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남서 유럽 문학/그리스·로마 문학


그리스·로마 문학〔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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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槪說〕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은 기원전 2,000년초부터 대략 2천년 동안에 걸쳐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에 개화·결실한 여러 민족 문화의 열매가 그리스·이탈리아 양 반도 기슭에 표착(漂着)하여, '인간'이란 중행적 테마에 의하여 총합되어 최종적인 변용(變容)을 이룩한 것이다

이 풍요한 모태(母胎)인 바다에 의해 운반된 문학적 선구(先驅)를 거슬러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의 찬가(讚歌)나 사자(死者)의 서(書), 바빌로니아의 신화, 전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며, 내려오면 <신약성서>나 초기 그리스도교의 지주라고 할 만한 성(聖) 히에로뉴모스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 긴 문학적 형성 작용에 있어서 조탁(彫琢)된 언어 표현을 통하여, 또 사상은 깊이를 관철함으로써 특히 인간의 모습에 예리한 상(像)을 맺은 것은 그리스·로마 양 지역에서의 도시국가 제도의 형성과 조락(凋落)의 기간과 거의 일치함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문학을 지중해 문학이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중심 과제에 고정시킨 자기 탐구의 길이며, 도시국가의 문학이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 근거한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수백년 동안 구전(口傳)되어 온 신화나 전설이 문자로써 표기되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가 언제 어떻게 하여 책으로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호메로스 자신이 그 당시 구승문학(口承文學)의 전통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그 조사(措辭)가 증명하고 있으며, 또 그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펼치는 자서전도 글로 쓰이지 않은 문학이 생겨나는 생성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인가 호메로스의 작품은 문자로 정착되어 그리스 문학은 최초의 거대한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호메로스는 유동하는 전승(傳承)의 바다에서 인간의 의지와 운명의 싸움을 끌어내어 그것을 불멸의―결국 인간이 주체적인 이론으로써 그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한, 언제라도 논리적으로 재현 가능한―형태로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이란 비논리적 기도문도 아니고 연대기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공통 보편의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진리표백(眞理漂白)의 길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호메로스를 비롯해서 헤시오도스 기타 서사시인, 또한 그 후를 이은 서정시인, 극시인, 그리고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에게 있어서도 바다와 같이 깊고 풍부한 신화·전설의 보고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더없는 강점이 되었다. 상호간 또는 독자나청중 사이에 공통적인 사고의 모태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로 쓰이지 않은 신화나 전설은 항상 창조적 사색으로 새로운 자극이나 출발점을 제공하고, 또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의 앞에는 심오한 층(層)을 차례차례로 열어 보여줌으로써 분석이나 비판을 유발하게 한 때문이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각각 그 자신의 시대를 추구하는 표현 양식으로서 자문자답을 문자로 써서 기원전 8세기에는 서사시를, 기원전 7-6세기에는 서정시를, 기원전 5세기에는 연극이나 역사 기술을, 기원전 4세기에는 철학적 대화를 이룩함같이 장르의 개발 창시를 눈부시게 계속했는데, 오늘날 회고해 보면 어느 것이나 신화·전설이라는 구전(口傳)에 의한 인간의 여러 경험과의 대화이며, 설명의 시도(試圖)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인간의 여러 경험에 대한 성찰(省察)로 향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다름 아니라 도시국가의 생활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인의 폴리스(도시국가)란 지상의 현실임과 동시에 신의 영지(英智)나 정의에까지 이어진 영원한 이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이 양면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사는 보람을 느껴 창조력이 자극되는 한, 폴리스의 문제는 곧 웅장한 문학적 영감이 되었다. 티르타이오스의 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투키디데스의 역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플라톤의 모순과 긴장에 찬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하나라도 여기에서 발단(發端)되지 않은 것은 없다. 또 반대로 이와 같이 한없는 포부의 원천이었던 개개의 폴리스가 그 정치적 존립의 의의를 잃게 된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는 그리스 문학도 또한 부득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테오크리토스의 목가시나 알렉산드리아의 여러 시인의 아름다운 보석 세공과 같은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바다와 신화, 그리고 폴리스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기의 그리스 문물은 헬레니즘 세계의 구석구석에까지 전해졌는데 지중해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서 그리스인의 문학은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자극을 주어 모범적인 귀감(龜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윽고 교양있는 로마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마인은 비슷한 풍토의 혜택을 입고 비슷한 폴리스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풍부한 지성과 창조력을 신화나 문학에 쏟았던 그리스인과는 아주 다르며 우선 실천적인 힘과 덕성으로 로마의 세계를 수립·확대할 것을 제1의로 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에 있어서 문학의 형성은 그리스의 경우와는 현저히 다르다. 로마인으로서는 극문학·시·변론술 등 어느 것을 물을 것 없이 그리스인에 의하여 다듬어진 형태를 어떻게 하여 그 자신의 내적 진실(內的眞實)을 담는 그릇으로 동화(同化)시켜 가느냐 하는 기술적인 물음에 출발점이 있으며 오늘날 전하는 로마 문학의 명작은 어느 것이나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플라우투스의 희극 기원은 멀리 이탈리아의 농민문화에서 발상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작품의 시형이나 극의 구성은, 그리스로부터의 자극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또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고통(苦痛)에 찬 세계를 배경으로 지성과 인간성을 호소한 키케로의 변론이나 수필 등도 그리스의 유산과 로마의 전통과 현실의 합일을 계속하여 추구한 보람임을 키케로 자신도 말하고 있다. 또 싱싱한 감정이 넘치는 카툴루스의 시는 알렉산드리아의 시성(詩聖)들도 놀랄 만큼 훌륭한 그리스풍(風)의 수식을 라틴어로 표현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 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의 치세하에 로마의 평화를 구가한 호라티우스가 그리스의 전형을 추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개탄한 것도 이와 같은 로마 문학의 숙명적 과제를 알 때 한층 더 절실한 의미를 전해준다.

그러나 로마의 시인이나 작가들이 달성한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업적은, 헬레니즘의 의미를―본래는 단지 그리스어화(化)한다는 것이었으나―창조적인 실험에 의하여 깊게 하고, 본질적인 변용을 수행한 사실에 있다. 언어나 민족성의 차이나 장애를 넘어 문학이 추구하는 형태와 내용의 미는 보편적인 생명을 보전 유지하여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것임을 그들은 실천적으로 입증한 때문이다.

그리스 중세 문학의 발달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395년부터 1453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일부였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1,000년 동안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비잔틴 예술이 발달했다. 이때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그리스의 학문 및 문학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종교시는 중세 그리스문학의 가장 지배적인 형태였다.

그 후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된 후 400년 동안 그리스문학에는 민요나 민담 이외의 작품은 창작되지 않았다. 19세기 초반에야 최초의 현대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모스(Dionysios Solomos)가 나타나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생생한 '일상어(demotic)'를 시에 사용했다. 그의 시 이전에는 '카타레우사(katharevousa)'라고 부르는 공식적인 학술 그리스어가 문학에 사용되었다. 1880년대의 민중운동은 예술과 문학이 일상 생활의 주제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그리스 산문은 지방생활과 풍습을 묘사하는 단편소설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장편소설이 산문 형태의 문학을 주도하여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욕망과 정신적인 이상 간의 갈등을 다룬 강렬한 소설을 썼다.

20세기의 현대 그리스시는 몇 명의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카바피(Constantine Cavafy)의 이야기체 서정시는 그가 죽은 후 외국어로 번역되어 큰 찬사를 얻었으며, 서정시를 쓰는 세페리스(George Seferis)는 1963년에 그리스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또 다른 그리스 시인 엘리티스(Odysseus Elytis)는 197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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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

그리스 문학은 한마디로 말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완성된 형태로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두 편의 배후에는 서사시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호메로스의 시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8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시 속에서 읊어진 트로이 전쟁은 그보다도 400-500년 거슬러올라간 미케네 문명시대, 즉 청동기 시대인 것이다. 더욱이 그때부터 이미 영웅의 무훈을 읊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노래와 말로 이어져 내려와 호메로스에이르러 찬란하게 개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 발전의 과정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호메로스가 실존했는지의 여부조차 불확실한 형편이다. 그러나 서사시는 쓰여진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이야기하면서 창작되어 전해져온 이른바 구전시(口傳詩)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서사시에는 성질이나 속성을 나타내는 형-용어구, 그 밖에 매우 다양한 전통적인 성구(成句)가 있어, 시인은 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스스로 하프를 타면서 거의 즉흥적으로 작시한 것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나 서사시의 주제는 역시 영웅의 무훈이다. 영웅이란 무용(武勇)·권력, 육체적 아름다움이라는 점에 있어서 신들과 흡사한 고귀한 사람들이며, 인간으로서의 한계점까지 전력을 다해서 살아간 사람들이다. 독일의 고고학자 실리만(1822-1890)에 의한 트로이나 미케네의 발굴은 그리스 역사의 초기에 이러한 영웅들이 활약했던 영웅시대가 있었으며, 트로이 전쟁은 이 영웅시대 말기의 사건이었음을 실증했다.

미케네 시대에는 각지에 호화스런 왕궁이 있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이곳만의 독특한 문명이 발달했다. 영웅의 무훈을 읊은 시인들도 왕궁의 녹을 먹고 있었다. 왕궁들은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약탈과, 약탈을 격퇴하기 위한 투쟁이 영웅의 생활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 속의 영웅은 화려하고 힘찼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영웅생활은 엄격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영웅의 생활은 끊임없이 예측할 수 없는 신들의 의지나 운명의 힘, 그리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죽음이 결정되면, 살아 있는 동안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영웅들과 그들을 둘러싼 생활이 한줄기 거대한 흐름이 되어 도도하게 흐른다. 이것이 그리스의 영웅서사시이다.

호메로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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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예부터, 특히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 있다. 그 쟁점은 호메로스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 그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는가의 여부이다.

근대에 와서의 단서는 독일의 고전학자 볼프(1759-1824)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운데 모순이 굉장히 많다는 것(한번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웅이 후에 다시 전사하는 등)에 착안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논쟁이 극단으로 나가 드디어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가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일리아스>로 하여금 세계 최대의 서사시가 되게끔 만들고 있는 예술적 통일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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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ias(기원전 8세기 ? )

호메로스 서사시. 전24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괴함으로써 전(全)그리스군이 대병력과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하기를 10년, 이야기는 전쟁 10년째인 어느 날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 제일의 용사인 아킬레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하여 노기충천, 전장에서 철수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가 없는 그리스군은 트로이군에게 참패를 당했고, 이렇게 되자 아가멤논에게는 재화(災禍)를 그에게는 영예를 내리라는 그의 기원을 제우스신이 받아들여 소원이 성취된다. 그러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 의해 쓰러지자 비탄한 나머지 마침내 전장에 출전, 귀신처럼 이 싸움을 휩쓸고 드디어 헥토르를 쓰러뜨린다. 헥토르의 유해를 돌려받기 위해서 아킬레스를 찾아온 트로이의 노왕 프리아모스와 헥토르를 죽이면 자기도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킬레스와의 사이에 비통한, 그러면서도 담담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마지막에 “헥토르의 장례식은 이와 같이 치러졌다”는 문구로 전편(全篇)은 끝을 맺는다.

시는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실로 가지각색의 영웅들과 그 가족, 조상을 등장시켜 때로는 놀랄 만큼 빠른 템포로, 혹은 서정미 넘치는 필치로 다양한 아름다움을 전개시킨다. 아킬레스는 전형적인 영웅이다.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에 통하는 길이지만 그는 명예를 얻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행동한다. 행동은 그 극치(極致)에 있어서는 비인간적이기조차 하다. 최후까지 인간적인 면을 버리지 않았던 헥토르와의 대조가 뛰어나다.

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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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ysseia (기원전 8세기 ? )

호메로스 서사시. 전24권.

전쟁 10년째 마침내 트로이는 함락되었고 그리스 장병은 각자의 고향으로 개선하나 오디세우스만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귀국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무수한 고난을 겪는다. 그동안 고향에서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가 무지막지한 구혼자들의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 아들 텔레마코스의 귀향길에 매복, 그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오디세우스의 표류와 모험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나, 이윽고 여신 아테네의 가호를 받아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도 변한 모습 때문에 아무도 그가 오디세우스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재회한다. 그 후 살해당한 구혼자들의 친척이 복수를 꾀하나 아테네의 주선으로 화해한다.

<일리아스>와는 대조적으로 이것은 영웅시라기보다는 일종의 옛 이야기(특히 오디세우스의 해상 모험 이야기 등으로)로써 줄거리가 <일리아스>보다 복잡하고 로맨스적인 이야기로 재미와 스릴이 풍부하다. <일리아스>에 비해 구성이 떨어지긴 하나 지장(智將) 오디세우스의 이미지가 전편을 일관하고 있다.

헤시오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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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iodos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활약한 그리스 서사시인.

중부 그리스의 보이오티아주 아스크라의 농촌에서 태어나 엘리콘 산중에서 양을 치는 가운데 시신(詩神) 뮤즈에게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방랑시인으로서 각지를 방랑하고 시가(詩歌) 낭송 경기에 참가, 심지어는 호메로스와도 경합, 이겼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는 호메로스의 영웅시에 비해 신들의 계보시나 교훈시에 보다 정력을 쏟았고 작품 중에 작자 자신을 명시한 세계 최초의 시인이다.

신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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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誕生

헤시오도스 작. 제신(諸神)의 태어난 계보를 노래한 1022행의 장단단(長短短) 육각시(六脚詩)로 되어 있다. 서가(序歌)에 이어 세계의 생성에 언급, 혼돈 상태의 카오스에서 가이아(대지의 여신)로, 가이아에서 우라노스(천공의 신)에 이르고 이 양자의 결합에서 티탄 신족(神族)이 태어나며, 아들 크로노스에서 제우스신에 이르는 3대 교체(交替)신화가 기술되어 있다. 한편 티탄(Titan)중의 하나인 이아페토스의 아들 프로메테우스나 인간과의 교섭이라든가 거인들과의 싸움을 서술하였고 나아가서는 여러 신들이나 영웅의 탄생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나 얼마간 황급하게 시는 끝나고 있다.

노동과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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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

헤시오도스 작. 28행의 동형시로, 서설에는 자기의 신상이나 시세의 개탄, 악의 유래와 5세대설―지금은 철의 시대―판도라의 이야기 등이 포함된다.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바탕으로 노동을 권장하고 농경법이나 밭일 및 항해의 계절에 관해 썼고 또한 일상생활의 교훈과 일력에 관한 주의가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미신적인 동시에 흐름도 달라 그 진본 여부가 의문시된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호메로스의 영웅시와는 달리 전원서사시라고 하겠으며 기사의 세계에서 서민의 세계로 뛰어들어 농촌문화의 모랄을 제시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대문학과 다른 경향을 지닌 점에서 주목된다. 헤시오도스파로 불리우는 보이오티아파 서사시에는 <헤라클레스의 방패> <여인의 카탈로그> 등이 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평가가 낮아지고 있다.

