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러시아-북동 유럽 문학/북유럽 문학
북구문학〔개설〕
편집고대문학
편집古代文學
북구땅에 최초로 이주해 온 민족은 켈트계(系) 민족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점차 게르만 민족(民族)이 침입하여 기원 전후는 거의 완전히 북게르만 민족이 그곳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용감한 전사인 동시에 게르만 민족의 풍습으로 시가(詩歌)를 사랑했으며 옛날부터 신(神)과 사라진 영웅들을 노래한 서사시·격언시 등을 갖고 있었지만 오랜 동안 문자를 몰랐던 탓으로 그것을 기록하는 일이 없었다. 2세기 무렵부터 독특한 ‘룬(Rune)’ 문자를 알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술용(呪術用)으로서 무기나 술잔 혹은 묘석(墓石)에 새겨두는 것이 주였고, 후기에 와서 가끔 짧은 시구 등이 기록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북구문학의 가장 오랜 시대의 일이었고 두운(頭韻)을 사용한 힘찬 시구는 영웅적 정신을 역력히 나타내고 있다.
이름이 남아 있는 시인으로서는 8세기 노르웨이의 우르브가 가장 오래되지만 그의 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시구가 전해지는 것은 9세기 초엽의 브라기로부터이며 쇼도르프 후라 빈, 소르뵤른, 호른크로베 등이 이에 계속된다. 그들은 당시 아직 각지에 할거(割據)해 있었던 노르웨이 왕이나 귀족의 저택을 역방(歷訪)하면서 그들의 공적을 노래하고 전쟁 때에는 용감한 전사로서 싸웠다. 이들 시인을 스칼드(宮廷詩人)라고 한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것 같으나 그 본거지는 아이슬란드로 옮겨져 많은 시인을 배출했다. 이어서 독자적인 산문문학 ‘사가’도 발달하여 이 고독한 섬은 고대 북구문학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아이슬란드 문학의 발흥
편집-文學-勃興
북대서양상의 고도 아이슬란드는 우리나라 남한만한 크기에 불과하지만 860년경 바이킹들에 의해 발견되었을 무렵에는 거의 무인도였다. 그러던 것이 노르웨이에서 하랄드 미발왕(美髮王, 850?-933)이 즉위해서 국가통일을 추진함에 따라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전통있는 귀족들이 점점 이 신천지로 빠져나와 옛 게르만의 신앙과 민주정치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한 결과 드디어 1930년에 의회를 개설하여 아이슬란드 공화국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이 고도에 이상하게도 문학이 성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고(古)게르만의 유풍을 그리워하는 그들은 조상 때로부터 구전되어 오던 신화시(神話詩)·영웅시 등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것에 열의를 나타내는 한편 그들 자신의 식민동기든가 그 후 섬에 있어서의 활동에도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를 이야기했던 사실이 문학을 발달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별다른 오락을 갖고 있지 않은 고도였다는 사정도 크게 작용되었으리라고 본다.
처음에는 이런 신화시·영웅시 등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내려왔지만 그리스도교와 함께 라틴 문자가 전달되어오자 이것들은 문자로 기록되어 다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으며, 12-13세기에는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이슬란드 문학은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에다(Edda)’인데, 이에 덧붙여 ‘시(詩)의 에다(Poetic Edda)’라고 하는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신화, 옛 영웅의 사적(事跡) 등을 노래한 서사시를 모은 것과 ‘산문의 에다’라고 하는 스노리(1178-1241)가 저술한 시학서가 있지만 자세한 것은 별항으로 미룬다.
두 번째는 먼저 말한 스칼드 시인들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수없이 많았지만 전술한 바 있는 노르웨이 시인들에 이어 오만불굴의 영웅시인 에이틀 스카틀라그림손, 연애시인 코마크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시풍은 ‘에다’의 객관적·서사적인 시와는 달리 개인적·서정적이며 상당한 기교를 부리고 있다. 13세기 중엽부터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마리아 찬가(讚歌) 등의 종교시로 옮겨간다.
세번 째는 ‘사가’라고 총칭되는 산문문학으로 이는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산물인 것이다. 전술한 스노리의 <하임스크린글라>(’諸王의 사가’라고도 한다) 등은 3천 매 가량이나 되는 대작이다. 기타 ‘5대 사가’라고 불리는 것을 비롯하여 장단편 2백-3백 종이 남아 있다.
사시풍(史詩風)의 것, 아이슬란드에의 식민이나 그리스도교의 전래나 그린란드 발견을 취급한 역사적인 것, 전기소설, 호족이나 지방의 명문(名門)의 역사를 그린 것, 바이킹의 원정이나 결투, 그리고 원수를 갚는 이야기, 공상적 사랑의 얘기 등 다종다양하여 당시의 북구적인 생활과 꿈을 거의 남김없이 전하고 있다. 당시의 유럽 문학은 거의 전부 운문이었는데, 이 고도에 근대소설에 가까운 산문형식이 발달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이들 아이슬란드 문학은 중세에 들어서서야 겨우 형성되었으나, 그 본바탕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교(異敎)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기원 1000년에 섬에 정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였지만, 이러한 근본에 있어서는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1241년 섬의 유력한 수령(首領)이며 대(大)학자였던 전술한 바 있는 스노리가 노르웨이 왕의 지시로 암살되고 이어서 아이슬란드가 독립을 잃고 노르웨이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불굴의 이교정신에 뿌리박고 있었던 문학도 급속도로 쇠퇴되어 그리스도교적인 종교문학 시대를 맞게 된다.
중세문학
편집中世文學
중세는 그리스도교와 프랑스·독일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성배(聖杯) 이야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로만스 영향 밑에 있었기 때문에 북구로서의 특색이 희박하므로 극히 간단히 서술한다.
노르웨이에서는 호콘 호콘손왕(王) 시대에 쓰여진 계몽서 <왕의 거울>, 덴마크에서는 코펜하겐을 세운 승려 아브사롱의 비서였던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라틴어로 쓴 <게스타 다노룸>(덴마크인의 사적), 스웨덴에서는 북구수도회의 기초를 만들어낸 성 비르이타(1303-1373)의 수기 <계시(啓示)>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삭소의 작품은 덴마크의 신화시대로부터 쓰기 시작하여 유명한 햄릿 왕자의 전설도 포함된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스칼드 시(詩)가 전향하여 종교시가 되었고, <마리아의 노래> <백합> <꿈의 리듬> 등의 역작들이 나왔다. ‘사가’는 당초의 힘찬 리얼리즘 정신을 잃고 공상적·동화적인 경향으로 흘러 그것이 민화(民話)에 연결되는 것 같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로만스의 영향으로 많은 민요가 탄생되었다.
근세문학
편집近世文學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에 수반되는 <성서>의 국어번역이 근세문학의 단서가 된다. 스웨덴의 올라우스 페트리(1473-1552)는 <성서>를 번역한 이외에도 많은 계몽극을 써서 가장 많은 공적을 세웠다. 덴마크의 페더센, 극작가 란크 등이 이와 나란히 활약했다. 그리고 북구에서 가장 오래된 웁살라 대학은 1477년에 창설되었는데 그 후 얼마 안 가서 코펜하겐 대학도 창립되었다.
17세기에는 스웨덴이 영웅 구스타프 아돌프 밑에서 부강해져 북방의 강국이 되었고 학문과 예술도 대단히 발달되어 시인 셰니엘름, 로센하네 등이 배출되었으며, 식물학의 린네, 임파선의 발견자 루드베크 등도 나와 황금시대를 형성한다. 1739년에는 노벨상을 시상하는 것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한림원이 창설되었다.
덴마크에서도 유명한 성학자(星學者) 티코 부라헤, 찬미가 시인 킹고 등이 나왔고, 노르웨이에는 여류시인 엔겔 브레시다트, <노르랑의 나팔>로 알려진 시인 다스(1647-1707) 등도 특기될 수 있다.
그러나 북구가 참다운 문예부흥을 맞게 되는 것은 18세기가 되어서부터이며 그 대표자가 바로 거인 홀베르크(1684-1754)인데 그는 특히 희극에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어 이따금 ‘북구의 몰리에르’라고 불리며, 본직은 역사가로 이 방면의 저서도 많고 소설 <닐스 크림의 지하여행>을 라틴어로 쓰기도 한 만능의 천재였다. 그를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툴린, 웨셀, 에와르 등이 나왔고 스웨덴에서는 퇴르그렌, 벨만 등이 나와 겨우 북구문학이 세계문학 속에서 독자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근대문학
편집近代文學
18세기말, 19세기 벽두부터 발흥한 낭만주의 사조 아래서, 북구가 그리스도교 유입 이전의 고대 북구정신을 재발견한 사실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을 북구에 성립시킨다.
19세기 전반(前半)은 낭만주의시대로 덴마크의 욀렌슐레거(1779-1850)가 그 선구자이자 또 대표자이기도 하다. 시집 <북구의 신(神)들>, 시극 <알라딘> 등의 명작을 내서 ‘북구의 시왕’이라고 불리었다. 그에 뒤이어 종교개혁자로 찬미가 작가이기도 한 덴마크 초고등학교의 창설자 그룬트비, 열혈시인(熱血詩人) 블리커, 동화작가 안데르센, 실존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우수(憂愁)의 철인 키에르케고르 등이 나왔다.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낭만주의사조의 유입은 그 민족적 자각과 독립운동에 실마리를 트기 시작했으며 웨르겔란, 웰하벤 등의 시인이 활약, 언어학자 오센은 공용어인 덴마크어를 배척하고 민간방언을 모아 오늘날의 새로운 노르웨이어의 기초를 만들었고 아스 비외른손과 모(Mor)가 서로 협력해 민화(民話)의 수집에 착수, 불후의 <노르웨이 민화집(Norske Folkeeventyr)> 등을 냈다.
스웨덴에는 시인 테그네르, 동요(動搖)·변모를 반복한 이상한 작가 알므크비스트 등이 그 대표자이며 핀란드계의 르네베리, 토펠리우스의 두 작가가 나와 스웨덴어를 쓰면서 고국의 자연과 인간에의 사랑이 넘치는 작품을 써서 핀란드 문학의 시조가 된 것도 주목되고 있다. 토펠리우스의 동화는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안데르센에 못지않게 애독되고 있다. 이어서 렌로트(1802-84)가 민간에 전승되어 온 핀란드 민족의 가요를 모아서 서사시 <카레와라>를 냈으며 <7인의 형제>로 알려진 키비(1834-72), 칸트, 아호 등의 작가가 나와 핀란드어에 의한 핀란드 문학의 서막을 열기에 이른다.
19세기 후반은 입센, 스트린드베리 등의 거인을 중심으로 한 자연주의 시대로 북구문학은 가차없는 리얼리즘으로 세계를 충동시켰다. 노르웨이에서는 입센을 비롯하여 비외른손, 요나스 리, 킬란드 등이 자연주의 4대가(大家)로 불리었다. 스웨덴에서는 스트린드베리 이외에는 다소 힘이 약했는데 소설가 루드베리, 시인 스노일스키, 여류작가 브레멜 등을 들 수 있다. 덴마크에서는 대비평가 브란데스(1842-1927)가 입센 등과 호응하여 자연주의사조의 추진자가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야콥센, 시인 드라크만, 조금 늦게 폰토피단 등이 나왔는데 특히 야콥센은 근대북구의 제일 완성된 소설가였다.
그러나 이 북구의 자연주의는 뜻밖에도 명이 짧았고 세기 말엽에 가서는 일찍 그 방향이 막혀 절망과 우수의 그림자가 깊었다. 입센, 스트린드베리 등의 저명한 문학가들도 그러했으며 그들의 후기작품은 상징적·신비적 경향이 깊었다.
이때를 당하여 자연주의가 특히 인간성과 사회와의 어두운 면을 그려내는 점에 반대하여 ‘미’와 ‘고귀(高貴)’를 높이 제창하여 조국의 전통을 사랑하고 또 생명의 대가 없는 유희를 찬미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스웨덴의 하이덴슈탐이나 여자로서 최초로 노벨상을 탄 라게르뢰브, 덴마크의 외르겐센(요안센)이나 옌센, 노르웨이의 함순이나 가르보르그(Garborg) 등이 그 대표자로, 이 신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경향이 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전반(前半)에 걸쳐 하나의 주조(主潮)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전대(前代)의 자연주의 독단과 성급한 윤리적 재단(裁斷)을 배제하면서 그 리얼리즘을 계승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끈기있게 인간과 사회를 그리려는 신현실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이 대두되게 된다. 노르웨이의 여류작가 운세트, 덴마크의 프롤레타리아 작가 네크세, 스웨덴의 시웨르츠, 무베리 등이 그 대표자이다.
