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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편집革命
피지배계급(被支配階級)이 지금까지의 지배계급의 지배를 타도하고 그 국가권력을 탈취(奪取)·장악하여 자기의 계급적 이익의 달성에 유효하게끔 기존의 국가권력기관을 재편성하여(혹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거나 혹은 부분적으로 개조) 구지배계급 및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의 반항을 제압, 복위(復位)의 노력이나 획책을 근절하면서 사회의 경제조직, 기타의 여러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규제(規制)하고 동시에 일반대중의 의식·사상의 변혁을 완성하는 전 과정을 광의의 혁명, 혹은 '사회혁명'이라고 한다.
모든 사회현상이 그러하듯 혁명이라는 사회현상도 한마디로 표현하거나 규정할 수가 없다. 혁명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아도 프랑스 혁명·소련혁명·4.19혁명 심지어는 산업혁명·농업혁명·정신혁명·패션 혁명·성(性)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용어례(用語例)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혁명이나 소련혁명 등은 사회혁명 내지 정치혁명이라는 종류의 혁명이고 산업혁명은 생산수단·도구의 발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생산조직 및 사회경제조직의 근본적인 발전·변화를 의미하며, 직접적인 권력의 탈취·변혁의 과정, 정치투쟁의 전개를 포함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정신혁명·인간혁명(人間革命)이라 함은 인간의 사상(思想)에 있어 급격한 자각·반성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변화·개종(改宗) 등을 가리킨다. 과학혁명이나 종교혁명의 개념도 이 종류의 것이라 하겠다.
이상 여러 사례의 모든 것에 타당할 수 있는 혁명의 정의를 구한다고 하면 극히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개념규정을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혁명이란 말은 자연과학 이외에서는 돌연하고 광범한 변화·발전의 계속성에 있어서의 커다란 단절을 가리킨다'라는 설명 등과 같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점차적인 발전,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진화(進化), 혹은 부분적인 개혁(改革), 그것들의 점진적 누적에 의한 발전을 의미하는 개량(改良)과 대비(對比)되는 급격한 그리고 근본적인 변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상의 여러 사례 모든 것에 타당할 수 있는 것이나 동시에 그 때문에 각각의 구체성·특수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명하지 못한다.
역사상의 정치혁명·사회혁명의 어느 것에 대해 보아도 피지배계급이 지금까지의 지배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그 국가권력기관을 자기의 정치적인 목적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변혁하고, 정치적·법적 제도를 재편성하여 새로운 국가기관을 자기의 정치적 대표자로 채우고, 구지배계급의 반항을 절멸시켜 새로운 사회·경제제도의 확립·발전을 꾀한다고 하는 과정은 가장 중심적인 과정으로서 인정될 것이다. 모든 혁명은 '일체의 혁명적 투쟁과 불가분의 것'이다. 그리하여 또한 국가권력이 어떤 계급의 손에서 다른 계급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이 개념의 엄밀한 과학적 의미나 실천적·정치적 의미에 있어서도 혁명의 제일의,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표지(標識)이다. 즉 정치혁명은 사회혁명의 가장 중심적이 과정·단계·국면이고 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며, 그리하여 그 본질적인 표지라는 것이다. 혁명의 근본적 특질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에의 국가권력의 이행(移行)과 전 국가적 질서의 근본적 변혁인 이상, 이른바 '궁정혁명(宮廷革命)'이나 쿠데타, 폭동·반란 등은 그 자체로서는 혁명이 아님이 분명하다. 궁정혁명이나 쿠데타는 그 자체로서는 정권자간의 권력쟁탈, 지배계급 내부에서의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데 그치고, 폭동·반란도 그 자체로서는 힘을 갖고 행하는 권력탈취 내지 권력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데 그친다. 그것은 혁명의 발단이나 한 단계를 이룰 수는 있어도 혁명 그것과는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권력의 계급적 이행이 행해졌다 하더라도 한 번 승리한 혁명권력을 전복하고 혁명에 의해 도달된 변혁을 역전시키든가 혹은 권력의 계급적 이행이 사회의 생산관계의 발전을 억지(抑止)하고 정돈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혁명'이라고 하겠다.
혁명은 사회발전의 과정이고 수단이며 새로운 보다 높은 차원의 사회질서·생산관계의 창출을 목표하고 매개하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 반혁명이 승리하는 경우, 그 사회의 발전이 정체되고 혹은 현저한 후퇴를 계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르주아 혁명을 전취한 프랑스나, 역시 구군주제적(舊君主制的) 질곡에서 독립한 미국과 혁명이 실패했던 독일, 그리고 혁명이 처음부터 문제될 수 조차 없게끔 구지배계급만의 권력교대에 의하여 외형적인 근대 통일국가에의 전환을 수행한 왕정복고(王政復古)의 일본과를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하겠다.
혁명의 유형
편집革命-類型
혁명에 대해서는 혁명의 어느 점에 초점을 맞춰서 이를 보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법이 있게 된다. 정권의 이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혁명, 생산관계의 변혁에 초점을 맞추면 사회혁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정치면에 초점을 맞춰서 보는 경우에도 혁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조직원리에 초점을 맞추면 민주주의혁명(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인민민주주의혁명(또는 신민주주의혁명) 등의 분류가 가능하다. 이밖에 혁명이 외국지배의 타도를 수반하는 경우에는 이것에 초점을 맞춰서 민족혁명·민족 민주혁명 등의 분류가 가능하다. 사회혁명의 경우에도 혁명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하여 혁명의 사회적 내용에 따라서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자본주의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주의혁명) 등의 분류가 행해진다. 또 사회혁명의 특수한 분야를 클로즈업시키기 위해서는 토지혁명(土地革命)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외에 혁명의 수단에 중점을 두어 혁명을 보는 경우에는 폭력혁명(暴力革命)과 평화혁명으로 나눌 수가 있다.
시민혁명
편집市民革命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혁명·민주주의혁명·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자본주의혁명이라고도 불리운다.
