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남서 유럽 문학/프랑스 문학


프랑스 문학〔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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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槪說〕

기원전 5-6세기경에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셀트(Celtes)족을 주축으로 남쪽에서 정복해온 로마인과 동북쪽에서 침입한 게르만족의 인종적·문화적 혼합이 프랑스인과 문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기질과 문화의 다양성도 그 인종적 혼합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의 경우도 어느 특징을 들어 강조하면 곧 반대의 측면이 드러나 이에 대응(對應)함을 볼 수 있다.

원주민 골르와(Gaulois)의 언어는 셀트어였고, 그들이 개명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기원전 100년) 로마의 문화와 혼합되면서부터이다. 로마제국의 한 속주(屬州)로 5세기 동안 예속되면서 인종적 혼합인 갈로 로맹인(人)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제도·관습·언어 등이 로마화(化)하여 갈로 로맹 문화로 미개한 상태를 벗어났다.

한편 언어는 프랑스 지방의 사투리처럼 된 구어(口語) 라틴어를 사용하여 이를 정통 라틴어에 대하여 로망어라 한다. 소설을 로망이라 부르게 된 것도 민간의 속된 말로 쓰여진 이야기라는 뜻에서이다. 5세기에 미개한 게르만족의 대거 침입으로 그중 가장 강한 부족 프랑크족이 최초의 왕조를 세웠으나 왕과 이동해 온 게르만족이 거꾸로 갈로 로맹의 문화에 동화되었다.

중세 프랑스 문학은 신앙과 기사도정신(騎士道精神)을 고취하거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사랑과 무용(武勇)을 담은 귀족문학과 상류층·승려·지배자를 풍자하는 해학적인 서민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최초의 서사시인 무훈시(武勳詩,기사도 로망)들, 장시 로망 등이 전자에 속하고 여우 이야기<파블리오=짤막한 소담(笑談)> 등이 후자에 속한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선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자극을 받고 이를 섭취·소화하는 과정에 두 가지 흐름이 발원(發源)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고전문예의 큰 장르(정형서정시, 극시)들을 프랑스어로 소화하여 부흥시키려는 시(詩) 운동이며(롱사르와 그를 중심으로 한 플레야드), 다른 하나는 그 고전문예에 담긴 정신·사상을 되살리려는 산문문학의 흐름이다.

전자는 프랑스어를 풍부하게 만들고 이를 가다듬고 순화하며 희극·비극 장르의 도입을 시도하여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터를 닦았고, 후자는 억눌렸던 인간성과 현세적 삶의 해방(라블레), 회의와 검증(檢證)·인간탐구(몽테뉴)의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

17세기 전기 시(詩)운동은 1세기 동안에 가꾸어져 비로소 고전주의 문학은 완벽한 형태의 극시(劇詩)로, 비극(코르네유, 라신), 희극(몰리에르) 등으로 찬란하게 개화된다. 이 이론의 투사이자 문학비평의 선구자인 보왈로는 진실, 봉상스(양식)와 자연스러움과 자연의 모방, 형태·문체의 완벽, 그리스·라틴 고전문예의 대가들에 대한 숭배와 추종을 역설하여 고전주의 문학의 대강(大綱)을 세운다. 이들 대가들이 궁정의 비호를 받는 한편, 귀부인들이 주재하는 살롱이 속출 유행하면서 사회적 지식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민간의 세력권을 이루고, 사교·대화·시적 교류·관찰을 통해 살롱문학(인물·성격묘사, 회고록, 잠언집 등)이 발달하여 몽테뉴에서 발원하는 모랄리스트 문학이 프랑스 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게 된다. 르네상스의 산문정신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철학과 이를 문학적 리얼리티와 조화시킨 진실·봉상스의 숭상은 프랑스적 클라르테(명석)를 결정(結晶)시켰고, 18세기의 합리·진보사상인 계몽철학의 소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을 넘어 고전주의가 전성기의 고비를 넘기자 벌써 이 산문정신의 추세는 그와는 르네상스의 쌍태아(雙胎兒)격으로 태어나 완성된 시문학, 즉 고전주의를 상대로 그 보수적 권위숭상을 공격하여 이를 압도함으로써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것이 ‘신구파 논쟁’이며 여기서 파스칼의 진보론까지 신파의 무기가 되었으니 시대정신의 추세는 이미 프랑스 혁명을 향하여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 고전주의를 누른 이성철학은 합리주의 비판정신으로 무장하여(퐁트넬, 벨) 차츰 더 강대한 전통적 권위, 즉 종교(로마 구교), 정치(군주전제의 구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예봉(銳峰)을 돌려 철학·비평의 산문시대로 돌입한다(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 이들 백과사전파(百科事典派) 철학·사상가들에 의하여 세계 정신사상의 기념비적인 대저(大著) <백과사전>(디드로 책임 편찬, 1751-1772·17권 증보 4권)을 간행, 이성과 진보의 철학사상의 승리와 문화·사회·정치의 전반적인 개혁, 즉 프랑스 혁명의 추진력을 제공한다. 데카르트, 파스칼 이래로 이들 역시 순수이론 과학자를 겸한 점이 사상 내용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향방까지 성격지우게 된다.

산문정신의 고양(高揚)에 따라 고전주의 문학(극시)은 문체·내용에 걸쳐 차츰 해체되어 희곡(마리보, 보마르셰) 이외에 소설이 주요 장르로 대두한다(르사주, 마리보, 프레보, 루소, 라클로).

19세기 이후 루소의 인공·기계문명에 대한 반발로 싹튼 낭만주의는 혁명의 격변과 참극을 겪고 현실에 대한 환멸과 유전무상(流轉無常)을 체험한 정신 풍토에 어울렸고, 독일에서 섭취된 루소사상의 문예가 근대 평론의 개척자 스탈 부인(婦人)에 의하여 재수입되자, 일세를 풍미하는 문예사조로 성행하기에 이른다. 한편 잡지·신문 등의 간행이 늘어남에 따라 차츰 문인(文人)들 생활이 독립되면서 사회적 기능이 강화되고 독자적인 사조 형성이 가능해진다. 사회의 변천에 따른 시대적 감성과 사고의 추이는 곧 문예사조의 변천을 유발하여 낭만주의(샤토브리앙, 위고, 뮈세, 스탕달)에서 사실주의, 자연주의(발자크, 플로베르, 모파상, 졸라), 상징·신비주의(위스망스, 릴라당)로 교체되어 간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문예비평이 소설 장르와 비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마담 스탈, 생트뵈브, 텐, 브륀티에르).

한편 혁명을 계기로 완전히 고전주의적 이상과 권위에서 탈피된 시(詩) 정신은 오히려 산문정신을 앞지르는 전위적인 새로운 미학의 개척자로 전진하며 전통적인 명석성(明晳性)을 등지고 신비의 세계와 인간 정신의 심층으로까지 파고들어 간다(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대체로 산문문학이 전통적인 인간탐구와 18세기 이래의 사회성 편향이 병행(竝行)되며 20세기로 접어들어 더욱 다채로운 모험과 세대적 변화를 보여줌에 반하여 시문학은 인간 내면의 탐구·해방과 전위미학의 개척으로 달려 대중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金 鵬 九>

중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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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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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文學

중세 프랑스 문학의 기간은 6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결국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약 2배의 기간을 중세라 부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기(世紀)와 지방에 따라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묶어서 중세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약간 무리한 점이 있다. 더욱이 중세문학에는 세계적으로 그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걸작은 적고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만 통하는 작품이 많다. 따라서 중세문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근대문학의 경우보다 더 시대나 환경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 제국(帝國)에게 멸망을 당한 후의 골(현재의 프랑스)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 후에도 라틴어는 계속 사용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하여 서양 여러 국가에 공통되는 중세 라틴어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에 의하여 지방 차가 심한 로망스어로 발전한 것이다. 8세기경부터 라틴어는 일상 회화에 쓰이지 않게 되고 로망스어가 그에 대체되었다. 842년에 가장 오랜 로망스어로 된 <스트라스블의 맹세>가 나왔다. 그 후 루아르강(江)의 남쪽과 북쪽은 역사도 풍토도 달라서 남에서는 ‘오크어(語)’라 불리는 방언군(方言群), 북에서는 ‘오일어(語)’라는 방언군을 이루었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봉건제후의 세력이 강하게 되자 앵글로―노르만 방언을 위시하여 지방색이 풍부한 방언문학이 성행하게 된다. 13세기 카페 왕권의 확립과 함께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르 드 프랑스 지방의 방언이 일종의 표준어가 되어 현재의 프랑스어에 가까워진다.

중세문학은 11세기 이전의 중세 라틴어 문학과 이후의 로망스어, 즉 프랑스 문학으로 크게 나뉜다. 중세 라틴어 문학시대에는 샤를 대왕(742-814) 아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 중심의 성직자 요소가 강하고 라틴 작가 기법의 모방에 그쳐 독자의 인간 이상상(理想像)과 문체를 창조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12세기의 르네상스’는 민족 에네르기의 발로이며, 실용을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지만 아라비아를 통하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이 전파되었다. 성직자의 세력도 다소 약해져서 세속적 요소가 강하게 된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각 지방의 방언문학이 불어나서 종래의 역사작품과 성자전 이외에 봉건 제후를 대상으로 한 무훈시(武勳詩)가 나왔다. 또 남불서정시(南佛敍情詩)는 북프랑스의 궁정풍 로망 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인간의 이상상을 만들어 냈다.

13세기에 들어서면 카페 왕권의 확립, 부르주아의 대두, 대학의 융성 등과 함께 프랑스 문학은 절정에 달한다. 교훈문학, 풍자문학, 극문학이 나타나서 프랑스어가 라틴어에 대체되어 서양 지식인의 공통어가 되었다. 14·15세기에는 백년전쟁과 페스트 유행 때문에 국력은 쇠약해지고 문학활동도 쇠퇴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이른바 암흑시대를 맞이하였다.

중세 라틴어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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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語文學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만족이 침입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로마 문명의 전통을 지킨 것은 베네딕트회(會) 수도원이었다. 부속학교에서는 문법과 수사학의 교재로서 고전작가를 주로 하는 라틴어 작품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수도승의 목적은 성서나 기타 종교서적을 읽는 데 필요한 라틴어 지식과 표현기술의 획득이며 고전을 문학작품으로서 음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수도승이 즐겨 쓴 장르는 성자전과 역사작품이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의하여 성직자의 라틴어 지식은 정확하게 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라틴어는 일상 회화에 상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문예부흥이 서양 각지에서 모여든 성직자와 궁정인이라는 지적 엘리트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일반대중과는 인연이 멀었기 때문이다. 문학연구는 변함없이 문학정신보다도 문장기술에 중점을 두었다. 작품도 교과서다운 것이 많고 내용도 반(反)여성적으로 현세 부정적 경향이 강하다. 이와같이 중세 라틴어 문학은 작가가 서양 각지 출신의 성직자이며 민족성과 지방색도 엷었으나 수사학을 주로 하는 문장기술에 의하여 후대 로망스어 문학 기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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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者傳

다소의 뉘앙스는 있을지라도 성자전은 모두 교훈을 목적으로 한다. 그 내용은 성자·순교자·신앙고백자의 일생과 그들의 박해자에 가한 신벌(神罰), 성인(聖人)이나 성유물(聖遺物)이 일으키는 기적과 성유물 전래의 경위 등이다. 수많은 라틴어 성자전 이외에 이미 9세기 말에 프랑스어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이라고도 말할 <성녀 우라리의 속송(續誦)>이 나오고, 이어서 <성 레제전>(1000년경)과 <성 알렉시스전>이 쓰여졌다. 성자전은 성인의 성덕과 순교자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는 것이며 기사의 여러 가지 덕행을 노래하는 무훈시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알렉시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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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e de St. Alexis (11세기 중엽?)

성자전. 작가 불명.

로마 영주(領主)의 아들 알렉시스가 결혼식날 밤, 이 세상의 사랑과 행복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깨끗한 생활을 하다가 육친의 애정과 슬픔에 싸인 채 성자로 승천한다는 이야기이다. 10음철(音綴) 625행. 성자의 금욕적 영웅 행위와 가족의 인간적인 정감을 병행하여 엮은 균형잡힌 구성과 간명한 표현에 의한 인간 감정의 서정적이며 감동적인 묘사는 이미 <롤랑의 노래>를 충분히 예시(豫示)하고 있다

무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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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勳詩

<롤랑의 노래>로 대표되는 바 프랑스 국왕과 봉건제후의 무훈을 노래한 서정시를 무훈시라고 한다. 이 새로운 장르는 1050년부터 1150년에 걸쳐 프랑스의 봉건제도가 신단계로 접어들어 십자군의 열기가 강한 시대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창작연대에 대하여는 11세기 이후 또는 카롤링거 시대라 하고, 작자에 대하여는 개인설과 대중 전승설 등이 있다.

무훈시의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 교권과 봉건사회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다든지, 반대로 그와 같은 희생에 반항하려는 봉건사회의 인간 이상상을 노래한다. 무훈시의 탄생을 비에르라는 악기의 반주로 읊는 무훈시의 청중이 주로 영주나 제후(諸侯)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훈시는 성자전문학의 후원자였던 사교(司敎)나 수도원장에 대신하여 호전적인 봉건제후의 취미를 만족시키는 데 있었다.

롤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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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son de Roland (1090-1130?)

무훈시. 작가 불명.

샤를 대제의 조카 롤랑은 프랑스군의 에스파냐 철군 때 후위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화평교섭의 사자 가느롱의 배신에 의하여 롱스보에서 이교국(異敎國) 사라고사의 왕 마르시르의 대군에게 습격을 받는다. 용장 롤랑은 퉁소를 불어 대제를 부르라는 지장(智將) 올리비에의 설득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열두 장군과 분전한다. 그러나 수에 눌려 마침내 퉁소를 불었으나 원군이 오기엔 이미 너무나 늦은 때여서 모두 신에게 기원을 드리면서 죽어간다. 대왕은 보복의 싸움 후에 전사자를 정중하게 장사 지내고 가느롱을 처형한다.

서사시의 큰 줄거리는 샤를 대제가 에스파냐 원정의 귀로중 피레네 산중에서 바스크족(族)의 습격으로 후군이 전멸한 바 있는 778년의 사건에 따랐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려진 풍속, 습관, 사상, 감정 등은 모두 12세기 초기의 것으로 <노래>의 주제는 십자군 그리스도교도의 패전, 신의 전사(戰士)들의 최후의 승리이다. 슬프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은 기사들의 애국과 신앙의 정열, 또한 롤랑이 절명할 때에 천사가 내려왔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고요함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 단일하여 막힘이 없는 이야기의 구성과 사건 및 인물과 배경의 균형잡힌 배치는 수사학으로 가꾸어진 고도의 문학기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 심리의 예민한 관찰과 간명한 표현 등은 이 시의 프랑스적 성격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10음철 약 4천 행.

역사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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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作品

역사란 중세에 있어서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수도승은 자기가 속해 있는 수도원의 유래와 보호자인 국왕과 봉건제후의 가계를 칭찬하기 위하여 픽션을 섞어가면서 연대기 등의 역사작품을 썼다. 투르의 사교 그레고리우스(538?-511)에 걸친 프랑크족사(族史)를 써서 이후의 중세 역사작가의 표본이 되었다. 카롤링거 시대에는 샤를 대제를 중심으로 한 많은 역사소설이 쓰여졌고 그중에는 무훈시의 전거(典據)라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1066년에 영국을 정복하여 새 왕조를 펴고부터는 영국이나 노르망디에서 왕가의 가문을 칭찬한 많은 역사작품이 나왔다. 그 가운데서도 조프로와 드 몽무트의 <브르타뉴 국왕사>(1136)는 사실(史實)의 정확함보다도 상상력을 구사한 문학작품이며 아더 왕 전설을 소개하였다. 이 작품은 1155년 와스(Wace)에 의하여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브리터스 이야기>가 되었고, ‘브리타니아 제재(題材)’의 궁정풍(宮廷風) 로망 유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프랑스어 역사작품에서는 역사의 의미가 협소하게 되어 근대적 의미의 역사에 얼마간 가깝다. 십자군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쓴 지휘관 비르아르누앵(1150-1213?)과 병사 로베르 드 크라리(1170?-1215기원후)가 있다. 13세기에는 조앙비르(1225-1317)가 성왕(聖王) 루이의 전기를 썼다. 14세기에는 백년전쟁의 고뇌를 묘사한 프르와사르(1337?-1405?)의 <연대기>가 나왔고 15세기 후반에는 코미느(1447-1511)가 비판력과 통찰력을 풍부하게 구사한 <회상기>를 저작하여 근대사학(史學)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프랑스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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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敍情詩

프랑스 서정시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고 장르도 다채롭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능적이고 신비적인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 많고 자연을 주제로 한 것은 적다. 그 위에 자연묘사의 태반은 수사학의 영향을 받아 틀에 박힌 것들이다.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남프랑스 태생인 기욤 9세(1071-1126)나 조프레 뤼델(1130-70 동안에 지음) 등의 남프랑스 서정시인들은 사랑만이 인생에 가치있는 것이며 여성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상의 배경에는 그당시 성행한 마리아 숭배가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종래의 성직자적인 여성 멸시(蔑視)의 사상과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노래한 이른바 ‘지순(至純)의 사랑’은 단순한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고 간통마저 꺼리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이 연애 지상주의적 사상은 북프랑스의 궁정풍문학과 단테와 페트라르카 및 독일의 음유시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궁정풍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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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廷風文學

12세기에 영국을 본거로 한 앙쥬 노르만 왕조와 북프랑스 각지에서는 아리에노르 다키데느(1122?-1204)를 위시하여 신분이 높은 여성의 영향 아래 ‘궁정풍 로망’이 생겼다(‘로망’이란 라틴어가 아니고 로망스어로 쓰인 시 또는 산문의 이야기). 궁정풍 로망은 세련된 엘리트가 여가를 틈타서 읽도록 쓰인 것이다. 윤리적 경향이 강한 북프랑스에서 태어난 궁정풍 로망 작가는 남프랑스 서정시인의 연애 지상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의 사회적 도덕적인 면을 취하여 ‘궁정풍’ 또는 ‘풍류’라고 하는 인간의 이상상을 만들어냈다.

즉 기사(騎士)가 마음에 품고 있는 귀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무훈시로 노래한 무용 이외에 고귀한 감정과 호탕한 성품, 말씨나 거동의 정중함과 은근함이나 절도 등의 여러 가지 덕이 요구되었다. 이들의 덕을 구비한 궁정풍 로망의 주인공은 이후에 서양 여러 나라에 나타나는 인간 이상상의 선구라고 말할 수 있다. 최초는 게마르의 <영국인사(英國人史)>(1140?)와 같이 앙쥬 노르만 왕조를 찬양한 선전문학의 경향이 강했으나 이윽고 사람의 관심은 고대로 향해져 1150년경부터 1165년경에 걸쳐 그리스나 로마를 주제로 하는 몇 개의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신비적인 켈트 세계에 그들의 눈이 쏠려 베르루와 토마의 <트리스탄 이야기>와 <아더 왕 계열 이야기> 등의 이른바 ‘브리타니아 제재(題材)’의 이야기를 낳게 하였다.

작가로서는 서양소설가의 시조라고도 하는 크레티앙 드트로와를 위시하여 그리스, 비잔틴 주제의 <에라클>(1164)을 쓴 고티에다라스와 같은 ‘브리타니아 제재’를 사용하여 12세기 후반 단시(短詩)를 쓴 여류시인 마리 드 프랑스 등이 있다.

13세기가 되면 비잔틴이나 아라비아를 배경으로 하면서 실제로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의 풍자와 다른 문학작품의 패러디로 노래이야기인 <오카생과 니콜레트>(13세기 전반)와 사랑에 있어서 비밀을 지키는 중요함을 가르친 걸작 <베르제 성주의 부인>(1288 이전)이 나왔다.

앙투아느 드 라 살르가 15세기 중엽에 쓴 <젊은 장 드생트레>에서는 전통적인 기사의 이상상이 현실주의적 평민의 이상상 앞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다.

트리스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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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후반)

궁정풍 로망. 켈트의 전설를 바탕으로 베르루와 토마는 각각의 이야기를 만들어 유럽 각지로 퍼트렸다. 두 사람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색조는 상당히 다른 것이어서 베르루가 소박한 청중

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반하여 토마는 세련된 궁정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극적 구성과 심리분석이 뛰어났다. 트루바두르가 지닌 사랑의 이념을 알고 있던 토마는 전설을 궁정풍으로 한 것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여러 나라 말로 된 단편들이 프랑스 학자 베디에(1864-1938)에 의하여 정리되어 있다. 고르느와유 왕인 마르크의 조카 트리스탄은 왕비가 될 ‘금발의 이졸데’를 찾아 함께 돌아가는 배 위에서 마르크 왕과 이졸데를 위한 사랑의 비약(秘藥)을 잘못하여 같이 먹어버린다. 왕비가 된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아무리 해도 연모의 정을 누를 수 없어 밀회를 거듭하다가 체포된다.

두 사람은 교묘하게 도망쳐 모르와의 숲속에서 3년간 괴로운 행복을 맛본다. 이윽고 트리스탄은 왕비 곁을 떠나 브르타뉴에서 ‘흰 손의 이졸데’란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왕비를 잊지 못한다. 트리스탄은 그런 가운데 결투로 무거운 상처를 받는다. 왕비 이졸데는 그를 구하기 위해 브르타뉴로 향한다. 아내 이졸데의 거짓말로 트리스탄은 왕비가 오지 않는다는 절망으로 숨지고 왕비도 그의 주검을 안고 목숨을 끊는다.

비련의 이야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미약(媚藥)에 의한 숙명적이고 생사를 초월한 결합의 정열이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종교나 사회의 법도에 용납되지 않는 간통을 근저로 하고 있다.

크레티앵 드 트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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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etien de Troyes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궁정풍 로망 작가.

1160, 1191년 사이에 샹파뉴와 플랑드르의 궁정에서 활약하였다. 최초로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번안하였으나 후에 아더 왕 전설 등의 ‘브리타뉴 제재’의 이야기를 정리하여서 줄거리가 통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크레티앵은 특히 결혼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의 결혼은 정략(政略) 따위의 비굴한 이해관계에 따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부부간에 참다운 애정은 있을 수 없었으며 결혼생활은 성직자의 학문이나 기사의 무용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있었다. 크레티앵은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 것이다.

현재 5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제1작은 결혼과 무용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취급한 <에렉과 에니드>(1170?)이며, 제2작의 <클리제스>(1176?)는 사랑하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인 정절을 이야기하여 <트리스탄> 이야기에 대한 항의라고 말해지고 있다. 제3작 <랑슬로>(1177-1179?)는 보호자 마리 드 샹파뉴의 궁정에 있으면서 마리 왕비의 요청에 따라 쓴 것 같다. 왕비 그리에브르에 대한 기사 랑슬로의 굴욕적 사랑을 묘사하였다. 제4작은 무용과 결혼생활은 궁정풍 윤리를 지키면 양립할 수 있다는 주제의 <이뱅(yvain)>(1177-79?)이고 최후의 작품인 <페르스발(Perceval)>(1181 이후)은 종래의 궁정풍 인간의 이상상과는 달리 종교성을 중시한 새로운 이상상을 묘사하여 이후에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한 ‘성배(聖盃) 이야기’의 선구가 되었다.

크레티앵은 심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윤리학자로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영웅적 행동을 칭찬하면서 절도있는 배려를 잊지 않고 궁정 취미를 분별하면서 애정에 의한 결혼의 변호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정녕 평형을 유지한 고전적 작가이며 12세기 궁정풍 인문주의의 대표이다.

교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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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訓文學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학교교육의 발달과 프랑스어 문학의 융성은 인간의 지식욕을 자극하여 세속사회의 교양을 넓혔다. 한편 11세기 이후의 아라비아를 통하여 서양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인 철학은 성 토마스 등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의 교양과 결합하게 된다.

그 결과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백과전서적인 지식이 보급되어 비판정신이 일어나 13세기의 문학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다. 가령 <보석광물>지(誌)와 <동물>지(誌) 등의 과학적 작품이나, 혹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일상생활에 적용한 속담이나 격언(格言), 나아가서 정치적 의무·예의작법·사랑의 기법을 가르친 교훈적인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장미 이야기>는 교훈문학의 대표적 걸작이다.

장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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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de la rose

우의(寓意) 교훈문학. 작가·연대가 다른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8음철 전편(1225-30?) 기욤 드 로리스 작, 약 4천 행. 속편(1269-78?) 장 드 망 작, 약 1만 8천 행.

이야기는 시인이 꾼 꿈의 형식으로 썼고 등장인물은 시인인 ‘나’와 사랑하는 소녀의 상징인 ‘장미’ 외에 ‘열락(悅樂)’ ‘청춘’ ‘환대’ ‘이성’ ‘자연’ 등이다. 이것은 심리적·윤리적 혹은 사상적 추상개념을 의인화한 우의(寓意)인 것이다. 이 꿈·의인·우의 등의 수법은 중세 라틴어 문학의 전래이기는 하지만, 수법뿐만 아니고 기욤이나 장은 오비디우스나 보에티우스 등의 라틴어 작품들을 여러가지 이야기나 교훈의 자료로 삼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줄거리로 사랑의 경위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가운데 두 사람의 작가는 각자 입장에서 사랑이나 사랑에 관련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기욤의 시편은 궁정풍의 문학에 묘사된 우아한 궁정풍 연애의 작법을 사랑의 신 ‘아무르’의 입을 통하여 가르친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이론과 기법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관찰하여 분석한다. 그래서 꿈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면서 리얼한 연애심리를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섬세 우미한 연애 이야기이다.

한편, 속편은 전편의 형식과 인물을 계승하고 있으나 우의 교화의 내용은 확대한다. 장은 인생 전반에 걸쳐 지식과 사상을 백과전서적으로 피력한다.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도 기욤이 여성 존중의 이상주의적 연애 지상주의자인데 대하여 장은 여성을 멸시하고 사랑의 목적은 종족의 유지에 있으며 생의 원리로서의 ‘자연’에 따라야 한다고 설파한다. 12세기 사르트르 학파의 흐름을 따라 장에 의하여 일종의 통일을 부여하게 된 ‘자연’사상과 그 기반의 현실주의적 합리주의에는 근대정신의 서광을 감지할 수 있다.

풍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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諷刺文學

13세기에 이르러 무훈시와 궁정풍 로망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이상상을 농조(弄調)의 신랄한 비판정신으로 쓴 <여우 이야기>와 <파블리오>가 호평을 받고 있다. <파블리오>에서는 교훈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나 사제(司祭)와 여성, 그리고 백성을 매우 심하게 풍자하여 인간의 물욕과 색정(色情)을 즐겨 비판대에 올려놓았다. <여우 이야기>에서는 여러 가지 동물을 통하여 인간사회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들 작품의 독자는 새롭게 등장해 온 부르주아뿐만 아니고 교양있는 궁정사회의 사람들도 끼어 있다. 기원도 민중적이지 않고 학자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여우 이야기>나 <파블리오>에 의하여 현실을 직시하는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인 작품이 탄생하여 <결혼의 열다섯 가지 재미>와 <신백화(新白話)>의 선구가 되었다.

여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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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de Renart (1150?-1250?)

동물 우화시. 대다수는 작자 미상.

주제가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훈시와 궁정풍 로망을 흉내 낸 기편(技編)이라 불리는 독립된 스물일곱 개의 소화(笑話)를 모은 것. 기원은 중세 라틴어 문학에 있다. 여우 ‘르나르’를 중심으로 사자왕과 늑대, 곰 등의 제후, 이하 갖가지 계층의 인간을 대신한 동물이 등장하여 당시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작가는 상세한 관찰, 자유스런 상상, 밝은 필치로 이기적인 귀족과 욕심뿐인 상인, 향락에 들떠 있는 승려와 천하고 교활한 백성, 남편을 속이는 악처 등에 조소를 퍼붓는다. 여우는 성급함·기지·웅변·과감 때문에 프랑스인의 장점과 단점의 권화(權化)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사회비판은 초기의 기편에서는 가벼운 핀잔 정도이나 13세기 이후에는 점차 풍자 교화(敎化)의 경향이 짙다. 프랑스 태생인 ‘르나르’의 명성은 유럽 전토에 퍼져 1250년 네덜란드판은 괴테의 <라이네케 푸스>의 원형이 되었다.

파블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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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iaux

주로 13세기 북프랑스에서 시작된 150 정도의 골계적 짧은 이야기를 총칭. 보통 8음철 중운(重韻). 작가는 대부분 미상이나 루트뵈프(Rutebeuf 13세기)와 같은 저명한 시인도 있다.

주제는 대개 여성 풍자와 성직자 비난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제재(題材)는 동서고금의 민간 전승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다수가 현실사회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여러 모습을 그렸다. 교훈적인 작품도 있지만 거개가 늘 속임수를 수반하고 있다. 위선과 피해자의 멍청한 정도가 웃음을 일으킨다. 그 웃음은 가끔 노골적으로 음란한 일에까지 비쳐 비천한 웃음이 되기도 하지만 음습(陰濕)하지는 않다. 예민한 관찰로 섞어서 정확하고 밝게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한다는 <파블리오> 정신은 프랑스인의 골계 기질에 통하는 것으로 독자를 귀족과 서민, 남녀의 구별을 가리지 않았다. <콩피에뉴의 세 장님> <평민 의사> 등이 유명하다.

결혼의 열다섯 가지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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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15세기 중엽)

작자 미상. 산문.

짧은 이야기의 형식뿐만 아니라 관찰과 웃음, 풍자라는 <파블리오>의 정신마저 이어받고 있다. 여성 혐오라는 끈질긴 전통적 사상을 기저로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남성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향해져 있다. 더구나 남성이 그 불행을 즐거움으로 하고 있다는 데 분노하여 작가는 그 우스꽝스러움을 15개의 화면에 상세하고 정확히 묘사한다. 여성비평은 장 드 망을 생각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신랄하다.

신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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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百話

(1456?-67?)

작자 미상. 산문.

내용과 형식 모두가 <파블리오>와 같은 계통에 속한다. 제재도 탐욕스런 승려와 멍청한 가장(家長), 그리고 악녀·악처 등으로 변함없이 유형적이면서 이것을 현실사회를 배경으로 묘사해냈다. 형식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착상을 얻은 작품으로 이미 이즈음부터 이탈리아의 영향이라 말하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계기가 엿보여 어떤 의미에서 라블레를 예고하고 있다.

북프랑스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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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敍情詩

사랑을 노래한 궁정풍문학의 전통은 13세기 치보 드 상파뉴(1201-1253)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한편 부르주아 세력이 강했던 북프랑스 알라스의 소읍을 중심으로 성했던 ‘결별의 노래’에는 일상생활이 시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고리이르 시인들(그날그날의 생활 가운데 도박·술을 라틴어로 노래한 몸가짐이 나쁜 성직자 시인)의 전통은 코랑 뮈제(1285세기 후반)의 루트뵈프(1285경 죽음)에 계승되었다.

그들이 즐겨 노래한 것은 방랑생활의 비참, 도시생활의 빈곤, 인간의 약점과 환멸감이며 중세 제1의 시인 비용의 시세계에 통하는 것이 있다. 백년전쟁의 시대에는 알랭 샤르티어(1385?-1435?)와 같이 절박한 시사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시인도 있는가하면 샤를 도를레앙(1394-1465)과 같이 시대의 불행에 무관심한 채 시작(詩作)에 몰두한 사람도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기욤 드 마쇼(1300?-1377)와 외스타시 데샹(1346-1406?)에 의하여 시작(詩作)의 이론적 탐구가 행하여졌다.

비용(프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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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Villon (1431?-?)

프랑스 서정시인. 본명 프랑스와 드 몽코르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성 브노와 교회의 성직자인 기욤 드 비용에게서 자라나서 1452년 파리 대학을 졸업. 이즈음부터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직업 없는 무위도식자가 되었다. 1455년 어떤 사교(司敎)를 죽인 죄로 파리를 떠났다. 이듬해 국왕의 특사(特赦)를 받았으나 연말에 나바르 신학교의 금화 절도사건에 가담하였다. 이때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유증(遺贈)의 노래>를 창작.

약 6년의 방랑 뒤에 파리 근처에서 <유언시집(遺言詩集)>을 썼다. 여기에서 시인은 백년전쟁 말기 혹은 직후의 화려한 파리의 모습을 빈궁과 패잔과 죽음에 직면한 눈으로 포착하여 솔직하게 노래하고 있다. 파리에 돌아온 얼마 뒤에 투옥되었으나 1462년 석방. 이듬해 싸움판에 관련되어 교수형에 선고되었으나 최고재판의 판결로 사형을 면해 10년간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뒤 비용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비용의 일생은 그의 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어디서든지 파리를 생생하게 체험하여 언제나 이 도시를 시작(詩作)생활의 무대로 하였다. 그래서 방탕한 청춘생활을 보내면서 도시인다운 재치와 사치스러운 그림자 속에 깊은 우수와 회한을 숨겨적나라하게 인생의 비참함, 인간의 ‘업고(業苦)’, 특히 비정하고 참혹한 죽음에의 공포를 고백하고 중세에 살면서 근세적 모습을 보여 보들레르를 보는 듯하다. 프랑스 최대 서정시인의 한사람이다.

극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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劇文學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교화를 목적으로 한 ‘부활제극’과 ‘성탄제극’ 등의 전례극(典禮劇)이 라틴어로쓰여져 교회에서 상연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 프랑스어를 사용한 작품이 상연되었고 작품으로 나왔다.<아담극(劇)>(1146-1174?)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어가 사용 되었다. 한편 사교좌(司敎座) 부속학교의 학생에 의한 라틴어 극의 흐름을 따른 장 보델의 <성 니콜라 극>(1200?)은 성자극 가운데 무훈시적인 전투장면과 우스운 요소, 술집, 도박 등 일상생활도 받아들여져 세속적인 요소가 강해졌다.

아당 드 라 알의 <잎 그림자 극>(1262 상연)은 일상생활이 극의 주제가 되었으며 다른 그의 <로뱅과 마리옹>(1275-1288 상연)은 전원생활이 무대가 되었다.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서는 <성모 기적극>이나 천지창조부터 성왕 루이에 이르는 <성사극(聖史劇)>이 만들어졌다.

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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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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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프랑스에서는 16세기 전체가 르네상스라 말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중세 그리스도 세계는 긴 기간의 독단과 편견에 의하여 경직(硬直)화하여 이르는 곳마다 혼란과 무질서를 낳았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케케묵은 전통에 의한 견고한 권위를 뒤집고 이제까지 잊혀진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사상 안에 생활의 지혜를 찾으려는 운동이 싹텄다. 이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란 말은 ‘재생(再生)’을 의미하는 프랑스 말이다. 결국 고대의 학문과 사상이 이 시대에 새롭게 바뀌어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물론 중세에 있어서도 라틴 어학이나 문학의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기가 되어 중세와는 전혀 다른방법과 왕성한 지식욕으로 주석에 의하지 않고 고대의 원전(原典)에서 직접 배우려는 기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를 낳은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15세기 말에서 약 반세기에 걸쳐 거듭된 이탈리아 원정이다. 알프스를 넘어 발달한 이탈리아 문화에 접한 프랑스인은 이탈리아인의 사치스럽고 고상한 생활과 세련되고 우아한 사교계에 심취하여 이것을 프랑스에 가지고 갔다.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품이 프랑스에 들어가서 단테의 <신곡>과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도 소개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매개로 하여 고대의 전통이 밝혀지고 다시금 고대문화의 가치가 인식되었다.