개성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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個性-發見

귀족과 영웅의 이상을 읊은 호메로스의 시는 새로운 공동사회의 성립과 함께 과거의 것이 되고 시민생활의 기쁨과 애증, 이별, 나아가서는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새로운 문학적 형식이 추구되기에 이르러, 이오니아 시인들의 엘레게이아 풍자와 비웃음을 주제로 한 이암보스 시, 아이올리스의 서정시가 개화기를 맞았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인은 개인으로서 표현하고 새로운 개성의 세계를 탐구한다. 아르킬로쿠스는 회화에 가까운 음률을 구사하여 개인적 증오를 투영시켰고, 사포는 열렬한 연정을 격정적으로 읊는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강렬하게 자기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의 시인들은 결코 자아에 탐닉하거나 순수한 사적 감정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꾸준히 도시국가를 사회적 배경으로 하면서 자신을

공동체의 일부분으로 하여, 보편적 규범의 제제를 받고 있다. 이들은 개성을 적극적으로 세계와 관련된 것으로서 표현하고, 개성을 통해 객관적 세계를 설명하며 동시에 자아를 객관화시킴으로써 참된 자아 의식에 도달한다. 호메로스의 어법을 사용하면서도 스파르타적 시민의 이상상에 다다른 티르타이오스, 얼핏 보기엔 개인적이면서도 민중의 소리를 자유의 표현에까지 드높인 아르킬로쿠스, 그 자신이 속한 사회가 붕괴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층 심오한 시인의 사명을 자각한 핀다로스는 서정시의 세계가 마침내 도달한 위대한 개성이었다.

티르타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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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rtaios

기원전 7세기경에 활약한 엘레게이아 시인.

아테네의 지극히 평범한 학교교사였던 그가 신탁(神託)으로 스파르타에 초빙되자 메시니아 전쟁에 지쳐 있던 스파르타군의 진두지휘를 하면서, 수많은 엘레게이아 시(詩)를 읊어 크게 사기를 고무하여 분발케 하고 마침내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당시의 스파르타는 낡은 귀족의 이상을 고수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였으나 그 미덕, 즉 전사로서의 용맹성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존귀성을 시인이 읊어 전체적으로 포괄적인 시민의 이상상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그의 시는 스파르타군 행진곡으로서 후세에까지 불려졌다고 한다.

아르킬로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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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lochus

기원전 7세기 초엽에 활약한 그리스 파로스 태생의 전사·시인.

그는 처음으로 전설세계에서 나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생의 문제와 고뇌에 관해 읊었다. 형식도 내용에 맞게 엘레게이아나 이암보스가 채택되어 더러는 호방하고 신랄하게 어떤 경우에는 유머를 섞어서 신변 이야기를 노래했다. 주연에 흥을 돋구기 위해 피리에 맞춰 '창 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를 노래하거나 영웅적 몸가짐에서 벗어난 자신을 유머와 함께 읊은'방패의 노래', 세속적 속박에서 떠나 자유로운 세계를 옹호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읊은 노래, 우화를 얘기하며 동료 시민들의 사표(師表)로서 발언하고 충고하는 노래, 그리스 문자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자신을 향한 자탄의 노래 등, 그의 시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개성을 통해 객관적인 전세계와 법칙을 표명하여 자기 자신 속에 대변시킨 시인이라 하겠다.

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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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pho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아르카이오스(레스보스섬 튜티레네시(市)의 귀족시인. 기원전 620경-? )와 함께 활약한 여류시인.

기원전 612년 무렵 레스보스에서 태어나 한때는 시칠리아에 망명했으나 그 후 다시 복귀했다. 개인의 내적 생활을 아름답게 읊어 그리스 문학사·정신사에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고, 시의 아름다움 때문에 열 번째 시의 여신으로 손꼽히고 있다. 사포는결혼 전의 처녀들을 모아서 소규모의 학교를 개설하고 음악, 무용, 시가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축혼가나 사랑의 노래는 그러한 처녀나 다정한 벗들을 대상으로 해서 읊어진 것이다. 조화가 넘치는 우애의 환희를 읊어 예부터 내려오는 남성적 여웅주의 전통에 여자가 지니는 영혼의 정열과 고결함을 첨가시켰다. 또한 그리운 처녀 앞에 나타난 약혼자에 대한 시인의 질투심조차도 담담한 소박함 속에서 표현하면서도 개인적 감정의 생생한 격정을 훌륭히 노래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추상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법이 없이 참된 정열이 언제나 감각의 세계를 통해 영혼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음을 묘사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비애가 그녀의 시에 순박한 우울의 아름다움과 참된 비극이 갖는 고아한 즐거움을 불어넣고 있다.

핀다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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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daros (기원전 518-기원전 438)

그리스 합창시(合唱詩) 작자.

그리스의 보이오티아 지방 테바이의 명문 출신이다. 그의 시재는 일찍이 뛰어나 여러 나라의 왕후 귀족에게 초청받거나 궁전에 초빙되어 무용가, 소녀무용가, 주연가, 찬송가 등 수많은 합창시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축제, 경기의 승리자를 찬양하는 축승가(祝勝歌)는 그의 이름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축승가는 그리스의 4대 제전인 올림피아제(祭), 피티아제, 이스트미아제, 네메아제의 승리자에게 바쳐진 것으로 각 제전의 이름을 붙여 모은 시가 현존하고 있다. 그는 축승가를 통해 신을 찬양하고 영웅을 찬양했으며 사람으로서 이상형(理想型)에 도달한 인간을 찬양하였다(올림피아歌Ⅱ). 이 젊은 시인은 테살리아나 아이기나에 초청되어 그 곳의 귀족사회에 완전히 동화하여 젊음이 넘치는 정열을 다해 그것을 이상화하여 노래했는데(네메아歌 Ⅶ), 단순히 귀족사회를 용인하면서 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화려한 어법과 의고적(擬古的) 조형예술을 구사하여 추구한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이후 밀어닥친 민주주의의 물결은 그의 후원자였던 왕후 귀족들을 점차로 몰락시켜 귀족주의는 멸망하기에 이른다. 고난의 현실과 대결하게 되자 그는 처음으로 과거의 전통이 지녔던 아름다운 이상을 의식하고 확인한다. 귀족적 인간상, 도덕적 자부, 종교적 신앙을 음영(陰影)있는 아름다움과 함께 묘사하고 잃어버린 세계의 고귀한 영혼의 부활을 부르짖는다. 이러한 절규가 풍부한 창조력으로 환원하여 생긴 것이 시칠리아 왕후에게 바친 시이다(올림피아시 I, 파티아시 Ⅱ, XII). 이렇게 해서 기원전 6세기말의 귀족들이 지닌 이상적인 참된 인간상은 그의 시를 통해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시민의 노래(연극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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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演劇-擡頭)

그리스에서의 비극·희극의 시작은 멀리 미노아, 미케네 시대의 땅의 여신이나 풍요의 여신을 모시는 제사에 그 발단을 두고 있다고 한다. 고대인은 해가 바뀜에 따라 생명을 새로이 하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비애나 새로 탄생하는 것에 대한 희열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감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헤시오도스의 농경시의 근저에 흐르고 있고, 또한 더러는 서정시인의 노래가 되어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제사라는 형식에 담겨진 인간의 소망, 즉 기도나 가무(歌舞)라는 말과 행위에 의한 표상을 통해 신과 자연과의 동화를 기원하는 본원적 욕구는 마침내 연극이라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탄생케 하여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비극·희극이란 뚜렷한 인간적 표정을 아로새겨 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창조에 보탬이 된 것은 흘러간 여러 문학의 전통적 힘도 있었지만 주로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아테네를 지배하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의 문화 진흥정책과 기원전 6세기 말엽에서 5세기 초엽에 걸쳐 있었던 민주주의 정권의 연극 진흥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사회적 주조(主潮)와 함께 아이스킬로스 등을 배출, 앗티카의 예술적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고전 연극사를 통해 연극은 시민사회의 일상적 행사가 되고 사회 전체의 평화, 번영, 정화를 바라는 공공단체의 기원은 극작품 전체의 모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극중의 합창대가 부르는 가사로 화해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고 있다. 아테나에서는 해마다 디오니소스신을 위한 커다란 제사나 레나이제를 비롯해서 그 밖의 축제에 있어서도 비극·희극의 경연이 성대하게 이루어져 시민이나 다른 나라의 방문자들이 다 함께 연극을 즐겼다. 연극 상연의 비용은 부유한 시민들이 신과 국가에 대한 봉사의 뜻에서 기증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이스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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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chylos (기원전 525-기원전 456?)

그리스 시인.

아티카 지방 엘레우시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그때를 전후해서 비극 창작과 상연에 두각을 나타내어 기원전 484년 비극 경연에서 1위를 차지했다.

기원전 472년 <피네우스> <페르사이(Persai)> <프로메테우스>의 여러 작품으로써 우승했고 그 후 시칠리아섬 시라쿠사를 방문, <페르사이> <아이토나이아이> 등 여러 작품을 상연하였다. 기원전 467년에는 <오이디푸스> 3부작을, 기원전 458년에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 등을 아테네에서 상연했으며, 그 후 재차 시칠리아를 방문한 바 있으나 기원전 456년 무렵 이 곳의 게라에서 죽었다.

90편의 비극이나 사틸로스극을 창작, 경연에서는 13회의 우승을 획득하였다고 하며, 죽은 후에도 그의 작품은 재연되어 상을 탔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세기 디오니소스 극장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비극은 <페르사이> <테바이를 공격하는 7인>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애소하는 여자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7편이 있고 그 밖에 파피루스 문서나 인용에 의한 단편(斷片) 다수가 남아 있다. 아이스킬로스가 비극의 창조주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웅혼하고 시적 영상성으로 충만한 합창가와 대사의 창시에 있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거창한 시간적·공간적 전망 아래 인간의 운명과 활동에 방향과 좌표를 설정하였다는 데 있다. 그러한 전망을 바탕으로 그는 3부작이라는 서사적 구성을 채용, 거대한 우주의 흐름을 통해 신들이나 인간이 유전(流轉)의 고통을 극복하고 언젠가는 보다 큰 조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페르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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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ai (기원전 472)

아이스킬로스 작.

현존하는 최고의 그리스 비극.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륵세스의 아테나 정벌 원정을 주제로 한 그리스극 가운데 가장 유일한 역사극. 페르시아 전쟁을 물질적인 양(量,페르시아측)과 인간적 자질(그리스측)과의 싸움이라고 보는 관점,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를 역사적 필연으로 보고 있는 점 등이 흥미있다. 더욱이 '비극'이라는 시점(視點)의 설정이

흥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의 한 특성을 설명하는 기틀이 되어 있는 것도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극의 구성은 페르시아군 패배의 비보가 페르시아 왕궁에 전해지는 것을 이야기의 줄거리로 하는 단순한 구성이다. 사자(使者)의 보고를 주축(主軸)으로 하여 엮어지는 전반과 노왕(老王)의 망령(亡靈)이 출현함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후반은 이른바 복식 구성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최후에 패왕 크세륵세스가 등장하는 막은 장대한 비탄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 비극의 리듬을 훌륭히 나타내고 있다.

아가멤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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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memnon (기원전 548)

아이스킬로스 작.

트로이 원정의 그리스군 총수 아가멤논이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얻은 후 개선하나 남편이 없는 동안 마음이 변한 왕비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의 간계로

암살당하는 경위를 소재로 한다. 이 이야기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하는 아들 오레스테스의 음산한 행적을 다룬 <코에포로이>, 최후로 오레스테스의 흑백을 가리는 신들의 법정을 주제로 하는 <에우메니데스>로 전개된다.

힘과 힘이 결정하는 정의가 아닌, 법과 설득에 의하여 인간의 행복을 약속하는 질서가 탄생함으로 해서, 오레스테스의 죄과도 인간의 역사에서 씻겨 나간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자의 시적 창조력은 이로써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언어 예술로서 극작품의 한 전형을 남기고 있다. 또한 운명과 자의(恣意)와의 사이에서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나가는 비극적 인간의 상징인 아가멤논과 오레스테스는 그 후 그리스 극작가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과 막중함에 심혈을 기울이는 현대 사상가들에게도 고전적 원형으로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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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okles (기원전 496?-기원전 406?)

그리스 극시인.

성품이 영민하고 기원전 468년 28세에 비극 경연에서 아이스킬로스를 누르고 우승했으며 그 후 정계에서도 페리클레스(아테네 정치가, 기원전 495?-기원전 429)의 동료로서 활약하여 기원전 443-기원전 442년에는 그리스 동맹재무관, 기원전 441-440년에는 지휘관직을 맡고서 키오스를 방문했다. 기원전 413-기원전 411년의 아테네 내정 동요기에는 국가 최고위원 10명 가운데 하나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뛰어나게 세련된 사교가로서 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또한 종교심도 두터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비극 123편을 만들어 우승만도 18회를 헤아리나 현존하는 7편 가운데 상연 연대가 밝혀지고 있는 것은 <필록테테스>(기원전 409)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며 <안티고네>는 기원전 442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모두 3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단계는 아이스킬로스풍의 웅장 중후함을 모방한 시기이고, 제2단계는 엄밀한 기교주의를, 그러다가 얼마 안가 제3단계에 이르러서야 비극의 인물에 조화시킨 스타일로 낙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7편의 작품은 이 최후의 완성기에 이루어진 작품들로 지목되는데 작중 여러 인물들의 깊고 강렬한 인간성이 부각된 대사로 충만되어 있다. 또한 합창대를 12명에서 15명으로 증원했고, 3명의 배역을 사용해서 3자의 대화를 극중에 도입했다. 또한 무대의 배경화나 소도구의 연구 등, 상연 양식에 있어서도

창의력이 돋보인다.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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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gone (기원전 442?)

소포클레스 작.

역적으로서 전사한 오빠의 유해 매장 여부를 놓고 누이동생 안티고네와 위정자 크레온 사이의 대립을 주제로 해서 법에 대한 충성과 인간성에 대한 순종이라는 영원한 문제를 부각 시킨 명작이다. 더욱이 작가는 작중인물의 정묘한 대비를 통해서 이러한 대립과 갈등, 나아가서는 비극적인 운명이 생기는 원천이 인간 내부에 감춰진 주장―그러한 주장이 되어 표면화하는 성격―에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오이디푸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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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dipous Tyrannos (기원전 402)

소포클레스 작.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경험을 가리켜서 말할 수 있는가. 애매하고 불안정한 자신이 결정적인 운명과 대결할 때라고 작자는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그러한 대결이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작자는 고아 오이디푸스를 테바이 왕으로 끌어올리는 힘이나,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힘도 결국 하나의 같은 힘이며 인간은 그러한 힘의 전모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접할 때 자신의 허무함을 깨닫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주인공이 전심전력을 다해 그러한 체험에 뛰어드는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에 작가의 인간성이 나타나 있다. 즉 궁극적으로는 무(無)의 자각에 이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과정에서는 선이요, 미라는 것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작자는 주장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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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ipides (기원전 480?-기원전 406?)

