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러시아-북동 유럽 문학/동유럽 문학

동구문학〔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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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歐文學〔槪說〕 동유럽 여러 민족은 지역적으로는 흔히 일괄해서 취급된다. 그러나 역사나 문화면에서 본다면 각기 다른 독자적인 국민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선 언어면에서 본다면 폴란드어(語), 체코어, 불가리아어,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등의 슬라브 계통 언어 외에 라틴 계통의 루마니아어, 고대의 이류리아어에 유래하는 알바니아어, 우랄알타이 계통의 헝가리어가 있으며, 일부에서는 이디시(근대 유대어)나 로마니(집시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종교에 관해서 본다면 예부터 그리스 정교,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유대교 등이 각각 유력한 종교로서 동유럽에 널리 포교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배경 밑에서 동유럽 여러 나라들은 제각기 특색 있는 국민문학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동유럽 각국의 문학을 특징 지워주고 있는 공통점도 결코 적지는 않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셔널리즘의 정열일 것이다. 동유럽 제민족의 내셔널리즘은 그들이 15세기 이래 오스만 터키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등 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민족의 독립을 지향하는 빈번한 반란으로서 폭발했다. 이러한 봉기가 일어났을 때 문학가들이 항상 적극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동유럽 민족운동의 특색이며 또한 동유럽의 2대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폴란드의 솅키에비치와 헝가리의 페테피가, 그 어느 쪽이나 다 민족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정열의 시인이었다는 것도 동유럽 문학의 성격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비잔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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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 비잔틴(동로마) 시대란, 통상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4세기 말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신로마’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블)이 함락된 1453년까지의 1000년 남짓을 가리킨다. 문화의 특색으로서 본래 동방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6세기에는 거의 완전히 이교(비 그리스도교)적 문화를 구축(驅逐)하고, 모든 면에서 문화의 기반이 된 점을 들 수가 있다. 화려한 것 속에도 엄격한 신비성을 간직한 동방 그리스도교(오도독스, 정교)의 특질은 교회건축, 성화상(이콘), 성가 등의 전례(典禮) 예술에 잘 나타나 있다. 전통적인 수도생활은 성파라마스(14세기)의 정적주의를 낳게 되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고전, 고대문화의 계승자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스티아누스대(6세기)의 로마법 편찬 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법제면에서 로마를 계승하고, 로마제정기에 이미 시작되었던 동방적 지배체제를 더욱 추진하여, 교회제도마저도 그 속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문화면에서 비잔틴은 7세기에 완전히 그리스어 세계가 되었다. 많은 산문작품들의 내용과 독후감을 기록한 포티오스의 <비부리오테케>(9세기), 시집 <그리스 사화집(詞華集)>(10세기), 수이라스의 이름을 붙인 <백과사전>(10세기) 등이 고전 텍스트의 교정 주해 외에도 고전전승의 면에서 주요한 성과이다. 그러나 고전의 보존이라 해도,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제약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시대에 성립한 코이네(共通語)를 문장어로 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11세기 후에는 고전기의 아티카 방언을 모범으로 삼는 의고문(擬古文)에 역행하는 양상이어서, 어느 것이나 일상의 구어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문학창조는 힘들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가 중심이 되었다. 서구에 영향을 끼친 것은 초기의 교부문학 뿐이었으나 그 후 성자전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나타나 서간문학도 성행하였다. 오늘날 정교회의 쥘례에서 사용하는 기도 성 이오안네스 그류소스도모스식과 성대(聖大) 파시레이오스식도 이 시대에서 비롯된다. 역사문학에서는 프로코피오스(6세기), 푸세로스(2세기) 등 많은 사가가 배출되었으나, 스케일면에서나 개성면에서 고전시대의 사서(史書)에 필적할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 7세(10세기)의 <제국통치론> 등 일련의 저술과 황녀 안나 코무네나(12세기)의 회상록도 유명하다. 그러나 순문학 부분에서는 이렇다 하게 취할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구어의 무훈시 <디게네스 아크리타스>(9-10세기경)는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와 견줄 만한 걸작으로 비잔틴 제국과 아랍과의 절박한 관계를 투영하여, 언어면에서 근대 그리스 문학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비잔틴이 반드시 독창적인 문화를 탄생 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동유럽 제국과 러시아의 그리스도교화 및 문화 형성의 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고 있어, 그런 점에서 현재도 아직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金 鶴 秀>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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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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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서(西)슬라브의 나라 폴란드는 중세 이래 우수한 독자적 문학을 지니고 있다. 폴란드 문학의 독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영광과 고난으로 가득 찬 역사에 깊은 동정을 보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19세기를 고찰해 보면, 서구에서는 몇 개의 근대적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제각기 국민문학이 화려하게 개화한 시대인 데 반해, 폴란드에서는 나라가 망하고 타국의 예속하에 놓였던 시대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여 폴란드의 국민문학은 그 주제를 한결같이 민족국가의 독립이라는 문제로 집중시켰다. 인간애나 윤리와 같은 일반적 문제도 이 중심문제에 종속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개인의 고뇌와 비애도 민족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폴란드적 헤브라이즘이 낭만주의 문학 뿐 아니라 솅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와 같은 세계적 문학에 있어서조차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폴란드 문학은 전통적으로 산문보다는 운문에 뛰어나며, 시의 영역에서는 세계문학 중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예술적 수준에 이르고 있으나, 대체로 시는 소설보다 번역이 어렵기 때문 에 세계적으로 광범한 애독자를 얻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중세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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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紀-文學 966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수세기간은 로마 카톨릭 문화의 영향으로 라틴어에 의한 문학이 발달했다. 라틴어로 쓰여진 폴란드 문학 초기의 뛰어난 작품에는 12-13세기에 속하는 연대기·성인전이 있다. 폴란드어에 의한 문헌은 겨우 13세기경부터 출현했고 가장 오랜 폴란드어 텍스트는 <보구로지차(신을 낳은 자=Bogurodzica)>라 불리는 성모 마리아에의 짧은 찬가이다. 15세기에 들어 폴란드 문화의 최초의 개화기가 찾아든다. 이때 폴란드는 야계워(Jagiellon)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유럽 강대국의 하나로서 중·동구세계에 군림했다. 1364년에 창립된 크라코바 대학은 1400년에 중세적 종합대학으로 확대되어 각 분야에서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크라코바 대학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강의한 그주고슈(1400-1477?)나 이탈리아인 필립 부오나코르시(1437-1496?)에 의해 인문주의가 재빨리 폴란드로 침투를 하기 시작했다. 얀 도우고쉬(1415-1480)의 12권으로 된 <폴란드사(史)>는 이 시대의 민족의식의 성장을 말해준다. 얀 오스트로로그(1436-1501?)는 최초의 걸출한 인문주의자로서 라틴어 논문 <국가건설에 관한 각서>(1475)에서 교회와 귀족사회에 대해 비판했다. 라틴어에 의한 저술은 여전히 우세했으나 1473년에는 브로츠워프에서 활판 인쇄가 시작되어, 1475년에는 폴란드어로 된 최초의 간행본이 인쇄되었다.

르네상스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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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期文學 16세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로서 이 세기의 후반은 폴란드 문화의 황금시대라 불린다. 이 시대에는 점차 대두하기 시작한 슈라프타(기사계급에 기원을 둔 중·소귀족 계급)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특권을 획득하여 르네상스의 기수가 되는 동시에, 폴란드에서의 종교개혁 운동의 진전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종교개혁 운동은 폴란드어를 민족의 문장언어로서 형성시키는 운동과 연결되어 처음으로 성서의 폴란드어역(驛)(1551)이 신교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얼마 안 가 폴란드어는 라틴어에 대신하게 되었다. 폴란드어에 의한 문학의 첫거장은 미코와이 레이(1505-1569)로서, 풍자시 <귀족·대관(代官)·사제 3자의 짤막한 토론>(1543)은 폴란드 문학의 개막을 고하는 기념비이다. 그러나 그의 본령(本領)은 산문에 의한 종교적·철학적 사색에 있으며 작품집 <거울>(1567)의 산문 <성실한 인간의 일생>은, 한 사람의 슈라프타(소귀족)의 진지한 윤리탐구의 일생을 간결, 명쾌한 구어체(口語體)로 쓴 것으로 문학어로서의 폴란드어 발달에 공헌했다. 폴란드 르네상스의 주도자는 위대한 시인 얀 코하노프스키(1530-1584)이다. 그는 인문학적 교양이 높아 서양고전의 시정신과 폴란드의 민족 전래의 모티프를 훌륭히 자기의 시 속에 살려 국민시의 발달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폴란드 최초의 비극 <그리스 사절(使節)의 사퇴>(1578), 어려서 세상을 뜬 사랑하는 딸 우르술라를 애도하여 부른 절창(絶唱) <만가>(1580) 등이 대표작이다. 예수회 신부 피오트로 스카르가(1536-1612)는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수많은 종교적 저작을 저술했는데 <성자열전(聖者列傳)>(1579)은 문학적 가치가 높고 <의회 앞에서의 설교>(1597)는 ‘설교’라는 형식으로 왕권의 강화, 농민권리의 보호 등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논한 수준 높은 산문이다.