16세기의 문학은 보통 세 시기로 나뉜다. ⑴르네상스 전기(1515-1534)―프랑수아 1세가 즉위한 1515년부터 20년 동안으로 젊은 왕은 새로운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문예를 장려하였다. 이 시기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손을 맞잡고 진척하여 문학자들은 고대작품에의 호기심과 새로운 종교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 작가로는 시인인 클레망 마로와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라블레가 있다.

⑵ 르네상스 개화기(1534-1560)―1534년의 ‘격문사건(檄文事件)’을 경계로 프랑수아 1세의 종교정책은 심한 탄압으로 바뀌어 마로는 이탈리아로 망명하고 라블레는 몸을 숨긴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결별하여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많은 문학가는 종교개혁을

멀리하여 고대의 원전 속으로 몰입한다. 1550년경이 되면 롱사르를 중심으로 플레야드(La Plei-ade)가 고대시형을 부활하여 고대극을 모방한 희곡을 썼다.

⑶ 르네상스 원숙기(1560-1598)―이시기는 종교전쟁과 일치한다. 문학가도 각기 그들이 속해 있는 당파의 신념에 입각하였으며, 가령 도비네와 몬뤼크처럼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다. 다만 이 고난의 시대를 맞아 몽테뉴는 광신적인 상호 혐오의 어리석음을 알고 고대에서 배운 행복의 철학을 역설하였다. 르네상스는 몽테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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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sme

16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그리스·로마의 문학을 찬미하여 이것을 모방하려는 지적 문학적 운동을 말한다. 에라스무스, 기욤 뷔데 등은 중세의 문학과 학문을 버리고 고대의 원전에 소급해 올라가서 성서를 번역하는 한편 고대 이교문학(異敎文學)의 보급에 힘썼다. 특히 1530년 뷔데의 진언에 의하여 설립한 왕립교수단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를 가르쳐 휴머니즘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점차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벗어나 신보다도 인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 인간의 생명이 구가되며 정신의 자유가 요구되었다.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치하에서 휴머니즘은 가장 화려한 시대를 맞이한다. 아묘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번역하여 고대인의 용기를 찬양하였으며 칠성시파(七星詩派)는 고대의 미학과 기법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종교전쟁이 휴머니즘에 큰 타격을 주었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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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

프랑스 르네상스의 여류문학가.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나바르 왕비로서 많은 휴머니스트와 초기 종교개혁자를 비호하였고 스스로 네오 플라토니즘과 신비적 그리스도 신앙을 융합한 종교적 서정시와 극작을 시도하였다. 특히 단편집 <엡타메롱>에 의하여 사실적 심리분석적인 근대소설의 길을 열었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 앙리 4세의 조모이다.

엡타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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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ptameron (1558-59)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단편소설집.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힌트를 얻어 열 사람의 귀족이 수도원에 모여 이야기를 하는데 열흘에 모두 백 가지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는 구상으로 1542년경부터 집필하였고 72편이 현존해 있다. 노골적인 테마를 선택하여 뛰어난 심리적 리얼리즘과 작가의 플라토니즘적 연애관과 도덕관의 투영으로 중세 전래의 민중적 폭로 이야기의 영역을 벗어나 아직까지도 애독하기에 충분한 근대성을 구비하고 있다.

마로 (클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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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t Marot (1496-1544)

프랑스 르네상스기 시인.

신앙의 순화를 지향하는 복음주의에 공명하여 궁정시인이면서 두 번의 투옥으로 망명을 겪어 북이탈리아에서 객사했다. 그의 700여 편에 이르는 시는 파란 많은 자신의 일생의 기록이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소네트를 시도하였으며 특히 경묘하고 소탈한 서간시와 엘레지에 개성적 기교와 독자적 시경을 보여주었고 롱사르와 라 퐁테느에게 영향을 끼쳤다.

라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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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 Rabelais (1494 또는 1483?-1553?)

프랑스 르네상스의 이야기 작가·의사·휴머니스트.

투렌주의 시농 부근에서 변호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수도사가 되어 철학·신학을 배우는 한편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고대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인이나 학자들과 교유, 1528년경 서남 프랑스의 수도원을 떠나 파리에 갔다. 한 미망인과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었다. 그때를 전후하여 프랑스 각지의 대학을 편력하면서 의학을 배웠다고 생각된다. 1530년 몽펠리에 대학 의학부 학생이 되어 11월 학위를 얻었다. 이듬해 춘계학기에는 고대의학을 그리스어 원전(原典)으로 강의하여 호평을 받고 1532년 여름에 세 종류의 학술서적을 출판, 11월 리옹 시립병원 의사로 임명되고 고전학자와 의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아르코프리바스 나지에라는 가명(假名)으로 우스꽝스러운 거인이야기 <제2 팡타그뤼엘>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제일보를 내디뎠다. 1534년 1월부터 4월까지 국왕 측근의 중신인 장 뒤 벨레의 시의(侍醫)로 등용되어 이탈리아에 동행하였고, 귀국 후 가을에는 <제1 가르강티아>를 출판하여 호평을 얻었다. 1534년 가을에 시작된 혁신사상 탄압의 파급에 겁먹어 1535년 2월 시립병원에서 행방을 감춘 뒤 7월부터 1536년 4월까지 재차 로마에 체류하였다. 1537년 의학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의를 하였고 1539년 전후에는 어느 여성과의 사이에 아들을 얻어 1540-1542년에 주로 북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머물렀다. 1542년 구작 2권의 정정(訂正)신판을 내었으며 탄압을 고려한 삭제 가필에도 불구하고 파리 대학 신학부에 의하여 금서처분(禁書處分)을 받았다.

1546년 침묵을 깨뜨리고 <제3 팡타그뤼엘>을 본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 역시 금서처분을 받아 약 1년 반 동안 메츠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1547년 가을부터 약 2년간 이탈리아에 체재하였으며 그간 1548년 초에는 <제4 팡타그뤼엘>의 일부를, 1549년에는 <모의전기(模擬戰記)>를 출판하였다. 1552년 1월 <제4의 서(書)>를 완전한 형태로 발표하였으나 이것 또한 고발의 대상이 되어 동년 가을 라블레 투옥의 소문이 퍼졌으나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편이든 반동적 카톨릭과 열광적 프로테스탄트의 쌍방에서 이단(異端)으로 저주를 당한 그는 1553년 1월 사제봉록을 포기한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1564년에 발표한 <제5 팡타그뤼엘>이 유작이라 하여 출판되었으나 다른 사람의 붓으로 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진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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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1564)

프랑수아 라블레 작.

<제1 가르강튀아>(1534), <제2 팡타그뤼엘>(1523), <제3 팡타그뤼엘>(1546), <제4 팡타그뤼엘>(1552), <제5 팡타그뤼엘>((1564)의 전(全) 5권으로 된 프랑스 르네상스 최대 걸작. 다만 사후에 출판된 최종권은 위작(僞作)이라는 의심이 있다.

처음의 두 권은 거인왕(巨人王)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부자 2대의 유년시대·편력수업·경이적 무훈을 이야기하고 수도사장과 인텔리 변덕쟁이인 파뉴르주 등의 매력있는 측근을 안배해 두었으며 독립하여 읽을 수 있으면서 우스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기의 존엄과 자유에 눈뜬 르네상스인의 환희와 몽상, 구태의연한 정치, 사회, 사상의 왜곡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종횡무진하게 짜여져 이 시대를 웅변으로 가장 잘 표현한 걸작이다.

제3의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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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파뉴르주의 결혼문제를 중심으로 무당·점성(占星)학자·시인·의사·재판관·철학자·신학자 등이 전개하는 함축성 있는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인적인 활극조에서 일전(一轉)하여 근대적 지성이 연출하는 1막 희극집 같은 면이 있다. 나머지 2권은 덕리명신(德利明神)의 신탁(神託)을 구하는 팡타그뤼엘 일행의 항해와 기상천외한 섬들에의 기항을 이야기하였다. 사상대립과 탄압의 와중에서 나온 후기 3권은 전기 작품의 대범한 희극조에 대신하여 우유(寓喩)와 환상의 안개에 싸여 미묘한 음영이 풍성하게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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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改革

16세기 전반 독일·스위스·프랑스·영국 등 유럽 제국에서 시작하여 동·북유럽까지 파급한 종교운동. 부패한 교황의 신정정치(神政政治)에 저항하여 성서의 권위와 신앙만에 의한 구원을 내건 복음주의운동이다. 그러나 절대주의 성립기에 이르러 사회 정치가 다같이 심각한 관련을 갖는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교황청의 면죄부(免罪符)판매를 비평한 <95개조의 선언」을 뷔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공표하여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었다. 종교개혁의 완성자는 프랑스 태생으로 주네브를 활동무대로 한 칼뱅이다. 그에 의하여 제네바에서 신정정치가 실현되어 칼뱅주의는 여러 나라에 퍼졌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1562년 이후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일어나 1572년 성바르테르미의 대학살을 정점으로 낭트 칙령(1598)까지 계속 되었다.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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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 종교개혁자.

노와이용에서 태어나 파리, 오를리앙, 브뤼지에서 신학과 법률학을 배웠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註解)>를 간행하여 휴머니스트로서 출발하나 1534년경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1541년 이후 주네브에 정주하면서 ‘성스러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개혁에 이바지한다. 그의 가르침의 특색인 ‘예정론’이 알려져 있다. ‘신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는 선민의식은 칼뱅주의자에게 굳은 확신과 적극적인 활동의욕을 일으켜 근대적 직업윤리를 발전시켰다.

그의 주요한 저서로 <그리스도교 요강(要綱)>(1536 라틴어 초판, 1560 프랑스어 최종판)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대전(大典)>이라 일컫는 명저이고, 프랑스어판은 16세기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사적으로 알려져 있다.

플레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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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星詩派 Pleiade

롱사르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프랑스의 혁신적 시파. 이 파의 목적은 종래의 비속한 민중적인 시와 절연하여 참다운 예술적 향기가 높은 프랑스 시의 창조에 있었다. 그리하여 뒤 벨레는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顯揚)>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이 의도를 굳게 하고 화려한 실천활동에 의해 이후 약 40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널리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파의 주된 공적은 르네상스의 종교적 사색과 과학적 박식 취미 사이에 잃어져 가는 미(美)와 예술의 관념을 구제하여 문학자에게 예술가로서의 자각을 깨우쳐 그 지위를 높인 것이다. 또한 고전어의 바른 연구를 통하여 프랑스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고대시형과 청신한 이탈리아 시형의 모방에 의해 프랑스 시법을 일신한 것 등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부당하게 경시되었으나 19세기 특히 생트뵈브의 정당한 재평가에 의하여 문학사상의 지위, 즉 근대 서정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점이 인정되고 있다.

뒤 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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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chim Du Bellay (1522-1560)

프랑스 시인.

앙제 근교서 출생. 롱사르 등과 함께 플레야드 시파를 결성하여 프랑스 시의 혁신을 꾀하였다. 이 파의 선언서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을 썼고 이어 페트라르카풍(風)의 소네트 <올리브>(1549)를 저작한 뒤에 종형(從兄)을 따라 로마에 갔다. 그러나 환멸과 회한만을 간직한 채 귀국하여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떴다. 만년의 <애석(哀惜)시집>(1558)은 개성적인 감동과 애수에 찬 걸작이며 근대서정시의 선구라 할 만하다.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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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

뒤 벨레에 의하여 집필된 플레야드파의 선언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의 서(書)에는 프랑스어를 야만과 빈곤의 비난으로부터 옹호하고, 제2의 서에는 현양의 방법으로 고대인에게서 배움으로써 신어를 대담하게 창조하여 국어를 풍부히 하고 더욱이 중세의 시형을 버리고 고대나 이탈리아에서 여러 유형을 모방하여 시법을 일신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본서는 그 혁신적 주장과 애국적 정열에 의하여 프랑스 문학사의 일대 기념비가 되어 있다.

롱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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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de Ronsard (1524-1585)

프랑스 시인.

방드모아의 라 포아소니에르 성에서 태어나 12세에 시동으로 궁정에 들어갔으며, 스코틀랜드와 독일에도 체류하였다. 18세 때 병으로 반귀머거리가 되고 휴머니스트인 장 도라의 코크레 학원에 입학하여 고전어와 고전문학에 몰두하였다. 여기에 바이프(1532-89), 뒤 벨레도 가담하여 그들과 같이 종래 비속한 프랑스어에 대신하여 고전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모범으로 한 ‘새롭고 장대한 예술’의 창조를 결의하고 뒤 벨레의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 그 자신의 <제1 오드집(集)>(1550)의 서문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플레야드 시파를 결성하여 스스로 수령이 된(1556) 이후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1차 종합 작품집>(1560)이 세상에 나오자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프랑스 시인의 왕’으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널리 유럽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종교전쟁 때에는 단호한 카톨릭 교도의 입장에서 <논설시집>(1562-63)을 내어 힘차고 정열적인 시구로 내란을 훈계하고 평화를 역설하였다. 최대의 보호자 샤를 9세 사후(死後)에 역령(域領)에 있는 승원에 은퇴하여 계속 작품의 퇴고 증보를 하다가 ‘세기적인 시왕(詩王)’의 영광 가운데 투르 근교의 수도원에서 영면하였다.

그의 작품은 모든 장르에 걸쳐 있는데 주요한 것으로 <오드집>(1550, 53), <연애시집>(1552, 55, 56), 전기한 <논설시집> <송가집>(1556), <숲의 노래>(1554), 미완성의 서사시 <프랑수아>(1572), ‘프랑스의 페트라르카’의 본령을 발휘하고 있는 <엘레네의 소네트>(1578) 등이 있지만 특출나게 성공한 것은 갖가지 연애시이다. 그는 관능적이며 애수에 찬 기질에서 항시 새로운 모습과 절묘한 형식으로 사랑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자연과 내적 일체가 된 시인으로서 사랑과 자연의 참다운 서정시인이었다.

또 기법면에서도 오드, 소네트, 엘레지 등 신시형을 구사해 보였고 12음철 시구(音綴詩句)를 재흥(再興)하여 이 시구에 관한 여러 규칙을 정하였다. 더욱이 다종다양한 서정적 음철을 창조한 것도 빠뜨릴 수 없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부당하게 경시되었으나 19세기, 특히 생트뵈브에 의한 정당한 재평가로 근대 서정시와의 결합이란 점에 그의 명성은 부활하였다. 특히 그는 완전한 형식 속에 자연을 표출한다는 시의 목적과 고대인의 연구와 모방이라는 수단을 표시한 점으로 고전주의 문학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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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 르네상스기의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

보르도 근교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존중의 신시대적 교육방침을 신봉하는 부친 피에르의 배려로 유년 때부터 특수한 라틴어 교육을 받아 후에 인문학적 교양의 기초를 굳혔다. 보르도와 기타 여러 곳에서 면학 후 페리그와 보르도의 법원에서 서기로 근무하였고 파리 궁정과의 연락도 담당하였다.

1571년 은퇴하여 가사관리 및 독서와 내성(內省)으로 날을 보냈다. 그 사이 기록한 수상(隨想)과 논고를 1580년 <에세이> 전2권 94장으로 간행하였다. 지병인 신장결석(結石)의 치료를 위해 1581년까지 독일·이탈리아의 온천장을 둘러 로마까지 갔다. 이때 <이탈리아 여행기>(1774 간행)를 썼다. 여행 중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되어 귀국하여 1585년까지 두 번이나 중임하였다. 전통적인 구교 입장에 서서 국왕 앙리 2세에 협력하면서도 종교전쟁의 비참한 유혈을 피하고자 여러 면으로 신구 양 진영의 융화를 시도하였다. 퇴임 후 재차 독서와 집필생활에 들어가 1588년에 <에세이> 개정판을 간행하였다. 많은 가필 외에 새롭게 쓴 제3권 13장을 더하여 전3권 107장이 되었다. 그 후 주로 자택에 있으면서 독서와 사색 가운데 자저(自著)를 가필하다가 1592년 사망하였다.

<에세이> 집필초기에는 고대사상과 문학에 조예 깊은 친우 라 보에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세네카 등으로부터 소재를 얻었다. 그리하여 정념을 극복한 부동한 마음을 간직하고 죽음에 친해짐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구애(拘?)되지 않는 태도로서 생을 보내려는 실천적이고 극기주의적인 사상을 품게 되었다. 그 뒤 고대의 회의주의적 사상을 가진 서적에 의하여 인간의 사상, 행동의 다양, 불안정을 살펴 알 수 있는 사고방식에 깊이 몰입했다. 특히 몽테뉴의 경우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보며겸허하게 사실과 사실을 쌓아올려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로 나타났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란 말에 그것이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후 몽테뉴는 “모든 인간은 인간조건이 완전한 형태를 구비하고 있다”는 확신하에 <에세이> 가운데서 자기를 실험의 재료로 하여 인간성을 음미하였다. 그래서 성질, 능력이 자연본래의 존재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연(本然)주의, 인간존중주의에 도달하였다.

몽테뉴는 자기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을 정밀하고 다각적 고찰로 포착했다. 이것은 ‘모랄리스트’의 태도이며 그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후계자를 내고 있다. 또 개인의 존중, 인간성의 해방은 루소에서 파급하여 현대에까지 흐르는 근대정신의 근본사상이며 데카르트와 파스칼에게 교시(敎示)하여 과학적 사고의 길을 열었다. 몽테뉴가 이룩한 문학사상·사상사상(思想史上)·문화사상의 업적은 매우 큰 것이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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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

몽테뉴의 유일한 저서. 길고 짧은 여러 장(章)으로 된 산문 수상집.

집필초기에는 독서의 여록(餘錄)과 같은 성격의 짧은 장이 많았으나 차차 충분한 이론을 전개한 것이 나오게 된다. 그의 사상도 초기의 극기주의적 사상, 중기의 회의주의적 사상, 후기의 쾌락주의적 사상으로의 ‘발전’을 볼 수 있으나 최후의 지점은 그때까지의 사상을 모두 내포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데서 그것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고도의 시사(示唆)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가혹한 종교전쟁의 시대에 있으면서도 그 시대를 넘어 미래의 신뢰를 잇는 몽테뉴의 한없이 깊은 인간애를 읽어 볼 수 있다.

도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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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ippa D'Aubigne (1552-1630)

프랑스 시인·신교파의 무장(武將).

상통쥬 출신. 16세기 말의 종교전쟁에 붓과 칼로써 활약한 후 망명지 주네브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품은 <비창(悲愴)곡>(1616)으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감정의 하나인 신앙에서 오는 그의 모든 것이 환상적 상상력이 풍부한 개성적 표현으로 노래되고 있다. 오늘날 그는 격동시대 문학의 체현자(體現者)로서 대표적인 바로크 시인의 한 사람이다.

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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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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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프랑스 17세기 문학은 일반적으로 고전주의 문학이라 말하고 있으나 참다운 고전주의는 루이 14세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1661년부터 약20년 동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세기의 문학은 그 20년 동안과 이를 전후하는 시기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1598-1661)는 모든 면에 있어서 규율화의 경향과 바로크적 경향과의 항쟁시기이다. 즉 전자의 출현은 정치면에 있어 절대 왕정제도의 진행과 종교계에서는 카톨릭 복권(復權)의 노력이고 문화면은 언어의 정화와 제형식의 적용, 취미의 세련 및 예절의 강제로서 말레르브, 보질라(1585-1650), 발자크(1597-1654) 등 ‘프레시오지테’의 경과를 보이면서도 살롱을 중심으로 하는 ‘사교계’와 아카데미가 이에 참가한다. 이 동안 데카르트가 출현할 ‘이성의 군림’을 준비한다. 이 경향에 대해 휴머니즘의 전통에서는 자유파와 독립파는 테오피르를 중심으로 영감(靈感)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프레시오지테’에 대하여 스카롱을 선두로 하는 ‘뷔를레스크’의 반항이 생겨 나와 이 시기에 독특한 색채, 즉 바로크적 경향을 띠면서 모름지기 규율화에의 저항을 나타냈다.

제2기(1661-1685)는 전대의 자유사상을 극복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질서가 확립되며 그로인해 지탱된 참다운 고전주의의 시기이다. 고전주의 문학의 원리는 이성에 의한 인간심리, 모랄의 보편성, 즉 ‘참다운 것’을 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모범을 찾아 거기에서 도출(導出)된 방식을 지키며 정리 순화된 언어로 ‘사람의 마음에 들면서 사람을 교육’하기 위하여 내용의 ‘참된 것’을 절도있는 형식으로 표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가들은 특히 ‘고전주의파’를 결성하지는 않았고 각자 독자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전술한 바와 같은 공통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장식하는 작가들로서는 의지의 비극을 강조한 코르네유와 섬세한 문체로서 여성심리의 심오함을 파헤친 라신, 자연에 따르도록 가르쳐 불후의 전형(典型)을 그린 몰리에르, 고전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보왈로, 이성과 감성의 논리를 훌륭한 문체로 쓴 파스칼, 우화의 라 퐁테느, 모랄리스트인 라 로시푸코, 뛰어난 심리소설의 라피트 부인, 서간문학의 세비네 부인, 대설교가인 보쉬에 등으로 그들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여 프랑스 문학을 다시금 유럽에 군림하는 문학이 되게 하였다.

제3기(1685-1715)는 고전주의 분해와 신풍이 불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즉 왕권의 쇠퇴는 기성질서의 옹호를 초래하고, 이 질서 위에 서 있던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란 고전주의의 이상이 이성의 우월이란 형태로 분해되어 간다. 그 상징적 사건은 ‘신구(新舊)논쟁’에 있어서 페로 등 근대파의 승리인 것이다. 또 고전주의의 실천자이지만 유연한 문체와 자유스러운 정신으로 신풍을 예고한 페늘롱과 라 브뤼에르가 활약하였고 베일 퐁트넬은 18세기 철학자의 선구자가 된다.

말레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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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

ois de Malherbe (1555-1628)

프랑스 시인.

칸 출신. 앙리 당글렘의 비서로서 남프랑스에 체재했다. 40세에 궁정에 들어가 이후 궁정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작품은 초기 롱사르풍(風)의 시로부터 바로크적인 것을 경유하여 만년에는 개인적 감정을 없앤 간결한 시까지 약 125편이 있다. 오늘날에는 시인으로서보다도 당시 풍부하였으나 잡다한 언어를 정리하여 균형이 잡힌 작시법을 체계세워 고전주의의 길을 열었다는 점으로 더욱더 평가되고 있다.

바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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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oque

어원은 ‘왜곡된 진주(眞珠)’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그래서 이것이 ‘기이한, 이상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미술사에는 이미 19세기 이래 ‘바로크 양식’이란 말이 르네상스 말기부터 로코코 시대까지의 미술형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플레야드 말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시대를 ‘전(前)고전주의 시대’라 불러온 데에 대하여 이 시대에 고전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이탈한 문학을 오히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바로크 문학’이라 하여 고전주의에 대치시키는 움직임이 근년 문학사가들 사이에 일어났다.

문학에 있어서 바로크의 특징은 ⑴ 안정보다 움직임의 중시, ⑵ 단념보다도 격한 감각의 존중, ⑶ 장식성의 우월, ⑷ 기발한 비유·대조·과장과 파격적 구문의 사용 등이다. 시에서는 도비네, 장 드 스퐁드(1557-1597), 초기의 말레르브, 극에서는 로베르 가르네(1544-1590)와 로트루(1609-1650), 초기의 코르네유 등에 이 경향이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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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수학자·과학자.

투렌의 라 에(La Haye)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 어머니와는 생후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어머니와의 사별은 그의 발상에 어떤 영향이 미쳤다고 생각된다. 라 프레쉬 학원과 프와티에 대학에서 배웠고 인생에 대한 날카로운 공포감과 그를 뒤집어 놓은 명석함과 확실함에의 이상한 욕구가 그를 자기와 세계의 철저한 탐구로 나가게 하였다. 과학연구를 하는 한편 군인 또는 여행가로 각지를 전전하였으며 1619년 꿈에서의 계시를 통하여 지혜와 학문의 결합이라는 자기의 사명을 직관한 뒤 1629년 네덜란드에 이주하였다. 이후 20년간 사색과 저술에 전념, <방법서설(方法序說)>, <성찰(省察)>(1641), <철학의 원리>(1644), <정념론(情念論)> 등의 저서는 모두가 이 시기의 소산이다.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건너갔으나 이듬해 폐렴으로 죽었다.

과학연구를 통하여 자연적 세계가 가지고 있는 기계론적 필연성을 강조한 반면 인간을 ‘정신’으로서 파악하여(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의 사고의 출발점이다) 객관적 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주체적인 생활방식을 탐구하였다. 모두를 의심하여 다만 이성의 지도만을 따른다는 자유롭고 명석한 사고 태도는 근대의 합리주의적인 사고의 원천이 되어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을 준비하였다.

<방법서설> <정념론> 등에 있어서 자기나 인간에 대한 성찰에 의하여 몽테뉴 이래의 모랄리스트적 전통을 계승하고 특히 <정념론> 중의 인간상은 코르네유적 인간상과 지극히 유사하여 “데카르트가 정의(定義)하고 코르네유가 그렸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현대에의 영향은 알랭이나 발레리에게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방법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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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法序說

(1637)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작품. 테카르트 저.

세 과학 논문의 서설로 쓰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독립하여 읽혀진다. “이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란 모두(冒頭)의 일구는 특히 유명하다.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방법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그와 같은 ‘방법’에 입각한 저자의 사상 형성을 자서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정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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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念論

(1649)

생리학적·심리학적 고찰을 내용으로 하는 철학 작품. 데카르트 저.

정신과 육체를 겸해 가지고 있는 ‘인간’을 양자의 상관관계로부터 해명하였다. 보헤미아 왕녀 엘리자베스의 요청으로 써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에게 헌증하였다. 놀라움·애증·기쁨·슬픔 등을 생리학적으로 분석하여 그와 같은 정념의 통어(統御)를 통해 ‘고매한 정신’에의 도달을 역설한 도덕서적이기도 하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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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e Francaise

1635년에 창설한 현존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1630년경 다수의 작가와 문학애호가가 문학을 논하기 위하여 시인 콩라르의 집에 가끔 모였다. 이것을 들은 재상 리셜리외는 이 집회를 공적 기관으로 만들 것을 구상하고 칙령을 얻어 40명의 회원을 모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발족시켰다.

회원이 하는 일은 국어의 순화 촉진을 위하여 ‘모범적 신사’의 관용(慣用)에 입각한 국어사전과 문법서의 작성이었다. 1647년에 보질라(1585-1650)의 <프랑스어 주의서>, 1694년에 사전의 초판이 간행되어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르 시드>논쟁에 발언하여 문학의 공적 평가기관의 역할을 감행하려고 했다.

코르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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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Corneille (1606-1684)

프랑스 극작가.

루앙에서 태어나 예수회파 학교에서 배웠다. 변호사가 되어 1628년 동시(同市)의 항만·해사(海士) 등을 취급하는 법원의 검사대리직에 취임하여 이후 1650년에 퇴직할 때까지 루앙과 파리를 왕복하면서 창작도 하였고 퇴직 후 파리에 정주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1629년 혹은 이듬해에 희극 <멜리트>를 발표하여 극작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이것은 프랑스 고전 희극의 성립에 공헌한 바 되었다. 1636년말 비희극 <르 시드>의 상연은 대성공을 보아 그 후 <오라스>(1640), <시나>(1641), <폴리왹트>(1641 혹은 42)를 썼다. <르 시드> 이후 이 네 작품은 그의 걸작이라 말해진다. 그 후 많은 작품은 주로 비극으로 썼으며 만년에는 창작력이 쇠퇴하여 시대의 기호에 맞출 수가 없어 극작을 그만 두었다.

그는 항상 죽음을 건 선택에 쫓기는 주인공을 설정하고 급격한 정열의 갈등을 그렸으며 그대로 격언이 될 수 있는 명구(名句)를 섞어 격조가 높은 시구를 구사하여 극의 품격을 높였으며 프랑스 고전 연극의 성립에 매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르 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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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id (1636)

희곡. 코르네유 저.

저자가 30세 되던 해의 아홉 번째 극작품이며 가장 뛰어난 희곡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당시 극계에 있어서 제1인자가 되었다.

중세 에스파냐 대귀족의 청년 로드리그는 부친의 명예를 위해 애인 시메느의 부친과 결투, 그를 죽인다. 시메느는 로드리그에 대한 애정만은 변함이 없으나 그녀도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로드리그의 처형을 국왕에게 청원한다. 이때에 로드리그는 쳐들어 온 모르인(人)의 대군을 격파하고 포로가 된 적왕으로부터 르 시드란 칭호도 받게 되며, 구국(救國)의 영웅이 된다. 왕은 시메느와 로드리그가 결혼할 것을 명한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 하면서 사랑도 버리지 않는다는 긴장과 고귀한 젊음이 전편에 넘쳐 흐른다.

특히 극 가운데 미풍양속을 해칠 점이 있다고 하여 이른바 ‘르 시드 논쟁’이 일어나 리슐리외의 명령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중재한 일은 유명하다.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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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 수학자·과학자·그리스도교 사상가·모랄리스트.

오베르뉴의 클레르몽에서 출생하였고 귀족 출신이다. 3세 때 모친 사별 후 파리로 이주하여 과학자이기도 한 가친의 독특한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비상한 천재의 소질을 발휘하였고 루앙에서 살던 16세 때에 발표한 <원추곡선(圓錐曲線) 시론>(1640)은 ‘아르키메데스 이래’의 업적이라고 칭찬받았다. 계산기의 발명, 진공에 관한 실험 등을 하는 한편 23세(1646) 때 장세니즘 신앙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回心)을 경험하였다. 다음해에 파리로 나와 과학연구를 계속하면서 사교계에도 드나들며 인간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하였다.

1654년 11월 23일 밤 결정적인 회심을 체험하였고 포르 로와얄 수도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에 제수이트파 대 장세니스트의 신학논쟁에 말려 <시골 벗에게 부치는 편지>를 발표하여 전자를 규탄하였다. 이즈음 그리스도교 변증론(辨證論)의 집필에 착수하고 후에 <팡세>로서 간행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를 기록해 두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39년간에 걸친 그의 일생은 병고의 연속이었으며 그와 같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실험적 방법에 의한 근대과학의 형성에 공헌하였고 동시에 냉정한 눈과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인간과 사회를 보아 거기에 궁극적인 선(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신(神)을 향한 길을 설파하였다.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모순을 가차없이 지적하는 태도는 몽테뉴에서 배웠으며 모든 것을 ‘신의 부재’로 설명코자 하였던 데에 모랄리스트를 초월하는 특색이 있다.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한 때문에 오히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평가를 받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주로 실존철학 관점에서 그를 이해하고 있다.

시골 벗에게 부치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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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res ecrites par Louis de Montalte aun Provincial (1656-1657)

서간문 형식으로 된 논쟁의 글. 다른 이름은 <프로뱅샬>. 파스칼 저.

최초에 시골에 사는 친구에게 쓰는 형식으로 썼으나 후에 직접 제수이트파 신부를 상대로 하여 익명으로 발표하였으며 전18편이다. 은총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수이트회 신학과 윤리의 타락을 철저하게 공박하였고 단순 명쾌한 표현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체를 결정하였다고 말한다.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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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sees (1670)

그리스도교 변증론을 목적으로 한 단상집. 파스칼 저.

<파스칼의 사후 그의 유고 중에 발견된 종교 및 다른 제문제에 관한 팡세>가 정식 제명(題名)이다. 미완성인 채로 남은 단장(斷章)을 뒤에 편찬한 것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판본이 편찬되고 있다.

저자가 구상했다고 여겨지는 구성에 따르면 내용은 2부로 대별하는 것이 되어 전반은 ‘신을 갖지 못한 인간의 비참’이며 후반은 ‘신을 가진 인간의 행복’이 설명되고 있다. 인간존재를 불안정한 중간자로 보고 그 모순에 찬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응시(凝視)하여 그와 같은 모순의 해결과 거기에서의 탈출은 성서와 예수를 따르는 길 외에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스도교적 시점에서의 철저한 인간인식은 저자를 근대 최고의 한 사상가로 만들었고 또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등의 명구로서 많은 독자를 얻었다.

프레시오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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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ciosite

17세기 중엽, 정확하게 1650년부터 1660년 사이에 프랑스 상류 사교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언어와 풍속을 극단적으로 세련되게 하려는 사회적·문학적인 운동이다. 이것을 낳은 모체는 1608년경 랑부이에 공작 부인이 파리에서 연 살롱과 오노레 뒤르페(1567-1625)의 소설 <아스트레>(1607-1619)이다. 랑브이에 저택의 ‘푸른 방’은 다시 유명한 인사와 문인이 모여 1630-1645년에 최성기를 맞았고 보아튀르가 활약했다.

프롱드의 난(亂) 후 살롱이 일제히 열렸으며 그 중에서도 수퀴데리 양의 살롱이 유명하였다. 프레시오지테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타인과 구별하려는 엘리트 의식이며, 사교생활에 있어서 여성의 군림, 연애의 이상화, 문학적으로는 미묘한 감정분석과 은유의 사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가끔 예절 법도와 말씨를 고상하게 하려고만 들어 오히려 우습게 되어 몰리에르로부터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뷔를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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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lesque

이탈리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약 1640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신성한 제재(題材)나 고상한 것을 짐짓 비속하게 표현하여 골계한 맛을 내는 문학적 경향이다. 고대의 걸작에 나오는 영웅적 모험을 평범한 모험으로 바꾸는 영웅에게 시골 사투리를 쓰게 하여 소위 패러디라고 하는 문학적 수법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극단적인 세련을 구한 프레시오지테에 대한 반동이며, 고대문학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고전주의에의 반항인 것이다. 처음 뷔를레스크한 시를 쓴 사람은 사라 장이라고 말하지만 스카롱(1610-1660)의 위작 <베르길리우스>가 평판을 불러일으켜 이 취미를 유행시켰다. 뒤에 게 드 발자크(1597-1654)와 보와로에게 공격을 받아 쇠퇴하게 되었다.

라 로시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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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ochefoucauld (1613-1680)

프랑스 모랄리스트.

대귀족의 장남으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한 후부터 사랑과 야심에 찬 모험의 시대를 보낸다. 프롱드의 난에서 반란군을 지휘하다가 실명(失明)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귀부인들과 더불어 사블레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였고 명상과 저작의 생활을 보내어 예리한 인간 관찰의 글인 <맥심>을 남겼다.

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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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xions ousen-tences et maximes morales (1665)

도덕적 격언집. 라 로시푸코의 작품.

“우리들의 도덕은 거의 모든 경우 가장(假裝)한 악덕에 불과하다”란 권두언의 말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저자는 인간의 모든 행위 가운데에서 위선을 지적하였다. 아름다운 감정으로 취급되는 용기·선의·겸손·우정에 대하여도 그 동기에는 자존심과 이해가 얽혀 있다는 엄격한 인생관이 전권에 일관하고 있다.

세비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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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de Sevigne (1629-1696)

프랑스의 서간문학가.

파리에서 출생. 25세 미망인이 된 후 모든 애정을 두 아이에게 바치며 살았다. 1669년에 딸이 그리냥 백작과 결혼하여 2년 후에 남편의 임지인 프로방스로 떠나자 부인은 딸에게 모성애가 넘치는 편지를 써 보냈다. 부인의 편지는 감수성이 예민한 홀로 된 여자의 영혼의 기록으로, 또한 그 시대 귀족사회의 증언으로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파예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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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de Lafayette (1634-1693)

프랑스 소설가.

