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설화문학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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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話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그 문화도 우수하여 향가 또는 민요 이외에 설화문학도 그만큼 많이 나타났다. 승려들이 이룩한 불교의 연기설화(緣起說話), 화랑들의 풍류세어(風流細語), 민간에 유포하던 민담(民譚) 등 그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 놀라웠다. 현재 신라시대의 설화 중 남아 있는 것은 삼국의 기록을 통해 다시 옮겨 쓴 고려시대의 기록들이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열전(列傳) 등에는 삼국통일 이전에도 아달라왕(阿達羅王) 때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진평왕 때의 <설씨녀(薛氏女)> 등의 설화를 비롯하여, 신문왕 때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 <조신설화(調信說話)>, 그리고 <김현감호(金現感虎)> 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 열녀나 불교의 많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설화는 그대로 고대인의 세계관·인생관이 스며 있어 민족적 전통의 보금자리를 형성했다. 또 이러한 보편적인 민간설화·개인전기·애국설화 등은 후대의 소설문학에까지 그 맥락이 이어 오는 문학유산들이다.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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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聰 (생몰연대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자는 총지(聰智), 호는 빙월당(氷月堂). 경주 설씨(慶州薛氏)이며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로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주로 왕의 정치적 자문 역할을 했다. 유학(儒學)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그가 창제한 것으로 당시 중국문학의 섭취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두(吏讀)를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579-631) 때의 <서동요>, 선덕여왕(632-647) 때의 <풍요> 등은 모두 향찰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설화작품인 <화왕계>는 신문왕의 그릇된 정사를 풍자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1022년(현종 13년)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했다.

화왕계(花王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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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때의 설총 작. 한문으로 된 단편으로 꽃을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온갖 꽃을 능가하는 화왕(花王=모란꽃)이 나타나매 장미꽃이 미인으로 분장하고 등장하여 화왕의 수청(守廳)을 앙청한다. 한편 백두옹(白頭翁=일본 할미꽃)은 장부(丈夫)로 분장하고 등장, 신하되기를 원한다. 이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생겨 화왕은 미인인 장미를 취한다는 줄거리로, 당시 왕의 어질지 못한 정사를 풍자한 글이다.

<삼국사기>권 46 설총 열전에 전하는데 그의 유일한 현존 문장이다. 그의 작품은 양적(量的)으로는 극히 짧은 작품이나 깊은 우의(寓意)를 지닌 것으로 한국 풍자소설의 효시(嚆矢)라 할 만하며 이조 때의 한문소설 <화사(花史)>와 <화왕전(花王傳)>은 모두 이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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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遠 (857- ? )

신라의 대학자.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待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의 표장(表狀)·서계(書啓)·격문은 모두 그의 소작이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알려졌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 외직(外職)을 청원,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成) 등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진성여왕 7)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심해 못 가고 이듬해 시무(時務) 10여조를 상소, 시행케 하고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본래 글씨를 잘 써 그의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작품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귀집> <석순응전(釋順應傳)>이 있으나 <계원필경>과 <향악잡영> 등 한시 몇 수와 금석문(金石文) 약간이 전한다.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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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의 작이라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고려 문종 때의 문장가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과 구별하기 위해 '신라'의 두 글자를 더하여 <신라수이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듯싶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등에 모두 <신라수이전>이란 책명이 기록되어 있다.

향악잡영(鄕樂雜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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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이 지은 5수의 한시. 그의 문집 <계원필경>과 <삼국사기>악지(樂志)에 수록되어 있다. 신라 5기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에 대하여 각각 읊은 것인데, 신라의 악극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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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問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의 귀족·학자.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했고, 704년(성덕왕 3)에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당대의 제일가는 문장가·저술가로 저서에 <화랑세기> <계림잡전>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후일 고려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그의 저서가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한다.