시민혁명이 행해지기 전의 사회는 봉건사회(封建社會)로서 그 정치형태는 절대주의(絶對主義) 또는 절대왕정이었다. 절대왕정의 출현은 원래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결부되어 있었다. 절대왕정이 나타나기까지의 봉건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주(領主)가 각지에 할거(割據)하여 독립국을 만들어 그들의 영내에서 자기 멋대로의 정치를 행하고, 과세(課稅)하고, 각양 각색의 화폐제도나 도량형제도(度量衡制度)를 채용하고, 국내 통행세를 받고, 영토의 주변에는 관세장벽(關稅障壁)을 쌓고 있었다. 이 사회는 농민의 착취에 기초를 둔 사회로서 권리가 없는 농민위에 영주가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자의적(恣意的)인 지배를 행하였으므로 농민은 압정(壓政)에 견디다 못해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적인 상품생산이 발달하고 상품경제의 담장자로서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출현하자 영주의 지배는 그들 상공업자에게는 점차 질곡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영주의 지배는 그들의 영업의 자유나 재산의 안전을 위협하고 영주국간의 관세장벽이나 화폐·도량형의 차이는 그들의 상품시장의 확대를 방해하였다. 그들이 영주에 대한 영업자유의 확대를 위한 싸움을 벌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봉건사회는 영주와 농민, 영주와 상공업자간의 대립이 격화함에 따라 혼란과 동요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때에 농민의 영주에 대한 반항과 상공업자의 영주에 대한 투쟁의 에너지를 교묘히 이용하는 한편 군소 영주국을 차례로 병탄(倂呑)하여 국가적 통일을 수행한 대영주가 절대군주로서 그 절대군주의 지배가 곧 절대왕정이었다. 절대왕정은 그때까지 영주국마다 달랐던 화폐나 도량형·세제(稅制)·법제(法制)·군제(軍制)·관세 등의 여러 제도를 통일하고 그것에 의해 상공업자들을 위한 상품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 또 상공업자들과 함께 그때까지 토지에 묶여 있던 농민도 약간의 자유가 주어져서 토지에의 긴박(緊縛)에서 해방되었다. 그 결과 상품경제는 한층 더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왕정은 원래 봉건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고 봉건제도의 틀 속에서 권력의 집중을 꾀한 것이었으므로 상품시장의 확대라는 점에서 약간의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는 하지만, 농민이나 상공업자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전면적 자유를 부여하지는 못하였다. 농민은 토지에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점에서 구영주의시대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상공업자도 군주로부터 특권을 인정받은 특정의 대상인(大商人)이나 대공장주를 제외하면 여전히 부자유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최초에 절대왕정의 출현을 환영한 농민이나 상공업자도 뒤에 가서는 점차로 절대왕정을 그들에 대한 질곡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절대군주나 그를 에워싼 귀족층 사이에서는 상품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화폐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강해져서 농민이나 상공업자를 점점 더 수탈(收奪)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농민이나 상공업자에겐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신분적 지배체제를 일소하지 않는 한 그들의 전도에는 희망이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왕정 타도를 위한 정력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절대왕정의 기초가 동요되기 시작하자 지배계급 내부의 의견 불일치도 증대하여 귀족층 속에서는 군주에 저항하는 자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그런 결과 절대왕정도 마침내는 붕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신분제도나 신분에 수반되는 각종의 특권이 일소되고 사유재산의 존중과 영업의 자유가 확립되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큰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것이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데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약간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즉 시민이라는 말은 '부르주아'라는 말의 번역이다. 또 부르주아란 말은 게르만 어의 'Burg'에서 나온 프랑스어의'bourg'에서 생긴 것으로서 부자(富者)·자본가·시민을 의미하였다. '부르크'란 처음에 무장한 성관(城館)을 의미하였으나 프랑스어화하여 '부르'로 되어서는 약간 의미가 변해 방책(防柵)을 두른 촌락이나 성벽이 있는 도시의 외부에 이루어진 성외(城外)의 마을을 의미하게 되고 그곳의 주민을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그 의미가 바뀌어 도시의 주민 가운데 한편으로는 영주에 대항하고 다른 편으로는 육체노동자들과도 구별되는 중산계급(中産階級)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돈 있는 상인이었으나 상인 외에도 의사(醫師)·공증인(公證人)·학자·변호사 등의 자유직업자나 공장주 등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라 불리었으며 따라서 부르주아란 말은 어느 사이 중산계급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혁명에서는 이 중산계급이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 또는 시민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이란 말에는 이와 다른 용어법(用語法)도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라에 따라서는 절대주의 세력이,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혁명에 선수(先手)를 써서 위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을 행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물론 절대주의 세력이 자기들의 보신(保身)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나 이러한 위로부터 행하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을 이와 같이 한정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민중이 광범하게 참가하여 스스로의 경제적·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적극적·자주적으로 행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또는 민주주의혁명이라고 불리며 이것을 좁은 의미에서의 부르주아 혁명과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같은 시민혁명이라 불리는 것도 그 나타나는 방식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각 국가가 놓여 있는 역사적 조건이나 혁명·반혁명 양세력의 역관계(力關係)와 혁명지도권의 추이(推移) 등에 각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시민혁명은 종교적인 형식에서 나타났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또 프랑스에서의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 가장 철저한 모습으로 싸워진 데 반해 독일이나 러시아·일본 등에서는 왜곡된 형태를 취했으며 중도에서 끝났다.
영국의 시민혁명
편집英國-市民革命
영국에서의 절대왕정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싸움은 1628년에 그들이 국왕에 대하여 의회의 동의없이 과세하지 않을 것, 멋대로 시민을 체포하지 않을 것, 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폐지할 것 등을 요구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투쟁은 1637년 이후에는 납세거부(納稅拒否)의 형태를 취하고 1640년에 이르러서는 큰 성과를 획득하였다. 즉 이 해에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의회는 정치의 실권(實權)을 국왕으로부터 탈취하는 데 성공하여 그때까지 국왕의 특허(特許)에 기초하여 행해지던 각종 독점사업을 폐지, 영업의 자유를 확립하려는 목적을 향해 거대한 일보를 내 디뎠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요구에 항거하여 끝까지 봉건적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국왕은 군대의 힘을 빌어서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억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의회군(議會軍)의 반격에 의해 패배하였고 부르주아지를 위한 새로운 질서는 착착 이루어져 갔다. 국왕과의 전쟁은 또 혁명세력 속의 지도권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 혁명의 지도권은 장로파(長老派)에 의하여 대표되는 대상업자본가층이냐 근대화한 대지주층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뒤에 이르러 그것은 독립파(獨立派)에 의하여 대표되는 중상공업 자본가나 근대화된 중소지주층의 손으로 넘어갔다. 크롬웰(O. Cromwell, 1599-1658)은 후자의 대표자였다. 또 국왕과의 투쟁이 최절정에 달하자 수평파(水平派)라고 칭하는 소생산자·도시 영세민·농민의 발언권이 강화되어 크롬웰에게 인솔된 의회군도 그들에게 강요되어 1649년에는 국왕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영국의 절대왕정에 최후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 혁명은 혁명을 지도한 사람들이 모두 국교회(國敎會)에 반대한 청교도(淸敎徒)였으므로 이를 '퓨리턴 혁명(Puritan 革命)'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시민혁명
편집美國-市民革命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는 영국의회가 본국의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내의 상공업 발달을 억압하려고 한 데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의회는 미국에 제철소를 세우는 일이나 모직물의 제조를 금지하고 영국에서 기성품을 수입하도록 명했다. 1763년에는 인지세법(印紙稅法)이 공포되어 상거래에는 모두 인지세가 과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미국 식민지 주민의 반항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에 놀라 인지세법을 철회하였으나 곧 다시 신세(新稅)를 과하고 미국 식민지의 반대를 억압하기 위한 대병력을 파견하였다.