바로크 시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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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文學 17세기는 인접국인 체코에서의 30년전쟁(1618-48)과 병행해서 프로테스탄티즘이 패퇴하고, 카톨릭시즘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엽에 걸쳐 폴란드 왕국은 중앙집권이 무너지고 귀족에 의한 지방분권의 경향이 나타나 잇달은 전란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엽에는 융성의 조짐을 보였던 시민계급도 중엽에는 조락을 보여 문화는 대귀족에게로 넘어간다. 이 사양(斜陽)시대의 폴란드 문학이 바로크 시대라 평가되고 있다. 문학은 주제와 표현양식에 있어 지방색을 띠게 되고 장르도 다양화되었으며, 역사적 서사시가 새로운 장르로서 애호되었다. 바츠워프 포토츠키(1625-96)의 애국적·서사적 <호침의 싸움>(1670)은 그 하나의 예이다. 안제이 모르슈틴(1613?-1693)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인 마리노의 현저한 영향을 받아서 연애시를 썼으나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뛰어난 번역자로서 알려져 있다. 귀족 얀 프리조스톰파세크(1630?-1701)의 수기인 <회상록>은 지극히 유니크한 작품이다.

계몽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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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主義文學 (18세기의 문학) 17세기 말부터 폴란드에 인접하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개 강국은 폴란드 대귀족들의 왕위계승권 쟁탈전에 따른 국내분열을 이용, 내정간섭을 시작했고 18세기 말에는 마침내 이들 3개국에 의한 3회에 걸친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져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18세기 후기는 폴란드 문화의 개화기에 해당되는데, 계몽운동이 국내에 퍼지고 합리사상과 애국적 정열에 의한 국가의 부흥과 근대화에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사회개혁을 위한 준비와의 관계가 의식되어 소설이나 희극이 저술되었고 특히 풍자의 장르가 유행했다. 이 시기를 장식하는 대표적 문학자는 폴란드 근대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크라시츠키(1735-1801)와 시인 트렘베츠키(1739-1812)이다. 전자는 <우화와 비유담>(1778), <풍자시>(1779) 등 걸작 외에 폴란드 소설의 선구인 <미코와이 도스비아트진스키의 모험>(1776)을 저술했다. 또한 후자는 라 퐁테느풍의 우화시를 썼다. 이 두 사람 외에는 폴란드 최초의 희극 <의원의 귀환>(1790)을 쓴 뉴므체 비치(1757-1841)를 들 수가 있다.

낭만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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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主義文學 1795년부터 1918년에 이르는 1세기 이상의 오랜 기간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개국에 의해 분할통치되어 비극적인 예속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러나 이 예속의 1세기는 폴란드 문학의 성숙기로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간단없는 투쟁의 시대에 문학이 수행한 역할은 실로 컸다. 국민적 비원을 발산시키는 수단으로서 우선 낭만주의가 등장하는데, 1830-1831년의 혁명 운동이 진압당하자 우국지사들은 대량 서방으로 망명했고 낭만주의문학은 망명지에서 미츠케비치 스워바츠키 등 대시인에 의해 예술적 절정에 달했다.

미츠케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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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Mickiewicz (1798-1855) 폴란드 시인. 리투아니아의 소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19년 빌노(Wilno) 대학을 나온 후 시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면학과 시작에 정진, 1822년에 철학학사의 학위를 얻는 동시에 처녀시집을 출판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극시 <아버지 제사>(제2부, 제4부)를 수록한 제2시집을 출간했으나 대학시대에 학생운동을 한 혐의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다음해 러시아로 압송되었다. 러시아 체재 중 푸슈킨을 비롯한 러시아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고, <크림의 소네트>(1825), 서사시 <콘라드 발렌로드>(1827)를 출판했다. 1829년 러시아를 탈출하여 유럽을 방랑, 독일에서는 헤겔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80세의 괴테를 방문하기도 했다. 1830년 말 바르샤바에서의 반러시아 봉기소식을 로마에서 전해 들은 미츠케비치는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귀국에의 길을 서둘렀으나 자금조달 등에 시간이 너무 걸려, 포즈난까지 왔을 때 반란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그 후 드레스덴에서 <아버지 제사> 제3부(1832)를 썼고, 망명지 파리에서 불후의 명작 <판 타데우시>를 완성했다. 1839-1840년 로잔 대학의 라틴 문학교수, 1840-44년 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슬라브 문학교수가 되었다. 1855년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터키군에 가세할 폴란드 의용군을 조직하려 했으나 11월 말에 만연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떴다.

판 타데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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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 Tadeusz (1834) 미츠케비치 장편 서사시. 작자의 고향 리투아니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속을 배경으로 1811-1812년의 폴란드 사회사(社會史)를 묘사한 약 1만 행 12편으로 된 대서사시인데 소설의 요소를 교묘하게 포함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대귀족 호레슈코가(家)와 소귀족 소프리츠아가 사이의 역대에 걸친 불화에 있는데 타데우시의 부친 야체크 소프리츠아가 젊은 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신부(神父)가 되어 조국 재건운동에 투신하면서 양가의 화해를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가능케 만들기까지의 경위를 묘사하고 있다.

스워바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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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liusz Slowacki (1809-1849) 폴란드 시인. 스워바츠키는 미츠케비치와 마찬가지로 망명지 파리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그 짧은 일생 속에서 수많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는 미츠케비치의 위세에 눌려 전모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기말에 ‘젊은 폴란드’의 시인들에 의해 정당하게 평가되어 그들의 시혼을 배양하기에 이르렀다. 연애시 <스위스에서>(1839)는 그의 수많은 서정시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그는 또한 근대희곡의 창시자로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의 역사 전설에서 취재한 사극 <코르디안>(kordian, 1833) <릴라 베네다>(1840) 등을 썼다. 바이런의 <돈 주앙>풍의 장편 담시(譚詩) <베뇨프스키(Beniowski)>(1841년)는 원숙한 작품이며, 최후의 작품인 미완성의 환상적 서사시 <정령왕(精靈王)>에서 달성한 그의 시어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타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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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他作家- 스워바츠키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시인 지그문트 크라신스키(1812-1859)도 명문귀족의 집안에 태어나 기구한 운명을 더듬지만 대표작인 희곡 <비신곡(非神曲)>(1833)은 귀족계급과 민중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민중의 승리로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했고, 에필로그에서는 민중의 지도자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죽는다는 묵시(默示)를 삽입한 작품이다. 또한 망명시인 치프리안 노르비트(1821-1883)는 동시대인의 눈에는 띄지 않았으나 금세기 초엽에 지적인 시인으로서 발견되었다. 대중작가 크라셰프스키(1812-1887)는 방대한 양의 역사소설·대중소설을 썼으며, 오랫동안 조국에 머무르면서 소설의 발달을 위해 공헌했다.

실증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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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證主義文學 1863년의 민중 최후의 반란 ‘1월 봉기’가 1년간의 저항도 헛되이 괴멸한 후에는 문학사상이 낭만주의적 민족독립의 꿈을 버리고 실증주의 사상으로 이행(移行)하였다. 실증주의는 국내 경제·기술·문화·교육을 기초부터 뜯어 고쳐 경제발전과 교육보급에 의해 선진국을 능가하려는 실천적 운동이 되어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실증주의 문학시대는 1864-1890년으로 프루스, 오제슈코바, 솅키에비치 등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대표되며, 소설의 융성을 특징으로 한다. 실증주의 문학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는 프루스(1845-1912)로서 <파라오와 기도승>(1897), 장편소설 <인형>(1887-1889)이 대표작인데 대도시 바르샤바의 여러 군중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여류작가 오제슈코바(1841-1910)는 부인해방 문제 및 유대인 문제 등 사회윤리에 예리한 관심을 보였으며 고향 리투아니아의 자연과 사회상을 묘사한 <니에멘 하반(河畔)에서>(1887)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증주의 작가는 <쿠오 바디스>의 솅키에비치이다.