그리스 극작가.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5세 때 비극 처녀작을 상연했고, 기원전 441년 우승하였다. <알케스티스> <메디아> <히폴리토스> 등의

걸작으로 일류 비극 시인으로서 인기가 높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기 10년 동안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몇 개의 정치색 짙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오랜 신화적 제재 가운데서도 현실 세계에 충만한 인간의 고뇌가 생생한 호소력을 지닌 채 육박하는 것이었다. 비극보다도 비극적인 전쟁·질병·절망·죽음이 주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극을 지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극'이라는 약속의 세계에 몸을 담고 엄밀한 극형식을 유지함으로써 목전의 세계로부터의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제재에서 우러나오는 기이한 친밀감과 밀어붙이는 듯한 형식의 냉엄함이 양극 사이에 가득 찬 긴장감을 극의 생명으로 삼고 있다. 기원전 416년 알키비아데스의 우승가를 지었고, 다음 해인 415년에는 <트로이의 여자들>, 기원전 412년<헬레네>, 기원전 408년 <오레스테스>를 상연했다. 마그네시아의 명예 영사에 임명된 것은 그때쯤의 일로 생각된다. 그 후 마케도니아 왕 궁전의 객이 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작품 75편에 우승 5편이었고, 죽은 후에도 그의 작품은 빈번히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현존 작품은 19편이 있다.

메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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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eia (기원전 431)

에우리피데스 작.

질투에 눈이 먼 아름다운 마녀 메디아가 남편 이아손에 대한 보복으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둘을 죽인다는 이 작품 속에는 비인간적인 대우에 고민하는 여성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남편 이아손의 파렴치하고 욕심 사나운 계산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메디아의 고뇌가 끝닿는 대목에서 그녀의 모습은 불마차를 몰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에우리피데스의 강렬한 리얼리즘이 신화로의 도피에 의해 훌륭한 예술 형식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히폴리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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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polytos (기원전 428)

에우리피데스 작.

아름다운 유부녀 파이드라가 양자인 히폴리토스에게 사랑을 느끼나 거부되자 부끄러운 나머지 히폴리토스를 참소해서 죽음의 동반자로 한다.

이 비극은 두 사람의 애처로운 결백함과 이를 죽음에까지 몰아넣는 사랑의 격렬함이 서로 얽히는 불꽃이 되어 종국에 이르는데, 작자는 프롤로그에 여신 아프로디테를, 에필로그에 여신 아르테미스를 배치함으로써 기하학적 대칭성과 돌같이 차가운 형식을 보존하고 비극의 초점을 무한한 피안(彼岸)으로 연결시킨다.

아리스토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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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phanes (기원전 450?-기원전 388?)

그리스 극작가.

그의 작품은 아테네 사람들의 공사간의 양상을 후세에 전하는 거울이라 불린다. 현존하는 11편에는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기사>(기원전 424), <말벌(胡蜂)>(기원전 424), <평화>(기원전 421), <리시스트라테>(기원전 411) 등과 같이 반전·반선동정치를 강렬하게 노래한 정치 풍자극이나 <구름>(기원전 423)과 같이 당시의 선진사상과 이를 따르는 어리석은 추종자를 조소한 극이 있고, 또한 희극으로는 참을 수 없는 경쟁 상대인 비극을 풍자의 대상으로 하는 <테스모포리아를 축하하는 여자들>(전 411), <개구리>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어느 작품이거나 인간의 웃음을 단순한 그 자리만의 생리적 충동으로서가 아니라 정치나 문화, 그리고 인생의 비극이 가져오는 중압에 굴하지 않으려는 분연한 인간의 자세로 부각시키고 있는 점에 불변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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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arnes (기원전 425)

아리스토파네스 작.

오랜 전쟁으로 농토를 잃고 피로에 지친 농부 디오폴리스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개인 자격으로 적과 단독으로 화평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교섭 경위나 권모술수, 그리고 평화가 찾아와 희비가 얽히는 시민과 군인의 우스꽝스런 표정 등을 통렬한 필치로써 꾸며나가고 있다. 이러한 테마는 또한 <평화> <리시스트라테> 등에서도 선명하게 전개되고 있다.

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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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rachoi (기원전 405)

아리스토파네스 작.

아리스토파네스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희극의 제재로 하고 있는 것은 문화나 교육과 같은 영역에서 신구 세대 사이의 격차 또는 대립에 관한 문제이다. <구름>에서는 신교육의 공죄가 풍자 대상이 되고 있으나 <개구리>에서는 아테네의 초기 민주정치의 챔피언인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전통적 예술에 혁신 기풍을 도입한 에우리피데스와의 솜씨 겨루기가 테마로 되어 있다.

이것은 표면을 희극으로 위장하여 심각한 문예비평을 숨기고 있으며 더욱이 연극과 사회와의 상관관계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는 점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

지성의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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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性-凱歌

서사시는 그것을 만들고 노래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들의 과거를 찬미하고 세계관을 대변해 주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새 시대의 물결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서사시의 세계나 또는 그 표현에 싫증을 느껴 자신들의 새로운 세계와 사유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자연발생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7세기의 서정시에 이미 반영되고 있는 새로 눈뜬 자기의식은 인간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통적·신화적 설명에 모순을 느끼고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지성에 의존해서만 참된 탐구를 꾀했다. 신화 영웅의 전승이 비판되는 것과 동시에 이를 노래한 전통적인 서사시라는 표현 방식을 대체시킬 것이 촉구되었다. 바로 여기에 산문이 새로운 지식탐구의 도구로서 발달하는 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기원전 6세기부터 '로고그라포이'라고 불리는, 주로 이오니아의 역사가들이 산문의 형식·계보, 각 도시의 연대기나 건설사, 그리스 이외 국가들의 지리·풍속·역사 등을 산문형식으로 열심히 쓰기 시작했고, 이오니아에 철학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그리스 철학·역사·과학의 발달을 위한 원동력이 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탐구정신은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어 우선 이오니아에서 참된 결실을 보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기원전370?)의 철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등 산문의 걸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이오니아 산문'은 호메로스 서사시 문체의 소박성을 보존하며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그리스 철학자 기원전 500?)에서 비롯된 대조법(상반되는 말 및 사상을 대조 배치하는 기법)과 같은 기교도 소박한 형태로나마 도입되고 있다.

이어 기원전 5세기 말에 아테네에서는 '덕이 곧 지성'이라는, 즉 아름다운 행위는 이성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가르치고, 참된 의지에의 애정을 설파한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역사를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탐구하려 했던 투키디데스의 역사 기술 등, 탐구정신은 실로 지성의 개가라고 할 수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이와 함께 사상의 복잡한 음영을 표현하고 인간 심리의 미묘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산문체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소위 '앗티카 산문'은 아테네의 민주정치와 함께 불가분하게 발달한 웅변술과 '이오니아 산문'이 결합된 것인데, 헤라클레이토스의 산문 기법을 고도로 수사화시킨 고르기아스(그리스 웅변가 기원전 483-기원전 376) 등 소피스트들의 영향하에 생긴 것이다.

헤로도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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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dotos (기원전 484?-기원전 428?)

그리스 역사가.

소아시아 하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는데 아테네와의 유대가 깊어서 몇 차례에 걸쳐 그곳을 방문했으며 문화인과의 접촉도 많았다. 그 후 아테네의 주창으로 남이탈리아에 건설된 식민지 투리오이의 시민권을 얻어서 그 곳으로 이주했다. 그동안 한 번은 이집트에서 페니키아·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또 한 번은 스키티아 지방을 답사하는 2회의 대규모 여행은 <역사>의 완성에 자료면에서나 사상면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500-기원전 479)을 주제로 한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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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기원전 425?)

헤로도토스 작의 역사서. 전9권.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9권은 미완성이다.

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하에 지리·풍속·역사·삽화·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져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표현 등 변화가 풍부하다.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줄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이유이다.

투키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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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kydides (기원전 460?-기원전 400?)

그리스 역사가.

아테네의 명문출신이며, 같은 이름의 정치가와는 동명이인.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04) 중에 자신도 장군으로 선발되어 트라키아에 파견되었으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죄로 추방되었다가(기원전 424) 전쟁 종결 후에 아테네로 돌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과 함께 전쟁의 중대성을 예견하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던 그로서는 불행했던 추방도 적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데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고, 직접 체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주제로 한 <전사>를 저술했다. 그의 역사 기술의 의도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 또는 미래의 정치를 정도(正道)로 이끌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교육적인 것으로, 또한 그 철저한 과학적·비판적 태도는 헤로도토스에게서 볼 수 있는 서사시적 발상을 일소하여 그리스의 역사 기술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워 '과학적 역사 기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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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史

투키디데스 작의 역사서. 전8권.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를 양분하여 서로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술한 이 역사서는 기원전 411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다.

<전사>의 문체는 이 책의 약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연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법과 같은 당시의 수사학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창출해 내고 있다. 하나하나의 문장은 사상이 지나치게 응집되어 추상적 문구의 지나친 사용과 함께 때때로 난해한 흠이 있으나 사색의 발자취가 그대로 문장에 남아 있다는 점에 투키디데스 문체의 독특한 매력을 찾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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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krates (기원전 470?-기원전 399)

아테네 철학자.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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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pokrates (기원전 460?-기원전 375?)

그리스 의사.

코스섬<島>에서 태어나 각지를 두루 여행했으며 테사리아의 라리사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이상적인 의사상으로서의 명성은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까지 부동이다. 모든 병은 자연적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학 원리로 하여 과학적인 의학을 창시했다.

그는 의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널리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히포크라테스 의학 집성>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기술된 논문집은 그의 이름을 따고는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의사 및 철학자들의 저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기원전 5세기에서 서기 2세기의 것까지 포함되어 있고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다. 그 가운데 그 자신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고대 이오니아 산문으로 된 걸작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공기·물·흙에 관해서> <성스러운 병(病)>등이다.

정치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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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文化

기원전 4세기는 정치적으로 볼 때 그리스 도시 국가 체제의 몰락기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에도 도시국가 간의 항쟁은 끊이지 않았고 시민의 공동체 의식은 엷어지는 반면, 개인주의 경향은 오히려 강해져 갔다.

철학자들이 폴리스의 변화에 절망하여 학문의 전당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이상적 정치와 순수 진리의 탐구에 여념이 없을 때 현실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몸소 폴리스가 직면한 고난과 맞붙어 고전적 그리스 문화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앗티카의 변론가들이었다. 기원전 5세기의 소피스트들에 의해 육성된 그리스의 변론술은 그들에 의해 최고의 산문예술로까지 드높여져 여기에서 정치변론이 훌륭한 문학작품일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주었다.

이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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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okrates (기원전 436-기원전 338)

그리스 웅변가.

아테네에서 태어나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기원전 500-기원전 400?)와 시칠리아 출신의 변론가 고르기아스(기원전 483-기원전 376)에 사사했고, 기원전 390년경 아테네에서 변론술 학교를 개설했다. 같은 무렵에 창설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대항해서 변론술을 지주로 하는 폭 넓은 인간교육을 이상으로 했으며, 그 문하에서 허다한 수재를 배출하여 후세에 인문주의적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통일을 평생의 염원으로 삼고,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마침내는 신생국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리포스에 기탁했으나 얄궂게도 그에 의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기는 케로네아에서의 패전이 있은 수일 후,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국가의 여명을 목전에 둔 채 98세로 일생을 마쳤다.

데모스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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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sthen

s (기원전 384-기원전 322)

그리스 변론가·정치가.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변론가 이사이오스(기원전 420-기원전 350)에게 사사했고, 처음에는 법정 변론가가 되었으나 정치에의 관심으로 해서 그의 활동 무대는 얼마 안가 법정에서 의회로 바뀌었다. 이 무렵 급속도로 세력을 신장시켜 인근을 엿보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에게서 폴리스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적(敵)임을 감지한 그는 안일에 빠져 있는 아테네의 시민을 고무하여 마케도니아와의 무력 대결을 주장했다. 이 당시 행한 일련의 '필리포스 탄핵 연설'은 웅변가로서의 명성을 후세에까지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설득이 주효해서 아테네는 테베와 서로 동맹을 맺고 시민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황금의 관을 보내기도 했으나 이 동맹군은 케로네아에서 참패했다. 그 후 필리포스가 죽음으로써 조국 광복의 희망이 소생하는 듯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으로 무산됐고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아테네를 점령한 마케도니아군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탈출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문예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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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學-誕生

기원전 5세기 전반(前半), 페르시아 전쟁에서 주역을 맡았던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학교로서 온갖 영역에서 찬란한 성과를 이룩했다.

문학에는 서사시와 합창대가(合唱隊歌)의 요소를 총합 완성시킨 비극이 있다. 비극은 도시국가의 공적 행사로 상연되었고 건전한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이 기원전 404년에 패배로 끝날 무렵에는 폴리스는 왕년의 모습을 잃었고 웅대한 비극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창조력도 쇠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학은 그 무렵까지 서사시·서정시·극을 완성했고 고전으로서 높이 평가될 작품을 지녔던 것이다.

한편 공리를 떠나 사물에 관해 그 본질은 무엇이며, 각 사물간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라고 묻는 데에 인간의 고귀성을 인정하는 학문의 입장이 기원전 6세기 이래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 학문은 고전적 작품이 충만한 문학의 세계에도 눈길을 돌려, 문학의 본질과 목적 등에 관해 파고 들어갔다.

여기에서 이때까지의 도덕적 문학비평이나 창작 기술을 가르치는 교과서 따위와는 질을 달리하는 문학에 관한 학문이 탄생했다. 그 선구적 입장을 수행한 것이 플라톤이며, 체계화시키려 했던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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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 (기원전 429?-기원전 347?)

그리스 시인·철학자.

아테네의 명문 출신으로서 시인을 지망하여 비극과 에피그램(Epigram)를 지었으나 소크라테스 일파에 가담할 때 비극작품을 불살라버렸다는 일화는 시대정신의 움직임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기원전 399년 스승이 죽은 후 아테네를 떠나서 여행길에 오른다. 귀국 후 교외에 학원 아카데미아를 개설한 후 시칠리아를 두 번 여행한 것 외에는 학원에서 교수와 저술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철학을 질서 정연한 체계로서 저술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대화의 형식을 취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비극에 대체시키는 산문에 의한 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플라톤은 이것의 완성자였다.

이 시인철학자는 문학의 본질과 작용에 날카로운 통찰의 눈길을 돌려, 누구보다도 먼저 문예학에 착수했으나 얄궂게도 문학에는 호감을 못 가졌다. 즉 그는 창작은 참된 실재(實在)인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외견상의 모방이며 덕육(德育)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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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osion

플라톤 중기의 대표적 대화편.

비극시인 아가톤의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차례로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가운데 완전한 것에의 동경, 즉 이데아의 세계로 정신을 유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심오한 이데아론(論)이 풍부한 문학적 표현으로 표출되어 있고, 인물의 개성적 묘사와 함께 당시 아테네의 지적인 분위기의 재현, 희극작가로서의 멋진 패러디가 주목된다.

파이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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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idros

플라톤이 60세경에 지은 작품.

아름다운 강변 숲속에서 이루어지는 파이드로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 전반에서는 인간 영혼의 편력과 참된 에로스가 무엇인가를 공상력이 풍부한 신화적 비유를 구사해서 묘사된다. 후반의 웅변술 비판에서는 문학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제시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의 정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상상력 등 플라톤 대화문학 가운데서 으뜸가는 작품이다.

티마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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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maios

플라톤 만년의 대화편.

자연계에 관한 당시의 모든 지식이 장대한 우주 창조 신화로 꾸며져 있다. 세계가 아직 형체가 없고 세월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유도되어, 전지전능의 신이 근원적 카오스에서 질서있는 우주를 창조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자연학과 추상적 사변(思辨)이 총합된 이 작품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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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그리스 철학자.

