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웨스턴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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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ie Rodgers(1897-1933) 기타를 연주하며 작사·작곡도 한 다재(多才)한 가수. 1920년대 후기부터 1930년대 초기에 걸쳐 미시시피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민요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켜 인기를 부른 C&W의 선구적인 구실을 한 사람이다. 백인의 컨트리 블루스 싱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흑인음악적 요소가 강하며 레퍼토리도 <프랑키와 조니> 외에 흑인계의 것이 태반을 차지하였다. 스타일 면에서 살펴보면 초기에는 기타의 대사 낭송을 곁들인 연주, 중기는 딕실랜드 재즈풍을 배경으로 하여 부른 것, 말기는 현대의 컨트리 스타일과 비슷한 것이 많다. 기타를 연주하던 시기에는 데뷔곡인 우아한 슬로 왈츠 <슬리프 베이비 슬리프>, 딕시조(調) 반주가 있는 것으로는 화물차를 보금자리 삼아 각지를 방랑하는 호보의 민요를 편작(編作)한 <웨이팅 포어 어 트레인>, 프리 컨트리 앤드 웨스턴조(調)의 말기 작품으로는 <복숭아가 익을 때>, <내 마음의 어머니> 등이 있다. 모두 13번까지 있는 '블루 요델' 시리즈는 지방의 민요와 흑인 블루스 및 스위스 요델의 셋을 합성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와이언조(調)의 <그리운 남쪽 해변>, <오직 하나의 장미>도 대표적 명창으로 손꼽혔다. 또한 이색작(異色作)으로는 오리지널 카터 패밀리와 공연한 4곡 <카터 패밀리를 맞아>, <카터 패밀리를 찾아>, <어째서 눈물을…>, <멋진 거리> 등을 들 수 있다.

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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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Monroe(1911- ? ) 노래, 플랫 만돌린, 작사·작곡. '파더 오브 블루그래스(father of bluegrass)'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창시자. 켄터키주에서 태어났다. 한동안 형인 차리와 '몬로 브러더스'를 만들었으나, 1939년에 '블루그래스 보이스'를 결성하였다. 1947년경 레스터 플래트, 알 스크라그스 등의 협력을 얻어 이 스타일을 완성, 이후 보급과 발전에 힘을 다하였다. 플래트 앤드 스크라그스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지미 마틴, 마크 와이즈만, 소니 오즈본, 돈 레노 등 현재의 블루그래스계(界)의 1급 아티스트의 태반은 몬로의 문하생이었다. 명곡으로는 빅터 시대(1939-1942)에 <뮬 스키너 블루스>, 컬럼비아 시대(1945-1948)에 <켄터키 왈츠>, <켄터키의 푸른 달>, <추억의 발자취>, 레스터 플래트와의 듀엣으로 <켄터키가 그리워>, <혼자 있는 산장(山莊)에서>, <어머니는 잠들 뿐>, 그리고 데카 시대(1948- )에 와서 <펜 아저씨>, <로하이드>, <유 올 컴>, <카터 트라벨 온>, 거기에 <켄터키의 푸른 달>의 재취입 등이 있다. 고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그의 인기는 지금도 옛 팬의 기억에 생생한 바가 있다.