솅키에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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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 소설가. 러시아령에 속한 라도현(縣)의 소귀족 집안에 태어나, 1866년 바르샤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학생시대부터 창작에 뜻을 두어 몇 개의 습작을 발표했다. 1876년부터 3년간 미국에 유학, 창작의 시야를 넓힌 후 <등대지기>(1880), <용사 발틱>(1882) 등의 단편을 썼다. 1880년경부터 역사소설의 분야를 개척하여 17세기 폴란드의 이국민(異國民)과의 영웅적인 격전에서 취재한 역사 3부작 <불과 검(劍)>(1884), <대홍수>(1886), <판 보워디요프스키>(1888)에 의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고 이어서 <쿠오 바디스>로 그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 국제적십자사의 구호활동에 종사하는 동안 스위스에서 객사했다.

쿠오 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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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 Vadis (1895) 솅키에비치의 역사소설. 줄거리는 로마의 청년귀족 비니키우스가 폭군 네로의 인질인 리기아에게 음탕한 생각을 품고 연애를 하다가 리기아의 신앙심에 감화, 개심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기까지의 경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주제는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가혹한 박해를 이겨낸 그리스도교의 승리에 있는데, 여주인공 리기아를 슬리브족의 왕녀로 내세움으로써 작자는 망국의 비운에 젖은 조국 폴란드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작자는 정확한 자료와 풍부한 상상력을 구사해서 네로 시대의 로마의 파노라마를 도처에 전개시키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품.

젊은 폴란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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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19세기 말 실증주의의 주제였던 국민경제의 향상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해 오히려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켰고, 또한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탄압이 강화되어 문학은 실증주의를 떠나서 또다시 낭만주의로 접근했으며 이와 함께 19세기 말의 서구 모더니즘이 주는 각종 조류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도덕적 속박을 거부하고 개성의 자유를 신조로 하는 예술지상주의적 문학이론을 창도하는 ‘젊은 폴란드’라는 문학자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론적으로 지도자적 입장을 취한 것은 시인 겸 극작가인 푸시비례프스키(1868-1927)였으며, 극작가인 테트마이에르(1865-1940), 카스프로비치(1860-1926), 스타프(1878-1957) 등과 같은 뛰어난 시인 그룹에 속했던 비스피얀스키(1869-1907)의 극작가로서의 존재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특이한 풍자극 <혼례>(1901)를 비롯해서 심원한 상징적 극시를 발표하여 낭만주의의 전통을 계승했다. 소설영역에서 활약한 대표적 작가는 장편 역사소설 <재<灰>>(1904)의 작자 제롬스키(1864-1925)와 대작 <농민>(1904-09)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레이몬드(1865-1925)이다.

양 대전간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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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大戰間-文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폴란드는 약 130년간 잃었던 자유와 독립을 회복했다. 이렇게 되자 민족의 주권회복이라는 문제는 문학의 주요 관심대상에서 빠지고 서구의 새로운 문학상의 형식과 주의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새로운 변화는 우선 시의 세계에서 일어나 월간시잡지에서 그 이름을 딴 ‘스카만데르’파가 등장, 애국의 사명을 예술가에게 부과하는 데 대하여 반발하면서 시의 높은 예술성을 지향하고 새로운 시형식을 탐구했다. 스카만데르파의 시인 그룹에는 투빔(1894-1953), 레호니(1899-1956), 비에르진스키(1894- ? ), 이바슈케비치(1894- ? ), 스워님스키(1895- ? ) 등이 있으며, 마지막 두 사람은 현재 폴란드 문단의 원로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 파의 거장 투빔은 금세기 최대의 시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스카만데르파 이외에는 ‘아방가르드’의 미래파 시인들이 2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비트케비치(1885-1939)는 예리한 문예이론으로 널리 알려졌고, 프지보시(1901- ? ), 바지크(1905- ? ) 등이 건재하고 있다. 소설영역에서 여류작가의 진출이 눈부시다. 돈브로프스카(1892-1965)는 4부작 <낮과 밤>(1932-1934)을 썼고, 나우코프스카(1885-1954)는 객관적 사실주의를 채택, 죄수의 세계를 분석한 <세계의 벽(壁)>(1932), 사회적 변동기에 있어서의 과제를 묻는 <경계(境界)>(1935) 등을 대표작으로 한다. 카톨릭 작가 코사크슈시취카(1890-1968)는 역사소설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십자군 사람들>(1936)이 유명하다. 30년대에는 국내의 경제위기와 더욱 높아진 파시즘의 물결 속에서 사회저항의 문학으로서 좌익작가가 진출했다. 소련에 귀화한 바실레프스카야(1905-1964) 및 <영주와 농민>(1932)을 쓴 크루츄코프스키(1900-1962) 등이 이들이다. 나치 점령하의 제2차 세계대전 중(1939-1944), 폴란드 문학가들은 민족의 사활문제에 작가적 생명을 걸고 또다시 애국적 모티브가 우세하게 되었다. 대시인 투빔(1894-1953)도 망명지 미국에서 애국적 서사시 <폴란드의 꽃>(1940-1944)을 썼다. 이 6년 동안 국내에서 폴란드어로 된 책은 1권도 출판되지 않았고, 문학작품은 전부 등사판에 의한 지하출판으로 회람되었다.

전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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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文學 전쟁은 600만 명을 훨씬 넘는 폴란드 국민을 희생시켰고, 유형무형의 손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후의 폴란드 문학은 국민의 이를 데 없이 비참한 고난의 의의를 묻고, 그 체험을 전세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돈브로프스카의 <샛별>(1955)을 비롯 나우코프스카의 <미달리온>(1946), 코사크슈츄츠스카의 <심연에서>(1946) 등 기성작가의 작품과 안제예프스키(1909-1983)의 <밤>, 보로프스키(1923-51)의 <마리아와의 이별>등 신예작가의 작품이 전쟁체험의 문학 가운데서 뛰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지금까지도 테마로 다루어지고 있다. 1949년 무렵의 문학에 부과되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형식은 점차로 없어지고 1957년경을 고비로 폴란드 문학은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국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문학가들도 많으나 20세기 후반의 폴란드 문학과 함께 이들에 대한 평가는 미래에 내려질 것이다.

체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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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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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는 1992년 12월 31일에 각각 분리 독립하기 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을 이루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동계(東系)의 서슬라브족에 속하나 체코는 오스트리아에,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오랜 기간 예속되어 있는 동안 다소나마 민족 및 문화전통을 달리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공통국가가 형성된 것은 1918년이었다. 언어도 서로 방언적(方言的)인 유사점을 지닌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의 두 언어로 되어있었으며 슬로바키아어가 문장어로서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엽이다.