소귀족의 딸로 파리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랑브이에 저택을 비롯한 당시의 살롱에 출입하여 상류 사교계의 세련된 풍습을 몸에 익혔다. 라파예트 백작과 결혼하여 후에도 남편은 시골에 둔 채 혼자 파리에 살면서 왕세비(王弟妃) 앙리에트 도를레앙의 총애를 받았고 라 로시푸코와 세비네 부인 등과 친교를 맺었다. 작품으로 고전주의 소설의 걸작 <클레브 공작 부인>이 있다.

클레브 공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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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rincesse de Cleves (1678)

심리소설. 라파예트 부인의 작품.

16세기 앙리 2세의 궁정을 무대로 줄거리는 메모를 해두는 형식을 취하면서 전개한다. 클레브 공작과 애정없는 결혼을 한 부인은 무도회에서 궁전 제일의 귀공자 누므르공을 만나 야릇하게 마음이 혼란해진다. 사랑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시골에 은둔하지만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문책당하자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사나이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안 클레브공은 고민 끝에 자살한다. 남편 사후, 부인은 누므르의 구애를 물리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망부에의 정절을 지켜간다.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번민하는 부인의 심리적 갈등을 비장감 넘치게 그린 간결한 표현과 명석한 감정분석으로 프랑스 심리해부 소설의 선구가 된다.

고전주의와 삼위일체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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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主義-三位一體-規則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정의는 동시기 유럽 문예의 바로크 취미와의 상관관계로 근래 더욱 불명확하게 되었다. 광의로 고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그것을 규범으로 하고 문학 제작을 규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그리스·로마의 문학을 모범으로 한 17세기 여러 작가에게 그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예사조로서는 이른바 ‘고전주의’의 기반인 합리주의적 경향이 이미 ‘신구논쟁’에 있어서 근대파의 발생과 연류되기 때문에 일류파(一流派)로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렇다할지라도 균정(均整)을 존중하여 자연스러움을 취지로 하려는 몰리에르, 라신, 라 퐁테느 등 작가의 여러 장르에 있어서 공통된 노력은 프랑스 문학의 고전을 완성하였고 그 집합체에서 16세기 휴머니즘과 다른 문학의 이념이 떠오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전주의의 명칭을 쓸 수 있는 것은 17세기 최고의 장르가 되는 비극에 한하여 샤플랭(1595-1674), 도비냐크(1604-1676)가 규정한 극작법이다. ‘진실함’을 무대의 철칙으로 하여 극의 진행에 대하여 ‘시(時)의 단일’(극중 시간의 경과는 1일 이내)·‘곳의 단일’(극중에는 동일한 장소만 설정된다)·‘줄거리의 단일’(극 줄거리의 통일)이라는 3조건을 부과한 것이다. 이 극작 방식이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의(疑) 고전주의’작품으로 계승되어 결국 비극의 장르를 붕괴시키기에 이르렀다. 고전과 고전주의는 뚜렷이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 퐁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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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de La Fontaine (1621-1695)

프랑스 시인.

샤토티에리에서 출생.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떠나면서 시작에 몰두하였다. 1668년에 <우화>(제1집 1668, 제2집 1678) 제1집을 출판하였다. 후에 사브리에르 부인의 빈객(賓客)이 되어 너그럽고 재치있는 부인의 보호를 받았다. 1887년 ‘신구논쟁’을 맞아 고전파에 가담하여 <위에에게 보내는 글>을 읽어댔다. 1893년 사망했다.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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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ables

라 퐁텐 저작의 우화시. 일부의 제재(題材)를 이솝에서 빌렸다고 하며 동서고금의 우화 중에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먼저 격언 비슷한 말로 시작하여 교훈담을 말하고 최후로 교묘히 도덕으로 유도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개미와 매미> <까마귀와 여우> <떡갈나무와 갈대> 가 있다. 제2집에는 겉으로 은근함을 가장한 궁정이 얼마나 광포한 세계인가를 말해주고 권력의 영예(榮譽)를 추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 등을 동물에 의탁하여 호소하였다.

평생 동안 지식과 지혜와 행복을 구했던 그는 최후의 우화로 은둔생활을 예찬하고 있다. <목동과 임금> <두 마리의 비둘기>

<젖 짜는 아가씨와 호리병> <페스트에 걸린 동물들> <토끼」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몰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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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iere (1622-1673)

프랑스 극작가. 본명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이다.

파리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법률을 배워 오를리앙에서 법학사의 자격을 받았다. 이즈음 연상의 여우(女優) 마들레느 베자르 일가와 사귀어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계에 투신한다. 1643년 ‘성명(盛名)극단’을 결성하여 애인인 베자르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빚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한편으로 샤페르와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와의 교유를 갖고 가산디의 유물론 철학을 접하게 되며, 새로운 문학이론을 연구한다. 1645년 지방공연을 떠난 기간에 이탈리아 희극을 배워 극작을 시작하였다. 1658년에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어전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기적으로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출연할 허가를 얻었다.

1659년 <덜렁쇠>의 성공으로 희극작가의 명성을 높였고 다음해 일단을 데리고 파리 르와이얄 극장에 정착하여 이후 몰리에르 일생을 통한 본거지가 된다. <남편학교>(1661) <아내학교>(1662)의 성공으로 극단(劇壇)에 있어서 지위를 확립하였고, 마들레느의 동생 아르망드 베자르와 결혼을 한다. 1663년에 반대파의 공작에 의하여 ‘희극의 싸움’을 했고 1664년의 <타르튀프>는 교회측의 압박을 받았다.

1665년에 ‘국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얻은 극단을 위하여 <돈 주앙>(1665)를 썼다. <인간 협오자> <수전노(守錢奴)>(1668)를 계속 집필하고 1669년에는 <타르튀프> 상연의 금지령이 해제되어 일반 공개로 대성공을 얻었다.

1670년에는 신경향의 무용희극 <상인 귀족>을 1671년에는 <스카팽의 간계>, 1672년에 <여학사의 무리> 등을 상연하였다. 1673년 2월 17일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를 상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그날 밤 서거하였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 일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하여 1680년 국왕의 명에 의하여 ‘코메디 프랑세즈’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국립극장이 ‘몰리에르의 집’이라 불리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완전한 연극인으로서 몰리에르는 당대의 최대 희극 연기자로 대우를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프랑스 연극사상 최대의 희극작가로 평가되었다.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그에 반하는 것은 골계화하는 태도는 희극의 장르에 있어서 고전주의를 대표하지만 휴머니스트로서의 몰리에르는 세상을 아는 것에 의하여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어 관용(寬容)을 역설하였으며 그 반면에 모든 위선에 대하여 건전한 분노를 터뜨렸다. 거기에 몰리에르 작품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

타르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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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Tartuff (1664)

운문 5막의 희극. 몰리에르 저.

별제(別題)에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인 타르튀프는 신자인 척하는 선량한 오르공과 맞붙어 아내 에르미르에게 호소하여 전재산을 탈취하려 한다. 그러나 간계는 탄로되어 국왕의 권력으로 투옥되었다. 초연(初演)은 베르사유 궁전의 축전에서 있었으며 그때는 3막이었다. 파리에서의 상연은 교회측의 압력으로 금지되어 1669년까지 지연되었다. 루이 14세의 비호가 있었으나 이 탄압에 대한 다음 작품인 <돈 주앙>으로 위선자들에 대한 반격을 가하였다. 희극을 비극과 동렬(同列)에 두려는 몰리에르의 연극이론이 무대 위에서 실증되는 중요 작품들의 제1작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최고의 상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 혐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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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isanthrope (1666)

운문 5막의 희극. 몰리에르 저.

지극히 결벽하고 타협을 모르는 주인공 아르세스트는 사교계의 인기자로 ‘갸랑트리’(부인에 대한 마음가짐)을 좋아하는 셀리메느를 사랑하지만 성격 차이로 끝내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돈키호테를 연상시키는 비극적인 성격희극이다. 이 작품은 몰리에르의 다른 작품에 현저했던 소극(笑劇)적 수법의 자취가 안 보이는 고전주의 희극의 완성을 표시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너무 고급이어서 초연 당시에는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작품에 18세기 드라마의 선구적 경향을 인정하여 주인공을 낭만주의 인간상에 연결지으려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보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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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Boileau-Despreaux (1636-1711)

프랑스 시인·비평가. 파리 중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서 처음에 승직을 지망하였으나 법률을 배웠고 부친의 유산을 받아 20대 초부터 문학에 전념하였다. 풍자시인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1667년 <풍자시집> 7편을 발표한 후 계속 증보(增補)하였다. 한편 고전주의의 이상을 논의하는 라모와뇽의 아카데미에 참가하여 그 영향을 받은 <시법>을 써서 루이 14세에게 인정을 받아 궁정에서 크게 세력을 얻었다. 1677년 라신과 더불어서 국왕의 수사관(修史官)으로 임명되었다. 골계적 서사시 <뤼트랭>(1674-83)은 당시의 문단에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문학사상 점유하는 보왈로의 위치는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의 집대성자로서 후세에 그것을 전했으며, ‘신구 논쟁’에 있어서 고대문학파의 영수로 활약한 사실보다도 동시대의 몰리에르나 라신 등의 고전주의 작가를 강력하게 옹호한 비평가로서 규정지워야 할 것이다.

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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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Poetique (1674)

보왈로 저. 고전주의 미학을 선전하는 4가(歌)로 된 장시(長詩).

라모와뇽의 아카데미로부터 이론의 영향을 받아 문학의 숭고성을 강조하는 한편 ‘진실함’을 기본으로 하는 합리주의적 문학의 이상을 들어 고대문학과 17세기 프랑스 문학의 우열을 논한 ‘신구 논쟁’에 있어서 고대파의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의 기본이 되는 서적으로 후세에 끼친 영향은 유럽 제국의 문학에서 인정되고 있다.

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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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Racine (1639-1699)

프랑스 극작가. 파리 동북 76㎞ 떨어진 페르테 말롱의 중산계급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친과 사별하였다. 조모 슬하에서 자랐고 10세경에 파리 교외에 있는 폴 로와얄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 거주하는 장세니스트 스승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엄격한 교육이라 하는 장세니즘의 숙명관과 또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하다는 고대문학에 관한 교양을 갖추었다.

후에 파리 대학에서 수학하는 한편 자유 사상가와도 사귀어 시작(詩作)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생계의 수단으로서는 승직을 택하여 1660년 남프랑스의 유제스에 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663년 파리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극단 진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1664년 비극 <라 테바이드>가 몰리에르 극단에 의해 상연되고 더욱이 1665년의 비극 <알렉산더 대왕>을 동극단에서 초연한 직후 브르고뉴 극단으로 바꾸어서 공연을 하였다. 폴 로와얄의 옛 스승 가르침에 등을 돌리고 세속적 공명심에 불탔던 라신은 브르고뉴 극단에서 전속작가로 <앙드로마크>(1667), <브리타니퀴스> <베레니스>(1670), <바쟈제>(1672), <미트리다트>(1673), <이피제니>(1674), <페드르>의 비극을 발표하여 극단 제1인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동안 <소송광(訴訟狂)>(1668)이라는 희극 1편이 있다. 그러나 1677년 <페드르> 상연 후에 루이 14세의 수사관(修史官)에 임명된 라신은 궁정인이 되어 극단에서 은퇴하고 또 장세니스트와도 화해를 한다. 만년에는 2편의 종교비극 <에스테르>(1689), <아탈리>(1692)를 썼으나 이는 극단 외에서의 활약이었다.

문예부흥기에 그리스·라틴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약 3세기간 프랑스 연극에 존속한 ‘비극’ 장르에서 정점을 이루는 그의 작품들은 고전주의를 대표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 및 에스파냐의 황금기 연극과 함께 근대 유럽 연극의 세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

브리타니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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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annicus (1669)

운문 5막 비극. 라신 작.

선행작가 코르네이유의 영역(領域)이라 했던 로마사에서 취재한 정치비극이다. 주인공은 제목의 이름과는 달리 황제 네로이다. 모비(母妃)인 아그리피느의 도움으로 왕위계승 싸움에 승리한 네로는 배다른 형제인 브리타니퀴스와 그의 연인 쥬니 사이를 이간하고 남몰래 쥬니를 사랑하자 아그리피느의 제지도 듣지 않고 간신 나르시스가 시키는 대로 브리타니퀴스를 독살해 버린다. 쥬니는 절망 끝에 신전의 무녀(巫女)가 된다.

브르고뉴 극단에서 첫 공연을 한 다음해(1770)에 출판되었고, 그 서문은 단순한 구성에다 정념의 비극이라는 라신의 극작법을 선언한 취지가 포함되어 중요시되고 있으며 괴물 네롱(네로)의 ‘태어나는’ 모습을 극화했다고 하는 한마디가 해석상의 문제가 되었다. 코르네유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공이 라신의 지위를 극단에서 제1인자로서 확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페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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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dr (1677)

운문 5막의 비극. 라신 작.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 제재를 취한 라신의 대표적 작품이다. 전설의 왕 테제가 원정을 떠난 후 왕비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연모하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어 테제가 죽었다는 오보(誤報)에 정신을 가누지 못해 결국 사랑을 고백한다. 그 후 귀국한 테제에게 페드르의 유모는 이폴리트 편에서 페드르를 유혹했다고 호소한다. 노한 테제는 왕자(이폴리트)를 추방하고 신벌이 내리도록 빈다. 페드르는 자결하고 이폴리트는 부왕이 금한 애인 아리시와 도망을 쳤으나 해신(海神)에 의하여 비통한 죽음을 당한다. 이 아리시의 설정은 라신의 창작이다.

주인공은 죄를 의식하면서도 정열이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어 몸을 망친다. 신의 은총이 없는 인간의 비참을 말하였고, 장세니스트의 교리와 연결되는 이 작품은 그리스적 숙명관과 통하고 있다. 라신의 시구는 완전한 비극미(悲劇美)를 표현하여 프랑스 연극사상 최고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라 브뤼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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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ruyere (1645-1696)

프랑스 모랄리스트.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변호사와 세무관(稅務官) 등의 직에 있었으나 직무에 등한한 채 독서를 일삼는 생활을 보냈다. 후에 콩데공(公) 손자의 교사가 되어 콩데가(家)에서 기숙하면서 사색과 독서의 나날을 보내며 귀족생활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1688년 당시의 풍속과 사람들의 성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레 카라크테르>를 출판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레 카라크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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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Caracteres ou les moenurs de cesiecle (사람도 가지가지)

라 브뤼예르 작품. 수상(隨想).

처음에는 그리스 철학자 테오플라스토스의 <성격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자작의 <사람도 가지가지>를 부록으로 첨가한 형식으로 발표했으나 후에 그가 그린 초상(肖像)이 인기를 불러일으켜 양이 증가하였다. 예리한 관찰로 당시의 풍속을 풍자적으로 취급하였고 성격을 교묘하게 그렸다.

페늘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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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

ois de Salignac de La Mothe-Fenelon (1651-1715)

프랑스 성직자.

페리고르 출신. 왕손(王孫)의 교사가 되어 그의 교재로서 저작한 <텔레마크의 모험>은 고전주의 걸작의 하나며 루이 대왕에 대한 비판과 퀴이에티즘 옹호로 미움을 받아 캉브레에 은퇴하여 거기서 죽었다. <여자교육론>(1687), <아카데미에의 서간>(1716) 등의 작품이 있다. 그는 고전주의자이지만, 자유스러운 정신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다음 대(代)를 예고하고 있다.

텔레마크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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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Aventures de Telemaque (1699)

교육소설. 페늘롱 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취재했으며, 젊은 텔레마크는 스승 멘토르(실은 여신 미네르바)에게 인도돼 아버지 율리시스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이것으로 왕손인 브르고뉴공(公)에게 도덕적 정치적 교훈을 주는 교재로 삼고자 했으나 루이 14세는 자기에게 가하는 비판이라 하여 노여움을 사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유연한 문체 때문에 고전문학에 있어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신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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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舊論爭

1687년 페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근대시인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 선언한 시를 발표해서 약 30년에 걸친 본격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르네상스 이래의 고대인 숭배에 대한 반역이며 또한 이것은 17세기 과학의 진보와 대작가의 배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논쟁 그 자체는 유치하지만 정신의 무한한 진보사상에 의하여 18세기의 시작을 알린다. 근대파에는 퐁트넬이 있고 고대파에 보왈로, 라 브뤼예르 등이 있다.

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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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Perrault (1628-1703)

프랑스 작가. <콩트>를 출판. 형제들과 함께 문학상의 적인 보왈로와 논쟁을 하였다. 재상(財相) 콜베르 아래에서 서기로 근무하였던 그는 문학가이기보다 행동가였다.

1670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루이 14세의 세기>(1687)는 화려하게 '신구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휴머니스트이며 자유사상가인 그는 전통적 보수파에 대하여 근대를 지지하여 생기있는 기풍을 가져오게 하였다.

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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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

페로 저. 동화집.

얼핏보면 부질없는 공상적 이야기이나 유용한 도덕이 포함되어 즐거운 가운데 배우게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인 일을 매우 쉽게 행할 수 있어서 아이들을 열중케 하며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한 풍자와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푸른 수염> <장화를 신은 고양이> <잠자는 숲의 왕녀>

등이 있다.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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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Bayle (1647-1706)

프랑스 사상가.

신교도 탄압을 피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역사비판사전(辭典)>(1695-97)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사상을 적용하여 주로 종교상의 편견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 것이다. 18세기의 작가와 사상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18세기의 문을 연 사상가로 보고 있다.

퐁트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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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 (1657-1757)

프랑스 작가·사상가.

비극과 시에 손을 댔으나 부진하였고, <세계의 다수성에 관한 문답>(1686)과 <신탁사(信託史)> 등에 의하여 또한 약 반세기 동안의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과학과 합리사상을 경묘한 붓에 실어 보급한 공적이 크다.

‘신구 논쟁’에서는 근대파를 지지하였다. 베일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사상가.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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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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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17세기에 완성의 영역에 도달한 고전주의 문학 전통은 18세기에 계승되어 내려온다. 가령 마리보의 여러 작품과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의 간결한 문체, 그리고 후자의 비극작품 등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고전주의는 17세기와 상이한 점이 꽤 많이 나타나고 또 전 세기의 수준을 능가하는 작품도 나오지 않았기에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라 말한다.

한편 이 세기에는 고전주의에 대체할 새로운 문학도 생겨났다. 절대 왕권제도를 확립하고 고전주의 문학의 비호자이기도 했던 루이 14세가 1715년에 죽은 후에는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를 이루어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하였고, 국제교류도 빈번하게 되어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도 점차로 대담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과학의 진보가 이성주의와 일반적인 진보의 사상을 재촉하였으나 이 징조는 이미 전 세기 말의 ‘신구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정을 중심으로 해서 번영하여 질서·균형·절도를 중히 여긴 고전주의 문학은 시대의 요구를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회의(懷疑)를 알고, 뉴턴의 과학과 로크의 경험주의를 배운 작가들은 ‘이성(理性)’과 ‘진보’를 모토로하여 문학 속에서 절대왕정과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일부는 유물론이나 무신론에까지 줄달음을 쳐갔다. 이른바 계몽(啓蒙)사상과 계몽문학이 개화(開化)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특히 18세기의 후반에 더욱 철저하다. 그들을 철학자라 부르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사색이나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을 의미 하지는 않으며 정치·경제·종교·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행동적인 문학자를 가리키고 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는 이러한 계몽적 동향의 일대 기념비이다. 그들의 노력은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프랑스 혁명에 의한 구(舊)제도 타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한편 이 세기에는 인간의 정열과 감수성을 존중하는 문학도 나왔다. 세기 전반에 프레보는 일찍이 정열적인 소설을 썼으며, 후반에는 유물론자 디드로가 한편에서 감수성을 예찬했고 루소의 연애소설은 독자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다. 이성주의에 만족할 수 없었던 독자들은 이 밖에도 영국이나 독일 등의 로맨틱한 문학으로 갈증을 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낭만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르별(別)로 보면 서정시는 매우 부진하였다. 셰니에는 유일한 예외지만, 그의 작품도 19세기가 되어서야 인정을 받았다. 고전주의의 영향을 덜 받은 소설은 발달하였는데 특히 풍자소설은 우수한 것이 있다. 라클로나 사드 등의 소설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 의미에서 주목되고 있다. 극에는 고전극에 대한 디드로의 시민극(市民劇) 제창이 탁견(卓見)이었으나 실작(實作)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보마르셰가 프랑스 혁명 직전에 독특한 작풍으로 인기를 모았다.

르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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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Rene Lesage (1668-1747)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그의 이전에는 귀족이 아닌 문학자는 국왕이나 귀족의 비호에 의하여 생활을 했으나 그는 프랑스 최초의 직업작가로서 문필로 가계를 꾸려나갔다. 에스파냐 문학에서 구상한 작품이 많은데 <절름발이 악마(惡魔)>(1707) 특히 <질브라스 이야기>에서 풍속묘사로 사실소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풍속희극 <튀르카레>(1707)도 걸작이다.

질 블라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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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istoire de Gil Blas de Santil-lane(1715-1735)

장편소설. 르사주 저.

17세로 고향을 떠난 질 블라스가 산적에게 사로잡힌다든지 여러 부잣집에 머슴이나 집사(執事)로 일을 해 나가다가 이윽고 총리 비서에까지 출세한 뒤에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동안의 갖가지 경험과 기복을 그린 입신 출세 이야기이다. 에스파냐 악자소설(惡者小說)의 흐름을 본따서 무대는 에스파냐로 하여 당시 프랑스 사회의 풍속을 정확하게 묘사한 근대 사실소설의 선구로서 중요한 작품이다.

생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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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de Rouvroy, due de Saint-Simon (1675-1755)

프랑스 회상록(回想錄) 작가.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의 아들이었으나 군인이나 외교관이 되겠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23년 궁정과 인연을 끊고 물러난다. 이미 19세부터 자기의 인상을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당지오의 일기를 읽은 것이 방대한 회상록을 엮는 계기가 되었다. 편견에 찬 기술이기 때문에 사실(史實)로서의 신뢰도는 낮으나 생생한 묘사와 예리하고 과격한 문체로 1829-1830년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에 낭만주의자들에게 널리 환영을 받았다.

마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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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de Mari-vaux (1688-1763)

프랑스 극작가·소설가.

파리에서 출생했다. 유명한 살롱에 출입하여 퐁트넬 등과 교우를 맺고 ‘신구 논쟁’에서는 근대파로 활약했다. 1720년 초연된 <사랑에 닦인 아를르갱>으로 성공을 거둔 이래 <사랑의 기습>(1722), <사랑과 우연의 장난> <거짓 고백>(1737) 등의 걸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들은 모두 연애심리 희극으로 사랑의 시작부터 성립까지의 심리가 마리보다주(마리보 취미)라는 우아하고 세련된 대사(臺辭)로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라신이 연애심리 비극의 제1인자라 한다면 희극에 있어서 그 지위를 차지할 사람은 마리보이며 이 전통은 뮈세와 포르토리쉬(1849-1930)에게 이어 나간다. 또 소설로는 모두가 미완성이지만 근대소설의 성립에 공헌한 <마리안느의 일생>과 <벼락부자가 된 농군>(1734-1735)이 있다. 만년은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져 별로 각광을 받지 못했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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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Jeu de l'amour et du hasard (1730)

마리보의 3막 산문 희극.

귀족의 영양(令孃) 실비아와 그 구혼자 드랑토가 만선의 자리에서 서로 상대를 잘 관찰하기 위하여 각각 시녀와 시동(侍童)으로 변장한 때문에 여러 가지 우스꽝스러운 차질이 생겼으나 결국 경사스럽게 결합한다. 줄거리는 부자연스럽지만 남녀간의, 특히 여성의 미묘한 연애심리가 마리보다주라 일컬어지는 세련된 대사로 멋있게 표현되어 있다.

마리안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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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e de Marianne (1731-1741)

고백체 형식의 미완 소설. 마리보 저.

가난한 고아 마리안느가 파리에 나와서 늙은 위선자의 유혹을 피해 청년귀족 바르비드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나, 여인의 변심으로 괴로워하는 데에서 이야기는 중단되어 있다. 풍속묘사가 우수한 부분도 있으나 전체로 보아 여성심리가 섬세하고 정확하게 분석되어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몽테스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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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de Secondat 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 계몽사상가.

남프랑스 보르도 근교에서 태어나 백부(伯父)의 뒤를 이어 젊어서부터 보르도 고등법원장이 되었다. 고전문학과 가까이 하면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721년 익명(匿名)으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발표하여 뛰어난 문명비평으로 172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고등법원장의 직에서 물러나 유럽 제국을 두루 여행하였다. 귀국 후 먼저 <로마인 성쇠 기원론>(1734)을 출판하고 이어서 <법의 정신>(1748)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내용에는 법이나 정치제도가 그때까지 생각되어 온 바와 같이 전세계에 공통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풍토와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이 상대적인 관념은 19세기 사회과학과 낭만파(派) 문학 이론의 길을 열었다. 또 거기에 소개되어 있는 영국류(流)의 삼권분립(三權分立)과 정치적 자유와 노예제도 비판 등은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페르시아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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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res Persanes (1721)

서간체의 풍자소설. 몽테스키외 저.

파리에 온 페르시아의 고관이 자기 할렘(後宮)에 있는 애첩(愛妾)의 부정을 알고 귀국을 결의한다는 천일야화풍(千一夜話風)의 호색취미를 하나의 중추로 하면서 그와 그의 벗이 이국의 풍물을 친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된 문명비판의 글이다. 파리 시민 각층의 생태와 커피숍의 번성함 등 섭정시대의 풍속묘사와 교회에의 비판 및 정치적 고찰 등 그 대상은 다양다기하다. 편견에 현혹되지 않는 이국인 견문기의 형식은 18세기 풍자문학의 전형이 되었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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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taire (1694-1778)

프랑스 계몽사상가.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르에.

파리의 공증인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자유사상가와 사귀었다. 1717년 섭정을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 왕(王)>(1718)의 대성공으로 문명을 날렸다. 그 후부터 볼테르라 이름하였다. 한 귀족으로부터 모욕을 받고 또 그의 책동에 의하여 부당하게 투옥이 되지만 영국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전제정치의 악폐(惡弊)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가지고 로크와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정신은 더욱 강고(强固)히 되었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서사시 <앙리아드>(1728)를 출판하였다. 귀국(1729)하여 셰익스피어극(劇)의 영향이 짙은 비극 <자이르>(1732)에 이어서 발표한 <철학서간>이 당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그의 애인인 사틀레 후작 부인의 영지(領地)에 가서 저술과 연구의 10년 세월을 보냈다. 한때 프랑스 궁정의 역사 편찬관이 되고 이어 프리드리히 왕(王)의 초청으로 프로이센에 가서 <루이 14세의 세기>(1751)를 완성하고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프랑스령 근처인 페르네에 정주하였다.

진보파의 영수로서 ‘페르네 장로(長老)’라 불렸고 반(反) 봉건, 반(反) 교회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광신(狂信)이 원인이 된 부정재판을 탄핵한 카라스 사건 등의 실천운동은 유명하다. 그 소산인 <관용론(寬容論)>(1763)을 비롯하여 사서(史書) <풍속시론(風俗試論)>(1756), 사상소설<캉디드> <철학사전>(1756)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생전에 많은 비극을 발표하여 고전 비극의 계승자로서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자디그>(1747)나 <캉디드> 등 사상소설과 그의 저널리스틱한 계몽활동이 본령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철학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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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res anglaises (1734)

볼테르 저.

다른 이름 <영국에서의 편지>. 영국의 문물을 서간형식으로 소개한 작품이다.

망명처인 영국에서 귀국한 그는 끈임없이 현실의 프랑스 사회 비판을 염두에 두고 영국의 종교·정치·학술을 다소 이상화하여 기술한 것이며 부록의 제25신(信)에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보이는 염세적인 사상을 과격하게 공박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에 큰 충격을 주어 분서(焚書)에 처하게 되어 볼테르는 파리를 탈출했다.

캉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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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ide (1759)

사상소설. 볼테르 저. 익명으로 발표하여 곧 금서처분을 받았다. 부제(副題)는 <낙천주의>이다.

불행한 체험을 계속하면서 사회의 불합리와 비참한 현실을 목격해 온 작자가 “무릇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라고 한 라이프니츠의 사상과 이 세상에 신의 은총이 있다고 하는 교회를 비판 공격한 것이다.

이름과 같이 극히 순진한 캉디드는 팡그로스 선생의 낙천적인 사상을 마음 깊이 신봉하나 조카인 퀴네공드를 사랑한 때문에 백부의 성에서 쫓겨난다. 무의미한 전쟁·대(大)지진·종교재판에 의한 화형·살인·몹쓸 병마 등, 이상향 엘도라도를 제외한 어느 곳에서나 스승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현실과 부딪힌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다만 정원(庭園)을 갈지 않으면 안 된다”란 최후의 말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인간에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사회는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작자의 쓰디쓴 유머가 빠른 템포의 간결한 명문이 충만한 풍자문학의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

프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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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ine Francois Prevost (1697-1763)

프랑스 소설가. 통칭하여 아베 프레보라 한다.

북프랑스의 피카르디에서 출생. 승직과 군직을 번갈아 맡는다든지 네덜란드와 영국에 출분(出奔)하는 등 대단히 변천 많은 일생을 보냈다. 수많은 소설을 쓴 이외에 신문 <푸르 에 콘트로>의 발간과 리처드슨의 소설 <파멜라>의 번역 등 영국을 소개한 공적도 있다. 그의 이름을 불멸하게 한 것은 한 편의 소설 <마농 레스코>이다.

마농 레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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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e du chevalier Des Grieux et de Manon Lescaut (1731)

프레보 저.

작가의 반(半) 자서전적 장편 소설인 <어느 귀인의 비망록>에 하나의 삽화(揷話)로서 최종 제7권에 수록되어 있다.

귀족 출신인 순진한 청년 데 그리외는 아름다운 마농를 보고 천눈에 반하여 두 남녀는 파리로 달아난다. 여자의 배반으로 아버지에게 끌려온 데 그리외는 성직자가 될 결심을 하지만 재차 그녀를 만나 명예도 출세도 잊어버린다. 그녀도 데 그리외를 사랑하지만 가난을 싫어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벽을 그녀도 어쩔 수 없다. 생활이 궁해진 그들은 계속해서 나쁜 짓을 거듭하며 투옥도 당하게 되어 결국 마농은 신대륙으로 쫓겨가게 된다.

데 그리외도 동행을 하지만 마농은 죽어버리고 그는 홀로 프랑스로 돌아온다. 과장하지 않고 줄줄이 엮어가는 이 소설은 정열의 밑바닥까지 불태운 힘과 공포를 묘사한 유럽 초유의 소설이며 이성보다 감정을 우위에 둔 점으로 루소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다.

뷔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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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

프랑스 박물학자·문학가.

약 50년간 왕립식물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역작 <박물지(博物誌)>(1749-1788) 기획에 전념하였다. <박물지>는 문장의 매력과 함께 문학에 과학이라는 신영역을 도입한 것으로서 문학사상 중요시되고 있다. <문체론>(1753)의 “글은 사람이다”란 유명한 말은 저작의 내용, 즉 지식·사실·발견 등은 저자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문체(文體)야말로 저자의 독자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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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제네바 태생의 프랑스 사상가·작가.

중산계급의 시계점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생후 곧 어머니를 잃었다. 10세에 아버지가 가출하고 형도 얼마 뒤에 행방불명이 된다. 루소 자신도 15세 때에 더부살이하던 집을 뛰쳐나와 방랑생활을 했다. 19세에 샹베리의 바랑스 부인의 비호를 받아 샤르메트에서 그녀와의 동거생활을 시작한 뒤 스스로 교육을 결의하여 수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파리에 나와 디드로 등의 문학가와 교우하고 상류사회에도 출입하였지만 대도시의 생활과 친숙해질 수는 없었다. 하숙집 식모였던 테레즈 르 바스르와 교분을 맺어 결국 평생을 같이 하였으나 태어난 자식은 다섯 모두를 버렸다.

그동안에 1749년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하여 처음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논문 <학술예술론>(1750)에는 후에 일생의 테마가 된 자연사상―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며, 사회의 안에서 일그러진 인간성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의 싹이 뜨고 있다. <인간불평등 기원론>(1755)에는 이 사상이 한층 심화되어 있다.

루소의 이름은 <학문과 예술론>이란 논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연한 계기로 집필하였다. 방센의 감옥에 갇혀있는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는 도중, 잡지에 게재되어 있는 현상논문의 제목 <학문과 예술의 진보는 풍속의 부패에 기여했는가, 아니면 순화(純化)에 기여했는가>를 본 데서 비롯된다.

후에 루소는 이때의 일을 회상하며 “나는 다른 세계를 보고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문과 예술론>에서 취한 루소의 입장은 그때까지의 루소의 생활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54년 제네바로 돌아가 시민권을 회복하고 신교도가 되었다. 1754년 <백과사전> 제5권의 <정치경제> 항목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후일 <정치경제론>으로 58년 독립하여 간행되었다.

루소는 자기 생활과 사상을 일치시키려고 도시생활을 버리고 파리 교외에 박혀 저작에 전념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대작(大作)을 써 1761년에는 소설 <신(新) 엘로이스>를, 이듬해에는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에밀>을 내놓았다. 이 세 저작은 각각 가정의 생태(生態)와 사회의 형태를 추구하여 새로운 인간 육성을 논하고 있다. 루소는 정식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버렸으며 실제적인 사회문제에도 발언을 삼갔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커다란 모순을 느낄 수 있으나 원칙론으로서 읽는다면 거기에 많은 시사(示唆)를 찾아 볼 수 있다.

루소의 <에밀>은 교육에 대한 생각을 개혁시킨 혁명적인 교육 소설이며, 그의 자서전 <참회록>은 자신을 철저하게 드러내 놓은 고백으로서 근대 문학의 깊은 원천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아이들 속에서 어른을 찾고 있어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즐거움,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본능을 보살펴주도록 하라. 입술에는 언제나 웃음이 떠올라 있고, 영혼은 언제나 평화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회한의 정에 젖지 않는 자가 있을까. 여러분들은 왜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로부터 오래지 않아 사라져 갈 기쁨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에밀>을 쓴 것이었다.

<에밀>은 그의 종교적 사상이 당국의 노여움을 사서 책이 불태워졌고 루소는 체포를 피해 각지를 전전하다가 1770년 겨우 파리에 돌아온 후 근교의 엘므농빌에서 살다가 죽었다.

사후 출판된 자서전 <참회록>은 방랑 중에 쓴 것이다. <참회록>이후 자기 변호의 작품인 <루소는 장자크를 재판한다>(1780-1782),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1782)이 있다.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사회사상 및 계몽사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작품이지만 <신(新) 엘로이스>나 이들 자서전적 작품도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新) 엘로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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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ou la Nouvelle Heloise (1761)

루소의 서간체 장편소설.

원제(原題)는 <줄리 혹은 신 엘로이스>이며 귀족의 딸 줄리와 평민출신 가정교사 생푸레의 사랑 이야기. 무대는 레반 호반. 제목은 중세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스가 주고받은 서간에서 딴 것이다. 중년의 루소가 젊은 두드트 부인에게 보낸 열렬한 사랑이 소설의 뒷받침이 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정열적이며 참신한 이 소설은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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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Confessions (제1부 1782, 제2부 1789)

루소의 자서전이며 사후에 출판되었다.

<참회록>이라 제목이 되어 있는 바와 같이 단순한 경력의 글이 아니다. 집필은 1765년부터 1770년경이며 탄생에서 생피에르 퇴거까지의 제1부는 목가(牧歌)적인 밝음이 넘쳐 있지만 파리생활에서 만년의 유람생활을 그린 제2부는 박해에 대한 망상(妄想)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고 때로는 병적이라고도 여겨진다. 전편을 흐르는 가련하도록 적나라한 자아 표백(表白)은 ‘자아의 해방’이란 점으로 루소를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게 하였다.