1774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미국 각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국왕에 대하여 미국의 상공업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미국의 동의 없이는 미국에 과세하지 않도록 청원(請願)하였으나 각하(却下)되고 영국군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식민자(植民者)들은 어쩔 수 없이 국왕의 군대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776년 7월 4일 미국에서는 독립이 선언되고 식민지 주민은 궐기하였다. 혁명의 봉화가 올려지고 혁명의 선두엔 북부의 상공업 부르주아지가 섰다. 전쟁은 1782년까지 계속되어 처음엔 고전하던 혁명군도 나중엔 다시 영국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서 영국군을 압도하여 드디어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였다. 이에 영국은 미국의 각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하고 1787년에 독립한 각 식민지는 서로 모여 합중국(合衆國)을 만들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상공업 부르주아지에의 중압(重壓)이 일소되고, 북부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상공업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남부에서는 시민혁명 뒤에도 노예농장주(奴隸農場主)의 지배가 그대로 유지되어 미국의 근대화에 큰 장애가 되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
편집France-市民革命
프랑스에 절대왕정이 확립된 것은 17세기 초로서 국왕은 정치의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또 국왕 밑에는 승려(僧侶)·귀족이라는 두 특권신분이 있어서 전자는 제1신분, 후자는 제2신분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모두 특권계급으로서 광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들 2개의 특권신분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제3신분에 속했으며 제3신분 중에서 지도적 지위에 선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지는 많은 영락(零落)한 귀족에게서 토지를 샀고 명문귀족과 호사를 다투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부르주아지의 경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절대주의 체제의 속박은 그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에 프랑스에는 수공업 길드가 남아 국왕의 주요한 재원(財源)이 되어 있었다. 수공업 길드는 석수(石手)·푸줏간·직장(織匠) 등에서 볼 수 있었고 국왕에게 길드 세(稅)를 납부하는 대신에 특정상품 생산의 독점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길드 제품에는 모두 규격이 있고, 생산량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규격에 벗어난다든가 제한량을 넘어 생산한다든가 하면 관리들의 손에 의해 그들의 상품은 사정없이 불태워졌다. 그 때문에 길드 수공업에서는 증대하는 시장의 수요(需要)를 도저히 채울 수가 없었으며 도리어 산업 발전의 장애가 되었다. 같은 무렵 프랑스에서는 외국무역이 성행하여 그 전도는 유망하였으나 국내의 관세제도의 방해 때문에 그 발전이 저해당하고 있었다. 국왕·영주도, 사교(司敎)·수도원도 각각 세관(稅關)을 갖고 있어서 자령(自領)을 통과하는 상품으로부터 통과세를 징수한 때문이었다. 곡물을 프랑스의 남부에서 북부로 나르기보다 중국에서 프랑스로 가져오는 쪽이 싸게 먹히는 형편이었다. 상업에의 압박은 공업과 농업에 있어서 중대한 장해가 되었다.
이와 같은 장해는 절대주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그것을 제거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와 제3신분과의 모순이 최고조에 달함으로써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혁명의 실마리가 된 것은 승려나 귀족의 면세특권을 취소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를 에워싼 국왕 대 승려·귀족의 싸움이었으나 제3신분의 선두에 선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승려나 귀족의 면세취소만이 문제가 아니고 모든 봉건적인 특권의 취소가 문제였다.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 그들의 의견이 특권신분의 대표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게 되자 결연히 스스로의 길을 가기로 정했다. 1789년 6월 20일 그들은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이고 국민의회(國民議會)임을 선언하고 이 의회가 해산되는 일이 있으면 세금의 납입을 정지할 뜻을 결의하였다. 제3신분의 대표자들의 이와 같은 행동에 호응해서 파리의 민중이 봉기하여 압제(壓制)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다. 왕의 절대권은 부인되었으며, 승려와 귀족의 특권은 폐지되고 인권선언(人權宣言)이 발표되었다. 혁명정부가 표방한 '자유·평등·박애'의 슬로건은 프랑스 국내의 학대받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들을 혁명정부의 주위로 집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외의 나라들의 내부에도 복잡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까닭에 혁명의 진행은 프랑스의 국왕이나 귀족뿐 아니라 유럽의 기타 국가의 국왕이나 귀족들을 공포감에 떨게 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공동으로 혁명에 간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간섭의 과정에서 적측(敵側)에 통모(通謀)한 왕비와 국왕·귀족의 배신이 폭로되어 궁전은 격앙(激昻)한 민중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왕정은 드디어 전복되고 다음 해인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는 혁명정부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
혁명의 지도권은 당초 상공업 부르주아지 당(黨)인 '지롱드(Gironde)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내외로 위기에 처하게 되자 혁명적인 소(小)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자코뱅(Jacobin)당'의 손에 넘어갔고 1793년에는 자코뱅당이 일시 프랑스 전토에 지배권을 떨치게 되었다. 구질서(舊秩序:ancien regime)의 폐기는 이 시기에 가장 철저한 형태를 취하였다. 봉건적 공조(貢租)는 무상(無償)으로 전폐되고 영주에 의하여 횡령되던 공유지(共有地)는 농민에게 반환되었으며 영주의 권리를 적어 놓았던 일체의 서류는 소각(燒却)이 명해졌다. 국외에 망명한 자의 토지는 분할되어 경매(競賣)에 붙여졌고 식민지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또 지주나 부농으로부터 곡물을 징발하기 위하여 무장한 징발대(徵發隊)가 농촌에 파견되었다. 반혁명적인 승려는 소탕되고 종교 대신에 '이성(理性)의 숭배'가 장려되었다.
