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칸초네

라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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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to Rascel(1912- ? ) 제2차대전 후에는 무대나 영화 등에서 배우로서 활약하였으나, 칸초네 분야의 원로적(元老的)인 존재로서 그 개성적인 노래와 작곡의 인기는 추호도 떨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 드러머로서 데뷔하였으나 쇼맨으로서의 선천적인 재능과 감각이 인정되어 뮤직홀의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였다. 노래와 함께 배우로서의 재질도 뛰어나 인기가 높았다. 그가 작곡한 칸초네에는 <아리베데르치 로마>, <로만티카>, <나폴리는 연인> 등의 히트가 있다. <로만티 카>는 1960년에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 직접 불러 우승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무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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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o Murolo(1912- ? ) 오래도록 활약한 최연장자의 현역 칸초네 가수로서, 옛 나폴레타노를 그대로 전해주는 귀중한 존재. 수많은 나폴레타노의 가사를 남겨준 시인 에르네스토 무롤로의 아들로서 18세쯤부터 칸초네를 불렀다. 미다 카르테토라는 그룹을 편성하여 몇 해 동안 유럽을 연주여행한 뒤에 나폴레타노 보급의 필요성을 느낀 무롤로는 본격적인 나폴레타노를 부르기로 결심, 여기에만 힘썼다. 전통적인 이러한 칸초네의 낡은 것, 잊혀진 것에까지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대중으로 하여금 그 가치를 재인식케 한 그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었다.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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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lla Pizzi(1921- ) 현재는 이탈르무지카에 속하는 가수. 1943년에 데뷔하였으나, 스타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51년에 산 레모 페스티벌이 열린 뒤부터이다. 우선 첫번째에 <꽃을 고맙게>를 불러 제1위와 제3위를 획득, 다음해의 두 번째는 1위에서 3위까지의 상을 독점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칸초네 분야에서는 레지나(여왕)라고 하면 그녀를 가리킬 정도로 오랫동안 인기를 독점하였으며, 2차대전 후에 급속히 활기를 보인 칸초네의 분야를 지배하였던 실력과 인기를 아울러 갖춘 여성가수이다. 콘트랄토의 미성(美聲)이며, 그 노래는 스케일이 큰 것으로 정평이 있다.

브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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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io Bruni(1921- ) 칸초네 나폴레타노 가수 중 뛰어난 세 사람 가운데 톱으로 손꼽히고 있다. 1945년에 데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인기는 변함이 없다. 산 레모 페스티벌에도 자주 나왔으며 특히 1962년에 부른 <탱고 이탈리아노>와 <곤드리 곤드라>는 2위와 3위를 획득하여 관심을 모았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나폴레타노 특유의 창법이 매력적이다.

타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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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aano Tajoli(1925- )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쓰지 못하였나 선천적인 미성과 노래에 대한 정열로 모든 것을 극복하여 스타가 되었다. 감미로운 멜로디의 전성기였던 칸초네의 세계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나 나중에 가 차차 노래에 짙은 심각성이 깃들여, 아름답게 멜로디를 부른다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테크닉도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는 1961년에 <알 디 라>를 불러 우승하였다. 이 밖에도 <맘마>, <아모레 미오>, <꼭 껴안아> 등의 히트가 있으며, 후에는 실업가로 활약하였다.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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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io Villa(1926- ) 로마의 빈민가 출신으로,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인정되어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첫번 히트인 <르나 로사>로 일약 스타가 된 이후 실력과 인기는 조금도 쇠퇴하지 않은 채 '칸초네의 왕'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는 도합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1955년의 <슬픔이여 안녕>, 1957년의 <기타의 줄>, 1962년의 <아디오 아디오>, 1967년의 <사랑의 이별> 등 인기 곡목이 많다. 1963년에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칸초네 가수로서 '카발리에레'의 칭호를 받기도 하는 등 그의 노래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머무르지 않고 노래의 내용을 표현하는 테크닉의 완성마저 엿볼 수 있었다.

