었다.

뉴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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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映畵

사회 전반의 시사적인 사건을 촬영·편집하여 정기적으로 보도하는 영화로서, 1910년 미국에서 만든 '파테 위클리'에서 비롯된다. 1차대전 후 점차 각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문화관광부와 그 밖의 정부 기관에 의하여 제작되고 있다. 각국 모두 제2차대전 전후가 뉴스영화의 전성기였으며, 항공기의 발달을 이용하여 새로운 보도가 전세계에 보내지고 신문·라디오와 함께 매스컴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발달에 따라 1950년경부터 어느 나라든지 극장용의 뉴스영화는 급속히 줄어들어 현재는 겨우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대신 매일의 텔레비전 뉴스의 제작이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다.

옴니버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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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nibus映畵

옴니버스란 합승마차·합승자동차를 말하는 것으로, 원래는 '여러 가지 사항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몇 사람의 소설가의 작품을 모은 책을 옴니버스 북이라 한다. 그로 인해 하나의 영화 속에 몇 개의 독립된 이야기를 모은 영화를 옴니버스 영화라 부르게 되었다. 서머셋 몸의 단편소설 넷을 4명의 감독이 연출한 <4중주>도 있고, 알렉산드로 블라젯트의 <그리운 나날>과 같이 한 사람의 감독 아래 몇 개의 콩트를 모은 것도 있다. 또 <7대죄(七大罪)>와 <복카치오 70>은 몇 사람의 감독의 콩트집이며, <스무살의 사랑>은 몇 나라의 감독이 동일한 주제를 다룬 콩트를 모은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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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tion映畵

움직이지 않는 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약동하게 하는 것을 애니메이트라 한다. 여기서 유래한 말로서 동화영화(動畵映畵)라고도 불린다. 그림을 한장씩 그려 1롤씩 촬영하는 만화영화로 그림자 놀이·인형·선화(線畵) 등을 포함하는 명칭이며, 영화발생과 거의 비슷하게 오랜 전에 만들어졌다. 1910년경 프랑스에서는 에밀 콜이 훌륭한 만화나 인형영화를 만들었고, 러시아의 L. 스타레비치도 그 무렵에 인형영화를 만들었다. 1920년에 독일에서는 로테 라이니거의 그림자놀이 영화가 있고, 미국에는 초기에 W.매케이, J.R.브레이의 만화가 있으며, 이어서 <뽀빠이>의 플라이셔 형제가 나타났고, 더구나 월트 디즈니의 만화가 나와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전후에는 영국의 존 할라스와 조이 배츨러의 만화, 캐나다의 노먼 매클러런의 추상적인 만화, 프랑스의 폴 그리모의 장편 만화, 미국의 스테판 보수스토의 만화가 각기 새로운 경향과 기술을 개척했다. 또 체코에는 이리 트른카, 카렐제에만, 헬미나 틸로버 같은 뛰어난 인형영화가 있다. 애니메이션은 현재도 전위영화의 수법을 계승하는 일이 많다.

영화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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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사이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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標準size映畵

극장용 영화는 토머스 A.에디슨(미국)과 뤼미에르 형제(프랑스)의 발명 이래 파퍼레이션(필름輪動用 구멍)이 뚫린 35mm나비의 필름이 쓰였으며, 그 화면의 가로·세로의 비율도 4대 3(1.33대 1)을 지켰었다. 토키 이후 사운드 트랙을 녹음하기 위하여 가로 나비가 좁아지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이 된 때도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세로의 치수를 줄여서 원래의 1.33대 1의 비율로 돌아와 오랫동안 표준 사이즈로 되어 있었다. 이 사이즈는 현재도 변함이 없으나, 와이드 스크린 시대의 출현에 따라 사실상 표준 영사(映寫) 사이즈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와이드스크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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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screen映畵

1950년대에 들어서서 텔레비전 보급에 대항하기 위하여 영화계는 와이드 스크린 영사법을 개발, 새로운 단계를 맞이했다. 현재의 극장용 영화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와이드 스크린 영사용으로 제작되어 있다. 와이드 스크린 영화는 한때 여러 가지 규격으로 나왔었으나 현재에는 다음 방식으로 통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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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Scope size 35mm