그러나 자코뱅당의 지배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793년 가을에 시작된 자코뱅당의 내분(內紛)은 그것만으로도 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충분하였으나 거기에 다음 해인 1794년 테르미도르 9일에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에 의해 꾸며진 쿠데타인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 Reaction)'으로 로베스피에르 등 당지도자가 처형되기에 이르러 그렇게나 권력을 누리던 자코뱅당도 하루 아침에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자코뱅당이 몰락하고 보수적인 부르주아 정권이 서자 자코뱅 시대에 정해졌던 보통선거법(普通選擧法)은 폐지되고 투표권은 직접지조(直接地租) 또는 인두세(人頭稅)를 납부하는 자에게만 주어졌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이러한 경향은 1799년 브뤼메르(Brumaire) 18일,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으로 더욱 심해져서 대의제도(代議制度)마저도 빛을 잃는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프랑스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은 그 후 나폴레옹이 반불연합군(反佛聯合軍)에게 패하고 연합군의 무력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다시 프랑스에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했어도 변하지 않았다. 반혁명적인 부르봉 왕조의 힘으로써도 프랑스를 다시 봉건의 옛날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독일·러시아·일본의 부르주아 혁명
편집獨逸·Russia·日本-bourgeois革命
17세기의 영국혁명, 18세기의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이 민중의 힘에 의해 기존의 지배체제를 밑에서부터 변혁시킨 혁명이라고 한다면 19세기 독일이나 러시아·일본에서 있어서 행해진 '부르주아 혁명'은 이들 나라들의 민중이 스스로의 손으로 주체적(主體的)으로 행한 것과 같은 '혁명'은 아니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민중의 선두에 서서 민중을 지도해야 할 부르주아지는 아직 그 힘이 약하였기 때문에 낡은 지배체제를 민중의 힘을 빌어 아래로부터 변혁할 수는 없었다. 변혁은 오히려 절대군주의 손에 의해 '위로부터' 행해졌다. 그것은 절대군주가 혁명의 충격을 완화시키고 스스로의 지위의 안태(安泰)를 꾀하기 위하여 자기 편에서 자진하여 행한 양보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불철저하고 불완전한 혁명이었다. 군주나 귀족의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에 대하여 부여한 약간의 자유나 권리도 그것은 군주의 '은혜(恩惠)'로서 부여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혁명
편집社會主義革命
부르주아 혁명·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사회주의혁명은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사회혁명의 2대 유형(類型)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주의 혁명(프롤레타리아혁명)은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유제(私有制), 그에 기초한 자본주의 착취의 사회경제구조, 이 사회경제구조에 조응(照應)하여 이것을 유지하는 정치적·법적 제 제도(諸制度)와 국가질서의 폐지, 생산수단을 근로대중의 정치권력인 국가의 공유(公有)로 하여 계획적 경제제도를 실현하고, 관료적·군국주의적 국가체제를 근로대중의 국가체제로 바꾸어 근로대중의 사회공공적 사무관리 체제에의 발전을 목표삼는 것을 과제로 하는 사회혁명이라 하겠다.
순수한 사회주의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고도로 발달하여 생산력은 높고 생산은 집중하여 소경영(小經營)의 비중이 적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정치제도가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는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의 혁명은 당연히 처음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개시되고, 만일 정치혁명이 달성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정권이 형성·유지되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경제제도의 완성은 비교적 빠를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의 사유(私有) 폐지, 여러 기업·교통기관의 국유화, 국영농장의 창설, 농민에의 토지의 비교적 적은 분여(分與), 자연발생적·무질서한 시장관계를 극히 좁은 범위에 머물게 하는 것이 당면한 경제혁명의 과제이다.
이 사회주의혁명의 단계에서는 농민 가운데에서도 부농층은 필연적으로 혁명의 주도세력에서 떨어져 나가고 노동자는 빈농·농업 프롤레타리아트와의 동맹(同盟), 중농(中農)의 중립화에 있어서 혁명 달성에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혁명은 시민혁명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시민혁명의 경우, 그 공격의 요주대상은 절대주의 세력의 타도이나 절대주의가 이룩한 근대적인 국가기구는 이것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할 수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절대주의가 이룩한 중앙집권적인 군·관료조직은 시민혁명에 의하여 도리어 확충·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혁명의 경우, 기존(旣存)의 국가는 그대로 이용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파괴되어 새로이 노동자계급의 손에 의하여 재건(再建)된다.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는 봉건사회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므로 혁명에 있어서도 다만 국가의 실질적 지배자를 바꾸면 되고 국가 그 자체를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이에 반하여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태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고 할 수는 없다. 생산수단의 사유(私有)에 기초를 두는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생산수단의 사유를 부인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육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국가가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국가는 자본가나 지주 등 착취계급의 반혁명을 분쇄, 사회주의 경제를 계획적으로 조직화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구사회가 남긴 계급적 차이를 없앰으로써 공산주의 사회에로의 이행(移行)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에 알맞은 기구를 갖는 것을 필요로 한다.
(2) 시민혁명의 경우, 국가권력의 탈취는 그때까지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진행하고 있던 혁명의 완성을 의미하나, 사회주의혁명의 경우 국가권력의 탈취는 혁명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낡은 사회에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생산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초석(礎石)이 쌓여진 것을 뜻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 코뮌
편집Paris Commune
세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은 1871년에 프랑스의 노동자들에 의해 행해졌다. '파리 코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보불전쟁(普佛戰爭)으로 독일에 굴복한 프랑스의 부르주아 정부에 반대하여 파리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이 혁명은 한때 파리에 노동자의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곧 독일군에 지원(支援)된 부르주아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서 불과 70일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신은 그 후에도 계승되어 1917년에는 러시아에 10월혁명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혁명의 물결
편집社會主義革命-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이 성공하자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지구상 육지의 6분의 1에 뿌리를 내렸고 혁명의 물결은 이곳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세계에 퍼져 나갔다.
유럽에선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아시아에서는 중국·북한·몽고·월맹, 서반구에서는 쿠바가(칠레도 이에 속했다) 이 사회주의혁명의 물결에 휩쓸렸다.
