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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편집司法
국가의 권력 또는 작용을 각기 성질을 달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입법·행정·사법의 셋으로 나누고, 각각 별개의 기관에 분장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이 '삼권분립론(三權分立論)'인데, 이 원리가 근대국가의 정치기구의 기본원리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삼권분립론에서 일반적인 '입법'이란 법을 정립하는 작용이고 '사법'은 법을 기초로 한 민사·형사재판에서의 법의 적용이며 '행정'은 역시 법을 기초로 한 사법 이외의 국가목적을 실현하는 작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법의 정립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입법이 법을 일반적으로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법은 법을 구체적인 사건이나 쟁송을 통하여 행하는 동일한 작용이며, 또 법의 적용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사법이나 행정이 다같이 법의 구체적인 적용이라는 데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차이도 근본적으로는 상대적인 정도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삼권분립론을 전제로 하여 사법의 의의를 명백히 하려면 입법이란 일반적인 법의 정립이고 사법이나 행정도 그것을 기초로 한 법의 적용이지만, 행정이 구체적인 국가목적의 실현을 지향해서 행하여지는 법의 적용인 데 대해 사법은 구체적인 국가목적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엇이 법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작용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사법의 제일차 목적은 법의 적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사법의 의의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개인 상호간 또는 국가와 개인과의 사이의 법률관계에 관하여 다툼이나 의심되는 점이 있을 때 당사자로부터의 소송의 제기를 전제로 하여 독립된 법원이 일정한 소송절차에 의하여 법의 적용을 보장하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법의 범위
편집司法-範圍
사법의 의의는 전기한 바와 같지만 그 내용, 즉 사법의 범위는 반드시 일정하지 않다. 즉,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는 연혁적·역사적으로 사법이란 민사·형사의 쟁송의 재판만을 가리키고, 행정사건에 관한 쟁송의 재판은 사법권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행정사건은 사법재판소와는 다른 행정재판소의 관할로 하고 있지만, 영미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민사·형사에 한정하지 않고 행정사건까지도 포함시켜서 광범위하게 일체의 쟁송을 재판하는 작용을 사법이라고 생각하여 사법재판소가 당연히 행정사건의 재판까지도 하는 것으로 되어 왔다.
민사·형사뿐만 아니라 행정사건에 있어서도 법률상의 다툼이 생겼을 때에는 그것을 해결하고 당사자의 권리를 완전히 구제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임무를 사법재판소와는 다른 행정재판소에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행정권 자체의 자제작용(自制作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또 그때의 재판절차에 있어서도 행정권의 편의가 우선적으로 고려되기 쉽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미형이 국민의 권리 구제와 법의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법권의 우월
편집司法權-優越
법원이 특히 의회가 정립한 법률의 위헌성(違憲性)을 심사하는 권한, 즉 위헌입법심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경우에 그것을 사법권의 우월이라고 한다. 예컨대 미국헌법은 이 원칙을 채용하고 있다.
즉, 상기한 바와 같이 사법권이란 법을 기초로 한 재판작용이지만 법원이 재판을 함에 있어서 적용해야 할 법률은 합헌(合憲)의 법률이어야 하며, 따라서 만일 그 합헌성에 의심되는 점이 있을 때에는 법원은 그것을 심사·결정하고 위헌되는 점이 있을 때에는 그 적용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법권 우월 원칙의 견해이다. 이 경우 법원은 의회에 대하여, 그리고 사법권은 입법권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물론 이 원칙도 근본적으로는 재판이 법률을 기초로 한 법률의 적용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적어도 합헌인 한에 있어서는 법률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다만 위헌입법심사권을 법원이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법원이 사법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고도의 독립성을 갖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위헌입법심사권도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사법권의 행사에 있어서 인정되는 권한이고 법원 본래의 기능인 구체적인 소송사건의 재판에서 거기에 적용해야 할 법률의 위헌성을 심사할 수 있다는 것에 한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법률에 관한 위헌판결이 나왔더라도 그 효과는 그 사건에 그 법률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며 그 법률의 효력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판례상 확립된 원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사법권의 우월이 입법권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법권의 한계
편집司法權-限界