이 두 경향이 대립하여 또는 혼합되어 사상적으로는 카톨릭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 사회주의·공산주의에 접근하는 사람,휴머니즘에 따르는 사람, 유미파(唯美派)·실험파 등으로 다시 분열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도 휘말리지 않고 안정된 복지국가의 길을 걷는 사회 속에서 공존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20세기 북구문학이었다. 그것은 작가나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행복한 시대였으나 다소 목가적이고 힘과 예리한 점이 결여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에는 작가로서의 함순과 운세트, 시인으로서는 외르겐센과 스웨덴의 후뢰딩과 카를휄트 등이 뛰어났다고 생각된다.
현대문학
편집現代文學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현대문학으로 이동되었다고 보아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안정된 번영 속에서 이를 넘긴 북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나치스의 발흥으로 전쟁을 피하기 어렵게 되자 휴머니즘의 위기를 부르짖기에 이르러 다소 안일(安逸)에 빠졌던 감이 있었던 북구문학계에도 긴박한 공기가 돌기 시작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침략되자 중대한 시련에 당면하게 된다. <카로카인>이라는 주목할 만한 미래소설을 쓴 스웨덴의 여류작가 카린 보이에는 이 위기를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노르웨이 문단의 젊은 지도자 그리그(Grieg)나 덴마크의 반나치스의 힘찬 극작가 문크는 저항운동 속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작가는 침묵을 지키거나 국외로 도피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전후의 문단 공기는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 실험적 작품 때문에 극히 일부에서 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스웨덴의 라게르크비스트가 반나치의 확고한 사상과 긴밀하고 날카로운 작풍으로 문단의 왕좌에 앉았다. 전후 혜성과 같이 나타나 화려한 작가가 된 아나키스트 작가 다게르만이 또한 얼마 안 가서 자살하고 말았다.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시인 외베를란이 전쟁 중의 불굴의 저항활동에 의해 전후 전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국민시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슬란드의 코뮤니스트계(系) 작가 락스네스가 각광을 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전쟁 중에 침묵을 지켰던 덴마크의 릴케풍(風) 시인 라쿨이 전후에는 은연한 예술파의 수령으로서 비중이 컸고, 또 종래에는 전혀 문단 밖에 있었던 여류작가 블리크센이 특이한 예술적 작풍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덴마크의 브란나나 한센이나 소야, 그리고 노르웨이의 팔크베르게(Falkberget)나 베소스, 스웨덴의 마르틴손 부처(夫妻), 아린 등도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 밖에도 유망한 신인이 꽤 있다.
끝으로 아동문학에 대하여 한마디 하면, 안데르센이나 토펠리우스를 빨리 탄생케 한 북구는 그 후에도 많은 우수한 작가나 작품을 내고 있지만 20세기가 되어서는 아이슬란드 출신의 스웬손을 선두로 가깝게는 스웨덴의 린드그렌, 핀란드의 얀손, 노르웨이의 에그나나 함레 등이 나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덴마크 문학
편집삭소 그라마티쿠스
편집Saxo Grammaticus (1150?-1120?)
일생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라틴어로 <덴마크의 역사>를 썼는데 이는 덴마크 중세문학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자료는 옛 이야기노래, 아이슬란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 아브사론의 전설과 편지, 옛 연대기,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덴마크 역사에 관한 저작 등이다. 16권으로 되어 있는데 1-9권은 고대사, 10-13권은 그리스도교화(敎化)시대, 14-16권은 당시의 일들을 엮어 놓았다.
발라드
편집Ballade
윤무(輪舞) 등에 맞추어 불리어졌던 것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들어왔다. 12세기 말엽에 유행되어 16세기 초엽에 쇠퇴되었으나 발라드에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16세기 중엽부터 채집되어 1백 가지의 발라드가 1592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작자 미상이나 민중 속에서 민중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각 행마다 네 개의 강조음절(强調音節)을 지닌 2행 연(二行聯)이나, 1행과 3행에 또는 2행과 4행에 각각 네 개의 강조음절을 지닌 4행 연이 있다. 그리고 각기 각운(脚韻)이 있다. 그 중에는 간혹 모운(母韻)만인 것도 있다. 정황(情況)을 연출하는 데 반복이 있고 언어는 구어체(口語體)로 되어 있으나 형태에 의한 어구를 사용하고 있다. 내용은
형식에 있어서 주로 고대의 서사시 전통을 본떴기 때문에 극적인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친족간의 불화나 살인 등이 얽힌 원시사회의 질서를 반영한 향토 이야기 <에바 스캄루손>,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오가와 엘사> 등이 특히 알려져 있다.
킹고
편집Thomas Kingo (1634-1703)
덴마크 시인.
직공(織工)의 아들로 스란가루프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한 후 오덴세 지방의 사교(司敎)가 되었다. 그룬트비처럼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 세속적인 것에의 집착이라든가, 은혜 깊은 신의 심판 앞에서 머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충동이 작품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포크 메이킹적인 세속시나 종교시도 있는데 자작을 포함하여 그가 편집한 <찬미가집>(1699)은 오늘날에 와서도 아직 이용되고 있다.
홀베르크
편집Ludvig Hol-berg (1684-1754)
덴마크 극작가.
농촌 출신의 육군 중령의 아들로 노르웨이의 베아운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덴마크에서 정주한 그는 1704-1716년 사이에 네 차례나 유럽을 여행했는데 런던, 파리, 로마의 방문이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작가활동은 다음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① 풍자적 작품―덴마크 농민들의 훌륭한 성격연구인 <언덕의 에페>(1722년 상연, 그 다음해 출판). 아카데믹한 우월감을 풍자한 <에라스무스 몽타누스>(1731년 출판, 47년 상연) 등의 희극. ② 역사서―덴마크사 3권(1732-35). ③ 철학적·도덕적 작품―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개와 고양이, 시골과 도시생활, 언어학적 문제, 코피와 차, 결혼, 종교와 자연과학 등―에 대하여 저널리스트적인 수필 <도덕사상>(1744)과 <서간>(1748-54) 등이 있다.
욀렌슐레거
편집Adam Oehlenschl
ger (1779-1850)
덴마크 시인.
그의 아버지가 성(城)지기 겸 오르가니스트로 있던 프레델베르크 성에서 자랐다. 처음에 배우를 지망하였다. 여기에서 헤겔, 셸링 등과 가까이 지내던 젊은 교수 스텐펜스로부터 낭만주의에 대한 교양을 익혀 이제까지 지녔던 북구(北歐)의 고대문학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다. 처음으로 발표한 <황금 뿔잔>(1902)은 북구낭만주의의 효시가 된다. 이듬해부터 <하지제(夏至祭)의 밤놀이>(1903),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영감을 얻고 쓴 <알라딘>(1905)을 발표, 이어 북구신화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을 내놓음으로써 북구문학의 제1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이 밖에도 <콜레지오> <헤르게> 등을 썼으며, 괴테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만년에는 점차로 초기의 그것과는 달리 목가적(牧歌的) 고전주의로 탈바꿈하였으며, 국민적 신뢰와 존경이 대단하였다.
그룬트비
편집Nic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
덴마크 시인·신학자·교육가.
우드비 교회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으나 종교에는 마음조차 기울이지 않았고 또 신앙도 없었다. 나중에 가정교사가 되었으나 매우 젊고 아름다운 주인 아주머니와의 사랑에 빠져 정신적인 위기를 빚어내어, 이 불의의 정열과의 싸움에서 크게 동요되어 그것이 정신적 전기가 되었다. 그때가지는 거의 마음에 없었던 낭만시와 잠자고 있었던 역사적 관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종교에도 눈을 떴다. 업적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면을 들 수 있다.
① 신화와 역사에 관한 저작―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역사>와 소노리의 <노르웨이 왕 사가(Saga)> 등의 번역(1814-22), <북구신화>(1808), <세계사 편람> 3권(1833-43).
② 그리스도교 시―<덴마크 교회와 학교노래집> 5권(1837-81).
③ 초고등학교 교육사상-젊었을 때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1830년대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했으나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포기하고 만다. 영국에서 힌트를 얻어 인생을 위한 학교교육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견해(見解)를 술회(述懷)한다.
이 학교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사람들은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자각하여 자기가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함을 몸에 익힌다. 문법학교(文法學校)에 대하여는 서적의 지식은 독자에게 활용될 수 없는 송장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인생에 대하여 넓게 알고 서적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여 자발적으로 배우기에 앞서 많은 것을 주입시키는 지식을 도제지식(徒弟知識)이라 한다. 그리고 “문법학교에서는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정신이나 몸이 발달하기 이전에 고도의 정신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14-18세 되는 아이들은 육체적인 작업과 정확한 과학(동물학·물리학) 교육에 가장 적합하다. 이런 연후에 비로소 국민이나 조국에의 애정에 눈뜨게 되는 정신적인 시대가 도래한다. 이때야말로 살아 있는 자연스런 언어를 통해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블리커
편집Steen Steensen Blicher (1782-1848)
덴마크 시인·소설가.
목사의 아들로 유틀란트의 비옴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학생시절에 오시앙의 시에 열중하여 1809년에 그 번역서를 출판했다. 시로 노래한 고독감과 음산하고 무정한 빛과 그림자에서 유틀란트의 서해안과 히드 지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문법학교의 교사로도 있었고 부친의 교회농장의 소작인 등의 일을 보다가 나중에는 성직록(聖職祿)을 얻고 교구농민들의 생활향상을 도모하면서 민중이 애국심에 눈뜰 것을 바라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아이들이 많아 고통은 받았지만 사냥이나 음주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역사상의 인물 마리아 그루페에서 소재를 얻은 <교회 역원의 일지(日誌)>(1824)는 19세기 덴마크 산문의 걸작이었고, 또 유틀란트 방언으로 시와 이야기를 혼합하여 저술한 유틀란트의 이야기 <편물집의 거실>(1842)은 특이한 작품이다.
안데르센
편집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덴마크 문학가·동화작가.
구둣방집 아들로 오덴세에서 출생하였다. 가정생활은 하류층에서도 제일 밑바닥의 어려운 살림을 해 왔다. 아버지는 퍽 부지런했으나 소심한 남자로 셰익스피어나 홀베르크 등의 작품, 혹은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읽고 동화를 아들 안데르센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또 장난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모친은 품위없고 무지한 미신적인 여자로 안데르센의 부친이 죽은 후 개가하여 그 어려움을 더했고 음주도 점점 심해져 마침내는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정신이상자로 오덴세의 거리를 방황하는 몸이었다. 할머니는 허영심이 강하여 자기가 훌륭한 집안 출신임을 손자 안데르센에게 들려주고는 비참한 현실을 위로해 주려고 했으며 인형극이나 공상에 열중하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일생은 이러한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탈출하려는 투쟁 그것이었다. 어렸을 때 이미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결심, 가수·무용가·배우·극작가·소설가 등을 꿈꾸었다. 드디어 1835년 최초의 동화 <부시 쌈지>를 썼다. 1백6십4편에 이르는 그의 동화는 거의가 자기 개인에 관한 사건에서 소재를 얻은 것이다. 첫째 <미운 오리새끼>(1845),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1848)를 들 수 있다. 전자에는 인간의 천성에 대한 안데르센의 낭만주의적인 사상, 즉 “백조의 알에서 깬 이상 오리 우리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에 반하여 폰토피단은 안데르센의 그런 사상을 <독수리의 비상>에서 반대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오리 우리에서 자랐다면 독수리 알에서 나왔던들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40대에 와서 겪은 스웨덴 가수와의 제3의 실연을 마지막으로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림 없는 그림책
편집안데르센 연작 단편집.
가난한 화가가 시골에서부터 큰 도회지의 비좁은 골목길의 어느 방을 얻어 이사해 왔다. 창 밖으로는 푸른 수풀과 언덕, 그리로 잔잔한 호수 대신 회색의 굴뚝밖에 보이질 않고 누구 한 사람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고 해서 그는 몹시 외로웠다. 그러한 때 문득 낯익은 얼굴을 들이밀어 위로해 준 것은 달이었다. 이 달은 매일 밤과 같이 좁디좁은 방 안을 찾아와서는 여러 곳에서 구경하고 온 것을 재미있게 들려 주곤 하였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재미있는 것만 골라 써 놓은 것이 이 책이다.
그러한 전제로서 제1야(夜)로부터 제33야까지 짤막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달이 보고 온 이야기인 만큼 그 범위는 전세계에 걸쳐 있으며, 머나먼 인도와 중국·그린란드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스웨덴·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빙산이나 오로라도 그 속에 끼어 있고 아프리카의사막이 나오는가 하면 폼페이의 폐허나 아드리아 해도 무대가 되어 있다.