표준 필름을 사용하는데, 촬영용 렌즈로 에너머퍼틱 렌즈를 사용, 화상(畵像)을 좌우 2:1로 압축하고, 영사할 때에는 이를 반대로 좌우를 2배로 확대하는 에너머퍼틱 렌즈를 사용하여 영사 화면의 가로 세로의 비율을 2.35대 1로 한다. 이 방식은 프랑스의 앙리 크레티앙의 발명에 의한 것으로 1953년에 20세기 폭스가 채용, <성의(聖衣)>가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공개된 이래 와이드 스크린 영화의 표준 사이즈로서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시네마스코프'란 명칭은 20세기 폭스의 등록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명칭이 있고, 또 촬영기도 광학계(光學系)의 기구에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닌 것이 있다. 수퍼스코프파나비전, 토틀스코프 등, 명칭도 다양하게 상당한 숫자가 있으나, 현재에는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서의 영사화면의 규격이 통일되어 있다.

촬영에 있어서도 애너머퍼틱 렌즈를 사용하지 않는 시스템도 있다. 네가화면 2롤분을 찍어서 필름을 옆으로 돌려, 촬영한 네가를 프린트 작업으로 1롤의 화면 사이즈로 좌우를 압축하는 테크니라마, 표준 사이즈인 네가화면의 상하를 자르고 좌우를 압축하는 수퍼스코프 등이 그 주된 것인데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촬영에 에너머퍼틱 렌즈를 사용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현재 쓰이고 있는 것은 테크니스코프인데, 이것들은 1롤분의 네가를 2롤분씩 촬영하여 프린트로 표준 프레임 사이즈로 확대함과 동시에 좌우를 압축하여서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영사법이 가능한 포지 필름으로 만드는 것이다. 화면의 해상력(解像力)은 조금 떨어지지만 네가코스트가 절반이 된다는 이점이 있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비스타비전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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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ta Vision size

1953년에 미국 파라마운트가 발표한 것으로서, 2롤분의 네가사이즈로 촬영한 것을 그대로 1롤분으로 축소 프린트하여 대형 스크린 영사에 적합한 선명도(鮮明度) 좋은 화면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영사에 에너머퍼틱 렌즈가 필요 없으며 화면의 가로 세로의 비는 1.85대 1 내지 1.66대 1이다. 요새는 사용되지 않으나 표준 사이즈의 네가의 상하를 잘라서 영사하는 이른바 와이드 스크린 영사법을 답습하고 있다(표준 필름의 와이드 영사는 1.66대 1이 보통이다).

시네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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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rama

미국의 발명가 프레드 월러가 고안한 3대의 촬영기로 동시에 촬영한 필름을 3대의 영사기로 영사하는 시스템이다. 1952년에 발명되어 대형 영화의 선구가 되었으나, 1962년 이래 1대의 촬영기와 영사기를 사용하는 70mm판으로 개량되었다. 만곡도(彎曲度)가 큰 스크린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고 화면의 가로 세로의 비는 2대 1로 되어 있다.

70mm 대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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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milimeter大型映畵

1955년에 발표된 70mm 너비의 대형 필름을 사용하는 토드 A. O.(제1작은 <오크라호마!>) 이후 초(超)와이드 스크린 시대를 개척한 시스템으로서, 촬영에 애너머퍼틱 렌즈를 사용하지 않는 것(토드 A. O. 수퍼 테크니라마, 파나비전 70 등)과 촬영할 때 애너머퍼틱 렌즈를 사용하는 것(울트라 파나비전, MGM 카메라 65 등)이 있는데 모두가 영사용 프린트는 70mm의 대형 필름으로, 애너머퍼틱 렌즈는 사용치 않고 표준화되어 있다. 화면의 가로 세로의 비는 시네라마와 같이 2대 1이다.

입체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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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體映畵

입체영화의 기술은 오랜 전부터 개발되어 왔으나 좌우의 눈의 시차(視差)를 이용하여 입체감을 준다는 원리는 변함이 없다. 1953년에 폴라로이드(偏光) 안경을 사용하는 입체영화가 출현하여 한때 유행했으나 2대의 영사기를 동시에 돌리고, 또 안경을 필요로 한다는 불편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다. 현재 특수 스크린과 영사 각도에 따른 안경이 필요 없는 입체영화를 러시아와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중스크린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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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重 screen system

1950년대에 체코에서 라테르나 마지카라는 스크린을 여러 개로 분할한 새로운 표현 방법이 발표된 이래, 영화의 시각적 기능의 다면성(多面性)을 탐구하는 시스템이 활발해졌다. 십수대의 영사기를 사용하여 360도의 원형 스크린에 영사하는 서큐라마를 비롯하여, 몬트리올의 EXPO 67로 주목된 체코의 키노 오토마트와 디아포리에크랑, 캐나다의 5면의 스크린을 사용한 라비링스, 그 밖에 허다한 방식이 있어, 장래의 영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소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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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型映畵