사법권의 범위가 개인간의 쟁송에서 행정사건의 쟁송까지로 확대되고 또 위헌입법심사권까지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법원이 어떤 사건이라도 무제한으로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는 사법권 본래의 성질에서 당연히 한계를 갖는다. 이 점은 특히 행정행위의 특색을 비롯하여 행정사건 소송의 성질이라는 문제 및 소위 통치행위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즉, 먼저 행정행위의 특색에 관하여 보면 행정권의 발동으로서의 행정행위는 사법상의 행위와는 다르며, 그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행정목적의 추구상 행정권에 광범한 자유재량이 인정됨과 동시에 전문적·기술적인 지식과 고려가 요구된다. 거기에 행정행위의 특색이 있으며 따라서 행정사건의 소송에 있어서 법원이 구체적인 행정처분의 적법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에도 자유재량이 인정되고 있는 범위에 있어서는 만일 행정청이 그 재량을 잘못하였더라도 그것은 당부당(當不當)의 문제가 될 뿐이지 꼭 위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재판의 대상이 '법률상의 쟁송'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하며 거기에 사법권의 한계가 있다. 또 만약 재량문제가 아니라 법률상의 문제로 되는 경우에도 그 다툼이 행정권 내부의 권한이나 조직을 둘러싼 다툼인 경우에는 그 해결은 행정권이 자주적으로 행하여야 하며 특히 법률에서 법원의 권한으로 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또 소위 특별 권력관계의 질서유지에도 법원이 무제한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행정부·의회·학교 등의 특별한 사회의 내부규율문제로서 각각 내부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과 또 사법권에 의한 재판은 원칙적으로는 일반 시민사회의 법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법률상의 다툼을 해결하는 것이므로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의무에 관계되지 않는 다툼은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음으로 통치행위란 정치적 성질의 강력한 행위이며 국회와 내각이 그 정치적 판단을 기초로 하여 정치적 책임에서 행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들 행위에 대한 통제방법은 법률적인 관점에서 하는 법원의 사법적 컨트롤이 아니라 직접 국민의 정치적 비판을 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다. 요컨대 사법권의 범위의 확대와 법원의 지위·권한의 강화는 법치주의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특히 일체의 정치문제를 법률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성질상 곤란하다는 것과 사법권이 본래 일반 시민법질서의 유지를 그 임무로 해야 한다는 등의 결과로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만일 이 한계를 무시하여 특히 고도의 정치적 문제에 법원이 깊이 관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법원이 정치의 분쟁 중에 스스로 개입하는 것이 되어 사법권의 본래의 임무 달성을 해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법권의 독립
편집司法權-獨立
사법권의 행사가 공정히 행하여져야 한다는 것은 사법권의 성질상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특히 사법권·법원이 행정권·정부·정당 등으로부터 부당한 압박이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삼권분립의 원리는 당연히 사법권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경우에는 사법권의 행사에 임하는 개개의 법관이 외부로부터의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사법권 독립의 핵심은 법관이 공정하게 재판을 행하는 것을 보장하는 데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관의 신분보장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본래의 사법권, 즉 개개의 재판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위 사법행정의 분야, 예컨대 법원의 조직 및 예산 등에 관해서도 법률의 형태로 국회의 통제가 가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산에 관하여 내각 밑에 있는 행정기관과는 다른 독립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예산을 통한 내각·정당 등의 부당한 영향을 배제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사법행정의 면에서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사법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
편집司法權-對-民主的統制
전기한 바와 같이 사법권은 독립하여야 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법권도 근본적으로는 국민의 의사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예컨대 절대전제국가에 있어서와 같이 군주는 정의의 원천이고 재판은 군주에 의한 재판이기 때문에 옳다는 사고방식은 근대에 있어서는 도저히 지지받지 못한다. 국민 주권이나 민주주의는 사법권에 대한 국민의 관여·통제를 당연히 요구하는 것이다. 또 재판 내지 법관은 그 본질상 보수적 경향을 띠는 일이 많다. 영미식의 배심제도나 대륙식 삼심제도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민주적 통제의 수단으로 발달하여 왔다. 또한 특히 혁명적인 시기에 있어서는 법관의 공선제(公選制)가 실현되는 일도 있다.
문제는 사법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요청과 재판의 공평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다. 즉, 민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판에 대한 국민의 참가는 이유가 있지만, 한편 어떠한 정치적 정세에도 관계없이 엄연히 정의를 선언해야 하는 재판의 본질에서 본다면 소박한 민중재판적인 주장이나 법관공선론의 견해는 재판의 정치화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법관의 독선은 어디까지나 배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법관의 특권적 의식이 배제되어야 하지만, 한편 법관이 마치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그때그때의 세론이나 정치세력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도 안 된다.