모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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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Modugno(1928-1994) 작곡가 겸 인기가수로서, 단순한 스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칸초네를 세계의 파퓰러로 만든 공로자라고도 하겠다. 시칠리아 태생으로 1952년에 신인 콘테스트에서 그의 재능이 인정되어 데뷔하였다. 첫취입은 1953년의 <황새치의 사랑>이었으며, 히트는 1956년의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 부른 <뮤제트>였다. 또한 1958년의 산 레모에서 우승한 <보라레>는 자작(自作) 자연(自演)이며, 이것은 모두뇨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걸작이기도 하였다. 이어 1959년에 <차오 차오 반비나>, 1962년에는 <아디오 아디오>, 1966년에는 <사랑은 한없이>로 네 번이나 우승하는 등 클라우디오 빌라와 같은 기록을 남겼고 있다. 박력이 있고 인간적인 체취가 풍기는 매력적인 노래를 불러 새로운 칸초네의 분야를 이룩한 이색적인 스타의 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피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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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 Fidenco(1933- ) 현대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리듯이, 애수가 깃든 목소리로 시를 읊듯이 노래를 불렀다. 로마 태생으로 본명은 도메니코 코라로시, 부친은 건축가였다. 로마 대학의 법과를 졸업하였으나 재학중부터 노래를 좋아하였다. 27세 때 영화 <태양의 유혹>의 주제곡을 취입, 크게 히트하여 잇달아 영화 주제곡을 부르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사(情 事)>, <사랑의 노래> 등으로 스타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혔다.

폰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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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y Fontana(1934- ) 마르케 지방의 카메리노에서 태어났다. 대학의 상학부(商學部)를 졸업한 뒤 재즈 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재즈를 배웠으며, 1959년에 로만뉴올린즈 재즈 밴드에서 가수로 데뷔하였다. 1961년에 RCA 이탈리아나 레코드와 계약, 수많은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알코올>이라는 곡이 1961년도의 레코드 금상을 획득하여 스타의 자리에 오른 그는 리듬감이 있는 재즈조(調)의 곡에 장기가 있었다. 1965년에는 RCA 이탈리아나에서 체트라레코드 회사로 이적(移籍)하였다.

바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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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nella Vanoni(1935- ) 밀라노 태생으로, 유복한 실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영국의 일류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라노 소극장의 연극학교에 들어가 여배우로서 활약하였다. 뮤지컬에 기용된 뒤부터는 노래에 인기가 집중, 후에는 칸초네 가수로나 뮤지컬 배우로서도 스타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964년에는 나폴리 페스티벌에서 <멋진 당신>을 불러 우승하는 등 테크닉의 충실감이 엿보였다.

파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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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o Paoli(1935- ) 몬팔코네 태생으로, 제노바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작사 및 작곡에 소질이 있어 독특한 곡을 만들어 음악출판사에 팔러 다녔다. 그러는 동안 <암코양이>가 유명해지고, 또한 시를 들려주는 듯한 그의 노래가 관심을 끌어 리코르디 레코드의 전속이 되었다. 1960년에 <행복은 가득히>를 작곡, 미나가 불러 크게 히트하였다. 한편 자살미수사건을 일으키거나 가짜수염을 다는 등 야릇한 가수이기는 하나 인텔리층에 인기가 높았다.

마르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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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nda Martino(1936- ) 북이탈리아의 우디네에서 태어나, 소녀시절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다. 1955년에는 이탈리아 방송협회의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데뷔하였다. 나폴리에 정주하면서 칸초네 나폴레타노를 전문으로 부르는 보기 드문 여성가수로서 이색적인 활약을 계속하였다. 예스러운 것으로부터 비교적 새로운 것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나폴레타노는 기존의 관념을 타파한 창법으로 대중의 애호를 받았다. 옛 노래에 새로운 시대의 숨결을 불어넣어 여유있게 감미로운 무드를 자아내면서 노래하였다.

쿠르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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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y Curtis(1936- ) 본명은 로베르타 코르티. 밀라노 태생. 1956년에 에밀리오 바시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어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다음 해 트리에스테에서 카르테트 라다르의 리더인 클라우디오 첼리를 만나 결혼하였으며, 이후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녀의 노래는 더욱 성장, <곤돌리에>를 불러 히트하였다. 1961년은 그녀에게 영광의 해였다.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 <아르 디 라>를 불러 우승하였으며, 나폴리 페스티벌에서는 <당신은 우울해>가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영광을 누렸기 때문이다. 신선한 아름다운 목소리와 테크닉이 완벽한 노래는 스타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켜주었다.

