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원의 중국 통치

원의 중국 통치〔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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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칸의 아우 세조(世祖) 쿠빌라이칸 시대(1260~1294)에 원(元)나라가 성립되었다. 즉위와 함께 연호를 중국식으로 중통(中統)이라 정하고 1264년에 지원(至元)이라 고쳐 도읍을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으로 옮겨서 중도(中都:후의 大都)로 했다. 1271년(至元 8년) 국호를 원(元)이라 정했다. 이것은 『역경(易經)』 제1건(乾)의 「대재건원(大哉乾元)」을 인용한 것으로, 중국에서 국호에 추상적인 명사가 사용된 시초이다. 중국 북부를 지배한 원조는 고려(高麗)를 수차에 걸쳐 침공했고, 1276년 남송(南宋)의 국도 임안(臨安:지금의 杭州)을 함락하고 얼마 후에 중국 본토의 통일을 이룩했다(崖山의 싸움, 1279).원나라의 중국 지배는 몽골 지상주의에 일관되어 인구가 적은 몽골인은 그 밑에 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남인(南人:蠻子라고 모멸했다)이라는 신분제에 의해서 사회층을 나누고 정치 기구의 요직을 몽골인·색목인의 ‘유근각적(有根脚的)’ ‘유유서적(有由緖的)’ 등으로 장악했다. 또한 언어·풍습·습관 등을 달리하는 민족을 포함하는 사회의 특이성을 인식하고 혼인·장의 기타 생활 습관에 관해서는 일단 일정하고(本俗法이라 한다), 또한 이민족간의 분쟁은 그 사건의 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아 재결하는(約會法이라 한다) 등 몽골 유목민의 이익을 존중하면서 복합 사회를 통치했다.

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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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都

북경(北京)의 원나라 시대 수도의 호칭. 쿠빌라이 칸이 1268년 『주례(周禮)』에 있는 왕도의 규모를 본떠서 중도성(中都城)에 북접(北接)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구축한 다음 대도라 개명했다. 이후 원나라 황제의 거성이며 하절을 제외하고 정무를 보살핀 정치 중심지이며 마르코 폴로 등이 칸바르크(한의 성)라 부른 곳이다(여름에는 북쪽의 上都「舊都 開平」에서 정무가 집행되었다). ‘세계의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것, 값비싼 것, 가지각색의 물자가 다량으로 반입되어’ ‘외국 상인들에게 있어서 이 풍부한 도성은 극히 매력 있는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고 『동방견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대도는 중국 지배의 정치적 중심지임과 동시에 경제·문화면에서도 세계 일류의 대도시였다.

4개의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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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分制度

원나라의 지배영역 안에는 인종·풍속·습관을 달리하고 언어·문화·전통이 각기 다른 잡다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복합사회(複合社會)를 소수의 정복민족이 통치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이 4개로 구분된 엄격한 신분제도였다. 첫째는 몽골인으로 국족(國族)이라고도 불렸는데 정복자로서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둘째는 색목인(色目人)이다. 색목이란 갖가지 빛깔, 즉 여러 종류라는 의미로서 투르크,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의 서역인(西域人)을 중심으로 유럽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는 한인(漢人)으로 총칭되는 옛 금조(金朝) 치하의 백성으로 여진(女眞), 발해(渤海), 고려(高麗)를 비롯하여 한인세후(漢人世侯) 아래 있던 중국인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넷째가 옛 남송 치하의 강남(江南) 중국인으로서, 그들은 남인(南人)이라든가 만자(蠻子)로 불려 멸시당했으나 문화적으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이상 4개의 계층은 이 순서로 법률·사회 생활 등에서 등차(等差)가 부여되었으며, 특히 몽골인가 색목인은 우대되었는데, 신분제 그 자체가 몽골제국의 발전과 함께 자란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색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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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目人

원나라의 신분 제도 용어. 몽골인 다음가는 계급이다. 위구르, 탕구트, 사라센인 등 몽골인 이외의 비중국 문화 민족으로 서방계 제국인을 일괄하여 호칭했다. 그 지위는 몽골 제국 창업의 공로와 중국 민족 견제의 필요에서 부여되었다. 관리나 장교의 지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의 활약은 중국사상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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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人

원나라 신분 제도의 제3신분. 색목인의 다음에 위치한다. 구(舊) 금조(金朝) 치하의 민족을 총괄한 호칭으로서 거란인(契丹人)·여진인(女眞人)·고려인(高麗人)·발해인(渤海人) 및 화이허(淮河) 이북의 중국인으로 구성되었다. 한인 가운데는 관계에 진출한 사람(史天澤·耶律鑄)도 있으나 남인과 함께 피지배 계층으로, 임관(任官)·형벌·조세(租稅)·금령(禁令) 기타 공적 관계에서 몽골·색목인과 차별 대우를 받았다.