재판
편집재판
편집裁判
국가기관으로서의 법원이 민사·형사의 소송사건에 관하여 심리하고 그 판단을 표시하는 행위. 그러나 통속적으로는 재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즉 재판절차 전체를 가리켜서 재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재판의 의의
편집裁判-意義
(1) 재판은 국가기관으로서의 법원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국가법 강제의 절차이다. 국가의 법률은 재판 이외의 방법에 의하여 강제되는 경우도 자주 있지만 그 행위가 헌법 또는 법령에 위반된다고 주장될 때에는 법원의 재판에 의하여 최종의 해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므로 '재판'은 국가법의 최종 강제절차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재판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a) 사권(私權)에 관한 다툼-사법상의 권리 또는 법률관계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에는 항상 민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법원의 판단을 구할 수가 있다.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하는 사실의 진부를 판단하고 여기에 법률을 적용하여 원고의 신청을 인정하거나 또는 그것을 배척한다. 민사소송에 관해서는 법관은 법규가 없음을 유일한 이유로 하여 판단을 거부하거나 또는 원고를 패소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적용해야 할 명분의 법규가 없을 때에는 기존의 법규의 해석에 의하거나 관습 또는 관습법에 의하거나 원용할 만한 학설 또는 조리에 의하여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b) 행정법규의 적용에 관한 다툼-행정소송법에 규정이 없는 사항에 관해서는 민사소송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행하여진다. (c) 범죄의 혐의를 받은 자에 대하여 사실의 유무와 법규의 적용을 확정하고 형벌을 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재판, 즉 형사소송은 형사소송에 관계되는 두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첫째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로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ㄱ) 헌법 및 헌법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법률 또는 법률에 의하여 수권된 명령·규칙 또는 조례에 어떤 행위를 처벌하는 취지를 정한 경우 이외에는 비록 그 행위가 도덕상, 풍속상 유해하다고 생각되더라도 법원은 유죄의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ㄴ) 형벌 법규의 해석에는 확대·유추해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ㄷ) 형벌 법규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어떤 행위가 처벌되는지를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두번째 기본원칙은 피고인은 적어도 제1심의 유죄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이다(Presumption of innocence). 따라서 유죄의 입증책임은 당연히 검찰관에게 있으며 피고인은 적극적으로 무죄를 증명할 의무가 없다. 또 법원은 피고인이 스스로 무죄의 해명을 하지 않거나 또는 검찰관의 증거에 대하여 반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유죄의 재판을 할 수 없다. 다만 제1심법원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은 자가 항소(抗訴)하고, 또 제2심법원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은 자가 상고(上告)하는 경우에는 원판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항소이유서 또는 상고이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2) 재판은 현재 각국이 모두 국가기관으로서의 법원이 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의 나라에서는 교회가 신도 및 교회원의 자격·교회조직·기타 문제에 관하여 행하였던 재판을 국가법원의 재판과 병렬적으로 인정하던 일이 있다. 그리고 현재도 『교회법전(敎會法典, Codex juris Canonici)』(1918)의 제4편은 소송법(De Processibus)의 규정이 되어 있고 총칙·화해조정법·형사소송법·혼인소송법 등의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들 재판은 일단 교회의 내부사항의 문제로 해석되고 있다. 또 국가 외의 법원으로서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서 '국제연합헌장' 제14장 및 '국제사법재판소 규정'에 의한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다. 이 재판은 국가간의 분쟁에 관해서 주로 조약의 해석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인데 이것 또한 광의의 재판의 일종이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국내법상의 '재판'이라고 할 때에는 일단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재판제도의 역사
편집裁判制度-歷史 재판은 어떤 분쟁이 있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재판을 위하여 정해진 여러 가지 제도, 예컨대 재판을 해야 할 시간·장소·사람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의 문제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다. 또 재판제도가 다르면 거기서 적용되는 법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컨대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떤 절차에 따라 사회내에 발생한 다툼의 당부를 판단하는가는 입법과 마찬가지로 그 사회의 지배이념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법'이란 이런 의미에서 조직된 법원에서 적용되는 분쟁해결의 기초이다. 