소형영화에는 널리 알려진 대로 16mm와 8mm가 있다. 종래에는 아마추어용으로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광학계(光學系)와 감광재료의 발달에 따라 프로페셔널 용도에 쓰이게 되었고, 특히 16mm는 TV 영화의 발달에 따라 이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또 8mm 영화도 실험영화에 쓰일 만큼 그 기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또 소형영화는 자기녹음법(磁氣錄音法)의 발달로 토키화(化)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영화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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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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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藝術論 영화의 예술성을 이론적으로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리치오니 카뉴도(1879-1923)라 한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빛의 펜'으로 그려지고 영상으로 만들어진 시각(視覺)의 드라마라고 그가 주장한 것은 1911년이었다. 그는 예술의 기본은 건축과 음악이며,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림과 조각과 시와 무용을 들었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영화이며, 움직임의 조형(造型)예술이라 하여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카뉴도는 20세기 초기부터 파리에 살면서 아폴리네르, 피캇, 스트라빈스키, 레제 같은 예술가들과 친분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뒤에 프랑스의 영화 이론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카뉴도는 영화의 연극성을 부정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매우 분명하게 하였고, 그런 만큼 영화의 영상성(映像性)의 순수성에만 그 표현력을 제약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시(映畵詩)의 전도사(傳道師)'(장에프스탕)라고 불리는 까닭은 이런 데에 있다.

영화의 포토제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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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畵-photogenie論 프랑스의 루이 델뤼크(1890-1924)는 젊은 저널리스트 문학자였으며, 카뉴도의 영향을 받고 그의 후계자로서 프랑스의 영화예술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영화의 영상이 단순한 사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유기적인 내재성을 주장하고 이것을 '포토제니'(사진이란 photo와 精·靈을 뜻하는 genie를 붙인 造語)라 이름지었다. 델뤼크는 포토제니의 4가지 기본적 요소로서 '장치' '조명(빛)' '억양(抑揚)' '마스크(面)'를 들고, 이 요소들을 감독이 자유로이 선택하고 짜맞춘 창조 위에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억양'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침내 영화의 몽타주론의 발전을 가져왔다(몽타주라는 말을 영화의 테크닉의 용어로서 先見한 사람은 델뤼크였다). 델뤼크는 1920년대에 발달한 프랑스 전위 영화(아방가르드)의 이론적인 리더가 되고, 자기 자신이 <광열(狂熱)>과 그 밖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애석하게도 요절(夭折)했다. 그의 이론은 프랑스에서는 레온 무시나크, 장에프스탕, 제르메느 뒬라크, 르네 클레르 등의 전위주의 전성기의 이론가 작가들에게 계승되고 실천되어 갔으나, 미술·음악 등의 다른 예술의 전위와 특히 밀접한 결합을 보여 사일런트 영화시대의 영상주의(映像主義)의 정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표현주의 영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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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主義映畵論 프랑스에서 이처럼 몽타주론의 전제를 이루는 이론 정립이 활발해졌을 무렵, 독일에서도 사회학과 미학(美學)의 두 견지에서 영화의 예술론이 추구되고 있었다. 그 선구적인 업적은 우수한 미학자인 콘라트 폰 랑게에게서 볼 수 있으며, 랑게가 <현재와 미래의 영화>(1920)라는 대작에서 도달한 결론은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부정적인 것이었다. 예술의 일류전주의자로 유명했던 랑게는 "영화는 대상(자연)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현실화할 뿐으로, 예술로서 필요한 인류전에 의한 의식적인 자기 기만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정신적인 창작활동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영화는 그 기술적인 진보에 따라 사실적인 재현력이 높아갈수록 예술성에서 멀어진다. 움직이는 사진은 정지하고 있는 보통 사진보다도 예술성이 적고, 그림이나 조각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구경거리의 장르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겨우 영화의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은 영화의 소재를 제약하여 판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랑게의 설은 이 시점에서도 완고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이었으나, 1910년대에 독일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운동인 표현주의와 영화의 연결에 있어서 랑게가 시사한 "소재를 제약하고 판타지의 표현을 추구"하는 면에서 1920년대의 영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바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대전의 패전 후에 독일의 경제적·사회적 혼란이 표현주의를 크게 육성하는 요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영화이론에 비해 사회적이고도 실천적인 성격이 한층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문학과 연극에서 영화에 미쳤으나 이론화되기 전에 <이기주의자>(1919)와 같은 걸작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1921년에 화가 리히터(Hans Richter)가 비킹 에겔링과 추상적인 화상(畵像)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조형적인 실험영화를 발표하여, 급진적인 성격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의 이론은 당시에는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선구자인 리히터는 후년에 이 실험은 입체주의 방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영화라는 미디엄을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우리는 영화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영화를 이용할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경험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기대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독일의 새로운 영화 운동에 대하여 지크프리트 크라카워는 프랑스의 신진 영화작가들과 뜻을 모아서, 1920년의 아방가르드 영화의 핵심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그 미학적(美學的) 분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 시대의 영화의 표현력은, 스토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연극이나 문학에 멀리 미치지 못한 것이 큰 약점이었으므로 스토리를 극도로 색다른 소재로 만들든지, 혹은 전혀 스토리가 없는 순수영화를 지향했다. 이리하여 영상의 순수표현에 따른 영화언어(映畵言語)의 확대를 탐구했다. 극단적인 카메라 앵글, 짧은 쇼트의 연속으로 된 커팅 소프트 포커스 촬영, 그 밖의 새로운 용법이라든가 그로부터 심리적인 리얼리티가 추구되었다(크라카워 <영화의 이론> 1960).