사회주의혁명도 시민혁명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일어난 나라에 따라 다르다. 러시아 경우는 러시아의 사회에 누적되었던 모순이 제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잇단 패전(敗戰)에 얽혀 폭발하는 형태를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난 사회주의혁명의 대부분은 처음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의 형태를 취하여 외세나 외국 제국주의 침략의 종말과 국내 봉건주의 지배의 타도 후에 점차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한 것(중국이 그 대표적 예)과 러시아군의 진주(進駐)와 그 적극적인 지지로 처음엔 연립정권을 세우는 외양(外樣)을 취했다가 그들은 숙청하고 공산당 일당독재정권을 확립하는 과정을 취한 것 들이다(동구 여러 나라의 예).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
편집Russia-社會主義革命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궤도에 오른 것은 1861년의 농노해방(農奴解放) 때부터의 일이었으나 노동자의 해방운동도 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동일한 궤도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도 70년대에 들어서자 노동자의 조직공장이 활발하게 되고 1898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 당은 1903년에 국외(영국 런던)에서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최대한 강령(最大限綱領:Maximum Program)'과 '최소 강령(最小綱領:Minimum Pro-gram)'을 정했으나 이때에 최대한 강령(혹은 최고 강령) 속에서 사회주의혁명과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해 말에 이미 당내에는 볼셰비키(Bolsheviki:다수파)와 멘셰비키(Mensheviki:소수파)의 대립·분열이 생겨 1904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나자 양자의 대립은 예각적(銳角的) 형태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즉 레닌에 의해 지도된 볼셰비키는 전쟁에 반대하였고 말토프가 지도한 멘셰비키는 전쟁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격심한 당내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정세는 이때부터 조금씩 혁명의 방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1905년 1월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의 스트라이크가 잇달아 일어나 도시 전체가 불온(不穩)한 공기에 휩싸였다. 그 무렵 정부의 어용단체(御用團體)로서 '러시아 공장노동자협회'가 있었다. 가본 승정(僧正)에 의해 지도된 이 단체는 황제의 정부에 대한 이러한 위험한 정세를 우려하여 노동자의 불만을 완화시키고 그 불온한 움직임을 누르고자 그 달 9일 왕궁에 대한 데모를 조직하였다. 데모의 선두에는 가본 승정이 서고 데모에 참가한 노동자나 일반 시민은 황제의 초상이나 성기(聖旗)를 들고 찬미가를 부르면서 왕궁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들은 이 데모가 황제에 의하여 따뜻하게 맞아질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을 맞은 것은 황제의 무서운 총알이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하고 데모의 대열은 혼란의 극에 이르러 1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2천 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이 비보가 시내에 퍼지자 격노한 노동자와 시민은 시가의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적기(赤旗)를 내걸고서 혁명에 돌입하였다. 사상(史上) 유명한 '피의 일요일'이 바로 이것이다. 러시아의 제1혁명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혁명의 파도는 날마다 높아 가 그 해 10월에는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 노동자가 일어났고 대공업의 중심지에는 잇달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이 정세에 놀란 황제는 회유·강경의 양면정책을 써서 혁명운동의 진압에 적극 개입했다. 이에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로써 맞서도록 민중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비롯한 몇 개 도시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는 황제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함으로써 러시아의 제1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혁명운동에 대한 잇달은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수상(首相) 스톨리핀(P. A. Stolypin:1863-1911)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스톨리핀의 반동의 시대가 닥쳐왔던 것이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사회민주노동당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멘셰비키는 비합법적인 당의 해체를 주장하였으나 볼셰비키는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였다. 볼셰비키는 가까운 장래에 혁명의 파도가 다시 일어날 것을 믿고 그 날을 위해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1년 9월 스톨리핀은 사회민주노동당과 함께 혁명의 일익을 담당하던 사회혁명당(에스·알당이라고도 한다)의 한 당원에게 저격(狙擊)당해 사망했다. 1912년이 되자 전국의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항의 스트라이크의 물결이 높아져서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정치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스트라이크는 1912년부터 13년, 13년에서 14년, 이렇게 해마다 격앙되어 혁명정세는 또다시 러시아를 휩쌌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러시아는 연합국측에 서서 제1차대전에 참전하였으나 전쟁의 장기화와 함께 군대내에는 염전사상(厭戰思想)이 높아졌고 러시아 군은 전장에서 계속적인 패전을 당했다. 그와 함께 노동자·농민·병사·인텔리 사이에는 전쟁을 저주하고 황제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 갔다. 1917년이 되자 연초부터 전국 각지에서 스트라이크가 빈발(頻發), 수도에서는 2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곧 반란으로 변하고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헌병이나 경찰과 충돌하였다. 충돌이 격화되자 노동자 진압을 위하여 군대가 출동하였으나 출동한 군대 속에는 노동자측으로 돌아서서 반란에 가담하는 자도 나타났다. 이 사이에 볼셰비키에 의하여 혁명은 교묘히 지도되었다. 혁명은 승리하고 로마노프가(家)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였다. 러시아의 제2혁명은 이렇게 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병사로 조직된 노병(勞兵)대표 소비에트 중에서는 아직 멘셰비키나 에스·알 당에 비하여 열세였다. 노병대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이 투옥·유형(流刑)당하거나 가두(街頭) 투쟁에 골몰하고 있을 동안 멘셰비키나 에스·알당에 그 속에서 세력을 부식(扶植)하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비에트내에 있어서의 수적(數的) 우세를 혁명 진행에 제동(制動)을 거는 데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비에트와 별도로 부르주아적 임시정부를 만들고 당시 소비에트의 부의장을 하던 케렌스키를 사회주의 제파(諸派)의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입각(入閣)시킨 것 등이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하겠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의해 러시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실현되자 볼셰비키는 그것을 이용하여 급속도로 당세를 확장시켰다. 당세가 확장되자 그들은 사회주의혁명에의 이행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혁명에의 이행을 결의한 이상, 그들에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매달려 있는 임시정부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볼셰비키가 대중을 임시정부의 영향에서 분리시키려고 시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측에서는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혁명의 그 이상의 진전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의 계속은 대중 사이에 별 인기가 없었다. 여기에다가 국면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환하기 위하여 정부가 계획한 전장에서의 새로운 공세가 거듭 비참한 패배로 끝나자 대중의 격노는 더욱 높아졌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고 외치는 대중의 무장데모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이것을 진압하도록 파견한 군대나 경찰과의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진압은 표면상 일시 성공한 듯 보였으나 그 뒤에서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해 7월 수상이 된 케렌스키는 혁명의 기선(機先)을 제압하기 위하여 단호한 행동을 취했다.
볼셰비키 기관지의 편집국과 인쇄소에 장갑차를 파견한 것이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무장충돌이 일어났고 볼셰비키는 계획대로 무장봉기를 행했다. 봉기가 성공하여 10월 25일 드디어 임시정부는 타도되었다. 그와 함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해 1918년 1-2월까지 혁명의 불길은 러시아 전토를 휩쓸었고 여기에 비로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의 기초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혁명
편집人民民主主義革命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의하면 부르주아 국가가 붕괴된 후에는 곧 사회주의의 서막(序幕)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정권이 수립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의 중간형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想定)되었다. 그러나 동유럽 제국에 있어서는 부르주아 정권이 붕괴하였다고 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이들 나라는 티토의 지휘하에 자력으로 제 나라를 해방시킨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의 진주에 의하여 비로소 국토의 해방, 나치 독일의 추방이 가능했고 국내에 있어서의 계급투쟁의 격화가 혁명으로까지 고양(高揚)된 것은 아니었다.