안데르센은 북유럽의 덴마크 사람인 만큼 그러한 먼 나라들과 유럽 가운데서도 훨씬 남쪽 나라에 대한 향수를 낭만과 시인의 동화답게 아름답고 투명한 환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의 소재도 풍부한데 예를 들면 인형을 잃어버린 계집아이의 슬픔, 비평가의 장난기, 유명한 조각가 트르발트의 유년 시절, 중국의 어느 중의 사랑, 해돋이를 향하여 시커먼 얼굴로 환호하는 굴뚝 소제하는 소년 이야기 및 미국으로 이사가는 농부의 가족들 등 몹시 다채롭다. 그 가운데는 중병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맞도록 자리에서 불러내어 억지로 화장을 시켜 창가에 앉은 채로 죽어가야 하는 목사의 딸과 같이 슬픈 이야기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전편을 통해 흐르는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정이 이 환상 속에 가장 아름답게 결정되어 있다.
미운 오리 새끼
편집안데르센 작.
한 마리의 엄마오리가 알을 품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알을 깨고 새끼오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제일 큰 알에서 나온 새끼는 아주 미웠다. 이 미운 아기오리는 다른 오리들에게 놀림을 받자 집을 나와 버린다. 집을 나온 아기오리는 어려움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어느 날, 백조를 만나게 된 아기오리는 그 무리에 끼이게 되는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들과 똑같아 놀란다. 사실은 백조의 알이 오리의 둥지에서 깬 것이었다.
즉흥 시인
편집안데르센 작.
낭만적인 작품으로, 이를 계기로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어머니가 마차에 치어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된 안토니오가 볼게제 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남몰래 숨어서 탐독한 단테의 <신곡>은 숨겨져 있는 시재(詩才)를 눈뜨게 해 준다. 가희 아눈차타와 사귀게 되어 즉흥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아눈차타에의 애정을 둘러싸고 그를 오해한 친구에게서 결투를 신청받고, 겨누어진 피스톨을 비껴내려는 순간 잘못해 친구를 쏘아버리게 되어 로마를 탈출한 안토니오는, 나폴리에서 즉흥 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무대를 밟는 날 볼게제 가의 사람에게 발견되어 억지로 그를 따라 또다시 먼 여로에 나선다. 안토니오은 운명의 장난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에 베네치아에서 뜻밖에 병색이 초췌한 아눈차타와 재화를 하게 되는데, 그녀는 그를 피하여 어디론가 모습을 숨겨버린다. 그 후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 편지를 남기고 죽는다. 유언에 따라 그는 시장의 조카인 아름다운 마리아와
결혼하는데, 바로 그 마리아는 언젠가 패스튬의 유적에 서 있었던 눈먼 봉사의 아름다운 소녀 라라 그 사람이었다. 원작은 너무나도 우연이 많고 허구성이 강하여 낭만주의의 결점이 눈에 띄나, 신선하고 격조 높은 아어체(雅語體)의 매력이 그 결점을 커버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
편집S 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철학자.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코펜하겐에서 출생했다. 부친과 약속한 대로 신학사(神學士)가 되었으나 그의 약혼은 실패로 돌아갔다. 저작가로서의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필명으로 발표한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와 <인생 항로의 여러 단계>(1845)가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같은 체계로 되어 있으며 인간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3개의 단계―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를 저술했다. 이는 모두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에로 연결되는 것은 직선적인 변화가 아니라 비약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종교 선언의 저작과 때를 같이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1848)을 기초하고 있었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두 가지 형태 가운데서 그 어느 것에든 반응한다―수용하든, 반대하든―키에르케고르는 전자를, 마르크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점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같은 사회정황 속에서 사상이 싹텄으며 당시의 헤겔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전도(轉倒)하여 이용했으나, 키에르케고르는 몇 가지 존재의 체계화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전체적인 체계를 파괴하려고 한다. “사상의 체계는 가능하지만 존재의 체계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그의 저작의 밑바닥을 흐르는 사상이다.
야콥센
편집Jens Peter Jacobsen (1847-1885)
덴마크 소설가.
상인의 아들로 티스테즈에서 출생한 그는 소년 시절부터 때때로 식물이나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코펜하겐에 있을 때 대학에서는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브란데스 형제(형은 평론가, 동생은 극작가)와 친교를 가졌다.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플로렌스에서 병을 얻어 쓰러지자 급거 고향으로 돌아가 이후 그의 생활은 폐결핵과의 싸움으로 일관되었으며, 모친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단편집과 약간의 시, <마리아 그루페 부인>(1876), <닐스 리네>(1880) 등이 덴마크 문학에 대한 기여였다.
마리아 그루페 부인은 홀베르크, 블리커, 안데르센의 작품에도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지나친 성적 욕망을 지닌 여자로 왕자비(王子妃), 또는 시골 무사의 아내, 마부의 첩 등으로 전락 끝에 1718년에 죽는다. 그러나 야콥센은 그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거친 에리크 그루페의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러나 그 부모에게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애욕의 매매키즘적인 소설을 읽게 되어 조숙해졌다. 코펜하겐의 레기츠 그루페의 집에 맡겨졌으나 역시 여기서도 그녀를 돌보지는 않는다. 때마침 덴마크는 스웨덴에 포위공격되는 전후의 험악한 시대였다. 당대의 영웅 울리크 크리스찬과도 만난다. 또한 그녀는 그녀의 형부인 스티오이, 촌스러운 시골 무사 파레 뒤르, 농장의 머슴으로 22살의 거인 수른 라즈포가 등의 사내들과 애욕의 유희에 빠진다. 그러나 수른에 대해서만은 단순한 애욕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서 사랑과 존경을 나누게 된다. 때문에 수른이 죽자 그녀는 절망하여 그의 뒤를 따라 죽어간다.
이렇게 하여 야콥센은 독자에게 인간이란 서로 혼합된 점토(粘土)이며 또한 그 자신이 그렇듯 본능과 꿈이 혼합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할 수 없지만 본능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타인이 있음도 교시하고 있다.
폰토피단
편집Henrik Pontoppidan (1857-1943)
덴마크 소설가.
목사의 아들로 프레데리카에서 출생한 그는 공학(工學)을 전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작가를 지망했다. 생활 때문에 초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그곳의 그룬트비적 환경에 불만을 느꼈으며 이때에 농민과의 교제를 위하여 농부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이혼하고 만다. 그 후 코펜하겐의 여성과 재혼하였다. 덴마크 문학에의 최대 공헌은 <약속된 땅>(1891-95), <운좋은 페어>(1898-1904), <사자(死者)의 왕국>(1912-16) 등이며 181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약속된 땅>은 3부로 되어 있다. 신학사(神學士) 엠마누엘 한스티즈는 모친을 정신병으로 잃고 코펜하겐의 부유한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엠마누엘은 무미건조한 도시생활에 싫증을 느껴 전원(田園) 생활을 동경한 나머지 북부 셀란의 귀족적 목사 밑에서 부목사(副牧師)가 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농민의 딸과 결혼하여 농민들의 도움을 받고 나중에는 그 교회의 후계자가 되지만 그는 농민의 딸과 결혼한 이상 농사로만 생계를 유지하려고 결심하고 교회에서 받은 급료도 되돌려 주고 농민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그렇게 잘 융화되지는 못했고 전원생활도 아내와의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내와 이혼한 후 도시생활에서 그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 했으나 역시 별효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시골로 되돌아와 마지막 농민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끝난다. 드디어는 정신병에 걸려 정처없이 자연 속을 헤매지만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죽고 만다. 엠마누엘은 무모하게 현실에 대항하였던, 현실을 모르는 우매한 자 같기도 했으며, 그의 온 생명을 걸고 이상실현을 위해 바치는 성인이기도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폰토피단은 독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다.
옌센
편집Johannes Vilhelm Jensen (1873-1955)
덴마크 소설가.
수의(獸醫)의 아들로 율란 반도에서 출생. 약학을 공부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작가를 지망했다. 오랫동안 미국, 에스파냐, 파리 등지에서 통신기자로 일했으며 후에 세계일주 여행길에 일본에 기착하여 1906년 신화 <후지산(富士山)>을 발표했으며 다양한 그의 작가활동 중에서 한 가지를 들어 본다면 노벨문학상(1944)의 대상이 되었던 <긴 여행(旅行)>(1909-21)이다.
이 작품은 6부로 구성되었는데 빙하기 이전의 시대로부터 빙하시대, 이민이나 바이킹 시대를 거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까지의 인류 진화과정을 그린 문화적·역사적·시적 소설이다. 인류의 진화를 과학적으로 기술한 다윈설(說)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구약성서, 스칸디나비아 신화, 아이슬란드의 사가(이야기) 등을 이용하여 지질학·인류학·고고학·민족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하여 소년시절의 회상이나 그가 얻은 많은 여행에서의 인상도 집어넣고 있다.
넥세
편집Martin Andersen Nex
(1869-1954)
덴마크 소설가. 보른홀름에서 이주해 온 포장공(鋪裝工)의 아들로서 코펜하겐의 빈민가 어느 싸구려 노동자 아파트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들은 보른홀름에 되돌아갔고 아스코프 초고등학교에 가기 전에 양치기 또는 구둣방 견습공으로도 일했으며 이탈리아, 에스파냐에 휴양차 여행을 한 후 수년 동안 교사로 지내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덴마크 최초의 사회소설을 썼으며 그의 명성은 대개 다음의 두 소설 <승리자 펠레>(1906-10)와 <사람의 자식 디테>(1917-21)에 의하고 있다.
후자는 5부로 되어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소녀의 젖먹이 시절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디테는 농부의 아들과 가난한 어부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외가에서 양육되었는데 외할머니와는 아주 즐겁고 친근한 사이였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의부(義父) 밑에서 어린 동생들의 뒤를 보아주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무정한 여자였다. 의부는 마음이 맑고 사귐성이 많은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나 결혼의 불행을 되씹는 어머니는 술에 취해 엉망이 되고 불규칙한 나날을 보낸다. 의부는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그리고 두 아들은 집을 나간다. 셋째아들 카르가 어머니의 학대로 몹시 고통을 받게 되자 디테는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카르를 동정하고 마침내는 몸까지 맡기고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카르는 비겁하게도 그녀를 배반하고 만다. 할 수 없이 디테는 코펜하겐에서 남의 일을 도와 주면서 어린애를 키운다. 나중에는 자유노동자가 되고 여러 가지의 정사(情事)를 일으켜 또 다른 한 아이를 낳는다. 다시 기아(棄兒) 베타까지 도맡았으며 그 빈곤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베타는 정거장 철도변에 있는 석탄을 훔치려다가 밤중에 교체되는 기차에 치어 죽어간다. 이를 본 노동자 역시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매장된다. 디테는 비탄(悲嘆)에 숨막혀 25살이라는 젊음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그녀의 시체 옆에는 어머니 슬하를 떠났던 카르가 있었다. 이와 같이 디테는 사회악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낸 가련한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천성적인 정신은 그 많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청초(淸楚)하였다.
한센
편집Martin Hansen (1909-1955)
덴마크 소설가.
소농(小農)의 아들로 스티운스에서 태어났다. 교사양성소에서 공부를 한 후 코펜하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946년서부터 작가활동에 들어섰다. 대표작으로는 <거짓말쟁이>(1950)와 <올므와 테아의 신(神)>(1952)이 있는데 전자는 라디오 소설로 주인공인 학교교사 요하네스 피크의 주변을 일기형식(日記形式)으로 다루었다. 피크는 도덕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탐미적(耽美的)인 면도 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인간이 실생활에 접했을 때의 고뇌(苦惱)를 그린 것이 이 소설이다. <올므와 테아의 신>은 한센의 문학적 공상과 고고학적·문화사적 지식에 의한 북구의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종교변천의 문화사이다.
블릭센
편집Karen Blixen (1885-1963)
덴마크 여류작가.
작가로서도 저명한 선장(船長) 빌헬름 디네슨의 딸로 웅그스테즈론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여행을 즐겼으며 1914년 아프리카에서 스웨덴 남작(男爵)의 사촌과 결혼했으나 1921년에 이혼하고 코피 농장을 경영했다. 그러나 친한 남자친구의 사고사(事故死)와 농원경영의 실패로 1932년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생지에서 생활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이자크 디네슨이라는 필명으로 1934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한 <일곱 개의 고트 이야기>(자기 자신이 모국어로 다시 써서 1935년 덴마크에서 출판한 <일곱 개의 공상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동서양의 옛날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모방(模倣)문학이라고 하는 일부층도 있으나 환상은 현대적이고 동기·행동·이상이 새롭게 안배되어 있으며 예술적으로 세련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작품이다. 그의 회상 기록인 <아프리카의 농원>(1939)은 1930년대 덴마크 산문학의 걸작이다.