아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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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dy Arnold(1918- ? ) 노래와 기타. '테네시의 태양'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테네시의 태양에 감싸인 듯한 따스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따뜻한 정서와 풍부한 노래의 표정을 지닌 가수로서 C&W팬 이외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았다. 히트곡의 수도 가장 많았으며 빌보드지(誌)의 핫 컨트리 싱어스의 톱 텐에 뽑힌 곡은 70곡 가까이 된다. 아놀드 에디는 테네시주의 헨더슨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하워드 매크너트라는 피들러와 팀을 만들었으나 1940년인 22세 때 당시 인기 밴드인 피위 킹과 골든 웨스트 카우보이스의 가수로 채용되어 출세의 문이 열렸다. 1943년에는 직접 '테네시 프라우보이스'를 결성, 다음 해인 1944년 말에는 RCA 빅터에 첫취입을 하였다. 1948년의 <장미의 꽃다발>을 절정으로 하는 그 전후 3년 정도가 제1기 황금시대라고 하겠다. 이 기간에 그는 수많은 발라드의 히트로 컨트리 발라드의 붐을 일으킨 한편 자신도 '킹 오브 컨트리 발라드'라는 이명(異名)을 자칭하였다. 1954년의 <알고 싶지 않아요>를 계기로 컨트리와 파퓰러의 중간쯤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으며 그 노력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크게 열매를 맺어 <추억의 발라드>, <두 사람의 발라드>, <사랑은 멀리> 등의 연속 히트로 1966년과 1967년에 걸쳐 제2기 황금시대를 쌓았다. 1966년 말에는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에 사상(史上) 일곱 번째로 들어가는 음악계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나는 C&W이면서도 팝이 될 수도 있는,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듯이, 그 활약은 폭이 넓었으며 <모리 달링>, <에니 타임> 등은 옛 팝송을 리바이벌시킨 것이었다.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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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k Williams(1923-1953) 작사·작곡도 하는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사망후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뿌리 깊은 잠재성의 인기를 지닌 거성(巨星)이다. 'C&W의 신약성서', '힐빌리 셰익스피어' 등 수많은 찬사에 감싸여 있다. 앨라배마주의 빈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5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6세쯤부터 기타를 다루었다. 당시 그에게 기타와 노래를 가르친 사람은 티토트라는 흑인의 스트리트 싱어였으며 행크 윌리엄스는 이 흑인에게서 흑인음악의 주요 요소를 배우는 동시에 깊은 인간적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훗날 행크의 음악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3세 때 자신이 직접 밴드를 조직, 로이 에이카프를 동경하여 C&W 가수를 지망하였다. 1948년에는 에이카프 로즈 악보출판사와의 계약이 성공하여 전속가수가 되었으며 또한 로즈 사장의 후원으로 일약 톱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53년 1월 1일 새벽, 연주여행의 차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약 4년 동안 음악계의 풍운아로서 활약하였으며 1964년에는 전기(傳記)영화 <행크 윌리엄스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의 외아들 란달은 행크 윌리엄스 주니어라 하여 부친과 같은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특색은 컨트리 뮤직의 전통과 흑인음악의 요소를 자신의 강렬한 개성으로 정묘하게 믹스시켰다는 점에 있다. 흑인의 블루스를 자기 나름의 스타일로 재생시킨 이른바 행크 블루스의 대표곡으로는 <러브시크 블루스>, <롱 곤론섬 블루스>, <혼키 턴크 블루스> 등이 있다. 또한 흑인적이며 끈질긴 창법으로 배에서 괴로움을 토해내듯이 노래하는 걸작으로는 <콜드 콜드 하트>, <어쩔 수 없어>, <사랑에서 미움으로>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머 감각을 나타내는 노벨티 넘버로서는 케이즌 지방의 민요에서 멜로디를 빌린 <잔 바라야>, <헤이 굿 루킹>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개성을 억제한 격조 높은 발라드 <맨션 언 더 힐>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의 하나이다. <아이 소 더 라이트> 이하의 세이크레드 넘버는 일반적으로 전통색이 강하다.

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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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Reeves(1924-1964) 가수이면서 기타도 연주하고 작사·작곡도 하였다. 또 뛰어난 미성(美聲)을 갖고 내시빌 사운드의 챔피언으로서 군림하였으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텍사스주 파노라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야구선수였으며, 아나운서이기도 하였다. 1952년에 데뷔, 다음해인 1953년에 <멕시칸 조>로 스타가 되었다. 스타일은 1957년의 <4개의 벽>을 중심으로 크게 전후기로 나뉜다. 전기는 낭랑한 목소리로 부른 순수한 컨트리 스타일로서 '텍사스의 미성(美聲)'이란 평을 들었으며 후기는 달콤하고 점잖은 내시빌 사운드에서 팝 컨트리 스타일로 '차콜 그레이의 미성'이니 '젠틀맨 짐'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 전기(前期) 작품에는 <멕시칸 조> 이외에 <빈보>, <영더컴즈 어 사카> 등이 있으며, 후기의 대표곡으로는 우선 그로 하여금 파퓰러 가수로서 인정받게 한 <바람을 피우지 말라>(1959-1960), <메리 안>이란 제명으로 샹송이 되기도 한 모던 포크조(調)의 <눈보라의 노래>(1961), 프로테스트 송 같은 조용한 박력을 간직한 아름다운 발라드 <머나먼 북소리>(1966) 등을 들 수 있겠다.