트라키아의 시골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아테나로 떠나 플라톤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20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플라톤이 사망한 후 소아시아로 옮겼다. 기원전 342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후에 대왕)의 가정교사로 있었다. 그가 준 <일리아스>는 대왕이 늘 좌우에 간직하는 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왕의 정치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기원전 335년 아테네에 학원을 개설하고 12년간 강의와 연구에 종사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방대한 학술서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 초고에 바탕을 둔 것이다.

키케로는 그를 미문가(美文家)라고 찬양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그의 학술서는 문학적 감상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성과를 풍부한 종합력에 의해 학문적 체계로 집약시키는 것이 그의 과업이며, 다른 개별 과학과 함께 문예학도 그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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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 Poiefikes

아리스토텔레스 작.

주로 비극을 논하고 있다. 시작(詩作)의 본질은 모방이며, 목적은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방설은 플라톤에서 유래하나, 여기에서는 이데아와의 관계는 없다. '시인이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에 대해 감상자는 개개의 현실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의 인식자로서의 관계를 맺는다. 인식은 그의 최고 사명인 동시에 기쁨이다. 이렇게 해서 문학은 그의 인간학 가운데 적극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 이에 관한 주석서·해설서가 무수히 저술되었으며 서구 고전극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헬레니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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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이 시대는 테오클리토스가 시작한 <목가>라는 전원생활을 묘사한 짧은 시형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문학 양식은 탄생하지 않았고 전시대의 문학 양식을 연구 모방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의고(擬古)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특색은 시가 비근한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성과 세부적 표현기교가 뛰어나다는 점에 있다. 산문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이 다수 출현하고 있으나 문체의 면에서는 한때의 풍부한 맛이나 건강한 맛은 없으며 고르기아스(그리스 변론가, 기원전 483-기원전 376)의 형식을 추종하는 관능적(官能的)인 것으로 과장이 많은 아시아니즘에서 얼마간 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제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의 동방 정벌에서 비롯되는 헬레니즘 시대는 아프리카·소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계 제국시대였다. 문화의 중심도 아테네보다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안티오크 등으로 옮겨져 그리스 문화는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화했다. 문학의 무대도 국제적 성격을 띠어 세계 시민적 일상생활에서 생겨난 보편적 감정이 서술되기에 이른다.

종래의 그리스 문화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를 낳은 민족 통일의식에 바탕을 두고, 폴리스(도시국가)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에 비해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보편화라는 헬레니즘의 적극적인 면은 그와 같은 창조의 기반을 잃고 세계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표면상 그리스적인 것이긴 하나, 전 시대의 그리스 문학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전 시대 문학의 모방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학이 다음 시대의 그리스 문학 및 로마 문학 형성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 컸던 것은 절대적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고전기 그리스 문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등 각 지역은 도서관이 건립되어 방대한 양의 고전작가 작품들이 수집, 보존되었다. 이와 병행해서 이들 작품의 사본을 분류 교정 및 진본 여부를 구별하는 문헌학이 발달했다. 또한 아폴로도로스(아테네의 문법가, 기원전 2세기?)의 신화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옛 문물을 고증하는 학문도 생겨났다. 이들 학문은 모두 당시의 문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현학적(衒學的) 냄새를 덧붙이기조차 했다. 칼리마코스의 <아이티아>나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가>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서사시는 자연과학 등 본래의 서사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재를 취급한 것이 많이 출현했는데 아라토스(Aratos)의 <파이노메나(Phainomena)> 등이 바로 그것이다.

비극에서는 별로 취할 점이 없는 것에 반해 희극에서는 이 시대에 '신희극'이라 불리는 단계에 접어들어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아티카의 '고희극'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풍속희극'이 완성되었다. 필레몬, 디피로스(기원전 340?-기원전 289?), 메난드로스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당시의 과학적 지리학의 발달과 병행해서 헤카타이오스(그리스의 역사가, 기원전 550?-기원전 475?) 이래의 지지(地誌)의 전통은 이 시대에도 계승되어 스큐락스 및 스큐무노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세계 여행기(世界旅行記)·항해기(航海記) 등이 저술되었다.

역사 서술은 티마이오스(기원전 356?-기원전 260?)의 <시칠리아사(史)>에 의해 대표되는 고증 취미에서 무비판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나열한 것이나, 두리스(기원전 340?-기원전 280?)의 <사모스섬 연대기>, 그리고 퓨라르코스와 같이 역사적 진실보다는 극적(劇的)인 효과를 노린 것 등 비과학적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히에로니무스나 폴리비오스(기원전 201?-기원전 120?)와 같은 뛰어난 역사가도 있었다. 특히 폴리비오스는 로마를 이 시대의 역사의 중심으로 잡고 세계적 시야에 서서 비판적·과학적 역사를 서술하여 그리스·로마를 가릴 것 없이 후세 사가(史家)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가 헬레니즘 문학의 최전성기였으며 그 후 시들기 시작하여 기원전 30년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최대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에게 함락당하는 것과 함께 헬레니즘 시대는 끝이 났다.

메난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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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andros (기원전 342?-기원전 292?)

아테네 시인. 그리스 신희극의 대표 작가.

평생 아테네에서 창작생활을 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강하게 영향받아 일상적인 시민생활을 무대로 해서 애증의 감정을 복잡한 줄거리로 엮어 희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체는 유연한 표현력을 지녔으며 성격묘사·사실성이 뛰어나다.

그의 영향은 테렌티우스나 플라우투스 등 로마의 희극 작가와 널리 근대 서구의 희극 작가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작품의 수는 백여 개가 넘으나 현존하는 것은 대다수가 단편으로서 그 가운데서도 비교적 정리된 것은 <디스콜로스> <단발(斷髮)당한 여자> <에피트레폰테스> <사모스섬의 여자> 등이 있다.

에피트레폰테스(중재를 의뢰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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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trepontes

메난드로스 작. 메난드로스가 만년에 쓴 희곡이며 내면화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

칼리시오스라는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가 불륜의 자식을 낳은 것을 알고 번민한다. 그러나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는 자신이 언젠가 아내인 것을 모르고 범한 끝에 생겨난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해피 엔드로 끝나는 줄거리이다. 폭행·기아(棄兒)·인지(認知) 등 메난드로스의 상투적 구성요소가 골고루 담겨 있다.

거듭되는 우연이 대단원을 낳게 한다는 줄거리에는 무리가 있으나 인물의 성격, 심리묘사의 교묘한 점 등이 극 진행의 필연성을 관객에게 납득시켜 이 작품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든다.

칼리마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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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limachos (기원전 305?-기원전 240?)

헬레니즘 시대의 시인·학자·비평가.

아프리카의 키레네 출신으로 젊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했다. 고전작가에 조예가 깊어 온갖 장르의 시를 썼다. 현학적 냄새가 강하게 풍기기도 하나, 그가 특히 능한 짧은 시형에서는 정교한 세련미가 엿보이고 있다. 고대에 있어서도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으며 로마 시인(詩人)들 가운데 모방(模倣)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이티아> <헤칼레> <찬가> <이암보이> 등의 시와 고전작가의 작품에다 설명을 붙인 목록 120권의 <피나케스> 산문이 있다.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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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歌

칼리마코스 작.

호메로스의 『찬가』를 모방한 시기이기는 하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문학적 작품이다. 전부 합해서 6수가 있으며 엘레게이아의 운율로 쓰여진 제5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서사적 시형으로 되어 있다.

아이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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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tia

칼리마코스 작.

제사의식·습관·도시건설 등의 기원을 엘레게이아로 읊은 시. 전4권 가운데 오늘날 몇개의 단편이 전해진다.

테오크리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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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kritos (기원전 310?-기원전 250?)

시라쿠사 태생의 시인.

원숙기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냈으며 동(東)에게해의 코스섬 문인과도 교류하여 그 영향을 받았다. 전원생활을 주제로 목자(牧者)를 노래한 짧은 시형 '목가'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다.

모름지기 '목가'라 불리는 서구의 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최후의 참된 영감을 지닌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시는 고전작가가 지닌 웅대한 늠름함은 없으나, 사실성과 낭만성을 훌륭히 조화시킨 정교한 완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주요 작품은 <목가>,<에피그램>등이 있다.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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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크리토스 작의 30개의 소품으로 된 시집.

각개의 시는 창작연대가 다르며 이 가운데는 다른 시인의 작품도 몇 편 들어 있다. 그리스어의 원제는 <Eidyllia>, 즉 '짧은 시의 모임'이란 뜻으로 <목가>는 그 일부이며 나머지는 서사시·연애시·극시 등이 들어가 있다. 하나하나의 시는 주옥과 같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그리스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아폴로니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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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오스) Apollonios Rhodios

(기원전 295?-기원전 215?)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학자·시인.

칼리마코스의 제자였으나 사이가 나빠져 로디오스섬에 이주하여 만년을 보냈다. 문헌학·고증 등에 조예가 깊어 여러 양식의 시를 썼는데 주로 <아르고나우티카>의 작가로서 유명했다.

아르고나우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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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gonautica

아폴로니오스 작. 아르고나우타이의 영웅전기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로서 전4권.

2개의 판이 전해지고 있는데 양자 사이에 중요한 차는 없다. 이 작품은 개별적으로는 생생한 묘사와 날카로운 관찰 등 취할 바가 있으나 전체로 볼 때 구성에 긴밀성이 결여되어 있고 낭만적이며 고증 취미가 다분히 엿보인다.

로마 시대 때 베르길리우스(Vergilius) 등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헤로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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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das

기원전 3세기에 활약한 그리스의 미모스(Mimos) 작가·시인.

헤론다스라는 이름도 전해진다. 코스섬 태생으로 주변의 일상생활에서 취한 코믹한 시극 <미미얌보스>의 작가. 극적 수법이 뛰어나며 사실적이며 페이소스도 있다. <교사> <질투하는 여자> <꿈> 등 8곡이 전해진다.

아라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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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tos

기원전 3세기의 학자·시인.

소아시아 칼리키아의 솔로이 출생. 후에 아테네로 옮겨서 마케도니아의 궁전에도 초빙되었다. <파이노메나>로 명성을 떨쳤다. <엘레게이아> <찬가> <에피그램> 등 많은 시를 썼으나 오늘날에는 <파이노메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소실되었다.

파이노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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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inomena (기원전 270?)

아라토스 작. 천문에 관한 서사시.

헤시오도스(Hesiodos)의 문체, 호메로스의 용어를 원용하고 있으나 내용은 기원전 4세기의 크니도스의 천문학자 유독소스의 연구서를 바탕으로 한 사이비 과학적 천문서. <천기예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시도 포함되는데 로마 시대 이 작품의 번역물이 많이 나왔다.

그리스 사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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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華集

서기 900년경, 콘스탄티누스 케파라스가 선집한 시선을 바탕으로 해서 980년경에 편찬된 그리스 단시집.

선자는 불명이나 본래의 것은 제4, 5, 6, 7, 9권, 그리고 10-12권까지는 그에 의하여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기원전 7세기의 아르키로코스로부터 시모니데스(기원전 556-기원전 468), 플라톤 등을 거쳐 서기 1000년경까지의 에피그램, 즉 엘레게이아 음률의 첨가에 의한 단시 약 8천수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시선은 자주 만들어졌으나 본집은 기원전 100년경의 시리아 시인 메렐아그로스의 선집 <화관(花冠)>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가 48명의 시인에게 보낸 제시(題詩)가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서기 6세기의 시인 아가티아스를 거쳐 케파라스에 이르렀으나 그의 선집 자체는 없어졌다. 훗날 학승(學僧) 막시모스 플라누데스가 대대적인 개편을 가해 많은 시를 삭제 추가한 이래 이 선집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나 1606년 겨울 하이델베르크 도서관에서 재차 케파라스계의 고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간신히 원형으로 복구되었다. 이것을 파라티나본(本)이라고 한다.

현형으로서는 모두 15권으로 되어 있고 특히 제5의 연애시, 제7의 애도시·비명시에 수작이 많고 작자로서는 앞서 말한 작가 외에 칼리마코스, 아스크레피아데스, 안티파토로스, 레오니다스〔알렉산드리아기(期)〕, 크리나고라스, 멜레아그로스(연애시), 루키리오스, 니카르코스, 파라다스(풍자시, 이상 로마 제정기), 파울로스 시렌티아리오스 등이 뛰어나다.

그리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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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소설이라는 것에 여러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이것을 산문으로 표현하는 창작으로서 인간세계의 양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직 충분한 독립성이나 총괄성은 지니지 못하면서 이미 그리스 문학의 고전시대부터 그것이 싹터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예를들면 크세노폰의 <키로스의 교육> 가운데 있는 <아브라다타스와 판티아>의 부부애와 죽음으로써 지킨 정절 같은 것이다.

또한 독립된 줄거리로서 연애를 주제로 하고 후에 가서 그리스 연애소설의 선구라고 볼 수 있는 것에 기원 1세기를 거슬러올라가 아시리아의 왕 <니노스와 세미라미스>가 있었다.

또한 2세기 중엽의 카르키스 사람 이안브리코스는 모험 기담이 넘치는 연애소설의 효시인 시노니스와 로다네스의 <바빌로니아카>(바빌론 이야기)를 지었으나 지금은 단편과 윤곽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갈리아 사람 가리톤에 의해 지어진 <카이레아스와 카리로에>연애담도 같은 2세기경 수사가 성행했던 때의 산물이다.

이어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대제(大祭)를 발단으로 하는 안티아와 하브로코메스의 연애담 <에페소스 이야기>까지도 이 시대의 것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 이것을 <이디오피아 이야기>의 뒤로 돌리는 설도 유력하다. <이디오피아 이야기>는 4세기 후반에 나온 시리아의 에메사 지방 승정 헤리오도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나 구성의 다채로움과 변전의 교묘함, 그리고 이를 일관하는 모랄과 대단원의 산뜻한 맛으로 칭송받고 있다. 아킬레우스 타티오스작 <레우키페와 클레이토폰>의 이야기도 서두의 회화비평이나 정조론 등에 특색이 있으며 4세기 전반에 속한다. 이러한 연애모험담과는 취향을 달리해, 양치기 소년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원소설로서 목가적 풍취를 갖는 <다프니스와 클로에>(2세기 ?, 롱고스 작으로 전해진다)도 교묘한 묘사와 온후한 내용 때문에 예부터 많은 애독자를 얻고 있다.

로마 시대의 그리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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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文學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판도에 들어가면서부터 겨우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단지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그리스 양식의 문화에 젖은 지중해 동반부의 연안지방, 소아시아에서 시리아·이집트 등의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서간의 교통이 자유롭고 빈번해져 무역도 번성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기 시작한 서기 2세기 전후에는 이른바 5현제(賢帝),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의 그리스 문화 심취도 겹쳐 제2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리스어로 된 대량의 철학·역사·문학 관계 서적이 제작된 것도 이 때가 전성기이다. 이 가운데는 당연히 고대의 고전인 그리스 시가·연극을 감상·비판 및 고증할 것을 꾀하는 것도 많았다. 시대의 선후는 있으나 스트라본(기원전 64-26?)의 <세계지리> 15권(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이나 파우사니아스(115년경 출생)의 <그리스 주유기>(160년경 출간) 10권, 3세기초의 사람 아테나이오스의 <향연의 현인들>(현형으로 15권, 원래는 31권인 듯) 등 대저는 전존하고 있는 그 일부로 각 지방 및 각 도시의 상황, 역사·전설, 또는 각지의 건조물과 유품, 고래의 설화 등을 정성껏 수록했다. 특히 아테나이오스는 요리 식품에 곁들인 옛 문인의 일화, 고대의 풍물 및 습속 등에 관한 기록을 많이 실음으로써 고대문학 특히 신희극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보고(寶庫)라 불린다.