조직된 법원이 없는 곳에서는 법·의리인정(義理人情)·종교·윤리 등의 구별은 이론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규범이라도 자유롭게 구체적인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재판제도의 성장은 이 종류의 의리인정·종교·윤리 등의 규범을 일부분 법규범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인데 동시에 그 규범들과는 다른 법규범을 창조하고 또한 창조된 법규범에 의하여 의리인정·종교 등의 제 규범을 없애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원시사회 ―― 원시사회에서의 재판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가는 일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원시 또는 미개사회는 결코 하나의 특정한 형(型)을 가진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전연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히 일반적으로 개설하면 어떤 의미에서 종교성이 있는 사제자(司祭者) 또는 추장(酋長)이 부족대표자의 호소를 받아서 그 불만을 보상하기 위하여 피고발자에 대하여 형벌을 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기에는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구별이 없고 보상은 전부 형벌에 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발자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증명은 반드시 증거에 의하지 않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재판이 행해진다는 사실에 의하여 확보된다. 또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일정한 의식을 거쳐서 신판(神判)을 받아 신 또는 초자연력의 계시를 받아서 흑백을 가리는 일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 초기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결투·냉수(aqua frigida)의 심판(재판에 입회한 승직자가 먼저 냉수에 대하여 기도를 올려서 정당한 자를 받아들이고 악한 자를 가려내 달라고 한 다음, 소송 당사자를 떨어뜨려 물속에 가라앉아 죽은 자를 정당한 자로 하고 살아서 떠오른 자를 허언자로 하는 심판법을 가리키며 1215년의 라테란 공회에서 이 종류의 심판에 승직자의 입회를 금지하는 취지의 결의가 있었지만 영국을 제외하고는 금지의 효력이 반드시 미치지 않았다) 등이 그 예이다. (2) 오리엔트 ―― 원시 또는 미개사회에 있어서의 공개 및 '종교성이 강한 재판은 그 후 차츰 세속화한 반면에 관료화'하고 있다. 예컨대 기원전 17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왕이 인민의 유일 최고의 보호자·국부(國父)라는 입장에서 왕 자신 또는 그 관리가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앞에 애로사항을 호소하거나 타인을 고발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에는 관리는 먼저 피고인을 호출한 다음, 당사자에게 화해를 권하고 또한 그것을 강요한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그와 같은 것을 하는 관료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재판관이 아니라 행정관인 동시에 재판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화해권고가 성립하지 않으면 실제로 재판이 행해지도록 하였는데 그때에는 해당 지방 장로를 증인·감정인 또는 법규통으로서 환문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서 재판한것 같다. 그러나 재판제도가 관료화한 바빌로니아·이집트·중국 등의 동방 세계에서는 비록 장로들을 불러서 의견을 듣는 경우라도 그들의 의견은 그 사람이 유명자이므로 그 의견은 옳을 것이라는 추측을 수반할 뿐이지 재판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왕·황제로부터 나왔다. 재판이 이와 같은 형태로 행해진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형벌법규는 발달하였지만 민사법규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황제가 국부이고 인민의 보호자인 경우, 가장 빨리 그 권위를 실증하는 방법은 악을 벌하고 정(正)을 칭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형벌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스스로 재판에 걸리기 전에 고발자와 화해를 하고 손해를 배상하고 탈취한 물건을 돌려 주는 등 고발을 취하하도록 힘을 썼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화해절차는 비공개가 되고 비밀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재판도 비밀화하고 또 재판관은 동시에 행정관이라는 원칙도 성장하였다. 이에따라 재판은 중앙정부가 하는 일의 일부가 되었고 재판할 때 적용되는 원칙과 중앙정부의 도덕·문교정책이 일치되도록 힘쓰게 되었다. (3) 그리스·로마 ―― 이와 같은 재판제도와 비교해서 더욱 중요한 영향을 남긴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제도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제도는 일반적으로 재판권의 기초가 '시민' (시민권을 가진 시민, 노예 소유의 유자격자)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예컨대 아테네의 재판제도의 역사를 보면 적어도 기원전 7세기 전후에는 아레오파고스(Areopagos)라고 불리는 시민의 집회가 전체적인 재판소로 되어 있었다. 후대(後代)에는 이 집회에 모이는 시민의 수가 5,000-6,000에 달하였으므로 몇 개의 '부(部)'로 나누어진 것도 사실이다. 또 기원전 6세기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시대부터 종속도시의 사건을 재판하기 위해서 아테네 시가 순회재판관을 파견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아레오파고스는 후대까지 적어도 모살사건(謀殺事件)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보다 경미한 죄의 재판에 한해서 아레오파고스의 구성원 중에서 선임되는 소재판소에 제1심의 재판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 법정에 관한 기록을 보면 소송당사자 또는 그 변호인이 된 웅변가가 시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변론을 하여 재판소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감정으로 법의 적용을 좌우시켰다기보다는 재판소에서 적용한 안정된 법이 없고 우민감정(愚民感情)이 그때그때의 법이었던 느낌이 든다. 