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국 문학/중국의 문학〔개설〕
中國-文學〔槪說〕
4천 년의 중국문학사는 황허(黃河)처럼 굽이쳐 왔다. 한자의 특질을 살려 대륙적인 민족기질과 방대한 산하(山河)에서 성장한 문학사는 시(詩)를 주류로 삼는 반면 소설·산문을 지류로, 서정과 자연영탄(自然詠嘆)을 본바탕으로 삼은 반면 서사(敍事)와 사회 고발을 그 운영(運營)으로 삼아 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문학 형식은 시가(詩歌)로서 그 대표가 주대(周代)에 씌어진 시경(詩經)이다. 풍(風)·아(雅)·송(頌)의 세 가지 체재(體裁)와 부(賦)·비(比)·흥(興)의 세 가지 작법을 운용한 305편은 대부분 연애·수렵·농작과 제사·전쟁을 주제로 했다. 주로 사언체(四言體)의 소박한 형식으로 씌어진 시경이 '사무사(思無邪)'란 중국 시의 본질적인 사실주의·낭만주의 전통을 수립했다. 시경이 북방 문학으로 토대를 닦은 뒤 춘추시대 이후로는 양쯔강 이남의 새로운 시가인 초사(楚辭)가 시경에 상대적인 문학으로 등장했다.
'혜(兮)사(些)지(只)' 따위 어조사를 곁들여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식인 초사는 비로소 사언(四言)의 구속에서 벗어났고, 정열과 환상 그리고 충정과 비분(悲憤)의 사상을 응합(凝合)시킨 작품들은 중국 시상(詩上) 최초의 서정시인 굴원(屈原)에 의해 가장 많이 남겨졌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변체시(變體詩)가 생겼으니 하나는 조정(朝廷) 문학으로 민중을 떠나서 가송적(歌頌的)인 부(賦)가 있었고, 하나는 악부(樂府)다. 시경(詩經)과 초사(楚辭)의 전통을 이은 악부는 민가(民歌)로서의 상화가(相和歌)·청상곡(淸商曲)·잡곡(雜曲)과 외국에서 전래한 고취곡(鼓吹曲)·횡취곡(橫吹曲)과 사대부들의 교묘가(郊廟歌)·연사가(燕射歌)·무곡(舞曲)들로 엮어졌고 무엇보다 음악을 배합한 신형식은 오언시(五言詩)의 기초를 세웠다.
한말(漢末)에서 위(魏) 초기에 정형(定型)된 오언시는 이미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와 조씨 부자(曺氏父子)·건안칠자(建安七子)
등의 시와 최장편 서사시인 공작 동남비(孔雀東南飛)에 점숙(漸熟)됨을 알 수 있다.
위진(魏晋)과 남북조(南北朝)는 정치적으로는 혼란했으나 문학상으로는 대조적으로 찬란하여 문학이 학문과 분리되었고 유가(儒家)의 교조적(敎條的)인 전통에서 벗어나 자연을 제재(題材)로 한 성정(性情) 문학이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 또 하나의 공헌은 칠언체(七言體)의 성립이겠고 그 시대의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사영운(謝靈運) 등이 있다.
중국 시의 전성기는 역시 당대(唐代)이다. 그 시체(詩體)도 오언(五言)·칠언(七言)·고체(古體)·근체(近體)·절구(絶句) 따위로 분망했거니와 2천 2백여의 많은 시인에 의해 4만 9천 수(首)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제왕(帝王)의 제창과 불교가 개척해 준 시의 의경(意境)으로 극성한 원인도 있겠지만 당대를 통하여 드물게 보는 천재적 시인 이백(李白)·두보(杜甫)를 비롯하여 고적(高適)·잠삼(岑參)·왕창령(王昌齡)·맹교(孟郊)·장적(張籍)·원진·백거이(白居易)·왕유(王維)·이하(李賀) 등의 군출(群出)이 세(勢)를 북돋우었다.
송(宋)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육유(陸遊)·왕안석(王安石) 등 시인이 불교적이면서도 주지적인 시를 써서 시사(詩史)의 명맥을 이었지만 전고(典故)를 애용하면서 부염(浮艶)의 폐(弊)를 면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詞)의 흥성(興盛)으로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성당(盛唐) 때 발아한 사는 송에 이르러 위장(韋莊)·이후주(李後主)·온정균(溫庭筠) 등을 중심으로 그 사용 음조(音調)가 칠궁 십이조(七宮十二調) 사패(詞牌)가 9백여 종에 다다랐고 그 풍격(風格)도 완약(婉約)과 호방(豪放)으로 갈라져 각각 음악의 시로 흥성케 했다.
원·명에 이르러 시는 모방의 길에서 진전하지 못한 채 답보했고 원대에는 오히려 '곡(曲)'으로 시사(詩詞)의 전통이 옮겨졌다. 역시 완약과 호방의 풍격을 지닌 곡은 '노래하는 희곡'으로 널리 불려졌으니 마치원(馬致遠), 관한경(關漢卿), 정광조(鄭光祖), 백박(白樸)을 비롯하여 작가가 187인에 이르렀다.
