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몽골인의 남러시아 침입

몽골인의 남러시아 침입〔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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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이 러시아에 들어간 것은 1223년이다. 이 해 칼카 하반(河畔)에서 러시아 제후(諸侯)의 혼성군과 싸워 격파했다. 본격적인 침입은 1236년부터의 바투의 서정(西征)에 의한다. 러시아의 제후국과 도시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거의 파괴되고 도시민은 학살되었다.러시아의 패배 원인은, 첫째로 제후가 서로 다투어서 단결되지 못했다는 것, 둘째는 하층 도시민이 열렬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이 몽골인에게 굴복했다는 것, 셋째는 몽골인이 러시아의 성직자에 대해서만은 면세(免稅)를 하여 이를 매수했다는 것, 넷째는 몽골과 가장 싸울 수 있는 입장에 있고, 시민의 무장과 자치력을 가지고 있던 노브고로트가 동시에 북·서에서 침략해 들어온 스웨덴과 독일의 ‘십자군’을 격파하는 데 전력을 다했으므로 몽골인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몽골인의 파괴와 그 후의 공세(貢稅) 요구는 러시아의 도시적 생활을 쇠약화하고 국토를 피폐케 하여 ‘타탈의 멍에’라고 불리어 그 후 오랜 동안 러시아 후진성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인의 용감한 저항과 반복되는 반란·봉기는 몽골인의 서정(西征)을 러시아에서 저지시켜 유럽 서부로의 침입을 단념하게끔 했다.

킵차크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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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汗國 Kipchak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에 건국된 몽골인의 왕조.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의 제2자 바투는 남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하여 볼가 강변 사라이에 도읍한 후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형(兄) 오르다는 백장한국(白帳汗國), 아우 샤반은 청장한국(靑帳汗國)이라 칭하고, 각기 아랄해(海) 북방과 우랄 방면에 영토를 갖고 킵차크 한국을 종가(宗家)로 받들었다.아랄해·카스피해·흑해의 북쪽을 점령하여 전러시아 제후국은 노브고로트를 포함해서 킵차크 한국의 종속하에 놓였다. 처음 몽골의 관리(官吏)가 징세(徵稅)했는데 노브고로트를 비롯하여 민중의 반란이 그치지 않아 러시아 봉건 지배층이 봉건적으로 민중을 착취한 것을 킵차크 한국에 납부하는 형식을 취했다. 러시아의 제후는 민중의 반란이 자신들의 지배를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민족의 이익을 팔아넘겼던 것이다.킵차크 한국의 전성기는 우즈베크·자니베크 양한(兩汗)시대인데, 원조(元朝)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서무역을 활발하게 하고 이슬람교를 채용하여 그 문화를 흡수하였기 때문에 언어·문화가 투르크화 되었고, 사라이는 상당한 번영을 누려 그 영토도 이르티슈 강에서 크림 지방에 미쳤다. 그러나 국내에 내분이 일어나고, 러시아 제후도 이반(離反)하여 동요를 일으켰는데, 백장한국의 일족 톡타미쉬가 일어나 킵차크 한위에 올라, 한국(汗國)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동방에서 티무르가 일어나 14세기말에 사라이를 약탈하고, 또한 국내에 내흥이 계속 되어 마침내 모스크바 대공(大公) 이반 3세에 의하여 사라이는 함락되고(1502), 킵차크 한국은 멸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