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이탈리아 제후·도시의 대립

이탈리아 제후·도시의 대립〔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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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동방 무역에 의한 북·중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경제적인 번영은 독일, 프랑스, 영국, 아라곤의 정치적 간섭을 초래하고, 이탈리아는 중세 후기 유럽 정국의 초점이 된 느낌이 있었다. 이와 같은 외국 세력의 간섭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 제후의 당파적 대립을 심화시켰다.12,13세기 도시 귀족에 의한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의 전성에 따라 상공 시민층이 동직 조합을 결성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시키고 도시 귀족과의 대립을 심화시키자 도시에서는 여러 당파와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의 봉건귀족이 포데스타(Podesta)로서 군사·사법권을 위임받았다. 이 시기의 귀족적 시민 상호간의 당파싸움은 황제당·봉건 귀족층 대(對) 교황당·신흥 부상층(富商層)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되어 맹렬히 투쟁한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프레데릭) 2세 아래서 이 당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사후 프랑스는 앙주가(家)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하는데 ‘시칠리아의 만종(晩鐘)’ 사건(1282)으로 패퇴, 아라곤 왕가가 이와 대치된다. 이 혼란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도시는 세습적 시뇨리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등 세 도시는 공화정(共和政)을 계속 유지했으나 최후까지 변하지 않았던 곳은 베네치아뿐이었다. 피렌체는 마침내 메디치가가 지배한다.

황제당(기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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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黨 Ghibellinen

중세 말기 로마 교황(敎皇)과 신성(神聖) 로마 제국(帝國)의 대립에서 황제를 지지한 당파(黨派)로 황제파(皇帝派)라고 한다. 제후(諸侯)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皇帝權)을 둘러싸고 자주 대립, 1138년 호엔슈타우펜 가의 콘라트 3세가 바이에른 공 하인리히 10세를 누르고 즉위하였는데, 이 때 호엔슈타우펜 가(家)를 지지한 당파를 기벨린당이라 부르고, 반대파(反對派)를 겔프당(黨)이라 하였다. 이러한 호칭은 독일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과 더불어 이탈리아 여러 도시 사이의 대립에서도 사용되었다. 기벨린당은 독일의 봉건적(封建的) 토지소유자와 이탈리아 여러 도시(都市)의 부유시민층에서 지지자를 얻었다. 교황청(敎皇廳)이 아비뇽으로 옮긴 후에도 양당(兩黨)의 분쟁은 계속되어, 15세기 말에는 독일, 프랑스, 에스파냐의 압력이 가해져 양당의 각 도시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였다.

교황당(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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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皇黨 Guelfen

중세 말기 로마 교황(敎皇)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대립에서 교황을 지지한 당파. 그 기원은 12세기 전반에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의 사망 후, 황제의 선출문제로 벨프와 바이블링겐 양당이 싸움을 시작한 데서 비롯되어, 이것이 이탈리아에도 영향을 주어, 전자를 겔프당(黨), 후자를 기벨린당(黨)이라 칭하게 되었다. 각 도시간에도 또한 도시내에서도 양당의 항쟁이 일어나고, 대체로 상류계급은 기벨린당에, 신흥시민은 겔프당에 가담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는데, 이 당쟁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시민들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각기 참주(?主)를 옹립하여, 14, 15세기에는 이탈리아 각지에 소규모의 전제군주가 나타나, 분열적인 경향이 짙어졌다. 14세기 전반에 나폴리 왕 로베르토는 프랑스 세력을 배경으로 겔프당의 중심인물로서 북이탈리아의 기벨린당 타도에 노력했다. 이에 대하여 기벨린 당파는 일시 독일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왕자이며 보헤미아 왕인 요한의 힘을 빌었는데, 마침내 그의 야망을 눈치채고, 양당이 반(反) 요한의 공동전선을 편 사실은 확실히 이탈리아적인 정신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