로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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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 Robbins(1925- ) 노래· 기타· 작사· 작곡을 하였다. 리듬감이나 프레이징, 필링, 목소리의 매력 등 모든 것에서 결함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가수로서 특히 감정의 표현과 구사의 훌륭함은 놀랄 만하다. 가수로서의 그를 보면, C&W 필드로 로빈스와 맞설 만한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C&W뿐만 아니라 재즈, 하와이언, 라틴 등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넓은 폭을 지녔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애리조나주의 그렌딜 근방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노래하는 카우 보이>(진 오트리의 노래)에 매혹되어 가수가 되기로 작정, 1948년에 데뷔하였다. 1953년에 <울지 않을 수 없어>로 스타가 되었으며 1957년 <화이트 스포츠 코트>로 팝송 분야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엘 파소>(1959-1960)를 비롯한 모던 카우 보이 발라드조(調)의 것이 마치 트레드 마크처럼 되어 버렸으나, 이것은 말의 이해가 완전하지 못한 동양인으로서는 미국인만큼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후기 작품으로는 <검은 리본>과 <사랑의 역전승(逆轉勝)>(1966)이 있으며, 이러한 곡에서 들을 수 있는 상쾌한 리듬의 구사나 교묘한 창법의 소화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 때문에 '목소리에 눈물방울이 맺힌 사나이', '눈물 사나이' 등의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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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 Price(1926- ) 가수 겸 기타리스트. 첼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가진 텍사스 출신의 인기가수. '첼로키 카우 보이스'라는 베테랑만이 모인 밴드를 이끌고 있다. 직업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이며, 1952년쯤 되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히트곡으로는 <별을 보지 마오>, <리리스 미> 등이 있다. 1956년의 <클레이지 암즈>에 잇따른 일련의 히트로 단음(單音)의 피들, 스윙기한 스틸, 마운틴의 체취가 풍기는 듀엣을 특색으로 하는 정조(正調) 모던의 레이 프라이스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후에는 이 스타일에서 완전히 탈피, 프레이즈를 극단적으로 짧게 압축시켜 전체적인 리듬을 살린 샤프하면서도 쿨한 근대창법을 구사하였다. <클레이지 암즈>를 부를 무렵의 프라이스는 성실감과 컨트리 무드만으로 팬의 인기를 모은 듯한 느낌이 있다. 그의 스타일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걸작으로는 <제2의 여 자>(1965), <대니 보이>(1967)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밴드가 연주한 걸작 레코드로는 바디 에몬스의 스틸 기타의 흥겨운 <악마의 꿈>을 손꼽을 수 있다.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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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Jones(1931- ) 작사·작곡도 하는 기타리스트 겸 가수. 텍사스주의 뷰몬트에서 태어나 9세 때 기타를 익혀 12세 때에 작곡을 했다는 놀라운 조숙함을 보여 1953년에 데뷔하였다. 인기나 정조(正調) 모던, 또는 퍼스널리티의 점에서 흔히 벅 오언스와 비견되는 제1급 싱어로서 1955-1957년의 로카빌리 시대에 순수한 컨트리 스타일로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1962년부터 1963년까지가 절정기라고 하겠으며, 남성 컨트리 싱어 가운데에서 넘버 원의 영예(디스크 자키의 투표에 의하여)를 누리기도 하였다. 건강한 남성미와 컨트리의 체취를 풍기면서 밝고 정력적으로 노래하는 업 넘버에 <이제는 그대를 내 것으로>, <화이 베이비 화이>, 거기에 모던한 감각과 비트를 혼합시킨 쾌작으로서 <사랑의 레이스> 등이 있다. 이 밖에 뉘앙스 짙은 바리톤으로 독특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발라드류에는 <2층의 창에서>, <텐더 이어즈>, <론리 넘버>, <내 마음의 계절>, <아무것도 아니야> 등이 유명하다.

