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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국무용〔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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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外國舞踊

1924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일본 등의 무용가들이 내한 공연을 가짐으로써, 외국의 각종 무용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문예부흥 이래 전통을 자랑하는 서양의 고전무용인 발레(ballet)가 소개되는가 하면, 고전무용의 전통을 탈피한 낭만적 무용시인(舞踊詩人) 사하로프(Sakharoff) 부처의 무용시의 소개로 현대무용은 선보였다. 또한 우리나라 신무용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일본의 신무용가 이시이(石井漢)에 의하여 서구적 무용이 들어오는 등 1924년 이래 약 10년 간은 서양의 근대·현대에 걸치는 고전무용·현대무용을 한꺼번에 대하게 되는 역사적인 기간이 되었고, 이로써 이 땅에 신무용의 뿌리가 내려지게 되었다.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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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et

사실상 한국발레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제정 러시아의 망명무희 엘리아나 파블로바가 중국·만주 등의 순회 공연을 마치고 평양을 거쳐 서울에 온 것은 1931년 7월이었다. 경성일보 주최로 7월 4일, 5일 희락관에서 열린 파블로바의 공연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발레공연이었다.

엘리아나 파블로바(Eliana Pavlova)는 20세기 초 발레의 여신이라 칭송받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의 수제자로 제실무용학교(帝室舞踊學校)에서 전통적인 러시아 발레를 전공한 무희이며, 1920년 일본 망명 후 중국순회공연 도중 사망하기까지 일본에 러시아 발레를 보급시키기에 진력한 무용가이다.

한편 1943년을 전후해서 이 땅에 처음으로 발레를 이식한 한동인(韓東人)·정지수(鄭志樹) 등도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문하생이던 백성규와 핫토리(腹部智惠子)에 사사했다. 6·25 이후 이 땅에 본격적인 발레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임성남(林聖男)·조광(趙光) 등도 또한 백성규와 핫토리의 제자이니 우리나라 발레 계통(系統)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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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舞踊

서양의 고전무용인 발레에 불만을 느껴 근대적인 무용으로 변형 발전된 현대무용의 소개는 1926년 3월에 이루어진 이시이(石井漢) 서울공연으로 시작된다.

이시이(石井漢)는 처음 이탈리아인(人) 발레교사(敎師)인 로시이에게서 발레를 배웠고, 또 발레에서 그의 무용생활(舞踊生活)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활동이 발레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창작무용으로 전향한 동기는 당시 1900년대 혜성처럼 나타나 전 구미(全歐美)에서 무용의 선풍을 일으킨 일세(一世)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8-1927:미국인)의 개성적이며 자유롭고, 영감과 내적 표현을 위하여는 기교와 의상 등에서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이념에 의한 무용의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후일 우리나라에서 신무용의 선두적인 역할을 맡은 최승희(崔承喜), 조택원(趙澤元) 등 그의 문하를 거쳐 무용가로 출발한 사람이 많음을 생각할 때 이시이의 무용이 우리나라 무용계에 끼친 힘의 지대함을 알 수 있다.

<1929년> 순순한 예술성으로 다룬다면 문제는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인에 의한 신무용 상연은 1929년 배구자의 음악무용이 그 효시(嚆矢)이며, 더구나 이 해는 이시이의 문하에서 돌아온 최승희가 무용연구소를 개설한 때이니 이 땅의 신무용의 토착기(土着期)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 한국 사람으로서 최초의 공연인 '제1회 최승희 창작무용회'가 상연됐다. 작품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 <해방을 찾는 사람들> 등은 당시로서는 좀 대담한 민족주의적인 것이었으며 고전을 현대화해보려 한 것이었으나, 너무 고답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일반인에게는 쉽게 납득되지 않았지만 무용에 대한 당시의 사회인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3년 간에 걸쳐 5회의 발표회를 가지는 등 거칠고 메마른 신무용의 황무지 한국에서 고난 속에서도 참된 예술무용의 씨를 뿌리고 가꾸려고 노력한 그의 개척의 발자취는 우리 신무용 개척사의 가장 많은 부분을 점유할 것이다.

