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한문학의 확립

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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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文學

신라 문학의 주조(主潮)는 향가임에 틀림없으나, 신라의 친당책과 아울러 당나라와 문화적 교류가 빈번했고, 한문학은 그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끝까지 불교로써 생활의 원리를 삼고, 유학으로써 정치제도의 원칙을 삼았으므로 반불(半佛)·반유적(半儒的)인 사상에 의해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왕위계승의 분쟁, 빈번한 살육과 지방의 반란, 지배계급인 귀족들의 호사·부패한 생활로 인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부족사회의 미풍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문학인 한문학은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여 빈공 제자(賓貢諸子)들은 김운경(金雲卿)을 위시하여 58인이나 되었다. 그 뒤에 최치원, 최승우(崔承祐), 박인범(朴仁範) 등은 당시의 대표적인 한문학자였고, 특히 최치원은 한국 한문학이 문을 연 초조(初祖)인 동시에 그에 이르러 한문학은 비로소 개화되었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시문집으로 이 시대의 한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그 밖에 최승우는 당나라에 유학, 귀국하여 많은 시작을 남겼고, 그의 시는 최광유(崔匡裕), 박인범과 함께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중국을 거쳐 멀리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까지 다녀오면서 쓴 여행기인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박인범은 역시 빈공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최치원 이후에 가장 이름높은 시인이었다.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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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祐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의 학자. 890년(진성여왕 4) 당나라에 건너가 국학(國學)을 3년간 공부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귀국했다. 후에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보내는 격서(檄書)를 지었고, 문집으로 <호본집>을 남겼다. 문장이 뛰어나 최치원, 최언위 등과 함께 3최(三崔)라 불리었다.

최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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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匡裕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의 학자. 당나라에 유학, 학문이 깊고 시(詩)에 능하여 당나라에서 최치원, 최승우, 박인범 등과 함께 신라 십현(十賢)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때 간행된 <십초시(十抄詩)>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 문종 때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백상(李伯常)에 의해 중간(重刊) 되었다.

박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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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仁範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의 학자.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했고, 시문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귀국 후 한림학사·수예부시랑(守禮部侍郞) 등을 역임. 898년(효공왕 2) 명승(名僧) 도선(道詵)이 죽자 왕명으로 그의 비문을 지었다. <동문선>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