이 시대의 또 하나의 특색은 철학 및 수사학의 유행으로서 철학은 로마 풍조에 절충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수사학은 교육과의 관계도 깊어 학당이나 학교에서 가두로 진출하여 강론 및 만담에 접근한 끝에 서간문학의 단편창작으로 결실을 보았고, 자작의 설제(設題)연설이나 상상적 단편을 군중에게 들려주어 생활에 보태는 문사도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제국 동반부의 도시인은 이러한 문학적 향수를 평화로운 가운데 만끽했다. 이와 함께 이 제국 동반부가 당시 그리스도교와 큰 관련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원후 30년 동안은 '기름 부은 사람'으로 불리는 예수의 생존시였고, 이어서 사도들이나 바울의 시대로 접어든 후 복음서 제작(2세기까지)에 이른다. 이들은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그 후의 많은 교부들도 그리스계 종교문학의 작자들이었다.

이 시대의 초기는 또한 세계를 통해 문예비평 창성기로서 기념될 만하다. 광범한 저작활동과 <문예론>의 대작을 낸 디오니시오스(기원 전후에 걸친 사람)와 문학에 있어서의 감동을 높이 평가한 <숭고에 관해서>의 저자 롱기노스(서기 1세기?)는 그 대표자들로 꼽힌다. 철학에 있어서는 스토아파의 진출이 현저하여 에픽테토스(55?-135?)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가 주목을 끈다.

전자는 프리기아 출생의 노예로서 불구의 몸이면서도 황제로부터 사표(師表)로서 존경받았다. 후자는 로마 황제로서 가장 기독교적인 황제라는 평을 받았고, 사색을 즐겨 명상생활의 기록을 <자성록>에 남기고 있다.

그는 평상시부터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까지 밤낮 반성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나, 아들 콤모두스의 결함까지도 자신에게 돌리면서 만물의 변화무쌍함과 영고성쇠를 깊이 새겨 조용한 체념의 일생을 보냈다.

플루타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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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tarchos (45?-125)

로마 제정기의 그리스 윤리학자·수필가·전기 작자.

보이오티아주 카이로네아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아 수사학·철학에 통달했다. 그 후 이집트, 로마 등지로 여행했으나 지방의 교육에 뜻을 두고 귀국, 고향에서 여러 일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의 저술은 방대한 양에 달했으나 현존하는 주요 작품은 <대비열전>과 <모랄리아> 등 두 작품이다.

대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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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i Paralleloi

플루타르코스 작. <영웅전>이라고도 한다.

50명의 그리스 및 로마 사람의 전기로서 어떤 유사점을 갖는 양자 각 한 사람씩을 비교, 평전(評傳)한 것이다. 주안점은 단순한 사실의 열거보다 특색 있고 생동하는 일화나 언행에 중점을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물 세 쌍과 4명에 관한 작자의 기록으로 양 민족이 가졌던 지명(知名)의 장군·정치가·지사·전설의 왕자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문체는 반드시 명쾌하지는 않으나 요점을 파악, 특징적인 언동을 생생하게 기술하여 인물을 묘사했기 때문에 예부터 읽을거리로서 널리 애독되었다.

모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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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lia

플루타르코스 작.

원제 <Ethika>는 일종의 수상 평론집으로 여러 잡다한 주제의 에세이 집성물이다. <헤로도토스의 악의(惡意)에 관해서> <아리스토파네스와 메난드로스와의 비교>와 같은 문학평론, <미신에 관하여> <노여움의 제어(制御)> <안일(安逸)에 관하여> <자녀교육에 관하여> 등의 윤리편, 델포이의 신탁이나 이시스신(神)에 관한 종교편, <수다스럼에 관하여> <육식에 관하여> <불과 물의 효용 비교> 등 일상 좌담형식의 것까지 80편 남짓을 포괄시켜 그의 자녀교육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루키아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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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kianos (125?-195?)

로마 시대의 그리스 단편작가. 제국 전성기의 그리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

제국 최동단 유프라테스 하반의 사모사타에서 태어난 시리아 사람. 부친은 석조사(石彫師). 젊어서 이오니아로 나가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을 수업했고 그리스어에 통달했다. 그 후 10여 년 간 여러 나라를 유행했고 그리스, 갈리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스승으로 활동했다. 또한 시리아의 대도시인 안티오키아와 이어서 아테네에 살면서 강연과 저술에 전념했다. 40세-50세에 걸친 이 시대가 그의 전성기로서 단순한 설제문(設題文)에서 시평(時評)으로 또한 대화나 의사(擬似) 문답 등 각종 형식을 구사했고 가벼운 문명비평과 통렬한 풍자로 세인의 호평을 얻었다. 이 가운데서도 대화편에 특색이 있어 널리 'Dialogoi'로 불리게 되었는데 초기의 우정론 <토크사리스>에서 후기의 유명한 <진실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서술체 가운데도 뛰어난 것이 있다. 이것은 후세에도 많은 모방자를 갖는 공상 여행기로서 달세계·극락도,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 있는 나라들과 꿈의 나라를 만유한 데 대해 만담 속에서 익살과 풍자로 엮고 있다.

대화편 중에는 <신들의 대화> <사자(死者)의 대화> <비극 배우 제우스> 등이 있고, 또한 시사 평론의 <페레그리노스의 죽음> <사기꾼 알렉산드로스의 일생> 자전풍의 <환상> <초상화> <초상화에 관하여> <2중 고소장> 등 어느 것이나 특색이 있고, 특히 가공의 대화는 올림포스 제신들의 모순된 여러 면이 지닌 우스꽝스러움을 찌르는 가벼운 풍자의 압권이다. 한편 <카론>이나 <닭> 등은 금전에의 집착과 현세의 욕망의 허무함을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편의 내용으로 그를 단순한 매문업자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풍자와 탄핵이 강해져감을 엿볼 수 있다.

로마 문학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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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發生

로마 문학(라틴 문학)은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문학의 강력한 영향하에 비롯된다. 그 이전에도 구송(口誦)에 의한 영웅가요나 소극류가 있긴 했으나 이들은 너무 유치하고 조잡하여 세련된 그리스 문학의 유입에 저항할 길이 없었고 그 후의 문학발달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 문학은 발생 시초부터 그리스 문학을 전면적으로 계승할 운명이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점차적으로 수중에 넣는 과정에 있어 동시에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했다. 로마 문학 발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타렌툼의 정복(기원전 272)으로 그때 노예로 끌려간 그리스의 소년 안드로니쿠스가 얼마 후 로마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 로마 문학의 제1작이 되었다. 특히 제1차 포에니 전쟁의 국민적 승리(기원전 241)에 의한 로마인의 물질생활의 여유는 고급문예의 출현을 촉구했고 다음해 개최된 '로마제'에서 상연된 안드로니쿠스 번역의 그리스극(劇) 성공은 연극시대의 단서를 열어 후에 2대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를 낳게 했다.

그 후 그리스 문학의 단순한 모방 추종에서 탈피한 로마 문학은 제재와 장르 및 정신에 있어 점차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했다. 로마적 제재의 연극, 플라에테쿠스타 비극 및 토가타 희극은 과히 성공하지 못했으나 엔니우스는 로마 역사를 서사시로 읊어 '로마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고 그가 창시한 사투라(풍자시)는 로마만의 장르로서 루킬리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산문가인 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는 로마의 그리스화를 꺼려 로마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대세는 헬레니즘화의 방향으로 흘러 그리스적 교양이 높은 상류 인텔리층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문학은 더욱 세련되어 라틴어도 문학어로서 발달하면서 마침내 기원전 1세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안드로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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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us Livius Andronicus (기원전 284?-기원전 204?)

로마 최초의 시인·극작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타렌툼 태생의 그리스 사람. 어릴 때 포로가 되어 로마에 끌려왔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로마에 알맞게 번안하거나 많은 그리스극을 번안 상연하였다.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문학활동을 했으나 단순히 그리스 문학을 이식한 것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라틴어에 의한 그리스식 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로마 문학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엔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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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ntus Ennius (기원전 239-기원전 169)

로마 초기의 시인·극작가.

이탈리아 남동부 루디아 출신. 어릴 때부터 그리스적 교양을 깊게 몸에 익혀 항상 그리스 문학을 기초로 삼아 로마 문학을 향상시키려 애썼다. 특히 호메로스에 심취, 그의 시 양식을 도입했고 로마사를 읊은 대서사시 <연대기>에 있어서는 자기 스스로가 제2의 호메로스라고 칭하면서 로마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그 사명을 설파했기 때문에 '로마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또한 수많은 비극을 저술하고 수상적(隨想的)인 풍자시 사투라를 창시하는가 하면 만물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의 시(詩)도 만드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여 뒤의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플라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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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Maccius Plautus (기원전 255?-기원전 184)

로마의 희극작가.

움브리아에서 태어나 로마로 건너와서 그리스 신희극의 번안과 상연을 했다. 조잡하고 교양이 없는 일반 대중을 위해 그는 대담하게 자유스러운 원작의 변형(變形)·개작(改作)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고상한 교양을 요하는 부분을 삭제한다든가, 로마의 인정과 풍속제도를 삽입시키든가하여 전체의 예술적 완성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장면마다의 효과를 노렸다.

그가 장기로 한 것은 교묘한 줄거리 꾸미기, 성격의 다양성, 대담한 기지와 해학, 풍부한 패러디(parody), 대화의 긴장감과 리듬 등에서 특히 서민의 일상어를 자유로이 구사함으로써 발랄하고 템포가 빠른 대사를 만들어냈다. 작품은 21편이 현존한다.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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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

v

(기원전 193 ? )

희극. 플라우투스 작.

유괴된 아들이 자라서 전쟁포로가 된 후 우여곡절 끝에 자기 집으로 풀려와 아버지와 만난다는 줄거리.

이 극에는 플라우투스의 상투수단인 수전노·교활한 노예·허풍쟁이·탕녀·뚜쟁이 등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의 아름다운 우정이 전면에 표출되어 전체로 볼 때 희극적 요소가 가장 적은 고지식한 도덕성과 품위를 갖춘 독특한 작품이다.

암피트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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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hitruo (기원전 196?)

희극. 플라우투스 작.

대신(大神) 유피테르는 암피트루오의 아내 아르크메나를 사랑한 나머지 남편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목적을 이룬다. 영웅 헤라클레스 탄생에 얽힌 신화를 다룬 것으로 비극의 소재인 신화에 바탕을 둔 고대희극으로서는 유일한 현존 작품이다. 그러나 여러 신들과 영웅의 등장이 비극적 파토스(pathos)를 불러 일으킨다고는 하나, 극의 전형적인 인물인 노예의 활약도 커서 전체적 구성은 어디까지나 희극이다.

테렌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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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Terentius Afer (기원전 195? -기원전 159)

로마의 희극작가.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로서 로마에 끌려온 후 해방되어, 그리스적 교양을 과시하는 상류사회에 출입하면서 그리스 문학을 배우고 재능을 닦았다. 이 때문에 플라우투스에서 볼 수 있는 조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적은 반면 고상하고 차분하며 이지적이기 때문에 교양있고 취미가 높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는 메난드로스를 즐겨 번안했는데 가능한 원작을 충실히 모방해서 그리스적 특질을 살리고, 인물의 성격과 극 내용의 일관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라틴어를 우아한 아름다운 언어로 탁마했고 그리하여 번안희극을 민중의 수준에서 교양있는 사회에까지 끌어 올렸다. 반면 활기가 부족하고 흥미면에서 떨어지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작품 6편은 모두 현존한다.

안드로스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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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ia (기원전 166)

희극. 테렌티우스 작.

메난드로스가 지은 동명의 희극에 바탕을 둔 처녀작으로 여자를 사랑하여 신원불명의 아이까지 낳게 한 청년이 부친한테서 다른 처녀와의 결혼을 강요당해 번민하나 우연히도 사랑하는 여자가 유서 깊은 가문의 딸임이 밝혀져 행복하게 결혼한다는 유형적 줄거리에 또 하나의 다른 연애를 얽히게 하여 사건의 갈등을 한층 흥미롭게 하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상하고 로마적 감상과 그리스적 분별이 결합해서 독특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다.

루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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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Lucilius (기원전 180?-기원전 102?)

로마의 풍자시인.

캄파니아의 명문 출신으로 최고의 교양을 쌓아 당시로서는 드문 그리스 철학통이었다. 스키피오가(家)의 문학 서클에 가입,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엔니우스의 풍자시 사투라를 계승해서 시형을 연극적 시격에서 서사시격으로 개편했다. 전개도 이야기풍으로 하는 등 사투라의 형식을 결정지었다. 이를 통해 시세(時勢)를 규탄하고 문학비평을 했으며 혹은 여행이나 일상생활을 기술했다. 개인적 색채가 극히 농후하고 격렬한 개인 공격을 잘한다.

작품은 30권에 이르며 그 뒤의 시인, 특히 호라티우스 등 풍자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현재는 단편이 1300행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공화정 말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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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政末期-文學

로마인의 정신 형성에 있어 그리스적 교양은 더욱 불가결한 것이 되어갔다. 이미 로마 세력권에 들어간 그리스 세계에서는 그리스 문인들이 밀려들었고 로마에서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유학생이 잇달아 나갔다. 교양있는 로마인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그리스적 교양은 로마인을 로마적 실용성에서 유리시켜 철학이나 문학 등 한가하고 우아한 세계에서 생활하게 했다. 문학은 조잡한 모방에서 예술적 형성으로 이행하여 기원전 1세기 공화정 말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황금시대'의 전기를 맞이했다.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이 로마 산문의 완성자 키케로이다. 따라서 '키케로 시대'는 산문 우세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서 카이사르, 살루스티우스 등 이 시기의 산문가들이 누구나가 다 그리스 고전기의 산문을 모범으로 삼은 고전주의자인데 반해 한편에서는 동시대의 알렉산드리아 문학을 바탕으로 삼는 한 무리의 시인이 나타나 현실의 정치적 세계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길드적 세계 속에서 학식과 기교, 그리고 섬세한 감정이 담긴 시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카툴루스를 비롯한 '신시인파'이다.

루크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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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Lucretius Carus (기원전 94?-기원전 55)

로마 시인·철학자.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미약(嵋藥) 때문에 정신 이상이 됐다거나 44세 때 자살했다고 전해지나 전부 불명이며 다만 서사시 <자연론> 6권만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보면 그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연구자인 동시에 정열과 공상이 풍부한 재능 있는 시인으로서 엠페도클레스(그리스 철학자, 기원전 493? -기원전 433)를 최후로 하여 산문으로 변한 철학을 재차 옛날로 되돌려 현인 에피쿠로스(그리스의 철학자, 기원전 342?-기원전 271?)의 철학을 교훈 서사시로 읊었다.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정통하고 호메로스를 비롯한 비극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서사시의 기교와 어구면에서 볼 때 그는 엔니우스의 완성에 이르는 발전 단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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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論

(기원전 55?)