한편 세계적인 무용시의 대가, 독창적 낭만무용가인 사하로프 부처(夫妻)가 우리나라 서울을 찾아온 것은 1931년 3월이었다. 우리나라 신무용사에 특기될 사하로프 부처의 서울공연은 경성기독교 청년회 주최 매일 신보사 후원으로 3월 2일과 3일 공회당에서 있었다. 이때의 무용작품들은 <고야에서 붙여서> <꿀벌> <붉은 원무곡> <흑인의 노래> <황혼에 부치는 찬가> 등이었다. 사하로프는 참으로 근대무용의 대두 이래 한 금자탑을 이룬 세계적인 무용시인이다. 사하로프 무용을 평한다면, 선이 가늘고 매우 낭만적이라 하겠다. 영원한 방랑인인 사하로프의 무용시, 현란한 의상에 휩싸인 그들의 무용, 그러나 운동에 있어서 기초적인 훈련과 무용구성 등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 오직 음악과 색채를 위주로 한 그들의 무용시는 우리나라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 발레를 제외한 현대무용에서는 이 무용시의 영향이 저류(底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하로프 부처의 경우에는 그들의 아류적(我流的)수법으로도 그처럼 낭만적인 무용시를 빚어낼 수 있었으나 그들 부처 아닌 우리나라 무용가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그들의 수법이라든지 경향을 따르려해도 너무도 독자적이었던 사하로프의 무용시를 참조할 수 없었던 것에 후일 우리 무용계의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1934년> <작렬하는 사색>(무음악), <어떤 움직임의 매혹>(무음악), <우울> 등의 일련의 무용시 작품으로 등장한 '조택원(趙澤元) 제1회 발표회'는 여성적인 가냘픈 무자극한 춤이었기는 하나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라는 위치와 좋은 체구적 소재, 그리고 이시이의 제자였다는 조건 등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음해 제2회 발표회에는 <승무의 인상> <풍년제> 등 민속조를 가미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대표적인 작품은 <승무의 인상(후에 袈裟蝴蝶으로 改名)>이다. 양악반주와 양무적 수법(洋舞的手法)으로 처음 시도된 이 작품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어, 이후 그의 작품 방향이 향토색을 띠게 된 원인이 된 것 같다. 조택원은 이 땅의 성장기인 신무용사를 빛나게 한 사람이다.

개척기에 있어 우리 신무용의 부자연성의 원인도 한국 근대의 부자연성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사조를 달리하는 서구의 각종 무용을 전후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대하게 된 때문에, 정당한 비판·소화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 그 하나요, 당시의 한국형편으로는 불가피하였겠지만 일본인을 통해서 간접으로 서구식 신무용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도 이시이류(流)의 현대무용이 우리 신무용의 주류를 이루게 되어 무용사조가 단조로운 것이 또 하나의 사실이요, 개척기에 있어 유일한 예술무용의 시도자 최승희는 순수무용으로서의 수련과 기초도 옅은 데다가 갑자기 처음부터 과도한 사상성을 담으려 했기 때문에 무용작품으로는 기교와 내용이 부합되지 않는 무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개척기를 지나 성장기로 접어들면서는 최승희나 조택원의 무용작품들이 한결같이 현대무용보다도 민족적 색채를 지닌 한국무용으로 주류를 바꾸었고 최승희는 개척기의 사상성을 버리고 서정으로 작품세계를 전환해 버렸음은 주목할 사실이다.

6·25 이후의 외국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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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以後-外國舞踊

서울수복 이후 무용양상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달라져서 그것은 완전히 신·구세대의 교체였다는 것만 아니라 일본에서 돌아온 임성남·조광, 국내의 송범(宋范)·주리(朱莉)의 발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무용의 여명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 주었다.

즉 임성남(林聖男)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무용생활을 하다 1956년 귀국, '임성남 발레단'을 창단하고 12회에 걸친 개인 발표회를 가졌으며, 5·16 군사정변 후엔 국립무용단 단장으로 재직하면서 정기공연 제6회를 공연한 바 있다. 1968년에는 미국 국무성 초청을 받아 2년동안 모던발레를 연구하고 돌아온 뛰어난 존재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불(禮佛)> <오줌싸개의 향연> 등이 있다. 주리(朱莉)는 도쿄 마스다(益田隆) 발레연구소와 정지수(鄭志樹) 발레연구소에서 사사하고 1956년에 당시의 시공관에서 제1회 작품 발표회를 가졌으며 1957년에는 '주리발레연구소'를 개설했다. 한국무용협회와 한국 발레단에서 일하는 한편 1967년에는 에스파냐의 '황실무용학교'에 유학하고, 1969년에는 미국 '재즈발레 스튜디오'에서 수학하여, 본격적인 플라멩코를 한국에 옮겨 놓은 사람이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도포> <무희 타이스> <코리언 판타지> <카르멘>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외국무용은 초창기의 혼란기를 거쳐 성장하여 6·25전쟁 이후를 계기로 발레, 현대무용 등의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여 왔다. 그러나 세계의 무용사조는 여러 가지로 변화 발전되고 있으며 종합적인 연출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국무용도 장차 기대되는 바 크다.