영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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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畵眼

포토제니에서 표현주의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에 이르는 일련의 전위주의 영화의 이론적인 근거는 영상의 중요성과 움직임을 수반한 새로운 조형주의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밝혀져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영화속 영상의 사실성에 영상의 의미를 제1의(第一義)로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 선구자가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젊은 시인으로, 러시아 혁명 후 인민위원회의 뉴스영화의 일을 보고 있던 지가 베르토프(1896-1954)였다.

베르토프는 렌즈의 절대적인 묘사력을 믿어 의심치 않던 인물로서, "렌즈를 돌릴 곳은 현실의 중심이어야 한다. 따라서 영화는 촬영소나 배우는 필요가 없고 스토리도 시나리오에 따라 촬영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눈(映畵眼)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자신이 영화의 눈이고 자신은 기계의 눈이다. 오늘부터 자신은 인간의 부동성(不動性)에서 영원히 해방되었다. 자신은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자신은 대상물에 다가 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영화적 기록의 개념에 포함된다. 우리가 보는 것이 영화다"라는 극단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몽타주론과 다큐멘터리론의 가능성을 내포한 베르토프의 유명한 <영화안(映畵眼, 키노키)>설로서 스스로 <카메라를 가진 사나이>(1929)와 그 밖의 작품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베르토프의 이론은 영화의 리얼리즘의 추구방법에 많은 자기모순을 안고 있었다. 카메라가 아무리 대상을 충실하게 잡았다 해도 편집단계에서 선택성이 개입하면 사실(事實)은 사실(事實)일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베르토프가 주장하는 기계의 무감동성 그 자체조차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으며, 그의 이론은 실제화(實際化)에 있어서 막다른 길에 봉착한 것이 당연했다.

몽타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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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age論 영화이론은 몽타주론의 조직적인 추구에 따라 근본적으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montage는 프랑스어로 '비등(沸騰)하다' '상승하다' '들어 올리다' '짜맞추다' '마무리하다' '결합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 시기(1920년대)의 영화에 있어서는 촬영된 필름의 단편을 '편집하는' 기술용어였다. 이때까지 써 온 바와 같이, 필름의 편집이 영화적 표현의 중요성이라는 것은 많은 이론가들에 의해 인식되기 시작했으나, 이 프랑스어에 특별한 뜻을 부여한 것은 러시아의 영화 작가와 이론가들이었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안(映畵眼)' 주장이 모순에 직면하여 좌절한 것도 몽타주론의 이론에 어두웠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몽타주의 중요성을 조직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베르토프와 같은 시대의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다. "필름 하나하나의 단편은 아직 영화가 아니라 그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예술은 이 필름들에게 순서를 부여했을 때에 시작된다. 이 창조적인 순서의 차이에 따라서 영화는 온갖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몽타주이며,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표현방법이다"고 하는 것이 쿨레쇼프의 사고방식의 요점이었다. 쿨레쇼프는 기성영화를 분석함으로써 몽타주의 본질을 대충 해명했으나, 베르토프와는 달리, 구성되는 쇼트는 어디까지나 소재이고 결합에 의해서만 영화의 표현이 결정된다는 점에 주장의 한계가 있었다.