계림잡전(鷄林雜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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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 때 김대문이 지은 설화집. 내용은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모은 것. 그가 지은 <화랑세기>라는 책과 함께 고려 때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쓸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화랑세기(花郞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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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3대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으로 있던 김대문이 지은 설화집. 이 책은 화랑의 역사로 매우 흥미있는 작품으로 추측된다.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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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의 설화.설화집 <신라수이전>에 실려 있었다는 이야기. <신라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는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에 실려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 8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丁酉) 동해가에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서 미역을 따는데 문득 한 바위 위에 앉았다가 실리어 왜국(倭國)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이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가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바닷가로 나갔다가 그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을 보고 역시 그 바위에 오르매 또한 바위에 실려 왜국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서 왕께 아뢰매 이에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는 왕비가 되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일월(日月)의 정(精)이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더니 지금은 왜국으로 갔으므로 이런 괴변(怪變)이 생겼다 했다. 왕이 사람을 왜국에 보내니, 연오는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가리요. 그러나 아내가 짠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 하며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와 아뢰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그 뒤 해와 달이 다시 빛나게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두어 국보(國寶)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이로부터 그들이 제사한 곳을 영일현이라 한다. 지금 민간에서 전하고 있는 해와 달의 설화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설씨녀(薛氏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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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설화.내용은 설씨의 딸과 청년 가실(嘉實)의 기이한 인연의 이야기로, <삼국사기> 권48 열전 설씨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씨녀는 율리(栗里) 민가의 여자로서 집이 가난하고 가족이 단촐하되 얼굴이 단정하고 행실이 얌전하여 누구나 아름다움을 탐냈으나 감히 범하지는 못했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가 나이 늙어 부방(赴防=변경을 방비하는 일)하게 되었다.

늙은 아버지를 멀리 보내게 되매 여자의 몸인지라 모시고 갈 수 없어 한갓 답답할 뿐이었다. 사량부(沙梁部=지금의 경주)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집이 가난하고 또한 누추하나 그 뜻을 곧게 가진 남자였다. 그는 일찍 설씨녀를 어여삐 여기던 바 이런 소문을 듣고 설씨녀를 찾아와 그 아버지 대신 변경을 방비하는 일에 나갈 것을 자원했다.

이에 아버지는 그 딸을 가실에게 허혼(許婚)했다. 가실이 혼인 날짜를 청하매 설씨녀는 부방을 교대하고 돌아온 뒤 날 받아 성례(成禮)하자 하고 거울을 깨뜨려 반씩 나누어 가지고 이로써 후일의 신(信)을 삼았다.

가실은 먹이던 말 한 필을 내맡기고 떠났는데, 나라에 변고가 있어 가실은 교대를 못하고 6년을(변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아버지는 딸에게 온다는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라고 했다. 설씨녀는 그 불가(不可)함을 말했으나 그 아버지는 허혼을 하고 정한 날에 그 사람을 이끌어 왔다. 설씨녀는 굳이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마구간에 이르러 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가실이 몹시 수척하여 돌아와, 그가 지니고 있던 거울조각을 내놓았다. 이에 설씨녀는 매우 기뻐하며 날을 받아 예를 올리고 늙기까지 잘 살았다."

최치원전(崔致遠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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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설화작품.신라의 명유(名儒)로서 당나라에 가서 문장으로 일세를 경동케 한 최치원의 일생의 전기를 소설식으로 엮은 것이다. 이 작품은 <계원필경> <사기(史記)>에 드러난 기사 이외에 허다한 신이(神異)설화를 점철시켰는데, 조선 후기에 이 설화를 윤색시켜 한문소설 <최치원전>을 이루게 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최치원의 탄생·성장으로부터 무수한 기담괴설과 신변망측한 설화로 엮어졌다. 김영녀(金英女)와의 연정과 결혼 등의 설화, 당나라 황제를 초빙한 동기·방법 등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그리고 초빙을 받아 입당(入唐) 도중 해상에서 용왕의 나라에 가서 지낸 괴기한 이야기, 입당 이후 황제와의 대화·시작(詩作) 등의 이야기 등 모두 신이설화이다. 등과(登科) 후의 문장 등은 다소 실화를 채택한 대목도 있으나, 돌아와서 전국을 순회하며 신선생활을 한 전설과 노후의 종적 등도 역시 기괴한 설화로 일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