외국무용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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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舞踊-導入

한국에 본격적으로 서구식 무용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6년 일본인 이시이(石井漢)가 경성(京城) 공회당(公會堂)에서 신무용 공연을 가졌을 때부터이다. 이시이 이전에도 한국에 외국무용이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즉, 1920년 러시아령(領) 블라디보스톡에서 성장한 10여 명의 우리나라 대학생 음악회 일행이 경성에 왔을 때 슬라브의 민속무용 코파크를 소개, 이 이방(異邦)춤은 신기롭고 이채로와서 전국에 유행했다. 이 춤의 유행은 춤을 천시하던 대중을 크게 계몽시켜, 이후 우리 무용의 선구자들이 거기에 뛰어들 용기를 심어 주었다.

한편 외국인 중에서도 백계(白系) 러시아인인 헬렌 등이 매혹적인 춤을 보여주어 개안적(愾眼的)인 역할을 했고, 엘레나 에르니크가 이끄는 이탈리아 무용단이 또한 외국무용을 선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외국인 무용은 1927년 스라비안 스카야 합창단의 공연 프로그램의 일부였고, 발레라는 이름의 춤은 일본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한국인에 의해서 서구적 무용이 도입된 것은 1926년 이래 이시이의 문하에서 신무용을 익힌 최승희(崔承喜), 조택원(趙澤元)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서구식 춤으로 출발하였지만 우리의 신무용으로 전환한 사람들로서, 외국무용을 우리나라에 전파시킬 수 있었던 도관(導管)적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러다가 광복 전까지는 많은 외국무용 전문가가 생겨나 그 중 김민자(金敏子), 진수방(陳壽芳), 주리(朱莉) 등이 해외로 나가 엘리아나 파블로바나, 마담 그레아스노바 및 일본인에게 발레를 사사했다. 또 6·25전쟁을 전후해서는 조광(趙光), 임성남(林聖男) 등이 도일(渡日)하여 발레를 전공했고, 국내에서도 송범(宋范)·이인범(李仁凡) 등이 있어 외국무용의 발전 및 정착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조선무용예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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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舞踊藝術協會

1946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직된 무용인들의 협의체.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조선의 신무용을 역사의 정당한 궤도 위에 올려놓고,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인의 혈액으로 씻어 다시 꽃피게 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무용예술협회'가 조직된 것은 의의있는 일이었다. 이 협의체는 그 해 8월 5일부터 3일 간 국도극장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는데, 이 또한 최초로 가진 무용인들의 일대 합창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무용예술협회'는 현대무용부·발레부·교육무용부·이론부·미술부 등으로 구성되었고, 위원장에 조택원(趙澤元), 각 부 수석위원회에는 최승희(崔承喜), 정지수(鄭志樹), 함귀봉(咸貴奉), 현철민(玄哲民), 김정환(金貞桓) 등이 담당했다. 그리고 창립공연의 작품은 <원무곡(圓舞曲)> <봉선화> <산신무(山神舞)> <만종(晩鍾)>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첫출발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무용인들간의 반목과 질시로 시종 별로 협의체다운 일도 못하고 그야말로 유명무실하게 끝나고 말았다.

신인무용가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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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舞踊家-登場

