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원대의 문화
원대의 문화〔槪說〕
편집몽골제국은 멀리 유럽에 펼쳐진 대제국으로서 잠치(站赤) 제도가 정비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실크 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도 증가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여행가가 속속 동방 세계를 방문했다.서방 문화의 유입 가운데서 중국에 전래한 이슬람 문화는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여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이나 미술에는 주목할 것이 많다. 중국의 전통 문화는 원조(元朝)가 무시했기 때문에 정체했다. 특히 유학의 경시는 학문 발전의 장해가 되었다.그러나 서민 문학은 성행하여 중국 문학사상 한문·당시(唐詩)·송사(宋詞)와 견주는 대표적인 문학의 하나인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戱曲)이 융성했다. 회화에서는 송의 원화체(院畵體)나 문인화(文人畵)의 화풍을 엮은 명장(名匠)이 배출되었다. 또한 원조의 종교 정책은 극히 관대하여 이슬람교·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퍼졌고, 라마교도 티베트에서 전파돼 중국 불교 역사에 이채를 던졌다.
참치
편집站赤
요(遼)에서는 전연(?淵)의 맹약(盟約)을 계기로 송(宋)과의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서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베이징(北京:燕京)·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중심으로 설치된 역전로(驛傳路)는 특히 활발하였는데, 역사(驛舍)에는 부근의 민가에서 공출된 우마(牛馬)가 있어 이를 여객(旅客)의 사용에 충당했다. 그러나 역전제도가 크게 발달된 것은 원(元)대부터였다. 원(元)대는 막북(漠北)시대부터 참치(站赤)가 있어, 이는 벌써 태종(太宗) 때부터 정비되고 있었는데, 원의 중국 통일 후에는 전지역에 걸쳐서 완비되었다. 참치(站赤)란 몽골어로 노(路)를 관장하는 자(者), 즉 역전(驛傳)의 뜻이었고, 참(站)은 역(驛)을 의미했다. 참(站)에는 여객을 위한 마참(馬站)·수참(水站)과 화물을 체송하기 위한 차참(車站)·강참(江站) 등이 있었는데, 참호제도(站戶制度)를 두어, 부근에 있는 중급 이상의 민(民) 100호(戶)를 참호(站戶)로 삼고 참에 필요한 물자와 마필(馬匹)을 부담·공출하게 하였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을 백호(百戶)의 직(職)에 임명하여 책임자로 삼았다. 참(站)을 이용할 경우에는 황제가 발급한 포마성지(鋪馬聖旨)「중서성 등에서 발급하는 것은 포마차자(鋪馬箚子)]라는 일종의 허가서가 필요했는데, 여기에는 참(站)에서 제공할 마필·식품이 기록되어 있어서, 어느 참(站)에서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포(鋪)는 대체로 참치(站赤)와 같은 노(路)에 설치되었고, 그 간격은 참(站)보다 단거리였고 5명의 포정(鋪丁)이 상주(常住)하였다. 우송(郵送)할 때는 포정(鋪丁)이 호리에 방울을 차고, 녹유황자서호(綠油黃字書號)의 패(牌)를 갖고 야간에는 횃불을 들고 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비된 참치(站赤)도 남용된 결과, 참호(站戶)는 부담이 과중하여 파산하고 원조(元朝)의 필사적인 대책에도 불구하고 차차 쇠퇴하여 갔다.
이븐 바투타
편집Ibn Batuta (1304
1378?)
모로코 탄질 태생의 이슬람 교도. 3대륙을 주유한 대여행가. 30년간에 아프리카·아라비아·인도·동남아시아·중국을 여행, 원말(元末)의 중국에서 귀국하여 여행기를 국왕의 명으로 작성했다. 그가 30년 동안 여행한 거리는 12만 km에 달했는데, 『도시들의 진기함과 여행의 경이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에 대한 선물』이란 이름으로 여행기를 펴내 역사자료로서 소중한 작품을 남겼다. 이 여행기는 19세기 초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파스파
편집Hahags-Pa 八思巴 (1239
1280)
라마승. 원의 세조(世祖)의 제사(帝師)이며 몽골 신자(新字)의 창작자. 몽골 왕실은 라마교를 신봉하여 세조는 파스파를 초청하고 국사(國師) 칭호를 내리어 전체 불교의 총통(總統)으로 삼았다. 라마교에 대한 우대는 국비의 난비(亂費)와 라마승의 횡포·음일(淫逸)을 초래하여 “원의 천하는 대부분 중으로 망한다”라고 평할 만큼 원조 지배 체제를 흔들어 놓았다.
수시력
편집授時曆
원대에 실시되었던 역법(曆法). 중국의 역법 중 가장 훌륭한 일력. 세조의 명에 의하여 곽수경(郭守敬) 등이 아라비아역과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천체 관측에 의해서 5년 만에 제작했다.1280년 이 신력에 수시력이라 명명하여 이듬해 천하에 반포했다. 1년의 길이는 오늘날의 그레고리오역과 같으며 명대(明代)에도 채용되었다.