이것은 한편으로 대중이 재판관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법학의 전문적 학습도 미숙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재판의 일반적 기준이 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은 부당하며 그 전체는 로마 법과 같이 체계화되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형사법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민사법에 관해서도 상당히 고도로 발달했었다. 그리스의 재판제도와 비교해 보면 로마의 재판제도는 더욱 조직적인 발달을 하였다. 로마의 재판제도에서 특색 있는 점은 우선 민사의 재판제도가 형사의 재판제도와 나누어져 있는 점이었다. 로마 법상의 민사재판은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Lex Licinius)에 의하여 설치된 법무관(Praetorurbanus:제국의 선출된 공무원)에게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법무관은 소송당사자의 주장, 증거의 내용이 소송방식에 위배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심사하고 재판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인정할 때 소송당사자의 협력을 얻어 로마 시민 중에서 선출된 재판인(index)에게 송부하도록 되어 있었다(訴訟係屬 litis contestatio:즉 이것으로 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로마법상의 재판인은 사건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특정사건의 재판자로서 반드시 직업적 법률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을 '재판인'에게 송부하기 전에 법무관은 사건이 소송방식에 적합한가의 여부, 그 사건의 대체적인 결론이 어떻게 되는가를 판단 또는 예견하는 것이 필요하였으므로 어느 정도의 법률지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의 하나였다. 더욱이 로마의 민사거래·민사소송과 같이 대단히 엄격한 형식을 요하는 곳에서는 거래나 소송에 관하여 당사자를 돕는 법률적 조언자가 필요하였고, 이 때문에 특히 귀족의 자제를 중심으로 법률을 가르치는 교사가 출현하였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예링에 따르면 법률을 배운 야심적인 청년은 거리에 나와 법규에 어두운 농민들을 위하여 무료로 조언을 제공하고 그 대신 관직선거때 자기에게 한 표를 던져 주도록 운동을 하였다고도 한다. 이것은 법학공부의 시초이며 그 후 기원 9세기 이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법학의 융성기에 대하여도 일종의 기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로마법상의 민사소송에 관하여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외국인과의 거래가 중요해졌으므로 기원전 242년에는 외계인(外係人)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이 설치되어 외국인 상호간의 민사소송, 로마 인과 외국인의 민사소송을 재판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외인계 법무관은 물론 로마 시국(市國)의 고유하고 엄격한 시민법(jus civile)에 의하여 재판할 수는 없으므로 차츰 그것과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지중해 연안 주민 전체에 적용하여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법규를 창조하여 이것을 재판에 적용하게 되었다. 이 종류의 법규가 소위 '만민법(萬民法:jus gentium'이며 그 형식은 결국 로마법으로 하여금 로마시국에 고유한 법이라는 단계에서 당시 알려져 있었던 인류에게 보편적인 법으로 변질시켜서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민사소송과 대비하여 형사사건의 재판은 우선 콘솔(집정관)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09년의 우아레리우스 법(Lex Valeria)에 의하여 콘솔의 재판권은 제한되고 특히 사형 또는 태형(笞刑)의 경우에는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라고 칭하는 인민집회에 상소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이어서 기원전 2세기에는 법무관(judex quaestionis)이라고 하는 직업적 법률가를 재판관으로 하고 콘실리움(consilium)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민 중에서 선임되고 배심원을 판결인으로 하는 배심재판소(qaestiones perpetuae)가 설치되어 죄질에 따라 일정 배심재판소에서 재판하도록 변하였다. 그런데 로마가 제정기(帝政期)에 들어간 후에는 재판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재판을 법무관과 재판인으로 나누는 절차는 금지되고 관료로서의 법무관만이 재판관이 되도록 개정되었다. 그러나 한편 재판소는 각지에 설치되었고 하급재판소의 재판에 대하여는 상급재판소에 상소하는 길이 열리고, 최고위의 재판관으로서 보통 '근위도독(近衛都督:praefectus praetorio)'라고 불리는 사람이 최고재판소의 기능을 행사한 듯하다. 이 관직은 황제의 법률 고문이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초기의 근위도독에는 파피니아누스, 파우루스, 우르피아누스 등의 대법학자가 임명되었으며 그들의 저서와 법률문제에 대한 해답은 후대의 법률원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로마 제정기의 재판제도는 교회의 재판제도에 대한 모범이 되고 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이미 사법재판소가 설치되어 단순히 신앙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도간의 민사소송, 때로는 신도에 대한 형사적 사건까지 재판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에도 이것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원 6세기경에 쓰여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서간에 의하면 로마 사교(司敎)가 유럽 전 그리스도 교회의 중심이 되었으므로 종교사건뿐만 아니라 세속사건에 관해서도 최고의 재판권을 가지며 다른 사교구(司敎區) 재판소의 상소심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재판소의 구성은 주로 제정 러시아의 재판 조직을 모방하여 차츰 교회관료로서의 직업적 재판관을 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교회재판소는 봉건제의 성립으로 붕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11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세속사항의 재판권까지도 보유하고 어음, 그밖의 유가증권법리(有價證券法理)의 발달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4) 게르만 ―― 5세기 전후부터 게르만 인 미개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은 차츰 붕괴하였다. 