문학작품성으로도 소설 <신 엘로이스>보다 현대에 와서 훨씬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 권두에는 전례도 없고 또한 모방할 사람도 없다는 자부가 적혀 있지만 실제에는 그에게 배워 많은 고백문학(告白文學)이 나왔고 이것이 근대문학의 하나의 큰 요소가 되었다.

디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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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s Diderot (1713-1784)

프랑스 계몽사상 문학가·철학자.

동프랑스 랑그르 출생. 파리 대학에서 고학으로 문학과 철학에 열중하였으며 영국의 철학자 샤프트베리의 <진가(眞價)와 미덕에 관한 시론(試論)>번안(飜案)(1745)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활발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노력가이며 <백과전서>의 편집자로 활약하는 한편 다채로운 저술활동을 하여 탄압과 박해에도 굽히지 않고 계몽운동을 계속했다. 저작의 대부분은 생기있는 대화체로 쓰였고 내용도 대담해서 그의 생전에는 사본으로 두루 읽혔으며 사망 후에 출판된 것이 많다. <철학적 사색>(1746), <맹인서간>(1749),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화>(1769) 기타 많은 철학논문에는 독자적인 무신론(無神論)과 유물론을 주장하였으며, <수녀(修女)>(1760-61),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 주인> 등 현실주의적인 풍자소설도 우수하다. 또 <연극론>(1758) 등에는 고전극의 규칙을 깨뜨려서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시민극’의 창조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문예론 <리처드슨 송(頌)> 등에서 감수성을 예찬한 것과 같이 낭만주의에 선행한 것이며 또 미술전의 비평문집 <살롱>(1759-81)은 근대미술 비판의 효시가 되어 있다.

라모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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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Neveu de Rameau (1762-1779 집필)

대화체 풍자소설. 디드로 작.

어느 철학자(디드로 자신)와 시니컬한 방랑 음악가인 장 프랑수아 라모(유명한 음악가 라모의 조카)의 기지(機知)가 넘치는 대화이다. 몸짓 손짓을 섞어 익살스러운 말 가운데 예술·사상·도덕 등의 날카로운 고찰이 포함되었고 또 현실사회의 통렬한 비판과 풍자가 있다.

당시 백과전서파의 강력한 논적(論敵)인 파리소와 프레롱 부자(父子)를 내리치고 더욱이 권력자와 부자가 물심양면으로 부패 타락한 점을 리얼하게 묘사하여 혁명 전 프랑스 사회의 선명한 풍속화가 되고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 라모’라고 불리어진 실재의 인물을 개성적인 전형적 인물로 형상화한 데에 성공한 이 소설은 작자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괴테의 독일어 번역판에 의해 알려져 있다가 19세기 말에 자필 원고가 헌 책방에서 발견되었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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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le Fataliste et son Maitre (1773-1774 집필)

대화체 풍자소설. 디드로 작.

일종의 여행기로서 일관된 줄거리는 없이 연속된 삽화로 되어 있다. 종복인 자크와 주인이 주고받는 활발하고 우스운 의논에는 당시 사회와 정치, 도덕과 풍속에의 예리한 풍자와 비판이 있다. 1785년 실러가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796년에 초판이 나왔다.

백과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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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科全書家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중심으로 <백과전서>에 협력한 철학자들이다. 협력이라 해도 순조롭지는 아니하여 몽테스키외는 한 항목만 쓰고 병사하였고, 뷔퐁은 기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달랑베르와 볼테르는 도중에서 손을 떼고 루소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집필자는 그 밖에 케네, 라 콩다미느, 드르바크, 마르몽텔, 그림, 튀르고 등이 있다.

이성주의로 일관하여 구(舊)제도에 비판적인 <백과전서>는 당연히 궁정과 교회측에 의해서 적대시되었으며 당국의 탄압과 협력자의 이탈 등의 악조건하에서도 사전의 간행이 이루어진 것은 20여 년에 걸친 디드로의 분투 노력의 결정이었다. 더욱이 도중에서 편집에 참가한 조쿠르의 헌신적인 노력과 출판을 바랐던 구독자층의 지지도 빠뜨릴 수가 없다. 사전은 널리 퍼져 백과전서가들의 계몽사상을 보급코자 한 노력은 큰 성과를 올렸다.

보브나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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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 de Vauvenargues (1715-1747)

프랑스 문학자·군인.

외교관의 영광을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건강을 해쳐 사색의 생활에 들어가 빈곤 가운데 요절하였다. 이러한 실의에도 불구하고 <사색과 잠언(箴言)>(1746)은 염세감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신에게도 의존치 않고 인간의 존엄만을 믿어, 행동을 칭찬하며 심정의 존귀함을 말하고 있다.

달랑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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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de Rond d'Alembert (1717-1783)

프랑스 과학자·철학자.

특히 수학에 뛰어나 1741년에 과학 아카데미에, 1754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맞이한 바가 되었다. 디드로와 같이 <백과전서>를 편집하여 서문과 그 밖의 것을 집필하였다. 서문에서는 인류가 지식을 획득하고 과학이 진보한 후를 개관하고 있다. 제7권에 쓴 제네바 항목은 루소와 백과전서가들의 절연의 단서가 된 것으로 문학사상 유명하다.

보마르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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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

프랑스의 극작가.파리 시계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처세술이 능하여 궁정에 출입하면서 많은 일에 손대어 거금을 쌓아 귀족신분까지 손에 넣었다. 또 큰 소송사건에 관계하고 미국의 독립운동가에게 무기를 수출하여 볼테르 전집의 간행을 기도하는 등, 그의 일생은 매우 활동적이었다. 명작 <세빌랴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도 이러한 그의 재기(才氣)와 활동력의 한 표현이다.

세빌랴의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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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abier de Sevilleiou, La Precaution inutile (1775)

보르마셰의 희곡.

무대는 에스파냐. 초연은 5막이었으나 평이 좋지 못해 기민한 작자는 곧 4막으로 고쳐 좋은 평을 받았다. 세빌랴의 이발사 피가로는 옛 주인 알마비바 백작이 고아인 처녀 로지느에 바치는 사랑을 거들어 로지느와의 결혼을 꾀하는 늙은 후견인 바르트르를 속여 두 남녀를 결혼시킨다는 이야기이다.

피가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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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riage de Figaro (1784)

보마르셰의 희곡. <세빌랴의 이발사> 후일담.

피가로는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느가 결혼을 하게 한 뒤에 백작의 종이 되었고 백작은 얼마 후 로지느에 싫증을 느껴 하필이면 피가로의 연인 쉬잔느를 사모한다. 머리도 행동력도 백작보다 우수한 피가로는 교묘하게 백작을 물리쳐 쉬잔느와 결혼한다.

작자는 피가로의 입을 빌어 거침없이 구제도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자유를 요구한다. 상연은 금지되었으나 굽히지 않고 3년 뒤에 상연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솜씨있는 구성과 기지와 상쾌함을 가하여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대담한 발언이 민중의 요구와 일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민중에 대한 봉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없으며 수년 후에 일어난 대혁명에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문학사적으로는 디드로의 시민극 계보에 속하지만 피가로라는 인물은 전혀 독창적이어서 비류(比類)를 찾을 수 없다.

레티프 드 라 브르통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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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Restif de La Bretonne (1734-1806)

프랑스 소설가.

부르고뉴의 농가에서 태어나 오세르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파리에 나와 방탕무위한 생활을 보냈다.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 <타락한 농사꾼>(1775) 이후 인기를 얻었다. 그가 쓴 작품은 총계 200권을 넘으며 당시 풍속의 기록으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우리 아버지의 일생>(1779), <니콜라 씨>(1794-1797) 등이 유명. 사실주의의 선구로서 후에 발자크와 졸라의 문학을 예시(豫示)해 주고 있다.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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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Henri Bernardin de Saint-Pierre (1737-1814)

프랑스 소설가·박물학자.

르아브르 출생. 본래 몽상적이어서 청년시대의 태반을 여행으로 보냈다. 1768년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프랑스 섬(지금의 모리셔스 섬에 가서 2년 이상을 체류했다. 그 후 파리에서 루소와 친교를 맺었다. <자연의 연구>(1784)로 명성을 얻어 식물원장이 되었다. 다만 감상적인 소설 <폴과 비르지니>에는 루소의 낭만주의 영향이 특히 농후하고 또 그의 이국(異國) 취미는 후에 유행할 실마리가 되었다.

폴과 비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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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et Virginie (1787)

전원시라고도 할 만한 중편소설.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작.

<자연의 연구>(1784)의 한 삽화(揷話)로 쓰인 소설. 이야기의 무대는 인도양 위의 고도 프랑스섬(지금의 모리셔스섬). 아름다운 자연의 품속에서 자란 순정의 소년 폴과 소녀 비르지니의 가련한 사랑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자연묘사와 신선한 이국정취가 극단적인 쾌락추구와 과도한 지적 생활에 피곤해 있던 당시의 사회에 애호되었으며 샤토브리앙을 위시하여 뒤의 낭만파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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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quis de Sade (1740-1814)

사디즘이란 용어로 알려진 프랑스 작가이며 사상가.

유서 깊은 귀족의 장남으로서, 파리에서 태어나 군직에 있으면서 7년 전쟁에도 참가하였다. 1763년에

결혼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방탕과 독성(瀆聖)의 죄로 투옥되었으며 이후 열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옥을 전전하면서 보내게 되었다. 1790년 대혁명 덕으로 석방되어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한 지구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혁명에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다. 얼마 뒤 온건주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테르미드르의 정변(政變)으로 겨우 단두대를 면했다.

방대한 소설·콩트·희곡을 썼으나 특히 <소돔의 120일>(1731-1735), <알리느와 발쿠르>(1795), <쥐스티느 또는 미덕의 패배>(1791), <신(新)쥐스티느>(1797), <줄리엣 이야기 또는 패덕의 승리>(1797) 등의 소설이 유명하다. 오랜 동안 변태성욕의 대명사로서 또한 터무니없는 성묘사 때문에 스캔들과 검열의 표적이 되어왔으나 금세기 초에 아폴리네르가 재평가한 이래 작품의 문학성과 사상성은 근년에 와서 특히 인정되어졌다. 이상(異常)임에는 틀림없으나 성을 통하여 기성의 종교·사회·도덕에 철저한 비판을 가한 유물론자이며 개인주의자라 할 수 있다.

샹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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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de Chamfort (1741-1794)

프랑스 모랄리스트.

클레르몽페랑 근처에서 사생아로 출생했다. 파리에 나와 특히 극작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1781)이 되었다. 후에 대혁명기의 논쟁에 참가하고, “대저택에 투쟁을, 오두막집에 평화를”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후 공포정치하에서 박해를 받아 자살을 꾀하다가 그 상처로 죽었다. 유작 <성찰·잠언·일화>(1803)는 그의 신랄한 정신과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라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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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Choderlos de Laclos (1741-1803)

프랑스 군인·소설가.

아미앵에서 소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병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서 시골의 주둔지를 전전했다. 그러는 중에 쓴 <위험한 관계>는 당시 퇴폐한 귀족사회를 충실하게 묘사한 풍속 심리소설이며 그는 이 한 작품으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외에 단시(短詩), 희가극(喜歌劇), 다수의 논문 등이 있다. 혁명기에 정치활동을 위해 한동안 군무(軍務)를 떠났었으나 후에 집정관 보나파르트의 지우(知遇)를 얻어 소장으로 승진, 이탈리아에 주둔 하던 중 타란토에서 병사했다.

위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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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Liaisons Dangereuses (1782)

서간체 소설. 라클로 작.

소설에서는 파리가 무대로 되어 있으나 현실의 소재는 작자가 주둔하고 있었던 그루노블의 사교계에서 얻었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은 독부(毒婦) 멜투유 후작 부인과 방탕아 발몬 자작의 유혹술(誘惑術)의 분석이다.

당시의 퇴폐적인 귀족사회의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에 대한 작자의 냉철한 관찰안(觀察眼)은 때로는 전율감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특히 섬세한 심리분석과 미리 계산된 문체가 뛰어난데 어떤 의미에서는 스탕달의 <적과 흑>의 예고라고도 할 수 있다.

셰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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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Ch

nier(1762-1794)

18세기 프랑스의 시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출생. 대혁명 때에 자코뱅과 대립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시는 그리스 서정시를 모방하여 청명하고 전아(典雅)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목가집> <비가집>, 그리고 옥중에서 쓴 격렬하고 뛰어난 <풍자시> 등. 대부분은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후에 낭만파나 고답파(高踏派) 시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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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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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文學

19세기 문학은 대혁명으로 새로운 사회의 담당자가 된 부르주아지가 과거의 제약에서 자아를 해방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학은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는 이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많은 정치적 변천을 겪으면서 나아간다. 이러한 사회변동과 밀접한 영향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학에 있어서도 갖가지 유파가 생겨나고 또 교체해 간다.

최초에 출현한 것이 낭만주의이다. 위고를 중심으로 한 이 유파는 전(前)낭만주의의 영향하에 18세기의 이성중심주의와 형식화한 고전주의 이론에 반대하여 문학에 개성적 감정을 풍성하게 하는 일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낭만주의는 19세기 중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했다. 그러나 이 사이에도 이미 객관적 사실주의에 눈뜬 작가들이 나와서 걸작을 쓰고 있었다. 스탕달과 발자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주관주의 내지는 주정주의(主情主義)의 과도한 발달이 원인이 되어서 낭만주의가 쇠퇴하자 이를 대신하여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여 현실세계의 충실한 재현을 지향하는 사실주의(寫實主義)가 대두되었다. 여기에는 자연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보급된 과학정신과 실증주의 영향이 컸다. 사실주의 문학가 중에는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1848년의 2월혁명의 실패로 정치에 대한 절망감, 물질주의를 구가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혐오 등이 큰 사회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파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는 플로베르가 있고 시 움직임에는 고답파(高踏派) 시인들이 이와 같은 사조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문학에 객관성을 구하는 움직임에서 더 나아가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 1870년경부터 대두한 자연주의이다. 텐류(流)의 실증주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은 결정론에 지배되고 있다는 문학관에 입각해서 그의 갖가지 양상을 실험적·과학적 방법으로 세세하게 묘사하려던 졸라를 중심으로 관찰과 실험을 주로 한 이 유파의 작가들은 부르주아지 사회의 부패를 묘사한 작품을 많이 냈다. 1889년경부터 자연주의는 차차로 쇠퇴하여 문단은 심리적·윤리적 작품을 썼던 부르제, 바레스의 세대로 옮겨갔다.

자연주의가 주로 소설을 지배하였던 기간에 시 분야는 고답파의 쇠퇴와 함께 1880년경부터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의 시대를 맞이했다. 보들레르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 시인들은 음악적 운율(韻律)과 영상(影像)으로서 사물을 암시하고 내심(內心)세계의 정확한 묘사를 지향하여 시를 모든 산문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상태에까지 올려놓았다. 이러한 시인들과 그들의 영향하에 생긴, 상징파라 불리는 모레아스 등의 시인들에 의해 20세기까지 계속된 일련의 운동을 상징주의라 한다. 이 사조는 근대시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영역을 넘어 20세기 문학 전체에 직접 큰 영향을 주었다.

낭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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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主義

대혁명에 의해 생겨난 부르주아지의 자유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고전주의의 답답한 형식에 얽매인 재래의 문학에 표현상의 자유를 주고 자아를 해방하여 개성적 감정의 우위를 주장한 예술상의 사조이다. 특히 시 분야에서는 특출한 작품을 많이 낳았다.

이미 18세기의 루소 같은 사람에게 그 선구적 요소가 보였으나 19세기 초두에 샤토브리앙과 스탈 부인이 나타나 초기낭만주의라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외국문학의 영향도 더하여서 라마르틴, 비니, 위고, 뮈세, 네르발 등 시인의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우수한 작품이 계속적으로 나왔다. 1830년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상연으로 낭만파는 고전파를 완전히 압도하고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여류소설가 조르주 상드도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낭만주의 문학은 그 후의 문학의 길을 개척한 점으로 근대문학의 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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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de Stael (1766-1817)

프랑스 초기낭만주의 비평가·소설가.

스위스 태생. 18세기 합리주의 정신 속에서 자랐으며 그의 살롱에 자유주의자를 모아 독재자 나폴레옹과 맞섰다. 문학을 사회와 관련시켜 고찰한 <문학론>(1800)과, 독일문학이 가진 낭만주의적 특성을 소개한 <독일론>(1810)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에 이론적 지주를 세웠다. 뛰어난 여성이 가지는 고독감이나 슬픈 운명을 묘사한 <델핀(Delphine)>(1802)과 <코린(Corinne)>(1807)이 있다.

샤토브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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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

ois-Rene de 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 초기 낭만주의 문학가·정치가.

그리스도교와 중세예술을 문학의 새로운 원천으로 되찾아 풍부한 이미지와 음악성 넘치는 문체로서 지성미있는 작품을 써서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중요한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시적·도덕적 미(美)를 칭찬한 <그리스도교 신수(神髓)>(1802), 소설 <아탈라> <르네> 근동여행의 산물인 <순교자>(1809)와 <파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순례>(1811), 그리고 유작 <무덤 저쪽의 추상>(1849-50)이 있다. 레카미에 부인의 별장에서 1848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아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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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la (1801), <르네> Rene (1802)

샤토브리앙의 단편소설.

모두 다같이 저자가 청년시대 때 미국 여행에서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수>의 일부분이 되는 삽화로 쓰인 것이지만 1805년에 2편을 묶어 독립된 1권으로 간행했다. <아탈라>에는 미국대륙의 황량한 대자연을 배경으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젊은날에 겪은 비련을 엮었고, <르네>는 미국으로 건너간 프랑스 청년 르네의 고칠 수 없는 권태로움을 묘사하였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신세계의 풍물은 언어의 마술사라 일컬어지는 샤토브리앙의 손에 의해 신선한 감동을 풍겨 주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의 문학에 이국 정조를 넣어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주인공 르네의 우수와 고독과 불안이 가득 찬 영혼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뒤를 이어받은 ‘세기병(世紀病)’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도 하여 세낭쿠르(1770-1846)의 <오베르만(Obermann)> 등 낭만파 세대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콩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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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Constant (1767-1830)

프랑스 소설가·정치가.

스위스 로잔느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젊어서 영국·독일·브뤼셀에 유학하였고 스위스 코페의 살롱에서 스탈 부인을 만나 애인이 되어 그녀와 같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적 공화파에 속하였으나 입헌왕정주의자이기도 하여 루이 필립 치하에서 큰 정치적 세력을 얻어 제법 혜택받은 정치생활을 보냈다. 대표작으로는 <아돌프>가 있다.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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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phe (1816)

콩스탕의 자전적 연애소설.

아돌프는 10살 연상의 에레노르를 유혹하나 이윽고 사랑은 식고 단순한 동정심으로 변한다. 그녀는 아돌프의 변심을 알자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끝에 죽는다. 에레노르의 모델은 스탈 부인 등 작가가 알고 있던 여성이라 한다. 근대 심리소설의 선구가 되어 작자는 세세하게 자기의 심리를 분석 해부하여 연애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내놓았다.

라마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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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onse de Lamartine (1790-1869)

프랑스 낭만파 시인.

마콩에서 출생. 1820년 처녀시집 <명상(瞑想)시집>(1823)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이 시집의 발표는 프랑스 시의 역사상 한 시기를 긋는 중대한 사건이며 이후 낭만파시인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또 그는 외교관과 정치가로서도 활약하여 <지롱드 당사(黨史)>(1847)를 발표하여 민중에게 호소하였고, 1848년에는 임시정부의 외무대신까지 지냈다. 그러나 후에 명성도 잃어버리고 만년에 빚더미 속에 파묻혀 실의 속에서 죽었다.그간 많은 시와 정치적 논설 또는 문학적 산문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신(新)명상시집>(1823), <시적·종교적 해조(諧調) 시집>(1830), 두 개의 서사시 <조슬렝>(1836), <천사의 실추(失墜)>(1838), 그리고 <정관(靜觀)시집>(1839) 등을 들 수 있다.

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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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de Vigny (1797-1863)

프랑스 낭만파 시인·소설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몰락한 지방 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군인에 뜻을 두었으나 군대생활이 싫어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위고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826년 <고금(古今)시집>을 발표하였다. 소설로는 리셜리외에 대한 음모를 쓴 <생 마르(Cing Mars)>(1826)와 시인과 사회의 대결을 그린 <스텔로>(1832), 군인의 비참상을 묘사한 <군대의 복종과 위대함>을 냈다. 그 후에는 이른 바 ‘상아탑(象牙塔)’ 속에 은거하여 고독하게 지냈다.

그의 일생 후반기에 이름을 후세에 떨치도록 만든 시편이 발표되었다. 몇 편의 시 가운데 그는 여성이 남성을 얕보고 신도 자연도 인간에게 냉정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명예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묵묵히 자기의 할 바를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들 시는 죽은 뒤 <운명(運命)시집>(1864)으로 출판되었다.

군대의 복종과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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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vitude et grandeur militaires

비니 소설.

작자가 군대생활을 했던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쓴 세 단편

<로레트(Laurette)> <뱅세느의 야회(夜會)> <르노 대위의 삶과 죽음>으로 되어 그의 군대관이 담겨져 있다. 그가 겪은 군대생활은 환멸과 굴종의 연속이었으나 그 속에서 진실로 위대한 것은 한 병졸의 숨은 복종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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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Marie Hugo (1802-1885)

프랑스 시인·소설가·극작가.

브장송 태생이며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었으며 20세에 처녀시집 <오드(Odes)와 잡영(雜詠)집>(1822)을 간행하고 그 해에 결혼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정력적으로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시집 <오드와 발라드집>(1826), <동방시집>(1829), 소설<아이슬란드의 한(Han)>(1823), <뷔그자르갈>(1826), <사형수 최후의 날>(1829) 등이 있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카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젊어서 야망에 불탄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고 있던 의(擬)고전파와 대립하여 당시의 문단에 발흥(勃興)하고 있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자택에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차차로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위고의희극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유했다.

그 후에도 위고의 왕성한 활동은 계속되어 시집 <가을 낙엽>(1832), <황혼(黃昏)의 노래>(1835), <마음의 소리>(1837), <빛과 그늘>(1840), 희곡으로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1831), <루이 블라스>(1838) 등이 이어서 발표되었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1831)는 위고에게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다.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뒤 10여 년 간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희곡 <성주(城主)>(1843)가 낭만주의 풍조에 싫증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 것과 가장 사랑하는 딸이 사고로 죽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48년 2월혁명 당시는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한층 굳혀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Jersey)와 강지(Guernsey)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 망명생활은 결실이 풍부한 시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어 창작에 전념한 때문이다. 시집 <징벌(懲罰)>(1853), <명상시집>(1856), <세기의 전설(제1집)>, 소설<레미제라블>,<바다의 노동자>(1866)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普佛)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소설 <93년>(1874) 등이 있다. 그의 죽음은 국장(國葬)의 예를 받았고 또한 유작도 수없이 간행되었다.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 같은 정열이다. 위고의 시는 시대의 낭랑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이렇게 너무나 낙관적인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세기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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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Leqende des siecles (제1집 1859, 제2집 1877, 제3집 1883)

위고의 서사시집.

다른 두 장시(長詩) <사탄의 종말>(1886), <신(神)>(1891)과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자유와 이상을 추구하여 진보해 나가는 인류의 모습이 이브와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제2제정기까지의 시대마다 다채롭고 장대하게 많은 시편에 걸쳐 묘사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양심>

<잠들고 있는 보아즈> <사티로스 신(神)> <가련한 사람들> 등의 시편이 유명하다.

위고 시집 중의 걸작일 뿐 아니라 서사시에 궁했던 근대 프랑스 문학에 극히 뛰어난 지위를 점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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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Miserables (1862)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르>란 제목으로 집필한 초고를 망명생활 중에 새롭게 구상하여 고쳐 써서 제목도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 작품의 의도는 가난에 고통받는 ‘가엾은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제도와 관습을 타파하려는 데 있다. 주인공 장 발장을 통해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묘사하려 했고 이것은 3부작으로 된 <세기의 전설> <사탄의 종말>(1886), <신(神)>(1891)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은 최후에 가서는 선(善) 속으로 소멸되어 버린다는 위고의 종교적 낙관론이 표현된 것이다.

장 발장은 가난 때문에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다. 그는 사람에게 심한 냉대를 받지만 밀리에르 신부만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준다. 그러나 장 발장은 신부의 집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가 체포된다. 신부는 경관에게 자신이 장 발장에게 은식기를 주었다면서 오히려 은촛대를 두 개 더 내주며 가져가라고 한다.

이 일로 크게 감화받은 장 발장은, 마들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번다.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시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뒤를 쫓는 자베르 경감에 의해 그의 과거가 폭로된다. 그 무렵, 장 발장이라는 사나이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장 발장은 자수하나,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의 일이 걱정되어 탈옥한다.

장 발장은 자베르 경감의 눈을 피해 죽은 여공의 딸 코제트와 함께 파리에서 조용한 생활을 한다. 아름답게 성장한 코제트는 마리우스라는 청년을 만나 장 발장의 허락하에 결혼한다. 장 발장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생활고로 빵을 훔친 것 때문에 19년간의 감옥생활을 보낸 장 발장이 성자와 같은 밀리에르 신부의 교화로 거친 마음에도 양심의 빛이 밝게 비치어 그 후에는 몸을 희생해 가며 많은 선행을 쌓고 그의 주위에는 매춘부가 된 팡티느, 딸 코제트, 공화주의 이상에 불타는 마리우스, 경찰의 권화(權化) 자베르 등이 등장하는 <레 미제라블>은 소설 형태를 취하여 당대 프랑스 사회를 풍자·묘사한 작품이다.

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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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rfed de Musset (1810-1857)

프랑스 시인·소설가·극작가. 파리 태생.

20세에 대담 분방한 시집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이야기>(1830)로 문단에 데뷔하여 낭만파의 청춘 시인으로서 사교계의 총아가 된다. 그러나 점차 낭만파 동향에 비판적이 되어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1833년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졌으나 이듬해에 헤어지고 연애의 번뇌와 고통을 노래하며 시인으로 크게 성장한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30세를 넘긴 후부터는 재능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852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나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죽었다. 분방한 상상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항상 신선하고 솔직하게 사랑을 노래한 뮈세는 낭만파 시인 가운데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시는 <초기시집>(1829-1835)과 <신시집>(1836-1852)에 수록되어 있으나 유명한 4편의 <밤>(1835-1837)에는 상드와의 연애 고뇌에서 나온 훌륭한 서정시가 담겨져 있다. 장편소설 <세기아(世紀兒)의 고백>(1836)도 같은 괴로움에서 생긴 것이지만 여기에는 동시에 샤토브리앙의 <르네> 따위의 흐름인 ‘세기병’을 역력하게 읽어볼 수 있다. 기타 <두 사람의 애인>(1837), <미미 팡송>(1845) 등 10편이 넘는 소설이 있고 또 현재에 한층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 <장난으로 사랑하지 않을 것>(1834), <로렌자치오>(1834)〔<희극과 격언극>(1854)에 수록〕 등 극작품도 많다.

네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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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de Nerval (1808-1855)

파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으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만년은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자주 입원하였고 최후에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 <불의 딸> 등 그의 걸작은 거의 이 시기에 쓰여졌다. 특히 <오렐리아>(1855)는 꿈과 광기의 세계를 주제로 한 몽환(夢幻)적인 소설로 그 상징성은 최근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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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illes feu (1854)

네르발의 시·소설·평론을 포함한 작품집.

중편소설 <실비(Silvie)>는 그의 유년을 지낸 바로와 지방을 무대로 ‘나’와 시골처녀 ‘실비’의 청순한 관계를 묘사한 목가적인 면과 한 여배우(女俳優)를 통하여 영원한 여성상을 추구한 신비적인 면이 정묘하게 짜여진 걸작이다. 또 12편의 소네트로 된 <환상시집>은 상징주의의 선구적 작품으로 중시되고 있다.

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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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and (1804-1876)

프랑스 여류소설가. 본명은 오로르 뒤팡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소녀기를 프랑스 중부의 노앙에서 보내다가 18세에 시골 귀족과 결혼하였으나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 나와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뮈세와 음악가 쇼팽과의 연애로 세상을 떠들썩하기도 했다. 처녀작 <앵디아나>(1832)로 이름을 얻었고 이어서 <발렝틴>(1832), <렐리아>(1833) 등을 발표하지만 어느 것이나 여성의 해방과 연애의 자유를 역설하는 자서전적 요소가 농후한 정열적인 작품이다. 한때 사회주의에 접근, 정치활동도 하였고 인도주의적인 소설을 발표하였지만 그의 사상은 감상성(感傷性)을 탈피하지 못했다. 만년에는 노앙에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면서 <마(魔)의 늪>(1846), <프티트 파데트>, <프랑스와 르샹피>(1849), <피리부는 이들>(1853) 등의 이른바 전원소설을 발표했다. 모두 그녀가 접하는 소박한 농민에 공감하여 자연을 사랑하는 목가적인 장편소설이며 사상적인 깊이는 없지만 작가로서의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간으로서도 원숙한 지경에 다다라 플로베르·프로망탱(1820-1876) 등 연하의 작가와 모성적인 애정으로 맺어진다. 오늘날 그녀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나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작가라 할 수 있다.

프티트 파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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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etite Fadette (1849)

상드의 장편소설.

빈약하고 왜소한 처녀 파데트가 어떤 청년과 사랑에 빠져 그 사랑 때문에 몰라보게 아름다워지는 한편 청년의 쌍둥이 형이 질투하여 두 사람을 방해하지만 그 장애를 넘어 사랑을 이룬다는 줄거리이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별다른 파란도 없지만 아름다운 자연묘사에 서정성으로 상드의 전원소설 가운데 걸작이 되고 있다.

뒤마 (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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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e Dumas, Pere (1803-1870)

다작(多作)으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부친은 군인이며 파리 태생. 1829년 희곡 <앙리 3세와 궁정>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낭만파 연극의 선구자가 되었고, 우수한 극작품을 많이 썼다. 동시에 <삼총사>와 그 속편 <철가면>(1848, 원제 <브라즐론 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의 베스트 셀러 작가이다.

삼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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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Troismousquetaires (1844)

루이 13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뒤마 페르의 역사소설로 오귀스트 마케의 협력을 얻어 썼다. 뽐내기 잘하는 귀족의 전형 아토스, 쾌한 포르토스, 계략에 뛰어난 아라미스 등 세 사람의 근위병을 상대로 가스코뉘 출생의 용감한 달타냥은 계속 결투를 하지만 결국 깊은 우정을 맺는다.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미끼로 왕비를 모함하려는 재상 리슐리외와 그의 여자 첩자(諜者)인 메레디를 상대로 해서 네 사람은 갖가지 모험을 쌓는다. 달타냥만이 운좋게도 다이아몬드를 다시 찾고 애인을 독살당한 달타냥은 세 사람의 협력을 얻어 악독한 메레디를 사로잡고 그녀는 처형된다. 뒤마의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소설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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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mte de Mont-Cristo (1845)

뒤마 페르 소설.

때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가려고 하는 무렵이다. 마르세유의 젊은 선원 에드몽 당테스는 선원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서 곧 선장이 되기로 되어 있다. 또한, 그에게는 아름다운 약혼자 메르세데스가 있어서 그는 행복하다. 당테스의 출세를 시기하는 배의 회계사인 당그라르나 메르세데스를 에워싼 연적인 페르낭은 당테스를 나폴레옹파의 공모자로 밀고한다. 그리하여 당테스는 결혼식장에서 체포되고, 담당 검사인 비르포르는 그가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있음을 알면서도 권세욕과 출세욕에 눈이 어두워 당테스를 감옥에 집어 넣는다.

당테스는 감옥안에서 사제인 파리아를 알게 되어 그와 함께 탈옥준비를 하면서 여러 가지 술수를 배우게 된다. 14년간의 지하 감옥 생활에서 탈출 직전에 사제는 죽는다. 그는 그 때 몽테크리스토섬의 동굴 속에 거액의 보물이 있다는 것을 당테스에게 알려 준다.

감옥에서 교묘하게 탈출한 당테스는 아버지가 굶어 죽고, 은인인 파라온 호의 선주는 파산하였으며, 원수이던 당그라르는 에스파냐 전쟁으로 백만 장자가 되어 남작 작위를 사서 은행가로 출세를 하고, 페르낭도 에스파냐 전쟁 때 배신행위로 부자가 되어 모르세스 백작이 되어 메르세데스를 아내로 맞이 하고 정치계의 큰 인물이 되었으며, 비르포르도 검찰총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테스는 복수심에 불타서 몽테크리스토섬의 보물을 손에 넣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자처하고 사교계에 나타나 곧 인기를 모은다. 그는 여러 인물로 변장하여 재물과 강력한 의지와 지모의 힘으로 복수할 준비를 한다.

14년이란 오랜 옥중 생활에서 사라진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의 약혼자였던 메르세데스만은 그를 알아본다. 그는 모르세스 백작이 에스파냐를 배반한 것을 폭로하여 그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다.

비르포르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데, 태연한 몽테크리스토의 발언이 비르포르 부인으로 하여금 온 집안 식구를 독살하게 만든다. 아내의 범행을 안 비르포르는 아내에게 자살을 명령하지만, 몽테크리스토의 모략으로 불의의 자식을 생매장했다는 것이 드러나 미쳐 버린다.

몽테크리스토는 송신원을 돈으로 사서 거짓 통신을 당그라르에게 보내 그의 투기 사업에 치명적인 실패를 보게 하여 복수를 한다. 그러나 은인인 모레르의 아들과 비르포르의 딸과의 사랑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 준 채 행방을 감춘다.

명석한 이성과 굳은 의지, 막대한 재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매우 장대한 구성으로 되어 있고, 그 무대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나 지중해의 여러 섬과 동양에까지 미친다. 1841-1845년 작품이다.

미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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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Michelet (1798-1874)

프랑스 역사가.

소르본과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프랑스사(史)>(1833-1867) 17권과 <프랑스 혁명사> 7권(1847-1853)을 비롯해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대리석을 통하여 인간을 느낀다”란 말에 상징되어 있듯이 미슐레는 실증적인 자료의 조사를 통하여 과거의 역사를 산 것으로 부활시키려 했다. 같은 시대의 역사가에는 기조(Guizot), 토크빌(Tocqueville), 키네(Quinet)가 있으며 역사와 문학 이외의 면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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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iel Henri-Frederic (1821-1881)

스위스계 프랑스 작가.

제네바에서 태어나 제네바 대학의 미학·철학 교수였으나 전문직의 업적은 평범하였고 생전에 출판된 시집도 거의 인정받지 못하였다. 오늘날에 와서야 사후에 햇빛을 본 방대한 <일기(日記)>(1883- 대부분이 미발표)만이 읽혀지고 있다. 날카로운 지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적이라 할 만큼 겁쟁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앞에 두고도 행동은 할 수 없어 자기 마음을 분석하여 자위한 기록이다.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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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主義-寫實主義-

18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낭만주의는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미 객관적인 사실정신에 눈뜬 작가들이 걸작을 내고 있었다. 스탕달, 발자크, 메리메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낭만주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고 있으나 과도한 주관성을 배제하여 관찰에 의한 현실의 정확한 묘사를 기도하여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시작되는 다음 사실주의 시대를 예고한다. 역사학을 비판방법으로 받아들인 생트뵈브나 조형적 비개성적인 예술을 지향(志向)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여 다음 고답파의 가교가 된 고티에는 이 시기를 대표한다.