이슬람포(회회포)
편집-砲(回回砲)
일 한에서 초청한 회교도 알라 웃딘과 이스마일에 의해서 제조된 일종의 투석기. 양양(襄陽)의 공격에 사용되어 크게 효과를 올렸다. 창시자와 그 자손들에게 전문 관서의 요직을 세습시켜서 개량과 제작에 종사시켰다.
파스파 문자
편집-文字
몽골 신자(新字)라고도 하며 그 형태를 보아 방형문자(方形文字)·4각문자라고도 한다. 세조의 명령으로 파스파가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모든 몽골 어음(語音)을 나타내는 42음을 문자로 만들어 1269년 공용 국자(國字)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서사(書寫)에 번잡하기 때문에 정부의 장려·사용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통용하지 않게 되었다.
조맹부
편집趙孟? (1254∼1322)
원(元)의 문인. 저장(浙江) 사람. 자(字)는 자앙(子昻), 호(號)는 송설도인(宋雪道人). 송(宋)나라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여 고관(高官)이 되었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능한데, 서(書)는 왕희지(王羲之) ·이북해(李北海)에 사사했으며, 그 귀족적인 품격은 높이 평가된다. 화(畵)는 남종원화(南宗院畵)를 반대하고 문인화(文人畵)의 부흥을 꾀하여 원말4대가(元末四大家)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시문집에는 『송설재집(宋雪齋集)』이 있다.
원말의 4대가
편집元末-四大家
원말에 나타난 황공망(黃公望)·왕몽(王蒙)·예찬(倪瓚)·오진(吳鎭) 등 4명의 화가. 중국 회화사상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화단은 관도(官途)를 봉쇄당한 남인(南人)의 에너지 발산처로서 원화체(院畵體)를 타파하려는 복고주의 일파이다. 조자앙(趙子昻)을 중심으로 하는 오흥파(吳興派)가 있었다.이 화풍을 계승한 4대가는 막다른 원화체의 산수 구도를 해방하고 선화 본위로 모든 준법을 선묘(線描)로 구사하여 한 필치 속에 천담(淺淡)·윤갈(潤渴)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작품 영역을 전개했다. 이 문인화의 발달은 명·청의 화단에 계승되었다.
원잡극
편집元雜劇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예술로서 한(漢)의 문장, 당(唐)의 시(詩)와 함께 원(元)의 곡(曲)을 들고 있는 것이 문학사(文學史)의 상식이다. 가무(歌舞), 음곡(音曲), 연기(演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원곡, 즉 원잡극(元雜劇)이야말로 바로 몽골 왕조의 지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성숙하여 발전한 것이다.원잡극은 희극(戱劇) 등(직접적으로는 金의 院本雜劇)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말하고 동작을 보이는 것인데, 대도(大都)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북곡(北曲)이라 불린다.원의 곡은 4막으로 이루어지며 비파(琵琶)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정말(正末), 정단(正旦)을 비롯하여 충말(沖末), 정(淨), 축(丑) 같은 배역이 정해지며, 주역의 말(末)과 단(旦)만이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어(口語)를 한껏 구사하고 과거(科擧)의 문이 막힌 지식인층에서 작자(作者)를 끌어들여 신선한 문예의 한 장르로서 지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북곡이 엄격한 규칙을 갖는 데 반해 원의 중엽 이후 강남(江南) 지방에서 일어난 남곡(南曲)은 자유롭고 무대의 변화가 많고 화려하다. 남곡의 대표작으로는 『비파기(琵琶記)』가 있다.
『서상기』
편집西廂記
원초 왕실보(王實甫)의 작. 원곡의 대표적 작품. 북곡으로서는 이례적인 장편이다. 내용은 당대(唐代)의 소설 『앵앵전(鶯鶯傳)』에 바탕을 둔 것인데 서생 장군단(張君端)과 최재상(崔宰相)의 딸 앵앵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나 문장이 뛰어났다. 또한 『수호전(水湖傳)』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비파기(琵琶記)』와 함께 원대의 4대 기서(四大奇書)로 꼽힌다.
『비파기』
편집琵琶記
명대(明代)의 희곡 이름. 42막(古本:43막).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고명(高明)의 작품인데, 남곡(南曲) 중의 으뜸으로 일컬어진다. 남송(南宋)의 연극이나 고자사(鼓子詞)에 나오는 채중랑(蔡中郞)과 조오랑(趙五郞)의 고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희곡이다. 남편 채옹(蔡邕)이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한 뒤, 아내 조오랑(趙五郞)은 그의 시부모와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시부모의 사망 후, 비파를 타면서 남편을 찾아 상경한다. 한편 과거에 급제한 채옹(蔡邕)은 재상(宰相) 우승유(牛僧孺)의 사위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이윽고 상경한 오랑이 남편의 소재를 알게 되고, 새아내 우씨의 주선으로 남편과 재회하고, 일부이처(一夫二妻)의 원만한 대단원을 보게 된다는 줄거리인데, 오랑의 고난과 채옹의 호사한 생활을 교묘히 대조시키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청아(淸雅)한 곡사(曲辭) 속에 정열이 넘치는 걸작으로 여겨져 명의 태조(太祖)는 이를 격찬하고 배우들에게 매일 상연(上演)시켜 관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