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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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人

금(金)·원(元) 시대에 남중국인을 가리켜 부른 호칭. 금이 처음으로 요(遼)를 공격하여 그 치하의 백성을 한인(漢人)이라 부르고, 다시 허난(河南)·산둥(山東)을 공략하여 이를 남인이라고 일컬었다. 원은 앞서 정복했던 금조(金朝) 치하의 주민을 한인이라 일컫고, 다시 남송(南宋)의 경내에 살던 한인을 특히 남인이라고 불렀다. 또 만자(蠻子)라고도 일컬었다. 원대에는 몽골인을 제1계급으로 보고, 제2계급을 색목인(色目人)·한인·남인을 제3계급으로 하였다. 특히 같은 한민족이라도 남인은 한인보다 낮게 보아 원대를 통하여 거의 중요한 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 압박에 반항하여 남인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원조를 멸망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제도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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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政制度-區分

쿠빌라이칸은 중국식의 행정기구를 완비시켰는데 내각에 해당되는 최고 행정관청인 중서성(中書省), 군사(軍事)를 다루는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구인 어사대(御史臺)는 모두 송대(宋代)의 형태를 답습한 것으로서 이 점에서도 몽골로부터의 이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중국 왕조에서 볼 수 없었던 특색도 많았다.칭기즈칸은 제국(帝國)의 영역이 확대되자,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의 농경문화권(農耕文化圈)에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지 행정관(行政官)을 두어 민정(民政), 징세(徵稅) 등의 정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것이 다루가치로 불리는 관직으로서, 원의 시대가 되자 각 지방 관청 및 군관구(軍官區)에 설치되고 원칙적으로 몽골인을 임명함으로써 감찰기구의 성격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이 다루가치 위에는 이미 오고타이칸의 시대에 대(大) 다루가치가 총괄적으로 설치되었는데, 대 다루가치의 관할범위를 하나로 묶어 중서성(中書省)의 출장기관인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몽골제국시대의 행성은 정토(征討) 등에 수반되는 중앙의 임시 출장기관인 동시에 지방 행정부도 겸했었는데, 원대(元代)에 와서 특히 강남을 통일한 뒤로는 11행성으로써 중앙 직할지인 후베이(河北), 산둥(山東), 산시(山西), 내몽골(內蒙古) 이외를 구획하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지방구획의 단위인 성(省)은 이 때의 원나라 행성(行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각 행성 아래에는 명칭만 송을 계승한 노(路), 그 밑에 주 (州)·현(縣)을 두어 그것을 축(軸)으로 하여 한민족(漢民族) 통치가 전개되었다.

행중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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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中書省

약칭은 행성(行省). 원조의 독특한 지방 관청. 본래 중앙 관청(中書省)의 파견 기관으로서 소정 관구 내의 재정·민정·군정을 통괄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노부주현(路府州縣)을 통솔하는 지방 행정 구획의 최고 통치 기관이 되었다. 전국이 11개 행성(중서성의 직할지를 포함)으로 구획되었다. 행성은 줄어서 성(省)이 되어 오늘날까지 지방 구획의 단위로 계승되고 있다.

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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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鈔

원나라 정부가 발행한 지폐(紙幣). 중통 원보 교초(中統元寶交鈔)·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 등이 있다. 역대 중국 왕조의 중농(重農)주의에 대해서 원나라는 그 방대하고 복잡한 제국의 경제계에 중상(重商)주의 정책으로 임하여 지폐 전용책을 취했다. 교초(交鈔)는 물자 유통의 원활화, 동전 주조 경비의 절감 등 이점과 함께 파손 지폐의 교환에 따른 수수료나 금은 등과의 교환에 따른 환전료(換錢料)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원나라 말에는 궁정의 사치, 군비의 증대로 말미암아 교초를 남발했기 때문에 그 가치는 하락하여 인플레이션을 초래함으로써 경제계가 혼란해졌다.

대운하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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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運河-改修

남방의 미곡을 북방으로 수송하기 위해 개설된 수로(水路). 7세기에 개착(開鑿)이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운하의 계통은 원나라 때 거의 완성했다. 원나라는 국도를 대도(大都)로 정하고 그 방대한 인구의 식량은 화북 지방에서 자급할 수 없어 강남(江南) 지방에서 다량으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대운하의 개수를 실시했다. 대청하(大淸河)와 황하(黃河)를 연결하는 제주하(濟州河)의 개착, 다시 대청하를 가로질러 어하(御河)로 연락하는 회통하(會通河)를 개통했다. 이에 양저우(揚州), 린칭(臨淸), 대도(大都)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주요 간선이 완성되었다. 대운하에 의한 식량 수송은 원나라 정권에게는 불가결한 것이며, 또한 항저우(杭州)∼북경간 약 2천㎞는 명(明)·청(淸) 2대에 걸쳐서 국도의 중요한 식량 확보 역할을 담당했다.

다루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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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魯花赤 Darughai

원(元)의 행정·군사면에 있어서의 중요한 관직명. 그 어원은 ‘진압하다’라는 뜻의 몽골어 daru에 gha와 chi를 붙여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을 표시한 것이다. 따라서 진수자(鎭守者)·단사관(斷事官)이라 번역된다. 처음 칭기즈칸이 이를 설치했을 때는 관인(官印)을 갖는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그 지방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뒤에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어사대(御史臺) 등을 제외한 모든 관서(官署)에 설치되어, 각 아문(衙門)의 정관(正官)의 최상위(最上位)를 점하고 관할 행정 전반의 최후적 결정권을 가졌다. 제국에서는 점령지 통치관, 도시의 행정 장관으로서, 원조에서는 지방 행정 관청에 반드시 장관 또는 감독관으로서 설치했다. 또한 제왕(諸王)·공신의 채읍(采邑)에 있어서도 재정 등을 관리시켰다. 원칙적으로 몽골인(蒙古人)만이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