스웨덴 문학
편집알므크비스트
편집Carl Jo-nas Love Almqvist (1793-1866)
스웨덴 소설가. 웁살라 대학 졸업 후에 관리가 되었으나 루소의 이상인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실행을 위해 농민생활을 시작했으나 얼마 안 가서 싫증을 느껴 수도에 돌아가 교원생활을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기(詐欺)와 살인 미수 혐의를 받아 북미(北美)로 도망친다. 변명(變名)하여 각지를 방랑하다가 다시 독일에 건너가 그 이듬해 빈궁(貧窮) 가운데 죽는다. 재능이 다채로운 점으로 그 이름을 떨쳤던 사나이로서 낭만파의 대표적인 시인인 동시에 향토문학과 문제문학의 선구자로 활동범위는 문학·철학·정치·음악·수학에까지 이르고 있다.
<들장미의 서(書)>는 바로 이 다방면성(多方面性)을 나타낸 작품이며 <그것도 좋다>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40년이나 앞서 발표한 작품으로 여성해방을 다룬 급진적 문제소설로서 유명하다.
스트린드베리
편집August Strindberg (1849-1912)
스웨덴 소설가. 입센과 나란히 이름 높은 북구의 문호(文豪)로서 부유한 상인 출신의 아버지와 하녀(下女)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스톡홀름. 남다른 재능은 문학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연과학이나 철학에 몰두한 시기도 있었다. 그의 일생에 세 번 결혼하여 세 번 다 파혼하는 파란 많은 일생을 보낸 그는 <하녀의 아들>(1886) 등에서 시작되는 자서전적 소설도 많고 그의 우수한 희곡작품은 근대극(近代劇)이나 자연주의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프살라 대학을 졸업한 후 교편생활을 거쳐 왕립도서관 근무(1874-82) 시절에 이미 희곡 <로마에서>가 상연되었고, 사극(史劇) <올로프 선생>은 형식의 자유성이 주목을 끌었다. 소설 <붉은 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결사(結社)의 비밀> <행복한 페르의 여행> <벤구트의 아내> 등 낭만적 희곡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남녀동권론(男女同權論)을 증오한 소설집 <결혼한 사람들>(1884)로 필화(筆禍) 사건을 야기시켜 도불중(渡佛中) 본국의 소환을 받았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어 무죄가 되었다. 걸작으로는 처음의 아내 시리 폰 에센과의 파탄을 그린 <치인의 고백>, 여성에 대한 환멸은 희곡 <아버지>(1887), <영양(令孃) 줄리>와 같은 자연주의에 뛰어난 작품을 내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소설 <바닷가에서>를 써서 초인주의자(超人主義者)의 투쟁을 그렸다.
1892년 오스트리아 여류화가 프리다 리르와 결혼하지만 2년쯤 되어서 헤어진다. 이 무렵은 중세 시대의 연금술(鍊金術) 연구, 심령술(心靈術)·천문·지리 등 광범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1897년에 문학활동으로 되돌아가 <지옥> <전설> 등의 생활기록을 발표했다. 희곡의 3부작 <다마스쿠스로>(1904)는 정신 고뇌의 고백이며 반(反)그리스도교로부터 경건한 속죄자(贖罪者)가 된 도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구스타프 바사> <에리크 14세> <폴쿤거 이야기> 등 사극을 발표했다. 비극 <죽음의 무도>(1901)를 발표했을 무렵, 젊고 아름다운 여우(女優) 하리에트 보세와 세 번째의 결혼생활에 들어가 축제극 <부활제>, 동화극 <백조 아가씨> 등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작품을 썼다.
1904년에는 다시 이혼하고 작품도 가열(苛烈)의 도를 더하여 <붉은 방>의 속편 <고트 거실>을 출판하였다. 그 무렵에 그는 자작작품을 상연하기 위해 숙망의 친화극장(親和劇場)을 설립, 여기서 <영양(令孃) 줄리> <유령 소나타>를 상연했으며 이 극장을 위해 쓴 일련의 실내극 <번개> <불탄 흔적> 및 전술의 <유령 소나타> 등은 모든 고뇌를 거친 다음 체관(諦觀)에 달한 작자의 심경을 나타낸 주옥편이다. 대작인 사극을 발표하는 한편 아주 간소하면서도 심각한 인생극도 썼다. <아버지> <영양(令孃) 줄리> 등에 그 특색이 나타나 있다.
이 대작가도 고국으로부터의 환대는 받지 못했고 스웨덴의 한림원이 노벨문학상을 수여하지 않은 것에 분개한 대중의 성금(誠金) 5만 크로네가 증정되어, 63회 탄생일이 축복되었다. 이로부터 4개월 후인 1912년 5월 “모든 것은 용서되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치인의 고백
편집癡人-告白 (1888)
스트린드베리 소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최초의 결혼생활의 발단으로부터 파국에 이르기까지의 적나라한 자전적 생활기록을 소설형식으로 엮어나간 것이다.
전체는 4부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나’인 주인공이 남작 부인 마리아와 알게 되어 매혹된다. 가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어 그녀와 사랑을 맺게 된다. 무대 배우를 하려는 마리아의 재능이나 행동에 ‘나’는 가지가지의 의혹을 품게 되지만 그녀의 임신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아내가 불의자(不義者)로서 또한 변태적인 교우자(交友者)로서 비쳤으며 부부 사이의 추(醜)한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이에도 이따금 찾아오는 화해와 포옹, 이런 것의 되풀이였다. 마지막으로는 홀아비나 가정교사의 생활이라고 자칭하고 ‘나’는 여섯 차례나 가출했다가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데서 끝난다.
작중의 아내의 행동은 작자의 병적인 눈을 통하여 본 망상(妄想)이라고 보며 사실 그는 아내와 이별한 후의 아내가 그 자녀들을 양육해 나가는 모습에 깊이 뉘우쳐 15년 후의 작품 <다마스쿠스로>에서는 그녀에게 무고한 죄를 씌운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있다.
영양 줄리
편집令孃-(1888)
스트린드베리의 희곡으로 작자 자신 근대극의 단막물(單幕物) 희곡의 모범적인 것을 쓴다는 속셈으로 쓴 것인 만큼 그 수법의 간소화와 구성의 긴밀성, 주제의 심각성에 있어서 <아버지>(1887)와 함께 그의 자연주의 희곡의 걸작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입센의 희곡과 대비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용은 여름철 어느 축제의 밤, 하인 잔을 상대로 춤추며 서로 말을 주고받은 백작의 딸 줄리는 그녀을 찾으러 온 백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만 잔의 방으로 숨어버린다. 여기서 두 사람은 맺어지고 만다.
이렇게 하여 분방하고 고집센 줄리와 하인 사이는 역전된다. 잔꾀가 많고 출세를 노리는 잔은 줄리에게 돈을 훔쳐내서 함께 도망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날이 새면 그는 어쩔 수 없는 비굴한 하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후환(後患)을 두려워 한 그는 줄리에게 자살할 것을 권한다. 그녀가 최면에 걸린 듯 문쪽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성적 관계로 무너지는 여성의 연약함과 남녀의 갈등을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붕괴되어가는 귀족계급과 조잡하기는 하나 힘찬 신흥계급을 대비시키고 있는 점, 이것이 바로 문제극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케이
편집Ellen Key (1849-1926)
스웨덴 사상가. 정치가의 딸로 태어나 처음에 작가를 지망했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를 전기(轉機)로 교사가 되어 약 20년 동안이나 교직생활을 했다. 그 후 어떤 사회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 직을 그만두고 사상운동에 들어갔으며 54세에 그의 대표작품 <생명선>을 써 일약 세계적인 사상가로 알려졌다. 이어서 <아동의 세기> <부인운동>을 저술했고 여권운동가로서 활약을 계속하여 일생 미혼으로 1926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상적 밑바닥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절대 불가침과 생명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신앙이며, 종래의 형식적인 결혼법이나 성도덕을 비판하여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라게를뢰프
편집Selma Ottilia Lovisa Lagerlof(1858-1940)
스웨덴 여류작가.
스웨덴 베름란드에서 태어나 북구의 특유한 풍토 속에서 자라난 라게를뢰프는 소녀시절부터 풍부한 상상력을 길러 나갔다. 스톡홀름 근교(近郊)의 여학교 교사시절에 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1891)가 현상소설에 당선하면서부터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서 <보이지 않는 고삐>(1894), 그리고 왕실로부터 장려금을 받아 외국 여행을 한 성과로서 <반(反)그리스도의 기적>(1897)이나 <예루살렘> 2권(1902)을 저술했다.
이 작품은 농민의 신앙과 향토애와의 상극(相克)을 그린 대작이며 <늪가 집 딸>은 가난한 처녀의 선의와 사랑을 그린 이야기이고 또 영화화되어 유명해진 <환상의 마차>(1912) 등 우수한 중편도 있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과 모성적인 깊은 애정은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낳게 했다. 소년소녀용으로는 <닐스 소년의 신비로운 여행>이 유명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1909).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마음 아파하면서 1940년 3월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닐스 소년의 신비로운 여행
편집Nils Holgerssons underbara resa genom Sverige (1907)
라게를뢰프의 동화. 라게를뢰프가 스웨덴 교육회의 의뢰를 받아 아이들을 위해 집필한 동화인데 이 작품을 위한 기초 준비로서 국내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연을 탐구하고 새 또는 동물들의 생활을 조사하여 쓴 것이다.
닐스는 짓궂고 바르지 못한 아이로 평소에 가축을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미움받는 아이였는데 우연한 일로 갑자기 난쟁이가 되어 거위의 등을 타고 기러기 떼와 함께 긴 여행을 계속한다. 도중에서 여러 가지 동물들과도 만나고 또한 이상한 사건들과 부딪치게 되는 가운데 친구인 기러기나 거위와 협력하여 딱한 입장에 있는 동물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렇게 하여 닐스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되어버린다. 마지막에는 그리운 집으로 돌아온 닐스가 보통 아이들과 마찬가지 체격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중에 스웨덴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전설을 교묘하게 엮어나간 향기 높은 동화로 작자의 깊은 향토애마저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작자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작자 라게를뢰프에게 웁살라 대학은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하이덴슈탐
편집Karl Gustav Verner von Heidenstam (1859-1940)
스웨덴 시인·소설가.
군인귀족의 명문 출신으로 수도에서 공부를 했으나 17세 때 신병으로 이를 중단하고 휴양을 겸하여 남구(南歐) 근동(近東)을 여행했다. 한동안 화가를 지망했으나 그 후 ‘펜’이야말로 스스로 갈 길임을 깨닫고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에 돌아가 장원주(莊園主)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1888년 처녀작 <순례와 편력의 세월>에서 동방인의 방일(放逸)하고 소박한 생활의 환희를 노래하고 당시의 자연주의 문학에 반항(反抗)한 그는 소설 <한스 알리에누스>로서 편력(遍歷) 끝에 안주(安住)의 땅을 고향에서 발견하고, 그 후는 향토와 고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으며 이 열정은 러시아와의 북방전쟁에서 병사들의 충성을 그린 <카를 왕의 군대>(1898)에서 그 정점에 도달된다.
그는 다시 <숲은 술렁인다> <성(聖) 게오르게와 용(龍)>에서 조국에의 사랑과 희생적 정신을 높이 제창하고, 또한 조국의 중세사에서 제재(題材)를 따 <성(聖) 비르기타의 순례> <폴쿤가가(家)의 이야기> 등의 역사소설을 썼다.
이 열렬한 조국애는 20세기 벽두의 좌우 정치투쟁 속에서 하이덴슈탐을 보수진영으로 달리게 했으며 스트린드베리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철학에 반대하여 그와 맞서 논쟁했다. 애국시집 <하나의 민족> 가운데의 1편인 <스웨덴>은 제2국가(國歌)로서 지금도 불리고 있다. 1912년 아카데미 회원. 19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스
편집Nelly Sachs (1891-1970)
스웨덴 여류시인·극작가. 유태인으로 베를린에서 출생. 공장주인 아버지의 서재에 파묻혀 어려서부터 모든 시대의 민담(民譚)과 동화를 읽고 문학적 소양을 키운 작스는 낭만주의 작가의 작품과 동방의 지혜까지 섭렵했다. 17세 때부터 시작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독일의 유태인 학살의 공포 분위기에 위축되어 공포와 불안의 시절을 보내다가, 스웨덴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시집으로는 <죽음의 집에서>(1947), <성식(星蝕)>(1949), <이상향(理想鄕)으로의 행진>(1960) 등이 있고 1966년 노벨상을 수상한 시극 <엘리>(1962)가 있다.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모른다>(1957), <그러나 이 태양도 역시 고향이 없다>(1957), <피란과 방황>(1959), <모래 속의 미소>(1964) 등의 희곡도 썼다. 특히 <엘리>는 <이스라엘의 고민을 그린 신비극>이란 부제가 달려 있는데 시간과 장소, 클라이맥스와 사건 등이 무시된 채, 유태인의 정감이 자유스런 형식에 담겨 있는 환상적 작품이다.