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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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y Dallara(1936- ) 본명은 안토니오 라르델라라고 하며, 남이탈리아의 캄포바소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미국의 재즈에 열중했던 그는 밀라노의 나이트 클럽 '산타 테클라'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발탁되어 레코드 회사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에 로큰롤의 비트를 도입하여 이탈리아 록의 기반을 만든 칸초네의 역사에서 큰 공헌을 한 가수이다. <코메 푸리마>가 크게 히트하여, 2차대전 후의 칸초네 분야에 활기를 띠게 하였으며 흔히 '주크 박스의 왕'으로 불렸다.

칠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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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usto Cigliano(1937- ) 칸초네 나폴레타노 가수 가운데서 손꼽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 나폴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그는 계속해서 나폴리에서 활약하였다. 열정적인 바리톤으로 나폴리조(調의)창법이 매력적인 가수이다. 또한 그는 작곡도 하여 <그대, 그렇지 그대야>, <달 아래 별 아래> 등 나폴레타노의 이름난 작품들이 있다.

도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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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Dorelli(1937- ) 남이탈리아의 메다에서 왕년의 명가수 니노 다우렐리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 곳 음악학교에서 배웠다. 파시 페이스의 인정을 받다, 브로드웨이 또는 영화에 시나트라 등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1958년과 1959년에 계속하여 산 레모 페스티벌에 출전하여 <보라레>, <차오 차오 반비나> 등을 불러 우승하였다.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비교적 이탈리아의 체취가 없으며, 자연스러운 매력과 훌륭한 노래솜씨로 인기가 높은 베테랑 가수. 산 레모에는 일곱 번 출전하였으며 1967년에는 <눈물에 피는 꽃>을 불러 관심을 모았다.

제르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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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o Germani(1937- ) 본명은 레모 스페오니라고 하며, 1937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로큰롤 페스티벌에서 우승하여 데뷔하였다. 레코딩은 상당히 늦은 편으로 25세 때였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 <사랑의 백야(白夜)> 등을 취입, 신선한 리듬감으로 인기를 모았으며, 핸섬한 용모와 젊음이 넘치는 칸초네로 인기가 상승하여, 1963년에는 연속 4회의 히트를 내는 등 그 활약이 화려하였다. 또한 그 해에 남성가수 랭킹 4위에 올랐으며, 역시 같은 해에 산 레모 페스티벌에의 등용문 페스티벌에서 입상하고, 다음해에는 산 레모에서 <오늘밤은 안돼>를 불러 입상하였다. 이후로 해마다 산 레모에서 활약하였다.

첼렌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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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o Celentano(1938- ) 록(rock)이 지지받기 어려운 이탈리아에서 단 하나뿐인 록의 하느님으로 불렸다. 원래는 시계공장의 직공이었으나 발탁되어 1961년 이후 계속하여 베스트셀러의 톱을 장식하였다. 1961년의 산 레모에서 제2위가 되었던 <2만 4천번의 키스>는 자신이 만든 록으로 크게 히트한 곡이다. 1964년에는 크란 첼렌타노라는 레코드 회사를 설립한 바 있다.

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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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va(1939- )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정열적인 칸초네의 여왕 밀바는 이탈리아의 코오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5년 그녀는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RAI(이탈리아 국영방송국)에서 개최하는 콩쿠르에 출전하여 우승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 후 칸초네 가수로 목표를 결정하고 1959년 에디트 피아프의 곡인 <미롤드>를 리바이벌하여 대히트시켜 인기 가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는 1961년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하여 <서랍 속의 바다>로 3위에 오른 이후 빠짐없이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하여 모두 입상하는 경력을 쌓았다. 이어 그녀는 히트곡 <비련>을 발표한 후 연극에 관심을 가지면서 1968년 실험극 <피터 와이즈>에 출연하여 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72년 내한하여 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1970년대 후반 독일로 건너가 1980년에 키보드 주자 반젤라스와 함께 독일어로 노래한 Ich Hab' Keine Angst를 발표하여 과 를 히트시켰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Tango, Brecht, Milva Singt Plaf 등을 내놓아 오늘날까지 칸초네의 여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도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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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o Donaggio(1941- ) 부라노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19세 때 캄보 밴드를 조직하였다. 1961년의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 <코메 심포니아>를 자작(自作) 자연(自演)하여 6위에 입상하였다. <슬픈 사랑의 테마>, <조바네 조바네>, <푸른 하늘에 살자>, <이 사랑으로 살아> 등으로 매년 산 레모에서 입상을 계속하였다. 노래는 약동적인 스타일로서, 어느 작품이나 모두 음악적으로 뛰어났는데, 전위적 경향이 짙었다.