'조선무용예술협회'가 유명무실한 협의체로서 아무 일도 못한 반면 6·25전쟁 때까지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것은 한동인(韓東人)이 주재한 '서울발레단'이었다. 그러나 <인어공주(人魚公主)>가 공연되던 날 전쟁이 일어나 '서울발레단' 역시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6·25전쟁으로 많은 무용인들이 납북되거나 피살되었는데 이때 김민자(金敏子), 진수방(陳壽芳)을 위시한 신인들이 남아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 중 송범(宋范)이 중심이 되어 대구에서는 '한국무용단'이 창설되었는 바, 여기에는 주리(朱莉), 이인범(李仁凡)외 약 20명이 규합, 연습장조차 없이 각고를 무릅쓰고 연습을 해 나갔다. 이들은 1951년 5월 10일 부산에서 클래식 발레 및 작품으로 첫 공연을 가졌고, 계속하여 대구·부산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한편 1951년과 1953년에 조광(趙光)과 임성남(林聖男)이 일본에서 귀국, 부진상태에 있던 무용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조광은 귀국 후 진수방 주재로 '한국발레예술단' 공연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귀국 후의 '임성남 발레단'의 첫 공연이었다. 이 첫 공연은 한국 초유의 본격적인 발레로서 이때의 작품은 <로맨틱 조곡> <목신(牧神)의 오후> <백조의 호수> 등이었다. 오늘에 이르러 신인무용가들은 각 대학 및 신인무용발표회를 통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1959년부터 동아일보사가 연례사업으로 개최하고 있는 '신인무용발표회'는 신인무용가의 등용문으로서 그동안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였으며, 무용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큰 자극과 격려를 주었다. 또 이화여대를 비롯하여 몇 대학에 무용이 정식과목으로 교수되고, 여자중·고등학교에서도 체육과에 무용이 포함되게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외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외국무용인의 내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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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舞踊人-來韓公演

해외 각국의 외국무용이 도입된 이래 외국무용인 및 무용단의 수는 오늘날 일일이 매거(枚擧)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외국무용 도입의 초기에는 이시이(石井漢)나 헬렌, 스라비안 스카야 합창단 등 그 수가 한국무용계의 인구처럼이나 적었으나 그런 중에도 1931년 세계적인 무용시의 대가 사하로프 부처의 공연은 우리나라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무용계가 정돈되고부터 차츰 외국인의 내한 공연회수도 많아졌고, 그것은 또한 한국의 외국무용계에 대한 자극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 광복이후 최초로 맞은 '자닌 샤라 발레단'의 공연은 국내 발레의 실력을 세계적인 반성과 평가로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때 공연된 작품은 <여섯 사람을 위한 구도>(차이코프스키 曲), <빈사의 백조>(생상스 曲), <로미오와 줄리엣>(차이코프스키曲), <파리의 외국인>(장 비너다니 바크레이 曲) 등이었다.

그 후 69년 '런던 페스티벌 발레단', 73년 '도쿄시티 발레단', 75년 영국 '로열 발레단', 서독 '쾰른 현대무용단' 등이 잇따라 공연하였으며 84년 '머스 커닝엄 현대무용단' '워싱턴 발레단', 86년 '아메리칸 발레코미디무용단', 일본 '와카야키류(若柳流)가 부키무용단'의 내한공연으로 우리나라 무용계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한국의 외국무용의 현황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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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外國舞踊-現況-展望

외국무용 도입 초창기에 비해 한국의 외국무용계도 상대적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한국 외국무용계의 좌표를 생각해 볼 때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용인의 더욱 피나는 정진과 국가적인 뒷받침이 아쉬울 뿐이다. 이런 전제 아래 우리 외국무용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발레는 국립발레단이 유일한 직업무용단으로서, <지젤> <코펠리아>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의 전막(全幕) 작품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하였으며, 발레를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밖에 직업발레단은 아니지만 각 대학 무용과의 발레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도사대 무용과는 정기발표회는 물론이고 미국·동남아 등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이화여대 무용과도 연 1회 이상의 정기 발표회를 갖고 있다. 중앙대학교 무용과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남학생들의 참여가 적극적인 것이 주목을 받을 만한다.

현대무용은 이화여대 무용과에 의해 오랫동안 명맥이 이어져 왔는데, <수퍼스타> 등 대작을 발표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또 이화여대 동문들의 모임인 '콘템퍼러리'가 출범공연을 가짐으로써 활동을 기대받은 바 있다.

한국의 외국무용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무용수 양성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무용수의 양성은 외국과 같이 개인 연구소 단위의 양성이 필요한데, 우리의 경우, 재정상으로 연구소의 경영이 어려워 개인 연구소를 통한 무용소 양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능한 외국무용수가 되려면 탁월한 재능과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오랫동안에 걸친 정확하고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수한 무용수의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과정을 이수하는 곳이 적으므로 무용수의 이상적인 양성은 어려운 실정이다. 이 밖에도 직업무용단원의 생활보장이 미흡하여 그나마 양성해 놓은 무용수들이 무용계를 이탈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우리 외국무용계의 장래를 좌우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林 聖 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