게르만 족 초기의 재판은 미개인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이 재판 집회를 열고 거기서 선서·신판(神判) 등의 야만적인 방법으로 민사상의 사건을 재판하고 형벌을 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제국(서로마)의 뒤를 승계하자 국왕은 인민집회에 의한 재판에 그라프(Graf)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재판절차가 정당하게 행하여지고 있는가, 또 재판의 결과가 집행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감시하도록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재판의 실태는 인민집회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었는데, 8세기의 카를 대제(大帝)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의 백인조마다 7인 정도의 판결인(rachimburgi)이 선임되어 그들이 그라프의 감시하에 인민집회에 출석하여 재판을 구체적으로 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재판집회는 원래 6주간마다 1회, 1주간을 회기로 하여 열렸는데 이것은 너무나 집회 참가자의 부담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하여 카를 대제에 의하여 1년에 9일의 비율로 개정되었다. 이것은 경미한 사건에 관해서는 그라프와 인민을 대표하는 수명의 배심원(陪審員:Sch ffen)이 회합하고 재판을 실제로 행하게 되었다는 것, 또한 황제의 순찰사(巡察使:missi)가 그 상황을 보고하고 재판의 결과에 대하여 조정을 가해 사실상의 상소재판관이 되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재판형식의 도입은 왕권과 봉건적 영주권의 문제에 관해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재판권이 순찰사, 그밖의 왕권 대표자를 통하여 국왕의 수중에 집중하는 것은 재판에 의한 수입, 즉 벌금, 속죄금, 재판수수료 등을 봉건 영주의 수중에서 빼앗아 국왕에게 주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국왕 또는 그 대표자는 형사사건에 관해서는 범인에게 벌금을 과하고, 그 재산 또는 신체를 몰수하고(즉 노예로 만들고), 사형이나 장형(杖刑)을 과하여 그 면제를 해 주는 대가로 헌상금(獻上金)을 명령하였다. 또 민사사건에서는 많은 수수료를 내지 않는 자에게는 재판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높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였다. 이 때문에 재판권의 소유를 둘러싸고 국왕과 영주 사이에 자주 분쟁이 일어났으며, 또 재판권을 얻은 영주들 사이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재산권으로 매매거래하는 자도 많이 출현하였다. 또한 왕명을 받은 재판관이 순회할 때마다 도로에 잠복하여 습격하는 자도 있어서 국왕에 의한 재판권의 확립에는 상당히 장기간의 반항사(反抗史)가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영국에서 12세기의 왕 헨리 2세에 대한 재판권 통일정책은 왕권의 신장과 더불어 배심제도의 기원으로서 특히 대표적인 것이다. (5) 영국 ―― 헨리 2세 이전의 영국에도 윌리엄 1세(정복왕)의 정복 이래 이미 재판권의 집중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왕 헨리는 이것을 배심제도와 교묘히 결부시켜 드디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든 역사적 거인이었다. 즉, 거의 재판관은 지방에 순회할 때마다 중요한 성시(城市)에서 재판소를 열고 그 때까지 밀려 있던 범죄자를 소환하여 이웃에 사는 12명(24명, 36명이라는 식으로 12의 배수로 된 때도 있다)에게 얼굴을 보임으로써 피의자의 범인 여부를 물은 다음, 12명 전부가 일치하여 범인이라고 증언하면 벌금·사형·법외선고(法外宣告:outlaw, 어떤 사람에 대하여 법적 보호를 거절하는 것, 즉 재산을 몰수하고 범인의 신체를 노예로 만드는 것) 등의 형을 과하도록 하였다. 또 토지를 빼앗겼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점유회수소장(占有回收訴狀:assize of novel disseizin)이라는 소장을 팔고 그 소장에 의하여 과거 1년내에 침탈된 토지의 점유회수를 제소한 사건이 있으면 이것 역시 12명의 이웃사람들을 소환하여 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면 침탈자는 침탈지를 반환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당시의 상태에서는 배심원은 아직 일종의 증인이었다. 그러나 이웃사람들에게 평판이 나쁜 사람들은 인기투표적으로 범죄인이라고 선고되기도 하고 토지 침탈자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으므로 배심재판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사람의 신체에 무거운 철괴(鐵塊)를 올려놓고 식사를 주지 않는다는 방법으로 배심수락을 강요하는 등 제도 자체가 몹시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배심은 증거재판의 일종이며 신판(神判)이나 결투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는 것, 또한 1215년의 라테란 공회의(公會議)에서 교회가 승직자의 신판입회를 금지한 것과도 관련하여 낡은 재판방법을 대신하여 가장 유력하고 통상적인 재판방법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 국왕은 재판에 의하여 수입을 올릴 수 없는 사건, 예컨대 빈민의 사소한 범죄 등에 대해서는 1327년의 입법 이래 지방의 향신(鄕神)중에서 선출되는 치안판사의 재판에 맡겼으므로 영국인의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귀족·지주·부농층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배심제도의 발달에 관해서는 아직도 보충할 