중세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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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紀-文學 체코 문학의 기원은 9세기로 거슬러올라간다. 9세기에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는 ‘대(大)모라비아 왕국’이라는 서(西)슬라브족(族)의 나라가 있었으나 그 서쪽으로 인접한 프랑크가 카톨릭교에 의한 타(他)부족 통합을 노려 모라비아에 종교적·무력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모라비아 왕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대항하는 문화정책으로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로 눈길을 돌려, 863년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에게 슬라브어를 아는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호응해서 모라비아 전도에 파견된 것이 슬라브 문화사상 이름 높은 킬리로스와 메토디오스라는 두 형제이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이었으나 마케도니아 지방의 슬라브어를 이해하고 있어 해박한 학식을 활용, 슬라브인 문맹자를 위해 슬라브어 표기에 적합한 문자를 고안했다. 이 문자에 의해 체코인은 처음으로 문학의 가능성을 얻은 것이나 최초에는 그리스어의 <성서>나 <전례서(典禮書)>의 번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종교문헌에 사용되고 있는 슬라브어를 ‘고(古)교회 슬라브어’라고 한다. 고교회 슬라브어로 쓰인 문헌 가운데 가장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은 두 형제의 전기로서 이것이 나온 장소는 불명이다. 체코권내에서 쓰인 문헌에는 10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聖)벤체슬라스(보헤미아의 왕자 바츨라프,920-29)의 전기가 있다. 그러나 1097년에 라틴어가 교회의 의식용어로 인정된 후에는 고교회 슬라브어는 체코에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체코어 문헌은 13세기 후반의 것이다. 14세기부터 체코어에 의한 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서사시 <알렉산더 대왕>이나 최초의 사서(史書) <다리밀 연대기>(1330?)가 나왔다. 카를 4세 재위 시에는 학예가 번성하고 1348년에는 중·동유럽 최고의 카를 대학이 프라하에 창설되어, 이에 프라하는 그 시대에 ‘황금의 프라하’로 불렸다. 이 세기의 끝에 가서는 스미르 프라시카의 정치적 풍자우화 <새로운 조언(助言)>이 나왔다. 15세기초 카를 대학 총장 얀 후스(1369?-1415)는 서구의 퇴폐한 카톨릭 교회의 악풍을 격렬히 비판하여 종교개혁의 횃불을 올렸다. 후스의 문학상의 공적은 체코 언어로된 간결하고 유연한 설교집과, 1자 1음의 원리에 입각해서 정서법(正書法) 개선을 논한 <보헤미아 정서법>의 저서이다. <성서>의 번역(<클라리체 성서>, 1579-1593 출판)은 체코어에 의한 산문의 위치를 높였다. 17세기와 18세기는 체코인에게 있어 극히 비극적인 시대였다. 1620년 프라하에 가까운 비라 호라의 전투에서 체코군이 패배하자 체코령은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하에 들어가, 체코의 귀족 및 후스 교도(체코인의 대부분은 후스교도였다)는 학살되거나 혹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체코어의 문헌은 소각당하고, 체코어는 공용어로서의 사용이 금지되는 한편 독일어가 이에 대체되었다. 체코인이 2세기에 걸쳐 쌓아올린 문학의 전통은 여기에서 붕괴되었으며, 이 전통을 홀로 국외에서 계승한 것은 동포교회(同胞敎會)의 최후의 사교이자 세계적 교육학자인 얀 아모스 코멘스키(라틴명 코메니우스,1592-1670)였다. 그는 학술상의 저작은 라틴어로 썼으나 체코어로 쓴 문학작품 중에 자신의 편력체험에 동시대에 대한 풍자를 담아 엮은 <세계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1623년작, 31년 간행)은 체코 산문문학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국내에서는 제수이트파의 사제인 보프슬라프 바르빈(1621-1688)이 대담하게도 라틴어로 <슬라브어, 특히 보헤미아어 옹호론>(1677)을 썼으나 발간 금지서가 되어 간행된 것은 100년 후의 일이었다.

근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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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文學 체코의 민족 부흥운동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높아졌다. 18세기 말이 되자 합스부르크가(家)의 요제프 2세가 당시의 계몽사상 영향을 받아 농노해방, 학교건설 등 상부에서부터의 해방을 시켜준 덕분으로 민족은 2세기 만에 숨을 되돌렸다. 민족의 문화향상을 위해 국어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어 문헌학자 도브로프스키(1753-1829)는 체코어 문법 및 언어사를 썼고, 같은 문헌학자이자 서구 낭만주의 문학의 소개자이기도 한 융그만(1773-1847)은 문학사 및 사전을 저술해서 근대 체코 문어(文語)의 확립을 위해 공헌했다. 이와 같이 민족정신이 고양된 가운데 낭만주의 문학이 탄생하는데 체코의 낭만주의 문학자 가운데는 학자가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민족의 전통에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팔라츠키(1798-1867)는 <체코 민족사>를 써서 ‘조국의 아버지’로 불렸고, 샤파지크(1795-1861)는 위대한 슬라브 학자인 동시에 시인으로서도 뛰어났다. 학자 시인인 콜라르(1793-1852)는 장편시 <슬라바의 딸>(1824-1832)로 범(汎)슬라브적 민족애를 나타냈고, 첼라코프스키(1799-1852)는 슬라브 민족의 민요를 수집, 민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집 <체코 민요의 메아리>(1839)를 발표했다. 낭만주의 문학 가운데 걸출한 존재는 마하(1810-1836)로서 대표작인 담시 <5월>(1836)은 예술적인 향기가 높은 것이었고, 그 밖에 산문에도 손을 댔으나 불행히도 요절했다. 1840년대에는 슬로바키아어를 문장어로서 체코어와 대등한 위치에까지 끌어올리려는 운동이 슬로바키아인 사인에 일어나, 학자이자 시인인 슈투르(1815-1856) 등의 문학적 실천에 의해 문어로서의 슬로바키아어가 형성되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의 물결은 체코에도 파급되어, 각지에서 바리케이드전(戰)이 벌어졌으나 혁명은 진압되고 합스부르크가는 반동정치로 전향했다. 이 체험을 통해 문학자의 눈은 현실을 직시하기에 이르렀고, 리얼리즘에의 이행(移行)과 함께 근대문학에로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이 혁명에 참가한 카렐사비나는 스메타나의 오페라 대본작자로서 알려졌고, 시인 프리치(1829-90)는 오랜 동안의 유형(流刑)중에 문학활동을 계속, 동시대의 귀중한 기록이 된 <회상록>(1886-87)을 저술했다. 여류작가 넴초바(1820-1882)는 산문분야를 개척했으며 그의 중편소설 <할머니>(1855)는 소박한 농촌녀의 사랑스러운 인품과 보헤미아 농촌의 모습을 리얼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한 것으로 체코 국민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네루다(1834-1891)는 시인으로서도 뛰어나며, 프라하의 어떤 거리의 생활을 그린 단편집 <마라 스트라나 이야기>(1878)는 지금도 애독자가 끊이지 않는다.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시인은 네루다 외에 하브리체크보로프스키, 에르벤, 슬라데크, 할레크, 울프리키 등이 있으며 최대의 시인은 체흐(1846-1908)로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시로서는 휴머니스틱한 장편 서사시 <노예의 노래>(1894), 산문으로는 풍자소설 <부로우체크 씨의 15세기 여행>(1889)은 그의 대표작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리얼리즘 문학은 역사소설 장르의 확립에 의하여 발전을 모았다. 역사소설의 대표자는 이라세크(1851-1930)로서 <흐름 속에>(1887-1890)를 비롯해서 ‘후스 전쟁’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과, 그 어느 것이나 민족의 각성이 주제인 (1888-1906), <우리 고향에서』(1896-1903), <암흑>(1916) 등의 장편이 명작으로 꼽힌다. 리얼리즘의 작가에는 라이스, 호레체크, 노바코바, 헤르벤, 무르시티크 형제 등이 있으나, 리얼리즘 문학의 사상적 지도자로서는 근대적 문예비평의 확립자 샬타(1867-1937)와 후에 대통령이 된 사상가 마사리크(1850-1937)를 들 수가 있다. 20세기 초엽에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인 소바(1864-1928), 마하루(1864-1942), 베즈루치(1867-1958) 등이 출현했다.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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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文學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二重帝國)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탄생하는데, 국내의 급속한 공업발전은 노동운동에도 박차를 가하여서 소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새롭고도 강력한 조류로서 나타났다. 시인으로서는 노이만(1875-1947)이 소위 프롤레타리아 시를 썼고, 소설에서는 올브라흐트(1882-1952)의 <프롤레타리아 안나>(1928)와 루테냐 지방의 민요에서 취재한 <산적 니콜라 슈하이>(1933), 마예로바(1882-1958)의 <사이렌>(1935) 등의 작품이 있다. 야로슬라프하세크(1883-1923)는 제1차 세계대전을 테마로 한 반전 풍자소설 <병사 슈베이크의 모험>(1921-1922)으로 체코 문학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카렐 차페크(1890-1938)로서 희곡 (1920)에서 사용한 신조어 ‘로봇’은 세계공통의 말이 되었다. 그는 형 요제프와의 합작 희곡 <벌레의 생활>(1921) 외에 <쿠라카치토>(1924), <산초어(山椒魚)전쟁>(1936) 등 장편에서 현대의 기계문명과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를 퍼붓는 한편, 파쇼의 위협을 예감하고 있다. 추리소설풍의 단편인 <하나의 포켓에서 나온 이야기>(1929), 편지형식의 여행기 <영국 소식>(1923), 에세이 <마사리크와의 대화>(1928-1935) 등 뛰어난 작품이 많다. 이 외에도 쿤데라, 희곡 작가 하벨도 다른 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하벨은 후에 체코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1984년에는 시인 사이페르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공산작가 푸치크(1903-1943)는 나치 점령하에서 지하 저항운동을 지도했고 체포된 후 베를린에서 사형을 당했다. 옥중에서 은밀히 집필한 <교수대로부터의 보고>는 전후 출판되어(1945)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나치 점령하의 6년간과 전후 한동안의 문학활동은 저조했으나, 1950년경부터는 새로운 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기성작가로는 초기에 쉬르레알리즘의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네즈월(1900-1958)이 시집 <평화의 노래>(1950)를 내놓았고 푸이마노바(1893-1958)는 <불놀이>(1948), <삶과 죽음과의 싸움>(1952)을 발표하여, 전전의 <기로에 선 사람들>(1937)과 합쳐 3부작으로 했다. 젊은 세대에서는 얀 도루다(1915- )가 <소리없는 바리케이트>(1946)로 유명해진 후 왕성한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체코의 현대 작가로는 푸르빈(1910- ), 카이나르(1917- ), 스카라(1922- ), 오트체나세크(1924- ), 아슈케나즈이(1921- ) 등이 있으나, 전후의 소설분야에서는 슬로바키아 작가의 진출이 눈부시다. 타타루카(1913- ), 베드나르(1914- ), 미나치(1922- ) 등 외 <늦어진 보고>(1963)의 므냐치코(1919- ) 등이 있다.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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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an Kundera (1929- ) 시인·소설가. 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음대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영화 아카데미 AMU에서 조교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드라마작가이자 불문학 번역가이기도 한 밀란 쿤데라는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하여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시집 <마지막 5월>(1955), <독백>(1957), 소설로 <우스꽝스런 관계>(1963), <농담>(1967),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1974), <작별의 왈츠>(1977), <웃음과 망각의 책>(198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에세이집 <소설의 기법>(1987) 등이 있다.