철학 서사시. 루크레티우스 작.

미완성의 원고를 그가 죽은 후 키케로가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목적은 공화정 말기의 혼란한 세태 속에서 생활하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안을 제거시키는 데 있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에피쿠로스 및 원자론자(原子論者)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 세계의 온갖 존재와 현상이 신이나 인간의 영혼은 물론, 심리적·사회적 현상도 전부가 물질적이라는 것을 설파하여 신에 대한 외경심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단순한 철학의 저술로 하지 않고 신화 세계의 비유나 아름다운 자연 묘사를 혼합시켜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구제의 확신에 넘치는 기품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카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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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Valerius Catullus (기원전 84?-기원전 54 ?)

로마 서정시인.

베로나에서 태어나 상경한 후 당시 유행하던 알렉산드리아 문학을 신봉하는 젊은 문학 그룹에 참여하여 사교계에 등장, 연상의 귀부인 크로디아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유희에 지나지 않아 결국 수년 후 헤어진다. 시집 속에서 이 여성은 레스비아로 불리는데 그녀에 대한 애증을 노래한 시가 최대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 밖에 우정·여행·자연의 노래, 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통렬한 개인 공격의 노래 등,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서 지은 직정적(直情的)인 서정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감정표현이 아무리 단순 소박하게 보여도 그 이면에는 반드시 효과를 계산에 넣은 기교가 숨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중시한 도회적인 우아한 기지라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문학을 모방한 일련의 비교적 길고 기교적인 시가 있으나, 이것도 레스비아와의 사랑 체험과 무관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긴 시와 짧은 노래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시인은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마르티알리스(로마의 풍자 시인, 40?-104?) 등 많으나 특히 그의 연애시는 엘레게이아 시인들의 선구가 되었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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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기원전 43)

로마의 변론가·철학자·정치가.이탈리아의 소도시 알피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변론가로서 법조계에 진출(기원전 80), 이어서 2년간 그리스에 유학하여 아테네와 로도스에서 철학과 변론술을 익혔다. 귀국 후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기원전 75년에 시칠리아 파견의 재무관을 시발점으로 순조로운 출세 코스를 밟았다. 기원전 65년에는 법조계의 최고직인 법무관에, 기원전 64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재임 중 그의 라이벌이었던 귀족 출신의 야심가 카틸리나의 음모사건이 일어나 이를 규탄한 <카이사르 탄핵연설>은 유명하다.

그러나 얼마 후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클로디우스(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기원전 93-기원전 52)와 대립 끝에 실각하여 기원전 58년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추방이 해제되어 카이사르와도 화해했으나 정계에서의 그의 지위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장군, 기원전 106-기원전 48)의 대립이 내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기원전 51)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측에 가담했으나 결과는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목숨만은 건졌으나 그 후 정계에의 복귀 희망은 완전히 차단되어 실의의 나날을 연구와 저술에 전념, 불과 수년 동안에 방대한 저작을 이루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죽음이 그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그는 공화정의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헛되어, 안토니우스(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82-기원전 30) 측의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필리포스 배격론>을 본딴, 안토니우스를 규탄하는 일련의 연설 <필리피카>는 그의 정치 연설의 최후를 장식하는 걸작이다.

카틸리나 탄핵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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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til

nan (기원전 63)

키케로의 연설 초고.

전해지는 키케로의 많은 연설(전부 58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박력과 품격이 높은 명문으로 후세 정치 연설의 모범으로 꼽히고 있다.

4편으로 되어 있는 이 연설은 공화정 전복을 책모한 야심가 카틸리나와 그 일파를 원로원과 시민회 석상에서 각각 두 번씩 신랄하게 규탄했고, 이것이 주효해서 카틸리나는 로마에서 추방된 후 사형에 처해졌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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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tus (또는 <저명한 변론가에 관해서>) (기원전 46?)

키케로 작.

키케로의 변론술에 관한 대표적인 것으로 이 밖에 <변론가에 관해서>(기원전 55), <이상적 변론가상(像)>(기원전 45)이 있고 이 두 개의 저작과 함께 3부작을 이룬다.

변론술의 이론과 실천에 관해 상세히 논한 기원전 55년의 전저(前著)에 뒤이어 여기에서는 변론술의 역사를 취급, 그리스 변론술의 짧은 개략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발달과정을 여러 변론가들의 평전(評傳)이라는 형식으로 고대서부터 동시대까지 살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변론가로서의 그 자신을 확립시키려 하고 있다.

투스쿨룸 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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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叢

(기원전 45)

키케로 작.

만년 실의 속에서 정치활동과 인연을 끊고 있을 때 키케로는 오랫동안 관심을 품고 있었던 일, 즉 그리스 철학을 라틴어를 통해 로마 땅에 이식할 것을 계획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의 주요한 각 분야에 걸친 수많은 저작이 연달아 서술되었으나 물론 이것으로서 독자적 사상이나 학설을 수립하는 것은 당초부터 의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공적은 철학 및 사상 전반의 표현수단으로서 그리스어에 필적할 만한 라틴어 산문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표제의 책은 <아카데미카(Academica)>(기원전 45)와 <선과 악의 한계에 관해서>(기원전 45)에 이어 저술된 것으로 5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를 꿰뚫는 테마는 '어떻게 해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며 죽음,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과 그 극복, 그리고 최후로 덕에 관한 논의(論義)로 끝난다. 로마인이 즐길 수 있는 인생 철학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으로 투스쿨룸에 있는 키케로의 별장이 토론의 무대로 되어 있다는 데서 표제를 얻고 있다

신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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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聖論

(기원전 45-기원전 44)

키케로 작.

신들의 존재와 그 본질에 관해 논한 것으로, 말하자면 (자연)신학입문서이다. 3권으로 되어 있고 각각 아카데미아파(派), 스토아파, 에피쿠로스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 대화자의 논(論)과 반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키케로의 절충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나 그의 입장은 스토아파에 가깝다.

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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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情論

(기원전 44)

키케로 작.

<노년론>(기원전 45-기원전 44)과 <운명론>(기원전 44)에 이어 <의무론>과 함께 키케로의 철학적 저작의 최후를 장식하는 주옥편. 우정의 의의와 가치를 규정하고 그 존속의 조건을 논하면서 참된 우정은 '덕'의 기초 위에서만 확립된다고 설파한다. 면밀한 논리나 문제 추구의 심오한 면은 결여되어 있으나 유려한 명문으로 널리 애독되는 키케로의 대표적 저작 가운데 하나이다.

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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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簡集

(기원전 62-기원전 43)

키케로의 서간. 현존하는 키케로의 서간은 약 800통으로 다음의 4개 수집물로서 전해진다. 즉 <아티쿠스(그의 평생을 통한 친우)에게의 서간>(기원전 64-기원전 44), <킨투스(동생)에게의 서간>(기원전 64-기원전 54), 그리고 단편뿐인 <키케로 브루투스 내왕 서간>(기원전 43) 후에 편집, 발간된 것인데 대부분이 공표할 의사 없이 쓴 사적인 편지여서 저서나 공적 생활에서는 알 수 없는 인간 키케로의 숨은 일면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서인 동시에 공화정 말기의 사료로서 귀중하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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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j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0)

로마의 정치가·장군·문인.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 태어나 정치가가 되기 위해 소년 때부터 변론술을 배웠다. 이 방면에서도 그는 빼어난 천분을 발휘하여 “로마인으로 그를 빼놓고는 키케로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법은 망실되어 오늘날은 단편밖에 볼 수 없다.

정치가로서 또는 장군으로서 화려한 생활 틈틈이 그는 시나 비극에 손을 대었고 때론 시론도 썼으나 현존하는 것은 10권의 <각서>로서 일반적으로 7권의 <갈리아 전기>와 3권의 <내란기>라는 표제로 알려져 있다. 후자는 기원전 49-기원전 48년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다.

갈리아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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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ari de bello Gallico

카이사르 작.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2년까지의 갈리아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인데 기원전 52년부터 기원전 51년의 겨울에 걸쳐 단숨에 완성된 것이다. 원제의 의도는 후세 사가들의 자료로 이용케 하기 위해, 자신의 전적을 순수한 지적인 입장에서 회상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집필의 참된 동기는 그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야심 때문이라는 세상의 비난에 대해 자기 변호를 하고 갈리아 정복이 얼마나 로마의 위대함에 공헌했는가를 선전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제어해서 기술하는 것이 세상의 동정과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판단, 감정보다 이성에 호소하면서 극적 표현은 전적으로 배제한

냉철한 객관적 문장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식하는 일에 못지 않는 기교를 필요로 했다. 그는 “참된 기교는 기교를 감추는 데 있다”는 잠언을 실천에 옮긴 대표적 작가이다.

살루스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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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Sallustius Crispus (기원전 86-기원전 34)

로마 역사가.

공화정 말기의 내란 때는 카이사르파에 속해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아 누미디아 총독으로까지 출세했으나 그 후 정치생활에서 물러나 장차 황실의 재산이 되는 호장한 정원에서 여생을 역사 저작에 바쳤다.

카틸리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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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um Catilinarium (기원전 43?)

살루스티우스 작.

기원전 63년 카틸리나라는 로마 귀족이 국가전복을 기도, 반란군을 모았던 사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구르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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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um Jugurthinum (기원전 41?)

살루스티우즈 작.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기원전 111-기원전 106)을 다루고 있다. 그는 카이사르나 그 이전의 연대기적 작가처럼 연대순에 따르지 않고 하나의 사건을 추구한 최초의 역사가이다. 효과적인 박력 있는 문체를 사용, 평범한 표현을 피하고 고상한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역사 기술의 문학적 수준을 높였으며 동시에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서 사건의 원인과 인간행위의 동기를 의식적으로 설명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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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Terentius Varro (기원전 116-기원전 27)

문학가.

공화정 말기의 내란에서 반(反)카이사르 입장을 취했으나 카이사르 사후(기원전 44)에는 조용한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지리·고대학·법률·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600권이 넘는 저작을 공간했으나 현재는 <농사론> <라틴어론>(일부), <풍자기>(일부)가 전해질 따름이다. 그 가운데서도 <농사론>은 제명에도 불구하고(특히 서문은) 기지가 넘치고 있어 재미있다.

네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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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ius Nepos (기원전 992-기원전 24)

로마 역사가.

키케로나 카툴루스와 친교를 맺으면서 평생을 저작에 바쳤다. <세계사> 등 많은 저서를 간행했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명사전(名士傳)>(일부) 등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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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世-文學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무렵, 로마의 내란은 종지부를 찍고 광대한 세계제국을 완성하여 여기에 영광스러운 '로마의 평화'를 수립하자 문학은 일제히 이를 찬양했다. 지적인 호라티우스도,명상적인 베르길리우스도, 역사가 리비우스도, 연애 시인인 프로페르티우스나 오비디우스도 그야말로 경향을 달리하는 이들 작가들이 제나름의 방법에 따라 결국 이구동성으로 로마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미하고, 아우구스투스(로마 제정 초대의 황제, 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를 신격화 했다.

황금시대 후기는 키케로의 시대와는 반대로 시의 전성시대로, 리비우스의 방대한 역사서조차 산문으로 쓴 서사시적 감이 있었다. 시인들은 전(前)세대의 신시인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그리스 고전기 또는 그리스와 로마의 전(前)고전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에서 오히려 키케로 등 고전주의의 계승자이며, 여기에서 전 세대의 대립되는 2개의 경향이 통일되어 고전적 완성에 이르고 있다.

베르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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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Vergilius Maro (기원전 70-기원전 19)

로마 최대의 시인.

만투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배우고, 아우구스투스(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70?-기원전 8)의 서클에 가담, 아우구스투스(로마 제정 초대 황제, 재위 기원전27-14)의 지우(知遇)를 얻었고, 호라티우스와도 친교를 맺는다. 자연에의 향수를 읊은 <목가(牧歌)>에 이어 7년이 걸린 <농경가(農耕歌)>로 이탈리아의 전원을 찬미하였고, 만년의 10년은 로마의 기원을 찬양한 영웅 서사시 <아에네이스>의 집필로 세월을 보냈다. 기원전 19년 그리스 여행 도중 병을 얻어 귀국후 세상을 떴다.

그는 애국 시인으로서 로마, 이탈리아,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찬미하나 현실을 직접 노래하지 않고 전원으로 혹은 과거로 도피해서 그곳에서 이상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기교면에서나 내용면에서 라틴 운문학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는 생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고 중세에는 구세주 탄생의 예언자로 숭상되었다. 근세에도 단테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에 영향을 끼쳤다.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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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olica (기원전 40전후)

전원시. 베르길리우스 작.

테오크리토스의 <목가>에 바탕을 두고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하는 목자(牧者)들의 연애나 경창(競唱) 등을 전개시킨다. 그리스적 목가의 도원경 속에 작자 자신의 고향도 혼입시키고, 이상(理想)의 전원세계에 당시의 실재인물이 목자로 꾸며져서 등장하거나 실제의 사건이 그려지고 있다.

농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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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rgica (기원전 30 전후)

교훈 서사시. 베르길리우스 작.

마에케나스의 주문에 응해 농업의 실제를 읊은 시로서 <곡물> <과수> <목축> <양봉>으로 되어 있다.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모방해서 그리스·로마의 온갖 농사 관계의 시 및 산문에서 재료를 얻으면서도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으로 농업 진흥을 통해 전후의 황폐한 국토를 구하려는 염원을 담은 서사시로 아름다운 전원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아에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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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neis (기원전 19)

영웅 서사시. 베르길리우스 작.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이스가 트로이가 함락된 후, 서방으로 새로운 나라를 찾아 여행길에 올라 오랜 방랑과 싸움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로마의 기초를 쌓기까지의 이야기를 읊음으로써 로마의 기원을 찬미한 서사시이다.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필적하는 국민적 시를 희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에 따라 11년이란 긴 세월을 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전반의 방랑과 회상, 사랑과 황천(黃泉)에 관한 것은 <오디세이아>를, 후반의 전쟁은 <일리아스>를 모방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선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인정되나 조탁(彫琢)된 아름다운 시구, 격조 높은 표현, 인간의 고뇌에 대한 깊은 슬픔, 제국의 사명에 대한 자각 등 실로 라틴 서사시의 최고봉으로 세계 제국을 수립하여 '로마의 평화'를 실현시킨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기념하고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을 찬양하기에 알맞은 명작이다.

프로페르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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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tus Propertius (기원전 47? - 기원전 15?)

로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 시대의 시인.

부친은 기사계급에 속했으나 그가 어릴 때 사망했다. 기원전 41-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82-기원전30) 및 옥타비아누스(로마 제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전 이름)에 의한 종군병사에의 토지 분배 때 부친이 남긴 토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현존하는 비가(悲歌) 4권의 제1권은 애인인 퀸티아에게 바친 것이나, 애인의 부정을 못마땅히 여겨 다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제2, 제3권을 쓴 후 칼리마코스의 영향을 받은 옛 신화를 제재로 한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오비디우스는 친구의 한 사람이다.

티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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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ius Tibullus (기원전 48?-기원전19?)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 시대의 로마 비가 시인.