자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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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 Zanicchi(1941- ) 북이탈리아의 레조 네에밀리아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그 곳 콘테스트에서 우승, 다음해의 카스트로카로 신인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6년에 산 레모 페스티벌에 나가 <이별의 밤>을 불렀을 때였다. 이 레코드는 크게 히트하여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1974년에 <안녕도 하지 않고>를 불러 명실공히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여배우기도하며 선천적인 미모와 미성을 곁들여 완벽한 테크닉을 지닌 스타이다.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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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a(1942- ) 본명은 미나 마치니로서, 크레모나 태생. 오페라 가수가 되고자 하였으나 14세 때 로큰롤에 매혹되어 데뷔하고 말았다. 1960년에 <달빛 아래의 나폴리>를 불러 크게 히트하였으며 또한 <행복이 가득>의 히트로 '여왕'이라는 애칭을 듣게 되었다. 우르트라레(絶唱型)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듯이 그녀의 노래는 스케일이 큰 것으로도 유명하며, 또한 사생활에서도 화려한 화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출연료도 최고라는 유명한 톱 인기가수였다.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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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by Solo(1945- ) 신진 인기가수로서, 산 레모 페스티벌이 낳은 스타이다. 본명은 로베르토 사티로서 로마에서 태어났다. 프레슬리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프레슬리식 로큰롤을 불렀다. 1964년에 산 레모 페스티벌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불러 입상, 이 레코드는 놀라울 정도로 팔려 일약 인기스타의 자리에 올라 10대의 우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자신이 작곡한 <그대에게 눈물과 미소를>을 불러 우승하였다. 저음(低音)이 매력이며 테크닉도 우수하다. 1965년과 1966년에도 <사랑은 한없이>로 다시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모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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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ni Morandi(1945- ) 볼로냐 태생. 유명한 작사가 미리아치의 추천으로 RCA 이탈리아나에 입사, <데이트 타임>을 취입하여 데뷔하였다. <선라이트 트위스트>로 히트하였으며 강렬한 리듬의 곡을 잘 다루어, 1963년에 부른 <당신에게 무릎을 꿇어>가 공전의 대히트를 하였다. 이후 발라드를 다루었으며, 젊음이 넘쳐흐르는 신선한 창법으로 사랑을 받았다. 신진가수 가운데서 인기의 톱을 차지하여 스타의 자리를 굳혔다.

고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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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ma Goich(1945- ) 1963년이 신인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리코르디 레코드사에 입사하였다. 1964년에 지중해 페스티벌에서 <사랑에 눈떠>가 우승하여 관심을 모았으며, 다음 해인 1965년에는 산 레모에서 <꽃피는 언덕에 눈물 흘려>를 불러 입상하였다. 자연스럽고 신선한 목소리와 친근감을 주는 창법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테크닉도 우수하였다.

파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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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a Pavone(1945- ) 북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출생. 10세 때 이미 노래 콘테스트에 입상하였다. 1959년, 자기가 사는 거리의 극장에 출연하였으며, 1960년이 되자 나폴리라든가 밀라노까지 순회하며 공연한 바 있다. 1962년에는 아리시아에서의 신인 콘테스트에서서 우승, 유명한 프로듀서 테디 레노에게 스카우트돼 RCA 이탈리아나 레코드와 계약하였다. 데뷔는 <사랑이 풋볼>이며, 계속해서 레코드가 히트, 순식간에 톱에 올라섰다.