슬로바키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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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슬로바키아의 문학은 문어의 성립이 늦은 까닭도 있어, 19세기 중엽의 낭만주의시대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 슬로바키아 문학사상 최대의 시인 P.O. 흐비에츠도슬라프가 나타났고, 그 후 상징주의 근대 시인 I. 크라스코가 새로운 경향을 보였다. 20세기를 맞이하여 근대 시인으로는 L. 므냐치코, L. 노보메스키가 유명하며, 20세기 중엽부터는 산문이나 시에도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다. 시인인 M. 루프스·M. 바레크, 소설가인 V. 미나치·A. 베드나르·V. 빈첸트 시크라 등이 유명하다.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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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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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유고슬라비아는 현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2개 연방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941년부터 1991년까지는 남슬라브족의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이었다. 예부터 문학을 가진 것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일찍부터 문학을 발달시킨 곳은 비잔틴 문화권에 속했던 세르비아이다. 13세기 전엽에는 대주교 성(聖)사바가 그의 부친 네마냐 왕의 후반 일생을 묘사한 <성(聖)시메온전(傳)>을 저술하여 중세 세르비아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15세기까지의 문학은 비잔틴의 종교문학 번역이 그 주체를 이룬다. 15세기에 세르비아는 터키에게 정복을 당했으나 아드리아해 연안의 달마티아 지방은 터키의 침략을 모면하여,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서 라구자(두브로우니크)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흡수하면서 크로아티아 문학(라구자 문학)이 발달했다. 서사시 <오스만>의 작자 군둘리치(1589-1638)는 라구자 최대의 시인이나 라구자의 대지진 이후는 라구자 문학도 퇴조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오브라도비치(1742-1811) 등의 계몽운동에 의해 문학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에는 서구의 낭만주의 영향하에 민족해방, 문어의 통일 운동이 일어나 근대문학이 개화한다. 세르비아의 카라지치(1787-1864)와 크로아티아의 가이(1809-1872)는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의 문어의 통일(세르보 크로아트어)을 성공시켰고 슬라보니아의 코피타르(1780-1844)는 슬라보니아어의 정리에 힘썼다. 세르비아의 니에고시(1813-1851), 크로아티아의 마주라니치(1814-1890), 슬라보니아의 푸류시렌(1800-49)은 낭만파의 3대 국민시인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러시아 문학의 영향으로 리얼리즘 문학이 도입되어 세르비아의 스레마츠(1855-1906), 라자레비치(1851-1890), 란코비치(1863-1899), 크로아티아의 세노아(1838-1881), 쿠미치치(1850-1904), 코바치치(1854-1889) 등이 리얼리즘 문학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엽에는 상징주의를 비롯해서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가지 경향이 나타나는데, 그 경향은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강하게 볼 수 있다. 슬라보니아에서는 찬카르(1876-1918), 쥬판치치(1878-1949)의 2대 시인이 태어났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조르(1876-1949)가 나왔다. 이 시대에 크로아티아의 보이노비치(1857-1929)가 고전적 희곡 <두브로우니크 3부작>(1902)을 썼고 세르비아의 누시치(1864-1938)가 풍자적 색채를 띤 희극을 썼다. 현대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존재는 크로아티아의 크를레자(1893- ? )와 보스니아의 안드리치(1892-1975)이다. 크를레자는 상징파 시인으로서 출발했으나 제1차 대전 후 <번민>(1928), <글렘바이가(家)의 사람들>(1929) 등 중요한 희곡을 썼고, <필립 라티노비치의 귀환>(1932) 등과 같은 우수한 소설도 있으며, 현재는 사상의 원숙을 보여주는 폭 넓은 평론활동을 하고 있다. 안드리치는 서정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후에 산문으로 전향하였으며, 보스니아를 소재로 한 단편을 썼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드리나강(江)의 다리> <트라우니크 연대기> <아가씨> 등 3부작을 발표, 1961년에 노벨문학상을 탔다.

세르비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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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세르비아 문학은 동방(비잔틴)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세르비아인들이 그리스어로 된 종교서적을 번역하기 위하여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2세기부터 나타난 세르비아 문학은 미로슬라브 복음서, 성서이야기, 성자전 등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추었다. 계몽주의시대의 가장 중요한 세르비아 작가인 도시테 오브라도비치는 세르비아 문학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20-70년의 문학에서는 유럽 낭만주의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부크 스테파노비치 카라지치와 같이 민간 전승에 대한 예찬과 민족주의적 주장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었다.1870-1900년에는 산문작가 라자 라자레비치, 시모 마타불리, 스텐반스레마츠 등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말엽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객관적 묘사에서 심리적 서술로 바뀌었는데, 보리사브 스탄코비치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짙었다. 20세기 초부터 1960년대까지는 문학의 표현양식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였고 1960년대말부터는 논쟁의 초점이 사회주의 사회의 문학에서 정치적·사회적 논평이 차지하는 위치와 문학작품의 내용으로 옮아 갔다.

크로아티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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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크로아티아 문학은 9세기 말에 크로아티아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다. 15세기 후반까지의 크로아티아 문학은 주로 성서이야기와 전설 및 민간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초의 종교서적들은 글리골 문자로 씌어졌으며 12세기부터 비문과 법률 서류에 민족 언어가 널리 쓰였으나, 14세기부터는 라틴어가 주로 쓰였다. 15-16세기초의 크로아티아 문학은 고전문학과 이탈리아 문학 및 크로아티아 민간 전승의 영향으로 페트라르카풍의 서정시가 발달하였다. 대표적으로 시인 하니발 루치치가 두드러진다. 17,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사람은 서사시 <오스만>의 작가 이반 군둘리치이며, 안드리야 카치치 미오시치는 역사적 주제를 음유시인의 대중적인 운문 형식으로 다루었다. 19세기에는 개인적·애국적·사색적인 서정시가 인기를 얻었다. 20세기 초에는 시가 크로아티아 문학을 지배하는 주요 장르였다. 시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 경향을 반영하여, 개인의 존재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며 자신의 세계와 싸우는 현대인의 내적 투쟁을 강조하였다. 1948년 소련(현 러시아)과 관계가 단절된 뒤 제한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많은 작가들은 1970-71년에 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이라는 민족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이후 크로아티아 문학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의 페미니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주의적인 주제를 선택함으로써 서구 문학과 공통된 관심사를 다루었다.