다른 기사계급 출신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40년의 내전 결과 페툼의 저택을 몰수당했으나 그 후 메살라 장군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아퀴타니아 및 아시아에 원정했고, 기원전 29년 코르키라에서 병을 얻어 로마로 귀환했다. 그 후, 아름다운 목가조의 시를 남긴 채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초기의 시는 평민출신의 처녀 델리아에 바쳐졌으나 부정에 배신당해 마라투스라는 소년을 사랑한다. 이 밖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이름을 지닌 탐욕스런 여인의 시, 제시(祭詩), 탄생일의 노래, 메사리누스의 취임을 축복하는 축가 등이 있는데 그의 비가 3권은 로마 비가 가운데 최고로 꼽히고 있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 등은 그의 친구이다.

호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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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ntus Horatius Fiaccus (기원전 65-기원전 8)

제정 초기의 로마 시인.

부친은 해방노예로서 세금징수원이었다. 젊어서 로마에서 오르빌리우스에게 사사했다. 30세경 아테네에 유학중이던, 기원전 44년 브루투스(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85-기원전 42)의 군대에 참가하여 공화정 옹호를 위해 지휘관으로서 싸웠다. 그러나 기원전 42년 필리피의 싸움에서 안토니우스(로마의 정치가, 기원전 82-기원전 30)에게 패해 공화정이 종막을 고하자 부친이 남긴 재산을 몰수당한다. 기원전 41년 은사(恩赦)로 로마에 귀환, 재무관의 사무관이 되는 한편, 시작에도 열중했다.

이즈음 베르길리우스 및 바리우스(로마의 서사시인)와 알게 되었고, 기원전 39년 옥타비아누스의 고문 마에케나스를 중심으로 한 문인 그룹에 들어가 기원전 33년에는 안토니우스의 화평교섭단 일행과 함께 브룬디시움까지 여행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아직 어느 정도 정치에도 관심을 쏟고 있었는 듯하다.

그러나 기원전 31년 악티움 전쟁이 있은 후, 옥타비아누스의 권위가 높아져 기원전 27년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내리는 것과 함께 그 비서관이 되도록 요청받자 이를 거절한다. 기원전 17년의 로마 대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대제시(大祭詩)를 지은 정도가 유일한 협력이었다. 기원전 19년 베르길리우스 사후에는 사실상 계관시인이 되었는데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사상적으로는 에피쿠로스파에 속하여 마음의 평정과 중용의 덕을 설파하고 신비주의적인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있다. 그의 풍자시 등에 나타난 문체는 훗날 라틴 문학뿐만 아니라 17세기경의 영국·프랑스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풍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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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ae

호라티우스 작.

기원전 35년경(제1부) 및 기원전 30년경(제2부)에 나온 풍자시는 수필집이라고도 할 만한 18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헥사미타의 시집이다. 그것은 \"그리스에는 없는 로마 특유의 것\"이라 일컬어지며, 루킬리우스에서 시작하여 호라티우스를 거쳐 유베날리스 등에 이어지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묘사하였으며 욕망·중용·작가론·기행·식도락·인간의 자유 등에 관해 뛰어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에 대해서는 다작·난작을 삼가토록 타이르며 대중을 상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벗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권하고 있다. 원제는 <잡담>이다.

카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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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inum

호라티우스 작.

기원전 23년(1, 2, 3권)과 기원전 13년(제4권)에 출간되었으며 주로 사포 및 알카이오스(레스보스섬 미티레네시의 귀족시인, 기원전 620?-?)를 모방한 103편의 서정시집.

그는 처음의 3권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던 듯 권말에 “세기의 대사업을 완수했다”고 적고 있다. 제4권은 기원전 15년의 두르수스와 티베리우스(로마 황제, 재위 14-37)의 알프스 원정을 축하하기 위해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지은 것으로 이것에 관한 두 시와 아우구스투스 정권 찬가의 두 시를 제외하면 그 밖의 것은 서정시로서의 박력이 결여되어 있다.

홍수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 방문,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등을 테마로 하는 이들 작품에는 에피쿠로스(그리스의 철학자, 기원전342?-기원전271?)의 중용사상이 근저에 깔려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영원한 것의 앞에 놓인 인생의 허무함이 비교되고 있다. 퀸틸리아누스에 의하면 호라티우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라틴 서정시인이었다.

서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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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tulae

호라티우스 작. 20개의 서간형식으로 된(전20) 것으로 <풍자시>와 마찬가지로 헥사미타로 쓰여져 특정인에게 봉정되고 있다. 다만 이론을 불특정의 독자에게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친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사상을 개진(開陣)하고 있다. 작품의 중심은 에피쿠로스파가 말하는 아무것에도 동요되지 않는 중용의 덕과 정신적 행동에 있었다.

제2권은 같은 형식으로 쓰여 있으나 주제는 문예비평으로 되어 있고, 제3권은 <아르스 포에티가(Ars Poetica)>(詩論)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오비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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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기원후 17?)

로마 시인.

중부 이탈리아의 수르모에서 출생, 로마로 나가 법률과 변론학을 배웠다.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부친의 소망이었으나 본인은 법률 공부보다는 시작이나 화려한 사교를 즐겨, 법정변론을 기초(起草)하려 해도 “말이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동안은 아테네에 유학한 후 한동안 평범한 공직도 있었으나 이 방면에서의 출제는 일찍 단념하고, 티불루스 등의 시인 서클에 가담, 당시 유행했던 엘레게이아풍의 연애시로 필재를 휘둘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연애의 농락술을 교훈시풍으로 엮은 <사랑의 기술>(기원전 2?)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연애시와는 결별하고 이야기시의 제작에 몰두, 필생의 대작 <변형담>을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하려던 <행사력>을 제작 중이던 서기 8년 황제로부터 돌연 로마 추방을 선고 받았는데 이 추방에 얽힌 경위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만년은 전반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비참했다. 흑해 연안의 벽지 토미스에서 호소와 애원이 담긴 서신을 고국에 띄우며 10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연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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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es (기원전 16)

오비디우스 작.

엘레게이아풍 연애시인인 오비디우스의 데뷔작. 처음에는 5권으로 된 책으로 기원전 16-기원전 15년경 출간되었는데, 후에 작자가 수정을 가해 3권짜리로 재간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다 할 짜임새 있는 줄거리는 없으나 ‘코린나’라는 애인에게 보내는 연가가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읊어지고 있는 연애감정은 진실한 심정의 발로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대상자인 애인도 가상적 존재인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재질은 기지, 세밀한 심리관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사학적 기법에 있다. 연애시로서의 작품 가치를 따진다면 다음에 쓴 <현부의 서간> 쪽이 오히려 뛰어나다.

변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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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rphoses

오비디우스 작.

6음각(陰刻)이라는 서사시의 운율로 쓴 이야기시로서 오비디우스의 시가 가장 원숙경에 달한 중기의 대표작. 변신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신화 전설에서 따온 짧은 얘기를 우주 개벽 때부터 시작해서 대체적인 시대순으로 엮어나가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카이사르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는 카이사르의 변신(變身) 이야기에서 끝난다.

능숙한 말솜씨,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생생한 묘사,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과 능란한 수사를 구사하여 스토리 텔러로서의 시인의 본령을 유감없이 발휘한 수작이다. 신화 전설의 보고로서 중세 이후 널리 애독되었고 서구의 시문이나 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행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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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ti (기원후 8-사후)

오비디우스 작.

시로 엮은 일종의 달력. 매월 1권씩으로 해서 12권으로 완성시킬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않았던 불행으로

처음 6권만으로 미완성이 되었고, 시인이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치는 헌시도 그대로 간행되었다.

역일(曆日)에 따라 성신(星辰)의 운행과 출몰, 그날그날에 얽힌 고사 인연, 제사 및 종교적 행사를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로마의 민속·종교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리비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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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Livius Patavinus (기원전 59-기원후 17)

로마 역사가.

비슷한 나이인 동년배 아우구스투스 대제(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와 우정을 나누었으나 정치생활과는 인연을 맺지 않고 142권이라는 방대한 <로마사> 저술에 몰두하였다.

로마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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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Urbe Condita Libri

리비우스 작.

현존하는 것은 제1권-제10권, 제21권-제45권(제41권과 제43권은 불완전) 등 불과 35권이다.

전자는 로마 도시국가의 전설적 기원에서 시작하여 왕정시대를 거쳐 공화정의 초기를 취급했고, 후자는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비판적 재능과 과학적 방법이 결여 되었고 역사가로서의 통찰력도 없어 <로마사>의 사서로서 평가도 대단치 않다. 그러나 그는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왕년의 로마 사람을 묘사하고 그가 사는 시대의 혼란을 낳게 한 도덕적 퇴폐를 탐구하여 여기에서 독자가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이러한 윤리적 주제에 대한 진지한 정열과 극적인 묘사와 표현이 풍부하고도 명확한 문체로 해서 이 <로마사>는 연대기적 역사기술의 정상에 올라서 있다.

제정기의 문학(백은시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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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政期-文學(白銀時代-文學) (17-130?)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 이후 130년경(하드리아누스 황제시대)까지의 라틴 문학을 일컫는 술어로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공화정 말기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포함한 이른바 ‘황금시대’에 대해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파에도루스의 우화, 세네카의 비극, 루카누스, 스타티우스(60?-100?)의 서사시,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람마>, 페르시우스(34-62)와 유베날리스의 풍자시, 타키투스의 역사 등 로마의 예술적 창조력은 여전히 왕성하여 한마디로 문학상의 ‘쇠퇴시대’라고 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오히려 로마 문화가 현란의 극치에 달해 바야흐로 부패, 발효 직전의 아름다움이 방출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세네카(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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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로마 변론가. 원로원 의원. 로마 정치가·철학자·수사학자인 대(大)세네카의 차남.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유년시대에 양친과 함께 로마로 가서 수사학·철학을 배웠다. 한때 코르시카로 추방되었으나(41) 네로(재위 54-68)의 모친 아그리피나의 주선으로 사면되어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네로 즉위 후 근위군 사령관 부루스와 함께 젊은 황제를 보좌하였다. 네로 초기의 선정은 그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점차로 네로로부터 소외당해 공직에서 물러났다. 피소의 반란(65)에 연좌되어 죽음을 명령받자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혈관을 끊어 자결했다.

그의 저작은 주로 철학적·윤리적, 때로는 자연과학적 에세이집과 친구 소(小)루킬리우스에게 보낸 <서간집>(63-65), 그리고 비극으로 대표되는 문학작품 등으로 대별된다.

에세이집에는 <노여움에 대해서> <행복론> 등 12편의 <대화>와 7권으로 된 <자연현상 연구>가 있다. <서간집>은 전20권 124통으로 인생의 제반 양상에 관한 스토아풍의 실천윤리에 대한 것이다.

현존하는 비극작품은 9편으로 <오이디푸스 왕(王)> <메데아> <아가멤논> 등을 포함한다. 그 밖에 후대의 위작 <옥타비아>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것이나 모두 그리스 비극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고유의 정신이나 정신적 배경과는 전연 무관하여 상연용보다는 낭독용 각본(레제 드라마)으로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고전극시대에 이르는 서구제국의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클라디우스 황제(재위 41-45)의 죽음에 즈음하여 지은 정치적 풍자시 <아포콜로킨토시스>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라틴 시화집>은 그의 단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루카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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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Annaeus Lucanus (39-65)

로마 정치가·서정시인·철학자인 세네카의 조카.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8세경 로마로 옮겨 교육을 받았다. 스토아 학자 코르누투스(20?- ? )에 사사. 조숙한 재능을 나타내 아테네에 유학한 후 네로(재위 54-68)에 의하여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예술가로 자처하던 네로 황제의 질투를 사서 대중 앞에서의 시낭독을 금지당했고, 이에 대한 노여움으로

피소의 반란(65)에 가담, 사건 발각 후 자결했다.

저작의 대부분은 망실되었으나 ‘내란’을 테마로 한 유일하게 현존하는 시 <파르살리아>는 <아에네이스> 이후 최대의 라틴 서사시로 꼽힌다. 그는 중세에 인기가 대단하여 그 영향은 17세기의 시나 연극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페트로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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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iter (Gaius) Petronius (?-65)

로마 정치가·소설가.

성은 분명치가 않다. 한때 집정관을 지냈고 비튀니아의 총독이기도 했다. 네로(재위 54-68)의 측근 그룹에 끼어 ‘멋진 판관(判官)’이었고 데게리누스의 참소로 자결.

그는 세련된 취미의 소유자이면서 반면 유능한 관리이기도 했다. 폴란드의 노벨상 작가인 생케비치는 그의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그를 이상화하고 있다. 페트로니우스의 장편소설 <사티리콘>은 16세기 이후 유행한 풍자적 피카레스크의 선구적 존재이다. 학교를 뛰쳐나온 엔코로피우스와 아스키르투스라는 악동, 그리고 그의 몸종 기톤의 모험담이다. 현존하는 단편의 주요 부분은 시리아 태생의 해방노예로서 벼락부자가 되었으나 저속한 취미를 지닌 트리마루키오 연회에서의 에피소드 <트리마루키오의 항연>이다.

작품 전체는 네로 황제 치하의 이탈리아 생활의 드라마틱한 묘사로써 하층계급의 생생한 회화가 재현되어 속어 및 일상어가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다. 외설적인 문장도 있으나 전체의 정신은 기지가 넘치는 소탈한 풍자 정신으로 일관되고 있다.

플리니우스(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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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Plinius Secundus Major (24?-79)

로마 관리·군인·학자. 코뭄에서 태어나 79년 베스비우스 화산폭발 때 미세눔의 함대 사령관으로서 근무 중 조난당했다. 능력있는 관리였던 그는 역대 황제를 모시고 수완을 발휘했다. 학자로서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사상가라기보다는 근면하고 지식욕이 왕성한 수집가이다.

현존의 저작 <박물지(博物誌)> 37권은 자연·인문 등 각 방면에 걸친 지식의 보고로서 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으나 자료로서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이 밖에 군기·역사·철학·문법에 관한 저작이 있으나 모두 망실되었다. 스토아적 사상을 지녀 그리스인을 혐오하는 옛 로마인 기질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퀸틸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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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Fabius Quintilianus (30?-96?)

로마 수사학자.

에스파냐 칼라구리스에서 출생. 어릴 때 로마로 나와 교육을 받았고 저명한 문법 학자 레미우스 파라에몬에 사사했다. 귀향한 후 재차 로마로 초빙되어 변론교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소(小)플리니우스(61?-114?)도 문하생중 한 사람이었다. 20년에 걸친 교사생활에서 은퇴한 후 다년간의 경험과 풍부한 학식을 살려서 대저 <변론술 교정(敎程)>(93-95?)을 남겼다.

또한 이 동안에 당시의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의 의뢰로 황위 계승자인 두 사람의 조카들 교육도 맡았고, 나아가서는 원로원 계급에까지 승급되는 영예에 찬 만년이었으나 처자식을 일찍 여의고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그외 저작에는 이 밖에 <변론 쇠퇴의 원인에 관하여>가 있었으나 망실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변설문>은 위작인 것으로 보여진다.