것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언제부터인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배심원이 직접적인 증인이 되지 않고 배심원의 면전에 증거가 제출되고 배심원이 그 증거를 보고 판단하는 길이 열린 점, 또는 1367년의 어떤 익명(匿名)의 판결에서 12명의 배심원 중 1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관은 유죄의 판결을 할 수 없다고 확정된 점(그 대신 동의하지 않은 자는 빨리 다른 자와 의견을 일치시키도록 12명이 모두 감옥 속에 갇혀 2일간 음식이 단절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07년부터 사건의 판결에 의하여 재판관은 배심원의 의견이 자기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심원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된 것 등은 특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배심재판방식이 확정된 후에도 왕은 역시 최종의 구제자라는 사상이 남아 있어서 그 때문에 민사사건에 관해서는 대법관재판소(Court of Chancery)의 발생을, 또 형사사건에 관해서는 성실청(星室廳) 재판소(Court of Star Chamber)의 발생 등을 촉구했다. 전자는 배심원에게 위압적인 힘이 있고 호족(豪族)을 피고로 하는 소송, 분쟁의 내용이 극히 미묘하고 배심제도에 따르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소송 등에 관하여 왕에게 직소하는 자가 있어서 비롯된 것인데, 왕은 이 직소를 대부분 성직자였던 대법관(Lord Chancellor)과 상의하여 처리한 것 같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14세기 전후에는 대법관의 재판소가 거의 독립하여 통상재판소의 재판에 대해서도 만일 승소자가(통상재판소의) 판결을 집행하였으면 무거운 벌금을 과하는 관례가 성립하였다. 비서장관은 결국 일종의 재판적 관리가 되고 그의 재판소는 대법관 재판소 또는 형평법 재판소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성실청 재판소도 원래는 왕실 속에 있는 별의 그림을 그리던 일실에서 왕이 중신들을 모아놓고 국무를 본 데서 유래한 것인데, 특히 15세기 후반 이후 1489년의 성실청 재판소법(Act pro camera Stellata, 1487) 등이 재판소를 법적으로 확정하고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제정하는 칙령(勅令)으로서 정치범인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소로 변하였다. 성실청 재판소의 역사는 이 때문에 튜더·스튜어트의 두 왕조에 의한 정치적 억압과 결부시켜서 이해되고 청교도혁명 직전에 해당하는 1641년에 폐지되었는데 그것이 미친 영국 국정에 대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재판제도는 이와 같이 몹시 복잡한 것이고 재판소마다 적용법규가 달랐었는데 드디어 1873년의 재판소법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최고재판소에는 왕좌(王座) 재판부(裁判部), 대법관 재판부 등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명칭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현행의 영국재판소법은 그러한 의미에서 재판제도사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73년의 재판소법 성립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서 통일적 재판소 성립사가 숨겨져 있었다. (6) 프랑스, 독일 ―― 이상과 같이 영국의 재판제도가 아주 일찍부터 국가적 통일의 수단으로 배심제와 치안판사제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과 비교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재판제도는 인민의 재판 관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왕국의 관리로 임명된 그라프들이 왕권의 약화에 편승해서 재판권을 사유화하고 자기의 권리로서 그것을 행사하는 사이에 그들도 또 봉건영주화되었다. 국왕이 이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취한 것은 주요도시에 고등법원이라는 재판소를 설치하고 이 재판소에 대하여 영주재판소 판결의 상소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 특히 파리의 고등법원에 대해서는 전국의 고등법원에서 적용해야 할 법규를 등록하는 권리를 주어 동재판소에 등록되지 않는 법률은 재판시에 적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던 결과 법규의 등록을 요구하는 국왕과 거부하는 고등법원 사이에 가끔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루이 14세가 '나는 국가다'라고 한 것은 왕명에 거역하는 파리의 고등법원에서 행한 발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영주재판소 위에 고등재판소라는 제도를 두고 그 재판관을 가끔 평민 중에서 임명하고 귀족의 지위(법관귀족:nobless de robe)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귀족이 됨으로써 반대로 왕과 대립적 입장을 취하였고, 근대적 통일 재판소가 완성함에 있어서는 프랑스 혁명을 지나 나폴레옹 법전까지 더듬어 가야만 했다. 프랑스와 비교하여 독일에서의 국가재판제도의 발달은 더욱 지연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독일에서도 1495년에 이르러 제국재판소의 설치를 보았는데 이 재판소는 주로 각 방(邦) 사이의 분쟁을 재판하는 기관이며 직접 민사·형사사건을 재판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또 영국, 프랑스에서는 국왕권에 의한 국가통일이 빨리 진행되었지만 독일에서는 18세기 말까지 300을 넘는 독립된 영방(領邦)이 있고 각 영방이 자기 영방내의 재판을 관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주재판소의 권한이 대단히 강하고 또 재판권 자체가 재산권으로 매매까지 행해졌던 정도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재판제도의 통일이 1871년의 독일제국의 통일 후까지 남겨진 것은 당연했다. 그와 더불어 이렇게 만들어진 재판제도가 영국형 배심제도도 아니고 중세형의 삼심제도도 아니라 순관료적 재판제도가 되는 것도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각국 재판제도의 특질
편집各國裁判制度-特質
현재의 재판은 언제나 국가기관으로서의 재판소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다.