슬로베니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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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슬로베니아어로 씌어진 최초의 문헌은 <브란진스크 사본>(1000년경)이다. 슬로베니아어를 문자언어로 쓴 종교문학은 1584년 유리 달마틴이 성서를 번역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으나, 반종교개혁으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18세기 중엽까지 슬로베니아어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19세기에 유럽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슬로베니아인은 슬로베니아어를 표준화하고 성문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기의 슬로베니아 문학은 산문의 발전과 사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으며, 작가들은 서구의 표현양식과 경향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초 슬로베니아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슬로베니아 문학은 다시 발전하였는데,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등장한 1930년대에 다시 활기를 찾았다. 제2차세계대전 후 산문분야에서는 서구의 영향으로 미하 레메츠 같은 작가들의 공상과학소설이 등장하였고, 시는 매우 주관적인 표현법을 계속 유지하였다.

마케도니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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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마케도니아 문학은 9세기에 정통문학과 더불어 탄생되었다. 그 후 16세기에 고대교회 슬라브어와 일상어가 융합되면서 대중적인 다마스쿠스 문학이 발달하였다. 이 문학은 근대 마케도니아어로 씌어진 책이 처음 출판된 19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초의 마케도니아 문학은 중세 클레멘트파(派)의 종교적 계몽운동을 충실히 모방한 것이었으며 독창적인 분야는 민속문학뿐이었다. 나중에 콘스탄티 밀라디노프가 독창적인 서정시를 썼으며, 동생 미디트리예와 함께 전설집과 민요집을 편찬하여 마케도니아 민족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정부가 마케도니아어를 공식으로 인정하자, 블라제 코녜스키를 중심으로 마케도니아어를 공식 문자언어로 표준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민족의식과 그 표현을 별개의 문화적 주체성으로 보호하려고 하였던 마케도니아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고유언어로 글을 쓰고, 책을 펴낼 수 있는 자유를 얻자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시인은 아초 쇼포프, 슬라프코 야네프스키 등이며, 콜레차슐레와 토메 아르소프스키 같은 새로운 극작가들이 연극계에 활기를 주었다.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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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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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엽에 걸쳐서 불가리아는 시메온 황제의 치세(893-927) 하에 국력이 크게 융성하고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과시했다. 킬리로스, 메토디오스 형제(체코 문학참조)의 제자들은 모라비아에서 추방당한 후 동방정교회의 나라 불가리아에서 보호를 받고 남서부 도시 오후리드를 중심으로 문학활동을 계속했다. 고교회(古敎會) 슬라브어또는 고(古)불가리아어의 문학은 비잔틴의 종교문헌으로 연대기의 번역이 주류를 이룬다. 14세기 말에 불가리아는 터키에 정복당해 그 후 19세기 후반까지 5세기에 걸쳐 터키의 예속하에 놓임으로써 문학활동은 두절되었다. 그러나 터키 침략 당시, 산중에서 농성하며 치열한 저항을 거듭했던 ‘하이도브틴’(산적의 뜻) 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찬양한 서사시가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졌다. 18세기 말에는 일개 수도승인 파이시가 민족의 과거 영광을 묘사한 <슬라브 불가리아사(史)>(1762)를 저술하여 불가리아인의 문화적 재생과 민족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1853년의 크림 전쟁을 계기로 민족독립의 정열은 한층 고조되어 1876년의 무장봉기(武裝蜂起)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으며 민족 해방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문학가들로서 이러한 과정을 겪는 동안 불가리아의 근대문학이 성립되었다. 슬라베이코프(1827-1895), 라코프스키(1821-1867), 카라벨로프(1837-1879), 보테프(1848-1876), 레프스키(1837-1873) 등 국민시인은 펜으로 혹은 검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879년에 불가리아는 터키 지배에서 벗어나 1908년 독립을 확보했다. 이 시기의 최대의 문학가는 이반 바조프(1850-1921)로서 시·소설·희곡 등 온갖 장르에 걸쳐 창작활동을 해서 근대문학의 기초를 세웠다. 1876년의 4월 봉기를 테마로 한 장편 역사소설 <멍에(頸木) 아래서>(1893)가 대표작이다. 이 시대에서 소위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상징주의 문학도 등장했으나 바조프의 전통을 계승하여 리얼리즘 문학을 발전시킨 것은 에린 페린(1878-1949)과 네미로프(1882-1945)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패전으로 끝나자, 러시아 혁명의 영향하에 좌익전 농민연맹(農民聯盟)이 정권을 장악하고 문학가의 급진화(急進化)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1923년에는 쿠데타에 의해 파쇼 정권이 성립되고 백색 테러의 희생이 된 문학자들이 생겼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까지 검열의 눈을 피해 가면서 반(反)파쇼 문학이 계속되었다. 1944년 소위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했고, 해방 직후의 문학은 반나치 저항 운동의 테마가 중심을 이루었다. 50년대 말부터는 ‘해빙’ 현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문학의 입김이 감지된다.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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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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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헝가리 문학의 특색은 우선 다른 동구 제(諸)민족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의 정열이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국민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진 페퇴피는 19세기의 독립운동에 자진하여 참가, 전장에서 쓰러진 투사였다. 이 내셔널리즘의 정열이 유럽 이외의 피압박 민족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청년시대의 루쉰(魯迅)이 페퇴피를 애독하고 손수 이를 번역한 사실로서 알 수 있다. 또한 헝가리 문학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민족적 고립감이다. 그 이유는 헝가리가 주변의 여러 민족과는 달리, 비(非)유럽계(系)민족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말하자면 유럽에 있어 아시아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헝가리 특유의 성격은 당연히 그들을 동서 양문화의 접점에 두게 했고 이 결과 헝가리는 시인 아디, 작곡가 바르토크 같은 동서문화의 혼혈이라고 할 만한 특이한 재능을 낳기에 이르렀다.