로마에서의 변론은 키케로를 정점으로 하여 공화정의 몰락과 함께 공적 활동의 발판을 잃고 급속도로 쇠퇴했다. 대신 학교교육 가운데 뿌리를 내려 교과의 중점적 존재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그 전통이 중세의 리버럴 아트로 계승된다. 퀸틸리아누스의 <변론술 교정>은 그리스·로마 변론의 총결산이며 이 유산을 후세에 남겨주는 중요한 영향을 수행한 것이다.

전부가 12권으로 되어 있는데 단순히 변론술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기술적 문제를 취급했을 뿐 아니라 변론가의 양성은 다시 말해서 전인간적 교육이라는 이소크라테스, 키케로 이래의 관점에 서서 유아의 초등교육부터 시작해서 성인의 문학적 소양, 덕성의 함양에 이르기까지 인격형성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상적 변론가는 키케로이며 또한 동시대의 것보다는 뛰어난 고전작가에 친숙해질 것을 권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로마의 주요한 여러 작가를 논한 제10권은 훌륭한 문학비평이며 고대에서는 귀중한 문학사 개설이기도 했다.

타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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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ius Tacitus (55?-120?)

로마 역사가.

속주 갈리아의 지중해 연안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갈리아인의 호족으로서 조부 대(大)에 로마 시민권을 얻어 기사계급에 편입된 것 같다. 그는 소년시대로부터 로마에 살면서 발랄한 정열로서 웅변술과 교양학과를 공부했다.

77년에 동향 출신의 아그리콜라가 집정관이 되기 위해 전임지인 속주 브리타니아에서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딸과 결혼했다. 81년경에는 당시의 황제에 의해 원로원 계급에 편입, 장래의 출세를 약속받았다. 97년에는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에 취임했고, 112년에는 정치적 일생의 극치인 속주 통치자(아시아 지사)에까지 올랐다.

이와 같이 타키투스는 로마 제국의 거대한 정치 기구를 몸소 체험한 노련한 정치가인 동시에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공적 생활 틈틈이 1권의 문학평론과 4권의 역사 작품을 발표했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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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s de Oratoribus

타키투스 작.

청년시대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전편을 통해 키케로풍의 유려하고 균형잡힌 문체, 청결한 분위기, 젊음이 넘치는 정신의 도취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웅변의 쇠퇴 원인을 논하고 문학평가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있다.

아그리콜라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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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lii Agricolae (98)

타키투스 작.

93년 장인 아그리콜라가 죽었을 때 그의 전기 집필을 착상했다. 그리고 최초의 집필 동기와는 동떨어지게 브리타니아(아그리콜라가 통치했던 속주)의 풍토 및 민족이 묘사되고 있어 로마 시대의 영국을 아는 데 필수불가결한 사료가 되고 있다.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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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ia (98)

타키투스 작.

그는 로마의 동포들에게 게르마니아인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아가서는 퇴폐한 로마인의 눈앞에 오염되지 않은 야만인의 정신과 모습을 보여주고자, 즉 정치적·도덕적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의 영원한 매력은 지식 때문에 서술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지 않고, 모랄리즘 때문에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 문체에 있다고 하겠다.

동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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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e (100?-109?)

타키투스 작.

네로 사후(68)의 내란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까지의 역사를 대상으로 해서 12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최초의 4권 및 제5권의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69년과 70년 등 불과 2년간의 사건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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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les (109?- ? )

타키투스 작.

18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우구스투스의 사망(14)에서 네로의 사망(68)에 이르기까지의 55년간에 걸친 4대 황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제는 황제 및 측근과 인텔리 집단인 원로원과의 갈등이다.

여기에 묘사된 황제의 잔학성에 관한 이야기는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나폴레옹(재위 1804-14?)을 분개시켰으며 원로원의 비굴한 태도는 휴머니스트로 하여금 인간정신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이 <연대기> 속에서 타키투스의 가장 원숙한 사상과 개성 강한 문체 및 극적인 묘사를 엿볼 수 있다.

아풀레이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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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us Apuleius (123 ?- ? )

로마의 소설가.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의 ‘자매도시’로 번창하던 카르타고로 유학하였고 후에 아테네에서 수학한 뒤 여러 지방을 여행하던 중 속주 이집트에서 병으로 쓰러져 친구 시키니우스와 그의 모친 푸덴틸라의 간호를 받았다. 친구의 권유도 있고 또한 친구 모친이 돈많고 아름다운 미망이었던 탓인지 그는 시키니우스의 모친인 푸덴틸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평소 이 여자에게 눈독을 들였던 시키니우스의 친족들이 아풀레이우스는 마법을 써서 여자를 유혹했다고 법정에 참소한다. 그러나 그는 웅변을 휘둘러 법정의 연설을 한 끝에 무죄 방면된다(156?). 이때의 자기 변호는 <변론>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그는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 카르타고에 안주했다. 여기에서 그는 다방면의 재능을 살려 시민 계몽을 위한 학술 강연이나 위정자를 위한 화려한 송덕 연설을 했고 시정에도 참여했다.

한편 시작 및 연극 창작을 시도하면서 9명의 예술의 여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정열을 쏟은 결과 카르타고는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동상을 세웠다. 그가 죽은 해는 불명이다.

황금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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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morphoses

아풀레이우스 작(원제는<변형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유일한 소설.

마법에 호기심을 품고 있던 청년 루키우스는 잘못하여 당나귀로 변신한다. 다시 인간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장미꽃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당나귀가 겪는 수난이 줄거리의 중심이며 여기에다 삽화(이 가운데서 특히 유명한 것이 월터 페이터를 감격시킨 <사랑과 마음>의 우미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 전편에 로맨틱한 서정과 풍부한 관능미가 넘치고 있다. 흥취가 무궁무진한 이 이야기는 예부터 <황금 당나귀>라는 별명으로 찬양받고 있다.

수에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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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140?)

로마 전기작가.

그의 일생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떤 시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의 비서직을 지냈으나 퇴직 후는 문필생활에 들어간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망실되어 <황제전(皇帝傳)>과 <문인전>(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황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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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 작.

카이사르의 전기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27-14)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까지 11명의 황제 전기를 담고 있다. 내용은 주로 소문과 구전에 바탕을 둔 일화집으로 매우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이 전기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수에토니우스 이후의 역사 기술이 전기적 경향을 띠게 된 것은 이 작품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중세의 그리스도교 작가나 르네상스의 역사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티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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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Valerius Martialis (40-102?)

로마 풍자시인.

에스파냐의 빌 빌리스에서 태어나 64년 로마로 와서 같은 에스파냐 출신의 세네카 및 루카누스의 보호를 받았다.

작품으로서는 주로 <에피그람마>(80-102) 전14권 1500편 이상과 콜로세움 준공(80) 때 개최된 경기를 축하한 <경구시>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듯이 가지 각색의 음률로 쓰여진 2-3행부터 20행까지의 단시이다.

여기에서 그는 온갖 인물과 사건에 관한 시사적 풍속적 재료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그당시 사람들의 생활 자체를 묘사했다. 황제에게 바친 후안무치한 어용시인적 아부의 시도 포함되어 있으나 시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정도는 아니다.

마르티알리스는 때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인간성의 참된 모습을 예리하게 파헤쳐 잔인하리만큼 풍자가가 된다.

<에피그람마>는 고대 로마사회의 풍속 연구자료로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고라 하겠다.

유베날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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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imus junius Juvenalis

로마의 풍자 시인

전기(傳記)의 소상한 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 아퀴눔에서 60-70년경 태어나 문학적 활동은 트라야누스 및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의 30년간(98-128)에 걸친 것으로 전해진다.

작품으로서는 16편의 사투라(풍자시)가 현존한다. 메갈로폴리스 로마의 도시악을 풍자한 제3서, 여성비판의 제6서, ‘희망의 공허’를 노래한 제10서 등이 유명하다. 더러 변론술적인 과장이 엿보이나 이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있던 문학적 풍조여서 그가 쓴 풍자의 본질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담백하고 순수한 인물로서, 후세에 사투라라고 하는 문학 형식에 부수하는 ‘독설적 풍자시’라는 뉘앙스는 이러한 그의 성격에서 힘입은바가 크다. 그러나 풍자의 배후에는 투철한 현실 인식이 있어 작품에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부여하고 있다. 고대 말기,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결백한 스토아적 윤리성과 세찬 비판정신은 루소, 빅토르 위고, 존슨 박사 등 많은 종교가·교육가·사상가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의 시에는 후세에 금언으로 된 명구가 많다. 가령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든다” 등이 그것이다.

제정 말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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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政末期-文學(130년경 이후)

백은(白銀)시대 이후의 바야흐로 쇠퇴기의 로마 문학.

로마 제국의 중심지에서 라틴 문학은 서서히 해체되고 시정신이 더욱 고갈되어가는 가운데 겨우 산문의 영역에서 그것도 로마 이외의 곳에서 라틴 문학의 여신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아풀레이우스에 의한 <변형담>(별칭<황금 당나귀>)과 아테네에 살던 에세이스트 겔리우스 아울루스의 <아테네의 밤> 등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 이외의 저작으로서 간신히 희미한 빛을 내고 있다.

겔리우스 아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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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llius Aulus (123?-165?)

로마 에세이스트.

전기의 소상한 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 로마에서 태어나 문학을 배우고 법률을 직업으로 한 후에 아테네로 유학, 철학을 배운 것 같다. 143년 이후 아테네에서 살았으나 그동안 아이들을 위한 라틴어 에세이집을 썼고, 이것을 <아테네의 밤>이라고 불렀다.

전20권인데 그간 섭렵(涉獵)한 서적의 발췌 및 정리, 시정(市井)의 전문(傳聞) 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언어·문법·원전비평(原典批評)·문학평론에서 고대학이나 철학에 이르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망실된 그리스, 로마의 원전에서 뽑은 인용·발췌 등의 풍부한 원천으로서 자료로서의 가치도 큰 것이어서 후세의 많은 저자들이 전거(典據)로 삼았다.

중세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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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移行

로마 고전문학이 급속도로 쇠퇴해 가는 2세기 말에 테르툴리아누스(160?-222 이후) 등에 의해 재빨리 그리스도교의 라틴 문학이 싹텄고 313년의 그리스도교 공인에 의해 문학도 점차로 그리스도교도의 손으로 이행해 갔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에 뒤이은 역사가 암미아누스(330?-400?)나 웅변가 심마쿠스가 이교문학을 옹호하기 위해 최후의 저항 을 시도했으나 헛되었다. 서사시 <고트 전쟁>의 작자 클라우디아누스(400?)가 이교(異敎)로마 세계 최후의 시인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아우소니우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세속문학이 시작되었고 프루덴티우스는 파울리누스(353?-431)와 함께 서구 그리스도교 서정시의 창시자가 되었다. 성(聖)아우구스티누스, 라틴역 성서의 성 히에로니무스(제롬), 찬미작자인 성 암브로시우스 등의 활약도 이 시기(4-5세기)에 해당된다. 고대 로마 최후의 작가 보에티우스는 동시에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이미 중세의 입김이 서려 있었다.

아우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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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imus Magnus Ausonius (310-395?)

로마 제정 말기의 시인.

보르도의 의사 아들로 태어나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후의 황제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의 가정교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였으나 당시의 다른 작가처럼 그리스도교 옹호론이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는데 문학적 관심은 오히려 비종교적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세속문학 개조(開祖)가 되었다.

작품 20권은 대부분이 각종 운율시인데, 서사시의 운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찬한 <모젤강(江)>(370)도 포함된다.

프루덴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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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relius Prudentius Clemensu (348-410?)

제정 말기의 그리스도교 시인.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퇴직하고 ‘신의 찬미’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찬미가를 단순한 예배의 목적에서 분리시켜 고전 서정시의 온갖 아름다운 운율을 사용해서 예술적 작품의 경지까지 높여 참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 서정시의 창시자가 되었다. 405년 출판된 시집에는 12편의 긴 찬미가 외에 순교자를 숭상하는 많은 시나 그리스도교 교의를 취급한 신학적 시가 있다.

보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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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us Manlius Sererinus Boethius (480-524)

로마 최후의 저술가·철학자.

로마의 명문에서 태어나 510년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당시의 지배자 동고트인 데오도리쿠스(재위 474-526)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반역죄에 연좌한 후 체포되어 옥사했다.

그의 저서는 철학·신학을 위시해서 수학이나 음악에까지 미치고 있으나 대표작은 옥중에서 집필한 <철학의 위안>이다. 이것은 저자와 ‘철학’과의 우의적 대화를 산문과 운문이 섞인 메니포스풍 사투라의 형식으로 쓴 것으로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영향이 강하다. 더욱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그리스도교의 여러 문제에 응용해서 다음에 오는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근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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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리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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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文學

오스만 터키의 압제하에 있었던 그리스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근대문학이 대두했다.

그 중심이 된 것은 민중의 독립투쟁을 노래한 솔로모스(1798-1857)를 비롯한 그리스 서안의 이오니아 제도 출신의 시인들로서 이들은 민요 속에서 살아 있는 언어를 찾아내어 문학용어에의 승화를 시도했다. 일상언어에서 동떨어진 고풍의 순정어(純正語)를 배제하고 구어인 민중어를 전파시키려는 솔로모스 등의 노력은 그 후 고전과의 유대를 중시하는 보수파의 저항에 부딪쳐 한때 좌절되나 프시하리스(1854-1929)가 나타나 언어학적 견지에서 민중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러 겨우 민중어의 지위가 확립됐다.

산문작가로는 단편에 뛰어난 파파디아만티스(1851-1911),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반전 작품<묘지에서의 생활>(1924)로 각광을 받은 미리빌리스(1892- ? ), 아테네의 시민사회 등을 묘사한 여러 희곡 및 소설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크세노폴로스(1867-1951) 등이 유명하다.

시인으로서는 서정시의 기교에 뛰어나고 문예비평의 영역에서도 활약하여 그리스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팔라마스(1859-1943), 알렉산드리아에 살았기 때문에 본국의 국어문제에 구애되지 않고 독자적 입장에서 헬레니즘, 비잔틴 문화의 성쇠를 노래한 카바피스(1863-1933), 신화적 종교관을 제시한 시켈리아노스(1884-1951), 서구 현대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 그리스를 뒤덮는 지난 날의 영광의 중후성을 다루어 1963년 노벨상을 받은 세페리스(1900-1971)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근대 그리스의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지방색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작가로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카잔자키스뿐이다.

카잔자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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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s Kazantzakis (1885-1957)

그리스 시인·소설가. 크레타섬 이라크리온에서 태어나 아테네와 파리에서 법학과 철학을 배웠다.

인간의 참된 자유란 어떤 것인가에 관해 평생을 두고 탐구했다. 호메로스의 제재(題材)를 빌어 자신의 영혼의 편력을 묘사한 <오디세이아>(1938)가 대표작품이다. <알렉시스조르바>, 소아시아에서 추방되는 그리스인의 고난을 그린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1955) 등과 같은 소설도 유명하다. 그 밖에 희곡·기행문·번역작품도 많다.

알렉시스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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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is Zorba (1947)

카잔자키스의 소설. 줄거리는 단순한 것으로 책벌레인 ‘나’가 크레타섬에서 조그마한 광산일을 돕는 가운데 현장감독인 조르바라는 자연인과의 접촉을 통해 기성 도덕 및 상식이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진실로 인간다운 생활을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