오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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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 Owens(1929- ) 가수이면서 기타리스트, 작사·작곡가. 1963년의 <액트 내추럴리> 이후 10여곡의 톱 원 히트를 연타한 코스트 컨트리(서해안과 모던 컨트리)의 인기가수. 텍사스주 셔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인스트루멘털리스트로 출발하여 토미 콜린스의 전성기에 그의 밴드에서 인기 있는 기타리스트로서 <왓 유 고투 두 나우> 등 콜린스의 히트곡에서 숨은 공로자의 구실을 하였다. 가수로서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의 <언더 유어 스펠 어게인>쯤부터이다. 모던한 감각과 약동적인 젊은 비트와 전통적인 컨트리 프레이즈를 아울러 지녔다는 점이 그의 특색이라 하겠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모던한 스타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겠으나 그의 노래가 풍기는 농도 짙은 향토색을 무시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그의 스타일을 이룩한 <액트 내추럴리>(비틀스에서도 다루어진 곡), 그리고 이와 흡사한 느낌이 드는 <말괄량이 아가씨>와 같은 샤프한 창법과 모던한 리듬감을 즐길 수 있는 비트류의 것 외에 <투게더 어게인>(1964), <크라잉 타임>(1965)과 같은 발라드 종류의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 후자에서는 스위트하면서도 강한 설득력을 지닌 깊이가 있는 연창(演唱)이 과연 거물답다. 또한 오리지널 히트는 아니나 그의 흥미로운 개성을 잘 음미할 수 있는 곡으로는 <트럭 운전수의 노래>, <라스트 댄스는 내게>, <헬로 트러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인스트루멘털의 빅히트에 그의 훌륭한 아내역인 단 리치의 엘렉키를 내세운 <바카르>(1965-1966)가 있으며, 이는 리버플 사운드를 교묘하게 컨트리로 소화시킨 걸작이라 할 수 있겠으며, 리듬이 보사노바풍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가 있다.

플랫 앤 스크러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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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tt & Scruggs 보컬 앤 인스트루멘털 그룹으로서 블루그래스의 왕좌적(王座的) 그룹. 빌 몬로가 블루그래스의 창시자라면 그들 시골의 산 구석에서 도시에까지 진출시켜 만인의 인정을 받게 한 것이 이 팀이라 하겠다. 레스터(가수 겸 기타리스트)는 1914년 테네시주에서 태어났으며, 들을수록 맛이 나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능숙한 멜로디의 구사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얼(5현의 밴조)은 1924년 노스캐롤라이나주 태생으로, 블루그래스 스타일의 주법을 만들어낸 악기의 명수이다. 두 사람이 모두 빌 몬로의 블루그래스 보이스에서 연마하는 동안 서로 뜻이 맞아 1948년에 독립, 포기 마운틴 보이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62, 1963년경부터는 팝 포크의 요소를 채택하여 '포크 블루그래스'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을 확립시켰다. 대표곡으로는 효성이 지극한 소년의 이야기인 <신문팔이 지미 소년>, 레스터와 마크 와이즈맨의 듀엣을 즐길 수 있는 블루그래스 발라드 <다시 만날 날까지>, 레스터가 저음으로 유머러스하게 부르는 TV영화 주제곡 <말괄량이 억만장자>, 그리고 포크 그래스적인 것으로는 <5백마일>, <나의 조국> 등이 있고, 얼의 밴조 곡으로는 <포기 마운틴 블레익다운>, <얼의 블레익다운>, <플린트 힐 스페셜>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