라게르크비스트
편집P r La-gerkvist (1891-1974)
스웨덴 소설가·시인.
웁살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일찍부터 프랑스 회화(繪畵) 영향을 받아 표현파문학을 제창했으며 1914년 시집 <모티프>로 시단에 데뷔했다. 대전(大戰)을 경험한 그는 시문집(詩文集) <고민>에서 절망에 가까운 고뇌를 노래했으나 그 후 시문집 <혼돈>, 시집 <마음의 노래> 등으로 빛과 자신을 되찾고, 수필 <극복된 삶>, 소설집 <싸우는 영혼>으로 긍정에 이른다. 이는 그가 인간이 갖는 파괴와 건설의 상반된 욕망은 모두 깊숙한 밑바닥에 있는 어둠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어둠의 세계야말로 생명의 근원(根源)이라고 보는 경지에 도달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에세이 <불끈 쥔 주먹>으로 이를 확인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나치스 세력이 강해지자 소설 <사형집행인>으로 폭력 긍정의 확대에 항의하고 다시 대전 중에는 소설 <난쟁이>로 악의(惡意)와 소극주의에 대결했다. 1950년에는 명작 <바라바>를 써서 그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에도 소설 <무녀(巫女)> <아하스베르스의 죽음>을 비롯하여 그 밖에 시집도 내고 있다.
그는 과작(寡作)으로 장편은 없고 작품에는 태작이 없으며 문체는 모자이크를 연상케 하는 거친 수법으로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 희곡작가로서도 그는 당대의 일인자라고 불리며 <인생을 다시 산 사나이> <어둠 속의 승리> <연금석(鍊金石)> <인간을 살리고 싶다> 등의 명작이 있다.
바라바
편집Barabba (1950)
라게르크비스트의 소설. 그리스도 처형 때 대신 방면(放免)된 도둑 바라바의 이야기는 성서에서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은 바라바의 그 후 일생을 창작하여 신앙에도 들어갈 수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 세상을 헤매는 인간을 그린 문제작이다.
난폭한 사나이 바라바는 골고다 언덕에서 본 예수가 시종 마음에 걸려 있었다. 같은 노예인 사하리에게 감화를 받은 일도 있으나, 바라바는 “나에게 신은 없다”라고 말하여 사하리만이 처형된다. 후년(後年) 로마에서 어느 날 밤 거리에 불이 나자 그리스도 교도들이 한 짓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번이야말로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거리에 방화(放火)하며 다니다가 붙잡혀 처형된다. 죽기 직전에 그는 캄캄한 어둠을 향해 “당신에게 맡깁니다, 나의 영혼을”이라고 말한다.
단 한번 얼핏 본 ‘빛’의 세계를 잊을 수 없을 뿐더러 더욱더 그것에 접근하려고 할 때의 그의 행동은 전부 작가가 말하는 어둠의 힘의 적나라한 폭발인 것이다. 최후로 그는 암흑―인간의 본심에 있는 심연(深淵)―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속으로 사라져간다. 작자의 소설 <사형집행인>과 일맥상통하지만 이 작품에 ‘구원’은 없다.
린드그렌
편집Astrid Lindgren (1907-2002)
스웨덴 여류 동화작가.
처음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으나 딸이 병으로 앓게 되자 즉석에서 이야기하여 준 동화 <긴 양말을 신은 피피>(1944)를 간행하여 일약 유명해졌는데 그 후에도 속속 명작을 써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화작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긴 양말을 신은 피피>는 여자 타잔이라고 하는 힘센 소녀의 자유분방한 활약을 그린 것으로 속편도 있다. 그 후에도 <미오야, 나의 미오> <시끄러운 마을의 아이들> <명탐정 카트레군(君)> <방랑의 고아 라스므스> <로타 아기의 이사> <마디켄> 등이 우수하다.
긴 양말의 피피
편집린드그렌의 동화로, 우리나라에서는 <말괄량이 삐삐>로 알려져 있다.
피피는 머리가 빨갛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소녀로서 언제나 빛깔이 다른 짝짝이 양말을 신고 다녔다. 피피는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화가 잔뜩 든 트렁크를 가지고 변두리 작은 집에서 혼자 산다. 학교도 가지 않고 혼자 멋대로 사는 피피는 힘도 무척 세어 금화를 노린 도둑들을 집어 던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피피의 남양 여행>과 같은 속편을 내놓게 했다.
욘손
편집Eyvind Johnson (1900-1976)
스웨덴 변경의 가난한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부터 간이 포장도로의 자갈 만드는 일에서 시작하여 뗏목 작업, 과자 장사, 매표소 판매원 등을 하였다. 노동조합의 사무원을 하면서 저널리스트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20년대에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도 하였다. 1924년 처녀작 <4명의 이방인>을 발표하고 이어서 <태만과 정당성>(1925), <회상>(1928) 등을 발표했다.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은 <해변의 파도>(1946)인데 이는 현대의 ‘오디세이아’로 불린다. 이외 <장미와 불에 대한 꿈>(1949), <크릴톤 3부작>(1941-43), <올리프에 관한 4부작>(1934-37) 등의 대표작은 소재가 다양하고 폭이 넓을 뿐 아니라, 북구풍의 거대함이 있다.
1974년 마르틴손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마르틴손
편집Harry Martinson (1904-1978)
스웨덴 소설가·시인. 잠스호그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선원생활을 6년간이나 했다. 시·에세이·대하소설 등, 20여 권이 넘는 저작에서 이슬 방울 맺는 듯, 전체적인 조화와 화합(和合)을 이룬다는 명성은 이미 1949년 한림원 회원이 되기 전부터 스웨덴에 파다했다. 특히 <아니아라>는 서사적 작품으로 빛이 없는 땅에서 탈출하는 8천 명의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밖의 작품으로는 전원생활을 그린 <케이프여 안녕>(1933), 사회에서 버림 받는 자들을 주제로 한 <길>(1950)이란 작품이 있다.
다게르만
편집Stig Dagerman (1923-1954)
스웨덴 작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웨덴에 나타나 귀재(鬼才)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곧 사라졌다. 스톡홀름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배웠으나 이보다 앞서 이미 신디칼리즘(노동조합)의 신봉자가 되어서 그 기관지인 <노동자>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의 출세작 <뱀>(1945)은 포크너와 카프카의 영향 아래 신디칼리즘의 입장에서 문명에 대한 비관적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의 수법은 초기에는 몽환적(夢幻的)이고 비유적(比喩的)이었으나 차츰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바뀐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소설로는 <재판받은 사람들의 섬>(1946), <밤의 유희> <화상을 입은 아이>(1948), <말썽 많은 결혼식>(1949)이 있고 이 밖에 <사형수>(1947), <마르트의 그림자> <누구에게도 자유는 없다>(1949) 등의 희곡이 있다.
스웨덴의 여러 작가
편집-作家
스웨덴 문학의 발달은 엄격하게는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 세기의 전기(前期)는 낭만주의 시작(詩作)시대로, 대표적인 시인은 테그네르이다. 그의 대표작은 <프리티오프 이야기>이다. 중기(中期)에 이르러 점차로 산문이 번성해지고 한편으로는 사실적(寫實的) 경향이 일어나서 사회문제 등도 취급되었다. 브레에르 여사(女史)는 부인문제를 취급한 선구자였다. 다시 진전되어 후기(後期)에는 자연주의가 일어나 리드베리를 거쳐 스트린드베리에서 정점에 이르러 세계문학에 한시기를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스웨덴의 전통적인 낭만적 정신은 나중에 신(新)낭만주의로 개화되어 레베르틴, 할시트룀 등을 낳았고, 다시 현실적인 색채가 깃든 작가로서 쇠데르베리, 베리만 등이 배출되었다. 또 이 시기의 북구는 대하소설(大河小說)의 시대로 스웨덴에서는 시베르츠가 <세란브가(家)의 사람들>을 썼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놀드시트룀, 베리만 등의 다채로운 작가가 있지만 특히 뛰어난 작가로서는 역시 라게르크비스트이다. 프롤레타리아파(派)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다소 늦었지만 현재로서는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무베리, 마르틴손, 로욘슨, 헤드베리 등의 작가가 북구 특유의 대하소설류의 대작을 속속 발표 활약하고 있다. 이 파에 속하는 마게르만은 젊고 두각을 나타낸 천재인데 자살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 밖에 닐슨 피라틴, 구스타브 얀슨 등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많이 있다.
노르웨이 문학
편집웨르겔란
편집Henrik Wergeland (1808-1845)
노르웨이 시인.
신흥국(新興國) 노르웨이의 헌법기초위원의 한 사람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도자적인 기질을 타고 나서 정력적으로 강연, 설교, 신문편집, 도서관 설립, 교과서 편찬, 시작(詩作) 등을 통하여 조국애를 고무하고 조국의 건설에 최선을 다했다. 유태인, 미국의 노예,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서의 폴란드인 등, 약자들의 해방을 웅변으로 주장하고 에스파냐에 있어서의 탄압에 대해 항의하고, 18세기적 계몽주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해 일반대중, 특히 노동자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웨르겔란의 경향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여 날카로운 대립을 보인 사람은 웰하벤이었다.
웰하벤
편집Johan Sebastian Welhaven (1807-1873)
노르웨이 시인.
그는 시작(詩作)에 있어서의 형식의 균정(均整)을 존중하여 때로는 탐미적(耽美的)일 정도로 심미능력(審美能力)을 살려서 고상하고 품위있는 주옥 같은 시를 남겼으며 노르웨이 낭만파를 구축(構築)해 냈다. 웰하벤은 호적수(好敵手) 웨르겔란의 누이동생이며 그녀 자신 시인인 카미라 코레트와 석연치 못한 연애를 했다. 20여 년 동안 대학에서 문학사(文學史)와 예술사(藝術史)를 강의했으나 만년에는 정신병원에서 불행한 일생을 마쳤다.
입센
편집Henrik Ibsen (1828-1906)
노르웨이 극작가·시인.
시골 시엔에서 태어난 입센은 암흑 같은 소년시절을 보냈다. 8살 때 부유한 상인이었던 부친이 도산하고 15살 때 그림스터라는 조그마한 읍의 약제사 조수가 되어 연상(年上)의 하녀에게 아기를 낳게 했다. 의학에 뜻을 두고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의 저명한 예비학교에 다녔으나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천성적으로 반항적인 성격이었으며 소년시절의 역경으로 모진 고생을 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어떤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1851년 베르겐 극장의 무대조감독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극장과 계약을 맺고 해마다 희곡을 썼다. 이어 크리스티아니아에 옮겨 1862년까지 감독으로 있었는데 그동안 연극연수(演劇硏修)를 위해 덴마크, 독일 등지를 여행했다. 무대감독으로서는 그다지 명성을 떨치지 못했으나 극장 일을 보면서 실지로 얻은 경험은 나중에 극작에 있어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베르겐 시절에 쓴 <외스트로트의 잉게르 부인>이나 <솔하우그의 축제> 등은 당시 발표된 노르웨이 민요에서 소재를 얻기는 했으나 덴마크 낭만파적인 사극(史劇)이었고, 그 사이에 아이슬란드 ‘사가’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자기의 마음에 통하는 황량(荒凉)함을 발견하고 크리스티아니아로 가서 <헬게란의 용사들>(1858)을 썼다. 다음 작품으로 <왕위를 노리는 자들>(1863)에 그려진 두 사람의 인간의 대립, 그리고 입센의 경쟁자 비외른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사랑의 희극>(1862)은 홀벨그풍(風)의 명랑한 운문극(韻文劇)인데 작자는 그 속에서 그 시대의 사회제도, 특히 혼인(婚姻)에 대해 비꼬며 해학을 퍼붓고 있다.
입센은 1864년 외국에 가서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정주(定住)하여 1891년까지 오랫동안 고국에 돌아오지 아니했다. 입센이 외국에 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1864년에 덴마크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승산 없는 전쟁을 했을 때 노르웨이가 참전(參戰)하지 않고 우방을 돌보지 않았던 점에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소년시절에 자랐던 고향에 대한 소외감과 반감에 있었다.