명대(明代)의 시는 전후칠자(前後七子)를 중심으로 성당시(盛唐詩)를 모방한 복고풍이 짙다가 청대(淸代)에 와서는 전대의 시를 총집성하여 각 시체(詩體)가 부흥하였다.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를 중심으로 한 시인들은 여러 시형식과 풍격을 시도했다. 시작과 시이론이 겸출했던 청대에는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과 거기에 반동했던 심덕잠(沈德潛)의 격률설(格律說), 옹방강(翁方綱)의 기리설(肌理說)과 원매(袁枚)의 성령설(性靈說)이 특기할 만하다.
청말(淸末) 황쭌셴(黃遵憲)은 시의 생활화·자유화를 제창했고, 외국시의 번역에 힘입어 또 하나의 시대의 문학으로 신시(新詩)가 혁명적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산문(散文)은 시에 비해서 순문학의 본질상 적은 편이며 대부분이 설리적(說理的)이거나 기사적(記事的)인 것들이 많다. 설리적인 것이 사상가로부터 나왔다면 기사적인 것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 그 최초로 상서(尙書)와 좌전(左傳)을 들 수 있으며, 철리적(哲理的)인 것으로는 논어(論語)와 도덕경(道德經)을 들 수 있다.
양한(兩漢)에 이르러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등이 불후의 작품으로 남았지만, 비교적 순문학성을 띤 것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산문을 들 수 있다. 비록 복고적인 경향을 면할 수 없었지만 예술성을 띤 영주팔기(永州八記 ― 柳宗元), 적벽부(赤壁賦 ― 蘇軾),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 韓愈), 추성부(秋聲賦 ― 歐陽修) 따위를 남겼다.
산문(散文)에 소조(蕭條)한 명대를 거쳐 청대에는 방포(方苞), 유대괴, 요정 등을 중심으로 한 동성파(桐城派)는 문도합일(文道合一)을 주장하는 고문 부흥에 경주(傾注)케 되어 결국은 산문이 역사적·철리적 굴레를 끝내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의 소설은 훨씬 늦고 더딘 것이다. 고사성(故事性)을 띤 소설들이 형성된 것은 당대의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다.
물론 한대에도 설원(說苑), 신서(新序), 열녀전(烈女傳)이 소설의 전신임을 발견할 수 있고 더구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의 열이전(列異傳), 박물지(博物志), 수신기(搜神記), 신선전(神仙傳), 술이기(述異記), 십유기(拾遺記) 등의 신괴소설(神愧小說)은 허구성(虛構性)이 있으나 그 구성이 '잡기(雜記)'식인 졸렬을 면치 못했다.
그것은 중국이 일찍부터 소설을 '가담항어(街談巷語)'의 '도청도설(塗聽塗說)'이라고 경시하여 왔고 과거(科擧)에도 씌어오지 않았다는 데 원인이 있다.
당대의 전기(傳奇)는 소설로서의 체재와 인물묘사, 스토리의 구성 등에 있어 오늘날의 소설에 접근했으나 그 내용은 연애·검협(劍俠)·신괴(神怪) 등에 불과했다. 대표작품으로 고경기(古鏡記)·유의전(柳毅傳)·잡혼기(雜魂記)·이왜전(李娃傳)·유씨전 (柳氏傳)·장한가전(長恨歌傳)·침중기(枕中記)·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등이 있다.
송대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몰락하고 또다시 '평화(平話)'로 대체되었는데 평화는 평민화한 전기로 남에게 읽히고 들려주던 것으로 은자아(銀字兒)·설공안(說公案) 등과 같은 탐정류와 강사(講史)와 같이 역사성을 띤 허구류(類)가 있었다.
원대에는 비록 잡극(雜劇) 시대였지만 수호전(水滸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백화(白話)로 된 장회소설(章回小說)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명·청대의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를 이룩하게 했다.
명대는 장회소설의 발달기였다. 봉신연의(封神演義)·서유기(西遊記) 따위의 신괴소설을 비롯하여 기서(奇書)로 알려진 금병매(金甁梅)를 빼놓을 수 없다.
청대는 소설의 전성기다. 그 제재나 기교가 뛰어나, 유림외사(儒林外史), 노잔유기(老殘遊記)·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따위의 사회풍자소설이 있고 야수폭언·경화연(鏡花緣) 등의 이상소설(理想小說)이 있고 홍루몽(紅樓夢)을 대표로 내놓을 수 있는 애정소설이 있고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삼협오의(三俠五義) 등의 무협소설이 있다.
청말에 이르러 임서를 비롯 구미 소설의 번역물이 쏟아져 나오고 한편 어문(語文)일치운동의 물결을 타고 장회소설(章回小說)의 허물을 벗고 신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許 世 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