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신라의 문자

新羅-文字

일찍이 우리 고대국가에 있어 한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 시대를 거쳐 한사군 시대에 이르러서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한자는 그 표현수단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문화의 유입·접촉으로 인하여 모든 문화생활을 영위했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반도의 동남단에 치우쳐 있던 관계로 처음에는 뒤늦게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자 전래의 기록으로는 17대 내물왕 때에 고구려와 교섭이 잦았고, 내물왕 26년(381)에는 사신과 예물을 보낸 일까지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백제를 통해 학문이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직접 중국문화를 흡수, 급속도로 여러 문물제도를 마련하고, 한문의 보급을 꾀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6년(545)에 <국사>를 편찬했다 하며, 또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北韓山巡狩碑) 등으로 미루어 이 때는 벌써 한문 사용이 난숙기에 들어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흥왕 26년에는 진(陳)에서 대량의 불경을 도입했으며, 27년에는 황룡사(皇龍寺)의 공역(公役)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유교와 불교의 융성으로 한문의 사용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삼국은 애초에 고유한 고대문자를 가졌던 흔적은 없으며,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한문이 유입되어 문자생활을 영위했으므로 고유 문자를 창안할 겨를이 없이 한어의 국어화 과정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삼국은 한자·한문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이용, 국어를 표기하려는 의욕에서 독자적인 표기 체계를 창안하니 이것이 바로 향찰이다. 따라서 신라를 비롯한 삼국은 차츰 이국의 문자인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어 자기네 언어를 표기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