스탕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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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ndhal (1783-1842)

프랑스 소설가. 본명은 앙리 베일.

그러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틀에 박힌 상류사회 교육을 받으면서 이에 과격하게 반발하였다. 13세에 프랑스 혁명으로 생겨난 중앙(中央) 학교에 입학하여 합리주의적 사상을 배웠다. 수학에 뛰어나 1799년 이공과(理工科) 학교 시험을 위해 파리에 나왔으나 시험을 포기하고 ‘제2의 몰리에르’가 되어 여우(女優)와 동거생활을 하는등 평소의 야심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친척인 유력인사의 천거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하여 소위가 되어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본다. 군직을 나와 1802-1805년까지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아 희곡 습작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8세기의 감각론 철학과 그 계보에 속한 트라시, 카바니스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후년의 기초는 이때에 굳혔다고 하겠다. 다시 군직에 취임하여 1809년에는 참사원(參事院) 서기관이 되어 사교계 인사로 생활을 보냈다.

1814년 나폴레옹과 더불어 ‘몰락’하여 제2의 고향인 밀라노에 망명한다. 처녀작 <하이든전(傳)>(1815), <이탈리아 회화사(繪畵史)>(1817) 등 부활한 부르봉 왕조를 공격하는 정치적 팜플렛의 색채를 띤 작품을 출판하였다. 메틸드 뎀보우스키에게 실연을 당했다. <연애론>(1822)은 이 쓰라린 추억이 가득 찬 글이라 할 수 있다. 1821년 자유주의자로 관헌에게 주목을 받고 실의 속에 귀국하였다.

파리에서 성행하였던 살롱에 출입하면서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25)에 의하여 자유주의와 문학적 혁신을 결합코자 하였으나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됨에 따라 그의 영향은 차츰 빛을 잃어버린다.

최초의 소설 <아르망스>(1827)와 걸작 <적과 흑>도 거의 반향이 없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과 이탈리아의 소도시 트리에스테 영사(領事)가 되어 죽을 때까지 이 영사직을 맡았다. 지리한 직무를 메우기 위해 많은 작품을 썼으며 사후 출판된 자서전 <에고티즘 회상>(1892), 미완성 소설 <루시앙 뢰방>(1894), <앙리 브릴라르의 일생>(1890), 소설 <파르므의 승원(僧院)> <라미옐>(1889) 등이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묘비명(墓碑銘) “밀라노인(人) 베일,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 티마로자, 모짜르트, 셰익스피어를 사랑하였노라”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죽은 뒤에 점차 평판이 높아 오늘날에 와서는 발자크와 나란히 근대 사실주의 소설의 시조(始祖)가 되어 있다. 자아숭배, 정력과 정열의 찬미는 로맨틱하지만 낭만주의의 주류를 이루는 샤토브리앙과 위고에는 공감을 갖지 않고 ‘섬세한 진실’을 즐겼다. 그는 민법전(民法典)과 같은 간결한 문체로 글을 썼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였으나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런 점이 시대를 앞질렀다고 본다.

적과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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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ouge et le Noir (1830)

스탕달 장편소설.

현실적으로 일어난 형사사건의 공판기록으로 쓰여졌다. 제목의 ‘적(赤)’은 군복을 ‘흑(黑)’은 승려복을 표현했다. 이것은 나폴레옹 이후의 사회에 사는 평민은 수도사가 되는 이외에는 출세의 길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무꾼의 아들로 야심에 불타는 줄리앙 소렐은 레나르 시장 댁의 가정교사가 되어 미모와 재간으로 레날 부인을 유혹한다. 세상에 드러날 것이 두려워 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이곳에서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위선만이 최선의 출세 방법임을 알게 된다. 팔라르 교장의 추천으로 파리의 라 모르 후작 댁에 비서로 들어가 굳센 의지의 힘으로 콧대높은 후작의 딸 마틸드를 정복한다. 그녀와의 결혼이 실현될 시기에 이르자 그를 중상하는 레날 부인의 편지로 그의

야심은 수포로 돌아가고, 급기야 그는 레날 부인에게 총을 쏘게 된다. 법정에서 사회의 부정을 고발했기 때문에 사형 판결을 받는다. 옥중으로 찾아온 레날 부인을 보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보며 얼마 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위선과 타산으로 출세가도를 한발한발 걸어올라간 줄리앙은 문학사상 두드러진 하나의 전형(典型)이다. 그러나 줄리앙의 위선은 그가 즐겨 몸에 붙인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강요된 것임을 예리하게 묘사한 점에서 뛰어난 사회소설이라 하겠다.

파르므의 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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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hartreuse de Parme (1839)

스탕달 장편소설.

16세기 이탈리아 고서(古書)를 골자로 하여 겨우 2개월 만에 써버린 작자 원숙기의 작품이다. 발자크가 격찬하여 스탕달이 생전에 인정을 받았던 유일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폴레옹을 동경한 대귀족의 아들 파브리스는 워털루 전투에 참가한 때문에 음모의 와중에 휩쓸린다. 그를 돕는 정열적인 상세베리나 공작 부인과, 기지에 찬 그의 여인 모스카 백작, 파브리스를 사랑하는 수줍고 상냥한 크레리아 등 네 사람에게 던져진 전제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렸다. 결투, 탈옥, 독살의 여러 사건이 전개된 뒤에 파브리스의 아들을 잃은 크레리아는 절망으로 죽고 파브리스는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작가가 소설에 몇 번이나 테마로 한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생존방식을 여기에서도 문제삼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희가극(喜歌劇)류의 풍자와 애수를 띠고 진행되어 <적과 흑>처럼 우울하지는 않다. 작자는 파브리스의 천진난만 속에 그렇게 되기를 바래 왔던 자신의 모습을 몽상하고 크레리아에게 이상적 애인의 영상을 그려보려고 했던 것이다. ‘행복의 추구’가 이 작품의 중심 테마라 하겠으며 다시 읽고 또 읽음으로 하여 더욱 흥미가 일어나는 명작이다. 더욱이 워털루 전투 묘사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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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e de Balzac (1799-1850)

프랑스 소설가.

프랑스의 정원(庭園)이라 일컬어지는 루아르강(江) 유역 투레느 지방의 투르에서 출생했으나 부모는 이 지방 출신이 아니다. 어머니는 파리 상인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혁명시대의 풍운을 타서 관리로 출세하였고 투르는 그의 임지였다.

발자크가 학령(學齡)에 달한 때에는 나폴레옹이 전(全) 유럽에 군림했으나 그가 16세가 된 때에는 완전히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발자크에 대한 나폴레옹의 영향은 컸다.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 발자크는 나폴레옹 숭배자로서 그 이름은 작품의 여러 곳에 나와 있고, 가장 유명한 것은 <시골 의사>(1833) 가운데 제정시대의 노병(老兵)이 나폴레옹의 일생을 영웅적인 서사시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그에게 있어서 나폴레옹은 유럽을 하나의 통일체로 만들 것을 뜻한 위대한 조직자였고 ‘나폴레옹이 무력(武力)으로서 이룰 수 없었던 일을 붓으로 이룩한다’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이것은 소설로써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작가에게 어울리는 전설이다.

청년기에 달하여 그는 부친의 권고에 따라 법률을 배우고 공증인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습을 했다. 또한 독립해 보고자 출판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도 하면서 작가 수련을 계속하였다. 이 불우한 청년을 끊임없이 격려한 사람은 20년 이상 연상인 그의 헌신적인 애인 베르니 부인이었다. 그는 그런 은혜를 소설 <골짜기의 백합>으로 보답하였다. 베르니 부인 사후에는 폴란드 귀족인 한스카 부인이 그의 반생을 지배하였고 그가 죽기 직전에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그가 <부엉이 당원(黨員)>(1829)으로 문학계에 확실한 첫걸음을 내디딘 직후에는 낡은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적 왕정이 성립되었다. 1789년의 혁명은 귀족계급에 대한 시민계급의 부분적인 승리였으나 1830년 7월혁명은 시민계급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것은 프랑스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상승기이며 금융가가 정권을 잡은 때였다.

발자크가 생활하던 목전의 사회는 이러한 사회였다.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는 부르주아를 속물(俗物)로 비웃었으나 발자크는 부르주아의 왕성한 생활력과 실행력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나온 과학의 진보와 산업의 번영을 찬미하였다. 그는 시민사회의 근본원리를 포착, 거기에 서서 이러한 사회 전반을 보기좋게 묘사하였다. 그를 사실주의의 가장 뛰어난, 그리고 가장 위대한 선구자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부엉이 당원> 이래 모든 소설에 인물재현(人物再現) 필법(이 방법은 <고리오 영감>에서부터 시작된다)을 사용하였다. <인간 희극>은 정녕 그가 말한 것처럼 가공(架空)이면서도 ‘하나의 완전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 시민사회에 관하여 풍부한 지식을 준다. 그러나 발자크는 다른 데에서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일이 아니며 창조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 희극>의 세계가 단순하게 발자크에 있어서 목전의 사회가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오히려 발자크 자신의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인간 희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작중인물의 백열적(白熱的)인 삶이며 욕구의 무한, 탐구의 무한, 의지와 감정의 무한을 추구하는 초현실적인 인생인 것이다. 이 점에서 발자크는 그의 뒤에 오는 사실주의자들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리오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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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ere Goriot (1834-1835)

발자크 장편소설.

그의 모든 소설 사이에는 작중인물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며 이 때문에 <인간 희극>은 하나의 완전한 사회 형태를 만들고 있다. 이 연관성을 설정한 최초의 작품이 <고리오 영감>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내용으로는 두 딸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끝에 딸들에게 버림을 받아 광사(狂死)하는 노(老)상인의 불행이 주제인 듯이 보여지나, 오히려 이것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 라스치냐크가 청운의 뜻을 품고 파리에서 쓰라린 면학(勉學)의 길을 걷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사회라고 하는 커다란 책자’를 읽게 되어 인생의 실상(實相)에 눈을 떠 사회에 도전하게 된다는 과정을 주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근대사회의 상징인 파리의 영화와 악덕의 두루마리 그림이지만 라스치냐크를 유혹하는 보트랑이란 무법자의 웅변에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노출되어 있다.

골짜기의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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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Lys dans la Vallee (1836)

발자크 장편소설.

인생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마음속 깊이 끝없는 꿈을 쫓는 ‘30대 여성’이란 전형(典型)은 발자크가 가장 좋아한 대상이었다. 이러한 기호는 청년시대의 애인 베르니 부인에 의하여 마음 깊이 심어진 것이다. 실제로 작중인물 페릭스의 유년시대에 겪은 일은 자전적인 요소가 보이고 모르소프 부인에 대한 페릭스의 열렬한 첫사랑은 베르니 부인에 대한 발자크의 최초의 연정을 엿볼 수 있다.

작중인물의 심상(心象) 풍경을 이루는 ‘몽바종에서 시작하여 루아르강(江)에서 그치는 작은 계곡’도 그가 잘 알고 있고 애호한 곳이다. 이야기는 연상의 유부녀에 대한 소년의 사모에서 시작하여 애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며, 이 작품의 뛰어난 특징은 인간정신의 형성에 있어서 소년기의 감정생활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훌륭하게 추구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매 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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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usine Bette (1846)

발자크 장편소설.

한 가정의 주인이 방탕하여 무서운 가정파탄을 초래한 내용으로 시대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인은 위로라는 육군성 국장인데 제정시대에 군정의 수환가로 또한 색한(色漢)으로 떨쳤으나 시민계급의 전성기가 되어 옛 모습은 찾아볼길이 없다. 그러나 승리가 몸에 밴 제정시대의 군인답게 그는 탐색(耽色)으로 인하여 가족을 연이어 자멸의 길로 몰아넣는다.

또 한사람은 크르베르라는 부유한 상인으로 프랑스를 지배하는 것은 왕도 아니요, 헌법도 아니며 “아름답고 고아하고 젊은 전능의 금화(金貨)”라 확신하여, 그 자신(自信)을 바탕으로 젊었을 적에 꿈꾼 ‘공작 부인’을 내것으로 만들고자 모든 재력을 쏟는다.

이러한 줄거리를 주축으로 하고 그 밖에 많은 발자크적 테마를 포함한 이 소설은 동시에 착상된 <사촌 퐁>(1847)과 같이 그의 최후의 작품이며 걸작이다.

메리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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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per Merimee (1803-1870)

프랑스 소설가·고고학자.

화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의 권유로 법률을 배워 변호사가 되었으나 언어학·고전문학·고고학을 연구하면서 예술가와 문학자를 사귀어 스탕달과 친교를 맺고 그의 좋은 비평가가 된다. 1825년에 에스파냐의 희극 여배우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발표한 <클라라 가질 희곡집>을 시작으로 문필생활이 시작된다. 1829년에는 역사소설 <샤를 9세 연대기>를 썼으나 그의 진가(眞價)는 단편집 <모자이크>(1833)에 수록된 <마테오 팔코네> <에트루리아의 항아리> 등의 단편과 콜시카나 에스파냐를 무대로 하는 강렬한 정력과 신비적인 정열을 묘사한 <콜롱바>(1840), <카르멘> 등의 중편에 발휘되었다.

그 밖에 <연옥(煉獄)의 혼>(1834), <일의 비너스>(1837), <아르세느 기요>(1844), <아베 오방>(1846) 등이 있는데 모두 냉정하고 간결하다. 한편 1843년 역사 기념물 감독관이 되고 1844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1852년에는 전부터 절친했던 나폴레옹 3세비(妃)의 추천으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 후로는 주로 푸슈킨, 고골리, 투르게네프의 번역과 소개에 힘썼다.

카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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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en (1845)

메리메 중편소설.

비제의 가극 <카르멘>의 원작. 에스파냐를 무대로 집시 여인 카르멘과 나바르의 사나이 돈 호세의 숙명적인 연애에서 정열과 오만과 복수와 죽음을 냉정한 풍자로 묘사하였다. 세빌랴의 담배공장 위병으로 근무하게 된 용기병(龍騎兵)연대 하사인 호세는 여공 카르멘의 야성적인 매력에 사로잡혀 질투 끝에 상관을 죽이고 도망쳐서 밀수단에 가입하여 도둑이 된다.

이렇게 하여 카르멘과 함께 지내게 되었으나 그녀와 투우사 르카스 사이를 탐지한 호세는 카르멘을 죽이고 옥에 갇히는 몸이 된다.

고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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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phile Gautier (1811-1872)

프랑스 시인·소설가·비평가.

낭만주의의 승리를 확고하게 한 1830년의 <에르나니> 상연 때에 붉은 웃옷을 입고 고전파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는 장본인이다. 시집에는 고답파의 선구적 작품 <칠보(七寶)와 나전(螺鈿)>(1852)이 있고 장편소설 <모팽 양(孃)>(1835), <미라 이야기>(1857), <대장 프라카스>(1863-64) 등이 있다.

<모팽 양>에 붙인 서문은 예술의 사회적 효용을 부정한 것으로 문학사적으로 보아 중요한 기록이다. 중·단편소설도 많은데 어느 것이나 환상적으로 응고된 문체를 지녔다. 그의 비판은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연극, 회화에까지 미치고 있다. 더욱이 고티에의 공헌은 문장어의 어휘를 풍부히 하였고, 또 후배를 양성하여 큰 영향을 남긴 점이다.

뒤마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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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e Dumas, Fils (1824-1895)

프랑스 극작가. 뒤마(페르)의 사생아.

파리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사교계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1845년 시집 <청춘의 과오(過誤)>를 출판하였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1848년의 소설 <춘희(椿姬)>로 일약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 후 희곡에만 전념하여 현실감이 풍부한 풍속묘사로써 연극에 있어서 사실주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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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Dame aux camelias (1848)

뒤마 피스의 소설. 이것이 극화(초연 1852) 되었으나 내용은 거의 같다.

창부 마르그리트는 아르망과 사랑에 빠져 시골에 박혀 사랑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아르망의 부친이 나타나 손을 떼도록 권유를 받는다. 마르그리트는 청년을 버린 척하고 본래의 창부생활로 돌아간다. 이에 분격한 아르망은 남들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고 그녀는 슬픔 가운데 죽는 전형적인 연애소설이지만 작자의 의도는 사회의 교화에 있었다.

생트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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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Augustin Sainte-Beuve (1804-1869)

프랑스 비평가.

북프랑스의 불로뉴 태생. 위고와 친교를 맺은 이후부터 낭만주의의 추진자로 활약하여 시와 소설을 썼으나 재능의 한계를 깨달아 문예비평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종래의 비판에 있어서 ‘재단(裁斷)’을 ‘관찰’로 바꾸어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하여 작품의 배후에 있는 작가의 정신적 인간상을 충실하게 포착하려 하였다. 오랜 동안 주평(週評)란을 담당하여 그 비평집이 <월요 한담(月曜閑談)>(1851-62)과 <속(續)월요 한담>(1863-1870)이 되었다. 그 외 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 르와이얄> 전6권(1840-1860)이다. 파스칼, 라신 등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 해부가 뛰어난 점은 19세기 비평의 최고 걸작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에 의하여 비평이 처음으로 문예의 한 장르로 확립되어 오늘날 비평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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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實主義 Realisme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서정과 감정과 상상으로 미화하지 않고 평범과 추악까지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문학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문학경향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었으나 프랑스에는 시민계급의 흥륭(興隆)과 실증적 정신의 발전에 따라 특히 이 명칭에 의한 문학운동이 낭만주의의 반동으로서 1850년경에 일어났다.

중요한 추진자는 미르제(<보헤미안 생활의 여러 풍경>), 생플뢰리(<모랑샤르의 사람들>), 뒤랑티이며 스탕달과 발자크를 스승으로 받들어 화단(畵壇)에 있어서 쿠르베와 같은 취지의 운동에 자극을 받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사실주의를 확립한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고 플로베르의 걸작 <보바리 부인>이었다. 이어서 소설에는 공쿠르 형제, 극에는 오제, 뒤마 피스, 비평에는 텐의 활동으로 사실주의는 19세기 후반의 큰 조류가 되어 자연주의로 발전하였다.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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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e Flaubert (1821-1880)

프랑스 소설가.

북프랑스의 루앙 시립병원 외과부장인 아시르 크레오파스 플로베르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병원에 딸린 집에서 성장하였다. 자존심이 강한 과학자의 가정 분위기에서 과학적인 인간 관찰방식을 길렀고 당시에 전성한 낭만주의 문학의 강한 영향을 받아 인생 일반을, 특히 서민들을 부정적·모멸적(侮蔑的)·조소적으로 보았다. 그런 한편 고대와 중세, 동방(東方)에의 강한 동경을 품어 샤토브리앙과 위고의 문장에서 영혼이 뛰는 희열을 맛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고티에 등에 가까운 예술 지상주의자로서 그의 일생을 문학에만 바치게 되었다.

그는 매우 조숙하여 1832년 고등중학교(리세)에 입학한 얼마 뒤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로맨틱한 혹은 사실적인 단·중편소설과 극까지도 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습작이었으나 이미 후년의 장편에 담긴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광인의 수기>와 <11월>이 특히 우수하지만 거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15세기경의 첫사랑과 여성 체험을 그리고 있으며 대체로 낭만적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대담하게 사실적이어서 흥미있다. 1842년에 파리 대학의 법과에 적을 두었으나 신경병의 심한 발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자택에서 요양하였다.

1846년 부친을 잃고 난 뒤에는 루망 근처의 크로와세에서 살았다. 그동안에 제1회의 <감정교육>과 <성 앙트와느의 유혹> 원고를 완성하였으나 만족치 않아 1851년부터 <보바리 부인>의 집필을 시작하여 1857년에 출판하여 일약 그 문명을 높였다. 이로써 사실주의 문학의 전형(典型)을 세워서 문단의 사실적 경향을 결정지음과 동시에 준엄한 객관주의 기법을 확립하였다. 작가는 신과 같이 작품의 세계에서 떨어져서 자기를 거기에 나타내서는 안 되며 또한 한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 가지의 표현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유일적(唯一的)표현을 구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살랑보>(1862), <감정교육> <성 앙트와느의 유혹>(1874), <세 개의 이야기>(1877), <보바르와 페퀴셰>(미완 1881 사후 출판) 등 뛰어난 작품을 써 19세기 후반의 지도적인 대작가가 되었으며 1880년 5월 8일에 급서했다.

보바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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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Bovary (1857)

플로베르 장편소설.

실제로 있었던 개업의(開業醫) 드라마르의 아내인 델피느의 자살사건에서 취재하여 5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사실소설의 전형적 걸작이다. 주인공 엠마는 북프랑스 루앙 부근의 부유한 농가의 외동딸이며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꿈을 품은 미모(美貌)의 정열적인 여성이다.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을 하지만 곧 환멸을 느낀다. 그것을 안 바람둥이 루돌프는 그녀에게 접근하여 간단하게 정복해 버린다. 그러나 그녀가 열중하자 간단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는다. 엠마는 절망하였으나 이어 젊은 서기 레옹을 사랑하여 밀회를 거듭한다. 그간 그녀는 가사를 돌보지 않고 남편 몰래 낭비한 빚 때문에 결국 자살해 버린다. 이것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꿈 많은 여성의 인생과 결혼에 대한 환멸의 이야기이며 ‘파멸(破滅) 소설’의 전형이다. 종교와 양속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판결을 받았다. 대비평가 생트뵈브는 이것을 과학적 인간분석의 우수한 선구적 작품으로 보았고, 텐은 발자크 이래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 하였다.

감정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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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ucation sentimentale (1869)

플로베르 장편소설.이 소설은 2월혁명 전후 역사의 진전 가운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였는가를 쓴 것이다. 발자크적인 대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성질이 농후하다.

주인공 프레드리크는 아르느 부인을 성실하게 사랑한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남몰래 그를 사랑하지만 동란(動亂) 속에서 영락해 가는 남편이나 자식에 이끌려 그의 사랑에 아무런 보답없이 어디론지 사라진다. 실의에 찬 그는 대의원이 되려고 한다든지, 창부와 여행도 하고 또 귀부인의 정부도 되면서 점점 환멸의 길을 걷는다. 결국 이 작품은 2월혁명 전후 사람들의 혼미(混迷)를 비웃는 조소로 묘사한 것이며 당시의 비평은 나빴지만 사실주의의 전형적 걸작이다.

공쿠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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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 Les Freres Goncourt

형 에드몽드 공쿠르(1822-1896), 아우 줄(1830-1870). 프랑스 소설가.

일찍 양친을 잃었으나 풍족한 유산으로 취미를 살리는 생활을 했다. 항상 공동으로 집필하였으며 먼저 18세기 풍속사(風俗史)를 연구하여 미술·여성 등에 대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다. 1860년경 소설로 바꾸어 문예가(文藝家)·창부 등 여러 인간의 생활을 성실하게 관찰한 기록에 따라 날카롭고 빈틈없는 문체로 묘사하였다.

대표적 걸작은 히스테릭한 식모의 일생을 쓴 <제르미니라세르토>(1865)인데, 하층사회의 현실적 묘사와 생리학적인 탐구로서 자연주의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들의 <일기>는 문단의 내외·표리(表裏)의 기록으로서 귀중하다.

르콩트 드 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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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Leconte de Lisle (1818-1894)

프랑스 시인.

레위니용 섬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군의(軍醫)였다. 정치에 실망을 느낀 1848년부터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고대 특히 그리스 문명에 쏠려 반(反) 낭만주의를 표방한 <현대 고답시집>을 편찬하여 그 산하에 엘레리아(1842-1905), 쉬리프뢰듬(1839-1907), 코페(1842-1908) 등의 수재(秀才)들을 모아들였다. <고대시집>(1852)과 <오랑캐시집>(1862) 등의 작품이 있다.

Hippolyte Taine (1828-1893)

프랑스 철학자·비평가·역사가.

아르덴주(州) 브제 태생으로 파리에 나와 철학·심리학을 배웠다. 문예비평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도입하여 <영문학사>(1863-1864)를 썼고 대담한 귀납법의 방법으로 문예과학을 창시(創始)하여 졸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인종’, ‘환경’, ‘시대’의 3요소에 의해 여러 가지로 규정되며 또 작가의 천재를 보여주는 것은 그 ‘주요 기능’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정신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점이 숙명설이 전성(全盛)한 사회적 풍조를 낳아, 후에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19세기 프랑스 최대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미술학교의 강의를 위해 나온 <예술철학>(1881)은 ‘환경설’을 미술사에 적용한 것이다.

르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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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Renan (1823-1892)

프랑스 철학자·역사가·문헌학자.

브르타뉴의 트레기에서 출생.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에 독일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화학자 베르트로와 친교를 맺고부터 신앙을 버리고 <과학의 미래>(1890)를 썼다. 그 후 헤브라이어 문헌연구에 몰두해 코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고 <그리스도교 기원사(起源史)> 7권(1863-1881)을 저작하였다.

제1권 <예수전(傳)>에는 그리스도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아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텐과 더불어 19세기 실증주의의 지주이며 간결 유려(流麗)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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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Verne (1828-1905)

프랑스 소설가.

낭트의 작은 섬인 페드에서 태어났다. 파리에 나와 법률을 배우는 한편 새로운 과학을 공상이나 모험에 결부시켜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작품에는 모험소설 <5주간의 기구(氣球)여행>(1863), <땅속 여행>(1864), <해저 2만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3), <15소년 표류기>(1888)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세계의 소년에게 과학과 모험, 정의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15소년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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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 모험소설.여름 방학을 맞아 15명의 소년은 몰래 돛단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 2주일간이나 표류하다 무인도에 닿는다. 섬을 탐험하던 그들은 50년 전에 표류해 온 프랑스 인이 살았던 굴을 발견한다. 겨울이 오자 소년들은 눈 속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하고 굴을 넓히기도 하면서 온갖 고생과 모험을 겪는다.

봄이 가고 또 겨울이 왔다. 그러던 어느날, 이 섬에 악한들이 상륙한다. 소년들과 악한들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지고 소년들은 힘을 합쳐 용감하게 악한들을 무찌른다. 그리하여 소년들은 악한들이 타고 온 보트를 이용하여 2년 만에 다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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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主義

이 말은 사실주의와 명백하게 구별되지 아니하고 병행하여 쓰여지다가 1860년대가 되어 인간을 생물학적·생리학적으로 보는 견해가 한층 강화된 사실문학(寫實文學)이 졸라라고 하는 강렬한 개성이 나타남으로써 특히 자연주의라는 이름 아래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걸작 <목로주점>이 발표됨으로써 자연주의가 확립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플로베르, 공쿠르까지 포함하지만 졸라와 그 주변의 작가들 즉 위스망스와 모파상 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황금시대는 1880년 전후의 10년간이다.

1885년부터 자연주의 문학과 그 근거인 과학 및 실증주의 사상에의 정신주의와 구교에 대한 반동이 높아져 1887년 졸라가 <대지(大地)>를 발표한 기회에 이 반동이 폭발하여 자연주의가 쇠퇴하게 되었다. 반동에 많이 활약한 사람들은 드 보귀에(1848-1910), 브륀티에르(1849-1906) 등이었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그 후 세계적으로 파급되어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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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e Zola (1840-1902)

프랑스 소설가.

파리에서 출생. 얼마 뒤에 남프랑스의 에크스로 이주했다. 부친은 이탈리아계의 토목기사였고, 모친은 세느 에 오와스의 가난한 직공 딸이었다. 부친을 일찍 잃은 그의 가정은 매우 어려웠다. 중학교 때 세잔느와 사귀었으며 1858년 파리로 이사하여 상 루이 고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이듬해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낙방을 계기로 그의 뜻을 문학으로 굳혔다. 이즈음 장편 서사시를 썼으나 성공작은 없었다.

1862년 아세트 출판사에 입사하여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단의 사실주의적 조류와 접촉하고, 시를 중단한 뒤 콩트와 평론을 쓴다. 1866년 출판사를 나와 문필생활에만 전념하고 신문에 미술평론을 실어 불우한 인상파 사람들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때에 자연주의적 작품 <테레즈 라켕>(1867)과 <마드레느 펠라>(1868)를 써서 자신을 얻고 <루공 마카르> 총서(叢書)의 구상을 세운다. 아데라이드 푸크란 신경병에 걸린 한 여성이 처음에는 건강한 농부 루공과 결혼한다. 남편이 죽자 주정뱅이 마카르와 재혼하여 각기의 사이에서 태어난 많은 자손이 제2제정하의 다양한 사회를 어떻게 생활해 나가는가를 쓰려고 했다. 따라서 <제2제정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 사회적 역사>란 부제를 달았다.

1868년 제1권 <루공가(家)의 운명> 집필에 들어가서 1893년 <파스칼 박사>를 출판하여 마침내 전20권을 완성하였다. <목로주점>, <나나>(1880), <포부이유>(1882), <제르미날(Germinal)>, <대지>(1887), <수인(獸人)>(1890) 등 걸작은 거의 모두가 이 총서에 들어 있다.

이 작품들로써 졸라는 자연파의 중심적인 대작가가 되었고, 이론면에서도 <실험소설론>(1880) 등을 써서 자연파의 추진에 힘썼다. 졸라는 개인보다 군중을, 특히 하층대중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용서없이 묘사하였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진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까닭에 그는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모랄리스트이며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때문에 만년에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들어가 사이비 애국자들에 대항하여 끝까지 드레피스의 무죄를 주장하여 결국 승리하였다. <세 도시(都市)>총서, <네 복음서(福音書)>는 그 당시의 정열을 반영하는 것이다.

목로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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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sommoir (1877)

졸라 장편소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7권. 부도덕하고 외설이란 강렬한 비난이 있었으나 많은 식자가 처음으로 졸라의 우수한 재능을 인정하여 대가의 계열에 세웠고 동시에 이 성공으로 자연주의 문학을 확립하여 전성기를 연 작품이다.

주인공 제르베즈는 애인 랑티에와 파리에 나오자 곧 그녀를 버린다. 두 아들을 거느린 채 빨래하는 일을 해나가다가 양철장이 쿠포의 구혼으로 결혼을 한다. 맞벌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남편이 지붕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고 그로인해 음주벽이 생겨 비뚤어지면서 집안은 곧 기울어 결국 남편은 알콜 중독 때문에 미쳐 죽고 아내도 아사(餓死)한다. 파리의 비참한 직공들의 희로애락을 잘 묘사한 걸작이다.

제르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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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inal (1885)

졸라 장편소설.

<루공 마카르>총서 제13권. 졸라는 전부터 정치적 민중봉기의 모습을 쓰고 싶었고 20세기 최대의 문제가 될 노사(勞使)분쟁을 쓰려고 했다. 그리하여 1884년 북프랑스 앙장 탄광의 스트라이크를 직접 돌아본 뒤에 이 대작을 썼다. 줄거리는 간단한 작품이다.

주인공 에티엔느 랑티에는 실업(失業)으로 북프랑스의 몽수 탄광에 가서 갱부(坑夫)로 취직을 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지도자가 되어 파업을 일으켜 군대의 처참한 탄압을 받는다. 그때 러시아인으로 망명한 아나키스트가 수도(水道)를 파괴하여 갱(坑)은 순식간에 수몰(水沒)한다. 에티엔느는 살아났지만 애인 카트리느는 그 속에서 죽는다. 군중 서사시적인 장대한 소설로 앙드레 지드는 이것을 졸라의 최고 걸작이라 하였다.

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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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onse Daudet (1840-1897)

프랑스 소설가.

남프랑스의 님에서 출생하여, 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파리에 나와서 문학의 길을 걷는다. <풍찻간 소식>으로 유명해졌고, <프티 쇼즈>(1868), <타르타렝 드 타르스콩>(1872), <월요 이야기>(1873), <사포(Sapho)>(1884)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자연주의에 가까우나 밝고 감미로운 시정과 정묘한 풍자로 호평을 받았다.

풍찻간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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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res de MonMoulin (1866)

도데 단편집.

때로는 야유도 섞어가며 자상한 시정과 풍요하고 경묘(輕妙)한 필치로서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인정과 풍경을 써서 작자의 이름을 불멸케 한 단편집이다. 이 중 <코르니외 아저씨의 비밀>,<스간 씨(氏)의 산양> <아를의 여인> <노인> <두 여관(旅館)> 등이 유명하다. 이 풍찻간은 아를 부근에 현존하고 있다.

모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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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y de Maupassant (1850-1893)

프랑스 소설가.

노르망디의 미로메닐에서 태어났다. 후에 정신 이상으로 죽은 아우 엘베와 같이 부친과 별거하는 모친과 에트르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브토 신학교와 루앙 고등중학교에서 배웠다. 르왕에서는 모친의 어린 벗이며 그의 스승인 플로베르의 친우 루이 보이에의 가르침을 받아 넓게 문학에 눈을 떴다. 1870년 보불(普佛)전쟁이 일어나자 출정하여 1872년 해군성에 근무하다가 1878년 문부성으로 옮겨 1880년까지 약 10년간의 습작 기간을 거기서 보냈다.

그동안 플로베르에게 사사(師事)하면서 졸라 외의 다섯 사람의 벗과 ‘메당 클럽’을 결성했다. 1880년에는 그의 출세작 <비계 덩어리>를 졸라가 주재하는 <메당의 저녁>에 발표하여 그의 독창적 구상과 우수한 심리묘사로 스승의 격찬을 받아 문단에 화려한 등장을 하였다. 이듬해 <메종 텔리에(La Maison Tellier)>를 발표, 이 두 중편소설로 그의 지위는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83년 불후의 명작 <여자의 일생>, 1885년 <벨라미(BelAmi)>, 1887년 <몽토리올(Mont-Oriol)>, 1888년 <피에르와 장>, 1889년 <죽음과 같이 강하다>, 1890년 <우리들의 마음>과 6편의 장편을 계속해 썼다. <피에르와 장>에 있는 서문의 <소설론>에 있듯이 자연주의의 필법을 기초로 애욕과 운명을 상대로 하여 인간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훌륭한 심리적 소설의 일각을 형성하였다. 이동안 300여 단편을 발표했는데 <목걸이> <쥬르 숙부> <초설(初雪)> <우산> 등 오히려 외국에서 널리 읽혀지는 명작을 많이 남겼다.

그의 단편은 인생의 한 단편(斷片)을 포착하여 대부분을 그의 고향 노르망디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단편이라는 좁은 무대 속에서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연스럽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모친에게서 받은 신경증은 스스로의 환각과 함께 서서히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 ‘공포’, ‘유령’ 등 일련의 공포물을 만들었으나, 물〔水〕에 도피처를 추구한 아름다운 기행문 <물 위에서>(1888)는 이 고통을 초월하여 훌륭하게 페시미즘 문학으로 결정(結晶)시켰다. 1892년 초하루 돌연 자살을 꾀했고, 1893년 유작 <종(鐘)>을 남기고 끝내 독신이었던 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비유가 넘치며 예리한 사고의 테마를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작품에 흘러내리는 페시미즘에는 결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과 동정이 숨겨져 있다. 시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때문인 것이다. 체호프 단편에는 물론 자연주의 문학의 세계적인 파급과 아울러 모파상이 외국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비계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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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le de suif (1880)

모파상 중편소설.

프로이센군(軍) 점령하의 루앙에서 출발한 마차 안에서 ‘비계 덩어리’라고 별명이 붙은 창부가 적의 장교로부터 몸을 요구받고 동행의 백작 설득으로 겨우 그들의 뜻을 좇아 일행을 구하지만 오히려 일행으로부터 모멸의 시선을 받는다. 그녀를 유혹하지 못했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 홧김에 혁명가를 계속 부르는데 창부의 흐느낌을 싣고 마차는 달려간다. 욕망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을 온갖 사람들에게 집어던진 이 한편은 그의 자연주의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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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Vie (1883)

모파상 장편소설.

