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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와 페르시아의 번영〔槪說〕 편집

샤푸르 1세의 사후, 한때 부진했던 사산 왕조도 4세기의 샤푸르 2세(재위 309

379) 시대에, 다시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 그 결과 쿠샨 왕국은 페르시아의 한 주(州)가 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에 빼앗겼던 아르메니아가 회복되었다. 로마와의 항쟁은 파르티아 왕국 이래 아르메니아를 둘러싸고 반복되어 왔었는데, 이제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교화(化) 성공과 콘스탄티누스의 개종(改宗)에 의해서, 로마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간섭은 한층 심한 것이 되었다. 이 로마의 간섭에 대해서 샤푸르 2세는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로 보복했다.샤푸르 2세의 사후, 왕위 상속에 관한 분쟁이 그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봉건귀족과 조로아스터교 사제(司祭) 계급이 결탁하여 세력을 넓혀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또한 5세기가 되자, 동방에 에프탈이 나타나서 때때로 제국에 침입하였고, 국내에는 공산주의적 사상을 가진 마즈다교가 일어나서 귀족과 평민과의 투쟁이 격화되었다.이러한 때에 외적을 격퇴시키고, 국내의 질서를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 아래 제국의 최성기를 일으킨 것이 호스로 1세였다. 그가 지배한 6세기 중엽의 약 50년간은 군사적·외교적 승리뿐만 아니라, 문화면에 있어서도 사산 왕조의 가장 빛나는 시대였다. 그의 손자 호스로 2세(재위 590

628)는 동로마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도 포위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인 헤라클레이오스의 반격을 당하여, 소아시아·아르메니아를 빼앗기고, 수도 크테시폰도 공격을 받아 그는 암살당했다. 호스로 2세의 패전으로 제국의 쇠망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최후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재위 632

651)는, 642년 네하반드의 싸움에서 신흥 이슬람 세력에 패하여 651년 메르프 부근에서 살해되어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호스로 1세 편집

-世 Khosrou Ⅰ (?

579, 재위 531

579)사산 왕조의 영주(英主)이다. 아누시르반(불사의 영혼을 가진 자)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부왕 크와드 1세 시대에 마즈다교에 의해 야기되고 있던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내의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동로마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티오크를 공략하고 동방에서는 돌궐(突厥, 터키)과 손을 잡고 에프탈을 치고, 남쪽에서는 아라비아의 예멘을 병합했다.

조로아스터교 편집

-敎 Zoroastrianism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를 교조로 하여 고대 이란에서 일어난 종교이다. 마즈다교 또는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부른다. 당대(唐代)의 중국에서는 천교로서 알려졌다. 교조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6세기에 걸친 사람으로 짐작된다. 그는 이란 재래의 종교를 개혁하여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신앙을 확립하고, 악(惡)과의 대결을 통하여 달성되는 인간의 구제를 설파했다. 그의 교설(敎說)에 분명한 2원론적 경향은 후대에 한층 강조되어 광명신(光明神)으로서 선신(善神) 오후르미즈드(아후라 마즈다)와, 암흑의 신인 악신(惡神) 아리만의 대립, 더 나아가서 선악 투쟁의 무대로서 9,000년 또는 12,000년의 세계시간이 설명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의식은 엄격하여 이란의 옛 종교에서 볼 수 있었던 풍습을 부정하고, 인간의 식료품이 될 가축을 제신(諸神)에게 희생(犧牲)으로 바치는 것을 금하고, 신성한 식물로 만들어 인간을 도취케 하는 하오마(술)를 마시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죽은 자는 신성한 대지, 불, 물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산정(山頂)이나 특정한 탑(塔) 위에 그대로 놓아 두었다. 이것이 풍화(風化)되거나, 새나 개에게 먹힌 뒤에 남은 뼈만을 추려 납골당(納骨堂)이나 바위를 뚫어 지은 묘실(墓室)에 안치했다.조로아스터교의 경전(經典)을 『아베스타』라고 하며, 사산왕조 시대에는 또한 많은 주석서(註釋書)와 종교 문헌이 만들어졌다. 조로아스터교는 적어도 아케네메스 왕조 후기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다고 생각되며, 사산 왕조 시대에는 국교로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슬람의 침입과 함께 급속도로 쇠퇴되어, 현재에는 이란의 일부와 인도의 봄베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아베스타 편집