노르웨이에 있어서 입센의 명성을 높인 것은 희곡의 형식을 빌은 장편의 사상시(思想詩)라고 할 수 있는 <브랜드>와 <페르귄트>(1867)이다. 이 두 작품에는 각기 제목과 동명(同名)의 주인공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노르웨이인, 나아가서는 입센의 두 개의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브랜드는 ‘전부냐, 아니면 무(無)냐’를 표방하고 모든 타협을 배격하며, 가족이든 나의 몸이든 모두를 희생하는 열렬한 목사이며, 페르귄트는 꿈 같은 생활을 하고 큰소리만 탕탕치며 현실을 바르게 보지 않고, ‘우회로(迂廻路)’를 좋아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의 양파’와 같은 사나이이다. 입센은 <브랜드>를 일생의 최대 걸작으로 할 생각으로 썼으며, <페르귄트>는 말하자면 그 반동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성립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후자가 노르웨이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애독되고 있으며 또 가끔 상연되기도 한다.비외른손이 1875년경 현대극을 쓰기 시작한 데 자극받아 입센은 1877년에 <사회의 기둥>을 쓰고 이를 전기(轉機)로 현대사회극으로 전향했다. 소년시절부터 반(反)사회적 경향이 있었던 입센은 외국에서 고향의 시민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여 ‘자기 해부’를 시도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분석하고 해독의 근원을 탐구·적출(摘出)하여 독자·관객에게 제시했다. ‘인간 정신의 반항’을 지상목표로 삼고 급진적인 입장에서 개인의 해방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가차없이 사회를 규탄하였으므로 반사회극이라고도 했다. 이들 작품은 한 해 건너서 크리스마스 전에 발표되어 독일로부터 전세계에 소개되었다. 그 시기가 되면 전세계는 그 상연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인형의 집>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이렇게 계속 발표된 사회극도 <물오리>(1884) 이후는 내면적·회의적·자조적(自嘲的)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부터 점점 표현의 명확성을 잃고 상징적이 되어 잠재의식의 암류(暗流)의 울림이 끊이지 않게 된다.
입센의 현대극은 극작 기술상의 걸작이기도 하다. 줄거리가 전개됨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이 점점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독백은 전혀 없고 대화 속에서의 미묘한 구절구절에서 배경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입센의 희곡은 인공(人工)의 산물은 아니고 다원적인 인간 입센 속에서 여러 가지로 대립하는 요소 가운데서의 대화이자 의논(議論)이며 그 대결로서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브랜드
편집Brand (1866)
입센 시극. 고국 노르웨이에 싫증을 느끼고 외국생활을 시작한 입센은 일생의 대표작을 쓸 야심으로 이를 써서 코펜하겐에서 발표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입센의 친구로 덴마크의 절망적인 대(對) 독일전쟁에 의용병으로 지원·종군한 브라운과 이 밖에 두 사람의 모델이 있다.
목사 브랜드는 신으로부터 배운 사명에만 따르며 모든 세속적 타협을 배제하고 생활하려고 한다. 그는 가난한 고향의 목사에 임명되어 자기의 절대적인 신앙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한다. 죄인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위험을 무릅쓰는가 하면 현세(現世)의 부귀(富貴)에만 눈이 어두운 모친의 믿음이 태만했다고 하여 모친의 임종(臨終)도 돌보지 않는다. 그의 처자는 이 지방의 이상한 풍토에 맞지 않아 건강을 헤쳐 아이가 죽어도 근무지를 떠나지 않을 뿐더러 서러워서 우는 아내에게도 아이의 생각을 회상하게 하는 모든 물건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아내가 신앙보다는 어머니로서의 모성본능을 선택하자 드디어 브랜드는 아내마저 버리게 된다. 그는 커다란 교회를 세웠으나 주민들이 교회의 의의(意義)를 이해 못함을 알게 되자 교회입구의 대문열쇠를 흐르는 냇물 속에 던져버린다.
산에 가서는 미치광이 게르에게 그리스도로 오인되어 다시 교회로 끌려갈 뻔하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그의 강고한 의지(意志)가 깨어짐과 동시에 눈사태에 휩쓸려 죽고 만다. 하늘에서는 “신의 사랑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인형의 집
편집Et dukkehjem (1879)
입센의 3막 현대사회극으로 <사회의 기둥>에 이은 제2탄으로 발표되었다. 1879년 12월 21일 코펜하겐의 왕립극장에서 초연되면서부터 전세계에 문제를 던졌던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입센의 작품으로 결혼생활에 있어서의 부인의 지위가 그 테마로 다루어져 있다.
헤르베르 변호사와 아내 노라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노라는 이미 아이가 넷이나 있으면서도 아직 아이티를 벗어나지 못하여 남편으로부터 항상 ‘종달새’라고 얕보였다. 그러나 노라에게도 크나큰 비밀이 있었다. 신혼 당시 남편이 결핵으로 전지요양(轉地療養)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구할 수 없다고 진단을 받았을 때 노라는 남편 몰래 돈을 빌었는데 그나마 그당시 빈사(瀕死)상태에서 병상에 누워 있었던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했던 것이다. 그 이후 노라는 부업을 하기도 하고 또 남몰래 돈을 모으기도 하여 이자와 원금을 반제(返濟)하는 데 쫓기고 있었다.
사건의 진전에 따라 이와 같은 과거의 사정이 차차 판명되어 가자 노라도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버린다. 노라는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이 전책임을 져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토록 훌륭한 정신을 갖지 못한 실제가(實際家)로 노라의 법적·도덕적 책임을 냉철하게 추궁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관례에 준하는 사건으로 취급하려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교육을 그런 여자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한다.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있어서는 외견상(外見上)의 사회적 지위나 그 체재(體裁)가 참다운 사랑에 뿌리를 둔 부부관계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노라는 노라가 생각하고 있었던 애정과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남편과 아이들을 남기고 집을 나간다.
물오리
편집Vildanden (1884)
입센 현대극. <사회의 기둥>에서부터 <민중의 적>에 이르기까지 소위 사회극에 있어서 사회악의 근원을 폭로하여 그 어떤 대가(大價)를 지불하더라도 절대적 진실의 탐구를 주장하고 있었던 입센도 이 작품을 전기(轉機)로 내성적·회의적인 입장이 되어 “범인이 살아가려면 거짓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주(船主) 웰레는 품행이 나쁘고 아들 그레겔슈는 집을 나가 친구 히알마르 에크달과 동거한다. 그레겔슈는 히알마르의 처가 원래 부친 웰레의 집에 있었던 하녀 기나임을 알고 히알마르 부부의 관계 정상 여부에 의심을 품게 되어 그 사실을 파헤치려고 한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의 동거인 레링 박사는 살기 위해서는 거짓도 필요하기 때문에 냄새나는 것에는 뚜껑을 덮어놓으라고 설명한다. 또 히알마르의 부친 노(老)에크달은 옛날 사기(詐欺)를 한 일이 있어 웰레가(家)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이에 그레겔슈는 그 진상을 발견하게 된다. 히알마르 부부의 14살짜리 딸 헤드비의 아버지는 실은 히알마르가 아니고 웰레인 것이다. 그레겔슈는 친구 히알마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는 것으로서 히알마르의 부부관계가 건전해질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역전되어 히알마르는 분격하여 집을 나가려한다. 헤드비와 늙은 에크달은 뒷마당에서 불구(不具)의 물오리를 정성껏 키우고 있다. ‘살기 위해 필요한 거짓’의 상징인 것이다.
헤드비는 그레겔슈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못 나가게 하기 위해 물오리를 희생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자기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하여 히알마르는 가출(家出)을 단념한다.
비외른손
편집Bj rnstjerne Bj
rnson (1832-1910)
노르웨이 시인·소설가·극작가.
18세 때에 크리스티아냐(현 오슬로)의 예비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같은 학급친구로는 입센 등 장래의 저명한 문인들이 많았다. 문필(文筆)을 희망하여 먼저 신문사의 연극·문학비평에 종사한다. 1856년에 스웨덴의 대학도시 우프살라를 향하는 학생 행렬의 선두에 섰으며 이때 시적(詩的) 영감(靈感)을 받아 산문극 <전쟁 기간>을 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가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아득한 소년시절의 생활을 회상하면서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 <아르네>(1858) 등 일련의 농민소설을 쓴다. 동시에 사가(Saga)에서 소재를 얻은 <시구르 슬렘베>(1862) 등의 역사소설이나 <아른뢰트 게리네>(1870) 등의 서정시를 차례로 발표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 이어서 수도 크리스티아냐에서 극장감독과 신문의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문학상에서 논쟁의 주역(論爭主役)을 담당했다. 그 후 1873년에는 이 시끄러운 문제를 피해 로마에 가서 현대 사회극 <파산> 및 <편집장>(2편 모두 1875)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현재에는 별로 상연되지 않고 있지만 입센이 사회극을 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 희곡의 근대화의 단서(端緖)가 됐다. 그 후 비외른손은 최후까지 현대극을 썼다. 대표작으로는 <레오나르다>(1879), <장갑>(1883) 등이 있다.
고국의 문단, 저널리즘의 거두, 지도적 존재로서 강연을 하기도 하고 논진(論陣)을 펴기도 하며 종횡으로 활동하여 그의 생전에 적어도 조국에 있어서 입센을 압도하는 명성을 떨쳤고 190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반신불수의 투병생활 끝에 파리에서 객사했다.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
편집Synn ve Solbakken (1857)
비외른손의 농민소설로 원제(原題)인 ‘신뇌베 솔바켄’의 뜻은 주인공인 소녀의 이름인데 성(姓)인 솔바켄은 햇볕이 잘 비치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가풍(風)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로 나란히 자리잡은 두 농장에 사는 가족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양지바른 곳, 꽃이 피는, 그리고 풍요(豊饒)한 농장 솔바켄에 사는 가족은 외롭고 경건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아들을 잃고 꼭 하나 남은 외로운 딸 신뇌베는 꽃다운 소녀였다. 한편 가난한 농장 그라리엔에 사는 부부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아이인 인게뵈르그라는 소녀는 신뇌베의 친구가 된다. 그리고 아들 롤뵈른은 난폭한 젊은이로 신뇌베에게 구혼(求婚)하지만 그녀의 양친의 승낙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신뇌베로부터 주의를 받고 얌전하게 되어 술과도 멀리 한다. 어느 날 밤 성대한 결혼 피로연이 있으나 출석하지 않고 거리로 나 간다.
도중 결혼 피로연이 있는 농가 근처에서 마차가 고장이 나 크느드라는 연적(戀敵)으로부터 그만 칼에 찔린다. 오랜 병상의 그를 신뇌베는 간호한다. 완쾌된 그는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청년은 부친의 시중을 받아 소녀 신뇌베의 양친을 찾아가 구혼하여 마침내 승낙을 받는다.
함순
편집Knut Hamsun (1859-1952)
노르웨이 소설가.
두 번이나 미국을 건너가 시카고에서 시전(市電)의 차장 등을 했으나 귀국하여 미국의 문명을 통렬히 비난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작가생활을 지망했다.
16세 때 비외른손 스타일의 농민소설을 썼으나 출세작인 소설 <굶주림>을 발표하여 문단에 신풍을 가져왔다. 그다음 작(作)인 <신비>(1892)에서는 니체적인 초인사상(超人思想)에 입각하여 입센, 위고, 톨스토이 등 당대의 거장들에게 맞설 정도로 육박했다. <주필(主筆) 륭게>와 <신세계>(다같이 1893)는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다음의 작품 <백야의 목가>(1894)는 백야(白夜)의 나라 북노르웨이의 풍토를 배경으로 한 이상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함순은 대단히 다작(多作)으로 1890년대에는 3부작의 희곡까지도 썼으며 <빅토리아>(1898)는 초기의 종말을 고하는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다.
20세기 벽두에는 함순의 작풍에 하나의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청춘의 격동은 목가적인, 경건한 리듬으로 바뀌게 되는데 <가을의 별 아래서>(1906), <베노니>(1908), <로사>(1908)를 비롯한 기타 작품이 이 시기에 속한다. 그는 1910년에 북노르웨이에 농장을 사서 <시대의 아이들>(1913), <세겔포스의 거리>(1915) 등 이 지방을 제재로 한 소설을 썼다. 1917년에 발표된 <토지의 혜택>도 북부를 개간하는 고독한 농부의 믿음직한 생활을 그린 일대 서사시적인 소설로 이 작품으로 함순의 세계적 명성이 확고해졌다.