환언하면 부르주아 지배는 끝났으나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을 거치지 않고 타력(他力)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전시 중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위해 조직된 국민전선·민족전선이 전후의 새로운 정권의 지도세력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있다. 즉 공산당은 분명히 소수파였기에 노동자·농민·소시민·인텔리·진보적 부르주아지 등 광범하게 참가하는 민주전선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정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단일계급에 의한 통일국가 권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공식에서 일탈(逸脫)한 것이었다. 또 히틀러 독일에 협력한 혐의로 대지주(大地主)·대자본가 등을 포함한 일부 보수세력이 추방된 이외에는 약간의 민족자본가나 지주 등의 존재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적합한 것으로서 1945-47년에 소련의 학자들은 인민민주주의 개념을 만들어 내어 한 편에 있어서는 이것을 '타계급과 권력을 공유하지 않고 이것을 독점하는' 소련형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구별함과 동시에 다른 편에 있어서는 '국가행정에 노동자와 농민을 참가시켜 민주주의의 이익을 대다수의 대중에 미치게 하는'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비해 고도의 민주주의 형식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인민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정치·경제기구는 각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것이나 소비에트 형의 정치형태를 채용하고 있으며 인민의회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정권(聯合政權)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단계의 일이고 그 후 공산당 이외의 나머지 민주정파(民主政派)를 숙청해 갔으며 오늘날에는 대개가 실질적인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대자본·대토지소유의 국유화가 실시되었어도 사유재의 완전한 부정은 행해지지 않아 소규모의 사기업(私企業)이 인정되고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란 사회주의혁명의 준비단계이기 때문에 초기에 있었던 정치적·경제적인 완화정책이나 성격들은 곧 대폭적으로 변질·전환되어 갔던 것이다.
동구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편집東歐-人民民主主義革命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동구 여러 나라에 수립된 정권은 저항운동 중에 형성된 통일전선을 모체로 하였다. 소비에트정권과는 달리 이들 정권은 공산당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정당·농민정당 그리고 약간의 부르주아정당도 참가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이 낡은 국가기구를 파괴하여 별개의 새로운 국가기구를 만든 것과는 달리, 이들 동구 국가들은 군대와 경찰이 전면적으로 재편성되기는 했으나 전전(戰前)의 부르주아적인 국가기구 특히 의회제도가 부활·이용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정권이 먼저 착수한 것은 봉건제도와 파시즘의 완전한 일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과 확립이었고 그 기초적인 작업은 혁명적인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동구 제국에서 독일인·이탈리아 인·전쟁범죄자·적에의 협력자·파시스트가 소유하고 있던 기업은 모두 국유화되었으며 대체로 독점적 대기업이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국유화의 제1보를 의미하고 있었다. 제2차대전 직후에 동구 제국의 정치체제와 그 행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구별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사회주의국가로서 탄생한 소련의 정치체제와는 달라 이 때문에 동구 제국의 정치체제를 인민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1947년에서 48년에 걸쳐서 동구 제국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 의회주의를 버리고 소비에트적인 국가기구로 이행하였다. 모든 사적 기업까지도 국유화되고 농업생산 협동조합을 통한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改造)가 본격화하였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들 정당 및 세력들은 정치투쟁에 패하여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나머지의 동구 제국은 코민포름(1947년에 설립된 공산당 정보국) 밑에 결속되었으나 소련의 경험을 역사적·구체적인 사정이 다른 자국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다가 커다란 정치적·경제적 곤란에 봉착하기도 했다.
1956년의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가 사회주의에의 이행방법의 다양(多樣)함을 인정함으로써 자유화의 물결이 일어나 이것이 반소(反蘇)운동으로까지 확대된 헝가리에는 비극이 닥쳤고 폴란드 등엔 고물카의 복귀로 민족공산주의 체제가 출현하기도 했다. 그 후 체코에 대한 소련의 무력간섭, 이를 계기로 한 브레즈네프의 '주권제한론(主權制限論)'까지 니오게끔 사태는 유동·발전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소련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자주노선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구제국의 사회주의 건설의 독자성이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
편집中國-新民主主義革命
1940년 1월 마오쩌둥(毛澤東)은 『신민주주의론』을 발표하여 중국혁명의 성격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국혁명은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2단계로 나누어지지만, 그 민주주의는 낡은 범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중국적인 새로운 특수한 형의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특징은 중국사회가 갖는 식민지·반식민지(半植民地)·반봉건의 성질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혁명의 주요 임무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지배를 축출·전복하여 독립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중국혁명도 5·4운동 이후 신민주주의 단계로 들어갔고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혁명은 그 사회의 성질에서 말한다면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었으나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지도하는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하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프롤레타리아는 5·4운동 이후 혁명을 지도할 계급으로 성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모택동은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중국혁명의 발전법칙을 밝혔고, 신민주주의의 정치·경제·문화의 강령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즉 그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밑에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의 제 계급이 연합하여 독재하는 민주공화국이고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에 의한 인민대표 대회제도를 갖는다. 대은행·대공업·대상업은 국유화되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된다. 그 문화는 반제 반봉건의 문화이고 민족적·과학적·대중적인 것임을 특징으로 한다. 이 신민주주의는 1949년 10월에 중국정권 수립으로 실현되었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 제1보를 디뎠다.
이 신민주주의도 1966년부터 69년 사이에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으로 제 계급연합 등의 민주적 성격은 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노동계급 독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민주민족혁명
편집民主民族革命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에 있어서 토착(土着) 부르주아지나 소부르주아지, 개명적(開明的)인 지주의 지도하에 행해지는 혁명으로서 그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 지배의 구축(驅逐)·타도와 민족의 독립, 민주적 자유의 확립에 있다. 시민혁명과 다른 점은 이 혁명에는 반드시 이민족(異民族) 지배의 타도가 수반되는 점에 있다. 또 이 혁명은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도 달라서 반드시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처럼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 프롤레라리아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1945년의 인도네시아 혁명, 52년의 이집트 혁명, 58년의 이라크 혁명, 제2차대전 후의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은 대부분 이에 속한다 하겠다.
반혁명
편집反革命
혁명에 반대하는 것. 여기엔 두 개의 면이 있다. 하나는 타도된 구지배계급이 다시 정권을 탈취하여 구체제를 부활하는 것이나 혹은 구체제의 부활을 목표하는 운동을 가리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지배계급이 혁명을 예방하기 위하여 혁명 억압체제를 강화하는 것을 말하는 경우이다.
구체제의 부활
편집舊體制-復活
구체제의 부활에는 역사상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이 있다. 성공한 예로서는 청교도혁명(淸敎徒革命) 이후에 있어서의 찰스 2세의 부활(1660년), 프랑스혁명 후에 있어서의 부르봉 왕조의 부활(1814년), 파리 코뮌에 대한 부르주아 정부군의 승리(1871년), 루마니아 군의 원조하에 행하여진 헝가리의 지주세력에 의한 벨라 쿤 소비에트(Bela Kun Soviet:벨라 쿤은 1886년에 태어난 헝가리의 유태계 공산주의자) 정권의 타도(1919년) 등이 있다.
이에 대해 실패한 예로는 러시아 혁명 후의 백계(白系) 러시아 인의 제정부활운동이나 바이마르 공화국 창립 후의 독일인의 제정부활운동 등이라 하겠다.
혁명의 예방
편집革命-豫防
기존의 체제에서 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혁명에 반대하여 혁명운동을 엄격하게 단속(團束)하려는 것은 어느 시대이든 있는 일이나 혁명 예방의 반혁명체제로서 유명한 것은 신성동맹(神聖同盟)과 파시즘이라 할 수 있겠다.