Avesta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을 말한다. 사산 왕조 시대에 부가된 주석서(젠드)와 함께 『젠드 아베스타』라고도 불린다. 이는 조로아스터 시대의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문학의 단편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아베스타의 완본(完本)이 존재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으로 산실되었는데, 조로아스터교가 사산왕조의 국교가 되자 다시 수집되어 3세기 무렵 현재의 체제로 갖추어졌다고 한다. 언어는 인도의 베다어(語)와 닮은 아베스타어이며, 문자는 팔레비 문자를 기초로 한 오른쪽으로 쓰는 표음문자이다. 내용은 기도 및 의식, 제사, 악마 조복(調伏), 불제(?除)에 관한 것, 제신(諸神)에의 찬가, 일상 제사에 관한 기도문 등 5부로 되어 있다. 즉, 『야스나』(祭儀用祈禱書)·『야슈트』(諸神贊歌)·『비데브다드』(악마를 쫓는 책) 등으로 이루어진다. 『야스나』 안에는 교조 조로아스터의 설교인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 현존하는 경전은 3세기경 집록(集錄)된 것으로서 아베스타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아후라 마즈다 편집

Ahura Mazdah

아후라 마즈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으로 다리우스왕은 자신의 즉위가 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권위를 세워 통일을 꾀하고, 고대세계의 정치 이상이었던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실현시켰다. 이 종교는 다리우스왕을 비롯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황제에 의해서 신봉되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國敎)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란민족뿐만 아니라 정복한 이민족의 갖가지 종교를 용인하고 직접 그 제의(祭儀)에 참가하는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케메네스조의 이러한 방책(方策)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본래의 성격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현재 이란민족의 초기 종교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에 관해서도 아직 거의가 밝혀지지 못했으나, 원래 이란 민족은 고대 인도의 아리아 민족과 마찬가지로 태양, 달, 대지(大地), 불, 물, 바람 등 많은 자연력(自然力)을 숭배했다. 그 하나에 마즈다교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주신(主神)으로 하는 다신교(多神敎)였다.

사산 왕조의 미술 편집

-王朝-美術

사산 왕조 시대의 페르시아인은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들을 이란 민족의 전통에 적응시켜서 훌륭한 종합미술을 탄생시켰다. 6세기 중엽의 사산왕조 황금기에 서방의 로마·비잔틴과 동방의 불교미술을 받아들이면서 이란민족의 전통적 감각에 점목시켜 사산왕조 시대의 미술이 창조·완성되었고, 왕조 멸망 후 옴미아드 왕조 궁정에 받아들여져 이슬람 미술의 중핵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건축의 기법으로는 전대의 파르티아 건축을 답습·발전시킨 사각형의 건물 네 모퉁이에 작은 변형의 아케이드를 구축, 그것을 이어 구형(球形) 돔을 가설하는 방법이다. 즉, 파르티아의 이완형식에 돔을 첨가한 형식이 출현하였다. 조각은 암벽을 부조(浮彫)한 기념상을 즐겨 제작했는데, 마애(磨崖)한 부조로 「샤푸르 1세의 전승도(戰勝圖)」,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도(敍任圖)」와 타크이부스탄의 「호스로 2세의 서임도」 등이 대표적인 조각작품이다. 그러나 사산 왕조 미술의 특색이 가장 풍부하게 개화된 것은 금세공(金細工)과 염직(染織)에서이며, 이란민족 천성(天性)의 장식적 재능은 여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모티브로서는 기마수렵도·성수(聖樹)·조수(鳥獸)·당초(唐草) 등 다양하며, 더욱이 깊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산 왕조 미술은 이슬람 미술에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은 널리 동서에 미쳐서, 서역(西域)이나 당(唐)나라를 거쳐서 극동에까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