쿨레쇼프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연쇄몽타주'라 불리고 있는데, 그것을 개개의 쇼트의 뜻을 지닌 진정한 몽타주론으로 전개시킨 것은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이라는 위대한 두 영화 작가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몽타주론은 대립된 성격을 갖고 있었다.

프세볼로드 푸도프킨(1893-1953)은 쿨레쇼프의 직접 계승자로, 영화예술의 기초는 몽타주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쇼트(카메라의 회전을 중단하지 않고 촬영한 연속적인 화면의 단위. 커트와 같은 뜻)는 시에서의 단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 단어들을 짜맞추는 것처럼 쇼트의 결합에 따라 영화는 형태와 생명이 주어진다. 카메라 앞의 피사체는 아직 영화가 아니라 그 재료이다. 몽타주해야만 비로소 영화적 시간이나 영화적 공간이 영화의 리얼리티로 된다. 그러나 몽타주에 의해 영화적 시간과 공간의 리얼리티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쇼트의 연속성에 대한 설계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푸도프킨은 "영화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 촬영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촬영되어 있는가에 의한다"고 말한다. 푸도프킨은 영화의 예술적 표현은 몽타주를 기초로 각본과 연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는 몽타주의 구성단위를 미시적(微視的)인 점까지 추구하여 슬로모션 촬영의 기교를 사용한 '시간의 클로즈업'에 대한 생각에까지 도달했다.푸도프킨은 몽타주 방법론을 분석 확립했는데, 그에 따르면, 몽타주는 '대조' '병행' '유사(類似)' '동시성' '라이트 모티브'의 5가지 방법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수법은 토키에 있어서도 화면과 음향처리와 표현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9)은 영화의 표현은 변증법적인 비약으로서 달성된다는 점에서 쿨레쇼프와 푸도프킨의 연쇄설과 대조적이다. 그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상극(相剋)몽타주'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상극 몽타주의 근거는, 몽타주는 쇼트의 연쇄가 아니라 영상의 충돌이며, 이 충돌로 주장하고 설명할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충돌(相剋)의 몽타주가 뜻을 갖기 위해서는 그 구성단위를 이루는 쇼트가 각각 몽타주의 세포로서 유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그 세포인 쇼트 속에 상극(相剋)을 환기하는 모순이 잠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쇼트 자체가 몽타주를 필요로 하는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은 그 뒤 음향·음성을 수반하는 토키, 색채영화의 적용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확대 스크린과 입체영화의 기능성도 내다보았다. 이를테면, "색채의 정서적인 이해와 기능은 영화 전체의 산 움직임의 실제적인 과정과 일치한 작품의 색채적인 주제(主題)의 결정에 의해 생기게 될 것이다. 색채와 소리의 절대적인 일치와 그 뜻, 소리와 특별한 정서와의 절대적 관계 등에서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어떤 색채, 어떤 소리가 특정한 정서 또는 특정한 과제에 가장 적합한가를 결정하는 것이다"(1943년 간행 영어판 <映畵感覺> 속의 <色彩와 意味>에서. 이 책에는 자작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氷上의 싸움의 장면에서 프로코피에프가 작곡한 17소절의 음악과 몽타주의 관계를 상세히 분석 해설한 흥미깊은 문장도 있다).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은 우수한 작가의 창조적 정신의 이론화로서의 영화미학(映畵美學) 클래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블라지,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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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a Blazs(1884-1949)

이 위대한 두 실천가가 수립한 이론에 평행해서,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친 영화미학자의 업적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중에도 헝가리의 시인·작가인 벨라 블라지는 1924년에 발표한 <시각적인 인간> 이후, 영화미학의 창조적인 계통 수립과 뛰어난 선견지명을 보인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몽타주와 같이 클로즈업을 중요시하여 이 두 가지가 영화언어(映畵言語)의 가장 큰 요소라고 말했다. 블라지는 1949년에 죽었는데 최후의 저서 <영화>는 대단히 많은 계시(啓示)를 포함한 명저이다. 블라지의 영화의 미학적 분석을 간단히 소개하기는 푸도프킨이나 에이젠슈테인의 이론 소개보다도 어렵다. 여기서는 그가 즐긴 클로즈업의 미시성(微視性)을 본받아 블라지다운 문장을 1개만 소개한다.