신성동맹
편집神聖同盟
신성동맹은 1814년에 유럽의 군주와 대신들이 나폴레옹을 실각시킨 여세를 몰아 빈 회의를 열고 프랑스 혁명의 흔적을 유럽에서 일소하려는 작업수행을 위하여 체결한 동맹이다. 이 빈 회의는 프랑스·에스파냐와 나폴리 왕국에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키고 로마 지방에 법왕(法王)의 지배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상공업이 유럽 각지에서 머리를 들고 있었던 당시의 정세하에서는 이와 같은 조치만으로써 혁명기운의 근절을 기할 수 없었음은 분명하였다. 거기에 1815년 유럽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에 의해 국제적인 반혁명 조직으로서 신성동맹을 만들었다. 이 동맹에서 그 정책을 실제로 지도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재상(宰相)인 메테르니히(K. L. W. von Metternich:1773-1859)였으나 그의 지도하에 국제헌병으로서 혁명 진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의 군대였다. 신성동맹이 행한 일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에스파냐 혁명과 이탈리아 혁명의 진압이었다.
1810년 에스파냐에서는 혁명운동이, 에스파냐의 중남미(中南美) 식민지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20년에는 독립운동의 토벌을 위해 미국에 파견될 예정이던 군대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며 반란군은 에스파냐 국민을 억압하는 종교재판의 폐지와 승려·귀족에 대한 과세(課稅), 수도원의 폐쇄, 귀족 소유지의 몰수, 1812년에 제정된 헌법의 부활을 요구하였다. 혁명은 많은 지방에 파급되었고 나중에는 마드리드 시내에까지 비화하였다. 낭패한 국왕 페르난도 7세는 혁명세력을 유화(宥和)하기 위하여 1812년 제정헌법의 부활을 약속하고 종교재판의 폐지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때 신성동맹은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에 따라 10만의 프랑스 반혁명군을 에스파냐에 보내어 에스파냐 내부의 반혁명군·신도군(信徒軍)의 협력을 얻어서 혁명군을 진압하고 페르난도 7세의 전제정치(專制政治)를 부활시켰다.
1820년에서 21년에 걸쳐 일어난 이탈리아의 혁명 역시 신성동맹 때문에 진압되었다. 빈 회의 이후 서(西)시칠리아 왕국에서도 에스파냐와 같이 부르봉 가가 통치하였다. 야만스런 반동(反動)이 이탈리아 각지에서 부활하였고 로마에서는 프랑스 인이 가져왔다는 이유로 종두(種痘)와 가로등이 폐지되었다. 프랑스인 이 손댄 폼페이의 발굴과(發掘)도 중지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귀족은 혁명에 의하여 일시 상실했던 그들의 특권을 모조로 회복하였다.
1820년 에스파냐에 일어난 반란은 이탈리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혁명도 군대의 반란에서 비롯되었으나 혁명의 지도적 역할을 행한 것은 비밀결사(秘密結社)인 카보우르당(炭燒黨:19세기 초 나폴리에서 조직된 이탈리아의 급진 공화주의라는 결사. 초기 당원들이 숯 굽는 인부로 변장한 데에서 생긴 이름)이었다. 나폴리와 피에몬테에서는 반란군에 의하여 혁명헌법이 약속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혁명은 신성동맹의 무력간섭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즉 신성동맹이 6만의 오스트리아 군을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혁명을 분쇄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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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동맹이 부르주아 혁명으로부터 전제군주정치를 지키기 위한 반혁명이었다면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혁명이라고 하겠다.
자본주의는 당초 그 자신의 정치체제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나 자본주의가 성장하여 독점단계에 들어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서는 노동자의 혁명운동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반혁명의 담당자를 파시즘에서 구하게 된 것이다.
파시즘의 물결
편집fascism-
파시즘의 물결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밀려왔다. 이 전쟁 중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당황한 자본주의 열강(列强)은 이 혁명을 진압·타도하기 위한 노력을 꾀했으나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사회주의정권의 수립과 성장은 자본주의에 큰 위협이 된 데다가 세계의 식민지나 반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의 물결이 높아져서 자본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여지는 점점 좁혀지게 되었다. 여기에 자본주의 열강간의 경쟁은 더욱 격심해지고 노동자계급의 성장에 따라서 자본주의국가내의 혁명운동도 한층 격렬해졌다. 국내에 풍부한 자원과 국외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나라의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국면을 호도(糊塗)할 수 있었으나 그 어느 것에도 충분치 못한 나라의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위기의 고조(高潮)와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체될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이 시작되었다. 이 점에 가장 열중한 것은 주야로 혁명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의 독점자본이었다.
1922년에 이탈리아에서는 전후의 혁명적인 정세 속에서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에 노동자들의 공장 점령을 폭력에 의하여 분쇄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을 해체하여 독점자본이 모색하고 있던 것을 사실로써 해답한 것이 곧 파시즘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노동자혁명을 분쇄하기 위한 폭력조직이었다. 폭력의 대중적 기초는 무솔리니에 의하여 영락(零落)한 중소 상공업자나 농민·학생·지주의 자제·퇴역군인 등에서 구했다. 그 때문에 이 운동은 처음에 중간층(中間層)의 운동인 양 오전(誤傳)되었으나, 그 후 파시즘의 정치체제가 정비되고 사회질서가 확립됨에 따라 그것은 중간층의 운동이 아니라 중간층을 이용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독점자본에서도 가장 반동적 그룹의 운동임이 밝혀졌다.
1930년대에 세계경제공황이 닥쳐오자 이러한 이탈리아의 경험은 곧 독일·에스파냐·포르투갈·아르헨티나·일본 등 세계자본주의의 비교적 약한 고리(環)를 구성하는 나라들의 독점자본에 의하여 답습되고 파시즘은 이들 나라에서 점점 우위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세계를 풍미(風靡)하는 큰 세력이 되었으나 제2차대전에서 파시즘 세력의 중심이라고 할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3국이 패전함으로써 그 세력도 타도되거나 크게 후퇴했다.
파시즘 국가의 조직원리
편집fascism 國家-組織原理
파시즘이 철저히 무장된 반혁명조직임은 그 국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어 낸 파시즘 국가는 파시즘 국가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그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 나타나 있다.
(1) 노동자의 혁명운동에 조금이라도 이용될 듯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모조리 부인하고 국가의 모든 권력을 독점자본 가운데 가장 반동적인 조직집단의 손에 집중되게끔 되어 있었다.