작자의 장편 중 최고 걸작이다. 한 귀족 여성의 평범하고도 고난에 찬 일생을 그 부제가 가리키는 것처럼 <조그마한 진실>로써 사랑과 미움의 근본문제와 대결시킨다.

순진하고 착하게 성장한 여주인공 장느는 라마르 자작과 결혼하였으나 품행이 난잡한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어두운 인생길을 걷는다. 남편은 식모 로자리에게 임신하게 하고 끝내는 그런 정사(情事)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양친과 식객인 숙모와도 사별(死別)한 그녀는 외아들 폴에게조차 버림을 받고 늙은 로자리에게 구원되나 자택도 남에게 넘어가 고독한 일생을 영위한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지친 그녀의 품에는 그녀도 모르는 여자가 낳은 폴의 딸만 남는다. 퇴색한 인생에서 한결 두드러진 것은 욕망과 잔학(殘虐)이다. 그 희생자인 잔느의 모습을 가혹할 정도로 묘사하면서 그 배후에 숨겨진 작가의 따스한 동정은 주목할 만하다.

위스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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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is-Karl Huysmans (1848-1907)

프랑스 소설가·미술비평가.

네덜란드 출신. 졸라의 제자로서 <바타르 자매>(1879) 등을 쓴 후 <반역>(1884)의 탐미주의, <저쪽>(1891)의 악마주의를 경유, 중세 카톨릭교에 심취하여 <출발>(1895), <대성당(大聖堂)>(1898), <수련자>(1903) 등에 의하여 카톨릭교의 음악·건축·제식(祭式) 등의 징표(徵表)를 연구하여 20세기 초엽 혼미한 영혼을 바로잡을 길을 보여줌과 동시에 중세의 신앙과 문화를 여실히 재현하였다.

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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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Renard (1864-1910)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자연주의와 상징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확실한 유파(流派)에는 속하지 않는다. 작은 것이나 순간의 감동을 대상으로 다가서서 극히 간결한 문체로 정확하게 표출하는 수법으로 독특하고주요한 작품은 단편집 <홍당무> <박물지(博物誌)>(1896), 희곡 <이별도 즐겁다>(1897) 등이며 죽은 뒤에 간행된 <일기>(1925)는 당시 문단의 이모저모를 알기 위한 귀중한 문헌이다.

홍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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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l de carotte (1894)

르나르의 문명을 일약 높여 준 장편소설.

이미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주인공 ‘홍당무’를 중심으로 한 많은 단문에 수편의 글을 더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 뒤 단막물(單幕物)로 극화하여 호평을 받았다.

‘홍당무’는 붉은 머리털에다 주근깨 투성이 소년, 언제나 매정하고 고집센 어머니의 심한 구박으로 시달림을 받는다. 두 사람의 대립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 말없는 아버지, 그리고 형과 누나, 루피크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통하여 착실하게 행동하려는 ‘홍당무’의 모습을 유머가 넘치는 정확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작자는 ‘홍당무’ 속에 숨은 어린아이다운 교활·잔학성·허영심 등을 날카롭게 관찰하여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기성관념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아이들의 참다운 모습을 응시한 유니크한 작품이다. 더욱 ‘홍당무’ 일가(一家)는 작가의 소년시대의 가정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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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Becque (1837-1899)

프랑스 극작가.

파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몇 편의 습작을 썼으나 모두 실패로 그쳤으며 <북(베틀)>(1878)과 <정절녀(貞節女)>(1880)에서 재능이 조금 인정되었다. 1882년 자연주의 연극의 획기적인 작품이 된 <까마귀떼>가 상연되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외에 <파리의 여인>(1885)과 미완의 <어릿광대>가 있다. 빈곤 가운데 국립의료원(國立醫療院)에서 죽었고, 죽은 뒤에 겨우 사실(寫實)극의 극작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앙트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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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Antoine (1857-1943)

프랑스 연출가·배우.

리모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스 회사의 사원으로 일한 그는 1887년 연극 혁신의 열의에 불타 자유극장을 설립하였다. 부채(負債)에 시달리면서도 상업에 편승하지 않는 무명작가의 희곡과 외국 작품을 소개하여 근대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자유극장이 세상에 내어보낸 신인에는 포르트리쉬(1849-1930) 등이 있다.

로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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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ond Rostand (1868-1916)

프랑스 극작가.

마르세유 출생. 시재(詩才)와 기지를 종횡으로 휘두른 희곡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를 발표하여 자연주의 연극에 권태를 느낀 당시의 관객에게 참신한 감동을 주어 일약 유명해졌다. 문학사적으로도 위고, 뒤마 페르 등의 유풍을 뒤따른 낭만파 연극을 일시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기타 시극 <수리 새끼>(1900)와 말년에 실험적으로 시도한 우화극 <샹트클레르>(1910) 등이 있다.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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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ano de Bergerac (1897)

로스탕의 희곡. 5막 운문(韻文).

웅변과 시재로 이름높은 검객(劍客) 시라노는 남달리 큰 코를 가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촌 여동생 록산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록산느는 미남인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두 사람의 중매를 선다. 결혼 직후 크리스티앙은 전사한다. 그 후 15년간 매주 토요일마다 시라노는 상부(喪夫)한 록산느를 위로코자 방문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노린 적의 계략으로 빈사(瀕死)의 중상을 입는다. 그가 숨질 때에야 록산느는 비로소 그의 사랑을 깨닫는다.

로스탕은 17세기에 실재한 작가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를 모델로 삼고 정열과 골계기질을 뒤섞어 이 로맨틱한 주인공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줄거리가 재미있고 대사(臺辭)의 아름다움, 또 초연 때에 시라노로 분장한 코크랑의 명연기로 당시의 연극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코메디 프랑세즈 등에서 상연되고 있다.

빌리에 드 릴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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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de 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

프랑스 시인·소설가·극작가.

프랑스 유수의 명문 귀족의 후예라 한다. 세속적인 생활이 싫어 평생을 빈곤에 허덕였다. 그는 제2제정기 부르주아 사회의 물질주의와 공리주의를 격렬하게 고발하고〔단편집 <잔혹한 이야기>(1883)〕 정신의 지고성(至高性)을 믿으며 우열(愚劣)한 현실을 도피하여 신비로운 세계의 꿈 속에서 살았다〔희곡 <아크셀>(1890),遺稿〕 그 밖에 <시집>(1859)과 <이지스>(1863), <미래의 이브>(1886), <트리빌라 보노메>(1887) 등의 작품이 있다.

상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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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徵主義 Symbolisme

낭만파와 고답파에 대한 반동으로 포우와 보들레르의 영향하에 나온 상징주의는 협의(狹義)에 있어서 1886년경 이후 몇몇 시인 집단에 볼 수 있는 시의 경향을 가리킨다.

언어 자체의 중시와 시에 있어서 형식으로 재검토를 주장함은 공통적이나 내부에서는 엇갈린 경향을 보였으므로 이것을 이론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문학적 유파(流派)로 간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안에 두개의 큰 핵(核)-말라르메 문하에 집결한 시인들과 카페를 근거로 하여 주로 베를렌을 떠받드는 데카당파(派) 두 존재를 인정할 수가 있다.

이들 세기말의 시인집단은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상징파 시인으로서 레니에(1864-1936), 사맹(1858-1900), 베라랑(1855-1916), 기르(1862-1925) 및 로마시파(L'Ecole Ro-mane) 선언 이후 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인 모레아스(1856-1910)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또 광의(廣義)의 상징파로서는 랭보, 로트레아몽의 이름을 빠뜨릴 수 없다. 협의의 상징파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끝났다고 하겠으나 대전 후 말라르메의 직계인 발레리, 랭보의 연장인 클로델은 상징주의 최후의 영광을 초래하였다.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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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시인·비평가.화가인 부친 조제프와는 6세에 사별하고 모친은 군인이던 자크 오피크와 재혼하였다. 고독을 사랑하고 반항적이었으며 1841년에 인도양 여행에 나섰으나 모리스섬까지 갔다가 파리로 되돌아왔다. 보들레르의 시가 이국의 향수를 담게 된 것은 이 여행에서 기인한다. 귀국 후 ‘검은 비너스’란 별명의 혼혈아 잔느 뒤발과 동거하여 그녀의 관능적인 매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나 생활은 파멸적이었다. 이외에 여우(女優) 마리 도브륀과 당시 문학적 살롱의 여왕인 사바티에 부인 등 그에게 시적 영감을 준 여성은 적지 않다.

1848년의 2월혁명과 6월폭동에 참가하였지만 차츰 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어 그때부터 열중하기 시작한 미국 시인 포우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이야기>(1856)와 기타 몇 작품을 출판하였다. 이미 1845년과 이듬해 살롱에서의 평으로 미술비평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1857년에는 미리 예고한 획기적인 시집 <악의 꽃>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간행과 동시에 풍속교란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 벌금과 시 6편의 삭제를 선고받았다. 악 속에 있는 미(美)와 신(神) 없는 인간 영혼의 여러 상을 영상(映像)의 상호환기(喚起)를 통하여 묘사하는 보들레르의 시는 그의 독자적인 수법으로 상징주의의 도래를 고한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미술면에서는 드라크르와, 고야, 콘스탄탱, 귀이와 음악에 관해서는 바그너, 문학분야는 위고, 고티에, 포우, 호프만 등의 진가를 인정한 폭 넓은 비평활동의 성과도 그의 사후 <심미섭렵(審美涉獵)>(1868)과 <낭만파 예술>(1868)에 의해 정리되었다. 아편 중독자 드 쿠인시에의 공감을 표시한 <인공낙원>은 1860년에 나왔고 1864년에 이미 그 일부가 <파리의 우울>이란 제목으로 <피가로>에 발표된 산문 시편은 유고로서 1869년에, 한 영혼의 내면적 기록인 일기는 <화전(火箭)> <적나라한 마음>이란 제목으로 1909년에 발표되었다.

만년에는 건강이 나빴으며 1864년 강연차 벨기에에 가서 1866년 뇌일혈(腦溢血)로 졸도하여 이듬해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사망했다.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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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leurs du mal (1857)

브들레르 시집

발간하자 곧 풍속문란의 혐의로 압수당하여 100프랑의 벌금과 시 6편의 삭제를 언도받았다. 시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1862년에 새로 35편을 더하여 <우울과 이상(理想)> <파리 풍경> <술>

<악의 꽃> <반역> <죽음>의 6부로 나누어 엮은 재판(再版)을 출판하였다. 사후(死後)에 한 권의 전집으로, 더욱이 1868년에는 시편을 증보(增補)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보들레르의 의도가 아니다.

현대 세계 서정시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이 시집은 당시 르콩트 드 릴 등이 “참신한 창의”란 칭찬을 하였고 위고가 “새로운 전률(戰慄)을 창조했다”고 격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영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상징파가 융성기에 이르른 때였다. 비유와 유추(類推)를 구사하고 감각적 요소를 통하여 초감각적인 것과의 교감(交感)을 기도하는 브들레르의 사상은 시편 <교감>에서 “인간, 상징의 숲을 거쳐 이곳을 지나도다”와 “향내와 빛깔과 물체의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고 표현한 시구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시인이 번민하는 혼은 역시 삭제(削除)의 시편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에로틱한 정경과 미에까지 승화한 악을 통해서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베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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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Verlaine (1844-1896)

프랑스 시인.

로렌 지방 메스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1851년 양친과 같이 파리로 갔다. 보나파르트 고등중학교에 다니면서 문학서적을 탐독하였고, 조카인 에리제와의 불행한 사랑을 잊기 위하여 술을 마셨다. 처녀시집 <사튀르니앙 시집>(1866)에는 그녀에 대한 사랑과 보들레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파리 시청에 근무하는 한편 독자적인 시경(詩經)을 개척하여 <화려한 향연>(1896), <좋은 노래>(1870)의 시집에는 우아하고 유동적인 음악성과 인상파적인 이미지가 넘쳤고, 마틸드 모테와의 결혼생활도 평온하였다.

그러나 파리 코뮌의 난(亂)에 휩쓸려 직장을 잃은 후에 1871년 9월 랭보가 파리에 나타나자 이 소년 시인에 매혹되어 가정도 버리고 랭보와 같이 벨기에를 경유하여 런던에 갔다. 1873년 권총으로 랭보를 쏘아 1년 반의 옥중생활을 보냈다. 몽스의 감옥에서 상(想)을 얻어 “무엇보다 먼저 음악을”이라는 유명한 시구로 시작되는 시편 <시법(詩法)>을 포함한 <말없는 연가>(1874)와 카톨릭을 향한 회심(回心)을 나타낸 <예지(叡智)>(1881)를 발표하였다. 상징주의 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 이후도 많은 시를 발표하고 명성도 얻었지만 생활은 난잡하여 만년에는 술과 매춘부를 반려로 궁핍 속에서 죽었다. 시집 이외에 <저주받은 시인들>(1884) 등이 수록된 시인론(詩人論)과 수상(隨想)이 있다.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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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Rimbaud (1854-1891)

프랑스 시인. 상징주의의 선구자.

아르덴의 샤를빌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보병 대위이고 모친은 지주의 딸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발군(拔群)의 모범생이었으나, 차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방랑도 하게 되어 16세로 학업을 포기한다. 이 전후에 쓴 여러 시에는 그의 그리스도교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과격한 혐오감이 가득 차 있다. 1871년 5월에 유명한 ‘보는 자(Voyant=천리안이라는 뜻)의 설(說)’(그가 시인에게 이 자격을 우선 요구한 것은, 시인은 우주의 모든 것을 투시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을 제창하여 이 새로운 문학적 실험에 들어갔다. 얼마 뒤 <주정선(酒酊船)>을 쓰고서는 베를렌을 만나려고 파리로 나온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파멸적인 생활을 보냈다. 브뤼셀의 권총 저격사건으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 2년간의 이상한 체험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훌륭하게 정착되어 있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의 열의가 차츰 식어 실제적인 직업을 구하고자 분주하게 다닌 한편 환상적인 <일루미나 시옹>(1886) 산문은 대부분 이 시기에 썼다고 추정된다. 이 산문 시집은 <지옥의 계절>과 함께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을 이룬다고 하지만, 후자는 거친 그림자를 숨기고 그의 상상력에 의하여 해체된 현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시적 현실에 다시 구축되고 있다.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은 다른 시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가 넘어서부터는 문학을 단념하여 시를 황금과 상품으로 맞바꾸어 유럽, 근동(近東) 아프리카를 무대로 상인 탐험가가 되어 파란 많은 후반생을 보냈다.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의 영향은 상징주의와 쉬르레알리즘을 뚫어서 현대시에도 파급하여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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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saison en enfer (1873)

고백적 산문시. 랭보 작.

브뤼셀의 권총사건으로 베를렌과 이별한 직후에 완성을 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보는 자(Voyant)’가 되고자 했던 랭보가 직면한 그리스도교와의 대결, 예술상·생활상의 착란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패배를 자인하면서도 다시 살아보려는 야수 같은 몸부림이 강렬한 이미지로 부각되어 있다.

말라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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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ane Mallarme (1842-1898)

시인.

대장성 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 13-14세기경부터 시작(詩作)을 시도하여,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소년시절의 시는 50편을 넘으며 1857년에 포우와 보들레르의 존재를 안 것이 그의 일생의 진로를 결정하였다. 특히 1861년 <악의 꽃>의 탐닉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극복하여 독자적인 시를 만드는 일이 당면의 목표가 되었다. 1871년 파리에 정주할 때까지 지방의 고등중학교 영어교사를 역임하는

동안에 포우의 시관(詩觀)을 도약대(跳躍臺)로 삼아 보들레르의 영향을 이탈, 더 넘어서서 “세계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쓰여져야 할 유일무이의 순수 저작(著作)”이라는 장대한 ‘저작’의 미래상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간 제1차 <현대 고답(高踏)시집>(1866)에 투고한 초기의 시로 시단(詩壇)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1864년에 시작한 장시 <에로디아드>의 창작을 계기로 시인의 개인적 의도를 초월한 ‘시’ 바로 그것의 본연의 자세에 관한 전대미답(前代未踏)의 탐구를 수행하였다. 1871년 이후 말라르메 전기 시집의 정점을 이루는 19세기 서정시의 최고 걸작 <에로디아드(舞臺)>(1871), <반수신(半獸神)의 오후>를 발표하였다. <큰 까마귀>를 비롯하여 포우의 시를 계속 번역해내는 한편 ‘저작’의 구현이고 동시에 ‘시도’인 후기 소네트의 창작 및 퇴고(推敲)를 아울러 병행하여 이들을 1884년 이후 이어서 발표하여 작자가 평생에 두 번인 자작시편을 엄선하여 간행한 <말라르메의 시>(릐뷔 안데팡당트 판(版) 1887. 데망 판(版) 1899)의 핵심이 되었다. 장시 <장송(葬送)의 건배(乾杯)>(1872)로 시작되는 일련의 송시(頌詩)와 말라르메의 후기 시집을 형성하는 소네트 군(群)은 무릇 어느 것에나 단어에 이니셔티브를 부여하면서 정성껏 구축한 자기 완성적인 언어의 건축이었으며 국어(國語)에 의한 표현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앞서 1877년경부터 많은 친구가 그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화요회(火曜會)’가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1890년대에 들면서 발레리, 지드를 비롯하여 다음에 문학을 담당할 준재(俊才) 거의 모두가 말라르메에게 집결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5년 이후에는 다년간의 사색을 결정(結晶)한 문학론이 여러 잡지에 발표되어 이들 산문시와 함께 <소요유(逍遙遊)>(1897)에 집대성되었다. 문예의 근본적 존재방식을 깊이 통찰한 이들 산문작품은 특히 현대 프랑스 문학의 선구자로서, 그것이 제기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현대에 계승되고 있다.

또 만년의 산문시 <주사위의 일척(一擲)>(잡지 발표, 1897)은 특수한 조판과 7종류의 활자를 사용하여 시화(詩化)된 내면의 파동을 그냥 그대로 시각적인 효과로서 지면에 정치(定置)시킨 공전의 시도이며, 이로써 시집은 ‘서적’이라는 육체를 얻어 우주적인 랑데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산문시를 더욱 퇴고하여 정진할 무렵인 1898년 가을, 대시인은 바르방의 별장에서 급서(急逝)하였다.

로트레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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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treamont (1846-1870)

프랑스 시인. 본명 이지도르 뒤카스.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에서 출생한 뒤에 모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마쳤다. 그는 짧은 일생에 이상한 산문시집 <말도로르의 노래>(1869)를 남겼다. 이 작품은 인간과 신과 사회에 대하여 불신과 저주를 퍼부은 이상한 환상과 절망적 광란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를 밝혀 낸 시인으로서 1930년대의 쉬르레알리즘의 시인들에게 재평가를 받았으며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테를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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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Maeterlinck (1862-1949)

벨기에 상징파 시인·극작가.

겐트(Ghent)에서 태어나 24세에 파리로 와 상징주의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처녀시집 <온실(溫室)>(1889)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그의 본령(本領)은 극작가로서 상징주의 비극을 창작코자 하였다. 신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참혹한 운명에 조종되는 인간의 고통이 간소한 필치로 묘사된 <펠레아스와 멜리상드>(1892), <파랑새> 등의 걸작이 있다. 동시에 에세이로서 <빈자(貧者)의 보물>(1896) 등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낙천적인 도덕을 역설하여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고 있다. 1911년 노벨상을 받았다.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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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seau bleu (1908)

마테를링크 작 희곡.

치르치르와 미치르라는 두 소년소녀가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구하기 위해 과거의 나라와 밤의 나라, 그리고 미래의 나라를 편력해 보지만 결국 파랑새는 아버지가 일하는 나뭇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이란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몸 가까이 있다고 설득한 상징적인 몽상극(夢想劇)이다.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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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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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文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프랑스의 정치·경제·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와 사회의 관련이 더욱 강화된 20세기 문학은 두 번의 대전을 경계로 하여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에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에 대가(大家)로서 존경을 받은 것은 이미 자연주의 시대부터 비판적이던 프랑스, 로티, 부르제, 바레스 등이었다.

이 시기의 사조는 텐으로 대표되는 실증주의·과학주의에서 베르그송으로 대표되는 반(反)지성주의로 이행한다. 이 동향은 상징주의 영향과 중첩하여 20세기 문학의 주조(主調)를 만들어 나갔다. 20세기 문학의 참다운 개척자인 클로델, 지드, 프루스트, 발레리 등은 모두 이러한 방향에서 출발하여 전후(戰後)의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또 인도주의적·사회주의적·카톨릭적인 흐름의 원천이 되는 롤랑과 페기 및 쉬르레알리즘의 선구적 시인인 아폴리네르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기성가치(旣成價値)의 부정과 정신적 불안으로서 문학에 나타났는데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즘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이러한 동향의 배후에 있는 프로이트의 영향도 빠뜨릴 수 없다. 양차 세계대전 간에는 전기한 대가들 이외에 여러 작가가 독자적인 일을 하였다.

시(詩)에서는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콕토가 소설에서는 콜레트, 모르와, 몽테를랑과 모리아크 등의 카톨릭 작가들이 있고 연극에서는 지로두, 살라크루, 아누이 등이 활동하였다. 1920년대 문학은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1930년대가 되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로맹 등의 대하(大河) 소설과 말로, 생텍쥐페리 등 이른바 행동주의 문학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1930년경에 시작한 세계적인 경제공황(經濟恐慌)과 파시즘의 대두 등 긴장된 사회정세와 관련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먼저 저항의 문학을 낳았다. 전후는 사르트르를 지도자로 하는 실존주의 문학이 화려하게 등장하여 인간의 고독과 불안과 번민을 드러내어 문학과 정치의 관련을 강조했다. 이것은 엄격한 역사상황에 직면한 시대의 요구에 잘 합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되어 일단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이룩하자 비정치적인 문학을 구하는 바람도 일어났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사강의 소설은 그 단적인 표시이다. 한층 더 중요한 동향으로서 소설에 있어서 누보 르망, 연극에는 앙티데아트르가 등장하였다. 양자는 다같이 정치와 절연하여 사실주의 실존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현실을 포착하려는 것으로 이미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누보 르망은 프랑스 문학에서 퇴보하는 경향이 되었다. 사로트는 주로 희곡에 전념했고, 로브 그리예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오늘날 프랑스 작가들은 다양한 종류의 소설을 시도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힘찬 시적 문체에 담고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인간의 정체성과 의사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파트릭 모디아노는 개인의 추억이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점령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70년에는 페미니즘 경향이 나타나 기존에 활동을 한 여성 작가들이 주목을 끌었고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여성들이 현대문학을 텍스트로 삼아 표현과 여성 등장인물들을 분석함으로써 문학 전반을 재점검했다.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엘렌식수를

들 수 있다. 특히 모니크 위티그는 과거의 문학 언어가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표현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페미니즘 작가이다. 20세기 후반에도 시는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브 본푸아는 복잡하고 함축된 언어로 철학적인 시를, 장클로드 르나르는 신비로운 경험을 시로 쓰고 있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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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ole France (1884-1924)

파리 서적상(書籍商)의 아들로 태어났다. 회의주의(懷疑主義)작가로서 인간의 연약함에 연민의 정을 표시하고, 20세기 초엽에는 세계최대의 작가라 일컬어졌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인기가 떨어졌다. 그의 작품에는 델리키트한 비웃음이 있고 문장은 고전적인 평탄함을 가지고 있다. 1921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실베스트르 보나르의 죄(罪)>(1881), <내 벗의 글>(1881), <요리점 레느페도크 정(亭)>(1893), <붉은 백합>(1894), <신(神)들은 목마르다> 등이 대표작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드 카이아베 부인 살롱의 소위 주인격이었고, <흰 돌 위에서>(1905)는 ‘황화(黃禍)’와 ‘백화(白禍)’를 다룬 사상소설이다.

신들은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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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Dieux ont soif (1912)

아나톨 프랑스 장편소설.

프랑스 혁명에서 취재한 소설로서 혁명을 미화한 것이 아니고 동란시대의 인간성을 묘사한 훌륭한 작품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보수세력을 비난하였으나 혁명과 사회제도의 변혁에 따라서 인간성도 변한다는 설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소년시대부터 책방에서 얻은 역사지식을 살린 그의 대표작이다.

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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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Loti (1850-1923)

프랑스 해군장교로서 소설가. 본명은 줄리앙 비오.

비스케 만(灣)을 바라보는 항구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배타는 집안이어서 유년시대부터 바다의 매력에 이끌렸다. 1867년 브레스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장교로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섬세하고 다감한 필치로 여러 곳의 풍물과 이국 여성과의 사랑을 엮어 이국취미의 특이한 문학을 구축하였다. 이스탄불의 비련을 말한 <아지야데>(1879), 타히티의 풍치와 관능을 묘사한 <로티의 결혼>(1980), 세네갈의 사막에서 작열(灼熱)하는 애욕을 그린 <아프리카 기병(騎兵)>(1881), 나가사키의 일본 아가씨와 메이지 중기의 세상을 부각한 <국화부인>(1887) 등은 프랑스 문학 중 이국 취미의 정수(精粹)이다.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인생, 열렬하나 덧없는 사랑 등 그의 작품에는 나그네의 애수가 서려 있다. 특히 결혼 8일 만에 아이슬란드의 바다로 모습을 감춘 브르타뉴의 어부 이야기인 <빙도(氷島)의 어부>(1886), 또는 바스크 청년의 다하지 못한 사랑을 그린 <라문쵸(Ramuncho)>(1897)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작품이다.

부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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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Bourget (1852-1935)

프랑스 문예비평가·소설가.

그의 활동은 먼저 평론가로 출발하여 <현대 심리논총(論叢)>(1883)에서 1880년대 작가들의 염세사상을 해명하였다. <가혹한 수수께끼>(1885)로서 소설가로 데뷔하여 처음에는 영국풍(英國風)의 상류생활 서술과 여성심리의 묘사에 전념하여 자연주의의 붕괴와 때를 맞추어 심리소설의 시대를 구축하였다. <사랑의 죄>(1886), <앙드레 코르네리스>(1887), <거짓말>(1887) 등은 그런 종류의 걸작이다.

그러나 졸라의 문학과 그를 뒷받침하는 텐의 철학을 융합한 <제자>(1889) 이후는 <역참(驛站)>(1902)을 비롯하여 <이혼>(1904), <망명자>(1907), <낮의 악마>(1914), <죽음의 의미>(1915), <네메지스>(1918), <감옥>(1923) 등 어느 것이나 다 그리스도교 윤리관을 골자로 하여 가정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 가운데는 편견에 흘러 읽기 거북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로써 분열된 인심의 현실에 구심적인 해석을 가하여 국민의 정신적 동향을 정하려던 열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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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Barres (1862-1923)

프랑스 작가·시사평론가·정치가.

로랜에서 태어나 보불전쟁(普佛戰爭) 때 패군의 참상을 어린눈으로 직접 바라본 것이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3년 파리에 나와 문단에 들어갔으나 정치적 혼란과 독일사상의 침입 및 결정론의 무기력에 반발하여 에고티즘을 강조하여 예리하고 섬세한 자아의 특이한 감수성에 지상(至上)의 가치를 부여했다. 3부작의 <자아 예배(禮拜)>(1888-91)의 진지한 개인주의는 당시 젊은층을 매혹케 하였다.

더욱이 드레퓌스 사건에 의한 각성(覺醒)에서 전통주의에 입각한 국민주의로 발전하여 3부작 <국민정력의 소설>(1877-1902)을 썼다. 1889년 대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확실히 그는 19세기 이래의 정치·철학·문학의 각 방면에 걸친 고민을 한몸에 진 사람으로서, 그의 사상의 발전은 바로 프랑스 자체의 어려운 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시사평론 <대전 연대기>(1920-24)와 사후 간행된 <나의 수첩> 전14권(1929-57)은 그의 순수한 논의를 집약하고 있다. 그 밖에 <영감(靈感)의 언덕>(1913), <오롱트 강변의 뜰>(1922) 등의 걸작이 있다.

필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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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Louis Philippe (1874-1909)

프랑스 소설가.

중부 프랑스의 세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목화공(木靴工)이며 조모는 구걸을 하였다고 한다. 1896년 파리로 나와서 사회예술을 표방하는 문예잡지 <랑클로>의 동인이 되어 시청 하급공무원으로서 빈궁 속에서 창작을 계속하였다. 그는 계급투쟁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내력(來歷)부터가 극빈한 사람이었으므로 근대자본주의가 대두하려던 시대에 있어서 관념적인 사변(思辨)에 따르지 않고 하층계급의 묘사에 전념하여 그것을 소박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였다.

프랑스 문학에서 드물 만큼 차분하게 읽히는 작가이다. 소설작품에는 <네 편의 슬픈 사랑 이야기>(1897), <순한 마들레느와 가엾은 마리>(1898), <어머니와 자식>(1900), <뷔뷔드 몽파르나스>(1901), <페르드리 영감>(1902), <마리 드나뒤>(1904), 그리고 사후에 출판된 단편소설집 <작은 도시에서>(1910), <샤를 블랑샤르>(1913) 등과

서간집 <젊은날의 편지>(1911)와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1928) 등이 있다.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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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 소설가·극작가·평론가.

중부 프랑스의 클라므시에서 출생했다. 가친의 혈통은 대대로 공증인으로서 낙천적이었으나 모친은 카톨릭 신앙이 깊었다. 그는 모친의 금욕적 기질과 음악을 애호하는 점을 이어받았다. 1880년 롤랑 일가는 자식의 교육 때문에 일체를 희생하고 파리로 이사했다. 가족의 이러한 기대의 무거운 짐과 세기말에 있어서 대도회의 혼탁한 풍조로 그는 질식할 것 같았으나 베토벤의 음악과 셰익스피어의 예술에서 영혼의 구제를 얻는다. 두 번의 입시(入試) 실패 후 1886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했다. 1889년에 졸업, 로마에 유학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보고 르네상스기의 거장(巨匠)들의 위대함을 호흡한다. <장크리스토프>의 모습이 비로소 그 작자의 마음속에 보였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당시 로마에 있었던 독일 노부인 마르비다와 사귀어 그의 이상주의에서 일생에 걸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귀국 후에는 모교와 소르본에서 교수로 음악사의 강의도 하면서 음악관계의 여러 논문을 집필한다. 한편 이미 극작의 일도 진척을 보아 1898년에 드레피스 사건의 와중에서 <늑대들>을, 1902년에 보아 전쟁이 말해 주는 유럽의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때는 왔다>를 써 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롤랑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베토벤의 일생>(1903)이었다. 그의 많은 전기작품에 앞서 쓰여진 이 작품은 영웅적 정신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위대했던 사람들만을 나는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교수직도 사직한 롤랑은 그 후 <장크리스토프>의 집필에 전념한다(1912년 완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당시 그는 스위스 여행 중이어서 그대로 거기에 체류하며 반전적 입장에서 <요란(擾亂)을 넘어서>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비난과 중상을 참아가며 인간적 정의의 입장을 탐구해 나간다. 전쟁의 체험은 그에게 두 개의 작품 <클레랑보>(1920)와 <피에르와 뤼스>(1920)를 내게 하였다. 이 전쟁에서 제국주의의 해독을 인정한 그는 러시아 혁명에 공감하여 얼마 뒤에 대두하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싸움을 개시한다. 또 다른 한편에는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인도의 정신에 깊은 관심을 쏟는다. 창작면에는 1922년 이후 새로운 대하소설 <매혹된 영혼>에 전념하였다(1933 완성). 만년에는 태어난 고향 근처 베즈레에 거처를 정하여 그의 평생 마음의 반려였던 베토벤의 음악에의 감사를 <베토벤 연구>(1928-1943)에서 결정(結晶)지었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자라는 범위를 초월한 그의 일생과 업적은 항상 전인간적인 방향을 지향하였고 현대의 양심으로써 억압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장 크리스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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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Christophe (1904-12)

로맹 롤랑 장편소설.

10권으로 된 이 대하소설―<여명> <아침> <청춘> <반항> <광장의 저자> <앙투아네트> <집안> <여성 친구들> <불타는 가시나무> <새로운 날>―은 최초 페기의 <반월수첩(半月手帖)>지에 발표되여 독자의 열광적인 공감을 얻었고 아카데미 문학대상(1913) 및 노벨문학상(1916)을 수상하였다. 롤랑 자신은 이 작품을 음악소설이라고 불렀다. 이 소설의 전체에 말하자면 교향악적인 감정의 통일을 부여하려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라인강가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프는 그 일생 중에 자유와 진실을 위해 사회의 갖가지 인습(因習)과 악덕에 대하여 투쟁한다. 연애·우정·절망, 조용하고 깊은 사랑을 겪으면서 또 몇 번이나 고통으로 쓰러지면서도 최후에 크리스토프는 생과 사의 조화에 도달한다. ‘생’을 긍정하는 감정이 이 작품의 저류(底流)가 되어 있다. 이것은 보불 전쟁(普佛戰爭)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야(前夜)까지의 유럽 문명과 예술과 도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글인 동시에 또 산다는 것에 신앙과 용기를 독자에게 심어주는 영혼의 노래이기도 하다.

매혹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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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e enchantee (1922-1933)

로맹 롤랑 장편소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 대한 커다란 실망을 느낀 롤랑은 그 후 <안네와 실비> <여름> <아들과 자식> <예고하는 자(者)>의 4부로 되는 새로운 대하소설에 착수하였다. 이 작품은 자유를 추구하는 한 사람의 여성이 오랜 시일을 겪으며 환혹(幻惑)에서 풀려나는 것을 엮은 것이다.

부유한 중산계급 집안의 외딸 안네트는 자기 계급의 도덕적 허위를 거부하여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채 약혼을 파기하고 이어 파산한다. 이렇게 하여 작품 전체는 안네트와 아들 마르크의 진실과 자유를 위한 싸움의 기록이 된다. 전쟁, 소비에트 러시아의 출현, 더욱이 파시즘의 대두 등 오늘날 우리들 주변의 역사 속에서 참다운 인간으로서 살아보려는 한 영혼을 거기에서 읽을 수 있다.

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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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Peguy (1873-1914)

프랑스 시인·평론가.

오를레앙에서 출생하였다.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던졌으나 공리주의에 환멸을 느껴 순수하고 자유로운 발언을 위한 발판으로써 <반월수첩(半月手帖)>지를 창간(1900), 롤랑 등의 기고를 얻음과 동시에 자신도 많은 애국적이며 정신주의적인 평론과 시극 <잔다르크의 신비한 사랑>(1910)과 8천 행에 걸친 장시 <예바>(1913) 등을 실었다. 그간 카톨릭으로 회심(回心)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르느의 전선에서 전사했다.

클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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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laudel (1868-1955)

프랑스 시인·극작가·외교관.

샹파뉴 지방의 한촌(寒村)에서 출생. 랭보의 시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말라르메의 ‘화요회(火曜會)’에도 참가하였다. 18세 때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일생에 걸쳐 은총과 구제의 문제를 중심 주제(主題)로서 추구하였다. 중국·일본·미국·유럽 각지의 외교관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는 한편 정력적으로 창작도 해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시 <오대송가(五大頌歌)>(1910), <삼성(三聲)영창(詠唱)>(1914), 희곡에 <정오의 분할>(1906), <마리아에의 고백>(1912), <사탱의 구두>(1929)가 있다. 특히 <사탱의 구두>는 전세계를 무대로 한 웅대한 구상의 바탕에 다채로운 표현법을 가지고 연마된 전체극(全體劇) 이어서 그의 정점을 표시한 것이다. 자연주의적 심리극을 배제하여 연극에 상징주의의 숨결을 트게 한 공은 크다. 만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천거되고 리옹 근처의 브랑그 성관(城館)에 은거하여 <성서>의 주석에 전념하였다.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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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Gide (1869-1951)

프랑스 소설가·평론가.