함순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식문화에 반발하여 건전한 농민정신을 독특한 문체로 작품화하였다. 그 작품의 주인공으로서는 항상 고고(孤高)한 남자의 모습이 등장했다. 이 남자도 작가가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하여 나중에는 노경(老境)에 들어가 <부랑자>(1927), <아우구스트>(1930) 등으로 변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후 전쟁 범죄인이 되어 재산을 몰수당한다. 이때의 체험을 쓴 <정들었던 길을>(1949)은 노인의 저작으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신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19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굶주림
편집Sult (1890)
함순 소설. 내용은 크리스티아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천재적(天才的)이면서도 가난한 생활에 굶주리고 있는 주인공 시인이 영양실조 때문에 몽유병자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스치는 행인들에게 여러 가지 기묘한 말을 하고 지나간다.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갑자기 상냥스러워지기도 하며 또는 화를 내기도 하며, 정신의 고상함을 유지하면서도 너무나도 겹친 공복(空腹)을 견딜 수 없어 사경(死境)에 이르지만 그러나 자기의 생활력을 소멸시킬 수는 없고 그리하여 모든 희망을 버리고 우연한 기회에 러시아 화물선에 고용되어 고향을 등지고 사라져간다. 이 작품은 함순의 젊은 시절의 방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서전적인 명작으로, 북구 3국의 합작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보예르
편집Johan Bojer (1872-1959)
노르웨이 소설가.
어릴 때 양친을 잃고 어부에게 양육되었으며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외국에 건너가 작가가 되었다. 1896년 출세작 <민족 이동>을 발표한 이후 <바이킹의 후예> <해변의 사람들> 등 소설과 희곡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보예르의 전기(前期) 작품의 특징은 대중을 묘사하는 데 있었고, 그 중심적인 문제는 추악한 현실사회와 초종파적(超宗派的)인 그리스도교 정신을 신봉하는 강한 자아(自我)와의 대립에 있었지만 후기작품에는 심리소설이 많다.
운세트
편집Sigrid Undset (1882-1949)
노르웨이 여류작가.
192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금세기 전반(前半)의 대표적인 여류작가이다.
국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로마에 유학했다. 초기의 작품은 현대소설로 사무원시절의 체험을 통한 주변사람들의 생활을 썼으며 1907년의 데뷔작인 <말타 오울리에 부인>은 아내의 부정(不貞)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1911년 로마에서 쓴 <예니>는 젊은 여류화가 예니의 어떤 청년에의 순수한 정신적 사랑과 그 청년의 부친과의 육체관계를 줄거리로 한 것으로, 여자의 업보(業報)라고도 할 수 있는 여성심리의 어두운 저류(低流)를 리얼하게 그 위에 상상력을 구사하여 묘사한 작품으로 섹스의 솔직한 묘사로써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역사소설로 전향하여 중세의 노르웨이를 무대로 한 대하(大河)소설을 썼다. 1920년에서 1922년에 걸쳐 출판된 대표작 <라브란의 딸 크리스틴>에서도 여주인공을 비롯하여 작중인물의 심리는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공통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루었다.
운세트는 1924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며 1925년서부터 1927년에 걸쳐 쓴 4부작 <아우둔의 아들 울라브>에서는 카톨릭의 입장에서 종교를 노골적으로 전면(前面)에 내세우고 있는데 전작(前作)에 비하여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스의 카톨릭교도에의 박해로 인해 스웨덴에서 영국, 미국 등지로 망명했다.
라브란의 딸 크리스틴
편집Kristin Lavransdatter (1920-1922)
노르웨이 여류작가 운세트의 역사소설로 <신부의 관(冠)>(1920), <주부>(1921), <십자가>(1922)의 3부로 된 대하소설이다.
스토리의 무대는 1306년부터 1348년까지의 중세 노르웨이이다.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청순(淸純)하고 아름다운 소녀 크리스틴이 자기를 구해준 미남이며 건달인 기사 에르렌을 사모하여 몸을 맡기게 되어 임신까지 하고 결혼한 남편의 불성실에 화가 나서 별거생활을 한다. 크리스틴은 시몬이라는 숭배자로부터 일생동안 연모(戀慕)를 받는다. 크리스틴은 두 의붓자식을 사랑, 또는 미워하기도 하며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여덟 아이를 떠맡게 된다.
크리스틴은 나다로스(현재의 트로니함)의 사원(寺院)으로 순례를 떠나 드디어는 수녀가 되어 당시 유럽을 휩쓴 페스트 환자의 간호에 몰두하고 있는 도중 자기도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이 스토리가 전개되는 가운데 자랑스럽고 완고할 정도로 자아(自我)가 강했던 여자가 죄의식에 참회하고 경건한 카톨릭교도가 되어 죽음의 직전, 신의 은총(恩寵)에 감읍(感泣)한다. 이 작품과 그 다음 작품인 <아우둔의 아들 울라브>는 운세트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계기가 되었다.
외베를란
편집Arnulf
verland (1889-1968)
노르웨이 시인.
초기의 시에는 독일문학의 영향이 강하고, 공허한 인생에 대한 고뇌라든가 개인활동의 자유 한계에 대한 불만들이 노래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사회혁명가적인 경향이 강조되어 부르주아나 관료에 대해 공격했고 인인애(隣人愛)가 설명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때까지 혁명적 급진주의자였던 외베를란은 다시 전향하여 국민시인이 되어 휴머니즘에 입각한 애국심과 인간성 및 민족의 자유를 설명하여 전후에는 국가적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서 수도 오슬로의 중앙부에 ‘그로틴’이라는 저택을 받았다.
팔크베르게
편집Johan Petter Falkberget (1879-1967)
노르웨이 작가. 스웨덴과의 국경지대인 레로스 광산에서 교양있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위고·발자크·졸라 등의 소설을 익혔다. 1906년 고향을 떠나 지방지의 편집자 노릇을 하다가 오슬로에서 1907년 소설 <검은 산>(1907)으로 데뷔했다. 1922년에는 다시 변경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하면서 사투리를 섞은 소박한 문체로 자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레로스 광산을 무대로 하여 광산촌의 비참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또한 로맨틱한 청년들의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켜 인간성의 승리라는 궁극적 목표를 내세웠다. 국회의원을 하기도 하나, 후일 나치스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작품으로는 <제4의 야근(夜勤)>(1923)과 두 편의 대하소설 <크리스찬누스 섹크투스>(1927-35), <밤의 빵>(1940-59)이 있다. 후편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에서 혹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도 사랑하고, 고민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독일점령하의 노르웨이 국민에게 정신적인 지침을 주었다.
노르웨이의 여러 작가
편집-作家
노르웨이는 ‘에다’ ‘사가’의 시대로부터 시인이 정치·민족의식상으로 점하고 있는 지위가 컸으며 이 전통은 18세기 전반(前半)의 웨르겔란 후반(後半)의 비외른손에 의해 계승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외베를란이나 노르달 그리크(1902-1943, 보통은 그리그라고 불린다)가 대독(對獨) 저항운동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때로는 시인국가(詩人國家)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것을 지지하지도 않고 그것에 반발하지도 않고 문학 주류를 떠나 주옥 같은 가작(佳作)을 남긴 시인도 있다. 오래 전에는 북노르웨이의 목사 다스(1647-1708)가 <노를랑의 나팔>을 썼고, 또 19세기 말에는 옵스트펠더(1866-1900)가 병적·상징적·신비적인, 단장(斷章)같은 단편소설이나 시를 만들어 냈다.
가장 일반적인 장르의 작가로서 그 시대에는 입센, 비외른손과 나란히 평가받았으며, 현재도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작가로는 리이(1833-1908) 및 키엘랑(1849-1906)이 있다. 전자는 어두운 테마를 소재로 하여 따뜻한 인간상을 그렸으며, 후자는 급진적인 입장에 서서 악(惡)과 불합리로 가득 찬 사회를 통격(痛擊)하여 약자에 대한 동정을 나타냈으나 만년에 현지사가 되어 사회소설 <야곱>을 완성하지 못한 채 붓을 놓고 말았다. 이 밖에 노르웨이의 제2국어 란스몰을 사용하는 비니예(1818-1870), 가르보르크(1851-1924), 베소스(1897- ? )의 계열이나 방언(方言)의 영향이 강한 릭스몰 제1국어를 사용하여 벽지(僻地)역사에서 테마를 잡은 대하소설(大河小說)을 정력적으로 발표한 팔크베르게(1879-1967)와 지방 출신의 인텔리 작가인 후울(1890-1961)의 이름도 들 수 있다.
요슈타인 가아더
편집Jostein Gaarder (1952- )
1952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1986년 단편집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한 작품을 썼고, 인생의 신비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냈다.
1990년에 <인내의 신비=Kabalmysteriet>로 노르웨이 문학 비평가 협회와 문화부로부터 상을 받았고, 과 <크리스마스의 신비=Julemysteriet>도 수상 작품이다. 특히 <소피의 세계>는 북유럽과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94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비롯하여 갖가지 상을 휩쓸다시피하여 가아더를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다.
또한 영어판이 출간되었고 1995년에는 프랑스·브라질·러시아·중국·일본 등 세계 30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어 지구촌 어디에서나 <소피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현재 가아더는 두 아들, 부인과 함께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살며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문학
편집사이문드의 에다
편집Saemund’s Edda
고대 아이슬란드어로 쓰여진 고대 게르만 신화, 영웅 이야기, 잠언(箴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집, 코펜하겐의 왕실도서관 소장의 사본(寫本) 번호 2365가 정식 호칭명이며 사본은 일부 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에다의 이름은 정확히는 <스노리의 에다(Snorri’s Edda)>라고만 불리는 것(외국에서는 ‘산문의 에다’ 또는 ‘신 에다’라고 불리고 있다)에 한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현재 사본의 성립은 13세기 후반(後半)이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사본이 발견된 17세기 벽두까지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귀중한 서적이 그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은 그 발견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문드의 에다>는 반드시 큰 저서도 아니며 그 주제의 모든 것이 고대 게르만 문학에 있어 독특한 것도 아니지만 고대 게르만인의 우주관·세계관·인생관 등을 이해하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사본에는 2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으로서는 우선 천지창조(天地創造)와 신과 인간의 운명을 노래하는 <무녀의 예언>, 고대북구인의 인생관, 또한 처세훈(處世訓)을 노래한 <지극히 높은 자의 말씀>, 고대 게르만의 신들을 찬양한 노래, 또 아틸라왕이나 부르군트왕(王), 그리고 니벨룽겐의 영웅 등을 노래한 것 등이다.
<사이문드의 에다>의 특징으로서는 ① 개관적이며 어떤 특정한 기회에 시작(詩作)된 것이 아니다. ② 작시자(作詩者)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세대(世代)에서 세대로 전수(傳受)되었다. ③ 고대 게르만의 운율(韻律)을 따랐다. ④ 사용언어는 <궁정시>에 비하여 용어에 있어서나, 어순(語順)에 있어서나 산문과의 차이가 작은 점 등이다.
스노리의 에다
편집Snorri’s Edda
작자 스노리의 이름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서 <사이문드의 에다>와 구별하지만 정확하게’에다’의 이름으로 호칭되는 것은 이 책뿐이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젊은 시인들을 위한 시교본(敎本)이며 소위 궁정시에 쓰이는 특별한 시어(詩語)나 운율(韻律) 등의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옛 ‘궁정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대 게르만 신화의 지식이 필요하게 되므로 여기저기에 <사이문드의 에다> 시를 삽입하고 산문에 의한 신화를 쓰고 있다.
이 책이 언어학적인 면에서 특기되지 않으면 안 될 점은 아이슬란드어에 대해 음성학적(音聲學的) 기술을 한 점인데 이는 그 시대의 다른 게르만 민족보다 현저히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궁정시
편집Skald
<스노리의 에다> 작시법에 의해 된 시로서 외국에서는 보통 ‘스칼드의 시’라고 부르고 있지만 아이슬란드어로는 ‘스칼드’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인’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이런 종류의 시를 ‘스칼드의 시’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슬란드어(語)로는 그 뜻이 맞지 않는다.
<궁정시>는 이 명칭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주로 왕후(王侯)를 높이 칭송하여 그 앞에서 노래한 것이었다. 바이킹 시대의 스칸디나비아 전역(全域)은 원래부터, 잉글랜드에 있어서도 언어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의 시인은 크게 활동했으며 그 업적도 대단히 우수했다. 시의 됨됨이가 좋을 때는 왕후로부터 막대한 상을 하사받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궁정시>는 <사이문드의 에다>시와 옛날에는 형식에 있어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나 9세기경부터 확실한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요한 것을 들어 본다면,
① <궁정시>는 시인과 그 시대, 혹은 극히 최근에 죽은 사람을 칭찬한 것에 반하여 에다의 시는 게르만의 옛 신(神)들이나 옛 시대의 범(汎)게르만적 영웅을 노래했다.