(1) 배심제를 채택하는 제국 ―― 영국 및 영국법을 모방한 미국의 재판제도에 따르면 경미한 치안관계사건 및 해사(海事), 기타 특수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배심제도가 원칙으로 되어 있다. 물론 영법에 있어서의 배심제는 이것을 명문에 의하여 확립한 헌법상의 규정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제는 관습상 영국헌법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서 이것을 움직인다는 것은 현재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곤란하다. 또 미국에서는 합중국헌법 제3조 제2절 제3관(款)에 의해 "모든 형사사건은 탄핵소추(공무원의 파면을 목적으로 하는 소추)를 제외하고 배심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적어도 형사사건에 관한 한 배심은 헌법상 강제되고 있다. 배심이란 그 토지에 거주하는 공민 중에서 관례상 12명의 배심원이 선정되어 어떤 사람에 관한 소추사건의 증거를 판단하고 유죄 또는 무죄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배심제는 전문적인 법률가가 아닌 사람에 의하여 행해지므로 당해 사건에 적용되는 법규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재판관의 임무이다. 또 배심원의 판단 결과 유죄로 결정한 때에는 어떠한 형벌을 과하는가도 법규의 범위내에서 보통 재판관이 행한다. 그러나 배심제는 원래 증인제도의 변형이었으므로 피소추자는 재판이 개시될 때 검찰관으로부터 소추된 사항의 유죄를 인정하는가의 여부를 물었을 때 자진해서 '유죄'라고 말하지 않으면(이것을 어레인먼트:arraignment:罪狀認否節次라고 칭한다), 가능한 한 객관적 증거를 제출하여 그것을 기초로 유죄·무죄의 판단을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피고인의 공판정 밖의 자백조서를 유치의 증거로 하여 법정에 제출하는 일이 많다고 보여지는데, 영국에서는 법정 밖의 자백서로서는 별로 신빙도가 없는 것 같다. 또 증거력이 있는 자백조서는 어디까지나 임의로 공술된 것이어야 하며 고문의 의심이 있을 때는 물론, '빨리 자백하면 귀할 수 있다' '자백하면 형이 가벼워진다' 등 어떤 이익과 교환으로 한 자백도 증거가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2) 배심제를 채택하지 않는 제국 ―― 그런데 비배심(非陪審)의 제국에서는 민사·형사의 쌍방에 걸쳐서 사실의 인정, 법규의 적용이 모두 직업적 재판관에 의하여 행하여지도록 되어 있다.
유럽 제국에서는 형사재판은 검찰관을 한 쪽 당사자로 하고 피고인을 다른 쪽 당사자로 하는 민사소송형 재판의 절차가 보편화되고, 재판관은 쌍방의 주장을 들어서 유죄·무죄의 판단을 해야 한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전통적으로 범죄 수사관으로서의 경찰관·검찰관의 지위는 피의자·피고인의 그것보다 강력하고, 장기 구류나 자백강요 등의 실례는 아직도 근절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재판제도에서 당사자 주의의 원칙은 한 쪽에서는 재판소의 독립을 도모하고 다른 쪽에서는 범죄의 피의자·피고인의 안전을 보장하여 함부로 자백을 강요당하거나 불충분한 증거에 의하여 처벌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달성된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발달상 당연히 도달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