"몽타주는 영화의 완전히 특수한 표현 수단의 하나이다. 만일 어쩌다가 무대 위나 스튜디오 안에서 연출되는 하나의 장면이 움직임이 멎는다면, 이미 그 곳에는 실제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지고, 리듬이나 템포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촬영된 장면이 굳어 버린 듯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스크린에 나타나는 화면에는 힘찬 움직임과 변화를 보일 수가 있다. 그러한 특수한 능력을 영화는 지니고 있다. 배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시선은 카메라와 함께 어느 지점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간다. 인물이나 물건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카메라는 신경질적으로 급속히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선회한다.

그리고 차례차례 섬광처럼 튀어나오는 편집, 확정된 쇼트는 격렬한 리듬으로 교체된다. 그것은 외면적인 움직임을 전혀 수반하지 않은 채 장면의 내부적 움직임을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전체로서의 장면은 버티고 선 커다란 기계처럼 죽음의 경직(硬直)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기증을 일으킬 듯 바삐교체되는 클로즈업은 시계의 조그만 톱니바퀴의 움직임과 같은 율동(律動)을 보인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눈썹의 경련이나 입가의 움직임을 본다. 이 온전한 부동(不動) 속에 극도로 긴장된 삶의 충만함을 본다."

다큐멘터리 영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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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映畵論 블라지와 동시대의 이론가로서는 <예술로서의 영화>의 저자인 독일의 루돌프 아른하임과 <영화의 문법>의 저자인 영국의 레이먼드 스포티스우드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는 몽타주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 중에서 영화작가에게 실제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영국의 로다(Paul Rotha, 1907-?)가 있다.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1936)는 사일런트 말기부터 일어난 영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활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나,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몽타주의 기본이 되는 촬영대본(撮影臺本:콘티뉴이티)의 확립이며, 영화의 창조적인 성과는 콘티뉴이티를 세우는 단계에 있어서의 분석과 몽타주의 종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로다는 쇼트의 액추얼리트(事實性)에다 영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두도록 강조하는 나머지, 성급하게도 극영화의 허구(虛構)를 배제하는 많은 모순을 보이고 있었는데, 영화의 리얼리즘이 기록성에 있다는 문제를 강력하게 내세운 점에서 2차대전 이후의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카메라 만년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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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萬年筆說

영화의 이론은 그 뒤에도 해마다 바뀌고 발전되어 갔으나, 그 근본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선구자들의 주장이 수정되고 심화(深化)된 것이라 하겠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영상에 의한 리얼리즘의 추구와 영화의 사회성에 대하여 프랑스의 앙드레 바장,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 간 지크프리트 크라카워 및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탐구되었다.

한편, 1947년에 젊은 영화 작가 알렉산드르 아스트뤼크는 '카메라 만년필'설을 제창하여 현재의 시네마 베리테의 선행자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카메라 만년필 시대라고 부른다. 그 영상은 대단히 정확한 뜻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영화가 조금씩 시각·영상지상주의, 직접적인 삽화, 구체적인 것 등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쓰여진 언어와 같은 유창함으로 섬세한 문학의 한 형식이 됨을 뜻하고 있다. 어떤 분야도 영화에는 입장금지가 될 수 없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빼앗긴 명상(暝想), 인간의 생산에 관한 하나의 견지(見地), 심리학, 형이상학, 여러 가지 사상, 여러 가지 정열 등이 매우 정확하게 그 영역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에 관한 사상과 비전들을 오늘날 영화만이 설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몽타주론의 지나침이 전형적인 영상의 결여를 초래했다 하여 오히려 종합적인 화면구성과 시야 깊은 팬포커스 묘법(描法)이 오래지 않아 시네마스코프에서 오늘의 와이드 스크린 시대를 창조하게 됐다는 앙드레 바장의 주장도 경청할 만한 것이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찍이 몽타주론이 일으켰던만큼 커다란 새로운 이론은 확립되지 못했다.

아스트뤼크의 '카메라 만년필'설은 이론적으로 확립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 같은 영화의 스타일에 연결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실제로는 이를 통일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생긴 배후에는 미학적인 문제와 동시에 영화가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누구에게나 쉽게 제작될 수 있게 된 기술혁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는 없다. 기술적인 이론은 일단 생략했으나 앞으로의 영화는 기술적인 문제를 이때까지보다도 더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