건국에서 18세기까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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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世紀-文學 헝가리 민족(본래의 민족명은 마자르)은 9세기 말에 현재의 주거지에 들어가 나라를 세웠다. 그때까지의 오랜 민족 이동시대에 그들은 풍부한 구전문학(口傳文學)을 지녔던 모양이지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후, 그러한 이교적인 전승은 점차로 소멸되었다. 건국 초기의 11세기경부터 14-15세기까지의 헝가리 문서는 주로 라틴어에 의한 연대기나 종교적 문학이었다. 헝가리어로 된 문헌(가장 오래 된 것은 12세기 말의 <죽은 자에의 말>이라는 짧은 종교적 문서)은 몇 개 안 되고, 또 대부분이 라틴어 문서의 헝가리어 번역에 불과했다. 15세기 말의 마챠스왕 시대는 헝가리의 르네상스기로서 여러 나라의 학자·문인들이 많이 모여들어 유명한 코르비나 문고 및 최초의 인쇄소도 설립되었으나 문학어로서는 아직 라틴어의 세력이 컸기 때문에 참된 헝가리 문학의 탄생은 다음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6세기 초엽의 오스만 터키에 의한 점령과 그에 이은 약 2세기간의 국토분열의 비극은 한편에서는 오히려 헝가리인의 민족의식을 높여, 여기에서 처음으로 헝가리어에 의한 국민시인, 즉 서정시의 발라시(1551-1594)와 서사시의 즈리니(1620-1664)가 나타났다. 한편 이 시대에 국내에서는 신·구교의 대립이 발생, 양파 사이에 논쟁이 맹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때문에 산문에도 헝가리어가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헝가리어 산문의 대표적 작품에는 미케시(1690-1761)의 <터키에서 온 편지>가 있다. 라코치의 민족적 반란이 실패하고 합스부르크 통치에 의한 독일화 정책이 일단 성공한 18세기는 문학적으로도 국민문학의 침체기를 의미했다. 그러나 18세기 말경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동유럽 여러 민족들 사이에 독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우선 이것은 각 민족의 국민문학 발흥(勃興)으로 나타나, 헝가리에서도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뛰어난 문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19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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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이 시대의 선구자는 극작가 베셰니에이(1747-1811), 시인 베르제니(1776-1836), 평론가 카진치(1759-1831) 등 이었으나 얼마 안 가 연애시집 <리라의 노래>(1805)로써 알려진 서정시인 초코나이(1773-1805)가 나와, 헝가리 문학에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19세기 전반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대한 민족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였고, 이에 호응해서 문학면에서도 많은 명작이 탄생한 국민문학의 융흥기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로는 극작가 키시팔루디(1788-1830), 카토나(1791-1830), 시인 뵈뢰시마르티(1800-1855) 등이 있다. 특히 카토나의 애국적 사극 <방크 반>(1821)은 헝가리 극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의 하나로, 오늘날도 각지의 극장에서 되풀이하여 상연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점차로 강력히 일기 시작한 반(反)합스부르크의 민족감정은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 지배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지향하는 국민적 봉기로서 폭발하였다. 헝가리측의 완전한 패배로 끝난 이 헝가리 독립전쟁(1848-1849)에는 많은 문학자들도 참가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당시 국민적 우상이던 청년시인 페퇴피의 전사는 이 전쟁의 최대 비극으로서 모든 헝가리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다. 독립전쟁 후의 한동안,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신음했으나 국민문학의 전통은 서정시의 페퇴피와 함께 손꼽히는 서사시인 아라니(1817-1882) 등에 의해 보존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민족적 고뇌를 강력히 반영하고 있는 시인에 마다치(1823-1864)가 있어, 그의 철학적 시극 <인간의 비극>(1860)은 헝가리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극단에서 지금도 자주 상연되고 있다.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오스트리아·헝가리 화평조약) 이후, 헝가리는 또다시 많은 정치적 자유를 회복했고 경제적으로도 일단 안정을 얻었다. 이 시기의 헝가리 문단의 제1인자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요카이로서 많은 장편을 썼고 요카이에 이어 이 시대의 인기작가가 된 미크자트(1847-1910)도 소설분야에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20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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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20세기에 들어서자 헝가리 문단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원동력이 된 것은 문예잡지 <뉴가트>(서양)의 창간(1908)이었다. 이 <뉴가트>의 그룹에는 서유럽의 근대 문예사조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의 문학자들이 참여하여, 새로운 문학운동을 통해서 당시 사회의 보수적 경향에 도전했다. ‘뉴가트’파의 지도자는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이색적인 시인 아디였으나 이 밖에 바비츠(1883-1941), 코츠톨라니(1885-1936)를 비롯해서 수많은 우수한 시인, 소설가가 이 그룹에 결집했다. 이 ‘뉴가트’파에서 출발한 소설가에 헝가리 리얼리즘 문학의 제1인자 모리츠(1879-1942)가 있고, ‘뉴가트’그룹에 가까운 서구파 작가에 희곡 <리리옴>(1909)이나 소년소설 <파르가(街)의 소년들>(1906) 등을 쓴 몰나르(1878-1952)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헝가리에는 쿤 베라의 공산혁명이 일어나 루카치(1885-1971), 바라지(1884-1949) 등의 평론가·문학가가 이 정권에 참가했으나 혁명 실패 후 망명작가가 되어 국외로 떠났다. 한편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소설가 사보(1879-1945)가 있어 혁명·반혁명의 투쟁이나 인플레이션의 불안에 위협을 받고 있던 전후의 혼란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 대전간의 시대에는 ‘뉴가트’파의 작가들 외에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제나름의 문예잡지를 통해 활발한 문예활동을 전개했다. 우선 서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소시민 작가에는 질라히(1891- ? ), 마라이(1900- ?) 등이 있고 두 사람 다 다방면의 필재에 의해 1930년대의 헝가리 문단에서 활약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망명했다. 또한 <걸리버 여행기>의 속편을 쓴 풍자소설가 카린티(1887-1938)는 이 시대의 지적인 작가로서 알려졌고, 그의 작품은 서구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전, 불우한 생활 속에서 자결(自決)한 시인 요제프(1905-1937)는 전후 그 진가가 인정되어 오늘날 페퇴피, 아디와 나란히 헝가리가 낳은 3인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헝가리는 다른 동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겪었으며, 그 영향은 당연히 문학분야에도 현저하다. 전후의 헝가리 문단의 주류를 점한 것은, 전전(前戰)부터 국내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던 ‘민중파’(이른바 파퓰리스트)와 해외망명이나 지하생활에서 문학에 복귀한 공산주의계 작가들이다. ‘파퓰리스트’파라는 것은 헝가리 문학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인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는 작가 그룹으로 그 대다수는 소농출신(小農出身)들이기 때문에 이 그룹의 작품 속에는 농지해방과 집단농장을 둘러싼 전후 농촌생활의 여러 모습이 자주 취급되고 있다. ‘파퓰리스트’파의 대표적 작가로서는 전전에 자전적 장편 <푸스타의 사람들>(1936)을 발표한 이에시(1902-?), <두려움>(1947)과 <에게테 에스테르>(1956) 등의 역작을 썼고, 소설 외에도 희곡·평론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네메트(1901-1975)를 들 수 있다. 한편 전전의 공산주의계 작가 중 제1인자는 데리(1894-1977)로서 그의 이름은 전후의 라코시 정권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한 작품 <니키>(1956)와 1956년 헝가리 의거에서의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외에 더욱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는 ‘헝가리의 누벨 바그’로 평가받은 <새끼 사슴>(1959)의 여류작가 사보(1917- ), 전후 헝가리 최대의 베스트 셀러 소설 <고철 묘지>(1962)의 페예시(1923- ), 르포르타주 문학의 문제작 <20시간>(1963)의 샨타(1927- ), 그리고 이들보다 더욱 젊은 세대에 속하는 단편작가 모루드바 등이 있다.

페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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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fi S ndor (1823-1849) 헝가리 국민시인. 헝가리의 소도시 키슈케레슈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 부친이 상업에 실패, 가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립극장의 단역배우가 되었다가 군대에 지원입대하여 군대생활을 마친 후 귀국, 파파시(市)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졌다. 이곳에서 그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 진학, 후년 유명해진 소설가 요카이와 친분을 맺었다. 1844년 처녀시집을 발표, 페퇴피의 명성은 삽시간에 국내에 퍼졌다. 그 후 자유를 추구하는 소박한 정열이 당시 헝가리 사회에 팽대했던 내셔널리즘과 결합됨으로써 잇달아 발표된 많은 시집은 그의 인기를 단시일내에 더욱 열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헝가리 독립전쟁의 서곡이 된 1848년의 페슈트시(市) 봉기 때 페퇴피는 자작의 <궐기하라, 마자르 사람들이여>라는 시를 민중 앞에서 낭독하고 민족의 자유 투쟁에 자진해서 투신, 이듬해 전사했다. 페퇴피는 스스로도 “자유와 사랑의 시인”으로 자처했듯이 소박·순정의 연애시인이었다. 그의 연애시집 <에테루케 묘의 측백나무>(1845), <사랑의 진주>(1845) 등은 감미로운 초기의 시풍을 대표하고 있으나 특히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은 애처 센드레이 유리아에게 바친 일련의 연애시다. 이 중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쓴 <9월 말에>(1847)는 헝가리 시의 절창이라 평가된다. 이 밖에 장시 <용사 야노시>(1844), 소설 <교수 집행인의 밧줄>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요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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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ai M r (1825-1904) 헝가리 소설가. 코마롬에서 태어나 시골 학교에서 수업한 후 부다페스트에서 잡지 편집에 종사했다. 21세 때 소설 <평일(平日)>(1846)을 발표하여 좋은 세평을 얻었다. 이즈음에 시인 페퇴피와 친교를 맺었고, 1848-1849년의 독립전쟁에도 참가했으나 중도에서 화평파로 전향하여 처형을 모면했다. 전후에는 신문 편집에 종사하면서 속속 장편소설을 발표하여 국민의 인기를 얻었고, 19세기 후반을 통해 문단뿐 아니라 헝가리 사회의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요카이 작품의 특색은 밝은 낭만주의와 분방한 판타지에 있고, 또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묘한 화술도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현대의 것으로 19세기 초의 세태를 테마로하는 <헝가리의 대낮>(1853-1854), 속편에 해당하는 <카르파티 졸탄>(1854), 독립전쟁 직후의 헝가리 사회를 묘사한 <새 지주>(1863) 등이 있고 또한 역사물로서는 오스만 터키군의 헝가리 점령시대를 배경으로 한 <트랜실바니아의 황금시대>(1853), <헝가리에 있어서의 터키사회>(1853) 등 외에 <집시 남작>(1885)과 같은 가극(요한 슈트라우스 작곡)이 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도 있다.