카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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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rina Caselli(1946- ) 모데나에서 태어나, 19세 때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 비틀스의 레퍼토리를 부르며 클럽 등에 출연하였다. 1963년에 카스토로카로 신인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MRC 레코드사에 들어갔으나, 1965년에는 CGD로 이적하였다. 1966년에 산 레모 페스티벌에서 <청춘에 살다>가 입상하여 경이적인 히트를 보였다. 박력이 있고, 열정적인 노래로 젊은층에 인기가 대단한 가수이다.

마르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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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la(1952- )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생. 1969년 칸타지로의 신인 그룹에서 <어릿광대>를 불러 데뷔했다. 1971년에 베네치아 음악제 은콘드라 부문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불러 2위가 되고, 1972년 산 레모 음악제에 <푸른 산맥>으로 입상, 크게 히트했다. '페스티벌 퍼얼'에서 우승, '카초니시마'에서는 신인으로는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여 4위가 되었는데, 결승전에서 부른 <미소하는 문>이 크게 히트했다. 그 뒤부터는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하였고 1973-1975년도 베스트셀러 여성 1위가 되었다. 사랑스런 동안(童顔)에 작은 몸매, 터질 듯한 육체미를 과시하면서 부르는 박력있는 노래는 일품이었다.

프라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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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nna Fratello(1951- ) 이탈리아 프리에 출생. 1969년 산 레모 음악제에 참가 예정이던 안나 이덴티치가 자살 미수사건을 일으켜 참가하지 못하자 대신 무명의 신인이었던 그녀가 참가하여 <기차>를 불러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베네치아 음악제에서 <성녀의 탄식>으로 은콘드라상을 받고 크게 히트했다. 아름다운 용모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트>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1970년 여름 <장미와 양초>, 1972년 <여심(女心)> 등의 히트곡이 있다.

바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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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io Baglioni(1951- ) 이탈리아 로마 출생. 1968년 테디 레이노가 주최한 신인 콘테스트 '페스타 데리 시코노시티'에서 2위로 입상하고, 1970년 여름 디스크 음악제의 곡 <푸른 동화>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3년 뒤인 1973년 말 <이 작고도 큰 사랑>이 크게 히트하고부터이며, 1974년에는 <그리고 그대>, <자장가> 등이 히트하여 부동의 위치를 굳혔다. 그 밖에도 산 레모 입선작 <길은 외줄기> 등 많은 곡을 다른 가수를 위해 작곡했다. 1975년에도 <토요일 오후>가 크게 히트 인기 정상을 누렸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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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1952- )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생. 본명은 나다 마라니마. 14세 때에 아마추어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RCA에 스카우트되었다. 그러나 너무 어려서 어울리는 곡을 얻지 못하고 2년이 지났다. 1968년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고, 1969년 산 레모 음악제에 처음 참가하여 <왜 이리 추워>를 불렀다. 입선에 그치는 성적이었으나 우승곡을 능가하는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연말의 '칸초니시마'에서도 9위로 랭크, 그 해의 신인이 되었다. 1970년에는 산 레모에서 <아빠, 엄마에게 말해줘요>로 입상, 1971년에는 <사랑의 집시>로 우승, 1972년에는 <사랑의 진실>로 3위를 기록했다.

질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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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da Giuliani(1954- ) 이탈리아 캄포바소 출생. 1972년에 신설된 산레모에의 등용문 콘테스트 '산 레모에의 목소리'에서 우승한 첫번째 가수이다. 1973년 산 레모 가요제에서 <애타게 기다리며>를 불러 5위로 입상, 대형신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여름 디스크 음악제에서 <내일에 불타다>를 불러 입상했고, '칸초니시마'에서도 <사랑에 살다>를 불러 준결승까지 올랐다. 그 밖에도 <사랑의 흐름 속에서>, <이별을 하고> 등의 히트곡이 있다.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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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a Greco(1954- ) 이탈리아 미냐네고 출생. 1972년 아마추어를 위한 콘테스트의 '산 레모에의 목소리'에 출전하여 1974년에 입상했다. 산 레모 음악제에 첫 출전하여 <여름밤>을 불러 입상했고, 대담하고 확실한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가을 베네치아 음악제에서는 신인 2위로 입상, 은콘도라상을 받았다. 1975년에 다시 산 레모 음악제에 참가하여 <갈림길>을 불러 4위에 입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