파리의 메디시스가(街)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프랑스의 위제스 출신인 파리 대학 법률교수였고 모친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의 부유한 명문 롱드 가문 출신이다. 부모 다같이 신교도. 그의 일생을 결정지었던 것은 외사촌인 마들렌 롱드(후년의 지드 부인)와의 사랑이었다.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마들린의 그림자가 전혀 서려 있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르제스 학원 재학중에 착상을 하여 21세에 발표한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手記)>(1891) 이래 그가 쓴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마들렌의 이미지를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어떤 작품은 그녀가 상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찬미로서 어떤 작품은 그녀가 구현한 것에 대한 반역으로서, 또 어떤 작품은 찬미와 반역이 과격하게 격돌하는 것도 있다. 1893년 아프리카 여행을 계기로 하여 지드 안에 잠재(潛在)하고 있던 모순이 격발하여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어지럽게 양극의 사이를 방황하게 되었다.

양극의 한쪽에는 영혼, 금욕주의, 전통적 미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육체, 관능의 환락, 양풍미속의 파괴가 있다. <팔뤼드>(1895), <지상의 양식>(1897), <배덕자>(1902), <좁은 문> <교황청의 지하실>(1914), <전원교향악> 등의 작품들은 모두가 그때그때마다 그 양극으로 흔들린 추의 진동의 기록이며 지드는 어느 작품에서 비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레시(r

cits)라 이름하고, 또 어느 작품은 희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소티(sotie)라 이름을 붙였다.

<사전군들>은 이 양극의 진동을 모두 포괄한 듯한 작품형식을 탐구한 결과로서 지드는 이것에 비로소 로망(roman)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이 로망이 그 후의 현대소설에 파급한 영향은 매우 컸다. <NRF>지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부르주아 사회의 악을 고발해 마지않던 경세가(警世歌)로서의 공적과 함께 지드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고 있다. 1947년 그의 전작품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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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orte etroite (1909)

심리소설. 지드 작.

작자의 자전적 요소가 짙은 작품으로 여주인공 알리사는 작가의 외사촌이며 뒤에는 아내가 된 마들렌의 영상(影像)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알리사는 사촌동생 제롬과의 지상에서의 사랑을 단념하고 ‘힘을 다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천국에서의 영혼합일을 꿈꾼다.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모친의 불륜을 보아버린 절망감 때문이었으나 그녀의 동생 줄리에트가 제롬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게된 데서 오는 자기 희생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고행(苦行)은 알리사에게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덕(德)’과 천국과 신에 대한 신앙까지 잃고 요양원에서 패배의 짧은 일생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롬은 어릴 때부터 2년 연상의 사촌누이 알리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감정에는 신비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윽고 알리사는 그녀의 동생 줄리에트가 마찬가지로 제롬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줄리에트는 언니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사랑을 단념하고, 연상의 구혼자와 결호하고 만다.

알리사는 단지 침묵을 지킬 뿐으로 제롬을 피하게 된다. 알리사는 사촌 동생 제롬과의 지상에서의 사랑을 단념하고, 힘을 다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천국에서의 영혼 합일을 꿈꾼다. 이러한 알리사의 태도에 제롬은 절망하게 된다.

3년 동안 떨어져 있던 그녀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애정을 되살리도록 말하지만 “안녕, 지금이 시작이에요…무엇보다도 좋은 일은”이라고 말하며 제롬을 문 밖으로 나가게 한다. 그로부터 1개월 후에 알리사는 죽는다.

그녀의 일기가 남겨져, 그 속에서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밀이 알려진다.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완전한 그리스도교도가 되려는 것으로서, 그러한 완전이란 사랑을 물리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알리사가 찾고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행복보다도 제롬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롬을 자기 자신에게 떼어놓음으로써 성서에서 말하는 어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좁은문’쪽으로 그 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일견 감미로운 이 연애소설에는 청교도적 신비주의에 대한 통열한 조롱이 숨겨져 있고 관능 및 환락의 추구가 좌절된 ‘배덕자’의 비극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비극이 묘사되어 있다.

전원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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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ymphonie (1919)

심리소설. 지드 작.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지드는 몇몇 지우(知友)들로부터 카톨릭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에는 계명(誡命)·위협·금제(禁制) 등은 하나도 없으니까 율법(律法)의 종교를 배척하고 자유로운 사랑의 종교만을 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목사와 그 아들의 대립을 드라마로 만들어서 목사는 자유로운 사랑으로 눈먼 소녀 제르트리드를 길러갔다. 그러나 목사의 무사(無私)의 사랑에는 무의식 가운데 남성의 색욕(色慾)이 섞여 있다. 제르트리드는 개안과 동시에 자기의 것도 하나의 미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전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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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aux-Monnayeurs (1926)

장편소설. 지드 작. 작가가 로망(roman)이라 호칭했던 유일한 작품으로 그 이전의 작품은 레시(recits) 또는 소티(sotie)라 하였다. 로망이란 인생의 모든 진폭을 포괄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레시나 소티는 인생의 단편밖에는 묘사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오해에 의하여 또는 가면에 의하여, 즉 위조지폐를 사용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태 전모를 용이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지드는 이 로망으로 인생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글 가운데 <사전군들>이란 같은 제목의 소설을 구상하는 소설가가 등장하는 것도, 작품의 부록으로 창작 노트 <사전군들의 일기>가 발표된 것도 이러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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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 소설가.

파리 교외의 오투유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아드리앙 프루스트는 전염병 예방의학의 권위자이며 모친 장느는 유대계의 부유한 집안 딸이었다. 프루스트는 모친의 지나친 사랑 속에서 자랐다. 9세에 천식 발작을 시작으로 평생 동안 고통을 받게 된다. 1811년 콩도르세 고등중학교에 입학하고 일찍부터 문학작품을 가까이하여 학교에서 작문과 논문으로 상을 받기도 하며 재능을 발휘했다. 졸업(18세)후 군(軍)에 지원 입대하여 1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1893년 법학사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문학 살롱과 사교계에 자주 드나드는 한편 직업은 갖지 않고 문학에 열중했다.

최초의 저작 <환희와 나날>(1896)은 고등중학시절부터 동인지나 그 밖에 발표했던 소품과 단편을 모은 것이다. 1895년부터 1899년에 걸쳐서 3인칭 형식의 자서전적인 장편소설 <장 상퇴유>(1952)를 시도하였으나 미완으로 그쳤다.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聖書)>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하였다(1904, 1906). 후에 <모작(模作)과 잡록(雜錄)>(1919)과 <시평집(時評集)>(1927)에 수록한 평론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활동은 모두 ‘유일하고 참다운 글’을 쓰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친을 여윈 정신적 타격을 넘어서 1908년부터 착수한 긴 평론 <생트뵈브에 반대한다>(1954)를 모체로 하여 나온 것이다. 이후 프루스트는 유명한 콜크 벽의 거실에서 죽을 무렵까지 이 대작에 몰두하였다. 제2편으로 공쿠르상(賞)을 받아 일약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걸작으로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을 끼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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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27)

1인칭 형식의 자서전적 장편소설. 프루스트 작.

제1편 <스왕가(家) 쪽으로>(1913), 제2편 <꽃피는 아가씨의 그늘에>(1918)(공쿠르상 수상), 제3편 <게르망트 쪽>(1920-21), 제4편 <소돔과 고모라>(1921-22), 제5편 <갇힌 여자>(1923), 제6편 <사라진 알 베르티느>(뒤에 <도망간 여자>로 수정)(1925), 제7편 <다시 찾은 시간>(1927). 제5편 이하는 작자의 사후에 간행되어 충분한 퇴고(推敲)를 하지 않은 것이다.

전편이 ‘기억현상(記憶現象)을 연결의 눈금으로 하여’ 전개되어 보통 의미의 줄거리나 시간적 순서가 결여되어 있지만 중심이 되는 주제는 주인공이 ‘천직(天職)’을 찾을 때까지의 정신적 편력이다. 주인공인 ‘나’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나 나이가 들어도 그 확신을 이룩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해 파괴되고 수포가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최후에 뜻밖에도 시간의 파괴작용에서 ‘참다운 현실’을 구제하는 무의지적(無意志的) 기억의 역할을 이해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정착시키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천직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깊고 예리한 심리분석, 성도착(性倒錯)과 무의식의 세계 등 미지의 영역개척, 19세기 말의 시민사회와 귀족사회의 묘사라는 점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참다운 현실은 기억 속에 있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사실주의적 소설관을 무너뜨린 점은 중요한 의미가 인정된다.

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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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Valery (1871-1945)

프랑스 시인·사상가.

코르시카 출신인 부친과 북이탈리아 출신의 모친 사이에서 지중해의 항구 세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말라르메에 사사(師事)하여 상징주의에 감화(感化)하여 <구수첩(舊手帖)>(1920)에 실려 있는 우아한 시를 썼으나 1892년 10월 태풍의 한밤에 있었던 괴로운 사색의 결과, 감동과 예술적 영감의 애매함을 거부하고 엄밀하고 명석한 정신의 ‘훈련’에 전념할 결의를 하였다. 두 에세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서설(方法序說)>(1895)과 <테스트 씨와의 하룻밤>은 이 지적 청춘의 엄격한 이상을 극한까지 묘사하고 있다.

그 후 얼마간 문학활동을 중단하고 표나지 않는 관리나 비서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사고·감정·심리의 법칙을 수학적 방법에 따라 해명코자 노력하여 고투의 과정을 32권이나 되는 방대한 노트에 기록해 나갔다. 걸작 <젊은 파르크>로 긴 침묵을 깨뜨린 것도 그의 벗인 지드의 권유에 의한 우연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매혹>(1922)에 수록한 여러 시편을 세상에 내어놓은 실마리가 되었다. 이들 시는 의식의 각성과 존재의 우연성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하면서 관능적 이미지와 음악성의 풍부한 운율(韻律)과 전통적 형식에 의한 완벽한 작품이라 하겠다.

차차로 문학적 명성을 확립하여 192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 세련된 회화와 강연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것이 발상(發想)에 불가결한 시보다도 <바리에테>(1924-1944)에 수록한 것과 같은 다채로운 산문에 있어서 보다더 투철한 지성이 생생하게 활동하고, 대화형식의 에세이 <외팔리노스>(1923)에는 신의 창조에 비길 만한 건축예술의 찬가(讚歌)와, <고정관념>(1932)에는 기지가 넘치는 두 사람의 정신의 응수(應酬)를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현실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인간이 기계나 제도의 노예가 되기 시작한 유럽 문명의 위기를 고발하여 장래를 우려하여 드디어 희곡 <나의 파우스트>(1941)에 와서는 절망적 니힐리즘에 달하였다. 1945년 7월의 국장(國葬)은 서구적 지성의 최후 상징에 대한 만가(挽歌)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테스트 씨와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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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oir

e avec M. Teste (1896)

소설. 발레리 작.

1927년 <테스트 씨>란 제목으로 출판할 때에는 <서문> <테스트 부인의 편지> <항해일지초(抄)>가 첨가되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을 말소(抹消)한다”란 자기의 신조에 충실하게,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에서 강한 자의식이 제어(制御)할 수 없는 부분을 가능한 한은 무(無)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지성의 괴물’ 테스트 씨의 극장이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언어나 동작이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부인 또는 일지를 통하여 묘사되어 있다. ‘과도한 자의식과 의지의 도취 및 정확(正確)에 대한 갈망’에 고민하던 젊은 발레리의 소설적 형식에 의한 고백으로서 우연성을 시(詩)에서 배제할 것을 이상(理想)으로 한 말라르메와 더불어 ‘수학적 아편’이라 불러서 숭배하던 포의 감화를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파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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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Jeune Parque

알렉상드랭으로 구성된 장편시. 발레리 작.

한밤중에 깨어 괴물의 도래를 불안과 기대로 예감하면서 꿈꾸는 듯한 상태에서 독백한다. 처녀신 파르크에 의탁하여 그 주제는 ‘의식하는 의식’의 눈부신 빛이 던져진 ‘관능·정서, 신체의 감각, 기억의 깊이’가 연출하는 내면극이다. 이것은 또 순수하긴 하지만 서로 메마른 미와 생명의 약동이 투쟁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후에는 유명한 <해변의 묘지>(<매혹>의 1편)의 후미 “바람이 일다. 이제 살고지고”와 같이 허무와 죽음이 아닌 동(動)과 생(生)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젊은 발레리의 이상이었던 순수정신이 무대에서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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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1868-1951)

프랑스 철학자·평론가. 본명은 에밀 샤르티에.

노르망디 모르타뉴에서 출생. 여러 곳의 고등중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여 많은 추종자와 제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모르와가 유명하다. 그는 “정신은 진리의 쓰레받기가 아니다”라 말하여 사상의 귀납과 요약을 일체하지 않고 현실에 적응한 산 사고(思考)를 통하여 대상을 파악하려 하는데, 특히 기성체제에 대한 불신과 회의적인 태도는 현대의 소크라테스 내지는 몽테뉴라 불릴 만하다.

저서는 철학 관계 이외에 문학·미술·음악·종교·역사·교육·정치·경제 다방면에 걸쳐 있고 그 대부분은 그가 창시한 짧은 ‘어록(語錄)’의 형식을 취하였다. 중요한 것에 <알랭 어록>(1908-1938), <정신과 정열에 관한 81장>(1917), <예술론>(1920), <문학론>(1933), <스탕달>(1935), <내 사색의 자취>(1936) 등이 있다.

티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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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Thibaudet (1874-1936)

프랑스 비평가.

브르고뉴의 투르뉴 출신. 상징주의와 베르그송 철학의 영향하에 비평에 있어서 독단을 배제하고 직관으로 대상과 합체하여 ‘마음의 감동을 수반하는’ 새로운 비평형식을 창시하였다.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가장 우수한 비평가라 일컬어진다. 주요한 저서는 <말라르메의 시>(1912), <플로베르론(論)>(1922) 및 사후 출판된 <근대 프랑스 문학사>(1936)이다.

아폴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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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프랑스 시인. 본명 빌헬름 드 코스트로비스키.

이탈리아인 부친과 폴란드인 모친을 부모로 하여 로마에서 태어났다. 불안정한 가정상황, 독일에 있었던 가정교사 시절의 추억과 실연, 그리고 파리에서 화가와 문인 친구들과의 교유, 낙천적 성격이나 기행(奇行), 제1차 세계대전 종군(그는 머리에 부상하여 수술 후 유행성 감기로 사망) 등이 작품에 잘 반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시집은 <알코올>(1913), <칼리그람>(1918) 등이다.

상징주의적인 복잡성을 거부하고 솔직하고 비약적인 문체, 구두점(句讀點)을 사용하지 않는 설화적(說話的)인 자유로운 표현, 퀴비즘(cubisme)과 같은 근대회화(繪畵) 기법을 모방하여 현대적 풍속과 전쟁을 시에 도입하는 등 정녕 그는 20세기 시의 선구자였다. <미라보 다리>(1912)와 같이 신선하고 우울에 찬 명작을 남김과 동시에 분방한 공상적 단편〔<암살당한 시인>(1916)〕과 미술평론에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쉬르레알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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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realisme

브르통, 아라공, 엘뤼아르 등이 추진자이며 20세기 전반(前半)의 가장 강력한 문학운동의 하나이다. 1916년 스위스에서 일어나, 예술 파괴를 제창한 다다이즘을 계승하여 주로 이성과 미적·도덕적 배려의 제약을 받지 않고 행하는 사고의 필기(自動筆記)에 의하여 의식 밑의 욕망을 해방하여 시민사회적 윤리와 미의 관념을 변혁하고자 시도하였다. 로트레아몽, 사드 등 파묻혔던 작가를 되찾아 인간 정신의 극한을 추구하여 회화 등 모든 예술을 재생(再生)한 공적은 크다.

브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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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

Breton (1896-1966)

프랑스 작가.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의관으로 소집되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법을 치료에 도입하여 큰 시사를 얻는다. 처음에는 말라르메류의 시를 썼으나 현실을 일변케 하는 ‘검은 유머’의 실행자 자크 바세와 만난다든지 아폴리네르와의 교우와 다다이즘 운동에 자극되어 수포와 공저(共著)한 <자장(磁場)>(1919)에는 무의미하고 비논리적인 언어와 영상에 넘치는 자동필기의 최초의 범례를 보였고 이어서 <쉬르레알리즘 선언>(1924)과 <쉬르레알리즘 혁명>지(誌)를 간행하여 뛰어난 시인과 화가를 모아 그 지도적 위치에 섰다.

그의 의도는 유머와 일상 속에 숨은 시적 경이의 발견, 꿈의 기술, 광기의 모방, 우연적 오브제의 진열, 떨어진 두 이미지의 비교 등의 수단으로써 예술뿐만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었다. 또한 ‘내적 경험에 대하여는 어떠한 외적 제약도 받지 않는다’는 선은 양보하지 않아 아라공 등과 인연을 끊고 <제2선언>(1930)에는 ‘생과 사, 현실과 초현실이 일치하는 지고점(至高點)’의 획득을 목표로 하여 나갔다. 1937년부터 해외로 여행하여 멕시코에서 트로츠키와 친교를 맺고 대전 중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신비적인 에로스를 칭송한 <광기의 사랑>(1937)과 <비법(秘法)17>(1943)을 냈으며, 소설 <나쟈>(1928)도 광기의 여성을 둘러싸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파리에서 마주치는 시적 우연과 ‘경련적인 미(美)’가 넘친 대표작이다. 전후에도 기관지 발행과 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정력적인 활약을 계속하였다.

엘뤼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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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Eluard (1895-1952)

프랑스 시인. 본명은 우제느 그랑데르.

파리 교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독가스로 폐를 다쳐 평생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전후 브르통, 아라공 등과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에스파냐 내란 때 인민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대표시집은 <고뇌의 수도(首都)>(1926), <사랑, 그것은 시(詩)>(1929), <정치적 진실>(1948) 등이다.

그의 시는 불연속으로 뜻밖의 이미지와 논리를 무시한 교묘한 비유로, 쉬르레알리즘의 강한 특징을 보이면서 어휘는 점차 투명해지고 내면적인 속삭임을 상기시키는 가락으로 변했다. 불안과 고뇌, 또 연애와 전쟁을 주제로 했어도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라고 그가 읊은 바와 같이 미와 사랑과 인생의 여명에의 신뢰를 언제나 잃지 아니하였던 희유(稀有)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아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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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ragon (1897-1966)

프랑스 시인·소설가.

파리에서 출생. 파리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으나 퀴비슴의 감화로 시를 썼다. 제1차 세계대전에 보조군의관으로 종군한 뒤 시집 <축화(祝化)>(1920)를 발표했다. 전후사회에 대한 반항의식에서 다다이즘 운동에 참가하여 소설 <아니세 혹은 파노라마>(1921) 등의 반역적 작품을 냈다. 이윽고 쉬르레알리즘 운동을 전개하여 시적 산문 <파리의 시골뜨기>(1926)를 썼으며 모로코 전쟁에서 반전활동에 참가하여 1927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반역적 시정신에 마르크시즘을 흡수하여 에세이 <문체론>(1928)을 썼으나 문학·정치·사생활 사이에 혼미(混迷)를 일으켜 자살 미수 후 엘자 트리요레(1896-1970)와 연애, 그리고 국제혁명작가동맹 하리코프 회의에 참석 등의 체험을 겪고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이탈한다.

시집 <박해하고 박해당하는 자>(1931)와 논설집 <사회주의 레알리즘을 위하여>(1935)는 그의 전기(轉機)를 말해 준다. 이후 연작 <현실세계>를 집필하고 반(反)파시즘 운동의 문화활동에 종사하며 1938년에 엘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레지스탕스 시기에는 <단장시집(團腸詩集)>(1941), <엘자의 동공(瞳孔)>(1942) 등의 저항시집을 써서 국민을 고무하였다. 전후 문예지 <레 레틀 프랑세즈>의 주필이 되었고, 소설 <성주간(聖週間)>(1958)과 서사시 <엘자에게 미치다>(1963) 등의 대작을 발표했고, <브랑쉬 혹은 망각>(1967)이 마지막 작품으로 그는 사랑의 문제를 일관하여 추구했다.

현실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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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實世界 (1934-1951)

연작형식의 장편소설 5부작의 총제목. 아라공 작.

<바르의 종(鐘)>(1943), <아름다운 거리>(1936, 르노드 상), <상층석(上席)의 승객>(1942), <오를레앙>(1944), 그리고 미완의 속편 <레 코뮤니스트>(1949-51)로 계속된, 전세기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 대작이다.

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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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octeau (1889-1963)

프랑스 작가 시인.

조숙한 시재(詩才) 때문에 사교계의 총아로 출발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반(反) 상징주의를 제창하고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를 옹호하여 전위예술의 기수로 변모하였다.

신선하고 기지에 넘치는 비유가 많은 시집 <오페라>(1927)와 모더니즘(modernism)의 불안과 허구의 미를 고전적 간결과 단속(斷續)적인 이미지를 가진 문체로 표현한 소설 <무서운 아이들>(1929), 신화와 전설을 교묘히 되살린 희곡 <지옥의 기계>(1934)와 영화 <영겁회귀(永劫回歸)>(1943) 등 다채로운 활약 때문에 곡예사라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의 세계에는 연애가 항상 비극으로 그치며 시의 천사가 사신(死神)과 친한 것처럼 미(美)와 사(死), 진실과 허구가 끊임없이 표리일체의 신비를 형성하고 있고 이 주제는 만년까지 변하지 않았다. 또 <존재의 곤란>(1947) 등의 에세이에는 균일화한 현대정신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

라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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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d Radiguet (1903-1923)

프랑스 소설가.

파리 근교에서 출생. 출정 병사의 아내와 소년의 연애를 냉정하고 관능적인 필치로 그린 소설 <육체의 악마>(1922)로 일약 시인 랭보와 비견할 신동으로 등장하였으나 그해에 “나는 사흘 후면 신(神)의 병사(兵士)에게 총살을 당할 거야”라고 콕토에게 말한 얼마 후 병사하였다.

1924년 유작 <도르젤 백작의 무도회>가 출판되었으나 <클레브의 아낙네들> 등 고전적 심리소설을 모방하여, 이른바 전후 풍속의 난잡함에 고의적으로 반항한 점에 독자성이 있으며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단순하고 이지적인 연애심리의 분석이 체스 선수 같은 명석한 의식과 과정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전작을 능가하는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외에 시집 <타오르는 뺨>(1920) 외에 희곡 작품이 있다.

마르탱 뒤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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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Martin du Gard (1881-1958)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파리 근처의 소읍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소송대리인으로 전형적인 서민이었다. 고등중학교를 마칠 무렵인 17세 때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감격하여 ‘여러 사람의 등장인물과 무수한 삽화를 가진 수명이 긴 소설’을 쓰려는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1899년 고전(古典) 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배운 역사 연구의 방법과 태도가 후에 그의 소설작법이 되었다.

1906년에 결혼, 창작에 전념하여 <생성(生成)>(1908)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고 드레퓌스 사건 당시에 지식인의 고뇌를 묘사한 장편 <장 바로아>(1913)는 관심을 모은 문제작이었다. 그 무렵 지드와 친숙하게 되었고 또 코포(1879-1949)의 새로운 연극운동에 협력하였다. 희곡은 농민의 풍속을 다룬 소극(笑劇) <를뢰 아저씨의 유언>이 있다.

1920년 드디어 필생(畢生)의 대작 <티보가(家)의 사람들> 창작에 착수하여 전8부 11권을 발표, 1937년에 제7부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41년부터 또다시 제2의 장편 <모모르 대령의 회상>(미발표)을 썼으나 이것은 미완으로 그쳤다.

티보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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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Thibault (1922-1940)

대하소설의 대표적 걸작. 마르탱 뒤 가르 작.

제1부 <회색 노트>(1922), 제2부 <소년원>(1922), 제3부 <아름다운 계절>2권(1923), 제4부 <진찰(診察)>(1928), 제5부 <라 소렐리나>(1928), 제6부 <아버지의 죽음>(1929), 제7부 <1914년 여름> 3권(1937 노벨문학상 수상), 제8부 <에필로그>(1940)로 되어 있다.

카톨릭의 티보가와 프로테스탄트의 퐁타낭가를 대조하여 양가 아이들의 운명을 더듬으면서 금세기 초엽의 사회를 묘사한 소설이다. 제6부까지는 주로 양가 가풍의 대립, 부자(父子)의 충돌, 자식들의 연애와 번민을 통한 시대 전체의 도덕적 문제를 다루었고 양가가 대표하는 묵은 시민사회가 내부에서 무너지는 모양을 보여준다. 제7부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른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부각하여 대전에 의하여 외부에서 무너져가는 사회와 개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사실주의의 걸작이다. 전편을 통하여 인생의 의의와 가치의 문제를 추구했으며 특히 젊은 세대(앙투아느와 자크)가 기성의 도덕에 의지하지 않고, 동란의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자태는 깊은 감동과 공감을 안겨준다. 소설기법상 새로운 것은 없으나 개인과 사회의 관련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점은 말로나 카뮈에도 통하는 현대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뒤아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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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Duhamel (1884-1966)

프랑스 작가.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했으나 ‘아베이(Abbaye)’파 동인으로서 기계문명에 대한 정신의 방위와 자율을 테마로 문학적 출발을 하였다. 그의 작품의 대상은 항상 근대문명의 진전에 허덕이는 프랑스 시민이며 그 인물은 반드시 일종의 이상적 휴머니즘을 가슴에 품고 사회의 벽에 직면한다. 장편 <살라뱅의 일생과 모험>(1920-1930)에서 한 시민인 살라뱅의 영혼의 편력에도 또한 장편 <파스키가(家) 연대기(年代記)>(1933-1945)의 로랑 파스키에와 그 가족들의 운명에도 예술과 사회에 대한 인도주의적 애정이 일관하여 기저에 묘사되어 있다. 중산계급의 대표적 작가이다.

로맹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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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Romains (1885-1972)

프랑스 작가. 본명은 루이 파리그르.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뒤아멜과 빌드라크(Vildrac, 1882-1971)들과 ‘아베이’파의 문학협동체에 참가, 위나니미즘(一體主義=Unanimisme)이라 칭하는 문학이론을 실작(實作)에 의하여 제창하였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로맹의 독특한 이론으로 작게는 가족으로부터 크게는 사회에 이르는 초개인적 집단이 무수한 개인을 총체로 통일하는 현상에 문학의 참다운 대상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3부작 <프시케>(1921-1929)와 14년간의 정력을 쏟은 장편 <선의(善意)의 사람들>(1932-1946)이 대표작이다. 특히 후자는 19세기 초엽 프랑스 및 유럽 사회의 대벽화(大壁畵)가 되고 있다.

콜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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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le Colette (1873-1954)

프랑스 여류소설가.

소녀시절의 회상을 엮은 일련의 소설 <클로디느 이야기>(1900-1903)로 데뷔하여 그 후 다난한 생활을 극복하면서 <푸른 보리>(1923), <암코양이>(1933), <지지(Gigi)>(1943) 등을 발표하여 상드 이후의 여류문학가라는 영예를 얻었다. 최대의 걸작은 연상의 여성과 미모의 젊은 정부(情夫)와의 애욕의 이야기를 묘사한 <셀리>(1920)라 하겠다. 콜레트의 작품은 모두 사랑의 비극을 테마로 삼아 전통적인 수법을 이어받은 심리소설이라 할 수 있고 여성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청신한 감수성으로 포착한 갖가지 자연의 정경과 애욕의 자태는 다채롭고 리듬감이 넘치는 문체와 융합하여 콜레트 특유(特有)의 관능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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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é Maurois (1885-1967)

프랑스 소설가·전기작가·평론가.

루앙의 고등중학교에서 철학자 알랭에게 배워 큰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고향인 에르브프에 돌아가 부친의 직물공장 경영을 돕는다. 영국통(英國通)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에는 영국군 참모부의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이 체험을 살려서 쓴 소설 <브랑블 대령의 침묵>(1918)으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그 후 소설은 <풍토(風土)>(1928) 등의 가작(佳作)을 내어놓았으나 오히려 1923년에 발표한 <셸리의 일생>을 비롯한 ‘소설류(小說類)의 전기’ <바이런>(1930),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서>(1949), <상드전(傳)>(1952), <위고전(傳)>(1954), <발자크>(1965) 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정묘한 붓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나의 생활 기술>(1939), <사랑의 일곱 가지 양상>(1946), <비로소 행동이 있었다>(1966) 등은 에스프리가 넘치는 에세이로서 온건한 인생관과 사회관을 역설하여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특히 <영국사>(1937), <프랑스사>(1947), <미국사>(1947) 등 역사가의 면모도 빠뜨릴 수 없다.

모리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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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 Mauriac (1885-1970)

프랑스 소설가.

보르도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모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카톨릭에 대한 신앙을 지녔다. 보르도 대학에서 수학한 후에 파리에 나와서 한때 고전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문학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최초 시집 <합장(合掌)>(1909)을 발표하여 바레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소설의 제1작 <쇠사슬에 묶인 아이>(1913)부터는 계속 문제작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주요한 소설로서 <문둥이에게 키스>(1922), <불의 강>(1923), <사랑의 사막>(1925), <테레스 데케이루>, <독사의 알력>(1932), <검은 천사>(1936), <바리새 여인(La Pharisienne)>(1941)을 들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대개 고향의 풍토와 기후를 배경으로 하고 폐쇄적이고 속악(俗惡)한 지주 집을 무대로 전개된다. 잃어버린 청춘에의 갈망, 영육(靈肉)의 격렬한 상극을 테마로 하여, 회상형식의 교묘한 기법(技法)이 일관하여 추구되고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신앙없는 세계의 비참함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외에 평전(評傳)·소설론·에세이·일기·극작에도 우수한 작품이 많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전후에는 정치·사회평론 활동이 현저하다. 193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고 195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테레스 데케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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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e Desqueyroux (1927)

모리아카 장편소설.

여주인공 테레스 데케이루가 성격이 전혀 맞지 않는 남편 베르나를 독살하려 했으나 미수로 그쳤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정신적 고뇌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불안으로 포착하여 교묘한 심리묘사와 특출한 회상형식의 수법으로 묘사한 걸작이다. <밤의 종말>(1935)은 속편으로 된 것이라 한다.

베르나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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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rges Bernanos (1888-1948)

프랑스 카톨릭 작가.

파리 태생. 어릴 적부터 카톨릭계(系) 학교에서 배웠고 뒤에는 문학과 법학을 수학했다. 최초에는 왕당파로서 '악숑 프랑세즈'에 소속하였으나 후에 탈퇴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브라질로 망명했다. 데뷔 작품인 <악마의 태양 밑에>(1926) 이후 <시골 사제(司祭)의 일기>(1936) 등이 있고, 인간의 내부에 펼쳐지는 악마의 처참한 투쟁을 심리분석과 사실(寫實)에 의하여 강렬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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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n Green (1900-1998)

프랑스 카톨릭 작가.

파리 태생으로 양친은 미국인이다.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14세 때 모친을 잃었다. 고독한 마음은 내적 세계(신)로 향하게 되지만, 1939년의 전쟁과 또 육체를 가진 자신의 현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내외(內外)에 걸친 현실의 상극에서 불안에 찬 <폐쇄된 정원>(1927), <모이라>(1950) 등과 자기를 말하는 <일기>를 발표하였다.

최근 제2차 세계대전 전후(前後)에 걸친 덴마크 상황을 배경으로 구원에 대한 갈구와 증오 및 투쟁을 그린 <타인(他人)>(1971)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지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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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Giraudoux (1882-1944)

프랑스 극작가·소설가. 베라크 출생. 관비생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

독일과 미국에서 교사·저널리스트의 경력을 가진 뒤 단편집 <시골 여자들>(1909)로 등장했다. 이 무렵부터 외교관생활로 들어가 1940년까지 계속하였다.

<시그프리드>(1928) 이후 주로 극작으로 전환했으나 소설에 <쉬잔느와 태평양>(1921), <시그프리드와 리무쟁 사람>(1922), <베라>(1926) 등이 있고, 희곡엔 <앙피트리옹 38번>(1929), <간주곡>(1933),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1935), <엘렉트라>(1937), <옹딘>, 유작인 <샤이오의 미친 여자> 등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기발한 발상과 자유자재한 상상력과 풍부한 에스프리가 담긴 문체로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시적 연극의 신풍을 극단(劇壇)에 불어넣어 그의 공은 클로델과 더불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극작은 고대신화와 고전에 의거한 것이 많고 상연은 주베(1887-1951)의 협력이 컸다.

옹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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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dine (1939)

지로두의 3막 희곡.

젊고 범용(凡庸)한 기사 한스는 지상(地上)의 인간을, 물의 정(精) 옹디느는 자유롭고 큰 자연을 대표케 하여 두 사람의 사랑과 한스의 죽음으로 인한 비련과 별리(別離)를 묘사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 지로두 특유의 그러한 것들의 조화, 새로운 질서의 꿈, 소망이 부각되어 있다. 특히 이것은 독일 낭만파(浪漫派)의 소설 <운디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존 페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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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is Saint-John Perse (1887-1975)

프랑스 시인. 본명은 마리드네 알렉시스 생 레제, 가들루프섬에 접하는 작은 섬 일레타 퓨에서 변호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1899년 포에 이주, 보르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한편, 여러 문학자들과 교우하면서 시작(詩作)에 뜻을 두었다. <찬가(讚歌)>(1911)는 서인도 제도의 남국 정취가 풍기는 풍물과 그곳에서 지낸 유년시절을 그린 작품이다. 그 후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베이징(北京)에 있을 때 외몽고와 중앙아시아를 탐험하여 <아나바스>(1924), <태자친선(太子親善)>(1924)을 썼다. 엘리어트 릴케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후 외교관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비시 정권에 의해 국적까지 박탈되었다. 미국에서 망명자의 부재감, 전쟁에 대한 고뇌의 선율을 읊은 <유적지(流謫地)>(1946)를 출간했다. 전후 귀국하지 않고 남미와 카리브 해를 배경으로 내재한 심오한 세계를 <바람>(1949), <항해 목표>(1957)에서 노래했다. 1957년 귀국하고, 1960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 후에도 <연대기(年代記)>(1960)와 <새>(1961)를 출판하였다. 1975년 9월 25일 사망.

살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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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and Salacrou (1899-1968)

프랑스 극작가. 루앙 태생. 의학·철학을 배운 뒤에 <파튀르>(1930)로 데뷔하여 <자유부인>(1934), <지구는 둥글다>(1938), <웃음의 역사>(1939) 등 독특한 심리적·사회적·실존적인 작품을 발표하였고, 뒬랭(Dullin, 1885-1949)과 더불어 양대전 간에 있어서 전위극(前衛劇)의 대표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후에도 <분노의 밤>(1946), <르느와르 군도(群島)>(1947), <신은 알고 있다>(1951), <뒬랭의 한길>(1961) 등 창작에 매진하였다. 그 후 다소 일선에서 물러선감이 있었으나 연극계의 총본산적 존재이며 아카데미 콩쿠르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아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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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an Anouilh (1910-1987)

프랑스 극작가.