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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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y Endre (1878-1919) 헝가리 시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의 동부 헝가리(현재 루마니아령)의 소도시에 에르민드센트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저널리스트로서 지방신문에서 활약하는 한편, 2-3개의 시집을 발표하여 그 이름을 인정받았다. 20대의 수년간에 걸친 파리 체재 체험은 보들레르, 베를렌에 대한 깊은 심취도 겹쳐서 아디의 타고난 시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이 파리시대의 작품을 모은 <신시집>(1905)을 발표함으로써 헝가리 문단에 신진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아디가 가장 활발하게 문단 및 논단에서 활약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10년간이었으나 대전의 발발은 그에게 심신 양면으로 큰 타격을 주어, 대전 중에는 거의 저술을 하지 못한 채 패전 후의 혼란기에 병사했다. 작품으로서는 비교적 짧았던 그의 일생 중 <피와 돈>(1907), <사자(死者)를 이끌고>(1918) 등 십수편의 시집과 다수의 단편소설 및 평론이 발표되었다. 그의 생활태도 가운데에는 칼뱅니스트로서 청교도주의와 도회인적 데카당스가 혼재해 있었고, 사상적으로도 반드시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특이한 시재는 죽은 후 더욱더 그 진가를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19세기의 페퇴피와 함께 헝가리 시인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가 되고 있다.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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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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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루마니아는 동(東)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발칸 반도 유일의 라틴 민족의 나라이지만 옛날부터 슬라브를 중심으로 한 이민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사상의 첫 인물은 19세기 중엽에 나온 국민시인 알렉산드리(1821-1890)이다. 이즈음 루마니아는 겨우 근대국가로서 통일되었다. 뒤이어 1864년에는 유명한 문학 그룹 ‘청년’의 결성과 기관지 <문학 담화>의 발행(1867), 또한 1866년의 학사원의 설립 등 루마니아 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청년’은 교육자이자 정치가인 마요레스크(1840-1917)를 중심으로 국민문학의 진흥을 위해 발족되었다. 여기에서는 루마니아 최대의 시인인 <초저녁의 금성> 등 훌륭한 작품을 남긴 에미네스쿠(1850-1889), 주옥과 같은 민요와 자서전 <소년 시절의 추억>을 남긴 산문작가 크량가(1837-1889), 그 밖에 훌륭한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루마니아 최대의 극작가로 <잃어버린 편지> 및 <폭풍의 밤> 등 사회 풍자희극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카라지알레(1852-1912)도 이 시기에 활약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시인 코시부크(1866-1918), 블라후차(1958-1919), 요시프(1875-1913)와 역사가이자 평론가인 요르가(1871-1940)가 중심이 되어 문예평론 잡지 <씨뿌리는 사람>이 간행되어, 새로운 국민문학 운동의 발달을 도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루마니아 문학은 이 운동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로맹 롤랑이 격찬했고 <발칸의 고리키>라고 불리었던 이스토라치(1884-1935)가 폭발적 인기를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프랑스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이질적인 존재이다. 본국에서 금세기 최대의 작가로 꼽히는 작가는 <미토랴코코르>를 비롯해서 수많은 장편 농민소설을 쓴 사도베아누(1880-1961)이다. 이 밖에 제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최근까지 혹은 현재도 아직 활약하고 있는 주요 작가로는 소설가 레브레아누(1885-1944), 스탄쿠(1902-?), 시인 고가(1881-1939), 아르게지(1880- ), 극작가 세바스찬(1907-1946), 카미르페 토레스쿠(1894-1957), 로비네스쿠(1917- )를 들 수 있다. 끝으로 루마니아 본국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으나 소설 <25시(時)>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망명작가 게오르규(1916-1992)의 이름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게오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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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tin-Virgil Gheorghuiu (1916-1992) 루마니아 작가. 1949년에 발표한 처녀작 <25시>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소설과 영화로 소개된 바 있는 <25시>는 나치와 소련의 학정, 전쟁 속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을 한 개인의 운명을 통해 심도 있게 묘사한 역작이다. <25시>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 상실과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오르규는 부쿠레슈티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루마니아 외무성에서 근무하다 프랑스로 망명했다.

게오르규 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루마니아의 한 농촌에서 살고 있는 소작농 요한 모리츠는 그의 아내를 좋아하는 한 헌병의 악의로 정부의 공문서에 유대인으로 기록되어 유대인 수용소로 보내지게 된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헝가리로 탈출하였으나, 이번엔 적국 루마니아인이라고 하여 헝가리 노무자로 독일에 팔려 간다. 단추 공장에서 일하던 모리츠는 우수한 게르만 인종의 후예라고 여기는, 인류학을 연구하는 독일군 대령에 의해 그는 독일 군인이 되고 결혼까지 한다. 어느 프랑스 포로에게서 연합군의 승리가 가까워졌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승리의 날에 처자를 보살펴 주리라는 약속을 받고 그 포로와 도망치지만, 연합국의 적국인 루마니아인이라하여 그는 수감되고 그의 처자는 불에 타 죽는다. 모리츠는 13년 동안 열다섯 군대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 다음날 소환장을 받는다. 동구의 모든 외국인을 수용소에 감금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그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18시간으로, 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미국 군인으로 지원한다. 이 작품의 제목 <25>시는 모든 구원의 시도도 무효화해 버리는 시각으로서, 결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과 불안의 시간을 의미한다.

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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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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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알바니아인(人)은 고대에는 발칸 지방의 선주민(先住民)으로서 세력도 있었던 인구어계(印歐語系)의 일류리아인의 후예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는 왕국도 수립했으나 그 후에는 로마제국, 고트족(族), 동로마제국, 슬라브족, 베네치아, 터키 등 차례로 이민족과 여러 외국의 지배를 받아 1912년 독립할 때가지 실로 천년 이상에 걸친 예속의 시대를 보냈다. 알바니아인이 문화적으로 각성하고 문학활동을 시작한 것은 15세기경부터 이며, 15세기의 문헌은 때마침 벌어진 터키 침략으로 거의 소실되었다. 16-17세기에는 터키 침략의 재난을 피해 남이탈리아로 이주했던 알바니아인과 알바니아 남부의 그리스 정교 성직자들에 의해 문학이 발달했으나 종교문헌이 대부분이다. 18세기에는 페르시아 및 터키의 동방문학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 등장하여 연애나 자연을 구가하고 세속문학의 발전을 촉구했다. 대표적 시인에는 주코 캄베리(생몰연대 미상)가 있으며, 유르 바리보바(1725-1762)의 장시 <성처녀의 일생>(1762)이 유명하다. 19세기 후반부터 터키 지배에 대한 저항이 시작된다. 각지에 학교가 개설되고 모국어의 교육이 성행하며 민요 및 구전문(口傳文)이 수집되고 민족의식의 앙양과 함께 낭만주의 문학이 생겨났다. 근대 알바니아 문학 개척자는 나임 프라셰리(1846-1900)로서 알바니아의 자연과 민족에 대한 찬가인 전원서사시 <목축과 농경>(1886)을 써서 국민시인으로 존경받았다. 또한 시집 <여름의 꽃들>(1890), 15세기 알바니아의 국민적 영웅을 노래한 서사시 <스칸데르베그 이야기>(1896)로 애국정신을 부르짖어 터키에 대한 해방 투쟁의 선구가 되었다. 프라셰리와 맞먹는 애국시인으로 안톤 자코 챠유피(1866-1930)가 있다. 20세기 초엽까지의 알바니아 문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조국애를 기조로 하는 시라고 하겠다. 그 밖의 문장 장르는 뒤졌으나 희곡 영역에서는 에타헴 하지아데미(1920- )가 몇 개의 사극을 썼고 서정시인 계르기 피시타(1871-1940)도 산문으로 된 종교극을 썼다.산문에서는 <해방자들>(1952-1954)을 쓴 지미타르 슈테리키(1915- ), <빵>(1951)의 작자 지니 사코(1912-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