(2) 독점자본 가운데 가장 반동적 조직집단이 외부로부터 아무런 제재도 받음이 없이 마음대로 국가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3) 독점자본 중 가장 반동적 조직집단이 자기 이외의 어떤 세력도 완전히 금압(禁壓)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파시즘이 그 국가의 조직원리로서 채택한 전체주의·지도자원리·통일주의 속에 명백히 구현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이 본래 갖고 있는 자유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시되어, 국가의 조직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국가의 침범(侵犯)으로부터 지킬 것인가, 개인의 자유가 국가로부터 침범당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는 것 등이 중요한 문제로서 취급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로서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 자유의 영역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국민의 기본권(基本權)이 규정되고, 이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 권력분립주의나 지방자치제가 도입되고, 국가로부터 침해당한 개인적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행정재판이나 국가배상제도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국가를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위병(衛兵)이라고 보는 이러한 제도는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에 편의를 제공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것은 독점자본 중 가장 반동적 조직집단이 멋대로 국가권력의 행사를 방해할 뿐 아니라 노동자의 반정부행동에 정당화(正當化)의 구실을 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주의에서는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가 역으로 되고 '국가가 있고 개인이 있다'는 입장이며, 국가 속에는 국가로서도 간섭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자유의 영역이 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부정되었다. 이것은 국가권력을 뜻대로 구사하여 노동자의 혁명운동을 분쇄하려던 독점자본 중 가장 반동적 조직집단에게는 아주 알맞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국가가 반혁명의 유력한 무기로 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평등하며 개인의 정치의사(政治意思)의 가치도 역시 평등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의사 결정도 정치의사 질(質)이 아니 라 양(量)에 있어서 생각되었다. 다수결의 원리가 존중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는 혁명화한 노동자계급이 그 수(數)를 이용하여 원용(援用)하기 시작하게 되자, 독점자본에게는 무서운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도자원리라면 이와 같은 걱정은 없었다. 즉 지도자원리는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불평등을 긍정하고 정치의사의 가치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이 원리 앞에서는 다수결과 같은 것은 넌센스로 되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치의사는 일반대중보다도 질적으로 뛰어난 정치의사를 가진 지도자가 결정하고 일반대중은 다만 그것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런 생각으로는 정부의 지위가 의회(議會)의 신임에 의해 좌우된다는 의회주의적인 생각 역시 넌센스였다. 최후의 결정은 지도자가 내리면 되는 것이고 그의 곁에는 다만 자문기관(諮問機關)만 있으면 되었다. 그것은 다수결의 원리를 내거는 혁명화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물리치는 데에 아주 편리한 이론이었다. 파시즘은 이런 이론에 기초하여 국가의 통치기구를 재조직하였다.
파시즘에서 말해지듯이 개인을 인간으로서의 가치나 개인의 정치의사의 가치가 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자는 영리한 자에게, 어리석은 정치의사는 현명한 정치의사에 따르면 된다는 것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파시즘이 지도자의 정치의사를 뭇 대중의 그것보다, 또 상급지도자의 정치의사를 하급지도자의 그것보다도 우월한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연장해 가면 나라 안에서 가장 우수한 것은 최고지도자의 정치의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에서는 국가나 민족에게는 다만 최고지도자의 정치의사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므로 그것에 반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탄압되었다. 통일주의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것이 이것으로서 이는 반대당이나 각종의 반정부운동, 반정부적인 언론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원리가 되었다.
파시즘과 노동질서
편집fascism-勞動秩序
파시즘이 노동자의 혁명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반혁명의 조직임은 분명하나 이것은 파시즘의 노동질서를 살핌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국가에서는 노동은 일개의 상품(商品)으로서 이것을 사는 자와 파는 자 사이에는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 거래는 개인과 개인간에 행해지는 경우도 있고 개인과 단체, 단체와 단체간에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자본가와 개개의 노동자와의 사이에 체결되는 노무공급계약(勞務供給契約)은 전자를 의미하고, 자본가와 노동조합, 자본가 단체와 노조와의 사이에 체결되는 단체협약은 후자를 의미하였다. 이 경우 국가는 노동기준법이라는 형식 등으로 노동에 대하여 준거(準據)할 일정한 기준을 표시하고 그런 한에 있어서 노자관계(勞資關係)에 다소 용훼(容喙)를 시도하는 경우는 있어도 원칙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노동조건의 구체적인 결정에 대해서는 노자 양당사자의 교섭에 위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문에 교섭이 잘 되지 않는 경우에는 종종 스트라이크나 직장폐쇄(職場閉鎖)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그것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안(公安)이 위협받지 않는 한 국가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그런 분쟁이 사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아무리 하여도 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만 비로소 조정활동(調停活動)을 하게 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파시즘 아래서의 노자관계는 이것과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자본가들은 모두 국가의 배후에 숨어버리고 노동자들 앞에는 그들의 고용주인 자본가나 자본가단체 대신에 직접 국가가 나타나게끔 되어 있었다. 노동은 그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에 대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의무라고 규정되었다. 따라서 노동자 가운데 스트라이크나 사보타주(怠業)를 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기업의 정상적인 운전을 방해하는 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그 기업에 국한된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적인 문제로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특정 고용주에 대한 의무위반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의무위반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민사사건이 아니라 형사사건으로서 다루어져, 개개의 고용주 대신에 국가가 노동자들 앞에 나타나 스트라이크나 사보타주를 한 자를 용서없이 처벌하였다.
원래 파시즘 국가에서는 노동만이 사회적인 의무가 아니라 사기업의 경영도 역시 사회적 의무로 되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사기업의 경영자는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노동자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기업 경영자의 경우는 거의 국가의 간섭을 받는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미리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생산의 영역에 있어서 사적(私的)인 창의를 존중할 필요성을 인정하여 국가의 정치적 이익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사기업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경영도 노동과 같이 사회적 의무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회적인 의무로 된 것은 노동뿐이고 자본의 편은 '사적 창의의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적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노동조건의 결정방법 또한 파시즘 국가의 경우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우와 달랐다. 거기에선 노동조건의 결정은 항상 국가가 관여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경우, 고용자와 피고용자는 각각 별개의 국가공인조합(國家公認組合)으로 조직되어 이들 국가공인조합 사이에서 단체협약이 맺어지도록 되어 있었으나, 체결된 단체협약이 효력을 발생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국가가 이것을 인가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었다. 인가에 있어서 국가는 자본가의 채산(採算)이 맞지 않는 단체협약은 인가하지 않음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단체협약은 어느 경우에도 자본가의 채산의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었다.
나치 독일의 경우에는 국가공인조합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립적 이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조직된 단체는 비록 국가가 그것을 공인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거기에 계급투쟁의 냄새를 남기고 있다고 하여 배척되었다. 나치는 경영 속에 지도자원리를 채택,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경영자이고 노동자는 이에 절대복종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탈리아 파시즘이 묘하게 우회적(迂回的)으로 하려고 한 것을 간단솔직하게 해치운 것으로서,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독재를 확보하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파시즘이 가장 철저한 현대의 반혁명조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독재를 노골적인 형태로 제도화한 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