보르도에서 출생, 법률을 배운 후 광고사 등에 근무하는 한편 주베(Joubet, 1887-1951)의 비서가 되어 <담비의 모피(毛皮)> 상연(1932)으로 젊은 나이에 본격적인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전전(戰前)에 이미 <하물(荷物)이 없는 여행자>(1937), <도둑들의 무도회>(1938), <안티고느>(1944) 등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으나 역시 그의 존재가 크게 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제법 다작인 편이지만 대표작은 <로메오와 자네트>(1946), <성(城)에의 초대>(1947), <종달새>(1953) <베케트>(1959)를 꼽을 수 있다. 작풍(作風)은 지로두 계보에 속하여 그것을 당세에 맞게 속세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하여도 좋으며 그것은 순수와 불순, 실존과 상식, 이상과 현실이 대립하는 교묘한 바리에이션을 덧붙여서 그 자신 스스로 ‘검은 희곡’, ‘장미색의 희곡’, ‘빛나는 희곡’으로 분류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시니시즘의 색채가 짙고 신선미를 잃어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나 각색과 연출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드리외 라 로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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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Drieu La Rochelle (1893-1945)

프랑스 소설가·평론가.

파리 태생. 중편 <속 빈 가방>(1923), 장편 <꿈꾸는 부르주아 처녀>(1937), 평론 <제네바냐, 모스크바냐>(1928) 등으로 전후세대의 불안과 그 해결을 취급하였으며 1930년 이후는 파시즘으로 전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에 협력했기 때문에 파리 해방 후 자살했다. 장편 <지르>(1939)는 그러한 정신의 편력을 소설에 담은 대표작이다.

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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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Ferdinand Celine (1894-1961)

프랑스 소설가·의사. 본명은 루이페르디낭 데투쉬.

파리 근처의 소읍에서 태어났다. 속어(俗語)를 쓴 특이한 문체로 인간사회를 통매(痛罵)한 자전적 소설 <밤이 다 갈 때의 여행>(1932)으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 후에도 철저한 염세관에 기초를 둔 <까닭없는 죽음>(1936), <성(城)에서 성>(1957), <북(北)>(1960)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사르트르와 크노(1903-1976)에도 영을 주었다고 한다.

몽테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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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de Montherlant (1896-1972)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파리 태생. 전쟁·스포츠·투우(鬪牛)를 몸소 체험하여 <투우사>(1926) 등의 소설에서 그것을 예찬하였다. 소설 <독신자(獨身者)>(1934)에서는 귀족의 몰락을 묘사하고 장편 4부작 <젊은 처녀들>(1936-1939)에는 여성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꼬집어 반향을 일으켰다. 전후는 극작에 전념하여 <죽은 여왕>(1942), <산티아고의 성기사 단장(聖騎士團長)>(1948), <포르루아이 얄>(1954) 등 격조 높은 희곡으로 명성을 높였다.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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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

프랑스 작가. 비행사로서 정기항로의 조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체험을 소재로 <남방우편기(南方郵便機)>(1929)를 집필하고 드디어 명작 <야간비행>(1931)으로 페미나상을 받았으며 독자적인 영웅적 행동과 윤리관으로 지드의 절찬을 받았다. 이 윤리관은 사회적 책임을 위한 개인주의의 극복을 독자적인 인도주의적 심정으로 주장한 것으로, 말하자면 심정의 윤리라고도 할 수 있다. 반(半)자전적 작품 <인간의 대지>(1939)에는 그의 고귀한 심정이 독특한 서술로 전개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알제리 정찰비행대에 소속하여 참전 중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동화 <어린 왕자>는 전쟁 중의 작품이다. 이 외에 미완의 문명론적인 고찰 <성채(城砦)>(1948)도 간과할 수 없다. 사회적 불안에서 동란(動亂)에 이르는 1930년대 작가의 한 전형이라 하겠다.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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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etit Prince (1943)

동화. 생텍쥐페리 유작(遺作).

1947년 가리마르사(社)가 작자 자필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 출판하였다.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자기의 작은 별에서 여러 별들을 거쳐서 드디어 지상에 내려온 소년의 신상(身上) 이야기를 듣고 결국 소년이 뱀에게 물려 승천(昇天)할 때까지의 경위를 회상한 것이다. 순결한 소년과 장미(여성)의 사랑 이야기나 갖가지 지상의 성인을 반영하는 다른 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하여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월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비판을 담은 시(童心)는 그것이 비판과 분리되지 않고 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자의 심정과 윤리가 혼연히 융합되고 표백(表白)되어 있어, 프랑스는 물론 미국·독일 등 각국에서도 비상한 호평으로 환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야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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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間飛行

생텍쥐페리의 소설.

야간항공 우편의 창설기에 용감한 비행사들이 불충분한 계기에 의존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우편을 배달하고 있다. 어느 저녁 무렵 비행사 파비앵은 파타고니아를 날아가서 아름다운 저녁 하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로부터 우편기로 운반되어 오는 우편을 즉시 유럽으로 운반하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공 우편국 지배인 리비에르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엄격한 인간이다. 나이 많은 베테랑 정비사의 사소한 잘못에도 엄격하게 벌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존경은 받고 있어도 호감은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을 향해 전진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엄격하고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믿고 있다.

곧, 칠레에서 우편기가 도착한다. 다른 두 비행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파비앵의 비행기는 예상하지 못한 태풍 속에 들어가게 된다. 파비앵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바람에 흘러간다.

리비에르도

이 태풍이 있는 것을 알고 파비앵의 비행기를 무전으로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지만 태풍의 범위가 넓어 적당한 장소가 없다. 그 사이에 파비앵의 귀환을 기다리던 아내가 비행장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파비앵은 간신히 태풍권에서 벗어나 조용한 빛속을 비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비행기 연료는 곧 떨어지게 되어 있다. 리비에르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절망한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명령한다. 파라과이에서의 우편기가 도착하면 유럽행 우편기를 즉시 출발시키라고.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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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Malraux (1901-1976)

프랑스 작가.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양어학교(東洋語學校)에서 배웠다. 1923년에 소설 <왕도(王道)>(1930)의 무대가 된 인도차이나의 고고학적 조사에 참가하였고, 이 작품에서 행동과 사색을 분리할 수 없는 타입의 모험가를 등장시켰다. 소설 <정복자>(1928)의 첫머리에 묘사되고 있는, 총파업이 있는 후 광둥(廣東)에 국공합작(國共合作) 정부가 성립하여 그는 1925년 그 정부의 위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1926년에 귀국하였다. 에세이 <서구(西歐)의 유혹>(1926)에서는 신과 내재적 가치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유럽적 인간주의의 한계와 고뇌를 호소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 탄압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과 손을 끊었다. 히틀러 정권이 탄생하자 반파시즘 운동에 투신하였고, 에스파냐 내란에는 공화국 공군을 지휘하였으며 소설 <희망>(1937)은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불안과 죽음에 떠는 인간에게 ‘혁명’이 부여하는 ‘희망과 우애’의 개인주의적 신화를 열띤 충격적 문체로 전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대독저항(對獨抵抗)운동에 전차대여단장(戰車隊旅團長)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제5공화국의 드골 정권에서 문화상(文化相)을 역임하는가 하면 최근에 와서는 동파키스탄의 독립운동에 의용군으로 지원하는 등 다채로운 일생을 점철하였다. <아르덴 부르크의 호도나무>(1943) 이후 창작을 중단하고 <예술심리학>3권(1947-50)으로 시작하는 미술론에서는 인간이 ‘인간성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역사와 운명을 초월하는 한 수단은 동서고금의 ‘예술 창조’ 외에는 없다고 역설하여 그 비밀의 해명에 정력을 경주하였다. 카뮈나 사르트르와 더불어 말로 또한 신이 죽은 뒤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근거를 찾고 있다.

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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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ndition Humaine (1933)

공쿠르상(賞)을 받은 말로의 장편소설.

상하이(上海)를 무대로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그것에 직접 참가하고 그 속에서 인간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한 청년의 기록이다. 그는 여기에서 학살에 의한 ‘죽음’과 부조리한 고독감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갖가지 반응의 극복을 감각적이면서도 지적(知的)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살인·광기(狂氣)·혁명·연애와 아편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작가는 자아를 초월하는 어떤 것에 대한 헌신적 행위에 인간의 위엄성을 인정하고 있다.

베르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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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cors (1902-1991)

프랑스 소설가·화가. 본명은 장 브리레르.

파리 태생. 제2차 세계대전에는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심야총서(深夜叢書)’란 이름의 비밀 출판을 주재했고 저항문학의 대표적 걸작 <바다의 침묵>(1942), <별에의 행진>(1943)으로 일약 문단에 등장하였다. 전후에도 인간성 옹호 입장에서 <밤의 무기>(1946), <낮의 힘>(1951), <많든 적든 인간>(1950) 등의 많은 소설과 평론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실존주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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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存主義文學

Existentiolisme

철학사조로서의 실존주의는 고대 소크라테스로부터 발단하여 성(聖)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에 이어져서 내려오며, 하이데거, 후설(Husserl) 등 독일 철학의 계보가 있지만 문학사조로서 실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문학운동을 가리킨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가 실존주의의 기본명제이며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무의미하게 세상에 던져진 여분의 존재로서 그 인간에 의미(본질)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 불과하여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문학가도 그 예외일 수가 없다라고 하는 데에 문학의 ‘사회참여’ 이론이 나오게 된다. 작가는 언어를 써서 세계를 개시(開示)하고 독자는 독서행위를 통하여 그 세계를 알고 책임을 진다. 사르트르의 이 사상은 <현대>지(誌)의 창간(1945)과 함께 널리 알려져 혼미한 전후 사상계를 받드는 큰 지주가 되었으나 1950년대에 들어가서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가 명백해지면서 카뮈, 메를로퐁티 등 당초의 공명자(共鳴者)를 잃었다.

광의의 실존주의 문학은 사르트르, 카뮈, 보부아르, 쥐네(1910-1986), 바타이유(1897-1962), 블랑쇼(1907- ), 퐁쥐(1899-?), 베케트 등의 프랑스 작가 외에 유사한 사상을 가진 도스토예프스키, 릴케, 카프카, 우나무노 등 외국작가도 포함된다.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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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작가. 파리에서 출생.

해군장교인 부친은 사르트르가 두 살 때에 요절했다. 그 후 외조부 샤를 슈바이처 집안에서 자랐으며 외조부는 어학의 직접 교수법을 주장한 어학교육자이며 노벨평화상을 받은 알버트 슈바이처는 모친의 사촌이 된다. 외조부의 훈육을 받아 일찍이 언어에 통달한 소년 사르트르는 ‘무엇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을 꿈꾸었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과교사로 르 아브르, 랑, 파리 등 고등중학교에 봉직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베를린에 유학하여 후설의 현상학(現象學)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니상(1905-40), 보부아르 등과 함께 고고학 문학 클럽을 만들어 몇 가지 습작을 썼다. <자아의 초월>(1934), <상상력(想像力)>(1936) 등의 철학논문을 발표한 후에 오래전부터 써 온 장편소설 <구토>가 간행되어 공쿠르상(賞)의 유력한 후보작품이 되었다. 더욱이 1939년 단편소설집 <벽(壁)>을 상재했고 또 모리아크와 포크너의 소설기법에 관하여 참신한 평론을 잡지에 발표하여 신진 작가의 지위를 얻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징병되어 한때 독일군 포로가 되기도 했으나, 석방 후 파리로 돌아와 저항운동에 참가하였다. 1943년 사르트르는 사상의 근저(根底)가 되는 현상학적 존재론 <존재와 무(無)>를 출판하였고, 독일 점령군에 대한 풍자를 넣어 쓰여진 처녀 희곡 <파리>가 뒤랑 극단에 의해서 상연되었다. 파리 해방 후는 고등사범학교 이래의 친구인 메를로퐁티, 알롱 등과 함께 <현대>지(誌를) 창간하여 문학의 ‘사회참여’를 제창하였다. 또한 그 이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혁명민주연맹(RDR)을 조직하였으나 1년도 채 못 되어 좌절하여 정치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에 점차 코뮤니즘에 접근하여 1952년에는 <공산주의자와 평화>를 발표하였다. 이 해에 카뮈와의 절교를 위시하여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초기의 맹우(盟友)와 계속하여 결별하게 되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시작된 1954년을 경계로 사상적 혼미를 떨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을 명백하게 하였다. 1960년 발간된 <변증법적 이성비판>(제1권)에는 마르크스주의를 20세기에 있어서 더 넘어갈 수 없는 철학이라 단정하면서도 그 한계와 불비(不備)를 비판하여 전체적인 인간학의 구축을 시도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알제리 독립전쟁, 나아가서 베트남 전쟁으로 계속한 일련의 정치적 위기에 대하여 항상 적극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를 회고하면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대별할 수 있다. 제1기는 존재론적 탐색에 살았던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이며 제2기는 낙천적으로 문학의 사회 참여를 믿고 있던 전후 얼마간의 시기와, 제3기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다시 고쳐버린 1950년 이후의 시기이다. 그러나 모든 기만을 배제하여 자기에게 끝까지 성실코자 하는 진지한 태도는 일관하여 변치않는다.

상기한 작품 외에 장편소설 <자유에의 길>, 희곡 <갇힌 방>(1944), <더렵혀진 손>(1948), <악마와 신> <아르트나의 유폐자(幽閉者)들>(1959)과 평론집 <상황(狀況)> 전7권(1947-65) 등이 있다. 또한 <보들레르>(1947), <성 쥐네>(1952), <플로베르>(미완) 등의 작가론은 한 사람의 인간이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인간과 언어의 근원적인 관계를 논한 중요한 작품이다.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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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Nausee (1938)

장편소설. 사르트르 작.

앙투아느 로캉탕은 역사상의 인물인 로르봉 후작을 연구하기 위하여 해변의 소읍에 체류하던 어느 날

해안에서 돌을 줍다가 구토증을 느낀다. 그 구토증의 정체를 밝히려고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문헌을 탐독하고, 밤에는 카페의 마담과 타성적인 교섭을 가지며 단조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윽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드디어 구토증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존재물의 맛이란 것이었다. 로캉탕은 로르봉 후작의 연구를 집어치우고 그 후부터 역사책을 탐색하지 않고 소설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결심한다.

‘존재의 우연성’을 주제로 몇 번이나 개고(改稿)하며 써나간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움트는 사상을 담고 있다.

자유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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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hemins de la liberte (1945-1949)

장편소설. 사르트르 작.

제1부 <분별기(分別期)>, 제2부 <집행유예(執行猶豫)>,제3부 <영혼 속의 죽음>, 제4부 <마지막 기회>는 단편 <기묘한 우정>을 발표했을 뿐 미완성인 채로 놓여 있다.

파리에 사는 젊은 철학교사 마티유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행동적인 인텔리 부르주아가 전쟁을 체험한 뒤에 행동적인 인간으로 변신(變身)하여 ‘자유’의 참다운 의미를 해득하는 과정을 각권에 따라 각각 다른 소설기법으로 묘사하였다. 제4부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진행될 셈이었는데 이들 과거의 상황보다 오늘의 현실적인 문제로 작자의 흥미가 바뀌어 미완인 채로 방치되었다.

악마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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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iable et le Bon Dieu (1951)

희곡. 사르트르 작.

16세기의 독일 농민전쟁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신의 대립을 그렸다.

귀족과 농민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 게트는 신을 배반하고 인간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악’을 선택, 우익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살육(殺戮)을 거듭한다. 그러나 파계승 하인리히가 지상에 있어서 ‘선’은 불가능이라 하여 이번에는 ‘선’을 선택, 농민에게 토지를 주고 공상적 이상향(理想鄕)인 ‘태양의 마을’을 만들었으나 농민폭동의 여파를 받아 이상향은 파괴되고 무저항주의의 마을사람은 학살을 당한다. 무정부주의적인 악(惡)의 행위가 결국 어떤 사회체제를 파괴하지 못하는 것도 알며 또한 이상주의적인 선이 어떠한 것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트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로서 살아보려는 결의를 한다.

이 작품에는 공소(空疎)한 모랄을 버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전환기에 있는 사르트르의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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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de Beauvoir (1908-1986)

프랑스 여류작가.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파리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마르세유, 루앙, 파리의 고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생시대에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베유 등과 사귀어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처녀작 <초대된 여인>(1943)은 제자인 소녀와 사르트르, 그리고 보부아르의 삼각관계를 기초로 하여 자기의 의식과 타인간의 의식의 대립과 상극이 중심주제로 되어 있다. 자기와 타인의 대립은 드디어 연대의식(連帶意識)으로 발전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을 배경으로 한 <남의 피>(1944)를 만들게 되었다.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性)>은 성과학과 사회학·역사·문학작품을 참고하여 ‘제2의 성’이라 볼 수 있는 여성의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세상의 통념은 모두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증하여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1954년에는 소설 <레 망다랑>으로 공쿠르상을 받았으며 이 작품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기에 있어서 좌익 지식인의 정치적 거취(去就)와 여주인공의 고민하는 사랑을 묘사하였다. 등장인물의 배후에는 사르트르, 카뮈, 루세 등 실재하는 인물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처녀시절의 회상>(1958), <인생의 성숙기>(1960), <환경의 힘>(1963)의 자전적 3부작에서는 여성다운 풍요한 정감과 놀라울 만큼의 솔직함으로써 자기 형성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어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현대 작가들의 동정(動靜)을 아는 귀중한 기록이 되어 있다.

전기 작품 외에 평론집 <실존주의와 상식>(1948)이 있고, 기행 <미국의 그날그날>(1948)과 <기나긴 걸음>(1957), 그리고 소설로 <사람은 죽는 것>(1947), <용이(容易)한 죽음>(1964), <아름다운 영상(映像)>(1966) 등이 있다.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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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Camus (1913-1960)

프랑스 소설가.

알제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장학금으로 알제리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결핵 재발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단념했다. 학업을 하며 극단을 조직하여 도스토예프스키, 지드, 말로 등의 작품을 각색 연출하여 스스로 무대에도 섰다. 대학 졸업 후 알제리의 밝은 풍경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구가(謳歌)한 에세이 <결혼>(1938)을 발표했다. 더욱이 소설 <이방인>, 평론 <시지프스의 신화>(1942)로 일약 문단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두 작품으로 세계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면서도 더욱 더한 명석을 잃지 않고 그 세계에 반항을 계속하는 이른바 ‘부조리 철학’을 외쳤다.

제2차 세계대전시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여 <콩바>지 주필로 활약했다. 전후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소설 <페스트>를 발표했다. 또 근대 니힐리즘 비판으로서 쓰여진 평론 <반항적 인간>(1951)에는 모든 종류의 절대적 관념이 부정되고 정치적으로는 극우극좌(極右極左)의 폭력을 배제하여 끈기 있는 반항과 점진적인 개혁을 역설했다. 이에 대한 장송의 반론이 <현대>지에 게재되면서부터 사르트르와 카뮈 간의 논쟁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되었다. 그 후 소설 <전락(轉落)>(1956), 단편집 <추방>(1957)을 발표하고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얼마 후 자동차 사고로 급서(急逝)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정의와 인간성을 믿으며 중용(中庸)의 덕을 주장한 카뮈의 사상은 모랄리스트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하겠다.

전기한 작품 외에도 희곡 <칼리굴라>(1944), <오해(誤解)>(1944), <정의의 사람들>(1950), 평론 <안과 겉>(1937), <시사 논문집> 3권(1950, 1953, 1958) 등이 있으며 그가 죽은 후에 <수첩>2권이 간행(1961, 1964)되었다.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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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ranger (1942)

장편소설. 카뮈 작.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장이 뫼르소는 모친 장례일(葬禮日)의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고, 희극 영화를 보고 웃으며 여자친구와 더불어 밤을 지낸다. 다음 일요일에 여자친구의 분쟁에 휩쓸려 해안에서 아라비아인을 이유도 없이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되어 범행동기를 물을 때 “모두가 태양 탓이다” 라고 대답하고, 사형이 언도된다. 독방에서 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사제(司祭)가 권하는 속죄(贖罪)의 기도도 거절하고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행복하다고 느낀다.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하게 되어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그 부조리의 의식을 최후까지 굳게 지켜나간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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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este (1945)

장편소설. 카뮈 작.

알제리의 오랑시(市)에 페스트가 발생하였다. 의사인 뤼는 친구 타르와 협력하여 사설위생반을 조직하여 페스트 치료를 하게 된다. 최초에는 비협력적이었던 파느르 신부와 신문기자인 랑베르도 뤼의 휴머니스틱한 행동에 이끌려 점차 구호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이윽고 페스트가 종식하는 날도 가까웠다. 그러나 항상 명석하여 구호활동의 기둥이 되어왔던 타르가 봉쇄해제의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악역(惡疫)에 걸려버린다. 뤼는 이 병역과 싸운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려고 결심한다. 페스트 균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항상 어딘가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끼면서―.레지스탕스의 우의(寓意)로 쓰여진 이 작품은 <이방인>에 있는 개인적 반항을 더욱 발전시켜 비인간성에 대한 집단적 반항과 연대성을 역설하고 있다.

데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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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Rene des Foret (1918-)

프랑스 누보로망 계열의 대표적 전후작가. 극히 과작(寡作)인 그의 작품은 언어에 의하여 존재의 깊은 속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근원적인 극(劇)을 소설로 조형한 것이다. 문학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엄격한 지향은 블랑쇼의 영향인 듯하다. <비렁뱅이들>(1943), <수다스런 사내>(1946), <아이들 방>이 있다.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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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e Sagan (1935- ) 프랑스 여류작가. 본명은 프랑수아즈 크아르.

18세에 발표한 베스트 셀러 <슬픔이여 안녕>(1954)으로 일약 전세계에 조숙한 문명(文名)을 떨쳤다. 이 소설에는 17세의 소녀를 중심으로 사춘기의 미묘하고 순수한 마음의 움직임과 인생에 대한 냉소(冷笑)를 개방적이면서 민첩하고 가벼운 필치로 묘사, ‘슬픔’조차 ‘우수’와 ‘감미로움’으로 환원시켜버리는, 1950년대의 공허한 청춘들이 재즈 레코드·스포츠 카·술·성적(性的) 자유 등 시대의 풍속과 교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기대했던 제2작 <어떤 미소>(1956)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는 전통적인 구성으로 복잡하게 얼킨 연애관계를 주제로 하고 있으나 덧없는 사랑의 매력이 조마조마한 무드로 묘하게 표현되어 권태와 환멸의 씁쓸한 맛은 절망이란 칼로서 등장인물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정사(情事)에서 교묘하게 손을 떼고’, ‘어른이 되고 도회적이며 지성적으로’ 된다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 그러나 일종의 퇴폐에 반항하여 갑자기 이유없는 ‘굴욕’과 ‘분노’의 감정에 휘말릴 때도 많아, 노대가(老大家) 모리아크는 죄의식(罪意識)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젊은 육체에도 슬픔이나 상처받은 영혼이 있는 것이라는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외의 소설에 <한달내 일년내>(1957), <신기한 구름>(1961)이 있고 희곡에 <스웨덴의 성(城)>(1960), <도박에 걸린 행복>(1964)이 있다.

누보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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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veau-Roman ‘새로운 소설’이란 의미이다. 앙티로망(反小說)이라고도 한다. 1950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쓰여진 일군의 전위적(前衛的) 소설이다. 작가에는 로브그리예, 뷔토르, 사로트(1902-1999), 시몽(1913- ), 뒤라스(1914-1996) 등이 있으나, 그들이 한 유파(流派)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수법은 갖가지이다.

단지 공통된 것은 19세기 소설이 지켜야 했던 것―주인공, 이야기의 줄거리, 주석이나 설명―을 무시하고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견 무미(無味)한 본원적인 소재로 소설이 꾸며져 있는 점이다. 방법상의 엄격주의(嚴格主義)가 특징으로서 독자에게 피동적인 독서(讀書)를 허락하지 않고 창작에 참가시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프루스트, 조이스, 카프카 등에 의하여 연원된 이 소설사상(小說史上)의 돌풍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기상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소위 ‘구조주의(構造主義)’ 사조에도 깊이 이어져 있다.

사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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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lie Sarraute (1902-1999)

프랑스 여류작가. 러시아 출생이나 어릴 때 프랑스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과 법률을 수학하고, 변호사를 개업하기도 했다. 발생상태에 있는 심층심리적 움직임,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각, 이미지, 회상, 충동 등의 미세한 입자가 사소한 자극에 촉발되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이야기를 썼다. 심리적 소재와 대화 가운데 깔린 의식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기법으로 묘사함으로써 주목 받는 작가가 되었다. 처녀작 <트로피즘>(1938) 이후 <낯선 사나이의 초상>(1949), <마르트로>(1954), <플라네타리움>(1959), <황금의 과실>(1963) 등을 발표했다. 소설이론을 편 평론집 <의혹(疑惑)의 시대>가 있다.

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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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Simon (1913- ) 프랑스 작가. 누보로망의 대표적 작가. 초기에는 <사기꾼>(1965)과 같은 전통적 수법의 작품을 쓰기도 했으나 <바람>(1957) 이후 작풍(作風)을 급회전하였으며 계속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플랑드르 가도(街道)>(1950), 에스파냐 내란을 무대로 한 <팔라스>(1962)를 발표하였다. 개인의 내적 의식에 외부상황이 어떻게 투영되는가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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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uerite Duras (1914-1996)

프랑스 여류작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출생, 파리에서 법률·수학·정치학을 수학했다. 초기에는 네오리얼리즘 소설을 썼다. 초기작으로 <중요한 생활>(1944), <태평양 방파제>(1950), <지브롤터의 수부(水夫)>(1952) 이후부터는 보다 추상적인 심리소설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모데라토 칸타빌레>(1958), <여름밤의 10시 반>(1960), <앙네스마 씨(氏)의 오후>(1962), <롤라 V. 스타인의 환희>(1964) 등 독자적인 사랑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심리묘사나 암시적인 회화의 사용에 의해 인간의 정열·사랑·행동의 심연(深淵)에 대한 미묘한 관계를 추구한다. 누보로망의 작가이지만 오히려 전통적인 프랑스 심리소설의 계승자라 볼 수도 있다.

로브그리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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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Robbe-Grillet (1922- ) 프랑스 소설가.

브레스트에서 출생. 통계기사로 열대지방에 오래 체재하였다. 소설 <엿보는 사람> <1955, 비평가상(賞)>, <질투>(1957), <미로(迷路)에서>(1959) 외 시네로망 <지난 해 마리엥바드에서>(1961)가 있고 평론은 <새로운 소설을 위하여>(1963) 등으로 누보로망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미래의 소설에는 행동이나 사물도 ‘무엇인가’이기 전에 ‘그곳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된다”라 하여 인간중심의 ‘의미 부여’를 배척했기 때문에 ‘시선파(視線派)’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일견 비정한 시선이 실은 극히 주관적인 이미지를 정착하는 데 독자적인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 밖의 작품으로 <고무 지우개>(1953), <질투>(1953), <미로(迷路)에서>(1959)가 있다. 현대소설가의 본질적인 책임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적 세계의 표면의 배후에 미(美)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 예부터의 심각한 신화를 파괴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뉴욕에서 혁명을 고안하다>(1970)에서는 에로티시즘과 고통의 현장을 거장의 필치로 승화시키고 있다.

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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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Butor (1926- )

프랑스 소설가.

릴 근교에서 출생하였고 소르본 대학에서는 철학을 배웠다. 이집트와 영국 등 각지에서 교편을 잡다가 30세 이후에는 저작에 전념하였다. 누보로망 작가로서 유명하다. “소설형식의 참다운 변혁, 수확이 많은 탐구는 모두 소설의 개념 그것의 변혁에만 있다”라 하여 현실을 총합적으로 포착할 ‘전체성’의 표현을 지향한다.

음울한 미지의 도시를 한걸음 한걸음씩 내것으로 하려는 <시간표>(1956), 파리에서 로마에 이르는 열차내에서의 주인공의 회상과 결의를 묘사한 2인칭소설 <변심(變心)><1957,르노드상(賞)>, 작가의 소설기법을 절정에 올린 <계단>(1960) 등과 소설 외 많은 평론과 라디오 드라마, 그리고 시화집과 오페라 대본 등 다채로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베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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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el Beckett (1906-1989)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아일랜드 더블린 근교의 부유한 신교도(新敎徒) 가정에서 태어났다. 포트라 왕립학교를 거쳐서 아일랜드에서도 책 많기로 이름난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여(1923)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2년 동안 영어강의를 하고, 1930년부터 2년 동안 모교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알프레드 페롱 등 문인들과 알게 되었고 칸트,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에 심취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933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조그만 유산을 가지고 런던에 가서 작품을 쓰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지냈지만, 런던생활에 적응할 수 없어 1937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 정착.

첫 작품은 시(詩) <호로스코프>(1930). 이어서 1935년에 <메아리의 뼈>를 발표하였으나 시인으로 각광을 받진 못했다. 소설로는 1938년 런던에서 영문으로 출간된 <머피>를 필두로 <와트>(1944), <몰로이>(1951), <말론은 죽다>(1961), <죽을 상상력이여 상상하라>(1966) 등이 있는데 주로 프랑스어로 된 작품을 베케트 자신이 영역(英譯)하였다. 더블린에서 대학강사로 있는 동안 알게 된 조이스를 사숙하여 베케트의 작풍(作風)은 조이스를 닮았다고들 평하고 있다. 소설가로서 그의 위치를 굳혀준 <몰로이>, <머피> 등은 불명확성 때문에 독자를 매혹한다. 지루하고 실마리를 잡기 힘든 줄거리의 작품들은 프루스트나 조이스 작품의 시간성처럼 시제(時制)가 명확치 않지만 인간의 본질적 고뇌를 부각시키고, 인생 및 사랑의 부조리를 체현(體現)해 주어 독자에게 실존적 공감을 불러일으켜준다. 베케트에 있어 부조리와 무(無)를 더욱 실감나게 파헤쳐주는 것은 소설보다는 희곡 쪽이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갖다 준 것은 1953년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 이 연극의 성공으로 그는 일약 앙티테아트르의 기수가 되었다. 이 밖에 희곡으로 <승부의 종말>(1957),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1959), <오, 아름다웠던 나날>(1961) 등이 있다.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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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Attendant Godot.

베케트 장편희곡.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불모의 땅에서 단 둘이 별로 의미도 없는 대화를 한정없이 계속하며 사랑하는 몸짓을 하다가 때로 떠밀고 다투는 몸짓으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등장인물이라곤 두 사람 외에 포초와 라키라는 박해자와 피박해자, 그리고 맨 나중에 고도의 소식을 알리는 어린아이뿐이다. 풀릴 길 없는 시간 속에서 저편에 있는 누군가의 구원을 한정없이 기다리는 인간의 부조리, 신(神)은 X+1이다 라는 베케트의 실존주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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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Genet (1909-1986)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 시인·소설가·극작가. 창부인 어머니와 태어나면서부터 헤어져 고아로 자랐다. 10세부터 굶주린 배를 억제하지 못하고, 애정에 굶주려 소년원에 수감되고, 그 후 탈옥하여 거지·도둑·남창(男娼)·죄수생활을 하면서 유럽 전역을 방황했다. 1942년 프레느 형무소에서 처녀작 <꽃의 노트르담>(1942)을 써서 문단에 데뷔했다. 사르트르는 주네에 대한 평전(評傳) <성(聖)주네>를 저술하면서 그의 문학을 “말로 표현된 고행승적(苦行僧的) 실험”이라고 했다. 대표작으로서는 시집 <장미의 기적>과 빈민 구제사업의 도움으로 살아난 자기의 이야기를 쓴 소설 <도둑 이야기>, 그리고 희곡 <하녀>가 있다.

이오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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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Ionesco (1912-1994)

프랑스계 루마니아 사람. 극작가.

루마니아의 스라티나시(市)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이후 파리에 정주하였다. 1950년 <대머리 가희>(부제 <반희곡)가 상연된 이래 앙티테아트르 작가로서 베케트와 더불어 호칭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의 대표적 극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초기의 전위적 부조리극, 가령 <수업>(1951), 중기의 <무소(犀)>(1960) 등 사회풍자극과 <빈사(瀕死)의 왕>(1962) 등 내면적 작품의 3기로 나눌 수가 있다. 그는 연극의 줄거리·성격·언어를 해체하는 것으로 연극의 에센스를 뽑아내서 전 세대의 실험적 쉬르레알리즘 연극에 풍요한 넌센스 유머를 부여함으로써 대중화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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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 철학자·문예비평가. 샹파뉴 출신. 소르본 대학에서는 역사와 과학·철학을 강론하였으며, 일생에 걸친 연구활동은 <과학정신의 형성>(1938), <부정의 철학>(1940) 등, 비판적·합리주의적 인식론의 시도와 <불의 정신분석>(1937), <물과 꿈>(1940), <공기와 꿈>(1942), <흙과 휴식의 몽상>(1945) 등의 일련의 ‘상상력의 형이상학’의 시도로 나누어진다. 특히 ‘상상력의 형이상학’ 시도에서 시적 감각에 넘치는 독자적 정신분석 방법에 의해 ‘인식상의 장애’에 숨겨진 깊은 심층(深層) 심리학적 진실을 규명 평가하여 프랑스 현대 비평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격적 비평서로서 <공간(空間)의 시학>(1957), <몽상의 시학>(1961)이 있는데, 여기에서 공명(共鳴)하는 하나하나의 시적 이미지의 현상학적 해석을 주축으로 하여 시인의 ‘창조적 의식과의 교류’를 유도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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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 G. Le Clezio (1940- )

프랑스 현대작가.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로 일컬어지는 르 클레지오는 1940년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남프랑스의 휴양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니스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1963년 첫 작품 <조서>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후 멕시코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 서구문명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발견한 그는 유럽인들이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존재의 모델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의 사상적인 변모는 특히 1997년 발표되어 순수문학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기간 베스트셀러가 된 <황금물고기>에 순도 높게 반영되었다.

파리문단에서의 사교활동이나 대중적 접촉에는 전혀 관심없는 ‘비밀스런 작가’, 프랑스에서 ‘그이 세대에서 가장 진정한 작가’로 현역 작가중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사랑받는 작가로 공히 인정받고 있다. 여전히 신과 바다 사이, 태양과 대지 사이에서 자발적 유배자로 살면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열병>(1965), <홍수>(1970), <전쟁>(1970), <저편으로의 여행>(1975), <지상의 마지막 인간>(1978) 등 다수가 있다. 니스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카메라-펜 기법’이라 불리는 문체를 내세워 순수하고 객관적인 서술로서 투명하고 시적인 언어를 사용, 카메라에 비치는 상 그대로 대상을 묘사해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사하며 그만의 독자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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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Werber (1961- )

프랑스 현대 작가.우리에게 소설 <개미>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작가’.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개미를 관찰하였고 그때부터 개미만 가지고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으며, 개미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12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한 놀라운 작가이다. 120번에 가까운 개작을 거듭한 끝에 1991년 봄, 드디어 소설 <개미>를 탈고한다. 그는 <개미>로 ‘과학과 미래’의 그랑프리와 팔리시상을 받았으며, <개미>는 이미 10여 개 국에 판권이 팔렸다.

그의 경력은 좀 엉뚱하다. 1961년생인 그는 고향 툴루즈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언론 학교에서는 저널리즘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후에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들을 발표했다. ‘별들의 전쟁’ 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만화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올더스 헉슬리와 H. G 웰즈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다른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을 여러 방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먼저 마치 개미가 쓴 것처럼 개미의 시각으로 씌여진 <개미>,폭력없는 진보의 흐름을 개미들에게서 배우는 <개미혁명>, 그리고 세계 밖에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백과사전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과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영계탐사자를 다룬 <타나타노트> 등이 지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