② <궁정시>의 형식은 대단히 복잡하여 특별한 시어(헤이티)나 쾨닝(’바다의 불’이라고 하여 ‘황금’을 의미하는 따위)이 많고 운(韻)을 따르기 때문에 어순(語順)이 전혀 무시되어 있어 아주 난해(難解)하여 외국어의 번역은 전혀 불가능한 것에 반하여, 에다의 시는 특별한 시어를 쓴다는 느낌도 적고 시의 형식도 쉽고 이해가 용이하다.
③ <궁정시>의 작자명은 대충 알려져 있는 데 반하여 에다의 시 작자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14세기경부터 스칸디나비아의 언어와 아이슬란드어와의 차가 커져서 스칸디나비아의 왕후는 궁정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궁정시는 쇠퇴되어 버렸다.
사가
편집Saga
중세 아이슬란드 문학이 세계에 자랑하는 산문문학의 한 형식이다. ‘사가’라는 말은 아이슬란드어로 ‘말해진 것, 말로 전하다’ 등을 뜻하며, 에다의 시나 궁정시에 있어서도 이 의미로 쓰여졌다. 현대어로도 그런 뜻으로 해석되지만 1200년경에는 적어도 아이슬란드에 있어서는 ‘어떤 길이를 가진, 쓰여진 이야기’를 뜻하게 되어 이런 종류의 문학형식은 세계문학에 있어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사가’라는 말이 이런 종류의 문학을 가리키는 술어(術語)가 되었다.
사가에는 장·단(長短) 여러 가지가 있고 문장은 간결하고 힘차게 되어 있다. 사가에 따라서는 궁정시를 여기저기에 삽입한 것도 있으나 산문의 이해는 쉽게 되어 있다. 종전에는 이들 사가의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을 기술(記述)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에 사가의 종류를 든다면 우선 훈족(族)의 왕 앗틸라나, 부르군트의 왕, 그리고 니벨룽겐의 시 등에 나오는 영웅의 <북구고대의 사가> <노르웨이 왕들의 사가> 그리스도교의 <성자들의 사가>, 사랑이나 모험 등을 취급한 프랑스어(語) 등으로 번역된 <기사의 사가> <아이슬란드인의 사가>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사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이슬란드인의 사가>인데 그 주요한 것들로는 <니아우틀의 사가> <에이틀의 사가> <그레티르의 사가> <복어골 주민의 사가> 등의 장편이 있다.
이들 사가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주로 아이슬란드에서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사본(寫本)된 것으로 덴마크나 스웨덴의 도서관에 있다.
에길 스칼라그림손
편집Egill Skallagrimsson (910?-990)
아이슬란드 시인, 호족(豪族). ‘궁정시’ 혹은 ‘스칼드의 시’라고 불리는 중세북구의 시로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인으로 이 시인 이후 그와 맞설 수 있을 만한 시인은 한동안 나오질 않았다. 그의 일생은 그의 이름의 머릿글자를 딴 유명한 장편 사가 <에길틀의 사가>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시(詩)인 <헤드랜섬(Head Ransam)>은 그 속에 노래되고 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
편집Snorri Sturluson (1178-1241)
아이슬란드 역사가·시인.
스노리가 이름이고 스투를루손은 스투를루의 아들을 뜻할 뿐 말하자면 성(姓)은 아니다. 아이슬란드의 굉장한 호족(豪族)이며 정치적인 세력도 강하여 그의 일가(一家)가 활약한 13세기를 스투를루 일족(一族)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이다.
스노리가 저술한 책 가운데서 유명한 것은 우선 <에다>(소위 산문의 에다 또는 신에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시학(詩學) 입문서인데 이에 첨가하여 고대 북구신화를 산문으로 쓴 것이다. 다음 저서로는 <헤임스크링글라>라고 불리는 노르웨이 왕조사(王朝史)가 있다.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여 집필된 것으로 19-20세기를 통하여 노르웨이에 있어서는 하나의 베스트 셀러였고 중세 작가 가운데서 그이만큼 영향을 준 사람은 없었다.
락스네스(할두르 킬리안)
편집Halld r Kiljan Laxness (1902-1998)
아이슬란드 작가.
락스네스는 자기가 자라난 곳(복어 허리)을 뜻하는 것으로 그의 성(姓)은 아니다. 출생지는 수도인 레이캬비크. 청년기에는 함순의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카톨릭에 개종(改宗)했으나 후에 미국에 건너가 이를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면서부터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현대 아이슬란드에 있어 스노리스투를루손 이후의 위대한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중세의 사가형식뿐만 아니라 그 주제도 가끔 사가에서 얻고 있다. 작품의 주요한 것으로는 <카시밀의 대직공(大織工)>(1927), <살카 발카>(1931-32), <독립된 백성>(1934-35), <아이슬란드의 종>(1943-46), <영웅이야기>(1952), <산기슭의 오막살이의 기록>(1957), <되찾은 천국>(1960),<연돌극>(1961), <시인시대>(1963) 등이 있다. 1955년 아이슬란드인으로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독립된 백성
편집Frie menn
락스네스 작. 아이슬란드의 가난한 소작농들은 손바닥만한 농지에 매달려 추위를 견디면서 한 줌의 수확을 얻으려고 일하지만 자신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독립된 자유인이라는 자랑으로 살고 있다. 주인공인 뱌르투르는 긴 세월 지주에게 고용되어 자기의 땅을 갖기 위한 일념으로 열심히 일한다. 이 목표를 달성한 순간 병과 그 밖의 불행이 겹쳐서 농장은 빚 담보로 남의 손에 넘어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토지를 찾아 산을 넘어간다. 그는 여전히 독립된 자유인이다.
베네딕트손
편집Einan Benediktsson (1864-1940)
아이슬란드 시인. 시재가 있는 모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시작에 전념했다. 에이틀 스카틀라그림손과 R. 브라우닝의 영향을 받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다그스그라우>지를 발간하고 법정변호사나 군(郡)보안관으로 활약하다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그의 시는 외국의 대도시나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 하기도 하였으나 지극히 철학적인 면이 강렬하였다. 아이슬란드어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휘하여 모국어의 우아함과 순수성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그 시작법상의 독특성은 모방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출한 것이었으나 실로 많은 젊은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집에 <이야기와 시> <바다의 빛남>(1906), <파도>(1913), <바다>(1921)가 있다.
아이슬란드의 여러 작가
편집-作家
아이슬란드어(語), 아이슬란드 문학이 다른 게르만 민족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는 점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이며 고대는 끊임없이 현대에 살고 있으며 또한 현대는 고대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작가로는 성시(聖詩) 작가로서 하틀그리무르페트르손(1614-74), 시인이면서 사전 편찬자이기도 한 스베인뵤르튼 에이일손(1791-1852), 아이슬란드 각지의 민화를 집대성한 욘 아우르트나손(1819-88),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의 지도자이며 또 고대문화의 연구가인 욘 시글손(1811-79) 등이 있다.
핀란드 문학
편집칼레발라
편집Kalevala
핀란드 민족전승(傳承) 서사시. 의사(醫師) 엘리아스 뢴로트가 핀란드나 칼레리아 지방의 숲속이나 또는 호숫가에서 구전(口傳)되어 온 노래를 수집하여 이를 정리, 1849년 증보(增補) 출판한 것으로 50장(章)에 2만 2천7백85행에 달한다.
이 웅대한 서사시는 대기(大氣)의 처녀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노(老)영웅 바이나모이넨의 출생과 훌륭한 마술사로의 성장이 기술되어 있다. 그는 구혼여행(求婚旅行)을 떠난다. 이것이 유능한 대장장이 일마리넨이 인간의 부귀를 낳게 하는 샘포(Sampo)를 만드는 이야기에 연결되어 있다. 일마리넨은 이 샘포를 포호욜라의 여주인 로우히에게 약혼의 선물로 보내어 아름다운 딸을 얻는다.
그러나 이 젊은 아내가 마음 상한 노예 클레르보의 복수의 희생이 되었을 때 포호욜라와 칼레발라의 백성은 싸운다. 칼레발라의 병사들은 포호욜라의 보배 샘포를 탈취하려고 하지만 도중에 방해되어 결국 샘포는 파괴되어 호수 깊숙이 가라앉아버린다. 그러나 샘포의 파편은 칼레발라를 풍요하게 만든다. 나중에 밀려오는 그리스도교 앞에 이교의 상징 바이나모이넨은 쓸쓸히 사라져가는 데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칼레발라>의 표현은 대담하고도 소박하며, 기발한 비유(比喩)가 풍부하다. 거기에는 자연만물 가운데에서 신을 우러러보고 언어의 마력을 신봉하는 원시적인 신앙을 찾아 볼 수 있다. 어진 음유시인(吟遊詩人) 바이나모이넨을 비롯하여 신중한 대장장이, 경박한 호남 렘민캐이넨, 비극의 노예, 청순한 처녀 아이노 등 갖가지의 인물들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칼레발라>는 핀란드 민족의 자랑이며 국민문학의 반석일 뿐 아니라 세계의 대(大)서사시로서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토펠리우스
편집Sakari Topelius (1818-1898)
핀란드 시인·소설가.
일찍부터 프랑스,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에 뜻을 두고 1841년 이후 애국적·국민적인 시를 썼는데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의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국어는 아직 문학어로서 완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스웨덴어(語)를 썼다. 1854년 토펠리우스는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 역사소설 <군(軍) 외과의사의 이야기>(1853-67)를 발표했는데 이 소설의 성공에 의해 그는 핀란드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또 8권의 동화집 <아이들을 위한 독본>(1865-96)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극작으로는 <엠메리츠의 여왕>(1854)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활동으로 핀란드 문학을 창시했고 아동문학에 큰 공헌을 세운 한편, 문학으로서는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인간심리의 묘사가 결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얀 아네모네
편집토펠리우스 작.
그의 동화집인 <별의 눈동자>에 실려 있다. 어느 공원에 핀 하얀 아네모네는 커다란 나비 ‘아폴로’를 좋아해서 자신의 꿀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한다. 그러나 아폴로는 아네모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몸치장에만 신경쓴다.
어느 날, 아이들이 아폴로를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아네모네는 자기 잎 아래로 아폴로를 숨겨 준다. 나비를 잡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아이들에게 짓밟히면서도 아네모네는 아폴로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실란페
편집Frans Eemil Sillanp
(1888-1964)
핀란드 소설가.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그는 헬싱키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배웠다. 25세 때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1916년 처녀작인 <생활과 태양>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것은 핀란드 독립 때 내란을 소재로 한 <경건한 고뇌>(1919)와 병약한 농가의 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자연과 심리의 소설 <요절(夭折)>(1931)이었다.
그의 문학에서는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융합되어 독특한 예술적 경지가 전개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나이의 길>(1932), <여름밤의 사람들>(1934) 등이 있으며, 193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젊은 나이로 잠들다
편집Nuorena Nukkunut
젊은 나이에 영원히 잠든 소녀 실챠의 일생을 그린 작품으로 멸망해 가는 농장주 살르메르스가(家)의 마지막 한 사람인 청순하고 가련한 딸이 폐병으로 죽기까지의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작품 전체에 작가 실란페의 로만티시즘과 휴머니즘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번역된 이 작품은 “원시신화나 전설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발타리
편집Mika Waltari (1908-1979)
핀란드 소설가.
학생시절부터 소설을 썼으며 헬싱키 대학을 졸업한 후 파리에 유학했다. 귀국 후부터 문필생활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탐정소설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1937년 <낯선 방문객>으로 일류작가로 그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발표된 고대 이집트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 <이집트인(人)>(1945)이며 그 후에도 역사소설의 베스트 셀러를 많이 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가치는 오히려 초기의 신비적 리얼리즘에 충만된 현대소설에 있다고들 한다.
핀란드의 여러 작가
편집-作家
핀란드 문학 최초의 민족서사시 <칼레발라>에 다음가는 창작으로서의 문학작품을 쓴 제1인자는 알렉시스 키비(1834-1872)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자연주의와 톨스토이 문학은 핀란드 근대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극작가 칸트(1844-1897), 소설가 아호(1861-1921)는 전자의 경우고, 이예르네펠트(1861-1932)는 후자의 경우다. 나중에 그 반동이 낭만주의 작가 린난코스키(1869-1913)에서 나타났다. 그의 <붉은 꽃의 노래>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하여 여류작가 칼라스(1878-1956)와 요투니(1880-1943)는 오히려 리얼리즘계(系)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핀란드는 독립, 문필의 자유를 얻어 일시에 문학도 개화되었다. 대표자는 국제적인 노벨상 수상 작가인 실란페이다. 또 발타리는 역사소설에 그 일생을 바쳐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대기적 대하소설의 리나(1920- ), 신소설(누보로망)의 메리(1928- ) 등의 신작가가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핀란드 문학의 특징은 다소 신비적인 리얼리즘에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